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6(D1)-주일예배(2548, 눅19,45-48),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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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6-16(D1)-주일예배(2548, 눅19,45-48),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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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눅19:45-48)

 

 

기도에 의존하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는 기도에는 그것이 유익한 것일지 어떨지 하는 것은 주님만이 아신다는 생각과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기도를 들어주실지 말지는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겟세마네의 가장 가혹한 시험 중에 말씀하신 대로 나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시길 기도해야 한다. (AC.8179, 이순철 역) ...prayer is not to be relied upon. For in prayer from the Divine it is always thought and believed that the Lord alone knows whether it is profitable or not; and therefore the suppliant submits the hearing to the Lord, and immediately after prays that the will of the Lord, and not his own, may be d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in His own most grievous temptation at Gethsemane (Matt. 26:39, 42, 44).

 

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4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26:39, 42, 44)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일이 있기 전에 주님과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도중, 감람산 근처에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에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묶여 있을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보니 정말 나귀 새끼가 묶여 있어 그것을 풀어 끌고 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깐 다음, 주님을 거기 태워 예루살렘 성을 향해 옵니다. 여기까지가 앞 절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과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영적으로는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에 의해 새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감람산 맞은편 마을은 믿음, 그러니까 신앙(faith)만 중시하고,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가벼이 여기는, 이른바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감람산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나타내고, 맞은편은 반대를 뜻하구요, 마을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거기 매여있는 나귀 새끼는 외적 교회의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매여있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에 매여 내적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셋째,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왔다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새 교회를 통해 비로소 말씀의 내적인 의미가 밝혀지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은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의 사람들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넷째, 제자들이 옷을 벗어 나귀 위에 깔고 주님을 태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새 교회의 사람들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와 그것을 통해 깨우친 내적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또한 이웃을 섬기는 걸 의미합니다. 제자들의 옷은 새 교회 사람들이 이해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 절에서 살핀 본문은 교회의 마지막 때, 참된 진리가 ‘오직 믿음’의 교리를 가진 외적인 교회로부터 신앙과 체어리티의 신앙을 가진 내적인 교회, 즉 새 교회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 설교 원본에 있는 ‘믿음’과 ‘인애’(仁愛)를 저는 가급적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로 수정하여 쓰고 있습니다. ‘믿음’은 개신교적 표현, ‘오직 믿음’이나 ‘믿습니다! 아멘!’ 같을 때만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인애’의 경우, 왠지 ‘체어리티’의 더욱 풍성한 뉘앙스를 많이 놓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새 교회 교인이라고 처음부터 내적인 신앙을 가지는 건 아닙니다. 그분들 역시 새 교회로 오기 전에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진리의 전부라고 믿었고, 또 주류교회들의 신앙인 ‘오직 믿음’의 교리만이 진정한 신앙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밝혀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새 교회로 오기 전 그들의 신앙이 감람산 맞은편 마을에 묶여 있어 아직 아무도 태운 적이 없는 나귀 새끼와도 같은 신앙이라면, 새 교회로 온 후의 신앙은 그 매인 상태에서 풀려난 나귀 새끼가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힘차게 가는 것과도 같은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도착, 성전으로 들어가시니 그곳에는 장사하는 자들이 가득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그냥 장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마태복음 21장 12절에는 돈을 바꿔주는 자들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이 성전에 가득히 들어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21:12)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는 영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거룩한 것인 선과 진리를 가지고 사적인 욕심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이를테면 돈을 바꿔주는 자는 진리를 가지고 사욕을 채우는 자이고, 비둘기를 파는 자는 선을 가지고 욕심을 채우는 자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목회자가 교인들의 구원에는 뜻이 없고, 높은 지위나 재물을 모으는 데만 관심이 있다면 그는 장사꾼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중에 그 목적이 사적 이득이나 명예를 얻는 데 있다면 그런 사람도 영적으로는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새 교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본인 신앙의 순수함에 따라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 다음은 어떻게 이렇게 성전 안에 장사하는 자들이 득실댈 수 있었을까 하는 그 배경 이야기입니다.

 

...성전 벽 남쪽의 더블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왕의 행각 지하를 거쳐서 성전 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왼쪽에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가 직영하던 부스가 있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다.

 

이 상점에서 성전 제사에 필요한 물건, 즉 소, 양, 비둘기, 밀가루, 올리브 기름, 포도주, 나무 등을 팔았고, 성전세로 바칠 반 세겔을 바꾸는 환전상도 이곳에 있었다. 이 상점은 대제사장인 안나스 가문이 직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 구입한 제물만 성전 제사에 적합한 규격품으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가격은 시중가의 몇 배나 비쌌고, 이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성전 뜰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상행위를 할 수 없었지만, 안나스의 직영 상점은 원래의 성전 뜰인 마카베오 성전산의 바깥인 헤롯 성전산에 위치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따지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종교적 기득권층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며,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성전 이야기)

 

※ 오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들’이라는 복수 표현, 그리고 위 이야기에서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라는, 이런 좀 이해하기 힘든 표현들은,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본래 한 명이어야 하니까요, 당시 극도로 부패,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암시하는 표현들입니다.

 

※ 헤롯 성전은 원래의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확장한 성전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를 성전 시대로 나누는데요, 먼저 솔로몬 성전 건축부터 멸망까지를 1차 성전 시대(BC.960-586)라 하고, 스룹바벨 성전 건축부터 AD 70년, 헤롯 성전 함락까지를 2차 성전 시대(BC.515-AD.70)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고 어떻게 하셨을까요? 45절과 46절에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모욕하고 폭행할 때도 묵묵히 참으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장사하는 자들이 성전을 점령한 것을 보시고 참지 못하고 무섭게 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단지 혈기를 누르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리에 의해 교회가 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섭니다. 진리는 자체로 악과 거짓을 흩어버리는 힘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꼭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325번 글은 ‘예배의 첫째는 체어리티의 삶이고, 둘째는 기도다’라고 합니다. 기도는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일이며, 또 죄를 이길 힘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기도가 없으면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없고, 체어리티의 삶이 없으면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예배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성전에는 기도와 체어리티의 예배는 없고, 오로지 장사하는 자들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신 것입니다.

 

본문 47절에는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신 후의 성전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신앙인들의 내면에 있는 교회 안에는 진리를 방해하거나 파괴하려는 여러 종류의 도둑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지옥으로부터 자아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악한 욕망과 거짓된 망상들입니다. 그것들은 주님에 의해 일시적으로 쫓겨났다가도 경계가 느슨해지면 다시 들어와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본문에 주님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악과 거짓들입니다. 제사장은 본래 사랑과 선을 표상하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악한 욕망을 뜻하고, 서기관은 진리를 방해하는 거짓된 망상을 뜻합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통해 쉬지 않고 주님과 대화하면서 그런 악과 거짓들의 훼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그것을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는 표현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가르치실 때, 48절에는,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백성의 영어식 표현은 people인데, people의 속뜻은 진리, 또는 진리에서 비롯한 애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백성이 주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새 교회 사람들의 진리의 애정이 주님을 향하여 열려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께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복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복종할 때 악하고 거짓된 영들은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죽이려 꾀하나 방도를 찾지 못한다는 게 그런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많이 발전해서 그것만 있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계속해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신앙인들은 그들과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스마트폰 속에 있는 세상의 일에 집착하다 보면 말씀을 가까이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이러한 것들이 진리에 대한 애정을 빼앗아 갑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의 크기에 따라 진리를 파괴하는 악한 영들이 들고 일어나기도 하고 죽은 듯 잠잠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애정이 크고 순수한 만큼 우리의 겉 사람은 합리성과 가까워지고 합리성을 통해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 ‘합리성’이라는 것은 영어로는 rational이라 하며, 우리의 겉 사람과 속 사람 간 가교 역할, 다리 역할을 하는 기능입니다. 쉬운 말로는 ‘이성’(理性, reason)으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어떤 사안, 어떤 진리에 대한 설명이 낯설지만, 그러나 매우 합리적일 때, 우리는 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 수용하게 되는 걸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음은 이에 대한 보다 깊은 설명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는 주님이 거처하시는 곳, 즉 속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고, 가장 바깥쪽에는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는 합리적 사람, 또는 합리성이라는 마음이 있어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서로 연결하는 일을 합니다. 합리성과 겉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주님은 합리성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그 속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을 몰아내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겉 사람은 합리성과 만나 서로 결합할 수 있을까요? ‘천국의 비밀’ 3030:2번 글에 의하면,

 

합리성의 근본은 선이지만 그것이 겉으로 나올 때는 진리이다. 선은 내적인 경로를 통해 합리성 안으로 유입되지만, 진리는 외적 경로를 통해 유입된다. 선과 진리는 그렇게 합리성 안에서 하나로 결합한다. (AC.3030:2, 이순철 역) The genuine rational is from good, but comes forth [existit] from truth. Good flows in by an internal way; but truth by an external way. Good thus conjoins itself with truth in the rational,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합리성이라는 의식은 선과 진리로 형성되는데, 합리성을 이루는 선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것과 결합할 진리는 겉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합리성을 형성하는 진리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요?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외적인 경로를 통해 흘러들어옵니다. 즉 겉 사람 안에는 기억이라고 하는 지식의 창고가 있는데 거기서부터 흘러들어온다는 겁니다. 사람의 기억 속에는 세상의 지식이나 말씀으로부터 얻은 지식 등 수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외적 경로를 통해 합리성 안으로 유입되는 진리란 이를테면 그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단지 세상적인 흥미나 명예를 위해 그런 지식을 습득한다면, 그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아닙니다. 지식을 추구하되 주님과 이웃을 섬길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애정입니다. 그 애정이 기억 속에 있는 지식을 소환해 합리성의 선과 결합하도록 만듭니다. 그때 비로소 영적인 합리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영적 합리성은 세상의 합리성과는 전혀 다릅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합리성을 통해 진리를 파괴하려는 악과 거짓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합리성의 선은 오염된 진리와는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진리가 주님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아와 세상을 향하고 있는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기도하도록 항상 힘써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21:16)

 

아멘

 

 

 

 

2022-05-1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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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D1)-주일예배(2547, 눅19,37-44), '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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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주님

 

 

37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19:37-44)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표상(representatives)과 표의(significatives)로서 존재하셨다. 그것은 주님 스스로 천국과 교회에 속한 최초의 것이면서 동시에 마지막의 것이 되기 위해서였으며, 그렇게 해서 최초의 것으로부터 마지막의 것들을 다스리고, 또한 그것들을 (쓸모에 따라) 배치시키기 위함이었다. (계시록해설 405:24, 이순철 역) The Lord when in the world was in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in order that He might be in the ultimates of heaven and the church, and at the same time in their firsts, and thus might rule and dispose ultimates from firsts, and thus all intermediates from firsts through ultimates;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are in ultimates. (AE.405d:24)

 

 

지난 주일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맞은편 마을에 있는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신 일과 제자들이 나귀의 등에 옷을 깔아 그 위에 주님을 모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에 이어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본문 37절과 3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7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제자들이 주님이 하신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찬송했다고 합니다. 여기, 주님이 하신 일이란, 첫째,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새 교회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열어주신 일입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주님의 제자들이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푸는 것’으로 묘사했지요. ‘나귀 새끼’의 속뜻은 내적 의미가 숨겨져 있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신 두 번째 일은, 새 교회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가지고 이웃을 섬기고, 나아가서는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의 속뜻입니다.

 

정리하면,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하고, ‘나귀 새끼’는 가장 낮은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그리고 ‘제자들의 옷’은 그보다 높은 영적 진리인 이웃 사랑의 진리를, 끝으로 ‘그 위에 앉으신 주님’은 가장 높은 진리인 천적 진리, 즉 주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진리를 뜻합니다.

 

마지막 때 새 교회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이 같은 일들은 주님께서 당신의 신적 선에서 비롯한 신적 진리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주의 이름’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인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을 뜻하는데, 매일 같이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이웃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로 눈이 열려 말씀의 문자 안에 감춰진 내적 진리를 볼 수 있게 되고, 그 진리의 힘으로 나보다 이웃을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제자들이 예수를 향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찬양하자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회의 지식인들이었지만 속뜻으로는 외적인 교회 안에 있는 위선자를 뜻합니다. 그들을 위선자라 하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신앙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수없이 보면서도 끝내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었기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며 예수를 찬송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신성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이 주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선생’은 진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므로 주님을 선생으로 부른 것은 주님이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걸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주님을 인정하면 그만큼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이런 설명도 있는데요, 당시 유대가 처한 정치적 상황으로 본 설명입니다.

 

당시 유대 전체는 로마 식민지요, 또 그 가운데 예루살렘은 대왕 헤롯의 세 아들 중 헤롯 안티파스가 분봉왕으로 있던 곳으로, 로마는 그 당시 지중해 연안 거의 모든 문명 세계를 정복하였으나 정복지의 거의 모든 문화, 종교를 존중, 반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얼마든지 자치를 허락했다. 그러나 로마가 파송, 혹은 세운 속주의 장들이 그 재임 중 한 번이라도 자기가 맡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그대로 직위해제 되는 원칙이 있어, 특히 반란이 잦은 유대 땅은 분봉왕들이나 로마 총독이나 늘 신경이 곤두서는 곳이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이때가 마침 유월절 시즌으로 당시 전 세계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유대인이 몰려드는 기간이어서 더더욱 정치적으로 민감한 분위기였다. 특히 안티파스의 경우, 즉위하던 해 바로 반란이 터져 큰 문제가 되었으나, 로마에서는 즉위하던 원년에 일어난 일임을 감안, 한번은 봐주기로 하였던 터라 이 기간 그는 더더욱 전전긍긍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의 온 무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며 무리 지어 다니고 있으니... 그래서 특히 이런 정치적 상황에 훤했던 바리새인들이 아연실색하며 주님께 그런 조언을 한 것이라는...

 

그럴듯하지요? 우리가 말씀을 영적으로 풀 때, 사람들은 이렇게도 풀고, 오히려 이런 풀이가 더 그럴듯하게 와닿으며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사실에, 혹시 사람들의 호응과 반응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는 설교자, 목회자라면 설교를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하나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신, 구약성경을 저런 식으로 풀어 시리즈로 낸 저 저자는 저런 관점의 책들로 많이 유명해졌고,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 초청 인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의 이 지상 배경 및 당시 정치, 경제 등 국제 정세, 그리고 등장인물과 장소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그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내적 존재이며, 천국은 내적 상태의 나라라 말씀도 그 안에 담긴 속뜻, 즉 아르카나(arcana, 秘義, 주님이 말씀에 불어넣으신 천국의 비밀)만 보인다고 합니다. 하여... 주님을 가르치며, 천국에 대한 올바른 소개와 인도의 책임이 있는 설교자, 목회자로서 저는 무슨 고민할 것도 없이 후자의 길을 걸을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몸 안에 머물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기에, 무조건 영적이고 내적이기만 하는 건 무리가 있지요. 말씀을 속뜻으로 풀되 필요하면, 저런 설명도 곁들이는 균형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그런 생각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다만 제 역량이 많이 부족하여 그런 설교 준비에 많이 미흡한 게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자, 그럼 계속해서, 주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돌들’은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새 교회의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새 교회가 참된 진리에 대해 증거하지 못한다면 진리 스스로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진리는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에 대해, 천국과 교회에 대해, 그리고 거듭남과 시험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 당시 정황상 바리새인들의 저런 조언과 충고도 나름 일리 있어 보임에도 불구, 주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 듯 말씀하십니다. 저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저런 상황에서 나는 과연 저럴 수 있을까 고민됩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붙들어 주심을 간구합니다.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말씀에서 ‘(, city)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지만 여기 ‘예루살렘 성’은 타락한 유대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성을 보고 우셨을까요? 교회 안에 신앙과 사랑이 사라지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황폐해지는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시는 것’은 무너져 가는 교회에 대한 연민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성을 향해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이 오시기 직전 천국에는 고요함이나 평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지옥의 세력이 팽창해 천국과 지옥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평화가 없다면 그것에 대응하는 지상의 교회에도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평화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교회가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더 이상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억류된 것처럼 영적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인류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시고, 그 능력으로 천국과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주님은 지옥이 팽창해 천국의 일부를 오염시킬 때도 그냥 두셨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그러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도 지옥을 당신의 발아래 굴복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요? 영계에서 지옥의 세력이 커진 것은 지상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대신해 인간의 몸을 입고 지옥과 싸워 이겨 그 능력으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상의 교회를 다스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 많은 개신교인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 그런 게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면서 마뜩잖아합니다. 이런 태도가 시작되면 바로 마음의 창, 내면이 닫혀 천국의 입류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게 중단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뭔가 반감이 시작될 때, 객관적으로 그 내용이 주님께 해가 되는 내용이 아니라면 그 평가는 주님께 맡기시고 쿨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반응하듯 말이지요. 그것이 마음을 지키는 것이며, 그런 태도가 안전한 태도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높이 앉아 인간에게만 지옥을 이기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 즉 인성을 입으시고, 직접 지옥과 싸워 이기심으로써 거듭나는 모든 이들의 본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의 시험은 인간의 시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혹독한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 시험의 난이도는 사랑의 대상 수에 비례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할 때와 두 사람을 사랑할 때, 가족 전체, 직장 전체, 교회 전체 등등, 그러니 인류 전체를 품고 사랑하고자 하시는 주님을 대적하고자 지옥 전체가 달려드니 그 난이도, 그 지독, 그 혹독함이 어땠겠습니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것만큼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그런 시험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이기신 그 능력으로 영계와 지상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때 하늘과 땅의 주님의 나라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란 지옥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선과 진리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상의 교회가 완벽하게 다스려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바리새인처럼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으로 표상되는 유대교회와 모든 타락한 교회들을 향해,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시며, 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 교회를 통해 참된 진리를 끊임없이 보내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 적어 희귀할 정도입니다. 몰라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진리인 줄 알면서도 세속의 입장과 지위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그들의 교회는 진리가 주는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그릇된 교회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토둔(土屯, 고대 전쟁 시 함락하고자 하는 성 높이만큼 흙을 쌓아 공격하는 공성법 중 하나)을 쌓는다고 했는데, 원문에는 성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벽’은 보통 교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타락한 교회들의 그릇된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너와 네 자식’은 유대교회 같은 외적인 교회의 모든 것들, 즉 아름다운 예배당과 경건한 의식 등을 뜻합니다. 그것들이 ‘땅에 메어쳐진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뜻합니다. 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들 교회에 진정한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심판의 날이 올 줄 몰랐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유대교회는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 이교도들, 그러니까 로마에 의해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고, 예배의 표상이었던 희생 제사는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또한 교회에 속한 사람들, 곧 유대인들은 자신의 땅에서 살지 못하고 온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내려진 심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을 받아들인 제자들과 끝까지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열어주신 내적 진리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심판 날에 영원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주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본래 그랬습니다. 애굽에 살 때부터 여호와의 기적을 많이 봤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후에는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과 애굽의 기병들이 홍해의 깊은 바닷속에 잠기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광야로 나와서는 매일 같이 주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었고, 그들 앞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광경을 지켜봤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그들은 모세가 잠시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우상을 만들어 놓고, 노래하고 춤을 췄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매일 경험하면서도 마음속에 다른 신을 품는 사람들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은 항상 우리를 유혹하여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리 안에 어떤 우상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매일 버려야 하겠습니다. 뜻대로 잘 안될 때는 주님께 고하고, 주님과 함께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버릴 때 시험이 점점 줄어들고, 시험이 오더라도 수월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로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10:22)

 

아멘

 

 

2022-05-0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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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2(D1)-주일예배(2546, 눅19,28-36), '주가 쓰시겠다'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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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의 속뜻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눅19:28-36)

 

 

제자들이 자기 옷을 나귀의 등 위에 까는 것은 진리 전체가 가장 높은 재판관이며,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천국의 비밀 9212:6, 이순철 역) By the disciples putting their garments on the ass and her colt was represented that truths in the whole complex were submitted to the Lord as the highest judge and king; (AC.9212:6, 출22:26)

 

 

※ 아래 에피소드는 설교 원본의 에피소드인데 오늘 설교 도입부로 적절해 보여 그대로 사용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부목사님과 함께 교회 담벼락과 보도블럭 사이의 땅에다 회양목을 100주 정도 사다 심었습니다. 봄이 되니 돌들 사이로 잡초가 올라오고 행인들이 담배꽁초도 버리고 해서 미관상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막상 시작하니 꼬박 이틀이 걸렸습니다. 나무를 심기 전에 땅을 팠는데 그 아래 건축 폐기물들이 잔뜩 묻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건축 공사를 할 때 시공하는 사람들이 시멘트나 벽돌 조각 같은 것들을 거기 묻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걷어낸 건축 폐기물이며 오염된 흙이 폐기물 처리용 마대 자루로 20부대가 넘게 나왔습니다.

 

서두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진리는 관념이 아니라 행동이며 일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주님은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진리가 있는, 진리를 동반한 선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선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주님의 진리는 목적에 맞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주님과 함께 일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일은 향기가 나고 주변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간 혼자서 하는 일은 오히려 주변을 오염시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어떻게 내적 교회의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28절과 2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므로, 속뜻으로는 교회, 또는 하나님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에 비해 감람산은 하나님의 사랑, 또는 선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감람나무, 즉 올리브나무와 산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감람산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주님이 신적 사랑에서 비롯한 신적 진리로 당신의 교회 안으로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은 사랑이 있는 진리, 사랑을 동반한 진리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며, 그러므로 죽은 진리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있는 진리는 사람의 의지를 움직여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라야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감람산 근처에 오셨을 때, 제자 둘을 부르셨습니다. 내적으로, 즉 속뜻으로 볼 때,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둘이라고 한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진리를 배우는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부르신 제자 둘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진리를 배우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0절 말씀입니다.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맞은편’은 한글 성경 표현이고, 영어로는 ‘against’라고 되어 있는데, ‘against’라는 말은 주님을 대적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을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있으므로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가 있습니다. 외적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과 경건한 예배 의식 같은, 예배의 외적인 것, 외향적인, 외모를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그에 반해 내적인 교회는 예배의 내적인 것, 즉 진리에 따른 삶을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맞은편 마을은 예배의 내적인 것은 없고, 외적인 것만 있는 교회를 뜻하고, 그러므로 주님을 대적하는 교회입니다.

 

※ 현실적으로 이렇게 완전 100% 외적이기만 한 교회는 없습니다. 논지를 또렷이 하기 위해 이런 대비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그리로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귀 새끼의 속뜻은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자연적 진리(natural truth)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포함한 자연적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적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죠. 말씀의 문자적 의미나 세상 지식을 새 교회에서는 ‘기억 지식(knowledge of memory)이라고 부르는데, 본문에서는 그런 지식을 ‘나귀 새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도 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지식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외적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기만 할 뿐 삶에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적 합리성이 닫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국 빛이 차단되고, 그리하여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맞은편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이런 외적 교회들에 대한 심판을 뜻합니다. 외적 교회들에 대한 심판이란, 외적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말씀 지식이 주님에 의해 내적 교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용하지 않는 진리를 주님께서 걷어 들여 잘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적 교회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후에 심판받을 때, 주님께서 악한 사람들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빼앗아 선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 오늘 본문 앞 본문인데요, 거기서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눅19:26)

 

라고 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말씀의 지식을 빼앗긴 외적 교회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말씀을 읽어도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외적 교회는 점점 진리에 대해 무지해지고, 내적인 교회는 점점 더 지혜로워집니다.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주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이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매인 것을 푸는데 그 주인들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합니다.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나귀 새끼가 매여 있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 속에 감춰진 내적 의미가 외적 교회 사람들에게 열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에 의해 매여 있는 나귀가 풀리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에 의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나귀의 주인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 교회들이 새 교회를 통해 밝혀지는 내적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가지고만 있고 쓰지 않는 사람은 결국 진리를 모두 빼앗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위해 진리를 쓰는 사람이라야 진리가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새끼의 등에 덮고 그 위에 주님을 태웠습니다. ‘천국의 비밀’ 9212:6항을 보면,

 

제자들이 자기 옷을 나귀의 등 위에 까는 것은 진리 전체가 가장 높은 재판관이며,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겉옷(garment)은 내적 교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뜻하고, 나귀 새끼는 진리가 감춰져 있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나귀 위에 옷을 깔고, 그 위에 주님을 태우는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깨우친 진리를 가지고 가장 높은 진리이신 주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낮은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보다 더 높은 영적 의미(spiritual meaning)를 섬겨야 하고, 영적 의미는 가장 높은 진리인 천적 의미(celestial meaning)를 섬겨야 합니다. 말씀의 영적 의미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관한 진리라면, 천적 의미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자연계의 지식과 모든 걸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한 애정들은 단절되면 안 되고, 서로 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덮고 그 위에 주님을 태우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는 것은 옷이나 장식처럼 남에게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일까요? 첫째는, 악을 멀리하되 그것이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멀리 해야 합니다. 다른 이유로 악을 멀리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건강을 위해, 또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등등의 이유로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둘째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는 자기 마음대로 해선 안 되고, 언제나 진리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 일인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주님께 물어가면서 일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속에 정성이 담기고, 주님의 질서가 담깁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됩니다. 직장의 일이든 교회의 일이든, 아니면 개인의 일이든 모든 일 가운데 나귀 위에 자기의 겉옷을 깔고 그 위에 주님을 모시는 것과 같은 겸손과 정성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삶 가장 낮은 곳까지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며, 각자의 삶을 향기 나는 삶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 위에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아멘

 

2022-04-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0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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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6(D1)-주일예배(2545, 눅19,12-24), '열 므나 비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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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5-26(D1)-주일예배(2545, 눅19,12-24), '열 므나 비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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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므나 비유의 속뜻

 

 

12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5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24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눅19:12-24)

 

 

진리를 기억 속에만 가지고 있고, 삶 안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사후에 진리를 모두 빼앗겨 버리지만, 그러나 기억과 삶 안에 모두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혜가 영원히 늘어난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은화 한 므나를 가지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열 므나 남긴 사람에게 준다고 말한다. (계시록 해설)

 

 

오늘 본문은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과제를 내어 주신 다음, 심판 때에 과제를 충실히 이행한 착한 종은 천국으로 보내시고, 그렇지 않은 악한 종은 지옥에 던지신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에게 심판받을 때, 악한 종이라고 꾸지람을 듣는다면 그 사람 마음은 어떨까요? 버나드 쇼(아일랜드, 192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자신의 묘비명에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길 줄 난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고 적었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후회를 할까요, 아니면 이를 갈며 주님께 대들까요?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우연히 태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목적은 세상 사는 동안 진리를 열심히 배우고 익혀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인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어느 귀인이 먼 나라로 가면서 종들에게 과제를 부여하고 떠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12절과 13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12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여기서 귀인은 주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귀인의 종 열 명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열(10)이란 수는 모든 걸 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종들에게 은화 열 므나를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 참고로, 므나는 주님 당시 사용되던 은으로 된 화폐인데, 100 드라크마에 해당하며, 당시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과 함께 품꾼들 하루 품삯에 해당하였다고 하니, 한 므나는 백 일치 품삯으로 작은 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월 300 일용직의 경우, 대략 천 정도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이런 므나의 그 속뜻은 말씀을 통해 배우는 선과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인이 종 열 명에게 열 므나를 나눠줬다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것을 통해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걸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은화를 가지고 장사를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선과 진리의 지식을 삶에 적용하여 더 많은 선과 진리를 소유하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배우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우는 대로 열심히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선과 진리가 늘어나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즉 진리를 배우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장사꾼이 재물을 모으듯 선과 진리가 점점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할 때마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선과 진리들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선과 진리의 지식을 불려 나가는 것이 바로 종들이 주인의 돈으로 장사를 해 이문을 남기는 것입니다.

 

주인이 한참 후에 돌아와 종들이 어떻게 장사를 하였는지 보고자 하여 종들을 불렀습니다. 첫 번째 종이 주인에게 나아와 보고합니다.

 

15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첫 번째 종은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배를 남겼고, 두 번째 종도 다섯 배를 남겼습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벌어질까요? 그 이유는 사람마다 영적인 상태와 능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2967번 글 2번 항은 ‘모든 사람은 각자의 상태와 능력에 따라 거듭난다(but each according to his capacity and his state;)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같은 시기에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각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능력이 다르며, 그에 따라 믿음과 사랑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열 배 이문을 남긴 종은 다섯 배 남긴 종에 비해 영적 능력이 우월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왜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의지가 약할까, 왜 다른 사람보다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할까 하면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람마다 영적인 상태와 능력이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겁니다. 유전적인 요인도 있겠고,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과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중요한 건,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문을 남겨 주님께 돌려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배를 남긴 사람에게는 열 고을을, 그리고 다섯 배를 남긴 사람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주십니다.

 

※ 이건 차별이 아닌 오히려 똑같이 공평하게 대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열 배의 역량을 가진 사람한테는 열 배, 다섯 배의 역량을 가진 사람한테는 다섯 배, 즉 각자의 입장에서는 100%,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부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배의 역량을 가진 사람에게 열 배로 부으시면 그 사람한테는 오히려 큰 고통이 됩니다. 내면이 안 열려 오히려 천국 질서가 뒤집힌 사람에게 그가 원한다고 천국 문턱에라도 들어가 보게 하는 순간, 그는 마치 불 위에 놓인 마른오징어처럼 온몸이 뒤틀리며, 죽을 것만 같은 상태가 되어 그만 후닥닥 원래 있던 지옥으로 도망치듯 뛰어내리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런 건 천국 내에서도, 즉 일층천에서 이층천, 이층천에서 삼층천을 희망하는 천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천사마다 자기 내면이 열린 곳에 있는 것이 천국이요,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상으로 받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말씀에서 고을(city)은 ‘남은 자(remains, 한글 번역 시 음역 그대로 ‘리메인스’로 표기)라고 하는, 선과 진리의 의식이 있는, 속 사람 속 깊은 내면을 뜻합니다. 따라서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상으로 받는 건 진리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리메인스가 많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리메인스란, 사람이 아주 어릴 때, 주님께서 속 사람 깊은 곳에 심어놓으신 선과 진리의 의식,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애정을 뜻합니다. 리메인스는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어린아이의 영 속으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다가 아이에게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면 유입이 멈춥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신념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 때, 다시 흘러들어옵니다. 반대로 선과 진리를 멀리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한테는 리메인스가 파괴되어 점점 고갈이 됩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개인의 영적 상태에 따라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리메인스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으며,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리메인스가 중요한 까닭은 이 리메인스가 없으면 악과 거짓에 저항할 힘을 잃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많아진다는 건 개인의 영적 상태가 점점 강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는 주님께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바치라고 명하시는데, 십일조를 드리는 것 역시 리메인스가 많아지는 걸 뜻합니다. 10이란 수가 리메인스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십일조를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일조의 의미는 선과 진리라는 영적 재물이 늘어날 때, 리메인스 또한 그만큼 늘어나는 걸 뜻합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드리는 건 내 걸 가지고 주님께 드리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오늘 본문의 종들처럼 여러 배로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며, 그때 리메인스라고 하는 주님의 생명이 각자의 내면에 쌓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 한번 악을 멀리하고, 한번 선을 행할 때마다 내면에 리메인스가 쌓이고, 그리하여 점차 거듭나기 좋은 상태로 바뀐다는 걸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종이 와서 주님께 고했습니다.

 

20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의 명에 따라 장사를 하지 않고, 돈을 수건으로 싸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주인이 엄한 사람이라 심지 않아도 거두시는 분으로 생각했다고 변명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주인이 준 은화를 수건에 싸두는 건 선과 진리의 지식을 기억 속에만 넣어두고 행하지는 않는 걸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오직 믿음’, 즉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워 행위, 즉 삶의 실천을 소홀히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 여기서부터는 설교 원본을 수정, 제가 조금 보충하였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2:8, 9)

 

라는 에베소서 구절을 댑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본 것입니다. 모든 행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같아도 그 출발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은 자기를 사랑해서이기 때문이지요. 위 에베소서 구절은 후자의 경우입니다. 즉 바울은 에베소서 및 그 근방 교회들에게 자기를 사랑해서 선행을 하고, 그걸 근거로 자기 구원의 공로로 여기는, 그런 걸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선행은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1-3)

 

참고로, 거듭나는 세 종류의 사람 중에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영적 인간은 영생을 추구하다가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고, 후자인 천적 인간은 주님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덤으로 얻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사람인데, 이 사람은 이런 일, 곧 주님과 영생에 도무지 관심이 없고, 그냥 선하고 착하기만 했던 사람입니다.

 

(여기까지)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교리에 충성, 정작 ‘주님을 사랑하여 선을 행하는 삶’은 소홀히 하는 대부분의 기독교, 개신교인들의 모습은 마치 주인이 엄격한 사람이라 장사를 하다 돈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돈을 수건에 싸두었다고 하는 오늘 본문, 세 번째 종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종의 말을 듣고 주인이 말합니다.

 

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말씀에는 진리를 배워 머리에만 쌓아두는 것을 재물을 수건에 싸서 보관하거나 땅에 묻어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장사하는 것, 또는 은행에 맡겨 이식(利殖, 이자에 이자가 붙어 재물이 늘어가는 것)을 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종에게 악한 종이라고 꾸짖으시며,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과 관련, 이사야에서는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고 하십니다. 여기서 포도주와 젖은 각각 진리와 선을 뜻하고, 값없이 사서 먹으라는 것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진리와 선을 행하되 주님으로부터 행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주님을 의지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즉 선을 행할 때는 즐겁게, 마치 자원하여, 그러니까 자기가 원해서, 하고 싶어서 하듯 하면서도, 하고 나서는 그 모든 공을 오직 주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곁에 서 있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4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세상 살 때 진리를 많이 안다 자랑하면서도 정작 행하지는 않았던 사람들은 나중에 주님 앞에 가면 가지고 있던 진리를 모두 빼앗기고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열심히 진리를 따라 살았던 사람들은 기왕에 가지고 있던 진리와 선 말고도 더 많은 선과 진리를 얻어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없는 사람은 가진 것마저 모두 빼앗기고, 상대적으로 진리가 많은 사람은 넘치도록 주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한 종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가진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진리를 안다고 모두 구원받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주인이 멀리 떠나면서 종들에게 은화 한 므나씩을 주면서 장사를 하라고 명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새 교회인이라면 누구나 진리에 따라 살기를 원하고 매일 같이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뜻대로 잘되지 않는 것은 사람마다 영적 상태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이나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이나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꼭 열 므나를 남기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힘닿는 대로 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고, 대신 진리에 부합하는 일은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신 한 므나를 여러 배로 만들어 주님께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도 구원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주님이 워낙 엄격하셔서 인위적인 어떤 선도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고, 내심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어떤 생각일까요? 본문 14절에는 그것에 대해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주님을, 또는 진리를 왕으로 섬기려는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준 은화를 수건에 싸둔 종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와 자기 생각이 충돌할 때, 언제나 진리는 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진리와 선이 늘어나지를 않았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는지, 아니면 주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것은 아닌지 항상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되 주님으로부터 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아멘

 

2022-04-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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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9(D1)-주일예배(2544, 눅19,1-10), '삭개오 본문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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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 본문의 속뜻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10)

 

 

일반적으로 성령이 의미하는 바 하나님의 능력과 작용(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으로 개혁과 거듭남(reformation and regeneration)이 있고, 그에 따라 (영적) 쇄신과 살아남, 성화와 의롭게 됨(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이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악이 씻어지고 죄가 사해지며(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최종적으로는 구원(salvation)이 있다. (참된 기독교 142, 이순철 역) 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 which are meant by the Holy Spirit, are, in general, reformation and regeneration; and in accordance with these, 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 and in accordance with these latter, 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and finally salvation. (TCR.142)

 

 

오늘은 저 유명한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와 그 의미, 곧 그 속뜻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넜을 때 처음 마주친 곳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가까운 곳이지만, 그렇다고 아직 가나안 땅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리고의 속뜻은 보통은 교회 밖의 이방인을 뜻하거나, 또는 사람들을 교회로 이끄는 선과 진리에 속한 지식을 뜻하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참된 진리를 방해하는 거짓 교리를 뜻합니다. 이를테면,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교리인 장로의 전통이나 오늘날 믿음만의 교리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는 건 어쩔 수 없이 태생적으로 잘못된 교리 안에 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참된 진리를 배우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삭개오라는 세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리가 무슨 뜻인지는 성문서(聖문서, ※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들을 가리키는데요, 스베덴보리에게 이 모든 기술(記述)을 허락하시고, 또 친히 계시, 딕테이션하게 하신 분이 주님이셔서 사람들의 일반적 저작들과는 구분하려고 이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세리가 어떤 사람인지, 그 속뜻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요, 다음은 위 비유의 본문입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이 본문의 세리를 보면, 그는 그 역시 비록 잘못된 교리 안에 있지만, 겸손하고 늘 자신을 돌아보는 진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는 삭개오가 부자라고 했습니다. 부자의 속뜻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을 뜻하는데요, 이러한 의미들을 통해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겠는데요, 정리하자면, 그는 태생적으로, 즉 태어나길 당시의 잘못된 교리 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고, 또 말씀을 항상 가까이하여 참된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었겠구나 하는 걸 말입니다. 그런 삭개오이니 그런 그가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아 인파 속에서는 도무지 주님을 볼 수 없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길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참고로, 이 돌무화과나무는 이전 번역인 개역한글에서는 ‘뽕나무’로 번역된 나무입니다. 삭개오의 그런 모습을 3절과 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가 키가 작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키가 작다는 것의 속뜻은 자연적 합리성만 있고, 영적 합리성은 아직 열리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영적 합리성은 주님이 주시는 합리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합리성을 소유한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특별한 지각, 즉 퍼셉션(perception, ※ 주님으로 말미암는 통찰력인데요, 태고교회 때 존재했던, 그리고 지금도 천국에서는 이 퍼셉션으로 천사들과 주님 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따로 학습하지 않고도 바로 직관하는 능력입니다.)으로 말씀을 읽을 때,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합리성은 인간의 지식에 의존하는 합리성입니다. 그래서 자연적 합리성 안에 있는 사람은 인간의 지식을 바탕으로 말씀의 의미를 추론하여 이해합니다. 가령, 히브리어, 헬라어 같은 원어를 가지고 말씀을 풀고자 하는, 그리고 각종 주석이나 세상의 온갖 사례들을 가지고 하고자 하는 이런 일련의 태도들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결국 자기를 높이게 되는데요, 그런 사람이 영적으로는 키가 작은 사람이며, 삭개오입니다.

 

본문에는 사람이 많아서 삭개오가 주님을 볼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원문에는 삭개오가 인파에 떠밀렸다(press)고 되어 있습니다. 인파에 떠밀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거짓 교리로 인해 합리성이 훼손되는 걸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군중이나 무리(multitude)는 진리를 뜻하고, 떠미는 건 폭행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합리성이 훼손된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만나더라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만의 교리에 젖어있는 사람에게 인애(charity)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면 오히려 그걸 거짓이라고 하는데요, 이를테면, 그런 것이 키가 작은 삭개오가 사람들 속에서 주님을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때 삭개오가 주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이 나무는 바로 이런 열매를 맺는 나무인데요

엄밀히 말하면, 무화과나무하고는 다른 나무이지만, 그 열매가 얼핏 무화과나무의 열매 같아 이렇게 부르는 나무입니다. 이 무수히 열리는 열매들은 그대로 두면 너무나 떫어 나중에 익어도 도저히 먹을 수 없지만, 익기 전 바늘 같은 걸로 구멍을 내고, 거기에 올리브기름을 발라주면 나중엔 달달해져서 먹을 만하게 되는 그런 신기한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아모스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암7:14)라 했던 말씀에 나오는 나무인데요, 당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우기에는 그럭저럭 들에서 양을 칠 수 있지만, 건기에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성읍 근방 논으로 들어와 거기 남아 있는, 추수하고 남은 곡식 밑동들을 양들에게 먹여야 하는데, 이때 땅 주인들과 협상, 그 대신 목자들은 이 돌무화과나무에 이 무수히 달린 열매들을 일일이 올리브기름으로 침놓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걸 ‘뽕나무를 재배한다’한 것인데요, 그래서 아모스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 것입니다. 이렇듯 엄밀히 말하면, 다른 나무이지만, 말씀에서는, 그리고 위 두 번째 이미지처럼 실제 무화과나무 열매하고도 비슷하게 생겨 당시 사람들은 이 돌무화과나무도 일종의 무화과나무로 쳐주었으므로 우리도 무화과나무로 보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말씀에는 무화과나무(fig tree)나 포도나무, 올리브나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속뜻으로는 신앙인들의 선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뜻하고,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그리고 올리브 나무는 천적 선을 뜻합니다. 자연적 선은 무엇이고, 영적 선은 무엇일까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행하는 모든 선이 자연적 선입니다. 예를 들면, 질서를 지키고, 이웃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하는 것 같은, 이런 선한 행실이 모두 자연적 선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자연적 선이라도 내적으로 영적인 것이 있고, 영적이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4988번 글 2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선의 기원은 두 가지이다. 즉 유전적인 것이 있고, 믿음과 인애의 교리에서 비롯한 것이 있다. 유전적인 선은 자연적이지만 영적이지는 않은 선이고, 교리에 따른 선은 자연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선이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니까 교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천성적으로 선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의 선이 바로 자연적이지만 영적이지는 않은 선이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행하는 선은 자연적이며 영적인 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주님을 보려고 했다는 것은 그의 선이 자연적이지만 아직 영적이지는 않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안에 참된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었겠구나 생각해 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양심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런 것이 바로 참된 진리에 대한 갈증이며, 그리고 그것이 진리에 대한 삭개오의 갈증인 것입니다.

 

※ 저 역시 이러한 갈증으로 지난 2022년 12월, 그동안 속했던 지방회를 나왔던 것이며, 또 수도원 역시 거리를 두게 된 것인데요, 지방회에서는 모이면 그저 어디 다니자는 이야기, 무슨 집회에 가자는 이야기, 어느 교회 누가 어떻다더라 등 무슨 친목회, 동호회 수준 같은, 도무지 주님과 천국 이야기는 없는, 그리고 그런 지식도, 관심도 없어 보이는 그런 이야기에 제가 많이 지쳤으며, 물론 참 선하신 분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말입니다. 수도원 역시 그 심성들이 다르지 않았고, 역시 주님보다는, 그리고 천국보다는 무슨 성인들 이야기, 그리고 남들 모르는 무슨 신기한 이야기들에만, 그래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혹하게 하는, 그리고 자꾸 처음 원칙과 규칙들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깨면서 변칙, 반칙을 허용하는, 이름은 ‘봉쇄’이면서, 그러나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세상을 향해 두리번거리며, 혼자 주님을 독대하려 하기보다는 계속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덜 심심하고, 늘 주목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뭔가 계속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에너지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런 모습 때문에 처음 몇 년을 마음을 다해 다녔으나 결국은 지쳤기 때문입니다. 네, 하여튼 그런 갈증이 저 역시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어쩌면 이렇게 스베덴보리를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자, 다시 이제 마침내 주님이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 하십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착한 마음과 진리에 대한 갈증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러자 삭개오가 급히 내려옵니다. 교리의 오류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만날 때, 처음에는 선뜻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스스로 높이 앉아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번 들어 보자 라고 생각합니다. 삭개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나무 높은 곳에서 주님을 내려다 봤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분이 참된 진리라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진리 앞에 황급히 자신을 낮추고, 진리이신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것이 삭개오가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만나게 된 삭개오가 감격해 말합니다.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세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모르긴 해도 부당하게 세금을 매겨 착복한 일이 그동안 많았을 것입니다. 당시 많은 세리들이 그렇게 해서 부자로 살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세리를 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로마 통치하에서 동족에게 세금을 거두니 말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교리에 빠져 있을 때는 그것이 죄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열심히 믿고, 헌금 많이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를 만나자 그것이 모두 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 하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다 주님 앞에 선언합니다. 영적인 의미로 볼 때,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는 건 이웃에게 잘못된 교리를 전해 결과적으로 그들로부터 진리와 선을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물질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전하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절반은 모든 것을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절반 안에는 전체의 특성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절반은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또 네 갑절로 갚겠다고 했는데 이 말은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본을 보이며 전하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넷이란 수는 둘의 배수로 둘과 같은 뜻을 가지며, 그래서 둘이나 넷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진리를 믿고, 또한 행하는 걸 의미합니다. 따라서 네 갑절로 갚겠다는 건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게 아니라 행하면서 전하는 걸 뜻합니다. 마태복음 5장 19절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고, 요한복음 13장 15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이런 말씀들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아주 반듯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하시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십니다. 잃어버린 자가 누굴까요? 아담으로 상징되는 천적인 교회의 지극히 순수하고 선한 사람들입니다. 그 교회가 무너졌을 때, 주님께서는 노아와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로 상징되는 영적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마저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되자 주님은 직접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시험을 이기시고, 거룩한 인간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신 목적은 삭개오와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영적 교회의 재건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잃어버린 천적 교회를 되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르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삭개오의 모습을 보시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삭개오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말씀에서 삭개오는 거짓 교리에 빠진 모든 신앙인을 나타냅니다. 거짓 교리는 신앙인들이 참된 진리를 만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본문에는 그것을 삭개오가 무리 속에서 떠밀려 다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참된 진리를 만나더라도 이전의 동료들로부터 이단의 진리에 빠졌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셨을 때, 무리들이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비난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죄인의 진리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모든 방해를 딛고, 영적 여리고에서 탈출, 주님의 손을 잡고 구원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그동안 삭개오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진리를 혼자만 알면 안 되고,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진리를 전할 때는 말로만 전하는 게 아니라 주님처럼 행동으로 본을 보이며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이 성령에 대해서는 앞의 ‘참된 기독교’ 142번 글을 다시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이 의미하는 바 하나님의 능력과 작용(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으로 개혁과 거듭남(reformation and regeneration)이 있고, 그에 따라 (영적) 쇄신과 살아남, 성화와 의롭게 됨(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이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악이 씻어지고 죄가 사해지며(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최종적으로는 구원(salvation)이 있다. (참된 기독교 142, 이순철 역)

 

※ 참고로, 저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사람에게 영과 육, 그리고 활동이 있듯, 주님 역시 신성(The Divine)과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그리고 ‘신적 에너지와 활동(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이라는 게 있으시며, 이때 이 세 번째가 바로 성령이시구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 주님을 느끼며, 그 인격을 감지하는 건,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모두 그 얼굴을 늘 주님을 향하는데 이는 그들의 중심 사랑이 주님 사랑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해서 늘 주님을 대면하여 뵙는 듯한 느낌 가운데 지낸다고 하는데요, 지상에 사는 우리 역시 천사들처럼 주님을 사랑하면, 똑같이 늘 주님을 뵙는 것 같은, 늘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독대하는 것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멘

 

주님의 은혜가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5:19)

 

아멘

 

 

2022-03-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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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2(D1)-주일예배(2543, 눅18,35-4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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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5-12(D1)-주일예배(2543, 눅18,35-4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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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

 

 

35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눅18:35-43)

 

 

영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믿음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 즉 주님께서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워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치유의 믿음을 주신다. (계시록 해설 815:5, 이순철 역) the faith by which spiritual diseases are healed by the Lord can be given only through truths from the Word and a life according to them; (AE.815.5)

 

※ 위 글은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계13:11) 속뜻 중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And I saw another beast coming up out of the earth,)에 관한 주석 내용 일부 인용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이 고치시는 병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영적 질병(spiritual diseases)입니다. 영적인 질병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사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질병이란 어떤 것입니까? 영적 질병은 내적으로는 선과 진리의 불균형으로 인해 생기는 병입니다. 그러니까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거나,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거나 할 때 생기는 병입니다. 영적인 질병들은 종종 육신의 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열등감이나 우울증, 거만함, 분노 조절 장애, 각종 중독 같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맹인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맹인’(盲人)이라고 부르는 것은 속뜻으로는, 그가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에 대한 애정은 있는데 진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맹인은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35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5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막 들어가는 초입(初入, 골목 등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여리고’ 사람들의 영적인 의미, 즉 속뜻은 진리에 대해 무지한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합니다. 맹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진리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는 진리를 구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36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맹인이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기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대답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선만 있고 진리가 없거나, 또는 진리만 있고 그에 부합하는 선이 없을 때, 사람은 영적인 병에 듭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시험과도 같습니다. 시련이 있을 때,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종교를 찾게 되고,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확신이 없는 사람은 구원의 진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것이 길에 앉아 진리를 구걸하는 맹인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영적 맹인이 참된 진리를 만나는 순간입니다. 본문에는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비하(卑下,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거나 상대방을 업신여겨 낮춤)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진리, 또는 구원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AC 9144:10). From this it is evident what was signified by the “crown of thorns,” and by his being hailed “King of the Jews,” by “behold the man,” and also by the inscription on the cross, “Jesus of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 (John 19:19, 20); namely, that Divine truth, or the Word, was so regarded and so treated by the Jews, among whom was the church. (That all things done to the Lord by the Jews at his crucifixion signified the states of their church with respect to truth Divine, or the Word, see n. 9093.)

 

38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들은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맹인은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은 평생 이방인들과 싸웠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마치 진리가 거짓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다윗’은 신성한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이 신성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맹인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비하할 때, 맹인은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맹인은 그동안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려고 했고, 진리를 알면 그대로 살려고 노력한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길에 앉아 구걸하는 것의 속뜻이기 때문입니다. ‘’의 속뜻은 진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때 주님은 이렇게 그를 만나시기 이전에 이미 그에게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진리 자체인 분이시라는 믿음을 주셨던 것이고, 그런 믿음이 그에게 이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오늘 주님을 만나자마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도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때가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진리를 모를 때는 마음에 평안이 없었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스베덴보리를 만났고, 주님의 사랑과 섭리로 그의 책들에 적힌 내용들이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마치 맹인이 오늘 예수를 보자마자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39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치자, 본문 39절에는 “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했습니다. 주님을 만나 처음 진리를 배우기 시작할 때는 시련이 많습니다. 진리를 잘못 적용, 실수할 때도 있고, 진리를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하며 다른 사람과 다투기도 합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할 때는 수치심과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것은 죽이 막 끓기 시작할 때와 같이 혼란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때 마음 한쪽에서 집요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지옥의 영들이 비난하고 조롱하는 소리이지요. 그런가 하면, 참된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질시 어린 시선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앞서가는 자들의 꾸짖음입니다. 이런 일련의 시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맹인은 자신의 병의 원인에 대해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던 기도가 좀 더 구체적인 기도로 바뀝니다. 그때를 40절과 4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0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맹인이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그동안 희미하게 알고 있던 진리를 점점 분명하게 알기 시작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맹인은 그동안 그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두루뭉술하게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가까이 가면서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진리에 대한 무지였습니다. 진리에 대한 무지란, 진리가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 없는 진리는 죽은 진리와 같아 설령 있다 하더라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맹인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단순한 진리, 지식에 불과한 진리가 아니라 선이 있는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선이 있는 진리를 소유할 때라야 진리를 적재적소에 올바로 적용할 수 있고, 또한 진리를 가지고만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하기 시작합니다. 진리 안에 있는 선, 곧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기 때문이지요.

 

42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주님께서 맹인의 말을 들으시고,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선이 있는 진리는 오직 그분에게서만 나온다는 사실을 믿을 때, 영적 고질병이 치유됩니다. 그렇게 맹인의 병이 고쳐진 상태를 이사야서 35장 5절에서는,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는 것은 진리에 무지했던 사람들이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는 것은 진리에 순종하는 힘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때가 그동안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것은 진리를 아는 것도 아니고, 구원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면서 주시는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함께 들어있는 진리이며, 그래서 구원의 진리입니다. 맹인은 그 진리를 통해 눈을 뜰 수 있었고, 삶의 질곡(桎梏, 차꼬와 수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맹인의 그런 상태를 본문 4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3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맹인이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의 병의 원인이던 진리에 대한 무지가 해소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맹인은 그동안 진리를 몰라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없어서 이웃과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열등감이나 우울증, 근거 없는 교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진정한 진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맹인이 진리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매달렸을 때, 주님으로부터 치유의 믿음이 흘러들어와 닫혔던 눈이 떠졌습니다. 말씀에는 맹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계시록 해설 1210번 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praising God)은 믿음의 고백과 예배(to confess and worship him)라고 말합니다.

 

Saying, Praise God, all ye his servants, signifies worship of the Lord by those who are in truths. Thi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raising God,” as being to confess and worship him (of which presently); (계19:5)

 

구원의 진리로 인해 닫혔던 눈이 떠질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에 따라 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예수를 따라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맹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믿음이든 개인적인 신념이든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 모두 구원의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모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로 밝혀져야 구원의 믿음이 됩니다. 구원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삶이 즐겁지 않고, 삶 속에서 보람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상태가 영적으로 병든 상태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의 믿음을 얻을 수 있으며, 영적 질병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요? 계시록 해설 815:5번 글에서는 “영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믿음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워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치유의 믿음을 주신다.”(이순철 역)고 합니다. 구원의 믿음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계시록 해설 1210번 글은, “사람이 자신에게는 어떤 선도 없고 자신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반면에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고 주님만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때 사람은 자아 사랑에 속한 것들을 밀어내고 마음을 연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선과 능력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when he acknowledges in heart that there is nothing of good in himself, and that he can do nothing of himself, and on the other hand, that all good is from the Lord, and that the Lord can do all things. When man is in this acknowledgment he puts aside what is his own which belongs to the love of self, and opens all things of his mind, and thus gives room for the Divine to flow in with good and with power. 이순철 역)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먼저 ‘네가 나를 믿느냐’ 라고 물으시고, 그다음에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 곧 이 ‘자기 부인’의 태도가 구원의 출발점, 곧 위 말씀, ‘그때 사람은 자아 사랑에 속한 것들을 밀어내고 마음을 연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선과 능력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처럼,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 영적 질병에 걸린 나를 치료하시는 주님의 치료의 광선이 내 안을 환히 비춰 나의 내면, 내 영혼을 충만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누구를 주님의 제자 삼으실 때마다 하신 말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처럼, ‘자기를 부인할 것’을 요구하신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것이 곧 ‘네가 나를 믿느냐’의 속뜻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배우신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께 구원의 믿음, 치유의 믿음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6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아멘

 

2022-03-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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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5(D1)-주일예배(2542, 눅18,31-34),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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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5-05(D1)-주일예배(2542, 눅18,31-34),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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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의 속뜻

 

 

3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눅18:31-34)

 

 

율법과 예언서에는 주님에 대해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주님이 지옥을 정복하심으로 해서 의롭게 되셨고, 천국을 질서 아래 두셨으며,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셨고, 또한 그렇게 해서 인간이 거듭나고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천국의 비밀 10239:4, 이순철 역) Therefore when the Lord suffered John to baptize him, he said: Thus it becometh us to fulfil all the righteousness of God (Matt. 3:15). “To fulfill all the righteousness of God” denotes to subdue the hells by his own power, and reduce them and the heavens into order, and at the same time glorify his human; which things were done by means of temptations admitted into himself, thus by means of continual combats with the hells, even to the last on the cross. (That this is the “righteousness” which the Lord fulfilled, see n. 9486, 9715, 9809, 10019, 10152.) The like things are also signified by “all things being fulfilled which were written concerning the Lord in the law and the prophets” (Luke 18:31; 22:37; 24:44); and by the Lord’s coming “to fulfill all things of the law” (Matt. 5:17, 18).

 

※ 위 내용은 출30:19,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And Aaron and his sons shall wash from it their hands and their feet)에 관한 속뜻 주석 중 일부입니다.

 

 

※ 아래 본문 중 ‘개인적으로는’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님 본인을 가리킵니다.

 

새 교회에 입문하면서 개인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성경의 내적 의미, 곧 속뜻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큰 감동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마 그렇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 교회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제각기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의 기록들이 실제와 다르다면서 성경의 완벽함을 의심합니다. 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어야 하느냐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그냥 믿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순하게 말씀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모두 독실한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뿌리가 그렇게 튼튼하지가 않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말씀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데, 그냥 맹목적으로, 아, 표현이 좀 그런가요? 말씀의 내적 의미, 즉 그 속뜻을 모른 채 그냥 겉 글자만 믿기 때문이지 싶은데요, 그것은 잘 모르는 어떤 존재, 즉 그 존재의 겉만 믿는 것과 같으며,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이라 볼 수 없지 않을까 저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성경은 문자, 즉 겉 글자로 된 외적 의미, 그러니까 겉뜻과, 그 속의 내적 의미, 즉 속뜻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문자적 의미로만 말씀을 이해하면 여러 가지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예를 들면, 앞에서 어떤 분이 말씀에 기록된 내용들이 실제와 많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내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며, 그러므로 그 자체로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오류가 없는 완전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의미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의미를 통해 볼 때, 성경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까요? 첫째는, 인류가 생긴 이래로 존재 했던 교회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내적 의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교회는 아담과 그 후손들로 표상되는 태고교회입니다. 태고교회 다음에는 노아와 그의 후손들로 표상되는 고대교회가 있었고, 그 후에는 야곱의 자손들로 표상되는 유대교회가 있었습니다. 유대교회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해서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유대교회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이 현 기독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인류를 위한 마지막 교회인 새 교회가 등장합니다. 그 교회를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계21:2, 10)이라고 합니다. 내적 의미를 통해 성경에 기록된 두 번째 내용은 주님에 관한 것입니다. 창세기와 예언서, 그리고 복음서의 기록들은 주님이 오실 것에 대한 예언과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시는지 그 과정들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세 번째 내용은 인간의 영적 거듭남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 창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내적 의미로 볼 때, 그것은 자연계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은 이와 같이 주님에 대해, 그리고 하늘의 천국과 지상의 교회에 대해, 또한 신앙인들의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 곧 그 속뜻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이해할 때,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고, 그때 비로소 주님을 굳게 믿고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이 입으신 인간은 선 그 자체이신 여호와에게서 나오는 진리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처음부터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한 진리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인간(human) 안에는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전적인 속성들이 남아 있어서 그것을 완전히 벗으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인 것들을 벗는 일은 불완전한 몸을 통해 지옥의 시험을 불러들여 그것을 완전히 이기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 비로소 주님은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이 되셨으며, 동시에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 마지막 시험인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먼저 본문 3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말씀에서 ‘열둘’(’12)이라는 수는 믿음 또는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을 나타냅니다. ‘열둘’(12)이라는 숫자에 그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는 주님의 제자들을 ‘열두 제자’로 표현을 했고, 이스라엘을 또한 ‘열두 지파’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열두 제자는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뜻하며, 또한 그들의 다양한 믿음을 나타냅니다. 주님을 믿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믿음이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믿음이 있는가 하면, 도마와 같은 믿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모든 사람을 함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이 마지막 시험을 당하실 고난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성전을 뜻하고, 또한 사람의 내면에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인 속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하시는 것은 주님에게는 십자가의 시험을 통해 당신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고요, 제자들에게는 시험을 통해 겉 사람과 속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곧 영적 성장을 의미하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표현하기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해서 ‘천국의 비밀’ 10239번 글의 4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과 예언서에는 주님에 대해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데, 그 의미는 주님이 지옥을 정복하심으로 해서 의롭게 되셨고, 천국을 질서 아래 두셨으며,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셨고, 또한 그렇게 해서 인간이 거듭나고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주님이 세상에 오실 것과 지옥을 정복하시고, 그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지금 올라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에 대해 32절과 33절에서는,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말씀에서는 주님에 대해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주님을 사람의 아들이라 할 때는 주님의 인간 안에 있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는 주님의 인간 안에 있는 선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시험을 당하실 때 주님은 왜 당신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실까요? 그 이유는 지옥의 영들은 선은 공격하지 못하고, 오직 진리만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주님은 인자가 욕을 당하고, 채찍질과 침 뱉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욕을 먹고 채찍질을 당하는 것은 주님의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고 더럽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욕을 당하시는 주님은 말씀이시며,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이 삼 일 만에 일어나신 것은 시험을 통해 주님의 인성이 신성과 하나가 되신 것이며, 그렇게 해서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3)은 완전한 성취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일을 한 번에 이루시지 않습니다. 한 번 하시고, 두 번 하시고, 마지막 세 번째 이루십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는 3시에 못 박히시고, 6시까지 견디시며, 마지막으로 9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교회가 무너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번 참으시고, 두 번 참으시며,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 믿음과 사랑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때 비로소 교회의 문을 닫으십니다. 교회가 타락하는 모습을 마가복음 12장에서는 포도원을 세로 얻은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두 번째 보낸 종을 또 때리며, 마지막에는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26장에는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당시 유대교회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고난에 대해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본문에는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의 의미를 감추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왜 말씀의 의미를 감추셨을까요? 첫째는, 진리를 받을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진리를 주면, 그것을 더럽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더럽히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이기시기 전 주님은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해, 요한복음 14장 25절 이하에서는,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하십니다. 주님이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보혜사 성령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밝혀주시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언제 그것을 보내주실까요? 그것에 대해 ‘참된 기독교’ 791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천국에서 마지막 심판을 끝내신 후, 세상에서 그를 따르던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 모두를 온 영계로 보내 다니엘서 7장 13절과 14절의 예언, 즉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고 한 예언에 따라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신다는 것과 그의 나라가 세세토록 있을 것이라는 복음을 가르치게 하셨다. (이순철 역)

 

Note: After this work was finished the Lord called together his twelve disciples who followed him in the world; and the next day he sent them all forth throughout the whole spiritual world to preach the gospel that the Lord God Jesus Christ reigns, whose kingdom shall be for ages and ages, according to the prediction in Daniel (7:13, 14), and in Revelation (11:15).

 

Also that blessed are those that come to 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 (Rev. 19:9).

 

This took place on the nineteenth day of June, 1770. This is w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He shall send his angels and they shall gather together his elect, from the end of the heavens to the end thereof (Matt. 24:31).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적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보혜사 성령, 즉 신성한 내적 진리가 천국을 통해 지상에까지 전파되게 된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791번 글은 그 일이 일어난 때를 지상의 시간으로 1770년 6월 19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선지자들이 당신에 대해 기록한 모든 것을 이루자고 하십니다. 주님은 왜 예루살렘에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려고 하실까요? 주님은 바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한편으로는 고난을 당하시고, 한편으로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욕되게 하거나 채찍질을 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얼마나 주님께 함부로 했을까를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에 설레고 기대가 됩니다. 항상 자신을 낮추시고,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끝까지 싸워 이기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와, 그리고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6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6-7)

 

아멘

 

2022-02-1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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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의 속뜻

 

 

18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8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눅18:18-30)

 

 

생명은 곧 주님이시며, 그러므로 구원과 천국을 뜻한다. 그 이유는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이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유일한 근원은 주님이시며, 천사와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형상에 불과한 것이다. (계시록 해설 186:11, 이순철 역) Life” signifies the Lord, and thence salvation and heaven, because all of life is from one only Fountain, and that only Fountain of life is the Lord, while angels and men are merely forms receiving life from Him. (AE.186:11)

 

 

주변을 돌아보면 머리가 좋고 근면할 뿐 아니라 성격까지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하고, 인간관계도 좋아서 대부분 자기 분야에서 성공합니다. 그들 중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해서 모두가 그를 좋아하고, 또 부러워합니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 내색은 않지만 속으로는 살짝 자부심이 있을 수 있는데요, 오늘 본문에 주님을 찾아온 관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세상에서도 성공을 거뒀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남 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그가 오늘 주님을 찾아온 이유는 뭘까요? 어쩌면 그는 세상에서 인정받은 것처럼 주님한테도 인정받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어떤 공허함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문제가 뭔지,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답을 주셨는지 본문의 의미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18절입니다.

 

18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관리가 이르기를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잠깐 있다 사라질 육신의 생명을 만드는 것이 자연의 음식이라면, 영생을 만드는 것은 영적인 음식인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는 말은 어떻게 해야 진정한 선과 진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19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러자 주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답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생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 질문의 요지와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얘기를 하십니다. 즉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원한 생명을 만드는 선과 진리는 인간에게서는 나오지 않고 오로지 한 분 하나님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영생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하고, 선한 일을 하더라도 주님으로부터 하지 않고, 즉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만 한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는 선과 진리가 아니라 악과 거짓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영생의 근원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영생을 얻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그것에 대해 2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0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십계명의 자연적 의미, 곧 겉뜻과 영적인 의미, 곧 속뜻을 모두 온전히 지켜야 합니다. 십계명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십계명의 겉뜻은 문자 그대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속뜻에 대해서만 살짝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간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속뜻으로 간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더럽히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거짓으로 만드는 불경한 일이므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살인은 진리가 아닌 거짓, 또는 선이 아닌 악을 사람들에게 주입해 그들을 영적으로 죽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세 번째는, 도둑질하지 말라 하십니다. 속뜻으로 도둑질은 다른 사람에게 거짓 진리를 가르쳐 그들에게서 진리를 빼앗거나 훔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 역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네 번째는,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것은 위선이나 위증, 사기, 또는 거짓으로 남을 모함하는 일 같은 거짓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과 교회를 마음을 다해 섬기라는 뜻입니다. 말씀에서는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는데요, 그렇게 볼 때, 신앙인들에게 영적 부모는 주님과 교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십계명의 가르침들을 자연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지키되 스스로 하듯, 즉 자발적으로 하듯 주님을 의지해 지키라고 하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모든 능력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21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관리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십계명에 관한 한, 그는 자기는 흠 없는 사람이라 생각한 듯합니다. 그동안 자연적인 의미를 철저히 지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고,

 

22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라 하십니다. 주님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정말 재산을 모두 팔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네게 있는 것’은 첫째는, 잘못된 교리 관련 지식들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의 장로들의 전통 같은 것이고, 오늘날에는 개혁교회 교리의 주류인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 같은 것입니다. 둘째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욕망과 그것에서 비롯된 거짓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참된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버리라 하시고, 그래야 하늘에서 보화, 즉 참된 진리와 선이 내려올 것이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또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것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끌려다니지 말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23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관리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근심에 빠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5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낙타는 감각을 통해 습득한 자연적 지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늘귀는 영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감각을 바탕으로, 그리고 그렇게 해서 습득한 세상 학문을 가지고 천국을, 영적 진리를, 신앙의 신비를 추론, 접근, 들여다보고자 하는 걸 뜻합니다. 낙타가 어떻게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으로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비유를 드신 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부자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토록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여기서 부자는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고, 영적 통찰력까지 갖춘 사람입니다. 문제는 그가 그러한 지식과 지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지식이나 총명함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신앙의 진리와 선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그 관리에게서 성실, 근면 같은 장점들을 보셨습니다만, 그러나 동시에 지적 교만도 보셨습니다. 그것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한 것인데요, 그래서 주님은 너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하시고 네게 있는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26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자라면서 배우고 익힌 수많은 지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 모두 총명하다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신앙인들조차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결정들을 하지요. 그 배경에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한 욕망들이 있는 것입니다. 자아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욕망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고,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8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끝으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이나 아내, 형제와 부모 자녀들은 그 속뜻으로는 모두 자아에 속한, 악하고 거짓된 것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 사는 동안 부단히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 안에 완고하게 들러붙어 있어서 한 번에 없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 의지해서 평생에 걸쳐 조금씩 버려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님을 찾아온 어떤 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관리는 총명하고 성실한 사람이어서 자신의 일에서도 성공을 하고, 재물도 많이 모은 사람이 아닐까 짐작을 해 보는데요, 그렇게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십계명을 지키되 문자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즉 겉뜻으로나 속뜻으로나 온전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자아와 세상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십계명 안에 있는 영적인 의미를 볼 수 없습니다. 설사 본다 하더라도 세상 것들을 지키기 위해 영적인 것들을 포기합니다. 주님을 찾아온 관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자연적 의미만을 지키면서도 모두 지켰다 스스로 믿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계명의 반쪽만 지킨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온전하게 지킬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반쪽짜리 신앙인이 온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영생의 진리를 얻기 위해 잡다한 세상 지식들, 이를테면 이전의 교회에서 배웠거나, 또는 책에서 배운 잘못된 교리나 신앙 관련 지식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새 술을 담기 위해 새 부대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영생의 본질인 진정한 선과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세상 사랑에 빠져 있던 관리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그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라는 말씀으로만 알고 심히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자연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이제까지는 그 모든 부와 소유를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면 지금부터는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 실제로 과거 여러 인물들을 보면, 수도사의 아버지로 일컫는 성 안토니우스(251-356) 라든가, 성 프란치스코(1181-1226) 등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 정말 문자 그대로 실천하고 수도적 삶에 뛰어들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지요. 말씀의 속뜻, 아르카나가 아직 세상에 계시(1750년대)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을 고려할 때, 이분들은 놀랍게도 여전히 그 소유의 쓰임새에 주목하셨음을 봅니다. 천사들은 주님이 모든 걸 거저 주시고, 입히시고 누리게 하시지만, 그리고 자기들 가운데 누구는 더 좋은 것을 받고 자기는 덜 받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저 그 쓰임새에만 주목할 뿐, 그걸 소유하고자 마음을 쓰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는답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하겠습니다. ‘아, 나한테 얼마만 있으면 참 선하고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런 생각도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행을 실천하다 보면, 필요한 것들을 주님이 공급해 주시겠지...’ 하는, 그 순서가 반대인, 이런 생각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적 성취와 우월감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삼으라는 말씀이지요. 그런 인식의 전환, 곧 쓰임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있을 때, 비로소 영적인 눈, 영안이 열리고, 굳어있던 의지가 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인 진정한 진리와 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십계명의 온전한 의미들을 알게 되고, 계명을 온전히 지킬 능력이 생깁니다. 이 일은 비단 내세를 위한 일만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현재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주님의 말씀을 믿고, 지금 바로 실행에 옮기시길 바랍니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일들을 주님께서 꼭 실현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 가운데 있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4)

 

아멘

 

 

2022-01-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4-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4-28(D1)-주일예배(2541, 눅18,18-30),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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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1(D1)-주일예배(2540, 눅18,15-17),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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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자’의 속뜻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8:15-17)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는 만큼 선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순진함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結婚愛 414, 이순철 역) The reason why good is good insofar as innocence is within it is that all good is from the Lord, and innocence is to be led by the Lord. (CL.414)

 

 

주님께서는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전의 아이들은 지금과 많이 달랐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니고, 어린아이의 속뜻이 순진함, 이노센스(innocence)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먼저 15절입니다.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사람들이 주님이 만져주시기를 바라고,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린 아기는 순진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를 데리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사람들이 주님께 진리를 배우러 나올 때 순진한 마음으로 나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주님이 자기의 아기를 만져주시기 원했습니다. 주님이 아기를 만지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순진한 마음 가운데로 오셔서 사람들과 교류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순진한 마음으로 말씀을 가까이할 때, 주님께서 그 마음속으로 오셔서 진리의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아기를 만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말씀에서 주님의 제자는 보통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뜻하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잘못 믿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 거짓 교리를 만들거나, 또는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꾸짖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박해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순진한 사람들을 박해할까요? 순진함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것에 따라 박해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전혀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순진함이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들은 무조건 베푸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새 교회에서는 이런 걸 무지의 순진함이라고 합니다. 이때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순진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순진함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순진함이란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한 그것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질시하고 핍박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 또한 순진한 사람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 가령, 이런 아르카나, 말씀의 속뜻에 기반한 새로운 내용들을 전한다 하여 기존 기독교회, 개신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 여러 방법을 통해 괴롭히는...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주님의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순진함의 단계 내지는 유형은 다양한데요, 그래서 말씀에서는 아이를 젖먹이라 하기도 하고, 아기, 또는 어린아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젖먹이가 가장 순진한 것이고, 아기나 어린아이로 갈수록 그보다는 덜 순진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꾸짖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6절입니다.

 

16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린아이에 비유되는 순진함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스베덴보리 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414번 글에서는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는 만큼 선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순진함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즉 순진함이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인데, 그러므로 순진함이 없으면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럴 경우, 비록 겉보기엔 선처럼 보일지라도 그 선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이 아니므로 참된 선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주님은 교회 안의 사람이든 교회 밖의 사람이든 그들의 순진하고 선한 마음 안으로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059번 글에 의하면, 놀랍게도 주님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로 더 많이 오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지 않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랍니다. 진리를 대적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님 당시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왜곡해서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일 돌이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3절 이하에서는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눅13:23-30)

 

여기서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주님께 여쭙는 것은 ‘교회 안에 주님을 대적하는 자가 많은데 구원받을 자가 과연 있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중 된 자는 교회 밖의 타 종교 사람들을 뜻하고, 먼저 된 자는 교회 안에 있는 자로서 말씀을 왜곡한 자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구원받기가 쉽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덮고 있는 지적 어둠은 주님에 의해 쉽게 걷히지만, 진리를 알면서도 더럽힌 자들은 그들을 덮고 있는 어둠이 걷히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지요. 17절입니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순진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뜻합니다.

 

※ 참고로,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국을 떠받치는 두 키워드는 ‘순진함’(innocence)과 ‘평화’(peace)라고 합니다.

 

순진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유에 대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281번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순진성(innocence)에 대해 천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순진성이 모든 선함의 본질이라는 것과, 선은 그 안에 순진성이 있을 때만 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지혜(wisdom)도 순진성이 있어야 지혜이며, 사랑(love), 이타심(charity), 신앙(faith)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순진성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어야 선이다. 모든 선은 주께로부터 오며, 순진함이란 주의 인도하심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말하기를, 오직 순진성에 의해서만 진리는 선에, 선은 진리에 결합될 수 있으므로 천사는 순진성이 있어야 천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선과 진리가 천국적 결혼으로 결합되지 않은 사람 안에는 천국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천국적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천국적 결혼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또 천사에게 들은 것은, 참된 결혼애는 순진성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참된 결혼애는 남편과 아내의 마음이 선과 진리의 결합 안에 있을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결합이 낮은 단계로 내려와 결혼애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했다. 부부는 각자의 마음이 사랑 안에 있는 만큼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결혼애에는 애들 같은 천진난만한 장난스러움이 있다고 했다. (천국과 지옥 281, 김은경 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진리 안에 들어온 우리들은 나름대로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 이 진리를 택했고, 진리에 따라 살고자 지금 노력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타 종교나 타 교파의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린 아기를 데리고 주님께로 오는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진리 안에 있다고 우월감을 가지거나 다른 종교나 교파 사람들을 경시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영적 순진함을 잃어버리거나 시험에 들 수가 있습니다.

 

※ 아래 이야기는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미묘한 우월감을 갖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 불교계의 큰 스님 중 한 분인 탄허 스님에 대한 강연이 있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연자에 의하면, 탄허 스님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기독교 신학자보다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모두 외우고 이해하는데 자신은 3년이 걸렸는데 재능이 있는 사람은 3개월이면 될 거라고 했다고 합니다. 불교에 비해 기독교의 교리가 그만큼 깊이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면서도 기독교와 동양의 유, 불, 선이 서로 회통(會通)해야 한다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탄허 스님에 대해 더 궁금해졌습니다. 강연하는 스님이 말하기를, 탄허 스님은 석가나 공자, 예수 같은 성인을 생각이 끊어진 자라고 정의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말일까요?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성인들은 우주 만물의 본질인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도 모두 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것을 아는 지는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생각하는 자는 영적인 사람이고, 생각이 끊어진 자, 즉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아는 사람은 천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천적인 사람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지각, 즉 퍼셉션(perception)을 통해 주님과 직접 소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앉은 자리에서,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강연자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밖에 있지 않고 사람 안에 있다고 할 뿐 모호하게 설명했습니다. 성경을 모두 이해했다는 탄허 스님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만약 알았다면 예수님을 석가와 공자와 같은 성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면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믿어야 한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 모르는 존재를 왜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까? 이 모든 의문들을 주님께서는 직접 세상에 오심으로써 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몸소 보여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시며, 손으로 직접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새 교회의 진리를 통해 이제 누구나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가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진리를 믿고 따르는 일은 순진함이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항상 순진함을 구하시기를 바라고, 주님이 주신 순진함으로 늘 자신과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6:30-34)

 

아멘

 

2022-01-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4-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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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마음이 안정이 안 되는 원인이 혹시 이번 총선 결과 때문이시면...

 

목사님, 저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알려주고 있는 바에 따르면, 사람 안에는 두 창문이 있는데, 한쪽 창이 열리면 다른 쪽 창은 닫힌답니다. 즉 세상, 세속을 향한 창이 열리면, 천국을 향한 창이 닫히고, 천국을 향한 창이 열리면 세상을 향한 창은 닫히는 것이지요.

 

이 어느 쪽 창이 열리는가가 아주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 열린 창을 통해 그곳의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인데요, 즉 천국을 향한 창이 열리면, 천국의 모든 입류(入流, influx)가, 지옥을 향한 창이 열리면, 지옥의 모든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세상을 향한 창을 닫기로 하고, 그래서 가급적 스마트폰을 닫고 있고, 부득이 보게 되어도 그냥 제목들 정도만 보고 꾹 참습니다. 그리고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천국을 향한 창을 여느라 애쓰고 있습니다. 밤낮 없이 창세기 번역에 힘쓰고 있고, 또 저희 사모와 함께 몇 가지 성독(聖讀), 즉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스베덴보리 저) 및 ‘성 프란치스코’(엄두섭 저)를 일주일에 두 번씩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금 상황이 너무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는데... 그러나 주님의 섭리를 믿고 꾹 참습니다. 우리의 경우, 지난 6.25, 그 전 일제 치하, 외국의 경우, 가령, 나치 히틀러의 2차 세계 대전 때, 유럽 및 유대인들의 처지 등을 말이지요. 특히 주님 당시, 로마의 식민지 시절 등... 그때도 주님은 주님이 직접 나서 모든 상황을 그때그때 즉각 바로잡아 주시지 않으셨지요, 전에 나눈 아래와 같은 말씀처럼 말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사42:3) (2024/2/4)

 

위 말씀의 속뜻은,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은 오직 거짓과 탐욕밖에 없기 때문인데, 만일 이때 이 유일한, 비록 악하고 거짓되더라도, 생명을 건드리게 되면, 더 이상의 생명이 없어 사람은 바로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대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와 동행, 그가 자의로 주님의 선과 진리 쪽으로 돌이키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역량에 맞춰 강약을 조절하시면서 말이지요...

 

목사님, 모두 힘드시지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믿으시며, 주님 주시는 ‘평안’ 가운데 힘써 거하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세상, 세속의 창은 잠시 닫으시고요...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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