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아벨(Abel) 그의 제물(offering) 관하여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That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signifies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therein, are pleasing to the Lord, has been explained before, as regards bothAbel,and hisoffering.

 

해설

AC.354는 매우 짧으며, 사실상 AC.350-353 전체를 한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결론입니다. 새로운 상응을 제시하기보다 창4:4의 마지막 부분인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의 속뜻을 다시 확인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벨이라는 개인이 가인보다 더 사랑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내적 상태와 예배가 주님의 질서와 하나를 이루는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체어리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지 않고, 예배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말합니다. 이것은 AC.349에서 밝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는 원리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외적인 예배의 형식이 아무리 온전해 보여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이 없다면 그것만으로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외적인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내적 생명으로 받아 그것을 표현한다면, 그 외적인 것 역시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올바른 질서가 중요합니다.

 

AC.350-353은 바로 이 질서를 차례로 밝혀 왔습니다. AC.350아벨이 체어리티이고 떼의 처음 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이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개괄했습니다. AC.351은 체어리티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로 설명했고, AC.352는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AC.353기름이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하며,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AC.354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은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묶습니다. 아벨의 예배가 살아 있는 까닭은 체어리티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체어리티와 사랑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보시고 기분이 좋아지시고 가인의 제물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셨다는 식으로 인간의 변화하는 감정을 주님께 그대로 투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은 변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 사랑과 선을 어떤 상태에서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으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으로 표현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생명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아보심돌아보지 않으심은 변하는 주님의 사랑보다 서로 다른 인간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과 아벨의 두 제물을 가르는 기준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 역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에게도 행위가 있었고 외적인 예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예배를 드렸느냐, 드리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더구나 곡식보다 동물 제물이 본질적으로 우월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AC.348-349에서 살펴보았듯 가인의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그의 제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합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결국 두 제물을 가르는 것은 무엇을 드렸는가?보다 예배가 어디에서 생명을 얻고 있는가?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아벨의 예배를 인간의 공로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아벨에게 체어리티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가인보다 더 훌륭한 예배를 만들어 주님께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52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고, AC.353기름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이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란 인간이 자기에게서 좋은 것을 생산하여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고 그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선에 따라 살아가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을 행하지만 그 사랑과 선의 생명을 자기 proprium에 돌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다시 분명하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읽으면서 반복해서 보았듯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신앙보다 행위가 중요하다거나 신앙 대신 체어리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53은 오히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을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배도 체어리티에 기초할 때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예배와 삶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하나의 생명 안에서 올바른 질서를 이루는가입니다.

 

AC.354는 바로 다음 AC.355로 넘어가기 직전의 중요한 경계이기도 합니다. 4:4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라고 했고, 4:5에서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이어집니다. 따라서 AC.354에서 먼저 돌아보심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다음에 나오는 돌아보지 않으심을 주님의 거절이나 편애로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벨에게는 체어리티에 기초한 살아 있는 예배가 있고, 가인에게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가 있습니다. 말씀은 이 두 내적 상태의 차이를 돌아보셨다돌아보지 않으셨다는 표현으로 드러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볼 때도 AC.354는 매우 간단하면서 깊은 기준을 줍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읽고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며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은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외적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그릇이 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수록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게 되는지, 진리를 알수록 이웃의 참된 선과 유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지, 받은 은사와 지식을 자기 우월감보다 쓰임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외적인 행위로 다른 사람의 내면을 판단하라는 기준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신앙과 예배를 주님 앞에서 살펴보는 기준입니다.

 

결국 AC.354AC.350-353의 긴 설명을 매우 단순한 한 문장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처음 난 것은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며, 기름은 주님께 속한 천적인 사랑의 선입니다. 그러므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체어리티가 되고, 그 체어리티가 신앙과 행위와 예배에 생명을 주는 질서가 살아 있음을 뜻합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은 외적인 형식 자체에도, 인간 자신의 경건이나 공로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어 신앙과 예배 속에 살아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아벨의 제물이 표상하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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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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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당히 강한 긴장 속에서 진행됩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의 지구촌교회 창립기념 설교를 계기로, 떼제 공동체와 관상기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일치, 에큐메니즘, 유진 피터슨과 레노바레 운동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비판합니다. 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 방법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에게 이것은 결국 ‘다른 복음’의 문제이며, 교회가 성경에서 떠나 종교통합과 신비주의로 이동하는 ‘배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의 ‘다른 복음’, 고린도후서 11장의 ‘다른 예수, 다른 , 다른 복음’, 요한이서의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져와 자신의 비판을 뒷받침합니다.

 

이처럼 정동수 목사의 문제의식 자체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사랑’, ‘화해’, ‘포용’, ‘넓은 마음’이라는 아름다운 말 아래서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종교적 차이를 지워 버리고 ‘무엇을 믿든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식의 무차별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선과 진리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선만 있고 진리가 없어도 안 되고, 진리만 있고 선이 없어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제기하는 ‘넓은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진리의 경계까지 없애도 되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반드시 진지하게 받아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정동수 목사와 스베덴보리의 길은 크게 갈라집니다. 정동수 목사는 ‘진리의 경계’를 거의 교리적 소속과 정통성의 경계로 설정합니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가 함께 예배하는 것을 종교통합으로 보고, 그것을 사실상 ‘다른 복음’과 연결합니다. 더 나아가 강의 마지막에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경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경계는 사람이 어느 교단 명부에 속해 있는가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를 읽는 데 가장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방대한 기록에서 사람을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방인’이라는 지상의 명칭만으로 나누어 구원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각 종교 안에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으며,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거나 자신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것은 매우 심각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어떤 교회적 환경에서 태어났고 어떤 교리를 배웠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는 구별합니다. 그의 저서,‘천국과 지옥’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원리도 결국 사람이 사후에 자기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지상에서 가입했던 교파의 연장선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동수 목사의 ‘가톨릭 신자는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없다’는 식의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 상당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먼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그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는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는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리는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삶을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교리적으로 많은 것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자기애와 세상 사랑 속에서 사는 사람보다, 제한된 진리밖에 모르면서도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먼저 세워 놓고 이동원 목사의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표현을 보아야 합니다. 이 표현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아름다운 진실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만든 교파의 울타리보다 훨씬 큽니다. 주님은 개신교라는 명칭 아래 있는 사람만 돌보시는 분이 아니며,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 합니다. 심지어 참된 종교에 관하여 거의 아무것도 알 기회가 없었던 사람에게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의 교파적 마음보다 넓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한 문장이 뒤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넓다는 것과 주님께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영원히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를 동일하게 참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넓은 마음’은 아닙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사이에 실제 교리적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교황권, 성인에 대한 기도, 성찬 이해, 칭의, 교회론 등에 실제 차이가 있는데 ‘우리는 똑같으니 아무 차이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화해라기보다 진리 문제의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떼제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 문제에서도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했으니 모든 교리가 참이라고 인정한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함께 기도했으니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임이 실제로 무엇을 고백하고 무엇을 지향하며, 참여자가 그 가운데서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떼제를 ‘가짜들끼리 같이 모이는’ 곳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이렇게 집단적으로 판정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외적 형식만 보고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우리가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예레미야 24장의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가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끌어낸 것을 ‘설교 왜곡’이라고 비판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보내신 목적이 ‘넓은 마음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을 정해 놓은 다음 성경 본문을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설교 왜곡’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지적은 상당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본문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은 경고를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라고 해서 어느 본문에든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집어넣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문자의 뜻을 정직하게 읽어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본문의 직접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 뒤에야 말씀의 속뜻을 살펴야 합니다. 속뜻은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주님께서 넣어 두신 더 깊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4장에서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나쁜 무화과는 남아 있거나 심판 아래 놓인 이들을 가리킵니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눈에는 정반대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포로가 된 사람들이 실패자이고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이 살아남은 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포로로 끌려간 이들을 오히려 ‘좋은 무화과’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징계를 통하여 보존하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인간이 불행이라고 판단하는 사건이 반드시 영적 파멸은 아니며, 인간이 안전이라고 생각하는 상태가 반드시 영적 안전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서 ‘무화과’라는 표상은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무화과는 대체로 자연적 선, 곧 사람의 외적·자연적 삶에서 나타나는 선과 관련됩니다. 포도나무가 보다 영적인 선과 연결되고 올리브가 보다 천적인 선과 연결되는 것과 비교하면, 무화과는 인간의 자연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대비는 단순히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도덕적 구분보다 더 깊게, 사람의 자연적 삶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선하게 형성되었는가 아니면 부패했는가 하는 문제까지 열어 줍니다.

 

그렇게 보면 바벨론 포로라는 사건도 색다르게 보입니다. 포로 생활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유다의 오랜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십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다시 교회를 일으킬 수 있는 남은 것을 지키십니다. ‘좋은 무화과’는 바로 그런 보존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 악의 결과 가운데서 선을 끌어내십니다.

 

이 점에서는 이동원 목사가 고난을 통하여 더 넓은 시야를 배우는다는 방향으로 적용한 것이 본문의 문자에 직접 쓰여 있지는 않더라도, ‘고난을 통한 변화’라는 적용 자체를 곧바로 성경 왜곡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조금 더 살펴볼 여지가 있습니다. 설교에는 본문 해석과 오늘의 적용이라는 두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은 본문의 문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적용이 본문의 중심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가, 아니면 본문을 발판으로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동원 목사의 실제 설교 전체 문맥을 놓고 따져야 공정합니다. 이번 원고가 제시한 비판자의 설명만으로 그의 설교 전체를 최종 판정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히려 정동수 목사 자신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본문에 없는 것을 가져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설교 왜곡’이라고 매우 좋은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후 예레미야에서 ‘하늘의 여왕’을 가져와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 칭호와 직접 연결하고, 따라서 예레미야를 설교한다면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와 종교통합을 버리라고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당시 말한 ‘하늘의 여왕’과 후대 가톨릭에서 마리아에게 사용된 ‘하늘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두 대상을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본문 밖의 역사적·신학적 연결을 사용한 ‘적용’입니다.

 

이것은 정동수 목사의 결론이 반드시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일관성입니다. 이동원 목사가 본문에서 현대 교회의 화해를 적용하는 것은 ‘본문에 없는 것을 넣은 ’이라 비판하면서, 자신은 같은 예레미야에서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론을 끌어오는 것이 자동적으로 허용된다면 해석 기준이 비대칭적이 됩니다. 설교자를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해석 원칙을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매우 유익한 제3의 길을 제공합니다. 역사적 문맥은 역사적 문맥대로 존중하면서, 그 안에 있는 영적 의미는 인간의 자의적인 연상으로 찾지 않고 말씀 전체의 상응을 통해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하늘의 여왕’을 단순히 2천여 년 뒤 특정 교단의 명칭으로 바로 점프시키는 것보다, 우상숭배가 인간 내면에서 무엇인지 먼저 묻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 속해야 할 사랑과 경배를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어떤 대상에게 돌릴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것이 모든 시대의 사람에게 적용되는 속뜻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강의에서 계속 등장하는 ‘배도’ 역시 단순히 교단 이동이나 에큐메니즘 참여보다 훨씬 깊은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심각한 배도는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교리가 아무리 정통이어도 체어리티가 죽어 있으면 신앙도 살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천국의 비밀’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반복해서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하면 결국 아벨, 곧 체어리티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을 경계하는 사람은 동시에 ‘나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지는 않은가?’도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언어를 돌아보게 합니다. ‘가짜 목사’, ‘쓰레기’, ‘마귀가 만든 ’, ‘가짜들끼리 모인다’, ‘침례교의 침자도 모르는 사람’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교리적 오류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과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진리를 위한 열심도 그 안의 정서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보호하면서도 사람의 구원을 원합니다. 자기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방패 삼아 상대를 공격하고 이기는 데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매우 강한 말을 할 수 있지만 속의 불은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고 ‘사랑해야 하므로 오류를 지적하지 말자’는 뜻도 아닙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의 말을 인정하는 온순함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도 이웃 사랑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사람을 영적으로 해친다면 그것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다만 목적이 중요합니다. ‘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거짓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여야 합니다. 이것이 논쟁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이제 관상기도 문제를 보겠습니다. 강사는 관상기도, 침묵기도, 향심기도, 호흡기도 등을 거의 하나의 범주로 묶고, 불교·힌두교의 명상 및 만트라와 연결합니다. 반복적인 말을 계속하면 이성적 사고가 정지되고 의식을 잃게 되며, 수동적인 상태가 되어 외부 영적 존재에게 열리고 결국 ‘마귀가 들어온다’고 설명합니다. 촛불을 바라보거나 호흡을 조절하는 것 역시 같은 위험의 통로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매우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계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혼자 생각하고 느끼는 독립된 섬이 아니라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영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영향’이라는 개념 자체를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부분만 보면 강사의 경계심이 스베덴보리와 접점을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평상시에도 영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정 기도법을 사용해야 비로소 영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이 자유와 이성 안에서 보존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촛불을 켰다는 사실, 몇 분 침묵했다는 사실, 짧은 기도문을 반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마귀가 들어오는 통로가 열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정말 중요한 경계선은 ‘자유와 이성을 훼손하는가’입니다. 사람을 무비판적 수동성으로 몰아가고, 자신의 이성을 내려놓게 하고, 어떤 내적 음성이나 느낌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 계시라고 믿게 만드는 수행이라면 분명 위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파괴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그것을 삶으로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침묵’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잠시 침묵하면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 역시 그 자체로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침묵 속에서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자기 생각을 완전히 제거하여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려 하는 것과, 방금 읽은 말씀을 주님 앞에서 조용히 되새기며 자신을 살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외형은 둘 다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일 수 있지만 내적 활동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반복기도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헛된 반복’을 경계하신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반복이 곧 ‘헛된 반복’은 아닙니다. 같은 시편을 반복해서 읽는 것,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진심으로 여러 번 기도하는 것, 찬송의 후렴을 반복하는 것을 그 자체만으로 힌두교 만트라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핵심은 말의 횟수보다 그 말 안에 있는 의도와 의식입니다. 의미를 제거하고 의식을 변형시키기 위한 기계적 반복과, 마음을 주님께 돌리며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기는 반복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의도’와 ‘목적’에 관한 가르침으로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같은 외적 행위라도 목적이 다르면 영적으로 전혀 다른 행위가 됩니다. 한 사람은 침묵 속에서 자기 안의 신성을 발견하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침묵 속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반복을 통해 의식을 지우려 하고, 다른 사람은 같은 말씀을 반복하며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길 수 있습니다. 외적 형식만으로 내적 상태를 판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떼제 찬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의 구조가 단순하고 짧은 문장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 구조 자체가 곧 악령을 불러들이는 장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음악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선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 찬양이 사람의 애정을 어디로 이끄는가? 주님을 향한 겸손과 사랑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자기 감정의 황홀경 자체를 사랑하게 하는가? 그리고 정서가 이후의 삶에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가?

 

이 기준은 통성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조용한 기도만 위험하고 큰소리 기도는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큰소리로 열정적으로 기도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도취될 수 있고, 조용히 침묵하면서도 깊은 회개 가운데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외적인 기도 형식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본질입니다.

 

강의에서 ‘설교 없는 예배’에 대한 비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로마서 10장의 ‘신앙은 들음에서 난다’를 근거로 말씀 선포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성경을 읽고 5~10분 침묵하는 것을 ‘설교’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적 설교관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워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적 체험만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 자체는 인간 설교자의 설명보다 더 근원적인 거룩함을 지닙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봉사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봉독한 뒤 잠시 조용히 그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씀 선포를 폐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설교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도록 인도받고 있는가’입니다. 훌륭한 설교도 사람을 자기 숭배로 이끌 수 있고, 짧은 말씀 봉독 하나가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역설적으로 이번 강의 자체에도 적용됩니다. 강사는 성도들에게 ‘유명한 목사가 말한다고 무조건 아멘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칙은 이동원 목사에게만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강의를 하는 강사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이동원 목사가 유명하다고 믿지 말라’가 옳다면 ‘이동원 목사를 비판하는 유명한 목사가 말한다고 그대로 믿지도 말라’ 역시 옳습니다. 모든 주장을 말씀과 사실과 이성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분별의 원칙입니다. ‘누가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말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말했는가?’보다 ‘ 말이 참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연결하고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이러한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강사는 유진 피터슨을 ‘신비주의자’,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메시지’를 ‘쓰레기’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한 사람의 저작과 신학 전체를 특정 연관관계 몇 가지로 한꺼번에 판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저자의 특정 주장에 문제가 있다면 그 주장을 구체적으로 살피면 됩니다. 리처드 포스터나 댈러스 윌라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사람과 관계가 있으므로 사람도 잘못되었다’는 연쇄적인 방식보다 각각의 가르침을 실제 내용에 따라 검토하는 편이 더 공정합니다.

 

특히 ‘누구 이름이 나오면 가지 말라’는 방식의 분별은 성도들에게 단기적으로는 편리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분별력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이름 목록만 외우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분별은 ‘ 사람은 금지된 사람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 가르침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존중하는가,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가, 말씀의 진리와 조화를 이루는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열매 맺게 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번 강의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인 가톨릭과 구원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권과 성인 숭배, 인간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문제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밝히기’에서 바벨론에 관한 해설을 읽어 보면 그 비판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영혼과 천국에 대한 권세를 자기에게 돌리는 사랑을 심각한 악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포용적이니까 가톨릭 교리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큰 오해입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가톨릭 신자는 모두 지옥 간다’는 결론과 전혀 같지 않습니다. 교리 체계의 오류를 비판하는 것과 그 안에 태어나 살아온 개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판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부분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진리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받은 빛과 기회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십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뿐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등 기독교 밖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적용됩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의 민족들, 곧 이방인들의 구원 가능성을 분명히 다룹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종교 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선한 삶을 살며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면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 강의 마지막의 ‘구원은 기독교 안에만 있다’는 문장은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중요한 수정이 필요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도 단호합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을 통해 구원받는다’와 ‘지상에서 특정한 기독교 교리 체계에 소속된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 기회를 얻지 못했더라도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입니다. 그리고 사후에 그 근원이 누구인지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은 놀랍도록 넓으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주님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이번 논쟁의 표현이 다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정말 넓습니다. 그러나 ‘아무거나 괜찮다’는 의미에서 넓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선과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려 하기 때문에 넓습니다. 불교인도, 무슬림도, 가톨릭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사랑하시지만 그들 안에 있는 모든 거짓을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하시되 거짓에서는 건져 내시고, 선을 보존하시며, 더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에큐메니즘과 잘못된 종교통합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교리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모두 똑같다’고 하는 것은 진리를 희생한 통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고, 함께 대화하면서 무엇이 참인지 찾고, 가능한 선에서는 협력하며, 최종적인 심판은 주님께 맡긴다’는 태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는 후자와 훨씬 가깝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번 강의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장점은 매우 분명합니다. 교회의 화해와 포용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진리의 문제를 덮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설교자가 본문을 자기 주장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유명한 목사의 말도 성도가 분별해야 한다는 경고, 감정적·신비적 체험이 말씀의 진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가 지나치게 확대되면서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침묵을 곧 관상기도로, 관상기도를 곧 동양 종교의 명상으로, 반복 찬양을 곧 만트라로, 만트라적 반복을 곧 의식 상실로, 의식의 이완을 곧 마귀의 침입으로 연결하는 일련의 논증에는 단계마다 별도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또한 떼제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짜’로 묶고,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사람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분별’에서 ‘심판’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영적 세계는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경외심과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은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내적 사랑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누가 천국에 속했고 누가 지옥에 속했는지는 주님께서 아십니다. 우리는 교리를 살필 수 있고 행동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으며 위험한 가르침을 경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 자체를 최종적으로 판결하는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기존 기독교의 여러 교리가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경험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믿음만의 구원, 속죄, 부활, 천국과 지옥, 최후의 심판, 말씀의 속뜻 등 거의 모든 핵심 주제가 새롭게 보입니다. 바로 그때 가장 조심해야 할 유혹이 ‘나는 이제 알았고 저들은 모른다’는 우월감입니다. 그것이 들어오는 순간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proprium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여 주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 사람이 틀렸는가?’가 아니라 ‘ 말씀이 안에서 무엇을 드러내는가?’입니다. 예레미야 24장의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도 결국 내 안의 문제입니다. 내 자연적 삶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는 선은 무엇이며, 이미 부패하여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붙들고 있는 예루살렘은 정말 주님의 도성인가, 아니면 내가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proprium의 성인가? 때로는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는 ‘바벨론 포로’ 같은 경험을 통해 주님께서 오히려 내 안의 리메인스를 보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좋은 무화과 광주의 소망’이라는 본문은 특정 목사의 에큐메니즘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되기 전에 우리 자신의 거듭남을 비추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열어 보이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판정하는 책이기 전에 나를 심판하고 고치고 거듭나게 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넓은 마음이냐, 진리 수호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는 사랑과 진리가 결코 싸우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하나이며, 선은 진리와 결혼해야 합니다. 진리를 버린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고, 사랑을 잃은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리적 차이를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영성을 경계하면서도 침묵과 묵상 자체를 악마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톨릭의 교리적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가톨릭 신자의 영혼을 우리가 대신 심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에큐메니즘의 위험을 살피면서도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 자체를 배도로 규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분별하라고 가르치면서 그 목사를 비판하는 또 다른 유명한 목사의 말 역시 똑같은 기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말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 넓음은 진리를 희석시키는 넓음이 아니라, 진리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넓음입니다. 주님은 거짓을 참이라고 부르실 만큼 넓으신 분이 아니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까지 버리지 않고 참으로 이끄실 만큼 넓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분별도 바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에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에는 우리가 함부로 그을 있는 경계가 없습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잃으면 한쪽에서는 무차별적인 종교혼합으로 흐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교리적 정죄와 영적 우월감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 시간의 강의를 다 듣고 난 뒤 우리에게 남아야 할 질문은 ‘이동원 목사는 배도한 목사인가?’ 하나만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을 경계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오류를 찾고 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진리의 차이를 흐리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를 사랑하면서도 진리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주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 두 질문 사이에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넓지만 흐리지 않고, 분명하지만 정죄하지 않는’ 분별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 논쟁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붙들고 싶은 지점입니다.

 

 

 

SY.71, 정동수 목사, ‘클로드, 챗GPT, 제미나이로 성경 공부 바르게 하기, 잘못된 목사, 교리, 설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특강은 인공지능 시대에 성경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정동수 목사의 출발점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과거에는 성경을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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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는 마태복음 21장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사건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외형적 종교성과 어린아이 같은 신앙, 하나님과의 친밀함, 그리고 기도에 대한 신뢰로 나아갑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문장은 사실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박요한 목사는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전부’인 것처럼 신앙인에게도 하나님이 전부가 되어야 한다고 반복합니다. 이 중심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깊은 지점을 건드립니다. 다만 설교 후반부의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면 반드시 받는다’는 적용으로 갈수록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먼저 박요한 목사가 무화과나무 사건을 문자 그대로만 읽지 않고 ‘표면성 이면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한 대목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예수께서 배가 고프셔서 열매를 찾으셨는데 열매가 없자 화가 나서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으로만 읽으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래서 무성한 잎은 있으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당시 예루살렘 종교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성전과 제사와 제사장과 종교적 형식은 화려하지만 정작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라는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는 방식과 상당히 가까이 다가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 속의 나무와 잎과 열매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닙니다. 특히 ‘열매’는 사람이 알고 믿는 것을 실제 선한 삶으로 가져가는 것, 곧 선과 체어리티의 실제적인 산출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설교의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없다’는 진단은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잎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교리도 필요하고, 말씀에 관한 지식도 필요하며, 예배의 형식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열매를 위한 ’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종교의 목적이 될 때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많이 알고, 신앙에 관한 말을 많이 하고, 예배와 기도와 찬양에 열심이어도 그것이 삶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며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영적으로는 잎만 무성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화과나무 사건을 오늘의 교회에 적용한다면 ‘예배를 화려하게 하지 말자’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설교와 기도가 실제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입니다.

 

이 지점에서 박요한 목사가 대형 연합집회, 수많은 직함, 화려한 찬양대와 찬양 형식을 비판하는 문제도 조금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명예와 직함과 외형이 앞서는 종교는 분명 위험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화려함’ 자체와 ‘’을 동일시하기 어렵습니다. 소박한 예배라고 해서 자동으로 내적 예배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예배라고 해서 자동으로 외적 예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핵심은 그 외적 형식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양대를 없애야 한국 교회가 산다’는 식의 결론보다는 ‘찬양대가 있든 없든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내적 예배를 담고 있는가’를 묻는 편이 더 본질적입니다.

 

설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어린아이에 관한 해설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어린아이도 장난감과 좋은 것을 좋아하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는 순간 그것들을 내려놓고 엄마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재산과 직업과 가정과 건강과 성취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과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이 목적이고 어느 것이 수단인가’입니다. 어린아이 비유를 이 관점에서 읽으면, 장난감을 가지고 즐겁게 노는 것은 괜찮지만 ‘엄마보다 장난감이 중요해지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주님에게서 받아 선하게 사용하는 동안에는 축복이지만, 그것이 주님을 대신하여 삶의 궁극적 목적이 되면 우상이 됩니다.

 

이것은 설교 중 출애굽기 33장의 모세와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은 주시겠지만 친히 함께 올라가지는 않겠다고 하시자 모세가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대답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이것을 ‘가나안보다 하나님을 원하는 신앙’으로 읽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이번 설교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 중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보다 ‘하나님 자신’을 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조금 더 깊이 표현한다면, 천국조차 주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천국의 본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그 안에서 사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없이 천국만 얻겠다’는 것은 영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를 더하면 이 설교는 더욱 깊어집니다. 어린아이가 천국적인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미숙하기 때문도 아니고, 부모에게 무엇이든 달라고 조르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린아이에게 나타나는 순진무구함의 핵심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지 않는 상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개념인 proprium과 정반대 방향입니다. ‘내가 안다’, ‘내가 있다’, ‘ 힘으로 산다’는 자기중심적 독립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생명과 선이 공급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어린아이 같은 신앙’은 지성을 포기하는 신앙도,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자신에게서 선할 없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깊은 인정에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요한 목사가 ‘어린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는다’고 한 것은 매우 좋은 비유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을 공급받는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반드시 돈과 성공과 건강과 소원의 성취를 공급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장 근원적으로는 생명, 선을 사랑할 능력, 진리를 볼 빛, 악과 싸울 힘, 그리고 거듭남에 필요한 모든 것을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연적인 생명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에서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설교 후반부의 기도론은 이 렌즈에서 한 번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과 오랜 기도 끝에 유튜브가 크게 성장한 경험을 들려주면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한 것은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개인적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는 고백 자체는 소중합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증언 역시 귀합니다. 그러나 한 개인에게 경제적인 회복과 성공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마태복음 2122절의 보편적 해석 원리로 확장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믿음으로 오래 기도했는데도 병이 낫지 않은 사람, 사업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은 ‘내가 어린아이처럼 믿지 못했기 때문인가?’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응답은 우리의 욕망을 무제한으로 실현해 주시는 데 있지 않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신적 섭리 안에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무엇이든 요구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엄마가 문자 그대로 무엇이든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가 엄마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엄마는 아이가 원하는 것과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박요한 목사가 사용한 ‘엄마만 믿어’라는 표현은 역설적으로 기도 응답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은 ‘엄마에게 조르면 내가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는다’가 아니라 ‘엄마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엄마에게 나를 맡길 있다’에 더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받으리라’는 말씀도 ‘ 욕망을 강한 확신으로 밀어붙이면 현실이 된다’는 공식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의 기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것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점차 ‘주님, 이것이 제게 정말 선한 것이라면 허락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뜻을 고쳐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변합니다. 결국 가장 깊은 기도는 주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의 절정은 ‘ 뜻대로 이루어졌다’가 아니라 ‘ 뜻이 주님의 뜻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 ‘성령 충만’을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고 사모하는 상태로 설명한 부분 역시 매우 좋습니다. 방언이나 봉사나 종교적 활동 하나를 성령 충만의 결정적 표지로 삼지 않고 ‘하나님 분이면 만족합니다’라는 방향으로 가져간 것은 이번 설교의 중요한 장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붙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친밀감에서 끝나지 않고 결국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기를 기뻐하는 ’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그 계명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즐거워함’과 ‘이웃에게 선을 행함’은 서로 경쟁하는 두 영성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안과 밖으로 나타나는 두 모습입니다.

 

반면 설교 중 몇몇 단정적인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구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교 전체를 ‘예수님이 씨를 말려 버린 이단 종교’라고 규정하는 표현이나, 특정 음악가·연예인들의 약물 문제를 감정적 공연 방식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연결하는 설명, 점이나 타로를 본 사람의 영 안으로 곧바로 악령이 들어와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설명하는 방식 등은 설교의 중심 메시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주장들이 아닙니다. 특히 무화과나무의 심판을 역사적 유대인 전체에 대한 주님의 저주로 확대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민족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표상했던 ‘교회의 영적 상태’를 읽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그 말씀이 오늘 우리 자신에게도 살아 있는 심판과 경고가 됩니다. ‘ 유대인들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였다’고 끝내면 말씀은 남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지만, ‘혹시 지금 안에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있지 않은가?’라고 읽으면 말씀이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설교 첫머리에서 언급한 엘리사와 아이들 사건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박요한 목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자적 사건 앞에서 ‘성격이 불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구나’라고 나름의 답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런 본문일수록 문자적 사건에 나타난 인물의 성격을 중심으로 교훈을 끌어내기보다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 자신이 무화과나무에서는 ‘표면성 이면의 영적인 의미’를 찾으면서 엘리사 사건에서는 문자적 인물의 성격으로 해석한 것은 방법론적으로 조금 일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사건을 함께 놓으면 ‘문자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일수록 속뜻이 필요한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됩니다.

 

결국 이번 설교의 가장 귀한 부분은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중심은 박요한 목사 자신이 앞부분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가나안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필요 없습니다.’ 이것을 끝까지 밀고 가면 설교 전체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무화과나무의 문제도 ‘하나님 없는 종교’이고, 성전의 문제도 ‘하나님 없는 종교적 외형’이며, 어린아이의 아름다움도 ‘엄마 없는 좋은 것을 원하지 않는 ’이고, 모세의 위대함도 ‘하나님 없는 가나안을 거절한 ’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절정 역시 ‘하나님 없는 응답’을 원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다시 읽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란 주님께 무엇이든 요구하면 무엇이든 얻어내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모든 생명과 선이 온다는 것을 인정하며, 주님 자신을 모든 선물보다 사랑하고, 사랑을 삶의 열매로 맺어 가는 신앙입니다.’ 그렇게 읽을 때 무화과나무의 ‘열매’, 어린아이의 ‘엄마’, 모세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믿고 구하는 기도’가 한 줄로 이어집니다. 잎만 무성한 종교에서 열매 맺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사랑하는 데서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데로,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어른의 proprium에서 모든 선을 주님에게서 받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설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밝게 비추어 줄 수 있는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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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고, 수도학교와 잇사갈 성경대학, 봉쇄학당, 수도 영성가 연구, 방문객 교육과 부흥회 사역 등을 소개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수도원 운동의 방향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은 하나의 수도 일화라기보다 강문호 수도사가 생각하는 ‘개신교 수도원 운동의 자기소개와 비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도 개별 사실 하나하나를 따지는 것보다 이 세 축이 과연 사람을 어디로 이끌려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영상은 은퇴를 앞두고 ‘후반전이 아름답게 달라’고 기도했다는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은퇴를 인생의 퇴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은 생애를 어떻게 주님께 드릴 것인가를 묻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의 영적 성장은 특정 나이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평생 계속되며, 이 세상에서 시작된 변화는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노년은 단순히 지난 업적을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을 더욱 내려놓고 주님께로 향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반전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소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아름다운 후반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나 더 던집니다. 많은 일을 이루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아니면 사람이 점점 더 주님 앞에서 작아지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물론 둘은 서로 배척되지 않습니다. 수도원을 세울 수도 있고, 학교를 만들 수도 있고, 수백 권의 자료를 집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외적 성취가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었는가?’보다 ‘ 일을 하는 동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얼마나 주님의 질서 아래 놓였는가?’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원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많은 수도원을 방문하고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답사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도원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이 깨졌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목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개신교 전통 밖으로 나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을 직접 보고 배우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 없는 것이 다른 전통에는 있을 있다’는 열린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개신교가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 제도와 상당히 멀어진 것을 생각하면, 오래된 기독교 전통 안에서 기도와 절제, 침묵, 공동생활, 노동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려는 시도 자체는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외적 수도생활과 내적 거듭남을 구별합니다. 수도원을 많이 방문했다고 수도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니며, 수도복을 입었다고 수도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봉쇄된 공간에 오래 머물렀다고 내면의 자기 사랑까지 봉쇄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의 접촉을 줄이면 이전에는 외부 활동에 가려져 있던 proprium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의 시험은 ‘얼마나 세상을 떠났는가?’가 아니라 ‘세상을 떠난 자리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떠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영상에 나오는 새벽 4시의 기도실 이야기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연 속 작은 기도실에 들어가 예수의 형상 아래 머리를 대고 ‘오늘 안수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모습에는 주님께 의탁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어떤 형상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게 하는 외적 도움으로 사용된다면 그 자체를 굳이 문제 삼을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 아니라 그 순간 마음이 향하는 대상입니다. 더 나아가 아침에 주님의 인도를 구했다면 하루 동안 실제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님의 계명 아래 두려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실에서의 ‘주님, 저를 지켜 주세요’가 생활 속에서는 ‘주님,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게 주세요’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수도학교 이야기는 강문호 수도사의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개신교 안에 수도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고, 그 가운데 일부가 실제 수도사의 길을 택하고, 다시 일부가 수도원을 세우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도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조건 긍정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도제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기도와 자기 성찰, 절제와 쓰임을 훈련하는 환경이 될 수는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제도 자체가 영적 우월감이나 특별한 신분의식으로 변한다면 오히려 거듭남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제도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 안에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따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을 행할 때 거룩함이 형성됩니다.

 

성경 연구에 대한 열정도 이번 영상의 큰 축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한번 성경만 깊이 파보자’, ‘오직 예수 공부만 보자’며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수백 권의 소책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경이 놀라울 정도로 깊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고백합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은 인간이 그 문자만 읽어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천국과 연결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다’는 발견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안다는 것은 희귀한 자료를 많이 알고, 고대 문헌을 많이 읽고, 사람들이 처음 듣는 정보를 많이 찾아낸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깊이는 궁극적으로 ‘얼마나 놀라운 정보를 발견했는가?’에 있지 않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 알고,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그토록 방대하게 펼쳐 보인 목적도 지적 경탄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악할 만큼 새로운 성경 지식’은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 지식이 사람의 생명을 바꾸지 못한다면 아직 말씀은 머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강문호 수도사가 마지막 때를 대비하는 수도원 영성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로 정리하는 대목입니다. ‘ 대신 청빈, 음란 대신 거룩, 배교 대신 오직 예수’라는 구도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렬하고 기억하기 쉬운 표어입니다. 그리고 각각에는 분명 기독교적 가치가 있습니다. 재물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고, 성적 욕망의 무질서를 다스리며, 주님에게서 떠나지 않으려는 삶은 모두 중요한 영적 과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세 가지를 조금 다르게 깊이 들어갑니다. 먼저 ‘청빈’의 반대는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돈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물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는 사랑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그것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선한 쓰임에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 재산이 없어도 돈을 몹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청빈보다 더 깊은 것은 ‘소유에 대한 내적 자유’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 힘과 내 영광의 증거로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맡겨진 것으로 보며 쓰임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음란 대신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적 절제는 중요하지만, 거룩은 단순한 금욕보다 훨씬 큽니다. 외적 행동을 억제했다고 내적 욕망까지 정돈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애의 질서는 오히려 매우 중요하며, 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거룩은 아닙니다. 거룩은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도자의 독신도 그 자체가 더 높은 거룩함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욕망을 중심에 놓지 않고 사랑을 주님의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배교 대신 오직 예수’는 세 표어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를 반복한다고 주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씀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은 결국 삶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의 가장 깊은 형태는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내 지식이 아니라 주님, 내 업적이 아니라 주님, 내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주님, 내가 세운 제도와 내가 만든 책과 내가 이룬 결과가 아니라 그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신 주님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영상에는 ‘내가 방문했다’, ‘내가 수도원을 세웠다’, ‘내가 자료를 만들었다’, ‘내가 학교를 세웠다’는 식의 개인적 경험과 성취가 자연스럽게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 자체를 곧바로 자기 자랑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는 영상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한 일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을 바라보게 합니다. ‘ 모든 일을 누가 이루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할수록 더욱 깊어져야 할 고백은 ‘내가 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셨으며, 나는 쓰임을 위해 사용된 도구일 뿐이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처음의 ‘후반전이 아름답게 달라’는 기도와 마지막의 ‘오직 예수’는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후반전은 앞선 전반전보다 더 많은 업적을 쌓는 후반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참으로 아름다운 후반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이야기는 조금씩 작아지고 주님 이야기가 점점 커지는 후반전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내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가 중요했다면, 영적 노년에는 ‘주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셨으며, 나는 얼마나 그분 앞에서 비워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수도원의 존재 이유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수도원은 세상에서 도망치는 장소도 아니고, 특별히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장소도 아닐 것입니다. 수도원이 참으로 교회를 섬기려 한다면, 그곳은 사람이 조용히 자기 proprium을 직면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내려놓으며, 다시 세상 속 이웃을 더 잘 사랑하고 섬기도록 준비되는 장소여야 합니다. 외적 침묵이 내적 침묵으로, 외적 청빈이 내적 자유로, 외적 독신과 절제가 사랑의 질서로, 성경 연구가 삶의 거듭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제시된 ‘청빈, 거룩, 오직 예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다듬어 다시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소유하지 않는 ’보다 ‘소유에 사로잡히지 않는 ’, ‘욕망을 억누르는 ’보다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 그리고 ‘오직 예수라고 말하는 ’보다 ‘자기 대신 주님이 중심이 되게 하는 ’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진다면 수도원은 교회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귀한 영적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말은 처음에 나왔던 ‘후반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인생의 후반전은 단순한 제2의 성공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점점 더 ‘’에게서 ‘주님’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시간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가 크게 보이고, 내가 얼마나 알려졌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주님의 선한 쓰임에 사용되었는지가 중요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수도의 열매는 수도원 숫자도, 제자의 숫자도, 책의 숫자도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 사람의 말과 표정과 삶에서 ‘ 사람’보다 ‘주님’이 더 잘 보이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직 예수’라는 고백이 마침내 한 인간 안에서 이루어 낸 가장 아름다운 후반전일 것입니다.

 

 

 

SY.87, 강문호 수도사, ‘수도학교 이야기’ (20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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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3,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 이비론 수도원,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 (2020010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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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3

기름(fat) 천적인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희생 제사에서 여러 종류의 기름으로 표상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간을 덮는 기름 또는 간에 붙은 꺼풀,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과 내장 위의 기름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것들은 거룩한 것이었으며 제단 위에서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29:13, 22; 3:3-4, 14; 4:8-9, 19, 26, 31, 35; 8:16, 25) Byfat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is also of the Lord. The celestial is all that which is of love. Faith also is celestial when it is from love.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 good of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se were represented by the various kinds of fat in the sacrifices, and distinctively by that which covered the liver, or the caul; by the fat upon the kidneys; by the fat covering the intestines, and upon the intestines; which were holy, and were offered up as burnt offerings upon the altar. (Exod. 29:13, 22; Lev. 3:3, 4, 14; 4:89, 19, 26, 31, 35; 8:16, 25)

 

13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위에 있는 꺼풀과 콩팥과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2 너는 숫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그것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위의 꺼풀과 콩팥과 그것들 위의 기름과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지라 이는 위임식의 숫양이라 (29:13, 22)

 

3그는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3:3-4, 14)

 

8 속죄 제물이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9그것의 기름은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르되, 26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31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35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같이 내어 제단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4:8-9, 19, 26, 31, 35)

 

16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꺼풀과 콩팥과 기름을 가져다가 모세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5그가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꺼풀과 콩팥과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를 떼어내고 (8:16, 25)

 

그러므로 이것들을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이라 했습니다. (3:14, 16) They were therefore called the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 (Lev. 3:14, 16)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3:14, 16)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은 짐승의 어떤 기름도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었으며, 이것을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 하였습니다. (3:17; 7:23, 25) For the same reason the Jewish people were forbidden to eat any of the fat of the beasts by what is called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 (Lev. 3:17; 7:23, 25)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3:17)

 

2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것이요, 25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7:23, 25)

 

이유는 교회가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 그러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This was because that church was such that it did not even acknowledge internal, much less celestial things.

 

[2] ‘기름(fat) 천적인 것들과 체어리티의 선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에서도 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fat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the goods of charity, is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55:2) Wherefore do ye weigh silver for that which is not bread, and your labor for that which satisfieth not? Attend ye diligently unto me, and eat ye that which is good, and let your soul delight itself in fatness. (Isa. 55:2)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eremiah: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복으로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14) I will fill the soul of the priests with fatness, and my people shall be satiated with my good, (Jer. 31:14)

 

여기서 기름진 문자 그대로의 기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적·영적 선을 뜻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시편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re it is very evident that fatness is not mea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So in David:

 

8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9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36:8-9) They are filled with the fatness of thy house, and thou makest them drink of the river of thy deliciousnesses. For with thee is the fountain of lives; in thy light we see light. (Ps. 36:89)

 

여기서 살진 (fatness) 생명의 원천(fountain of lives)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하고, 복락의 강물(river of deliciousnesses) (light)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erefatnessand thefountain of livessignify the celestial, which is of love; and theriver of deliciousnesses,andlight,the spiritual, which is of faith from love. Again in David: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3:5) My soul shall be satiated with marrow and fatness, and my mouth shall praise thee with lips of songs, (Ps. 63:5)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름진 (fat)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 입술(lips of songs) 영적인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영혼을 만족하게 한다고 하였으므로 천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같은 이유로 땅의 처음 것인 열매들도 기름(fat)이라고 합니다. (18:12) where in like mannerfatdenotes the celestial, andlips of songsthe spiritual. That it is what is celestial is very evident, because it will satiate the soul. For the same reason the first fruits, which were the firstborn of the earth, are calledfat.” (Num. 18: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소산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18:12)

 

[3]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모세가 백성 앞에서 읊은 노래에서는 그것들을 다음과 같이 총괄적으로 묘사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of innumerable genera, and still more innumerable species, they are described in general in the song which Moses recited before the people: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32:14) Butter of kine, and milk of the flock, with fat of lambs and of rams, the sons of Bashan, and of goats, with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ou shalt drink the blood of the grape, unmixed. (Deut. 32:14)

 

이러한 표현들의 의미는 속뜻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없습니다. 속뜻이 없다면 소의 엉긴 (butter of kine), 양의 (milk of sheep), 어린 양의 기름(fat of lambs), 숫양과 염소의 기름(fat of rams and goats), 바산의 아들들(sons of Bashan), 밀의 콩팥의 기름(fat of the kidneys of wheat), 포도의 (blood of the grape) 같은 표현들은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표현 하나하나는 천적인 것들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의미합니다.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know the signification of these expression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Without the internal sense, such expressions as thebutter of kine,themilk of sheep,thefat of lambs,thefat of rams and goats,thesons of Bashan,thefat of the kidneys of wheat,and theblood of the grape,would be words and nothing more, and yet they all and each signify genera and species of celestial things.

 

해설

AC.353은 앞의 AC.350에서 아벨이 드린 기름진 천적인 자체이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다고 한 내용을 자세히 풉니다. 첫 문장부터 핵심은 분명합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단순히 풍요롭고 좋은 것을 막연하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속한 천적인 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앞 AC.352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라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의 생명도 인간 자신의 선함이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에 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매우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이것은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살펴본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리해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낮추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 신앙 역시 천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이어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사랑,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선은 서로 경쟁하는 별개의 종교 요소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희생 제사에서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특별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29장과 레3, 4, 8장에는 간을 덮는 기름,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 등이 매우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문자만 보면 왜 이런 신체 부위의 기름까지 세세하게 구별하는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 기름들이 천적인 것과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했기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번호만을 근거로 간의 기름은 정확히 어떤 사랑이고 콩팥의 기름은 또 어떤 선이라고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범위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그것들이 거룩하여 제단 위에 드려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기름들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이라고 불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연적인 음식이나 기름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인 제사가 내적인 사랑과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AC.349에서 이미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 위 기름의 거룩함은 물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천적인 사랑과 선에 있습니다. 자연적인 제물은 그 내적 실재를 담아 보여 주는 표상적 그릇입니다.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이 기름을 먹지 못하도록 한 규례도 설명됩니다. AC.353은 그 이유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 교회가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성격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유대인 개인의 내면을 일률적으로 단정하는 말로 확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표상교회로서의 그 교회의 일반적 성격과 기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내적인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기름을 인간이 자기 것으로 취하는 대신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한 규례는, 표상적으로 보아 천적인 선이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다는 질서를 보존합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제사법에서 선지서와 시편으로 이동하여 기름진 이 천적인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55:2에서는 기름진 으로 영혼이 즐거움을 얻고, 31:14에서는 제사장의 마음이 기름으로 흡족해지는 것이 주님의 선으로 백성이 만족하는 것과 나란히 놓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문자적인 지방이나 풍성한 음식만을 뜻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연이어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별개의 교리를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 안에서 기름기름진 이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영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을 하나의 논증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36:8-9은 그 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 생명의 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 강물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끊어진 두 세계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비롯되는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주의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는 말씀은 이 문맥에서 인간의 신앙과 진리의 빛이 독립적인 자기 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는 AC.353 첫머리의 선언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63:5에서도 기름진 은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 입술은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민18:12에서는 땅의 첫 열매까지 기름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5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처음 난 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의미했고, 여기서는 기름이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떼의 처음 것과 기름진 을 드렸다는 짧은 표현 안에는 두 가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거룩한 것도 주님께 속하고, 그 거룩함 안에 있는 사랑의 선과 생명도 주님께 속합니다. 아벨의 예배는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낸 선을 주님께 자랑스럽게 내놓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예배입니다.

 

[3]에서 신32:14가 인용되면서 AC.353은 한 단계 더 넓은 원리를 밝힙니다.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에는 소의 엉긴 ’, ‘양의 ’, ‘어린 양의 기름’, ‘바산에서 숫양과 염소’, ‘밀의 콩팥의 기름’, ‘포도의 와 같이 매우 다양한 자연적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각각이 천적인 것들의 서로 다른 종류와 세부 종류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AC.353은 각각이 정확히 어느 종류의 천적 선을 뜻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의 엉긴 젖은 이것’, ‘양의 젖은 저것’, ‘바산의 숫양은 이것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상응표를 더 만들어 붙이는 것은 스베덴보리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이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붙들어야 할 더 큰 원리는 천적인 사랑과 선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입니다. 우리는 사랑’, ‘’, ‘체어리티라는 말을 하나의 단순한 성질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실제 삶에서 무수한 형태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을 위로하는 선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선, 어린아이를 돌보는 선과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선, 진리를 가르치는 선과 말없이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선은 모두 선에 속하면서도 그 질과 쓰임은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AC.353이 직접 각각의 사례를 열거한 것은 아니지만, ‘천적인 것들의 헤아릴 없는 종류와 세부 종류라는 원리를 우리의 삶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예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획일적인 하나의 행동 양식이 아니라 각 사람과 공동체의 상태와 쓰임에 따라 무수한 형태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방법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기름 = 사랑’, ‘ = 신앙과 같은 기본적인 대응을 아는 것은 유익하지만, 상응을 단순한 암호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53 자체가 기름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천적인 것에는 헤아릴 수 없는 종류와 세부 종류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연물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다른 표상들과 함께, 어떤 교회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상응은 자연물에 영적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무수한 질서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자연계의 형상 안에 표현되는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신32:14의 표현들을 두고 속뜻이 없다면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밀의 콩팥의 기름이나 포도의 와 같은 표현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러한 낯선 세부조차 말씀 안에서 무의미하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천적인 실재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문자적 의미가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문자 안에 속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문자적 형상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담긴 천국의 실재를 열어 보여 줍니다.

 

다시 창4:4의 아벨에게 돌아오면 이 긴 설명의 목적이 선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 떼의 처음 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며, ‘기름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선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은 내가 좋은 것을 만들어 주님께 드린다는 인간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사랑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를 나타냅니다. 가인에게도 소산과 제물이 있었지만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와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에는 체어리티와 사랑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인정이 있습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자연적인 재료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353의 핵심을 단지 기름은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상응 하나로만 기억해서는 부족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천적인 것이 사랑에 속한 모든 이며, 그 사랑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신앙도 사랑에서 비롯될 때 살아 있고 천적이며,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 역시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과 예배와 행위 안에 기름이 있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예배를 충실히 드리며 많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의 사랑이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살아 움직이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은 바로 그 살아 있는 사랑의 생명을 보여 줍니다.

 

 

 

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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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이 오직 주님께만 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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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경험한 ‘손님 대접의 영성’을 소개하면서, ‘주는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도 잊지 말라’는 메시지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과 조금 다른 의미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수도자의 극단적인 금욕이나 기이한 일화보다 ‘타인을 향하여 열리는 ’이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토스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는 ‘마리아의 정원’, 여성 출입 금지의 기원, 황후의 방문 등에 관한 여러 전승이 등장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동방정교회의 오랜 수도 전통과 신심을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전승의 신성함이나 기적성 자체가 영적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장소가 천 년 이상 보존되었고, 수많은 성물과 고문서를 간직하고 있으며, 수많은 수도자가 그곳에서 기도했다는 사실은 존중할 만하지만, 그것이 곧 그 장소 자체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함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며, 사람이나 장소, 그리고 물건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나타내는 만큼만 거룩함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정원’이라는 전승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 후반부의 ‘손님 대접’ 이야기가 오히려 이번 영상의 영적 중심에 가깝습니다. 가뭄과 흉년 때문에 수도원 자신들의 먹을 것조차 부족해지자 수도사들은 방문객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던 관행을 중단하기로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결정입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방문객이 찾아와 ‘ 가지를 잊지 말라. 주는 것과 받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을 믿으라’는 취지의 말을 남깁니다. 이후 수도원은 다시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에게 음식을 나누었고, 그것이 이비론 수도원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매우 아름답게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삶은 근본적으로 ‘받아서 주는 ’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 모든 사랑과 생명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기 위해 받는 존재가 아니라, 받아서 다시 이웃에게 흘려보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의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은 단순한 자선의 격언보다 훨씬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받음’과 ‘’은 서로 반대되는 두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순환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그렇게 흘려보내는 가운데 다시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주의점도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 남에게 하나를 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열을 주신다’는 식의 보상 원리로 이해하면 금세 본래 의미에서 벗어납니다. 주는 행위가 더 큰 물질적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겉으로는 체어리티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자기 사랑이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었으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갚으실 것이다’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부터가 주님에게서 것이므로 필요한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가 더 깊은 질서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주시는 것도 반드시 돈이나 재산의 증가를 뜻하지 않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볼 수 있는 눈, 더 깊은 평안과 지혜,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훨씬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손님이 오지 않는 집에는 천사도 오지 않는다’는 수도원의 말도 문자 그대로 어떤 신비한 법칙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가리키는 정신은 아름답습니다.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식탁을 열고, 자기에게 속한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위는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서 밖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말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운동이라면, 체어리티는 받은 선을 이웃에게 유용하게 흘려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환대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잘 행해질 때 ‘use’, 곧 쓰임의 한 형태가 됩니다.

 

영상에서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 천사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연결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읽으면 좋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 앞을 지나가는 이들을 보고 먼저 달려나가 맞이하고, 물과 음식과 쉼을 제공합니다. 속뜻에서 더 깊은 의미들이 있겠지만, 겉으로도 이 장면에는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있습니다. ‘먼저 대접하고, 나중에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상대가 천사인 줄 알았기 때문에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환대했습니다. 바로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가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한 사랑하는 ’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따라 필요한 쓰임을 행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도원이라는 장소를 넘어 우리 일상으로 곧바로 이어집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아도 식탁 하나를 여는 것이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고, 어려운 사람에게 시간과 물질을 내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으며, 자기 능력과 지식을 필요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생활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하게 보는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나 세상에서 멀리 떨어졌는가?’보다 ‘얼마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선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영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천 년 된 박물관도, 아토스의 신비로운 전승도, 여성의 출입이 제한된 독특한 수도 전통도 아닙니다. 오히려 굶주림이 닥쳤을 때 닫으려 했던 ‘창고를 다시 여는 장면’입니다. 수도원의 거룩함이 박물관 속 오래된 성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에게 내어주는 한 조각의 빵에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 성물은 과거의 거룩한 삶을 기억하게 할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을 살아 있게 합니다.

 

다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스베덴보리는 ‘주는 ’ 자체도 분별 없이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실제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살피는 사랑입니다. 악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니며, 상대의 잘못을 강화하는 도움 역시 참된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환대와 나눔에는 사랑과 함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사이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아토스의 웅장한 역사와 희귀한 보물들을 한참 이야기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끝까지 따라가 보면 결국 가장 빛나는 보물은 다른 데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조금 더 깊게 바꾸어 읽어볼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았음을 잊지 말고, 받은 것을 이웃에게 흘려보내기를 잊지 말라.’ 그렇게 읽는 순간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환대 이야기는 특정 수도원의 미담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일상 전체를 비추는 말이 됩니다.

 

결국 참된 수도는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외적 고요가 내적 고요를 도울 수 있고, 외적 청빈이 자기 사랑을 돌아보게 할 수도 있으며, 수도원의 규율과 전통이 영적 훈련에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기 것으로 가두지 않고, 삶의 쓰임으로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받은 것은 것이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나를 지나 다른 사람에게까지 흘러가도록 받은 것입니다.’ 그 흐름이 막히지 않는 곳,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그곳에서 천국의 질서가 시작됩니다.

 

 

 

SY.84, 강문호 수도사, 수도원 7년, ‘청빈·거룩·오직 예수’를 다시 생각하다 (2026082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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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1,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의 티혼 수도사, 금욕과 거듭남’ (20200105)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한 러시아 수도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에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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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2

떼의 처음 (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새끼’)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표상교회에서 처음 , 장자에 관한 규례에서 분명합니다. 처음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firstborn)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입니다.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십니다. 이것은 고대교회들에서 사람과 짐승의 처음 것을 여호와께 거룩한 것으로 드림으로써 표상되었습니다(13:2, 12, 15). That thefirstlings of the flocksignify that which is of the Lord alone is evident from the firstlings or firstborn in the representative church, which were all holy, because they had relation to the Lord, who alone is thefirstborn.”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re thefirstborn.” All love is of the Lord, and not one whit of it is of man, therefore the Lord alone is thefirstborn.” This was represented in the ancient churches by the firstborn of man and of beast being sacred to Jehovah; (Exod. 13:2, 12, 15)

 

2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모든 것은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것이니라 하시니라, 12너는 태에서 처음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것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5그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것까지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모든 수컷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아들 중에 모든 처음 자를 대속하리니 (13:2, 12, 15)

 

또한 속뜻으로 사랑을 의미하는 레위 지파가, 비록 속뜻으로 신앙을 의미하는 르우벤과 시므온보다 나중에 태어났지만,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받아들여지고 제사장직을 맡게 것으로도 표상되었습니다(3:40-45; 8:14-20). and by the tribe of Levi, which in the internal sense signifies lovethough Levi was born after Reuben and Simeon who in the internal sense signify faithbeing accepted instead of all the firstborn, and constituting the priesthood. (Num. 3:4045; 8:1420)

 

4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하여 명수를 기록하라 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2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계수하니 43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처음 태어난 남자의 총계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 4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5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3:40-45)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자라 이스라엘 자손 모든 초태생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8:14-20)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에 관하여 모든 것의 장자이심을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f the Lord as the firstborn of all, with respect to his human essence, it is thus written in David:

 

26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내가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89:26-27) He shall call me, my Father, my God, and the rock of my salvation. I will also make him my firstborn, high above the kings of the earth. (Ps. 89:2627)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ohn: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5) Jesus Christ the firstborn of the dead, and the prince of the kings of the earth. (Rev. 1:5)

 

예배에서 처음 것들은 주님을 의미하고, 교회의 처음 것은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Observe that the firstborn of worship signify the Lord, and the firstborn of the church, faith.

 

해설

AC.352는 앞의 AC.350에서 떼의 처음 이 왜 오직 주님께만 속한 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처음 난 것, 곧 장자가 거룩한 까닭은 자연적인 출생 순서에서 첫째라는 사실 자체에 어떤 신성함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표상교회에서 처음 난 것은 궁극적으로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에 거룩했습니다. 그래서 출13:2, 12, 15에서는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하여 돌리라고 합니다. ‘이는 것이니라라는 말이 반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의 거룩함은 인간이나 짐승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실재, 곧 모든 거룩함과 생명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번호의 중심 문장은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입니다라는 말과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거기서 비롯된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 신앙은 사랑과 독립된 별개의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았으며, 그러므로 신앙은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을 통하여 살펴본 문제와도 정확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존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을 인간에게 실제 사랑이나 체어리티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선을 행합니다. 다만 그 사랑의 최초 근원과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사랑과 선을 끊임없이 주시며,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마치 자기에게서 사랑하고 행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참된 체어리티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수동성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내가 이만큼 사랑했고 이만큼 선을 행했다는 자기 의보다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라는 인정이 깊어지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벨이 떼의 처음 을 드렸다는 말도 단순히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도덕적 교훈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그가 드린 처음 난 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안의 참된 사랑과 선을 자기 고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주신 것을 우리가 소유했다가 다시 주님께 돌려드린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선을 실제로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이 처음부터 주님께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것은 여호와의 이라는 표상이 가르치는 중요한 내적 질서입니다.

 

AC.352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레위 지파에 관한 설명입니다. 자연적인 출생 순서에서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이고, 그다음이 시므온이며, 레위는 셋째입니다. 그런데 속뜻에서는 레위가 사랑을, 르우벤과 시므온이 신앙에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주님께서는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시고 그들에게 성막 봉사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3:40-45; 8:14-20). AC.352가 이 말씀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출생 순서와 영적인 내적 질서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내적인 생명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먼저다라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언제 사랑을 느끼고 언제 신앙의 진리를 배우는가 하는 시간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중요한 길이 됩니다. 그러나 진리가 먼저 의식에 들어온다고 해서 진리가 선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생명적 질서에서는 선과 사랑이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이것이 르우벤과 시므온보다 나중에 태어난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는 표상을 통하여 드러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 순서를 하나의 시간 공식으로 섞기보다, ‘외적으로 먼저 나타나는 내적으로 생명을 주는 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2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르우벤이 신앙을, 시므온이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가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서를 신앙 행위 체어리티라는 자동적인 세 단계 공식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AC.35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이 먼저이지만, 사랑을 의미하는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참된 신앙으로 살아 있으려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서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만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의 진리는 그 사랑이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알고 바르게 행하도록 섬깁니다.

 

이제 AC.352 마지막의 중요한 주의 사항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배에서 처음 것들은 주님을 의미하고, 교회의 처음 것은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응을 고정된 암호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장자라는 말이 나온다고 언제나 기계적으로 하나의 의미만 대입할 수 없습니다.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거룩하게 드리는 표상에서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주님을 가리킵니다. 반면 교회에서 생겨나는 처음 이라는 측면에서는 신앙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AC.338에서 가인을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신앙이라고 한 것도 이 두 번째 의미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처음 난 것이 신앙이라고 해서 신앙이 사랑보다 독립적이거나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그 오해가 가인의 길입니다.

 

89:26-27과 계1:5의 인용은 이 모든 처음 의 표상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주님의 인성에 관하여 그분이 모든 것의 장자이심을 말합니다. 시편은 내가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라고 하고,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분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 말씀은 각각 별도의 장자론을 전개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니라,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이 왜 궁극적으로 주님을 표상하는지를 확증합니다. 따라서 출13, 3장과 8, 89, 1장의 여러 인용은 모두 처음 것의 거룩함은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하나의 중심을 향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52는 가인과 아벨의 대조를 한층 더 깊게 합니다. 가인의 길은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사랑과 분리하여 그 자체로 독립시키는 길이었습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가 드리는 것은 떼의 처음 ’, 곧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에는 안에 있는 참된 사랑과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내적 인정이 들어 있습니다. 가인이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붙들었다면, 아벨의 예배는 선과 사랑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질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두 제물의 차이는 단지 체어리티가 있느냐 없느냐뿐 아니라, 영적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AC 공부와 신앙생활에도 매우 직접적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신앙과 체어리티, 퍼셉션과 거듭남의 질서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붙들 위험에 놓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알수록 자신의 선함과 지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모든 참된 사랑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된다면 그 지식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참된 지식은 인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합니다.

 

결국 AC.352의 중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 처음 것이 거룩한가?그것이 자연적인 첫째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인가?모든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시며 참된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 장자가 아닌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는가?자연적인 출생 순서보다 사랑과 신앙의 내적 질서가 더 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참으로 장자이신가?모든 사랑과 선과 거룩함의 처음과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을 드리는 장면은 결국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선의 생명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주님께 인정하는 예배를 보여 줍니다. AC.352가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도 여기에 있습니다. ‘ 안에서 발견하는 선과 사랑의 근원을 나는 누구에게 돌리고 있는가?

 

 

 

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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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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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1

아벨(Abel)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뜻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ThatAbelsignifies charity has been shown before. By charity is meant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for he who loves his neighbor as himself is also compassionate toward him in his sufferings, as toward himself.

 

해설

AC.351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지금까지 계속 아벨이라고 불러 온 체어리티가 실제로 어떤 사랑인지를 매우 따뜻하고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여기서는 그러면 체어리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자비가 무엇인지를 다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신학 용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선이 나와 무관하지 않게 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체어리티를 단순히 선행이라고 번역하거나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행은 체어리티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이지만 체어리티 자체는 그보다 더 안쪽에 있습니다. 바로 앞 AC.348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가 나올 수 있으며 그러한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까지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날 때 살아 있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와 선행은 분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완전히 같은 말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선한 행위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사랑이고, 행위는 그 사랑이 자연계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AC.351은 여기에 자비(mercy)를 곧바로 연결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다른 사람의 모든 감정과 고통을 문자 그대로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성격과 감수성은 다르며,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동일하게 체험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일이니 나와 상관없다고 외면하지 않고 그의 어려움과 선을 자신의 관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단순한 감상이나 순간적인 연민과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마음이 아픈 것은 귀한 출발일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가?를 묻게 합니다. 때로는 위로하고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자비이고,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자비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길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한 체어리티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사랑도 아니고, 고통을 없애 주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진리는 무엇이 이웃에게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도록 하고, 체어리티는 그 선을 실제로 바라며 행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은 여기에서도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AC.348-351의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가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AC.350에서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51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체어리티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것을 체어리티 행위 예배라는 기계적인 단계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대조도 훨씬 실제적으로 보게 합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단지 아벨=이라는 추상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아벨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돌아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속뜻도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소멸시키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라는 신학 용어 하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교회의 생명입니다. 교리가 남고 신앙 고백이 남고 예배까지 남아 있으면서도 이웃의 고통과 선에는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감정을 많이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체어리티가 없다고 할 수 없고, 눈물을 잘 흘리거나 공감을 잘 표현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깊은 체어리티 안에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AC.351의 핵심은 감정 표현의 정도가 아니라 이웃의 고통과 선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랑입니다. 조용히 필요한 일을 해 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더 큰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단호하게 돕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외적인 모습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원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350에서 떼의 처음 이 의미하는 거룩한 것도, ‘기름진 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도 오직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마음을 짜내어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물리치는 거듭남의 과정을 통하여 조금씩 이웃의 선을 자기 일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했을 때에도 나는 원래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자기에게 공로를 돌리기보다 그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 체어리티의 질서와도 맞습니다.

 

AC.351은 목회와 교회의 삶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실제적인 기준을 줍니다. 교회는 진리를 가르쳐야 하고 바른 교리를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람을 이웃의 고통에 더 무감각하게 만들고,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쉽게 멸시하게 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형편보다 자기 입장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 더 몰두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말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중요하지 않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참된 사랑은 이웃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지를 알아야 하며, 그 분별에는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특히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만 적용하기 쉽습니다. 가족이나 친한 사람의 아픔에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이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의 고통에는 훨씬 쉽게 무관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연적 호감과 같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뜻도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방을 하나의 영혼을 가진 이웃으로 보고 그의 참된 선을 바라는 데까지 우리를 이끕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체어리티는 자연적인 인정이나 친밀감을 넘어 영적인 사랑이 됩니다.

 

결국 AC.351아벨이라는 이름에 담긴 체어리티를 아주 실제적인 언어로 풀어 줍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감정적 연민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며, 진리의 인도를 받아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위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은 두 신학 개념을 올바르게 배열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마침내 다른 사람의 선과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AC.351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내게 이웃의 고통은 여전히 남의 일인가, 아니면 그의 참된 선이 나에게도 중요해지고 있는가?입니다.

 

 

 

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이 오직 주님께만 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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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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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4:4)

 

AC.350

여기서 아벨(Abel)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떼의 처음 (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새끼’)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기름진 (fat, 기름’) 천적인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음을 뜻합니다. ByAbelhere as before is signified charity; and by thefirstlings of the flockis signified that which is holy, which is of the Lord alone; byfat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also is of the Lord; and by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 were well-pleasing to the Lord.

 

해설

AC.350은 창4:4의 아벨의 제물을 개괄하면서 바로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 정반대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AC.346-349에서는 가인의 땅의 소산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행위이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 역시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예배가 아닙니다. 이제 아벨의 제물에서는 그 반대편이 나타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 떼의 처음 은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 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은 단순히 가인의 것보다 더 좋은 물질을 드린 제사가 아니라 체어리티에 기초한 살아 있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먼저 아벨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을 단순히 착한 사람’, 가인을 나쁜 사람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그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두 형제의 제물은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두 개인이 서로 다른 물건을 하나님께 바친 사건의 차원을 넘어, 서로 다른 내적 근원에서 나오는 두 종류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가인의 예배에는 외적 행위와 제물이 있었지만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었고, 아벨의 예배는 체어리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곡식과 양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거룩한가가 아니라 그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생명이 무엇인가입니다.

 

떼의 처음 에서 스베덴보리는 처음 이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곧바로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짧은 말은 AC.350 전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참된 선과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다면 그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거룩함을 생산하여 그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면서, 그 선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처음 을 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드러내는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거룩함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선을 행하면서 내가 선하다고 자기에게 돌리는 것과,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기름진 천적인 자체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다시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이라고 강조합니다. ‘처음 의 거룩함도 주님의 것이고 기름진 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이 문맥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 속한 선이라는 중심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그 기름진 것을 드렸다는 것은 단순히 가장 좋은 부분을 골라 바쳤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배의 내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함과 사랑의 선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도 자연적인 제물의 품질보다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이 중심입니다.

 

이것은 AC.349의 핵심 원리와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AC.350의 아벨의 제물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외적으로는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기름진 것을 드리지만, 그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체어리티와 천적인 선이며 그 모든 것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를 서로 대립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고 표현하는 그릇이며, 내적인 것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때 그 외적인 예배 역시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문제는 외적인 예배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외적인 것 안에 무엇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도 이 질서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어떤 종류의 제물을 보시고 마음이 바뀌어 아벨에게는 호의를 보이시고 가인에게는 호의를 거두셨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은 변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주님 쪽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 쪽의 받아들임에 있습니다.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예배라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생명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원문의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예배를 드린 뒤 별도로 추가하는 선행 하나가 아닙니다.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토대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웃에게 착하게만 하면 예배나 신앙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체어리티 자체도 주님에게서 오며, 진리는 무엇이 참된 선이고 참된 이웃 사랑인지를 가르칩니다.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결합되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 안에서 표현될 때 예배는 살아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50은 신앙을 체어리티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의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둘 다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으므로 차이는 예배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체어리티에 기초하여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창4:3-4를 곡식 제사와 동물 제사의 우열로 읽는 것은 속뜻의 중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곡식과 첫 열매 역시 거룩한 제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양고기를 곡식보다 좋아하셨기 때문에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물질에 있지 않고 그것들이 표상하는 내적 상태에 있습니다.

 

AC.348-350을 함께 놓으면 이 질서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을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습니다. AC.349에서는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50에서는 아벨의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합니다. 다만 이것을 체어리티 행위 예배라는 기계적인 세 단계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모두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과 살아 있는 행위와 살아 있는 예배의 생명은 서로 다른 세 근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예배에도 직접적인 자기 성찰의 기준이 됩니다. 예배의 형식과 말씀의 정확성, 기도와 찬송, 헌금과 봉사는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의와 경건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예배는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하기보다 그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게 하고, 자기 안의 악을 살펴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을 드린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무엇인가 특별한 종교적 행위를 더 많이 드린다는 뜻보다 내가 가진 선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고 그 선에 따라 살아가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50의 중심은 아벨의 제물을 주님께서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아벨이라는 개인을 편애하셨기 때문도 아니고, 양의 제물이 땅의 소산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 떼의 처음 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 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의 질서와 합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와 거룩함과 천적인 선의 근원 역시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를 가르는 가장 깊은 차이이며, 동시에 살아 있는 예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AC.350의 핵심입니다.

 

 

 

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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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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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9

제물(offering)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모든 소산의 열매, 그리고 처음 것을 드리는 것도 제물(offerings)이라 불렀으며, 그들의 예배는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모두 주님을 가리켰으므로, 이러한 제물들이 참된 예배를 상징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 죽은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표상교회의 모든 제물은 주님을 향한 예배를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앞으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각각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물(offerings)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선지서 전반에서도 분명합니다. 말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 by anofferingis meant worship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ves of the Jewish church, in which sacrifices of every kind, as well as the first fruits of the earth and of all its produce, and the oblation of the firstborn, were calledofferings,in which their worship consisted. And as they all represented heavenly things, and all had reference to the Lord, it must be obvious to everyone that true worship was signified by these offerings. For what is a representative without the thing it represents? Or what is an external religion without an internal but a kind of idol and a thing of death? The external has life from things internal, that is, through these from the Lord. From these considerations it is evident that all the offerings of a representative church signify the worship of the Lord; and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reat in particular in the following pages. That byofferingsin general is meant worship, is evident in the prophets throughout, as in Malachi: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3:2-4) Who shall abide the day of his coming? He shall sit as a refiner and purifier of silver, and he shall purify the sons of Levi, and purge them as gold and silver, and they shall offer unto Jehovah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Then shall the offering of Judah and of Jerusalem be pleasant unto Jehovah, as in the days of eternity, and as in ancient years. (Mal. 3:24)

 

공의로운 제물(offering in righteousness) 내적 제물이며, 레위 자손(sons of Levi),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드릴 것입니다. 옛날(days of eternity) 태고교회를, 고대(ancient years)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offering in righteousnessis an internal offering, which thesons of Levi,that is, holy worshipers, will offer. Thedays of eternity,signify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eancient years,the ancient church. In Ezekiel: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이 땅에 있어서 거룩한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20:40) In the mountain of my holiness, in the mountain of the height of Israel, there shall all the house of Israel, all that land, worship me; there will I accept them, and there will I require your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your offerings, in all your sanctifyings. (Ezek. 20:40)

 

예물(Oblations) 너희가 드리는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역시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행위를 뜻합니다. 스바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blationsand the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are likewise works sanctified by charity from the Lord. In Zephaniah:

 

내게 구하는 백성들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3:10) From beyond the rivers of Ethiopia my suppliants shall bring mine offering. (Zeph. 3:10)

 

구스(Ethiopia) 천적인 것들,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Ethiopiadenotes those who are in possession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love, charity, and the works of charity.

 

해설

AC.349AC.346에서 제시한 세 번째 표현, 곧 가인이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다는 말씀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제물이 그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고 간단히 밝혔습니다. 이제 AC.349는 왜 말씀에서 제물이 예배를 의미하는지를 유대교회의 표상들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그 모든 소산의 첫 열매,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도 모두 제물이라고 불렀고, 그러한 것들이 유대교회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외적인 제물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궁극적으로 모두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에 예배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제물이 예배인 까닭은 제단 위에 어떤 물질을 올려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거룩한 실재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표상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외적인 의식이 사랑과 체어리티와 주님을 향한 예배를 표상한다면, 그 안에는 실제로 그 내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질문은 더욱 강합니다.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 죽은 외에 무엇이겠습니까?이것은 바로 앞 AC.348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고, 이제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를 죽은 이라고 합니다. 행위든 예배든 외적인 형식 자체가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외적인 예배는 중요하지 않다거나 내적인 마음만 바르면 예배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외적인 것을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외적인 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349의 핵심 문장은 바로 이것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질서는 주님에게서 시작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사람의 내면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와 행위 가운데 표현될 때 외적인 것은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는 서로 경쟁하는 두 종류의 예배가 아니라,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표현되고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하나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가인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예배가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46에서 이미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보았고, AC.348에서는 가인의 땅의 소산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죽은 행위를 뜻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AC.349에서는 그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겉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외적 예배의 존재만으로 참된 예배가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외적인 것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이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3:2-4, 20:40, 3:10의 인용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여러 방향에서 뒷받침합니다. 말라기의 공의로운 제물은 스베덴보리에게 내적 제물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드리는 레위 자손은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며, ‘옛날은 태고교회, ‘고대는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제사 형식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내적 본질입니다. 특히 레위가 등장하는 것은 앞의 AC.34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했고 그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와 체어리티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외적인 의식의 정교함이 예배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그 안에 있을 때 예배가 살아 있게 됩니다.

 

20:40은 이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물 열매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행위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AC.348AC.349를 연결하는 중요한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AC.348에서는 살아 있는 열매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했고, 이제 AC.349에서는 그 체어리티의 행위가 다시 주님으로 말미암아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인간 자신의 선한 성품이나 공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참된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참된 예물이 되고 그 행위와 결합된 외적 예배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3:10구스에 대한 설명도 같은 논증을 마무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스가 천적인 것들,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49에 인용된 여러 말씀을 각각 별개의 주제로 떼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라기의 공의로운 제물’, 에스겔의 예물과 열매’, 스바냐의 예물은 모두 제물의 참된 영적 실재가 사랑과 체어리티와 그 행위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함께 인용되었습니다. 외적 제물이 참된 예배를 의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내적 실재를 담고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46부터 AC.349까지의 흐름도 매우 선명해집니다. AC.346날들의 끝에’, ‘땅의 소산’, ‘제물을 각각 시간의 경과,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개괄했습니다. AC.347은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리 분리되는 상태를 설명했고, AC.348은 그 상태에서 나온 땅의 소산이 왜 죽은 행위인지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AC.349는 이제 그러한 행위에서 나온 외적 예배 역시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결국 창4:3 전체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낳고, 더 나아가 예배의 형태까지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가인의 제물 이야기를 가인은 나쁜 것을 드렸고 아벨은 좋은 것을 드렸다는 물질적 차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곡식을 드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땅의 소산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고, 곡식 제물이 본질적으로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제물이 어떤 내적 상태에서 나왔는가입니다. 바로 다음 AC.350부터는 아벨의 제물이 다루어집니다. 가인과 아벨 모두 외적으로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두 제물의 차이는 제단 위에 놓인 물질보다 그 예배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의 차이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를 돌아볼 때도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헌금하고 성찬에 참여하며 설교하고 봉사하는 외적 예배는 모두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자동으로 예배에 영적 생명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AC.349가 묻는 것은 예배 형식을 갖추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외적인 것에 무엇이 생명을 주고 있는가?입니다. 예배가 우리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 예배는 정교하게 유지하면서도 자기 의와 지배욕과 다른 사람에 대한 멸시를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가인의 제물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예배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AC.349의 중심은 예배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한 질문으로 압축됩니다. 외적 형식이 스스로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이것이 이 번호의 중심 문장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외적인 것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외적인 형식만 충실하게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내적인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외적인 행위와 예배 가운데 표현되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바로 그 질서가 깨어졌을 때 외적 예배가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절의 아벨의 제물은 그와 반대로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게 됩니다.

 

 

 

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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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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