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1)

 

AC.295

 

그들을 가리켜 가죽옷을 입었다(clothed with a coat of skin)고 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은 순진무구함(innocence)으로 인해 벌거벗었다(naked)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걸 잃었을 때,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는데, 이 역시 벌거벗음(nakedness)이라 합니다. 모든 것이 역사적으로 서로 이어져 보이게 하기 위해, 그러니까 태고교회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에 따라, 여기서는 그들이 벌거벗지 않도록 옷을 입었다(clothed lest they should be naked), 다시 말해 악 가운데 있지 않도록 옷을 입었다 한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이 31절로 13절까지 그들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내용으로 분명하며, 또한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Jehovah God made them a coat of skin, and clothed them) 한 사실로도 분명합니다. 여기서는 그 교회의 첫 번째 후손들, 그리고 특히 두 번째, 세 번째 후손들을 다루는데, 그들은 이러한 선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The reason why they are said to be “clothed with a coat of skin,” is tha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said to be “naked,” on account of their innocence; but when they lost their innocence they became conscious that they were in evil, which also is called “nakedness.” That all things might appear to cohere historically (in accordance with the way of speaking of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are here said to be “clothed lest they should be naked,” or in evil. Their being in spiritual and natural good is evident from what was remarked above concerning them, from verse 1 to 13 of this chapter, as well as from its being here related that “Jehovah God made them a coat of skin, and clothed them”; for it here treats of the first—and more especially of the second and third—posterities of the church, who were endowed with such good.

 

 

해설

 

AC.295는 ‘가죽옷’이라는 표현이 왜 사용되었는지를 먼저 태고교회의 ‘벌거벗음’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이 벌거벗었다는 것은 단순히 옷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악을 감추거나 선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마음이 없었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의지에는 위장과 꾸밈이 없었으므로, ‘벌거벗음’은 수치가 아니라 순진무구함(innocence)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태고교회 사람들이 순진무구함을 잃게 되자 ‘벌거벗음’의 뜻도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살았으므로 자기 상태를 감추려 하지 않았지만, proprium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악과 수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 이후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이 아니라 선이 결여된 상태, 곧 악 가운데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이야기가 역사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벌거벗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외적 서술, 그러니까 무슨 스토리 텔링 같은 이런 서술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 방식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영적인 것들을 자연적인 사물로 표현하던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벌거벗음’, ‘가죽’, ‘’, ‘입히심’은 모두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벌거벗지 않도록 옷을 입혔다’는 것은 그들을 악 가운데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옷은 사람의 내면을 덮고 보호하는 외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이 천적 선과 퍼셉션을 잃은 뒤에도 주님께서는 그가 완전히 선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더 외적인 선을 주셨습니다. 그 선은 이전의 순진무구함과 같은 내적 선, 곧 천적 선은 아니었지만, 악을 억제하고 사람을 보존할 수 있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여기서 ‘가죽’은 인간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죽, 그러니까 피부가 몸의 외부를 덮듯이, 가죽옷은 속 사람의 천적 생명이 사라진 뒤 인간에게 남겨진 겉 사람의 선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외형적 착함이나 세상에서 인정받는 도덕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남아 있는 상태에 맞추어 주신 선이며, 이를 통하여 인간이 더 깊은 타락으로 빠지지 않도록 붙드시고 보호하신 것입니다.

 

AC.295는 이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가운데 있었다고 말합니다. 영적 선은 신앙의 진리에서 비롯,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하는 선이며, 자연적 선은 그러한 영적 선이 겉 사람의 생활과 행동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선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질서 있고 유익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선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서로 분리된 두 선이라기보다, 속에서 받은 선과 그것이 생활 속에 나타난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교회 자체보다 그 교회의 후손들을 다룬다고 밝힙니다. 첫 번째 후손들 가운데는 아직 태고교회의 선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에게서는 그 선이 더욱 외적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그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선과 진리를 아는 그런 상태는 아니었지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부여받아 교회의 상태를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가죽옷’은 바로 이처럼 교회의 생명이 내적인 것에서 점차 외적인 것으로 옮겨 간 상태를 보여 줍니다.

 

AC.295는 ‘여호와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말 속에 타락한 인간을 향한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순진무구함과 천적 선을 잃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벌거벗은 채, 곧 악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외적인 영적 선과 자연적 선으로 그를 덮고 보호하셨으며, 그 선을 통하여 새로운 교회의 후손들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AC.295, 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AC.295.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첫 번째 후손들 가운데는 아직 태고교회의 선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에게서는 그 선이 더욱 외적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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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6, 창3:21, ‘가죽‘의 상응 원리, 성경 전체를 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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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4, 창3:21, ‘가죽옷‘과 체어리티, 그리고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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