아버지가 스베덴보리를 하다 보니 주님이 이 피조세계에 심으신 여러 원리 중 하나로서 ‘서로 상태가 비슷해야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라는 게 있는 것 같구나.

 

가령,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하신 말씀처럼, 생전에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 상태인 사람이라야 사후에도 그에게 맞는, 즉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말씀인데...

 

천사들이 그토록 지혜와 능력이 사람보다 수천수만 배 뛰어난 이유도 이 원리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천사들의 상태가 주님을 닮아 자신의 역량 한도 내에서 주님이 주시는 모든 걸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복음서 여러 병 고침 받은 사람들의 경우도, 그리고 현재도 그런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지 싶은데...

 

우리 역시 만일 주님의 이 병 고치시는 능력을 경험하고 싶으면, 저들처럼 먼저 우리 내면의 상태가 주님의 능력, 곧 주님의 신성(神性)이 흘러들어오실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

 

참고로, 천국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볼 때 일어난다고 하니, 우리도 일상 중에 수시로 마음을 다해 주님을 바라보자. 마치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

 

그때 주님의 모든 능력이 우리의 수용 능력에 맞춰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흘러들어오실 수 있게 하자. 주님의 능력은 제한이 없으시나 다만 피조물인 나의 역량, 내 믿음의 그릇 사이즈 때문에 제약받으심을 염두에 두고 말이다.

 

아버지는 주님이나 주님의 제자들이 감기 걸렸다는 걸 읽어본 적이 없구나. 그리고 이런 일이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날 줄 아버지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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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31(D1)-주일예배(2537, 눅24,1-12, 부활절), '다시 살아나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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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나신 주님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오늘은 부활절, 주님 부활하신 이 아침에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9216번 글 2번 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에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사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셨던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 즉 그 속뜻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하신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향품을 준비해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이 없는 진리, 못 움직이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창세기 1장 창조의 순서 중 식물부터 먼저 창조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에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합니다.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뭘까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걸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 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고 할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이 새로운 계시, 그러니까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여신 이 계시를 지난 2017년 가을에 처음 접했습니다. 당시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을 준비하시면서 수도사 학교(후에 수도 학교로 개명)를 시작하셨는데, 첫 학기 종강 때인 그해 초여름, 강사로 오신 시흥 영성수련원 원장 박희진 수도사의 권유로 저는 그 후 틈틈이 대전 바이블아카데미를 다니게 되면서 거기 주교재인 ‘핵심진리’를 접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영계의 구조’에 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이 나오는 걸 보고 말이지요. 나중에 혹시나 하여 저의 지난날 일지를 보니 과거 제가 부사역자로 있던 교회에서 제가 돌보던 어느 목장 목자를 통해 제 생애 처음으로 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을 들었더군요. 목장원 중 한 분이 이 이름으로 모이는 무슨 이상한 성경공부 모임에 다닌다는 그런 상담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흔한 이단 분파, 신천지 같은 덴 줄 알고 금했죠. 그때가 2011년 2월이었습니다. 아무튼, 지난 2017년 1학기부터 1기생으로 출발한 저는 그때부터 접하는 모든 내용이 지난 50여 년 알아 오던 모든 기존 교리 내지는 신앙의 결을 내려놓고, 완전 새롭게 시작해야만 하는 것들이었는데, 그것은 마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 것과 같았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스베덴보리 연구회 출판, ‘위대한 선물’로 시작, 이어 그의 많은 저작 중 가장 대중적인 ‘천국과 지옥’으로 만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이어진 주님의 이끄심으로 현재는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라틴, 天界秘義) 번역과 함께 이런저런 나름의 활동, 즉 유튜브와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갖겠습니다.

 

※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도 특히 교리적인 부분에서는 절대 타협이 없는, 골수도 정말 특이한 골수인 제가 달라도 너무 다른, 완전 그 근본부터 다른 이 아르카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 역시 주님이 하신 것이며, 처음엔 요나처럼 도망가기 바빴던 저를 그러나 끊임없이 권하시되 마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듯’ 저로 하여금 주님을 향하게 하신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옴짝달싹, 마치 칡넝쿨처럼 옭아맨, 기존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리인 ‘오직 믿음’ 교리를 모두 잘라내 치워주셨던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시고, 살아나신 주님께서 말입니다. 제가 주님의 이끄심으로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마치 태생적으로 유대교인이었던 주님의 제자들이, 그리고 바울이, 그러나 주님을 만나 자기들의 DNA에 새겨진 것과도 같았던 유대교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을 4절과 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여인들은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왜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도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가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실제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주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여자들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사신다고 한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과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보고 만져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것에 대해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뜻합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뭘까요?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는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맞아 다시 한번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그 자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지옥이 감히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시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2023-04-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3-3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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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4(D1)-주일예배(2536, 눅17,28-37),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세간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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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세간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의 속뜻

 

 

28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33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없음) 37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눅17:28-37)

 

 

주님이 사흘째 되는 날 다시 사신 것은 말세에 진리의 신성, 또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고대 교회가 이해했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회복됨을 의미한다. 사흘째는 말세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인자, 즉 진리의 신성이 그때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천국의 비밀 2813:3, 이순철 역) The Lord’s rising again on the third day also involves that truth Divine, or the Word as to the internal sense, as it was understood by the ancient church, will be revived in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ich is also the “third day” (n. 1825, 2788); on which account it is said that the son of man (that is, truth Divine) will then appear (Matt. 24:30, 37, 39, 44; Mark 13:26; Luke 17:22, 24–26, 30; 21:27, 36). (AC.2813:2)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누가복음 17장 같은 본문, 지난주에는 전반부를 했다면 오늘은 후반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자가 나타나는 날’은 내적 의미, 즉 그 속뜻으로는 교회의 마지막 때, 낡고 부패한 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가 열리는 때를 말합니다. 그때를 ‘인자가 나타나는 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때 주님께서 새 교회, 곧 인류 다섯 번째, 마지막, 그리고 영원한 교회인 새 교회의 교리로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주시는데, 그 내적 의미, 속뜻이 바로 인자, 곧 진리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거나 사람의 아들, 즉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실 때는, 주님의 거룩한 인간(Divine Human, 신적 인간) 안에 있는 선을 뜻하고, 인자라고 하실 때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교회의 마지막 때를 가리켜 ‘인자가 나타나는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28과 2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8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은 마치 롯이 소돔에서 나오는 때와 같다고 하십니다. 여기 소돔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깊이 빠져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불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온갖 욕망들을, 유황은 그런 욕망들에서 비롯한 거짓 교리를 뜻합니다.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사라지고, 대신 악한 욕망과 거짓 교리가 만연할 때, 신실한 신앙인들은 진리를 찾아 부패한 교회를 떠납니다. 그들이 바로 롯으로 표상되는 선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불과 유황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롯이 소돔에서 나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불과 유황이 쏟아지는 것은 악한 욕망과 거짓 교리로 말미암아 교회가 스스로 몰락하는 것이고, 롯이 소돔을 떠나는 것은 선한 사람들이 부패한 교회를 떠나가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도 홍수가 있기 직전, 어떤 사람들은 방주에 올라 구원을 얻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주 밖에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다가 홍수를 만났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교회를 심판하시는 방법입니다. 먹고 마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먹는 것은 삶 가운데서 저지르는 악이 의지라는 생명에 쌓이는 것이고, 마시는 것은 삶 가운데서 저지르는 거짓들이 이성이라는 생명에 쌓이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곧 이성과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1절과 32절 말씀입니다.

 

31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앞의 28절과 29절 말씀이 부패한 교회에 대한 심판에 대한 것이라면, 이 말씀은 새 교회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지붕은 영적으로 가장 높은 것인 사랑의 선을 뜻하고, 집과 세간은 그보다 낮은 차원의 것인 신앙의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이 집의 세간을 가지러 내려오는 것은, 선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진리의 상태로 내려가는 것이며, 거듭난 사람이 거듭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거듭나기 전 사람과 거듭난 사람의 차이에 대해 '천국의 비밀' 10184번 글 4번 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며, 그러므로 부분적으로는 자기가 자신을 이끈다. 그러나 거듭나게 되면 주님께서 선을 통해 그를 이끄신다. (AC.10184:4, 이순철 역) for in this state man is led by means of truth to good, thus partly by himself; but in the later or posterior state, namely when he has been regenerated, man is led by good, that is, through good by the Lord.

 

그러니까 거듭나기 전 진리의 인도를 받을 때는 주님께 완전히 의지하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의지하는 상태라는 것이고, 거듭난 후에 선의 인도를 받을 때라야 비로소 주님을 완전히 의지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이 거듭나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영적으로는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만큼 살아나고, 주님보다 자신을 믿는 만큼 영적으로는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붕에 있던 사람이 세간을 가지러 집 안으로 내려오는 것이나,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는 것은 주님만을 믿고 따르던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영적인 죽음을 의미하며,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러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적으로 뒷걸음치지 않고, 항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와 관련해 본문 34절과 3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밤에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워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림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밤은 교회의 마지막 때의 상태, 즉 교회 안에 악한 욕망과 거짓 교리가 가득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리, 또는 침상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는 같은 교리 안에 있더라도 삶의 행위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믿음만의 교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만, 새 교회의 신앙 안에 있더라도 믿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워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른 삶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가는데 하나만 데려감을 얻고, 다른 하나는 버림을 당한다는 것도 비슷한 의미입니다. 여기서 여자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고, 맷돌을 가는 것은 애정을 가지고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깨우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같아 보이더라도 애정의 질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할까요? 자아의 애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주님이 주시는 애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자아에서 비롯한 애정은 진리를 진리 그 자체로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어떤 이익을 위해 사랑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보려고 해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자아의 욕심이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주님이 주신 애정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 그 자체를 사랑합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진리의 깨달음 안에 있게 되고, 그것으로 매일 같이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맷돌을 가는 두 여자 중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왜 우리는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는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에 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더 사랑하는 것이고,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은 주님을 위해 자아를 버리는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자아를 목숨만큼이나 소중히 여깁니다. 굶주림은 견뎌도 모욕을 당하거나 자존심 상하는 것은 못 견디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런 자아를 그대로 두면 절대로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나아가서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아는 모든 진실과 선의를 왜곡하고, 결국은 주님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잃는다는 것일까요?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아를 버리는 자는 대신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그것으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악하고 거짓된 지옥의 영들이 믿지 않는 자는 물론이고, 믿는 사람들까지 유혹해 시험에 들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신앙적으로 뒷걸음질 칠 때가 많습니다. 또 부패한 교회들은 인간의 추론을 앞세워 진리를 왜곡하고, 수많은 거짓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들의 추론의 능력을 주검 위에 날아드는 독수리에 비유했습니다. 주검은 사랑과 믿음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죽어 있는 교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16:25)고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4)

 

생명처럼 아끼는 자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아를 버리기 위한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아와의 싸움에서 때로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가장 아름답고 진실한 교리이신 주님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눈먼 자는 눈을 뜰 것이요, 귀머거리는 귀가 열릴 것이며, 앉은뱅이는 일어나 걸을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8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요5:8, 9)

 

아멘

 

 

원본

2021-10-1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3-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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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7(D1)-주일예배(2535, 눅17,20-27), ‘인자(人子)의 날, 번개의 번쩍임’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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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3-17(D1)-주일예배(2535, 눅17,20-27), ‘인자(人子)의 날, 번개의 번쩍임’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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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人子)의 날, 번개의 번쩍임’의 속뜻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26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눅17:20-27)

 

 

천사들이 이 천국 또는 저 천국에 있는 것은 그들의 내면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면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는 만큼 그들은 보다 내적인 천국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 33, 이순철 역) with the angels it is the interiors that cause them to be in one heaven or another; for as their interiors are more open to the Lord they are in a more interior heaven. (HH.33)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돌아온 이후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약의 예언에 따라 언젠가는 메시아가 오셔서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더구나 주님이 오셨을 당시는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암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열망은 더욱 컸습니다. 그들이 그런 바람을 가지게 된 것은 구약의 예언 때문이었는데, 특히 이사야서 11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4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9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1, 4, 9)

 

유대인들은 이 말씀 속에 속뜻이 있다는 것은 모르고 단지 메시아가 오셔서 다윗 왕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고만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곧 메시아의 출현이었던 것입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메시아이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도 세상 나라들처럼 물질로 만들어지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세워지는 사랑과 지혜의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임할까요? 마가복음 4장 26절 이하에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막4:26-29)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자연적인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세워지는 영적 나라이며,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통해 아주 천천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번에는 제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때가 이른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 안에 더 이상 사랑도 없고 진정한 믿음도 없는 때입니다. 교회들이 영적으로 그렇게 피폐해질 때, 신실한 신앙인들은 진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닙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진정한 진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즉 참된 진리를 찾아다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교인들의 모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에서 ‘인자’는 진리이신 주님을 뜻하고,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는 것은 교회 안에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에 진리가 없는 이유가 뭘까요? 그들이 말씀을 왜곡, 거짓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10)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나무는 진리 또는 믿음을 뜻하고, 열매는 진리에 따른 삶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진리만 있고, 진리에 따른 삶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교회가 그와 다르게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거짓입니다. 거짓된 교리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랑과 진리를 파괴하고, 그렇게 해서 교회를 내적으로 붕괴시킵니다. 교회의 종말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23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교회의 마지막 때는 진리를 가장한 수많은 거짓과 이설이 나타나 진리에 목마른 신앙인들을 현혹합니다. 그 거짓들은 아주 교묘해서 가끔은 진리를 많이 안다는 사람조차도 빠져듭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신실한 교인들을 향해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하십니다. 진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거짓에 빠져드는 것은 큰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를 잘 아는 사람이 거짓에 빠지는 것은 큰 죄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더럽히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24절에서는 세상의 종말, 즉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24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여기서 ‘인자의 날’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뜻하며, 동시에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의 교리로서 참된 진리를 선포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그때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번쩍이는 것은 교회의 거짓들과 맞서 싸우는 신성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번개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성한 진리를 가지고 어떻게 싸우실까요? 한편으로는, 진리를 찾아 헤매던 신실한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밝혀 주십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진리를 알면서도 왜곡했던 사람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들에게서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빼앗아 버리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 것이 오히려 큰 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것에 대해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9:39)

 

주님이 오셔서 참된 진리를 세상에 밝히실 때 거짓 교리 안에 있는 교회들은 가만히 있을까요?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핍박하고 말살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본문 25절에서는,

 

25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교회들이 신성한 진리를 모독하고 배척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유대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장로의 전통이라는 인간의 교리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린 양같이 순결하신 주님을 욕하고 폭행하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주님을 폭행하고 죽이는 것은 신성한 진리를 모독하고 말살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그 본질에 있어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시기 때문이며, 이 진리는 선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진리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요한복음에서는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1:9, 10)

 

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항상 교회들에 의해 말씀이 왜곡되고 조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이 시대도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새 교회도 이유 없이 박해를 받았고, 교리가 부인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시험을 이기시고, 신성한 인간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새 교회의 진리도 시험을 딛고 이겨냄으로써 보다 완전하고 단단한 진리가 됩니다. 완전한 진리가 된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진리와 선, 또는 믿음과 인애, 체어리티의 삶이 더욱 긴밀하게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악과 거짓의 위협과 유혹을 이겨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 주님이 밝혀 주시는 새로운 진리를 통해 눈이 밝아진 사람들은 그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거짓 진리를 끝까지 붙들고 참된 진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은 점점 눈이 어두워져 나중에는 진리가 뭔지 거짓이 뭔지도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맹인, 소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어린 양 같은 순진함입니다. 그래야 주인이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진리의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그냥 가지고만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고난의 진리이며, 형제와 이웃들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는 진리입니다. 시험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의 손을 잡고, 시험을 이기고 또 이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들, 그리고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들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6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눅17:26, 27)

 

아멘

 

원본

2021-09-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3-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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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구원 시스템, 주님의 구원 시스템 (2024/3/16)

 

다음은 교보문고 웹사이트에서 검색한 책, ‘위대한 선물’(스베덴보리 연구회 편역)에 달린 후기들에 대한 통계인데요, 총 48개의 후기 중 부정적인 후기는 전체의 12%인 반면, 나머지 88%가 긍정적이었습니다. 아래는 부정적인 몇 가지 후기입니다.

 

 

ra*****|2009.08.01

종교 1위라니 지금 깜짝 놀랐습니다.

 

베스트셀러라고 무턱되고 보지마세요 검증된거 하나도 없습니다.

 

이책과 관련된 세미나도 있는데요 가지마세요

 

정 은혜 회복 되고 싶으시면 예배생활과 성경을 보세요

 

su*******|2009.06.18

제가 이 서적을 비방하려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저는 장로교에 다니는 일반 성도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서적을 보면 우리에 교리와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것입니다.

 

10장도 채안되서 그냥 버렸습니다 .새일교인가? 몰몬교인가? 아무튼 외국 이단종파에 서적일뿐입니다.

 

말도 안되는 계시를 받고 어쩌고 저쩌고 보지 맙시다.

 

ch******|2009.11.06

대단히 위험한 책입니다... 왜 기독교 도서부문 베스트셀러가 됐는지 이해가 안되는군요 종교다원주의와 뉴에이지에 관한 내용인데 말입니다...

 

dm******|2009.10.29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말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사도행전 4장12절)

 

스베덴보리에 대해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왔기에 그의 책을 한번 읽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가 영계를 다녀오고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는 내용과 스베덴보리 연구회에서 한국적 시각에서 일부를 편집한 책이다.

 

이 책을 펴낸 스베덴보리 연구회는 여러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으로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선하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이 책에서 끊임없이 하고 있다. 특히 불교의 인물들을 예로 들며 종교다원주의적인 엉뚱한 결론을 내고 있다. 정작 스베덴보리는 불교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는데도 연구회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결론을 내림으로써 독자들을 우롱하고 있는 책이다.

 

종교다원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이지만 천국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구절을 적당히 인용해서 자기들 입맛대로 편집한 책은 읽으면 우리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고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사탄의 앞잡이 노릇만을 하는 도구가 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절대로 읽을 가치가 없는 책입니다.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천국과 지옥을 찾아보실 것을 권유합니다.

 

yo***|2009.05.02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기독교 신앙에 도움을 받았다는 식으로 글을 쓴다.하지만 포장을 잘 헤치고 내용을 보면이 책은 기독교 서적이 아니다.오히려 단전호흡 등을 통해 영계로 들어간 사람들의 경험담과 흡사하다. 이 책을 읽고 천국에 대한 인식을 통해 성실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긍정적이다.하지만 이를 넘어서 기독교 신앙에 접목시키는 것은 머리를 안개속에 담가 놓는 것과 같을 것이다.

 

xf****|2014.02.28

추천해서 읽게 되었지만 추천하고 싶지 않다.

완전 대실망이다. 사후세계를 말하는 책들이 의례 허무맹랑하지만 한 시대의 저명한 과학자가 저술한 책답게 사후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긴 하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성격이 말하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고 사후세계를 지극히 현세적 관점으로 그리고있다.

중간 즘 읽다가 멈췄는데 끝까지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다음은 제가 위 글들 중 두 군데에 단 댓글들입니다.

 

 

Ca*******|2024.03.16

저는 연구회 사람은 아니지만 위 글 중 '연구회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결론을 내림으로써'라는 부분에 대해 그건 좀... 하며 생각나는 바 있어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이라는 챕터가 있으니 혹시, 시간되시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역본이 있으나 '김은경 역'을 추천합니다.

 

Ca*******|2024.03.16

위 내용 중, '이 책은 기독교 서적이 아니다'라는 부분에 대해 좀 바로잡았으면 하여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라 하면 천주교를 포함, 개신(改新)교 전체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기독’(基督, 중국어로는 ‘기두’로 발음)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에 대한 한자 표기인 ‘基利斯督’(중국어로는 ‘기리스두’로 발음)를 음역(音譯), 그러니까 우리 식대로 축약해서 읽은 건데요, 가령, 프랑스를 ‘佛蘭西’(중국어 발음은 포란시), 즉 우리말 불란서로 읽는 것과 같은 겁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둘 다 그 뿌리가 ‘기독’,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타 종교 입장에서 봤을 땐 다 기독교인 것이지요. 이 외에도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뿌리로 하는 다양한 종파, 예를 들면, 정교회라든지, 콥트라든지 등등 모두 무슨 세계 종교 분포도 같은 통계를 낼 때는 다 합쳐서 기독교로 분류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그 출발이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기독교인 것이 확실하지요.

 

잠깐 위키백과를 보니 세계 종교에서 기독교가 25억이며, 그 안에서 가톨릭이 12억, 개신교가 6억, 정교회 3억 등으로 나옵니다. 현 전 세계 인구가 대략 80억으로 나오는 걸 보면, 기독교는 30프로 좀 넘네요. 주님의 시야엔 이 나머지 70프로, 55억의 인구 역시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자녀라는 사실과, 만일 개신교 6억만 놓고 볼 때도, 주님의 구원은 나머지 74억한테도 중요하지요. 그래서 주님은 현 개신교의 구원 시스템 외에 나머지 74억 모두를 아우르는 어떤 공정한 구원 시스템을 준비하셔야만 했는데, 그게 그렇게 언짢고 못 마땅하신지요?

 

 

두 번째 댓글 맨 마지막 문장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는데요, 위 부정적 후기를 올린 분들이 거의 개신교인들인 것 같고, 대부분 몹시 불편해하시는 걸 보면서 요나 생각이 났습니다. 특히 요나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들이 말이지요.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욘4:10, 11)

 

거듭, 80억 인류 가운데 고작(?) 6억인 개신교인들이 나머지 74억을 위해서도 구원의 방도를 마련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처사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다음은 위 첫 번째 댓글에서 언급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이라는 챕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김은경 역입니다.

 

318.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몰라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주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의 자비는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을 향한 자비라는 사실이다. 또 비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교회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사람으로 태어나며, 또 그들이 주를 모르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밝은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사람은 단 한 명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는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321. 나는 많은 경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살고, 자기 종교에 따라 순종과 겸손과 서로 간의 이웃사랑으로 살았으며, 그래서 양심을 지니게 된 비기독교인들이 내세에 가면 천사들이 이들을 받아들여 정성을 다해 선과 신앙적 진리에 대해 세심히 가르쳐준다. 이 사람들은 일단 배우고 나면, 겸손하고 총명하고 지혜롭게 행하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신앙적 진리에 위배되는, 뽑아버려야 할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특히 주님을 보통 사람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주님을 함부로 여기는 관념은 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비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그렇게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수긍하고, 주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은 천상천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인류는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당신을 온전히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한다. 주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신적 진리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위 글들의 하이라이트는 각각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살고, 자기 종교에 따라 순종과 겸손과 서로 간의 이웃사랑으로 살았으며, 그래서 양심을 지니게 된 비기독교인들이 내세에 가면 천사들이 이들을 받아들여 정성을 다해 선과 신앙적 진리에 대해 세심히 가르쳐준다. 이 사람들은 일단 배우고 나면, 겸손하고 총명하고 지혜롭게 행하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한다.

 

입니다. 이 글들은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글이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인들은 이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지요.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이런 조건(?)들은 천국 생활을 위한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에, 비록 주님의 말씀을 가진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실제 삶이, 그 내면이 이런 기본과 거리가 멀다면 그는 천국에서 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개신교에서 말하는 소위 ‘영접기도’라든지, ‘구원의 확신’이라든지, 그리고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교리에 정통, 목숨 걸고 그 교리를 지킨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사실 이런 교리들은 다 바울서신에서 뽑아낸 것들이요, 복음서와 계시록, 그리고 창세기를 비롯한 ‘말씀(The Word)에는 나오지 않는 교리입니다. 오히려 복음서에서는 아래와 같이 가르칩니다.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4:35-40)

 

그러므로 확실히 오늘 글 제목처럼 개신교의 구원 시스템과 주님의 구원 시스템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개신교인이지만 그 신앙에서 체어리티(charity, 이웃사랑)를 분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내면이 천국에 합당하게 되어 구원받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담는 그릇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글 제목을 좀 더 정확히 잡는다면, ‘개신교인들 중에서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한 사람들의 구원 시스템과 주님의 구원 시스템은 다르다’가 되겠습니다. 사실 개신교인들 뿐이겠습니까? 기독교인들 전체가 그렇겠지요!

 

다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21)

 

즉 그 내면, 그 속 사람의 상태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인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며, 이런 상태는 오직 ‘주님 사랑, 이웃 사랑(Love to the Lord and Charity toward the Neighbor)의 삶을 산 사람이라야만, 오직 그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하지 않은 사람이라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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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0(D1)-주일예배(2534, 눅17,11-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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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3-10(D1)-주일예배(2534, 눅17,11-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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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17:11-19)

 

주님께서 치유하신 모든 자연적 질병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영적 질병들을 의미한다. 영적 질병은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즉 주님의 신적 전능함을 바라보는 일과 삶의 회개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계시록 해설 815:5, 이순철 역) all the diseases healed by the Lord represented and thus signified the spiritual diseases that correspond to these natural diseases; and spiritual diseases can be healed only by the Lord, and in fact by looking to His Divine omnipotence and by repentance of life. (AE.815.5)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그동안 살면서 은혜를 입은 많은 분들 생각이 났습니다. 가깝게는 부모님과 형제들, 처가, 그리고 고등학교 동기들, 서울침례교회 청년부 형제자매들, 지구촌교회를 비롯, 침신대 신대원 동기들, 늘사랑교회 성도들과 그 외 개척 시절 물심양면 많은 도움을 주신 평책사 목회자 부부들, 그리고 수도원이나 4014 금식 운동 등으로 알게 된 많은 지인들 등, 제가 지난 4, 5년 꾸준히 틈틈이 글 공유를 하는 카카오톡 명단이 있는데, 그중 거의 대부분이 바로 한 번이라도 저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분들을 대상으로 초창기 처음 명단을 선정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무슨 대신 갚을 것 없는 때여서 제가 받은 은혜와 감사의 글 나누는 것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제가 하는 이 스베덴보리의 낯설고 생소한 말씀 풀이와 이질적 교리로 그마저 많이들 소원해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한 분 한 분 저희를 기억하시고 사랑과 은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푸신 기억들은 두고두고 고맙고 감사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다 제 일지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러나 정작 실제로 그 고마움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일에는 저희가 너무 서툴러 본의 아니게 섭섭함과 서운함을 드리는 경우들도 가끔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 한분 한분이 사실은 그분들 모습으로 저희를 도우신 주님이셨을 텐데 말입니다. 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제 경우였지만... 이처럼 우리는 왜 보통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을 모를까요?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주님이 갈릴리를 출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즉 그 속뜻으로는, 이 말씀은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의 과정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이 지옥의 시험을 이기시고, 점차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이 되시는 과정을 의미하지요. 이에 대해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조금 어려우실 듯 합니다만... 주님이 빛을 더하사 이해를 더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갈릴리는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하고, 사마리아는 이방인 가운데서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주님도 처음에는 교회 밖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계시다가, 그러니까 아주 어린 영유아 시절이셨겠지요, 점차 진리의 인도를 받아 내면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가신 것을 뜻하며, 그러므로 전반적으로는 주님의 영화의 과정을 의미하는데요,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주님의 영화, 즉 주님이 입으신 인성과 주님 안의 신성이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거기서 부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뜻하고, 부활은 시험에서 이기심으로 해서 신성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주님의 영화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그렇게 한편으로는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아직 신성과 완전히 결합하지 않으신 주님이 그러면 어떻게 병자들을 고치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영화롭게 되시는 과정을 보면,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서로 결합되어 있을 때도 있었고, 분리된 상태일 때도 있었는데요, 전자의 상태, 즉 인성과 신성이 결합한 상태를 주님의 영화의 상태라 하고, 후자의 상태, 즉 인성과 신성이 분리된 상태를 겸비(humiliation)의 상태라고 합니다. 겸비라는 것은 주님의 인성이 신성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은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 하나가 된 상태일 때, 즉 영화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인데요, 그때 신성의 능력이 인성을 거쳐 병자들에게 전해져 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이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을 12절과 13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영적 의미로 나병환자는 진리를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진리를 더럽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영적 나병환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인정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까지 인정하지는 않는 걸 의미하는데요, 왜냐하면 본문을 보면, 그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예수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주님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병환자의 경우, 시대적으로, 즉 유대 정결법이 우선되는 당시 상황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지만, 속뜻으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는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거나 세상 재물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 주님 앞에 나오면 영적인 복과 자연적인 복을 주님께 구합니다. 나병환자가 멀리서 주님께 병의 치유를 구하는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것입니다.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십니다. 레위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나병환자가 생기면 먼저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를 통해 나병의 유무와 그 상태를 판단 받도록 했습니다. 주님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지요. 그렇다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말씀에서 제사장은 선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보이라 할 때, 몸은 겉 사람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선의 관점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걸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돌아서서 악을 행하는지, 아니면 아직 선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진리의 상태에 있다가 악을 행하는지 스스로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상태가 후자보다는 내적인 나병이고, 그러므로 위중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속까지 병드는 게 겉만 병든 것보다 더 치명적이기 때문이지요. 상한 양파나 감자, 사과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나병환자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간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그러니까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은 나병환자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병의 상태를 진단한 후, 악에서 돌아설 때 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저들처럼 주닙의 말씀대로 하면, 일상 가운데 이런 일이 고스란히 그대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15절과 16절에는 병이 치유된 나병환자 중 한 사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나병환자 가운데 한 사람이 주님을 찾아와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것은 그가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77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힘과 지혜에 있어 하나님은 모든 것이고 그에 비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 또는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인간으로부터는 악 외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그때 그는 하나님 앞에 굴복한다. 사람이 이러한 것을 마음으로 인정할 때, 그는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처럼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때 또한 그에게서 자아가 제거된다. (이순철 역) when man thinks that the Divine in respect to power and wisdom is everything, and man in comparison is nothing, or that from the Divine is all good and from man nothing but evil. When man is in this acknowledgment from the heart he comes as it were out of himself, and thence falls upon his face, and when he is thus out of himself he also is removed from the proprium [what is his own], which in itself is wholly evil; when this is removed, the Divine fills him and raises him up; (AE.77)

 

주님께 감사드리는 나병환자는 자신은 아무 힘도 없고, 오로지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침을 받았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주님께서 발아래 엎드린 그 사람을 향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물으십니다. 여기서 열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주님께 병 고침을 받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열이라는 숫자는 모든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홉은 결합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주님과의 결합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과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아홉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인애(仁愛, charity)의 신앙을 버리고, 자아에서 나오는 신앙으로 자기 자신 및 세상과 결탁, 결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세상의 부귀를 좇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아 겨우 숨통이 트여 살만하게 되면 금방 또 제힘을 의지하여 세상 가치관으로 돌아서는 그런 버릇이 우리 안에 여전히 있는 것을 보는데요,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이는 들어가는데 이루거나 모아놓은 건 전혀 없이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를 맴맴 도는, 어처구니없는 인생을 살게 되지요. 이런 못된 버릇이나 습관은 아주 단호하게 끊어내야 할 줄 믿습니다.

 

아, 그리고 참고로, 이 9:1 비율은 의외로 많은 곳에서 발견되거나 경험할 수 있는데요, 가령, 제가 몇 년째 대략 100여 분께 받은 바 은혜를 나누어 오지만, 그 가운데 꾸준히 답신을 보내오시거나 무슨 반응을 보이시는 분은 대략 열 분 정도밖에 안 됩니다. 처음엔 좀 서운함이 있었으나 ‘아, 원래 이런 거구나...’ 하는 걸 알게 되고 나선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로 돌아와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에는 그를 사마리아인 또는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교회 밖의 이방인이지만 그럼에도 진리를 사랑하여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의 믿음은 자신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먹는 개에 비유하신 주님의 비유에 기꺼이 동의한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겸손한 믿음이며, 부잣집 문 앞에서 음식을 구걸하듯 진리에 갈급했던 거지 나사로와 같은 믿음입니다.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주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습니다. ‘일어나는 것’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으로 그의 신앙이 자아의 이기적 신앙에서 주님이 주시는 이타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는 것’은 신앙의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걷는 것이나 가는 것은 삶의 행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는데요, ‘구원하였다는 것’은 그의 병이 일시적으로 치유된 게 아니라 영원히 치유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가 구원을 받은 이유는 그의 신앙이 인간의 이기적 신앙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인애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신앙이라고 모두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구원과 세상에서의 영달(榮達)을 위한 그런 신앙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전자의 신앙, 즉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신앙이라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후자의 신앙, 즉 이기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오히려 그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악을 끊고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을 고치기를 원하는 병자들에게 언제나 ‘네가 나를 믿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물으실 때의 그 믿음은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신앙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타적인 신앙입니다. 겸손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에 따라 자아의 신앙을 버리고, 주님이 주신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고질병인 나병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었고, 주님의 발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반대로 나머지 아홉 사람의 나병환자들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을 통해 일시적으로 병을 고칠 수는 있었지만, 곧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시는 이타적인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기적인 신앙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영적인 질병을 근본적으로 고칠 수 없고, 주님 앞에 겸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에게로 돌아온 한 사람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리에 따라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자신의 신앙이 어떤 상태인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통찰력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이 잘못된 것이라면 과감히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신앙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17:6)

 

아멘

 

 

 

원본

2021-09-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맞춤 설교

2024-03-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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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원리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김은경 역) 총 63장 목록 중 앞부분입니다.

 

1. 주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시다 (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2. 주님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3. 천국 안의 주님의 신성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In Heaven the Divine of the Lord Is Love to Him and Charity toward the Neighbor)

 

4.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 (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

 

5. 세 천국이 있다 (There Are Three Heavens)

 

6. 천국은 무수한 공동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The Heavens Consist of Innumerable Societies)

 

7. 각 공동체는 더 작은 천국이며, 각 천사는 가장 작은 천국이다 (Each Society Is a Heaven in a Smaller Form, and Each Angel in the Smallest Form)

 

8.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 (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

 

9. 천국의 각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 (Each Society in Heaven Reflects a Single Man)

 

10. 천사는 완전한 사람 형태로 있다 (Therefore Every Angel Is in a Complete Human Form)

 

11.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 (It Is from the Lord’s Divine Human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Reflects Man. Extracts from Arcana Coelestia relating to the Lord and His Divine Human)

 

12.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 (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

 

13. 천국은 지상의 모든 것과 상응한다 (There Is a Correspondence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the Earth)

 

33.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 (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Human Race)

 

등의 내용들, 그리고 악한 영들이 자기 위장 근처로 오니 우울증이 시작되다가 떠나니 회복되는 걸 보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여러 증상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는 그의 진술,

 

또 사람은 그 내면에 두 개의 창이 있는데, 하나는 천국을, 하나는 지옥을 향한 창이 있어 어느 한 쪽이 열리면 다른 쪽은 닫히게 되어 한 쪽의 것만 흘러들어올 수 있다는 것과, 이 창문을 열고 닫는 건 본인의 선택이라는 것, 마치 창문 밖 햇볕이 아무리 따스하고 환해도 정작 본인이 커튼을 쳐버리면 방안으로 못 들어오는 것과 같다는 것,

 

천국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건데, 그런 거처럼 지상의 사람도 천국, 곧 주님을 향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며, 그래야 천국을 향한 창이 열려 천국의 모든 좋은 것과 능력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와 비로소 내가 그걸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사람의 내면이 열리지 않으면, 즉 사람이 천국을 향하지 않으면, 아무리 누가 기도를 해 주거나, 안수해 주거나 예언 기도, 치유 기도, 무슨 기도, 무슨 기도를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그래서 저는 영육 간에 무슨 연약함이나 비정상이 시작될 때, 의도적, 의식적으로 천국하고의 연결을 생각합니다. 만일 몸 특정 부위의 연약함, 아픔이 시작되면, 의식적으로 천국 해당 공동체들하고의 연결을 생각하고, 주님이 해당 공동체들을 통해 제게 그 인플럭스(influx, 入流)를 더욱 흘려보내 주시기를 구합니다. 저는 제 온 몸이 늘 천국과 상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인플럭스란 주님으로부터 나와 피조세계에 더하여지는 어떤 영원한 영적 흐름인데요, 그러면 대부분은 상태가 호전되며,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영육 간에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복음서에 나오는 수많은 치유의 원리가 아닌가 하는데요, 늘 군중에 둘러싸이셨지만 정작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소수였는데, 그 소수만 그 내면이 열려, 아니 정확히는 ‘열어’ 주님의 능력, 곧 치유하시는 인플럭스가 자기 안에 흘러들어오도록, 즉 심령의 커튼을 확 열어젖힌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믿습니다!’, ‘주여!!!’ 소리소리 지르더라도 이 원리를 모르고 애를 쓰는 사람한테는 대부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봅니다. 이 자기 내면을 여는 거, 곧 내면의 창문을 여는 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을 사랑하고 지상의 삶, 겉 지향적이고 세속적 가치관으로부터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라야만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815번 글 5번 항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는 계시록 13장 11절,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를 속뜻으로 주석한 내용 일부입니다.

 

주님께서 치유하신 모든 자연적 질병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영적 질병들을 의미한다. 영적 질병은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즉 주님의 신적 전능함을 바라보는 일과 삶의 회개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계시록 해설 815:5, 이순철 역) all the diseases healed by the Lord represented and thus signified the spiritual diseases that correspond to these natural diseases; and spiritual diseases can be healed only by the Lord, and in fact by looking to His Divine omnipotence and by repentance of life. (AE.815.5)

 

즉, '주님의 신적 전능함을 바라보는 일과 삶의 회개', 이럴 수 있는 사람이 곧 위에서 말씀드린, '자기 내면을 여는 사람, 곧 내면의 창문을 여는 사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천국을 사랑하고 지상의 삶, 겉 지향적이고 세속적 가치관으로부터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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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3(D1)-주일예배(2533, 눅17,7-10),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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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의 속뜻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17:7-10)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천국으로부터 하는 것,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 하는 것은 무슨 일이든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이다. (계시록 해설 794:3, 이순철 역) whatever man does 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he does from heaven, that is, through heaven from the Lord; but anything that a man does 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this he does from self. (AE.794:3)

 

 

다음은 마태복음에 실린 주님의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5:1-4)

 

주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할 때는 생색을 내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말씀이지요. 누구나 자기를 자랑하고픈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지 말라 하십니다. 왜일까요?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높이는 건 자아에 대한 사랑이며, 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대신 자신만을 사랑하면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문이 닫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선(善, Divine Good)과 진리(眞理, Divine Truth)의 유입이 끊어집니다. 그런 상태가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서 살아가는 상태인데, 그때 우리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할 뿐 이웃에게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장 39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눅11:39-40)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바리새인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41절) 하십니다.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는’ 건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겉 사람으로부터 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행동이라도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고,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전자는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속 동기는 주님 보시기에 불순하고 악합니다. 반면, 후자, 즉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고 선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웃을 구제할 때는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익한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님 앞에 스스로 무익한 종이 되는 건 겉 사람의 마음으로는 어렵고, 속 사람의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 앞에서 무익한 종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해 오늘 본문의 말씀들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7절입니다.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종이 밭에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종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건 말씀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배워 익숙해지는 걸 의미합니다. 밭을 가는 건 진리의 지식을 배워 믿음이 자라가는 걸 의미하고, 양을 치는 건 그 믿음에 따라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면 밭은 무엇일까요? 밭은 교회를 뜻합니다. 신앙인은 교회를 통해 매일 선과 진리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묵상, 실천하는데요, 그것이 종이 밭을 일구고, 양을 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종이 밭에서 돌아와 앉아 누군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려고 합니다. 말씀에서 앉는 건 의지의 상태를, 먹는 건 진리와 선을 실천하는 거, 즉 삶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 종의 상태는 어떤 겁니까?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주님과 이웃을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진리에 대해 아는 걸 자랑하고, 진리를 이용해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 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상태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종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물으신 겁니다. 그러면 종은 어떻게 처신하는 게 옳을까요? 그에 대해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8절 말씀입니다.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종은 자기가 먹기 전에 마땅히 주인의 먹을 것을 먼저 준비하고, 주인이 먹는 동안 곁에서 수종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들이 진리를 가지고 선을 행할 때는 자기 자신보다 먼저 주님과 이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기쁨과 행복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주인이 먹은 다음, 종이 먹고 마실 음식은 바로 그런 천국의 것, 곧 천국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 된 사람은 허리에 띠를 두르고 먼저 주인을 수발해야 합니다. 말씀에서 허리는 생식능력과 관련이 있는데요, 그래서 영적으로는 선한 열매를 생산하는 것, 즉 선을 행하는 걸 뜻합니다. 그리고 띠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띠를 두르고 주인을 수종, 수발하는 건 선을 행함에 있어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진리에 따라 행하는 걸 의미합니다.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할 때, 주님과 이웃을 위한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걸 가지고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평화와 자유를 주십니다. 주님은 그걸 위해 종더러 먼저 주인을 수발하고, 그다음에 먹고 마시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에는 이와 같은 반전의 미학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육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영광을 얻으신 것이나, 신앙인들이 자아라는 생명을 버림으로 주님으로부터 참 생명을 얻는 건 겉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반전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인들 가운데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과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기보다 이웃들로부터 섬김받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주인보다 먼저 먹고 마시려는 종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잠깐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믿고, 그것에 따라 살 수 있음에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그걸로 추앙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걸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는 주님 앞에 스스로 무익한 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잘나거나 총명해서 참된 진리 안에 들어온 게 아닙니다. 내가 선해서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아주 작은 선도 스스로 행할 수 없고, 아주 작은 악도 스스로 끊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악하고 거짓된 것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하고 진실한 모든 게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걸 인정할 때,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고백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한 일들에 대해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겸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아시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속 사람이라는 마음과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이 계시고, 겉 사람 안에는 인간의 자아가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만 오고, 사람으로부터는 아니라는 건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선한 행위는 겉 사람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보기에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하고, 성실하고 공정하게 행동하더라도 그 동기가 주님과 이웃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서 하는 일이며, 그러므로 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속 사람이 열리고, 속 사람으로부터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주님과 이웃 앞에 겸손’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겸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주님과 함께’라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많은 것입니다. 시험을 잘 견디고 이김으로써 속 사람은 열립니다. 그리고 그때 무슨 일을 하든 자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매일 같이 띠를 두르고, 정성껏 주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에게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107:15)

 

아멘

 

원본

2021-08-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3-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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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1(D6)-추모예배(2532, 마24,35-40), '故 권성조(權聖祚, 1923생 - 2015졸, 향 91세) 9주기 추모(追慕) 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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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지금부터 작년 11월 5일, 포천 황동묘원에서 이곳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로 새롭게 모신 故 권성조(權聖祚, 1923생 - 2015졸, 향 91세) 아버지, 할아버지 추모(追慕)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설교

다들 오늘 특별히 삼일절(105주년) 아침, 원근 각처에서 서둘러 오시느라고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께서 그 귀한 걸음들 위에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민족의 아주 특별한 날인 삼일절이면서, 한편으론 고 권성조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9주기 되는 기일이기도 합니다.

 

이 ‘기일’(忌日)이라는 표현은 다른 말로는 제삿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는 이런 예배가 아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였을 것입니다.

 

원래 조선 말, 이 땅에 처음 기독교가 전파된 건 가톨릭(Catholic, 公, 보편적, 일반적), 그러니까 천주(天主)교를 통해서입니다.

 

※ 참고로, ‘기독교’라 하면 천주교를 포함, 개신(改新)교 전체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기독’(基督, 중국어로는 기두’로 발음)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에 대한 한자 표기인 基利斯督’(중국어로는 기리스두’로 발음)를 음역(音譯), 그러니까 우리식대로 축약해서 읽은 건데요, 가령, 프랑스를 佛蘭西(중국어 발음은 포란시), 즉 우리말 불란서로 읽는 것과 같은 겁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둘 다 그 뿌리가 ‘기독’,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타 종교 입장에서 봤을 땐 다 기독교인 것이지요. 이 외에도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뿌리로 하는 다양한 종파, 예를 들면, 정교회라든지, 콥트라든지 등등 모두 무슨 세계 종교 분포도 같은 통계를 낼 때는 다 합쳐서 기독교로 분류합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잠깐 위키백과를 보니 세계 종교에서 기독교가 25억이며, 그 안에서 가톨릭이 12억, 개신교가 6억, 정교회 3억 등으로 나오며, 현 전 세계 인구가 대략 80억으로 나오는 걸 보면, 기독교는 30프로 좀 넘네요. 주님의 시야엔 이 나머지 70프로, 55억의 인구 역시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자녀라는 사실과, 만일 개신교만 놓고 볼 때, 주님의 구원은 나머지 74억한테도 중요하여, 그래서 주님은 모두를 아우르는 어떤 공정한 ‘구원 시스템’을 구비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 개신교(1879)가 들어오기 백 년 전 천주교(1784)가 들어왔는데요, 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처음 들어온 천주교는 처음에는 서양 기독교 입장에서 당시 조선에 만연, 큰 폐단을 낳고 있던 조상 제사를 금했는데, 이게 나중에 수많은 구한말 천주교 박해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것이 바로 흥선 대원군 때 있었던 병인박해(1866-1872)입니다. 당시 심화되던 민심 이반을 달래느라 안 그래도 조상 제사를 금하던 천주교를 향해 가진 백성들의 반감을 이용했던 건데요, 전국적으로 이 기간 팔천 명이 참수(斬首)된,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박해였습니다.

 

이런 시행착오, 단순히 시행착오라기엔 그 흘린 피가 너무 진한 아픈 역사를 거쳐 천주교에서는 제사 허용으로 입장을 바꿨고, 그걸 미사 형태로 오늘날 드리고 있으며, 개신교는 교단마다 좀 다르지만 어디는 ‘추모’(追慕) 예배, 어디는 ‘추도’(追悼) 예배, 또는 편의상 기일 예배 등으로 부르면서 지금처럼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성경 어디에서도 죽은 자를 해마다 기억하여 무슨 의식을 진행하는 장면이 한 군데도 안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죽었을 때, 그와 관련된 장례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말입니다. 성경에도 이 ‘제사’ 이야기는 많이 나옵니다만, 우리말 번역 표현이 그저 ‘제사’일 뿐, 원어는 영어로 ‘worship’, 즉 예배하다, 경배하다입니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제사 정신인 것이지요. 성경의 유일한 예배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며, 이를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아래와 같이 아예 돌판에 새겨주셨습니다.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20:3-6)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명목상으로는 추모예배로 모였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것임을 하나님이 보시고, 이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만약 지상의 이 부모-자식, 남편과 아내 등의 혈연관계가 사후(死後) 천국에까지 영원히 이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좀 엉뚱해 보이기도 하는 이런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해본 적이 있는데요, 만일 사후 내가 천국에 가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또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리고 제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등 끝없이 이어지는 위아래 관계 속에서 아마도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 되지 않을까 한 적이 있습니다. 천국 전체가 아마 혼란도 그런 혼란이 없지 싶었는데요, 지상 혈연관계가 천국까지 이어진다면 말입니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썼던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는 그 시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대부분 자기가 개척한 교회들에게 신앙적 권면을 위한 편지, 서신들을 썼을 뿐인데, 그 서신들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아서인지 후대에 이르러 몇 차례 공의회를 거치며, 그 서신들이 성경에 포함된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은 그의 생전에 그를 한번 천국, 그것도 삼층천을 다녀와 보게 하셨는데요(고후12:2), 이런 일을 세월이 흘러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 주님은 또 한 사람, 그의 나이 57세에 찾아오셔서 천국을, 이번에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무려 27년 동안 구석구석 경험하여 글로 남기게 하셨습니다. 천국을 한 번만 다녀왔던 사도 바울의 글도 성경이 되었거든, 하물며 27년간을 다니며 라틴어로 수만 장의 기록을 남긴 사람의 글은 더 말할 게 없겠지요?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그가 남긴 기록을 참고한 건데요, 그의 글을 가급적 제가 소화한 걸로 말씀드립니다. 그의 기록을 이런 예배에서까지 인용할 정도로 제가 신뢰하는 이유는, 그 역시 참으로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서 남은 삶을 오직 주의 쓰임새의 삶을 살면서 지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하며 높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추모예배 관련, 사후의 일, 곧 천국의 실상을 논할 때, 이보다 더 생생한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스웨덴)이며,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톤(1643-1727, 영국)과 40년 정도 겹치는 시대를 산, 역량으로는 거의 동급의 천재였습니다.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통한 이 영계 체험을 시작하기 전 이룩한 과학적 성취는 당시 유럽의 학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가 나중에 과학계를 은퇴, 오직 주님 부르신 일에만 전념하자 당대 학자들이 다 만류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그때 한 대답입니다.

 

저와 같은 과학자는 얼마든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 곧 영계에 관한 진리를 남기는 일은 인류 전체의 생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 받은 이 특별한 소명은 제가 과학자로 공헌하는 것보다 수천수만 배 더 중요합니다...

 

그의 이름은 우리한테는 무척 생소하지만, 그는 서양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서 서양에서는 유명하며, 심지어 그의 모든 영적 저작은 인류 문화유산으로 등재까지 된, 그런 사람입니다.

 

 

자, 그럼 다시, 이 지상 혈연이 천국까지 이어지는가 하는 건데요, 그를 통해 주님이 계시하신 천국 실상에 의하면, 지상의 혈연관계는 지상 생활로 그치고, 천국에서는 모든 게 전혀 새롭게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부모-자식, 부부 등의 관계가 사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뭐랄까... 초기화가 된다고 해야 할까요? 네, 기존 지상의 모든 것, 곧 지상에서 익힌 모든 학문과 지식, 인맥, 경력, 경험 등은 다 휴면 상태로 들어가고, 이후 모든 걸 전혀 새롭게 시작한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진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한 가지, 아주 근본적인 게 궁금해집니다. 사후 어차피 초기화가 될 거라면, 굳이 생전에 효도다 뭐다, 부부 사랑이니 자식 사랑이니 애쓸 필요가 없지 않을까 말이지요. 네, 그런 생각이 당연히 들지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주님이 그런 걸 모르고 우리가 누구의 자식으로, 누구를 우리의 부모로 세상에서 이렇게 연결시켜 주셨겠습니까? 거기엔 주님의 깊으신 섭리, 신적(神的) 섭리와 목적이 있으신데요, 그건 바로 우리가, 그리고 온 인류가 지상 생활을 마치고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먼저 천국에 합당한 주님의 신적 성품을 지상에서 함양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에게 있어 지상은 천국을 위한 일종의 모종밭인데요, 지상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주님이 맺어주신 혈연관계를 통해 주님을 닮도록 연습하고 훈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아버지를 아버지의 모습으로 계신 주님으로, 어머니를 어머니의 모습으로 계신 주님으로, 형, 누나, 동생을, 남편 혹은 아내, 그리고 자녀를 각각 그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 주님으로 인식, 마치 주께 하듯 하여 어떤 인간관계에서든지 주님의 성품을 갖추어 나갈 수 있게 말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으로 가는 나라인데, 그 속 사람이 천국의 주(主)이신 주님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속 사람은 무슨 교리에 밝다고,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무슨 신학적 입장에 목숨을 걸 정도로 단호하다고 저절로 형성되는 게 아니고, 오직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오직 주님의 진리를 실천, 선한 삶을 살아야만 형성되는 겁니다.

 

 

다음은 톨스토이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주인공 마르틴은 구두를 만들고 고치는 제화공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그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5년 전에 자식 둘과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근래 하나 남은 막내아들까지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며, 자신도 빨리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고픈 마음이 들어 그날부터 성경을 읽다가 그리스도의 삶에 감동을 받고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더욱 성경 읽기에 열중했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마르틴, 내가 내일 찾아갈 테니 창밖을 보아라.

 

마르틴은 다음날 하루 종일 일 끝날 때마다 창밖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언제쯤 오시려나...”

 

하며,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신다던 하나님은 오시지 않고, 마침 창밖엔 늙은 청소부가 눈을 맞으며,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틴은 그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시게 한 뒤, 따뜻한 차를 대접하며 몸을 좀 녹이시게 하였습니다.

 

청소부가 나간 후, 두어 시간이 지나 창밖을 보니, 이번엔 아기를 안은 여인이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인을 가게 안으로 맞아들여 먹을 걸 대접하고, 그 사이 얼른 엄마와 아이를 위한 따뜻한 옷을 장만해 주었습니다.

 

또 시간이 흘러 거의 해가 질 무렵, 역시 창밖을 보니 이번엔 사과를 파는 노파가 사과를 훔친 소년을 붙잡고 야단을 치고 있었습니다.

 

마르틴은 밖으로 나가 소년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사과값을 대신 갚아주며, 노파가 소년을 용서하시도록 권유, 원만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마르틴은 날이 어두워지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마르틴은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자신이 낮에 대접했던 늙은 청소부와 아기 안은 여인, 노파와 소년이 나타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이후 마르틴은 꿈에서 깨어나 마침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니,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4:35-40)

 

 

이 단편의 핵심은 바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곧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하신 대목이지요. 즉 주님은 나이 많은 청소부의 모습으로, 아이를 안은 아이 엄마의 모습으로, 그리고 사과를 훔친 소년과 그 소년을 야단치는 노파의 모습으로 마르틴을 만나러 오셨고, 마르틴은 그 사실을 까맣게도 모르고 단지 그들을 주께 하듯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을 베풀었을 뿐인데,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이웃 사랑이 곧 주님 사랑이 되는 이유이며, 주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를 통해 내 안, 내 속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을 닮게 하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게 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마5:44)인데요, 이 말씀의 속뜻은, 비록 나를 힘들게 하고, 원한이 있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라 할지라도 그 역시 주님이 지으신 사람이므로 그의 안에도 역시 주님의 형상, 곧 주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으니, 비록 그는 미울지라도 그의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에 대해서는 예를 갖추고, 함부로 하지 말라는,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말씀인데요, 그러니까, 원수일지라도 그저 하나님 앞에 네 할 도리만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선을 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19-21)

 

사후 속 사람의 겉은 휴면 상태에 들어가고, 속 사람의 속이 드러나 그걸로 천국, 또는 지옥을 가게 된다는, 이것 때문에 지상 혈연관계가 천국까지 이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내용은 아래 소개하는 책자인,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그러나 오히려 이런 사실, 이런 영적 실상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끼치는 유익은 참 큰데요, 가장 큰 유익은, 우리가 이렇게 모든 관계가 지상 생활로 끝난다는 걸 알면, 더 이상, 무슨 자기 이름 석 자를 남기기 위해, 또는 가문의 이름을 빛나게 하기 위해, 아니면 재물을 쌓기 위해,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자녀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거나 큰 부담을 지우는 그런 무리수를 두는 인생을 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든 아니든 거진 다 공통인데요, 이런 건 어떤 말로 포장하든 사실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얼른 돌이키지 않으면, 그 속 사람이 지옥에게 먹히게 되어 살아서도 지옥에 연결되어 살게 됩니다. 그 끝이 비참하며, 사후 운명이 매우 안타깝게 되지요. 아주아주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을 열심히 사는 게 무조건 나쁘다거나 죄가 된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모든 노력과 방향, 초점이 주님이 원하시는 어떤 쓰임새에 맞춰진 게 아닌,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맞춰지는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 우리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아주 깔끔하게 살 수 있습니다. 부모-자식, 남편과 아내, 그리고 교회 교인들과 회사 동료들, 이웃들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마르틴처럼 주님을 대접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해도 정말 순수하게, 자식을 사랑해도 정말 순수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지상의 모든 관계는 지상 생활로 마감한다는 이 계시는 정말 정말 귀한 계시이며, 그래서 아마도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여신 많은 계시 중 하나로 이것을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작하면서 던진 일종의 화두지요. 성경엔 장례 관련 사례는 많으나 죽은 자를 기억하여 해마다 무슨 의전을 행한 기록은 전혀 없다는...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한 답이라고 할까요? 지금까지 살핀 바에 따른 당연한 결론인데요, 그것은 지상 모든 혈연은 지상 생활로 그치고, 천국에서는 전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이라는, 즉 지상 모든 혈연은 속 사람의 겉과 함께 영원히 휴면 상태로 가라앉는 대신, 속 사람의 속으로 천국의 새 삶을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론,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유는, 영계인 천국에서는 자연계에서 습득한, 자연적이기만 한 모든 것은 재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며, 소개하고픈 책 두 권이 있는데요, 이는 주님의 신성, 곧 선(, Divine Good)과 진리(眞理, Divine Truth)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진리와 관련된 책으로, 중간에 잠깐 언급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입니다. 바로 이 책입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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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하나는 ‘성 프란치스코’라는 이 책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은성출판사, 영성, 영성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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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는 800년 전 사람으로서, 인류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음의 정신 그대로를 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의 신성 중 진리를 접한다면, 프란치스코를 통해 주님의 신성 중 선을 접할 수 있습니다. ‘아, 주님의 진리를 일상 가운데 저렇게 실천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선이구나!’ 깨달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권의 책이야말로 지상에서 주님의 신성을 연습하고 훈련하는데 결정적인 가이드요, 등불이 될 줄 믿습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 성경이 그 첫 자리임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도우심의 그 은혜와 사랑이 작년 이장 후, 오늘 이곳에서 처음 드리는 이 추모 형태의 예배를 통해 진정한 추모의 의미에 대해 듣고, 앞으로 더욱 서로를 주께 하듯 그렇게 사랑해야지 마음에 굳게 결심하고 돌아가는 모든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과 삶 가운데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2024-03-01(D6)

삼일절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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