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말씀의 속뜻은,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은 오직 거짓과 탐욕밖에 없기 때문인데, 만일 이때 이 유일한, 비록 악하고 거짓되더라도, 생명을 건드리게 되면, 더 이상의 생명이 없어 사람은 바로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대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와 동행, 그가 자의로 주님의 선과 진리 쪽으로 돌이키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역량에 맞춰 강약을 조절하시면서 말이지요.

 

창세기 1장 30절 말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에 관한, 다음과 같은 속뜻 역시 그렇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 갈 때, 그는 끊임없이 영적 전투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엔 탐욕(cupidities)이 지배적(the dominion)이기 때문인데요, 사람은 그 자체가(the whole man) 그저 탐욕과 탐욕에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composed of)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간적으로 폐지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the whole man) 파괴되기 때문인데요,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has acquired)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일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되는데요,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하여 그를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계속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이런 탐욕의 추구에도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지게 마련이며, 그 결과, 결국엔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러면 이제 이 사람에게는 개혁될 나름의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섬세하시며, 사람 일생의 모든 악과 거짓조차 이런 섭리 가운데 허락하심을 볼 수 있지요. 우리 주님의 이런 모습은 현재 거듭남의 과정 중인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자녀, 성도는 물론, 기타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우리가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지 하는 근본적인 방향과 관점을 제공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다음과 같은 주님 말씀이 생각나는데요,

 

1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2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18-20)

 

그러므로 우리 역시,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주님의 성품, 곧 사랑과 온유, 겸손이라는 안전하고 온전한 울타리 안에서 행해야 하겠습니다.

 

가령 아이 훈육의 경우, 이렇습니다. 아, 그전에 먼저 천국 천사들 중 어린아이를 훈육하는 천사들은 어떤 태도와 자세로 하는지를 보겠습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7장, '천국의 어린이들'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천사들의 훈육을 보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지상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훈육해야 하는지 하는 귀한 통찰력을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죽으면 바로 내세에서 깨어나고(부활하고), 깨어나자마자 천국으로 인도되며, 육신을 입고 살 때, 아이들을 인자하게 사랑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한 여성 천사들에게 맡겨진다. 그 천사들은 세상에 살 때, 모든 아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맡겨진 아이들을 자기 아이로 여기고, 어머니의 인자함으로 받아들이며, 아이들도 타고난 성향에 의해 그 천사들을 자기 어머니처럼 사랑한다. 그 천사들은 영적 모성애로 원하는 만큼 아이들을 돌본다. 이 천국은 천사들의 이마 앞쪽, 그들이 주를 바라보는 일직선 상에 있다. 모든 아이들이 주의 직접적인 보호의 눈길 아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위치하는 것이다. 순진함의 천국, 즉 삼층천이 그들에게 유입된다...

 

...아이들은 주로 그들의 특성에 알맞는 표상으로 교육을 받는다. 그 표상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내면에서 나오는 아름다움과 지혜로 가득하다. 선함을 본질로 하는 지성이 이런 방법을 통해 아이들에게 점진적으로 심어진다. 이제 내가 허락하심 하에 보게 된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이로써 나머지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심과 동시에 주의 인성과 신성이 합일되는 것을 표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은 사람의 모든 지혜를 초월하면서 동시에 아이들의 순진함에 맞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떤 무덤이라는 개념이 연출되고 나서 그 안에 주님이라는 개념이 나타났는데, 아주 멀리서 보는 것처럼 어렴풋하게 표현하여 전혀 주님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덤이라는 개념에는 뭔가 죽음이란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고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 다음 어떤 공기 같은 것, 아주 옅은 액체 같은 것이 조심스럽게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적절한 거리에서 보면 이것은 세례가 상징하는 영적 삶을 표상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서 '결박된 자들'에게 내려가시고, 그들과 함께 천국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표상이 보였는데, 그 장면은 극도의 조심성과 경의로 연출되었다. 또 아이들 마음의 수준에 맞추어 거의 안 보이는 가느다란 실들이 내려와 승천하시는 주님을 지극히 부드럽고 섬세하게 거들어드리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혹시라도 영적이지 않거나 천국적이지 않은 것에 그 표상들이 닿지 않게 하려는 경건한 두려움 속에 진행되었다. 거기 다른 표상들도 연출되었다. 아이들 마음에 적합한 놀이들을 통해 아이들은 진리를 알게 되고, 선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된다...

 

...나는 아이들의 사고가 얼마나 부드러운가도 알게 되었다. 내가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을 때, 그들의 사고가 내 사고의 개념들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흐름은 거의 애정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할 만큼 온화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들의 사고가 주님께로부터 직접 열려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마치 그들을 그냥 통과해 흐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주께서는 가장 내적 차원에서 어린아이들의 생각 안으로 유입하시는데, 그것은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처럼 생각을 닫아버리고, 진리를 이해하는 길을 막아버리는, 그릇된 가치관이나, 선을 받고 그에 따라 지혜를 받는 길을 막아버리는 악한 생활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아이들이 죽은 후, 바로 천사의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알아감에 따라 점차적으로, 천국의 모든 질서에 따라서 천사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아이들의 특성을 낱낱이 아시며, 따라서 그들 성향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맞추어 선의 진리와 진리의 선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많은 내용들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이들을 돌보는 천사들은 아이들에게 일체의 영적이지 않거나 천국적이지 않은 것들이 닿지 못하도록, 즉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극도로 조심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네,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아이를 훈육하면서 아이를 주님께 맡긴다는 건, 아이에게 무슨 예외를 허용했다가 아이에게 그동안 기울인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리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계속 강행, ‘맞을래?’ 하며 아이를 위협, 끝까지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혹시 그럴지라도, 즉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날지라도 아이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을 의지, 주님의 사랑과 온유하심으로 아이를 훈육하는 것이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그 순간, 방법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영적으로 악한 기운이 아이와 엄마를 삼키지 못하도록 시급히 그 기운을 끄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들과 악령들이 둘씩 와 있다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또 사람의 연령대에 따라 그에 맞는 영들로 임무 체인지가 되는데요, 대략 영유아들에게는 삼층천 천사들이, 초중고에겐 일층천 천사들이, 청장년에겐 이층천 천사들, 그리고 다시 노년에겐 삼층천 천사들이 오며, 이에 대응하는 악한 영들 또한 그렇게 임무 교대합니다.

 

이런 아르카나(arcana, 秘義)에 관한 지식은 지금 훈육 중인 어린아이 앞에서도 무척 유용합니다. 이때 영안이 열려 아이 안에 와있는 악령들이 보이면 더 좋겠지만, 비록 안 보이더라도 부모가 깨어 있어 그 영적 기운, 아우라의 변화, 그 영적 감각을 느낄 수 있었으면 참 다행스럽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아, 지금 아이 안에서 악령, 이 경우는 어린 악령이겠지요, 악령이 활동하며, 내가 화를 내고, 아이를 위협할수록 더욱 사실은 내 머리 꼭대기에서 나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고 있구나! 그리고 내 안에서도...’ 간파하고, 즉시 영적 기운을 변화시키기 위해, 즉 아이 안에 역시 와있는 삼층천 천사들이 일하실 수 있도록, 나의 인간적인 훈육을 중단, 천사들을 통해 주님께 맡기는 물러남이 필요합니다.

 

이 물러남은 뭐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대체로 바로 회개 기도를 하며, 주님의 임재를 구하는 게 좋겠습니다. 상황 전개에 대한 주도권을 천사들에게, 곧 그렇게 해서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영유아 아이라 하더라도 아이를 윽박지르고, 사납게 대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하여 어찌하든지 지금까지 활활 타오르던 악한 기운을 시급히 끄는 게 중요합니다. 부모의 이런 태도는 절대 수치스러운 게 아니며, 우리가 즉시 이런 조치를 취하면 오히려 상황의 중대성을 감안, 삼층천 천사들이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상황을 수습하실 겁니다.

 

이 지경까지 안 가도록 그냥 삼층천 천사들이 바로 개입하시면 되지 않느냐 하시겠지만, 주님은 절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자유를 일방적으로 침해하시지 않으며, 그래서 이럴 경우, 즉 끝까지 쌩고생을 하면서도 회개하지도 않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경우, 삼층천 천사들은 그냥 안타까워하며, 가까이 오지도 못하시고, 그저 저만치 물러나 그 상황에서 하실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 하실 뿐입니다.

 

두 가지, 곧 사람의 안에 있는 악한 생명조차 주님은 함부로 건드리시지 않는다는 사실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은 사랑으로 온유하게 대처하신다는 거! 이 두 가지를 꼭 기억하여 아이 훈육을 비롯, 모든 상황에서 대처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어떤 걸 이루시기 위해 악한 기운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교육 및 훈육 방식이 무조건 나쁘다, 악하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크게 유용하지요. 하지만 그조차도 주님의 성품, 주님의 사랑과 온유하심 가운데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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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2024-02-04(D1)-주일예배(2528, 눅16,14-18),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pdf
0.38MB
축도.2024-02-04(D1)-주일예배(2528, 눅16,14-18),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pdf
0.21MB
성찬.pdf
0.14MB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것을 듣고 비웃거늘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눅16:14-18)

 

 

(선이라는 것은 쓰임새이며, 인간이란 본래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인데) 만일 쓰임새가 끊임없이 행해지지 않고 중단되게 되면, 이 기간 그는 모든 (악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강한 욕정으로 돌이킬 수 있게 되며, 그건 곧 그렇게 해서 그는 체어리티의 중단뿐 아니라 심지어 선행들로부터도 떠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이런 식으로 자기와 반대되는 것들로 인해 소멸되며, 그렇게 해서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애의 교리 156) And if uses are not done perpetually there is an interruption, and in this interval he may turn aside into all loves and the concupiscences therefrom, and so not only intermit his charity, but even depart from good works. Charity thus perishes from its opposites, and the man serves two lords. (C.156)

 

※ 위 글은 스베덴보리 저, ‘The Doctrine of Charity’(1766) 중 여섯 번째 소주제인, ‘Man is born that he may become charity’(126-157)에 나오는 글이며, 본래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 지음받은 인간이 체어리티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멈추면, 그 결과, 어떻게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지를 말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실제 삶에 있어서는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과 세상 재물을 더 믿거나, 또는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나기 전 신앙인들은 보통 이렇게 두 얼굴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다가 사후, 영계에 가면 감춰진 본래의 얼굴이 드러나는데요, 그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그가 그동안 어떤 주인을 섬기며 살았는지를 알게 되지요. 어떤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사람 같은데 의외로 주님과 이웃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른 이유가 뭘까요? 새 교회에서는 그것을 사람마다 주도적인 사랑, 우세한 사랑(dominant love)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종류의 애정, 또는 사랑이 있는데, 그것을 크게 나누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고,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랑은 이 두 가지 큰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렇다면 주도적 사랑이란 뭘까요? 각 사람에게 있는 수많은 사랑 중에 으뜸이 되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도적 사랑이 무엇이냐에 따라 개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즉 주님과 이웃을 위한 천국적인 삶이 될 수도 있고, 자아와 세상을 좇는 지옥적인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하시는 것은 주도적 사랑은 둘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그것들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주된 사랑이 되어야 하고, 나머지 사랑은 보조적인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반대가 된다면, 그 사랑의 끝에는 세상의 온갖 탐심과 정욕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 가르침 “인애의 교리” 156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이라는 것은 쓰임새이며, 인간이란 본래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인데) 만일 쓰임새가 끊임없이 행해지지 않고 중단되게 되면, 이 기간 그는 모든 (악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강한 욕정으로 돌이킬 수 있게 되며, 그건 곧 그렇게 해서 그는 체어리티의 중단뿐 아니라 심지어 선행들로부터도 떠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이런 식으로 자기와 반대되는 것들로 인해 소멸되며, 그렇게 해서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애의 삶, 체어리티의 삶을 그치는 순간 주도적인 사랑이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잠시도 체어리티의 삶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세상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주도적 사랑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미워하고,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세상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바리새인이야말로 두 주인을 섬기는 자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위선자의 말로에 대해 마태복음 24장 50절에서 51절까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50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엄히 때린다 했는데 이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구요, 원문에는 ‘그를 갈라놓는다(divide)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라놓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께서 그들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빼앗으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위선자들에게서 선과 진리를 빼앗는 이유는 그대로 두면 선과 진리를 더럽힐 것이고,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를 알면서 더럽힐 바에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가 하나도 없고, 악과 거짓만 남아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나 연민 따위는 없고, 오로지 자기만 아는 사람, 어떻게 해서든지 이웃을 짓밟고 올라서기를 바라는 사람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는 위선자들이 받을 벌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비웃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들은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를 모르고 오히려 높아지기를 바라고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또 자기 생각과 다르면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비웃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 “천국의 비밀” 9264번 글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적 진리와 선이 부인될 때, 이 선은 파괴되며, 그 경우, 사람 안에 있는 것 역시 끝나고,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주님 역시 그렇습니다. 주님은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비롯되는 분이십니다. and this good is destroyed when the Divine truth and good which are from the Lord are denied, in which case this is extinguished in the man, and consequently so is the Lord himself, from whom proceed all good which is good and all truth which is truth.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비웃을 때,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인 선을 파괴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끝냈다, 더 이상 주님이 자기들 안에서 역사하시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들이 부인하고 비웃는 그 말씀이 바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의 말씀을 의미하고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주님이 직접 전하시는 진리의 말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새로운 천국과 새로운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오셔서 직접 전하신 말씀은 지상에 세워질 마지막 교회를 위한 말씀이며, 또한 그 교회를 바탕으로 하늘에 세워질 새로운 천국을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신 것은 요한의 때까지의 말씀, 즉 구약의 말씀들이 주님이 오실 것을 예언한 말씀이라면, 그 후의 말씀은 세상에 오신 주님이 직접 전하시는 영원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그 신성한 말씀을 비웃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주님은 인간이 각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되 온전하게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지성에 비춰 어떤 말씀은 임의로 버리고, 어떤 말씀은 왜곡하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율법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뜨리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세워지는 교회는 신성하고 완전한 말씀으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천지는 하늘의 천국과 지상의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남용, 말씀을 왜곡하여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말씀보다 더 높였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8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주님이 갑자기 간음을 하지 말라 하십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고, 그것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걸 상기시키신 후, 그러므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는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뜨리지 말라 하신 주님께서 갑자기 간음을 하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은 왜 이 시점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말씀에서 결혼은 선과 진리의 순수한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 전체를 통해 가르치시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요, 믿음과 믿음에 따른 삶의 결합입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세워진 모든 교회들은 마지막에 가서는 선과 진리, 또는 믿음과 삶을 분리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왜곡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 아니며, 그러므로 영적인 간음입니다. 왜냐하면 간음의 영적인 의미는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을 뒤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것은 간음이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말씀을 임의로 왜곡하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임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하실 때,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중요하고, 삶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잘못된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말씀을 임의로 왜곡, 믿음과 삶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 희생시킴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 믿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누가복음 24장 47절에는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라고 말합니다. 또 마가복음 1장 15절은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믿을 뿐 아니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생각이나 애정을 면밀히 살펴 악하고 거짓된 것이 있으면 주님 앞에 고백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고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빼고,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가르칩니다. 이런 것이 영적인 간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는 일이고, 그러므로 진리에다가 거짓을 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각자에게 맞는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처럼 모든 진리와 선은 각기 맞는 진리와 선을 만나 결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부 간의 선과 진리가 있고, 부모 자식 간의 선과 진리가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 간의 선과 진리가 있고, 회사에서 상사와 부하직원 간의 선과 진리가 있습니다. 선과 진리가 같은 것 같지만 이렇게 모두 다릅니다. 쓰임새가 다르고 형태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쪽의 진리가 저쪽에서는 거짓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말씀의 외적이고 내적인 의미들을 통해 우리는 그런 지혜를 깨우쳐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각자의 삶 속에서 선과 진리의 순수한 결합이 일어나고 천국의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 체어리티의 행위를 멈추지 말고, 꾸준히 계속하라고 하십니다. 멈추는 순간, 불순한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의 바다로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즐거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관심을 잊을 정도로 과도하면 안 됩니다.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

 

아멘

 

원본

2021-06-2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2-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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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AC.34번 글 가운데 특별히 '휴거' 본문이 나와 따로 올리는 글입니다.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막13:18-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이 일’(Flight, 비행, 들림, 휴거)은 마지막 때를,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가 죽는 때를 의미합니다. ‘겨울’(Winter)은 사랑이 결핍된 삶을, ‘환난의 날’(the 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 삶의 끔찍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 휴거는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인데요, 같은 본문의 마태복음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24:31)

 

그런데 AC.4060번 글을 통해 그 속뜻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갑자기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나중에 쓰신 것입니다.

 

참고로, 창세기 아브라함 이전까지는 그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어느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이름으로 일컬었던 그 시대 신앙이나 교리, 혹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위 '노아'는 우리가 아는 노아라는 한 개인이 아닌, 그 시대 저런 순결한 신앙을 고집했던 극소수 교회를 가리켜 '노아'라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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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8(D1)-주일예배(2527, 눅16,9-13),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신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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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1-28(D1)-주일예배(2527, 눅16,9-13),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신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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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신 속뜻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16:9-13)

 

 

오늘날 다들 믿기를, 체어리티라는 건 단순히 선을 행하는 거고, 그러고 나서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 결과, 체어리티의 처음은 선행이고,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나중이라고들 믿습니다만, 그러나 이는 완전히 정반대로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처음은 악을 치워버리는(to put away)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참된 기독교 437) At the present day it is believed that charity is simply doing good, and that then one does not do evil; consequently that the first thing of charity is to do good, and the second not to do evil. But it is wholly the reverse; the first thing of charity is to put away evil, and the second to do good; (TCR.437)

 

 

요즘 시대는 각종 지식과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서점에는 매일 같이 수많은 책이 새로 나오고, 컴퓨터를 켜면 다양한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 학생들이 전문가를 뺨치는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인생의 경험이나 지혜보다는 기억력과 지식이 힘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어떤 정당에서 당 대표를 선출하는데 다선 의원들을 제치고 의원 경험이 없는 30대 젊은이가 대표로 뽑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 지난 2021년 6월, 국민의힘 당 대표로 이준석 후보가 당선된 걸 말하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 설교의 원본은 지난 2021년 6월 13일,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의 주일 설교입니다.

 

※ 설교 중 이 ‘※’는 원본에는 없는, 이 원본을 조금 다듬어 설교하는 저의 보충 설명입니다.

 

이런 현상 역시 기억력과 지식과 언변이 무엇보다 힘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인간의 머릿속에 든 지식은 가장 차원이 낮은 진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는 없고요, 더 높은 진리인 영적 진리를 얻기 위한 도구이며, 나아가서는 주님의 나라에 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려는 것도 바로 그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먼저 본문 9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주님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습니다. 불의의 재물이란 어떤 것입니까? 인간의 기억 속에 쌓인 지식들이 불의의 재물입니다. 왜 그 지식들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하셨을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지식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부와 명예를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교우님들은 어떤 사람을 친구로 사귀고 싶으십니까? 저는 힘들고 외로울 때 자기 일처럼 저를 걱정해 주는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습니다. 또는 인생의 위기에서 저를 구해 주고 기꺼이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과연 그런 친구가 있겠습니까? 아마 주님만이 그런 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친구란 바로 주님, 또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 것은 세상 지식을 가지고 영적 진리를 사귀라는 것이고요,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사귀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식은 진리를 얻기 위한 수단이고, 주님과 결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10절, 1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0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지극히 작은 것은 무엇이고, 큰 것은 뭘까요? 또 그것에 충성하는 것은 무슨 뜻이고, 불의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은 낮은 차원의 진리, 즉 기억에 속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 이 ‘기억에 속한 진리’라는 것은 세상에서 학습한 지식들을 가지고 알게 된 진리를 말합니다. ‘영적 진리’라는 표현이 있으니까 ‘자연적 진리’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큰 것은 그보다 높은 차원의 진리, 즉 영적인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충성한다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불의하다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다 하시는 것은,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은 영적인 진리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가지고도 주님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는 것은 세상 지식이나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지 않고 세상을 섬기는 사람은 더 높은 영적 진리가 주어졌을 때에도 그것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기만 할 뿐이라는 뜻입니다.

 

※ 갑자기 많은 수의 영 능력자들이 떠오릅니다. 각종 병 고침, 신유, 치유, 예언, 안수, 방언, 영계 체험, 그리고 집회 인도자들, 주 강사들이 말입니다. 그 가운데 정말 드물게 주께 순수한 쓰임새로 섬기는 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잘 포장된 생업 수단으로, 그리고 자기를 높이고 주목받고자 하는 숨은 동기로 그러고들 있으니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저부터도 우선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 역시도 누가 저를 무시하고 그러면 발끈하거든요... 성 프란치스코는, 스베덴보리는 그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저는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인 사람은 진리를 가지고 언제나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이 오로지 세상의 부와 명예인 사람은 진리를 가지고 오직 부와 명예만을 좇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말씀으로부터 삶을 분리,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에 대해 불의하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12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앞에서는 남의 것, 뒤에서는 너희의 것이라고 하셨지만, 그러나 이는 모두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러면 진리를 남의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뭘까요? 진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거나 진리를 마음대로 왜곡하는 것은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깨달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리를 대하는 바른 태도는 진리를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의 것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에서는 왜 너희의 것이라고 했을까요? 진리를 주님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진리에 따라 신실하게 사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그들의 생명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를 가지고 당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그들의 사랑, 또는 의지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들의 생명인 의지와 사랑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따라 살지 않거나, 혹은 못 하거나 시험에서 넘어지는 이유는 진리가 아직 우리의 생명인 사랑이 되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그러면 그때는 뭐가 사랑이며, 뭐가 생명일까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주님을 의지, 진리에 따라 세상 욕망을 이긴다면, 그때부터 그 진리는 주님에 의해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진리를 너희의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 물론, 경험에 의하면, 이후에도 계속 넘어집니다만,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일어나 회복, 다시 주님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넘어질 때마다 마음이 참 힘들지만, 그러면서 더욱 자신에 대해서는 낮아지고 겸손하여지며, 부인하며 내려놓게 됩니다.

 

다음 13절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신앙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행동에 있어서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머리로는 진리를 생각하면서 행동은 진리와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와 관련해서 계시록 해설 409번 글의 7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과 천국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속 사람이 열리고, 그때 겉 사람은 속 사람을 섬긴다. 겉 사람은 섬기기 때문에 종이라 부르고, 속 사람은 자기 의지대로 하기 때문에 주인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속 사람이 닫히고, 겉 사람이 열린다. 겉 사람이 열리고 속 사람이 닫힐 때, 사람은 하나의 주인 즉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고, 다른 주인 즉 주님과 천국을 미워한다.” With those who love the Lord and heaven cove all things, the internal or spiritual man is open, and the external or natural man serves it; then the latter is a servant because it serves, and the former is a master because it exercises its will; but with those who love themselves and the world above all things, the internal or spiritual man is closed, and the external or natural man is open; and when the latter is open and the former closed, the man loves the one master, namely, himself and the world, and hates the other, namely, the Lord and heaven. (AE.409:7)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겉 사람이 열린다는 것은 겉 사람이 세상 또는 지옥을 향해 열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멀리할 때는 주님을 향한 마음인 속 사람이 열리고요, 주님을 멀리할 때는 겉 사람이 세상과 지옥을 향해 열립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향한 마음과 세상을 향한 마음이 동시에 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계에 밸브가 달린 것처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밸브가 하나 있고, 겉 사람과 지옥 사이에도 또 하나의 밸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열리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닫히고, 다른 하나가 열리면 다른 하나는 닫히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고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신앙인들이 한 손으로는 선을 행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악을 가까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차지도 덥지도 않다 하시고 토해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인애를 베풀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점검해서 모든 종류의 악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를 가지고 세상을 섬기지 않고 오직 주님 한 분만 섬길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애굽인들로부터 금은 대접들과 옷가지를 빼앗아 가지고 나오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또 민수기 3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족과 싸워 이겼을 때 그들의 부녀와 가축과 재물들을 모두 탈취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애굽인이나 미디안족은 모두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즉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는 마음이 애굽인이며, 미디안족입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극복할 때, 그동안 세상을 섬겼던 모든 지식들이 오직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이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애굽의 재물과 미디안의 재물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넘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을 세상을 섬기는데 쓰지 말고, 진정한 친구인 진리와 주님을 사귀는데 쓰라는 말씀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아멘

 

 

원본

2021-06-1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1-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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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1(D1)-주일예배(2526, 눅16,1-8, AE.763), ‘오십이라 쓰라, 팔십이라 쓰라’의 속뜻.pdf
0.42MB
축도.2024-01-21(D1)-주일예배(2526, 눅16,1-8), ‘오십이라 쓰라, 팔십이라 쓰라’의 속뜻.pdf
0.21MB

 

 

 

 

 

오십이라 쓰라, 팔십이라 쓰라’의 속뜻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눅16:1-8)

 

 

신구약 말씀에서 ‘’과 ‘행위’, 그리고 ‘행함’과 ‘사랑’이란 말이 그렇게나 자주 언급되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일이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하지도, 구원하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그것들을 신앙으로부터 분리해 온 이래, 지금은 또 이 둘을 교묘하게 신앙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해설 763:2) But inasmuch as they find in the Word of both testaments “works” and “deeds,” as well as “doing” and “loving,” so frequently mentioned, they can do no otherwise than affirm that one ought to live well; but since they have separated works or deeds from faith as not justifying and saving, they craftily join these and faith together, (AE.763:2)

 

 

오늘 말씀은 주인의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어떤 부자의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의 귀에 들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청지기는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믿음만 있고, 인애(仁愛, 체어리티charity)의 삶은 없는 교회, 또는 그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 오늘 설교를 처음하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과 달리 개신교 장로교 통합 가정에서 태어나 침례교인이 된 후,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제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순수하게(?)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된 기독교인들은, 그리고 개신교인들은 사실 겉으로 봐서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만, 그러나 제가 속했던 교회들이 대체로 괜찮은 교회였을 수도 있고, 또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살던 시대인 1700년대 중반 유럽 기독교회 때와는 또 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주님 보시기에는 그나마 한국 기독교회가 좀 나을 뿐, 세상이, 곧 교회가 종말을 향해 점점, 더욱 아주 심하게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오늘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청지기가 외적인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이 세상 청지기는 대개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할뿐, 주인 입장에서 정성껏 일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쌓아 두기만 하고 사용하지는 않거나, 사용하기는 하는데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신앙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주인이 청지기에게 더 이상 청지기의 직무를 계속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에서 내쫓거나 직분을 빼앗으시지는 않으시는데요, 그러면 이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신 건 무슨 뜻일까요? 외적인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내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나마 있던 외적인 신앙마저 없어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처음 신앙을 가질 때는 외적인 신앙으로 시작합니다. 외적인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믿음에 따라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도 나오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지만, 정작 삶에 있어서는 교리대로 살지는 않는 것이지요. 그것이 외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외적인 신앙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점진적으로 내적인 신앙, 즉 삶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입술로만 주님을 믿고, 실제 삶은 그 반대가 될 수 있으며, 그 정도가 심해지면 나중에는 신앙의 진리마저 부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동안 존재했던 많은 교회들의 타락상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외적인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중에는 주님을 부인하고 진리도 부인하는 상태에 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청지기가 직무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고, 자기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지요. 3절에서는 주님에 대한 믿음마저 잃어버린 신앙인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청지기가 주인으로부터 직분을 빼앗기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외적 신앙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회개하지 않았던, 내적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사람들이 종국에 가서는 그 신앙, 그 믿음마저 잃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마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의 순수함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내가 하나님도 잘 믿고, 이웃을 섬기려는 마음도 있었지 하는 감상에 빠지거나, 지금 모습을 생각하며 부끄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있어 순수했던 때로 돌아가려 해도 뜻대로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땅을 파는 것은 샘(fountain)을 얻기 위한 노력을 뜻하고, 샘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진리를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다는 것은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외적 신앙 안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믿음에 반하는 삶을 살았다가는 어느 순간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때부터는 말씀을 읽어도 더 이상 진리를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빌어먹자니 부끄럽다 했습니다. 이 비는 것(begging)은 주님 앞에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어먹자니 부끄럽다고 하는 것은 주님 앞에 겸손하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청지기가 마침내 무서운 결심을 합니다. 5절로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주님 앞에 빚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신, 말씀의 선과 진리를 선한 일을 통해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빚진 자가 주인에게 기름 백 말을 빚졌음을 인정하는 것은 그에게 있는 모든 선이 주님의 것이며, 그러므로 선한 일을 통해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름은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하고, 백 말의 백(100)이란 수는 완전한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청지기는 증서에 오십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오십(50)은 보통 작은 것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백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증서에다 오십이라 쓰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채무가 모두 변제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믿음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외적 교회들이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7절에 청지기가 밀 백 석 빚진 사람에게 증서에 팔십이라 쓰라 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밀은 기름과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하고, 팔십(80)은 완전히 거듭난 상태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의미로 일곱째 날(7일), 즉 안식일은 거듭난 상태를 의미하고, 그다음 날인 여덟째 날(8일)은 천국에서 새로운 시작, 즉 구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밀 백 석을 빚진 사람에게 증서에 팔십이라 쓰라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체어리티의 삶으로 갚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청지기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를 오히려 칭찬했다고 합니다. 교회들이 교인들을 그렇게 잘못 가르칠 때 주님께서 과연 칭찬하실까요? 주님은 그런 교회나 사람들을 칭찬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칭찬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의 교활하고 영악함에 감탄하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세대의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교활한 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교묘한 논리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뒤집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비해 빛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의지해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시대든 빛의 아들보다는 감각적이고 추론, 논리, 말재주에 능한 사람, 교활한 사람들이 권세도 얻고, 부도 얻습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7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정한 청지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부정한 청지기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지는 않는 교회와 그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음이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믿음에 따라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롯의 아내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면 나중에는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사람이 되고, 종래에는 겉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속으로는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랬고, 오늘날 주류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세상 재물을 믿고, 하나님의 지혜보다 인간의 지식을 더 믿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예배는 외적으로만 경건하고, 내적으로는 공허한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청지기입니다. 주님께서 부정한 청지기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그들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부정한 청지기는 자신이 영적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는 줄 알면서도 주님 앞에 겸손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더 이상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왜곡, 다른 사람의 구원마저 가로막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621번 글 6번 항에는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날 때부터 갖고 있던 유전 악 가운데 여전히 머물러 있게 됩니다. 회개는 사람이 악을 행하고자 마음먹는 걸 그만두는 것, 그건 하나님께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 자신을 살펴 자신의 죄를 보고 주님 앞에 고백, 도와주시기를 구하며, 악을 삼가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할수록, 그리고 주님을 믿을수록 그의 죄는 용서되지요. (참된 기독교 621:6) [6] The angels said further, “Man must repent of his sins in order to be saved, and unless he repents he remains in the sins into which he was born; and repentance consists in man’s ceasing to will evils because they are contrary to God, searching himself once or twice a year, seeing his evils, confessing them before the Lord, praying for help, refraining from evils, and beginning a new life; and so far as he does this, and believes in the Lord, his sins are forgiven.” (TCR.621:6)

 

주님께 도움을 구해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3:27)

 

했고, 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매일 살피시고, 주님께 도움을 청해 모든 종류의 악에서 벗어나시기를, 물러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10:29, 30)

 

아멘

 

 

원본

2021-05-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1-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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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4(D1)-주일예배(2525, 눅15,22-32),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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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1-14(D1)-주일예배(2525, 눅15,22-32),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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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2)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22-32)

 

 

결혼 그 자체는 그 이상 거룩한 것이 없을 정도로 거룩하다. 그것으로 인해 인류가 생성되고 인류로 인해 천국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천사의 삶을 살았던 사람은 천국으로 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간음은 그 이상 불경한 것이 없을 만큼 불경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에게 있는 천국과 교회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9961:4) ...marriages are so holy that there is nothing more holy, and this also for the reason that they are the seminaries of the human race, and the human race is the seminary of the heavens, for thither come the men who in the world have lived an angelic life. And on the other hand adulteries are so profane that there is nothing more profane, because they are destructive of heaven... (AC.9961:4)

 

 

오늘 본문은 2주 전 다룬,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 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은 그 유명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 본문인데, 본문이 길어 전, 후반 둘로 나눈 것으로, 오늘은 그 후반 본문입니다. 먼저 22절, 23절은 멀리 떠났다 돌아온 아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인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들은 속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고, 떠나 제 마음대로 살다 돌아와 이제는 속 사람과 결합하기를 원하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소를 잡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많이 보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좋은 옷은 진리를 뜻하고, 살진 송아지는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단절되었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다시 통할 때, 주님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당신의 생명인 선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때 그 지식들이 살아나 진리로 변합니다. 그러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는 것은 지식들 안으로 선이 흘러 들어가는 것이고,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은 그때 그 지식들이 진리로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 우리는 보통 내 안에 지식이 많으면, 그러면 언제든 내가 맘만 먹으면 나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경험에 의하면, 지식과 실제로 그 지식을 가지고 선한 삶을 사는 건 별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선을 행할 수 있으려면,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야 하는데요, 이것을 ‘주님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당신의 생명인 선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가락지를 끼워주신다고 했는데, 가락지는 보통 결혼식에서 배우자들이 서로 나눠 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가락지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을 의미하고, 또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겉 사람에게 힘이 생기는 것을 뜻합니다. 가락지로 표상되는 겉 사람의 힘이란 어떤 것입니까? 어떤 시험에서도 이길 수 있는 힘이며,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 결합할 때, 겉 사람은 그런 힘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이 끼워주시는 가락지, 반지입니다.

 

말씀에는 또 아들의 발에 신을 신겼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발이나 신은 겉 사람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처음 만나실 때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신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깨끗하게 된 겉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겉 사람을 정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발을 씻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로 돌아와 순종할 때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4절에서 아버지가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겉 사람이 주님 앞에 회개하고 속 사람과 결합할 때, 죽었던 겉 사람이 다시 살아납니다. 주님은 어떤 식으로 겉 사람을 살리실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불어넣으시고, 그때 겉 사람 안의 모든 것들이 살아나면서 능력이 생기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때 밭에 있던 큰아들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모습을 25절에서는,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여기서 맏아들과 작은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내면의 교회를 형성하는 두 마음,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 밭에 있다는 것은 속 사람이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밭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집에서 노랫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노래와 춤은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그 선과 진리에서 비롯한 기쁨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릴 때, 악기를 연주하고 찬송을 하는 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을 때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춤추는 것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맏아들이 화를 냅니다. 그것에 대해 29절과 3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이 말하기를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속 사람은 그동안 주님의 명령에 따라 겉 사람에게 진리와 선을 충실하게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겉 사람은 말을 듣지 않고 세상을 좇다가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그에게 선과 진리를 아낌없이 주십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창녀들과 함께 살림을 탕진한 이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라고 성을 내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창녀들과 함께 살림을 탕진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모두 더럽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간음은 선과 진리를 악과 거짓과 뒤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이렇게 표현했지만, 그러나 실제로 속 사람은 이렇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맏아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聖) 문서에서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 즉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오픈하신 모든 계시를 특별히 구분하여 ‘(聖) 문서’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요,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면 외부의 교회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누굴까요? 속 사람의 역할을 하는 이는 목회자입니다. 선과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겉 사람은 성도들입니다. 외부의 교회 중에는 가정도 있습니다. 고대 교회 때는 각 가정에서 가장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속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가장입니다. 그리고 겉 사람은 아내와 자녀들입니다. 교회의 목회자나 가정에서 가장들이나 세상 즐거움을 느낄 겨를없이 성도들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계속해서 맡은 일을 하지요. 그런데 때로는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잘한 것보다는 잘못을 지적하는 분들도 계시지요. 서운한 일이 있다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럴 때 목회자나 가장은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하느라고 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아버지께 성을 내는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 이 설교 원본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지난 2021년 5월 16일 주일 설교인데요, 이런 설명, 이런 풀이 앞에 저는 참 마음 깊이 탄복합니다. 주님의 성품 안에서 주님의 지혜를 온전히 의뢰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적 의미로 목회자는 사랑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모든 문제를 사랑, 또는 선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데요, 그러나 본문에서 맏아들의 모습은 사랑이나 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이해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본문 26절에 보면,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맏아들이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종에게 물어봤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종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종에게 물어봤다는 것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선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이해하는 모습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상황을 선으로 이해하면 어떤 경우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로 이해할 때는 화도 나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 이와 관련, 마태복음 산상수훈 말씀이 생각납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38-44)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본문은 참으로 능력의 말씀,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의 능력이 느껴지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부족함을 느끼는 건 다름 아닌 선악 분별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선, 곧 주님의 뜻인지를 잘 모르겠는 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 요즘 가장 저를 괴롭히는 한 가지는 바로, 저를 이단으로 단정, 일체 어떤 권면도 거절하는 사람을 저는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시도 때도 없이 진리, 즉 옳고 그름의 잣대가 떠올라 저를 분노하게 하는데요, 바로 오늘 본문의 맏아들 모습이 딱 제 모습입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은 정말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내가 여러 해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라며 서운함을 내비쳤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절과 32절 말씀입니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마9:13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눅15:4절 이하에서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은 선한 사람보다 죄인들을 더 챙기신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특별히 누구를 더 챙기거나 덜 챙기시지 않습니다. 병든 자들에게 주님의 손길이 더 필요한 것 뿐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어느 만큼은 영적인 병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돌아온 탕자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기실 때, 질투하거나 시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매일 같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서, 그런데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하는 나는 왜 거듭나지를 못하나 하는 마음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웃이 거듭나고 성장할 때, 우리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우리 안에 있는 탕자가 치유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어 주님의 교회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도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그렇게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참으로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 참으로 주님이 제 안에 와 계시기를,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선한 능력으로 제가 즐겁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를, 비록 제가 무례히 여김을 당하며, 모욕을 당해도 프란치스코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4:2)

 

아멘

 

 

원본

2021-05-1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1-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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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2024-01-07(D1)-신년주일연합예배(2524, 마5,3-12, 공주농아교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의 속뜻.pdf
0.49MB
성찬.pdf
0.14MB
축도.2024-01-07(D1)-신년주일연합예배(2524, 마5,3-12, 공주농아교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의 속뜻.pdf
0.16MB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의 속뜻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3-12)

 

 

※ 오늘 설교에는 말씀 본문 인용이 참 많습니다만 평소 다 잘 아는 본문이라고 지루해하시거나 그냥 대충 후루룩 넘어가거나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와있으면서 우리의 눈을 통해 말씀을 읽는 천사들은 본인들이 내적 존재라 역시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이라고도 하는, 말씀의 영을 보는데요, 그때 그 펼쳐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주님 신성의 이 수백, 수천 천상 오케스트라의 향연과도 같은 감동과 감격에 그들은 어쩔줄을 몰라하거든요. 우리는 외적 존재, 즉 탁하고 흐릿한 물질계에 있으면서 역시 의미 전달에 있어 매우 제한적인, 인간의 언어로된 겉뜻으로만 주님의 이 신성 가득한 말씀을 접하기 때문에 잘 못 느끼지만 말입니다. 우리 안의 천사들을 위해, 그리고 그 즉시 숨는 우리 안의 악령들을 위해(?), 그리고 그 결과, 우리 영의 소생을 위해 모든 성경을 읽을 때는 정성을 다해 예를 갖춰 읽으시기 바랍니다.

 

 

지난번 성탄절 예배에 이어 오늘 신년 첫 주일예배 역시 공주농아교회 여러분과 함께 드리게 되어 참 좋습니다. 저는 여기 오면 마음이 편합니다. 아마 우리 서미례 전도사님과 여러분의 따뜻한 환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임재 덕분이 아닌가 하는데요, 우리가 어떤 집을 방문할 때, 마음이 편한 집이 있는가 하면, 마음이 불편한 집이 있지요. 집주인이 우리를 좋아하면 마음이 편하지만, 우리를 싫어하면 마음이 불편해서 오래 못 있고, 용건만 간단히 마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게 되지요. 주님이 이곳 공주농아교회를 편안해하시는 건,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싫어하면 주님도 이곳에 오래 계시기가 눈치가 좀 보이실 거에요. 우리, 주님이 우리 곁에 늘 편안히 계시도록 힘써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올 한 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늘이 벌써 2024년 1월 7일입니다. 이렇게 해가 바뀔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인사가 바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인데요, 물론 우리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다 잘 알지요. ‘올 한 해 건강하시고, 가정과 회사에 어떤 불행한 일 없이, 손대시는 일마다 크게 성공하여 평안한 한 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뭐 대충 이런 뜻으로 하는 무난한 인사입니다. 이런 인사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겠지요.

 

저는 오늘 특별히 우리 기독교인들 역시 똑같이 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하고는 좀 다른 뜻으로 사용했으면 한다는 것과, 그에 따른 새해 권면도 좀 함께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여러분, ‘’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고 해서 ‘’에 대해 뭐 유별나게 다르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 내용처럼 우리도 무병장수하고, 부귀영화 및 자손의 번영을 누릴 수 있으면 좋죠. 구약에도 보면 하나님을 섬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비롯, 애굽의 국무총리를 지낸 요셉, 큰 부와 명예, 영광을 누린 다윗과 솔로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으나 오히려 큰 재상의 삶을 살았던 다니엘 등 ‘’에 대한 세상 관점에서도 이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을 누리다 간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며, 누가 천국에 가 보니 의외로 세상 살 때, 부유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많이 와 있더라는 것, 그리고 이왕이면 부자로 사는 것이 좀 더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가 주님이 허락하신 재물을 그저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도구요, 쓰임새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이런 부자는 주님이 허락하신 부유함으로 적당히 좋은 집과 좋은 음식, 좋은 옷과 기타 여러 가지를 누려도 되는데요, 이런 부자는 절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며, 재물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할 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러면 성경에서는 ‘’을 무엇이라 하는가 하여 좀 찾아봤는데요, 참 많은 본문, 아니 성경 전체가 사실은 ‘’에 관한 책이라 할 정도로 많은 본문이 있어 좀 놀랐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마태복음 산상수훈 첫 시작을 주님은 ‘’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하시는 걸 보고, 신년 첫 말씀이기도 하니 우리도 이 팔복 본문으로 해야겠다 마음먹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팔복 강해를 하려는 건 아니고요, 단지 오늘 본문 통해 주님은 어떤 걸 ‘’으로 여기시며, 이 산상수훈은 천국 생활을 요약하신 건데, 그러면 혹시 천국 입국 자격을 주님은 이 팔복으로 말씀하신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성령께서 오늘 이 시간, 이 본당을 환히 비추셔서 오늘 말씀이 충분히 잘 전달되며, 다들 깊이 깨닫는 시간들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선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재산을 소유하고 부유한 삶을 사는 게 악한 것도, 죄짓는 것도, 잘못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우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법을 지키며, 정직하게 사업을 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25:20, 21)

 

하신 본문처럼 말입니다. 또 이런 본문들도 있는데요,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19:21, 22)

 

그리고 이 말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물론 이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실제로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다 처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자기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의 삶을 살거나 그 밖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제법 있었는데요,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아시시의 성자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열두 제자가 그랬고요, 수도원 공부를 하면 처음 배우게 되는 모든 수도사의 아버지 성 안토니우스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영적 실상을 말씀드리면, 아무리 남들이 쉽게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이런 과감한 선행을 하였어도 그걸 자기 공로로 여기는 사람, 곧 속으로 ‘나는 실제로 이렇게 했으니 당연히 천국 갈 자격이 있어’ 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괜히 재산만 날린 채, 천국도 못 갈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요, 이런 사람을 가리켜 바울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말하고 있음을 봅니다. 즉 그 동기, 숨은 의도가 오직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무엇을 소유하는 것에 관해 천국의 천사들은 이런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든 의식주를 온전히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는데, 그것도 그 천사의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그리고 최대로 받는다고 합니다. 천사들이라고 해서 다 같은 수준은 아닌데요. 그렇다고 뭐 세상에서처럼 내가 크니 네가 크니 하는 그런 건 아니고, 오직 얼마나 더 주님을 사랑하는가, 얼마나 더 주님의 신성을 깊이 받아들이는가 하는 걸 말합니다. 방금 최대로 받는다 했는데요,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한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수준에서 최대로 받는 곳, 바로 그곳이 천국이니까요. 천사들은 그러나 그렇게 거저 받는 걸 절대 ‘소유’, 즉 ‘내 꺼’라는 생각으로 받지 않고, 대신 ‘이것의 쓰임새가 뭘까?’ 하는 생각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즉, 주님이 뭘 주시면, 그걸 받으면서 ‘주님이 이걸 왜 주실까? 나는 이걸로 무엇을 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걸까? 나한테 저 천사보다 더 주신 걸 보니 주님 보시기에 내가 이걸 가지고 해야 할 일이 더 많은가 보다’ 한다는 것이죠. 천사들은 주님께 모든 좋은 것을 거저 받으면서 늘 이런 태도로 받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같으면, 이런 사람에게 더욱더 주고 싶지 않으시겠어요?

 

우리도 이 세상 살면서 천사들의 이런 마인드로 살면 우리 역시 반드시 우리 수준에 맞는 그런 복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 각 사람의 수준을 말입니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 각 사람의 분수에 지나는 복, 즉 감당할 수 없는 복을 허락하시지 않는데요, 그렇게 되면 그건 복이 아니라 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더욱 큰 복을 받고 싶으시면, 자신의 영적 역량, 곧 속 사람의 크기를 더욱 키우시기 바라며, 반대로 만일 지금 내 처지가 실망스럽다면 그 이유를 잘 생각해 보시고, ‘아, 지금의 내 영적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어서 주님이 나를 복 주실 수 없는 거구나...’ 하시고, 회개하고 돌이켜 부지런히 영적 성장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하시면, 분명 얼마 안 가,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15:22-24)

 

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복은 모두 여덟 가지입니다. 그래서 얼핏 이 여덟 가지가 제각각 다 다른 복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천국 입국 조건, 즉 어떻게 하면 천국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 수 있을까라는 한 가지를 말씀하시는 건데요, 우리가 아까 성찬 때도 말씀드렸듯, 천국은 주님의 신성(神性)으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사실을 기억하신다면, ‘아, 그렇다면 내가 그런 나라에 입국하려면 내 안에 주님의 신성이 갖추어져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가려면 그 나라에서 요구하는 최소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팔복은 바로 그 조건을 말씀하신 것이며, 그 조건이란 바로 세상 살면서 주님의 신성을 부지런히 갖추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살면서 무엇을 겉으로 ‘해야’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속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말이지요.

 

주님의 신성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살면서 주님의 신성을 준비한다는 것은 곧 일상생활 가운데 주님의 선과 주님의 진리에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오늘 주님은 여덟 가지, 곧 ‘심령의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말라함’,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함’, ‘화평케 함’,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음’ 등으로 말씀하신 건데요, 이는 곧 우리 속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령 이런 것이지요. 내 안에, 곧 내 속 사람 가운데 주님의 선과 진리가 없어 안타까워하는 상태를 ‘심령의 가난함’이라 하신 것이며,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픈데 의지가 약해 그렇게 못 사는 걸 슬퍼하는 상태를 ‘애통함’이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나한테 돈이 없고, 이것저것이 없을 때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그러지, 이런 거룩한 걸 가지고 그러지는 않잖아요? 다른 것들도 그 의미가 비슷비슷한데요, 우리가 ‘아... 내 안에는 이런 천국 입국 조건, 그 자격과 됨됨이가 너무나 많이 부족하구나...’ 하며, 심히 애통해할 때, 주님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바로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말이지요. 이 약속들은 모두 그 속뜻으로는 천국에서 누릴 여러 영원한 행복을 뜻합니다.

 

2주 전 성탄절 예배 때 드린 말씀 또한 이와 비슷합니다. 다음은 그때 말씀인데요,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34-40)

 

여기서도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그리고 ‘옥에 갇혔을 때’는 모두 우리 속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이기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 곳곳에서 계속해서 우리의 속 사람 상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속 사람이 사후 주님과 함께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엔 주님의 모든것이 충만하기 때문인데요, 탈북자들이 그 목숨을 건 북한 탈출을 감행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기만 하면 정말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곳에서 천국과도 같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인데요, 그런 것처럼,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복을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 또한 그 초점이 우리의 속 사람에게 맞추어져 있으며, 속 사람의 성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겉 사람의 복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의 질서이며, 이 순서, 곧 ‘’이라는 것은 주님한테서 나와서 천국을 통해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에게 도달하는 것이라는 이 순서를 망각하고, 엉뚱한 순서, 그러니까 정반대의 순서이지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태도를 가지고 감히 천국의 ‘’을 추구하셨다가는 오히려 큰일 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태도를 보고 주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 하신 것입니다. 그때는 오히려 ‘’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우리를 위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을 다들 기억하시지요?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21)

 

즉 세상 살면서 그 안에 이미 천국이 있는 사람이라야 사후에 그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인데요, 이 말씀은 반대로는 세상 살면서 그 안에 지옥이 있는 사람은 사후 그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말씀도 되지요.

 

여러분, ‘인생은 끝이 좋아야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아무리 뭘 야단스럽게 누리고 살았어도 그 끝이 지옥이면 꽝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네, 고민할 것도 없이, 죽어서 천국 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럴려면, 평소 속 사람의 상태를 천국 상태로 유지하는 일에 모든 걸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42)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중에 가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와 같은 권면을 오해하여 누구나 일단 예수 믿고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고 천국 간다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이 권면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중간중간 생략된 권면입니다. 즉, ‘주 예수를 믿어 변화된 삶을 살아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이 되는 그런 사람과 그런 집은 사후에 구원을 받아 천국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 말이지요. 해당 사도행전 본문도 보면 나중에 이 간수와 그 온 집이 정말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의 변화 없이 교회 다녔다고, 예수 믿었다고 저절로 무조건 천국 가는, 그런 건 없습니다.

 

오늘 ‘’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드렸는데요, 다시 한번 확실하게 드리고픈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은 사실은 주님이 주시고, 안 주시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햇볕을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햇볕이 무슨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던가요? 똑같은 햇볕이 숲을 비추면 생명이 태동하지만, 거름더미를 비추면 부패가 시작되듯, ‘’도 ‘’ 그 자체이신 주님을 사람이 어떤 태도, 곧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된 삶을 살게 되고요, 반대로 주님을 미워하여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리는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 나는 특별히 주님을 미워한 적이 없는데, 왜 내 삶은 이렇게 힘들고 불행한 거야?’ 하시는 분들이 혹시 계실 텐데요, 주님을 미워하는 것은 마치 우리끼리 하듯 ‘나는 주님이 미워요.’라고 주님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주님 말씀보다 내 생각, 내가 하고픈 대로, 내 맘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무슨 말을 하거나 뭘 하려 할 때 먼저 주님께 여쭤보지 않아요. ‘주님, 제가 지금 이런 말을 해도 될까요? 주님, 제가 지금 이런 걸 해도 될까요?’ 하고 말이지요. 무슨 말을 하거나 뭘 하기 전, 먼저 주님의 뜻을 살피는 사람은 정말 범사에 주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라야 주님이 오셔서 함께하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음 말씀처럼 말이지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올해가 2024년이지만 그러나 여러분, 천국엔 시간도, 공간도 없습니다. 거기는 이 세상 자연계처럼 태양이 있어 무슨 공전과 자전 같은 걸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거기엔 주님을 향한 우리 속 사람의 상태와 그 변화가 있는데요, 그래서 이 2024년이라는 숫자 역시 천국에서는 어떤 상태를 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새해 인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그 속뜻으로는 ‘올 한해 당신의 속 사람이 더욱더 주님으로 채워져 영적으로 더욱더 놀라운 상태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의미로 사용했으면 좋겠고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한테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이 좀 어려우실 수 있으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을 귀를 주셔서 이 내용이 다들 자기 심령에 잘 들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늘 2024년 신년 첫 주일을 맞아 마침 두 교회 연합으로 주님 공생애 내내, 아니 성경 전체를 하나로 관통하는 너무나 귀한 말씀인 ‘속 사람’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라는 걸 오늘 말씀 통해 깊이 명심하고, 당장 오늘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우리의 하루하루, 우리의 모든 언행 통해 주님이 우리 각자 속 사람 안에 오셔서 편히 지내실 수 있는 그런 2024년 올 한 해 될 수 있게 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2024-01-07(D1), 신년

공주농아교회

설교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수화 통역

공주농아교회 서미례 담임전도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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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1(D2)-신년신정가정예배(2523, 마25,31-46),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pdf
0.42MB

 

https://youtu.be/oxlRHSsTi6Q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25:31-46)

 

새해에 부모님께 세배 올리듯 새해 첫날인 오늘 우리는 또한 하늘의 아버지께 첫 예배 올림이 합당하지요. 주께서 오늘 예배에 함께하시고, 올 한 해 필요한 사랑과 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신정 예배를 마음에 둘 때 주신 올 한 해 마음의 본문으로서, 사실 너무나 완전한 본문이어서 그냥 마음을 다하여 귀 기울이기만 하면 될 뿐 딱히 무슨 인간의 설명이 필요 없지 싶은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은 시대의 완성과 주님의 오심, 그리고 그 결과 이어지는 교회의 연속적 황폐함과 최후의 심판(the consummation of the age and His coming, and the consequent successive vastation of the church and the final judgment)을 예언하신 마태복음 24장, 25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오늘 한 가지, 이 중차대한 말씀의 하이라이트로서 주님은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라고 하는, 삶의 실천을 강조하셨다는 말씀을 꼭 좀 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은 오늘 본문 중 35절, 36절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주석입니다.

 

4955. 이들 본문에 들어있는 속뜻은 이제 이어질 내용을 보시면 되는데요,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여기 순서대로 주욱 나열된 행위들은 바로 체어리티의 행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건데요, 즉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신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게 뭔지를 말입니다. 이런 행위들을 그저 겉 글자의 뜻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이 행위들은 겉보기에 그냥 평범한 선행일뿐 거기 무슨 다른 비밀이 있을 수 있나 합니다만, 그러나 이 하나하나의 행위에는 어떤 비의(秘義, secret), 곧 신성(神性, Divine)이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이 비의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 여기 ‘오늘날’(at this day)은 이 주석이 기록되던 1,750년대 유럽을 말합니다.

 

오늘날엔 체어리티의 교리가 없기 때문인데요, 사람들이 신앙(faith, 믿음)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해 온 이래 이들 교리는 사라졌고, 이 교리들이 있던 자리를 신앙(믿음)의 교리가 대신 고안되어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 후자의 교리는 체어리티가 무엇이며, 이웃이 무엇인지를 전혀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교리들은 체어리티의 모든 종(種, species)과 속(屬, genera)을 가르쳤고, 체어리티가 베풀어져야 할 이웃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어느 정도로, 그리고 어떤 면에서 어떻게 이웃인지를, 그리고 그 결과 체어리티의 실천이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양하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이 주석을 기록할 때, 주님의 직접 계시, 곧 그 어떤 천사나 영들을 통하지 않고, 주님이 친히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풀어 주실 때, 세상 그 어떤 서적도 참고하지 않고, 성경과 종이, 그리고 펜만 가지고 딕테이션, 곧 받아적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알 수 없는, 이런 태고, 고대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교리들은 또한 이웃을 여러 클래스로 그룹지어 이름들을 주었는데요, 부르기를 가난한 사람들(the poor), 궁핍한 사람들(needy), 불행한 사람들(miserable),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afflicted)로, 또 어떤 그룹들은 앞 못 보는 사람들(the blind), 다리 저는 사람들(lame), 장애를 가진 사람들(halt), 고아들(fatherless), 과부들(widows)로, 또 어떤 그룹은 굶주린 사람들(the hungry), 목마른 사람들(thirsty), 나그네들(strangers), 헐벗은 사람들(naked), 병든 사람들(sick), 옥에 갇힌 사람들(bound) 등으로 불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이 사람과 저 사람을 향해 자신들이 어떤 의무를 지고 있는지를 알았는데요,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듯, 이들 교리들이 이젠 사라졌고, 그와 함께 말씀에 대한 이해도 사라져서, 즉 말씀을 속뜻으로 볼 줄 아는 능력이 사라져서, 오늘날은 말씀에 나오는 이 ‘가난한 자들’, ‘과부들’, ‘고아들’이라는 표현들이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 말고 무슨 다른 의미, 즉 비의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실정입니다. 오늘 본문, ‘주린 자들’, ‘목마른 자들’, ‘나그네들’, ‘헐벗은 자들’, ‘병든 자들’ 및 ‘옥에 갇힌 자들’ 역시 그 비의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체어리티는 그 본질 그대로 설명되어야 하며, 그 실천 역시 실천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4956.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본질은 선과 진리에 관한 애정(the affection of good and truth)이며, 자아를 악과 거짓으로 인식하는 것(the acknowledgment of self as being evil and false)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웃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며, 선과 진리에 의해 영향받는 것이 곧 체어리티를 갖는 것입니다.

 

※ ‘이웃은 선과 진리 그 자체’라는 말은 아마도 천국은 주님의 신성, 곧 선과 진리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이웃’이기 때문이지요. 즉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한 천국에서의 태도를 지상에서는 체어리티라고 한다는 것으로 저는 이해가 됩니다.

 

이웃의 반대는 악과 거짓이며, 이 악과 거짓은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은 선과 진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요, 이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며, 또한 악하고 거짓된 것을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악과 거짓은 자아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것을 하면, 곧 체어리티의 사람이 되어 자아로 말미암는 악과 거짓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면 그는 자인(自認)으로 인한 굴욕 가운데(in humiliation from self-acknowledgment) 있게 되는데, 바로 그때 그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과 진리를 받는 상태가 됩니다.

 

※ ‘자인(自認)으로 인한 굴욕 가운데 있게 된다’는 건, 원래 사람은 그 본성상 자아를 부인하는 걸 좋아하는 존재가 아니기에 ‘제 안에는 선과 진리가 없어요. 저는 본질적으로 악하고 거짓된 존재입니다.’ 이렇게 시인하는 건 어찌 보면 참 굴욕적이라는, 그런 말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람이 주님 앞에 이렇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는 주님의 모든 좋은 것을 받을 수 있게 되지요.

 

이런 것이 다음 주님의 말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에 들어있는 체어리티의, 속뜻으로 본 특징들입니다. 이 말씀들이 그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속뜻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체어리티의 교리들을 갖고 있었던 고대인들은 이런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오늘날 이런 사실은 너무도 엉뚱해 보여 그 안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는 말을 들으면 다들 어리둥절해할 것입니다. 게다가 천사들, 사람한테 와있는 천사들은 이 말씀들을 다른 방식으로는 지각조차 못 하는데요,

 

※ ‘사람한테 와있는 천사들’(the angels who are with man), 모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 말미암는 건데요, 먼저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있어 사람이며, 둘째, 천국은 두 나라, 곧 천적(天的, celestial, 의지, 선, 사랑 등) 나라와 영적(靈的, spiritual, 이해, 진리, 신앙 등) 나라로 되어 있고, 지옥 역시 그에 대응하는 두 지옥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천적 천국과 그에 대응하는 지옥에서 각각 천사 하나, 악령 하나, 영적 천국과 그에 대응하는 지옥에서 각각 천사 하나, 악령 하나, 이렇게 둘씩 와있는 것이며, 천사들은 와서 그 사람의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악령들은 와서 그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사람은 천사들을 통해서는 주님 및 천국과, 악령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고로, 각 사람에게 와있는 천사들과 악령들은 그 사람의 기억과 생각을 자기 걸로 압니다. 모든 피조물은 누구나 자기 걸 소중히 여기므로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 또한 저들에게 보호받게 하시려는 주님의 배려라고 합니다.

 

천사들은 ‘주린 사람들’(the hungry) 하면, 애정을 가지고 선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로 지각하고, ‘목마른 사람들’(the thirsty) 하면, 애정을 가지고 진리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로, ‘나그네’(a stranger) 하면, 기꺼이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을, ‘헐벗은 사람들’(the naked) 하면 자신들 안에 아무런 선과 진리가 없음을 시인하는 사람들을, ‘병든 사람들’(the sick) 하면, 자신들 안에 악밖에 없음을 시인하는 사람들을, ‘결박, 즉 옥에 갇힌 사람들’(the bound or those who are in prison) 하면, 자신들 안에 거짓밖에 없음을 시인하는 사람들로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 바로 위에 주욱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주님이 특별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신 것은 우리의 선행이 진정성 있게 하시기 위해서인데요, 왕이나 대통령 등 높은 사람에게 선대하며 예의를 갖추는 걸로는 그 진심이 명료하지 않아서입니다. 비슷한 걸로는 우리가 예배 중 경배와 찬양 같은 시간에 짐짓 거룩한 표정과 마음가짐으로 나름 정성을 다해 진정성 있게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한다고 하지만 주님은 그런 일종의 겉모습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오늘 본문과 관련된,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주인공 마르틴은 구두를 만들고 고치는 제화공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그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5년 전, 자식 두 명과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근래 하나 남은 막내아들까지 병으로 그만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며, 자신도 빨리 죽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접하고는 읽기 시작하였는데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감동받은 그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아 성경 읽기에 열중했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마르틴, 내가 내일 찾아갈 테니 창밖을 보아라.” 마르틴은 그날 하루 종일 창밖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언제쯤 오시려나..." 중얼거리며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겠다는 하나님은 오지 않고, 마침 창밖에 늙은 청소부가 눈을 맞으며, 청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은 그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따뜻한 차를 대접하였습니다. 청소부를 보내고 두어 시간이 지나 창밖을 보니, 이번엔 아기를 안은 여인이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네요. 그는 여인을 가게 안으로 맞아들여 먹을 것을 대접하고, 옷을 한 벌 장만해 주었습니다. 또 시간이 흘러 거의 해가 질 무렵, 창밖을 바라보니 이번엔 또 사과를 파는 노파가 사과를 훔친 소년을 붙잡고 야단치고 있는 겁니다. 마르틴은 밖으로 나가 소년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사과값을 대신 갚아주며, 노파가 소년을 용서하시도록 권하여 원만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마르틴은 날이 어두워지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마르틴은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요, 그때 어둠 속에서 자신이 낮에 대접했던 늙은 청소부와 아기 안은 여인, 그리고 노파와 소년이 나타나 미소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데요,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이후 마르틴은 꿈에서 깨어나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니,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라는 이 톨스토이 단편은 뒤늦게 구원의 감격을 깨닫게 된 마르틴이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하루 동안 겪는 이야기입니다.

 

네,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온 우리가 이런 걸 모르겠습니까? 다 아는 내용이지요. 그럼에도 신년에 이런 체어리티의 메시지를 준비한 것은 이것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앞서도 말씀드렸듯 마24, 25, 시대의 완성과 주님의 오심, 그리고 그 결과 이어지는 교회의 연속적 황폐함과 최후의 심판 등 대하드라마 같은 앞날을 예언하시는 가운데 하신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주님의 지혜와 복, 생명은 평소엔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관한 지식으로 우리 안에 머무르다가 우리가 여기 마르틴처럼 용기를 내어 실천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 흘러들어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고, 부디 올 한 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신앙으로 진입하는 우리 모두 되게 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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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31(D1)-주일예배(2522, 눅15,11-21),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1).pdf
0.47MB

 

2023-12-31(D1)-주일예배.축도.pdf
0.21MB

 

https://youtu.be/iRzbRgxz9Yc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1)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15:11-21)

 

 

진리를 진리 자체의 빛으로 보는 것은 영적 마음이라 하는, 인간의 내적 마음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것이다. 이 마음은 체어리티에 의해 열린다. 이 마음이 열릴 때, 빛과 진리를 이해하는 애정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흘러들어오는데 그것이 깨달음이다. (AR.85) to see truths from their own light is to see them from man’s interior mind, which is called the spiritual mind, and this mind is opened by charity; and when it is opened, light and the affection of understanding truths flow in out of heaven from the Lord. Thence is enlightenment. (AR.85)

 

 

오늘은 2023년 올 한 해 마지막 날이며, 그래서 마지막 주일 설교입니다. 오늘 같은 날은 보통은 한 해를 마감하는 설교를 준비하지만, 지난주를 성탄 주일예배로 드려 2주 연속, 아니 다음 주인 1월 7일 신년 첫 주일예배 역시 공주농아교회에서 드리게 되어 3주 연속 누가복음 강해를 쉬게 되어 고민, 마침 오늘 본문이 어쩌면 그 깊이와 메시지에 있어 한 해를 마감하는 귀한 메시지일 수도 있겠다 싶어 그대로 준비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인생에 있어 거의 비슷한 패턴을 통해 회심을 경험하는, 그래서 거듭남의 일반적 이야기이기도 하여 오늘 같은 송년 주일예배 본문으로도 아주 적절하다 생각되오니 부디 깊이 경청하셔서 그 가운데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꼭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아버지께 받은 상속 재산을 집을 나가 먼 나라에 가 허랑방탕 모두 탕진한 아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주님 앞에 탕자이고, 탕자가 겪게 될 운명은 어떤 것이며,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회개란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의 의미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여기서 아들이 둘이라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있는 두 가지 마음을 뜻합니다. 즉 큰아들은 속 사람이라는 마음이고, 작은아들은 겉 사람이라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재산은 주님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에게로 보내주시는 선과 진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작은아들, 곧 둘째가 재산을 나눠달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넣어주실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걸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누구나 처음 진리를 배울 때는 그것이 자기 것인 줄 압니다. 주님이 주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주님은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하되 스스로 거듭나는 것처럼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절과 14절에서는 자기 몫의 재산을 받은 둘째 아들의 방탕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둘째 아들이 재물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갔다는 것은, 겉 사람이 진리를 행하지는 않고, 머리에 쌓아 두기만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주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걸 뜻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마치 진리를 모르는 사람처럼 세상 즐거움을 좇아 살게 되며, 그러면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진리와 선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세상 욕심에 빠져 살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끊어져 더 이상 속 사람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흘러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천국을 향해, 주님을 향해 항상 열려있어야 할 내면의 창문이 닫히는 것이며, 그래서 이런 이유로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늘 세상일에 몰두, 몰입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저지른 악과 거짓들로 인해 선과 진리들이 파괴됩니다. 그것이 둘째 아들이 재산을 허랑방탕 탕진하는 것이고, 크게 흉년이 들어 비로소 궁핍해지는 것입니다.

 

흉년 상태, 즉 선과 진리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15절과 16절에서는,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044:4항을 보면, ‘돼지는 간통자들의 지옥에 사는 사람들의 불결한 사랑을 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돼지를 친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잃게 되면 점점 더 간음의 욕망에 깊이 빠져든다는 뜻입니다. 물욕에 빠질 수도 있고, 명예욕에 빠질 수도 있는데, 최종적으로는 간음의 욕망에 깊이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음의 악은 부부의 순결한 사랑이라는 가장 고결한 선과 대척점에 있는 악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의미로 부부의 순결한 사랑은 선과 진리의 순수한 결합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간음은 선과 악, 또는 진리와 거짓이 섞이는 것이고, 그러므로 거룩한 것에 대한 모독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음은 가장 가증스러운 악입니다. 실제로 천국에 3층천이 있다면, 그에 대한 가장 깊은 지옥 역시 있는데 그 지옥이 바로 이 간음자들의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돼지를 키우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지켜내지 못하면 나중에는 가장 나쁜 상태, 즉 선과 진리를 모독하는 상태로까지 떨어질 수도 있음을 나타냅니다.

 

본문에는 또 그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으나 그것마저 주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 영어 성경에는 그가 곡식의 껍질로 배를 채우려 했으나 주는 자가 없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곡식의 속살은 본래 선을 뜻하고, 그것을 덮고 있는 껍질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돼지가 먹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라 간음의 욕망과 결탁한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면 배를 채운다고 할 때, 배(belly)는 무슨 뜻일까요? 배는 사람의 내면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돼지가 먹는 곡식 껍질로 배를 채우고자 했다는 것은 내면의 욕망을 감추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하려 하는 것을 뜻하고,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은 그럼에도 진리가 없기 때문에 거짓으로 속내를 감출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 참고로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식물 이야기’ 14장, ‘탕자는 왜 하필이면 쥐엄 열매를 먹었을까? 가난한 자의 식량, 쥐엄 열매’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흥미로운 내용들이 더 있으니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떠난 먼 나라는 분명 유대인 마을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대인 마을에서는 돼지를 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 요단 동편의 베뢰아는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린 유대인 지역이었다. 그 북쪽에 있는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둘째 아들이 떠난 먼 나라는 아마도 데가볼리에 속한 열 개의 이방인 도시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돼지의 사료로 가장 값싸고 영양소가 풍부한 쥐엄 열매를 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땅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떨어졌다. 둘째 아들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놓고 돼지와 쟁탈전을 벌여야 했다.

 

유대인들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돼지와 쥐엄 열매가 오버랩되면서 둘째 아들의 비참한 상태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콩과에 속하는 쥐엄 열매는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사람이 정말 먹을 것이 없을 때 마지막에 먹는 식량이었다. 보통 끓는 물에 쥐엄 열매를 넣어서 죽을 만들어 먹었다. 그 안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필수 영양분들이 고루 들어 있었다.

 

 

새 교회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이 거짓을 말하고 거짓된 행동을 하는 것은 선과 진리의 지식을 안 다음부터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지식이 없으면 그나마 거짓된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 요즘 특히 어느 야당 대표의 여러 가지 사법 리스크와 그런 그를 향후 대통령 삼기 위해 끝까지 몰염치한 짓을 서슴치 않는 그 야당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누구에게나 그 옳고 그름이 불 보듯 뻔한 일을, 그러나 그들은 두 눈 꾹 감고 애써 외면하면서 버젓이 국회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는데요, 이 역시 진리를 모두 잃어버려 분별력과 수치심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속내를 감출 만큼의 분별력이나 수치심도 없는 것이지요.

 

탕자가 그렇게까지 추락할 때, 비로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회개가 올라옵니다. 진리와 선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회개를 할 수 있을까요? 내면의 추악한 것들이 온 세상에 드러나고, 그로 인해 자기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갈 때, 비로소 그동안의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됐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생각하며 회개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 아마도 그 야당 대표도, 그리고 그 야당 소속 많은 국회의원들도 나중에 사법처리 되어 감방에 갇혀 그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때에야 비로소 이런 순간들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탕자의 회개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본문 17절에는 탕자의 첫 번째 회개의 고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여기서 품꾼의 영어 성경 표현은 품삯을 받는 종(hired servant)입니다. 말씀에서 종은 속 사람을 섬기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할 때는 선과 진리를 풍족하게 소유하지만, 속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선과 진리의 유입이 끊어져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탕자가 주님 앞에 드리는 첫 번째 회개의 고백입니다.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탕자의 두 번째 고백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속 사람을 뜻하고, 아버지는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탕자의 두 번째 고백은, ‘제가 속 사람의 말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해서 주님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탕자의 세 번째 고백은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입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품꾼은 속 사람에게 복종하는 겉 사람을 뜻하는데,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복종하는 겉 사람입니다. 품꾼으로 상징되는 겉 사람은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나를 품꾼으로 보소서’라는 말은, 속 사람과 단절되었던 겉 사람이 회개하여 속 사람에게 복종할 때, 처음에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처음에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속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밑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절박함에서 비롯되는 복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온 탕자의 회개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자신에 대한 연민, 주님을 향한 죄스러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들이 일어나 드디어 아버지를 만나러 갑니다. 그 모습을 2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일어난다는 것은 세상만 바라보며 살던 탕자가 주님을 향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거리가 먼데도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오십니다. 거리가 멀다는 것은 회개의 노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전 시간에 주님은 우리의 적은 노력을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것은 탕자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회개가 얼마나 진정한 회개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그의 절박한 마음을 보시고, 멀리서 달려오십니다. 멀리서 달려오시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적은 노력을 귀하게 여기시고, 부족한 회개를 받아들이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그의 목을 안으셨습니다. 목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통로를 뜻합니다. 그래서 목을 안는 것은 그동안 막혀있던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통로를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그곳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는데,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됩니다. 그것이 주님이 입을 맞추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속 사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신앙인들이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지, 그리고 바닥까지 떨어진 다음에 어떻게 다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지를 배웠습니다. 계시록 2장 5절에도 회개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가끔 자신을 돌아보면서 처음 진리를 알았을 때의 순수한 열정으로부터 멀리 떠내려왔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은 아주 복잡해서 과거의 상태와 현재의 상태를 어느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어떤 부분은 더 단단해졌을 것이고, 어떤 부분은 해이해진 부분도 있겠지요. 또 어떤 부분은 문제가 많아서 거듭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 고백하여 그 걸림돌을 필히 제거해야 합니다. 계시록 2장에서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하신 것은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면 부끄럽고 죄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드는 것 자체가 주님 앞에 감사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서는 그런 마음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회개해야 할까요? 먼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회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어떤 행위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찾아내 그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홍수가 났을 때 급류에 휩쓸리게 되면 처음 출발한 지점보다 한참 아래쪽으로 떠내려가게 됩니다. 그것처럼 아주 작은 잘못된 실수 하나로 인해 나중에는 주님으로부터 아주 멀어집니다. 미국 새 교회도 처음에는 하나의 교파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교리에 대한 작은 이견 때문에 둘로 갈라졌고, 그로 인해 많은 차이가 생겼습니다. 결과적으로 한쪽은 크게 부흥하고, 다른 쪽은 쇠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는 어떤 행위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는가를 찾아내어 주님 앞에 그것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거듭남을 위해 회개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달려와 우리의 목을 안아주시고 입을 맞춰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또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촛대는 교회를 의미하고, 가장 큰 의미로는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시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로부터 배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안전하고 행복한가 하는 것은 교회 안에 있을 때는 모릅니다. 탕자처럼 교회를 떠나 있을 때 절실히 느낍니다. 주님의 말씀을 두렵게 받아들여 회개하고, 또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

 

아멘

 

원본

2021-04-2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3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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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5(D2)-성탄예배(2521, 눅2,8-11, 성탄절, 공주농아교회),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pdf
0.41MB
성찬.pdf
0.14MB
2023-12-25(D2)-성탄예배.축도.성탄절.공주농아교회.pdf
0.15MB

 

https://youtu.be/JZXdWxYWd3U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2:8-11)

 

 

주님의 성탄(聖誕)을 공주농아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제가 지난 2019년 성탄절을 여러분과 함께하였으니 만 4년 만에, 그것도 너무나도 귀한 성탄절을 이렇게 다시 공주농아교회와 함께하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기쁘고 감사한 날에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안, 천국의 평화를 전합니다. 이 아침, 이 시간, 이 본당에 주님의 임재, 천국의 빛이 환히 비추시기를, 그래서 모두의 영과 육이 활짝 열려 오늘 저를 이 자리 세워 여러분에게 전하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온전히 이해되며,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하시기를, 그래서 천사들처럼 우리도 말씀으로 주님과 결합하여 이 예배가 참으로 주님께 열납되는 귀한 시간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한 가지, 곧 주님의 너무나도 귀한 이 성탄 소식을 왜 하필이면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천민 계급이라 할 수 있는 목자들에게 알리셨을까 하는 걸 나누고자 하며, 이를 통해 목자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일어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숨을 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반대로, 사람이 산소통 없이 물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둘 다 숨을 쉴 수 없어 죽습니다. 물고기는 아가미 호흡을, 사람은 폐 호흡을 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사람은 얼굴에 있는 이 육의 눈으로 영적 존재를 볼 수 없습니다. 육의 귀로 들을 수도 없고요. 영적 존재인 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눈엔 우리가 사는 이 자연계가 보이지 않고, 자연계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두 세계가 전혀 달라 서로를 직접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창조주가 정하신 질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은 주의 사자, 곧 천사를 볼 수도, 그들이 전하는 소식을 들을 수도 있었는데요, 이 어찌된 일일까요?

 

성경에 보면, 천사들 같은 영적 존재들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 있는데요, 우선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있습니다. 그가 제사장 직무를 행하러 성전에 들어가 분향할 때, 향단 우편에 나타난 주의 사자, 곧 천사를 통해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1:13) 하는 예고를 받습니다. 동일한 사건이 이번엔 주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일어나지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1:35) 하는 놀라운 소식을 고지받습니다. 이외에도 주님이 변화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하신 모습을 본 제자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요한도 있고요, 부활하신 주님을 무덤가에서 처음 뵌 막달라 마리아도 있습니다.

 

주님의 질서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육의 눈이 아닌, 영의 눈, 곧 영안이 열려 영으로 본 것이며,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목자들 또한 그들의 영으로 천사를 본 것임을 알 수 있는데요, 자, 그렇다면, 더욱 놀랍습니다. 당시 저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계 리더십들이 수두룩했음에도 그들은 한 사람도 천사의 방문을 받지 못한 반면, 엉뚱하게도 한밤에 밖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는 이 놀라운 방문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외모가 아닌,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천사를 목자들에게 보내셨다는 것은 목자들의 마음속 중심이야말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고요, 추운 밤 밖에서 양 떼를 돌보던, 정말 역한 양 똥 냄새 밴 거적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목자들이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오히려 정말 마음 편하신 그런 사람들이었음을, 그래서 주님이 그들의 영안을 열어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목자’는 보통은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을 뜻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은 속뜻으로는 사람의 마음속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사랑)를 뜻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이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는 말씀은 ‘진리가 무엇이고 선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이 어두울 때에도 여전히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법도를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들’을 뜻하며, 그래서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으신 것이고, 그래서 천사는 다른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목자들에게 보내심을 받아 주님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16:9)

 

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다행히 우리 곁에 바로 이런 목자의 삶을 살고 계신 분들이 있는데요, 바로 우리 서미례 전도사님과 그 가정입니다. 농아의 삶을 사는 성도들을 오랜 세월, 이렇게 한곳에서 묵묵히 섬기신다는 것은 정말 말이 쉽지 저 유명하다는 목사, 목회자라 할지라도 아무나 못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도 ‘고맙다. 너희 아니면 딱히 누구에게 이 교회를 맡겨야 할지 잘 모르겠구나...’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노력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처럼 천사들을 만날 수도, 주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남 탓 안 하고, 그냥 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모든 걸 사랑으로, 즉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그런 사람이 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표현이 좀 미안한데요, 무식하면, 무지하면 사랑도 못해요. 사랑과 지혜는 같이 가는 겁니다. 사랑은 지혜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사랑이 되고, 지혜는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걸 모르면, 나는 그게 사랑인 줄 알고 열심히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크게 사고 친 게 되고 마는, 그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성경, 곧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시고, 힘써 읽어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셔야 하는데요, 그중의 하나를 말씀드리면,

 

여러분, 천사들은 보는 것과 듣는 것, 즉 시력과 청력 중 어느 걸 더 중요하게 여길까요? 힌트를 드리면, 시력, 시각은 이성, 지식, 머리에 해당하고, 청력, 청각은 의지, 지혜, 가슴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네, 맞습니다. 바로 듣는 것, 곧 순종을 가장 큰 덕목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통해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15:22)

 

즉, 일상생활 가운데 잘 모르는 게 있으시면 여러분의 목자이신 서미례 전도사님과 상의하신 후, 전도사님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께 순종하는 것,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전도사님은 전도사님의 모습으로 여러분 곁에 와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인데요, 서미례 전도사님을 대하는 태도가 곧 주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실지 몰라도 주님은 그렇게 여기신다는 사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진리는 사실 더욱 확장할 수 있는데요, 바로 부부는 서로를 주께 하듯, 자녀는 부모를, 부모는 또한 자녀를 각각 주께 하듯, 직장에서, 사회에서 누구를 대하든 다 주께 하듯 대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걸 가르쳤습니다.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22, 25)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엡6:1)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3:23)

 

네, 여러분, 살면서 우리 주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생전에 주님을 사랑하는 연습, 훈련을 항상 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일상 가운데 이런 훈련을 열심히 하면,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과 같이 되어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걸 무척 편안해하시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으며, 그래서 비록 육으로는 지상에 있지만, 영으로는 늘 천국과, 그리고 주님과 늘 연결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목회자든 성도든, 부모든 자녀든, 그리고 직장 상사든 평직원이든 저마다 다 나름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각자 주님 앞에서 해결할 문제고, 우리는 저마다 주님 앞에 자기 할 도리만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너는, 누구는 이렇다 저렇다 비난과 지적질로 세월을 허송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한두 가지 비밀을 더 말씀드리면, 여러분, 사람은 본질적으로는 영입니다. 사람의 사후, 이 몸은 지상에 남기고 가 썩어 없어지지만, 영은 영원히 영계, 즉 천국이나 지옥에서 영원히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영이 육이라는 옷을 입고 지상에서 왔다 갔다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의 눈으로 오직 자연계의 것만 볼 수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영, 심지어는 자신의 영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겉으로는 멀쩡하나 속으로는 악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사후 영계에서 자신의 영의 그 괴물 같은 모습을 보고서는 그만 기절할 정도로 놀란다고 합니다. 우리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람 몸의 여러 감각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그리고 만지는, 이 신체의 오감은 사실은 영의 감각인데요, 사람의 사후 영이 되면, 이 감각들은 고스란히, 아니 몇 배로 확장된다고 합니다. 그때는 더 잘 보고, 더 잘 들을 수 있게 되지요. 그렇다면, 우리 같은 농아인들은 어떻게 될까요? 네, 비록 육으로는 이런 장애 가운데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영은 멀쩡, 너무나도 멀쩡하여 전혀 아무 이상 없는 상태입니다. 참 다행이지요. 그러나 한편, 참 안타깝습니다. 영은 멀쩡한데 육이 작동하지 않으니까요! 육의 감각은 사실은 영의 감각이 연결되어 움직이는 건데 지금 그 연결이 끊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돌이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영과 육이 서로 연결되게 할 수 있을까요?

 

32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막7:32-35)

 

우리가 잘 아는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운 좋게 나았다 생각할 게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이 사람 안에 흘러 들어갈 수 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무리 주님이 안수하셔도 이 사람의 속 사람 상태가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이면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애당초 이 사람의 속 사람 상태가 그랬다면 주님은 이 사람을 안수하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육은 영의 옷이라 했습니다. 즉 정말 중요한 건 육이 아니라 영, 곧 당사자 본인의 속 사람의 상태인 것이며, 이 상태는 우리가 오늘 본문 목자의 삶을 살 때, 열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명심하시고, 하나하나 생활 속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 다 주님 뜻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악과 거짓을 힘써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서서히 우리 영이 깨어나며, 그리고 천국을 향한 창문이 열리는데요, 그러다가 혹시 주님이 기뻐하시면, 즉 때가 되면 지금은 끊어져 있는 이 듣는 능력이, 지금은 굳어져 있는 이 말하는 능력이 다시 연결되고 회복되어 위 마가복음 말씀처럼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리는’ 놀라운 일이 내 방에서, 혹은 이 본당에서 나 혼자 기도하는 중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 그리고 우리 서미례 전도사님도 역시, 아니 우리 모두 정말 이런 일이 이 교회에서 매우 빈번하게, 그리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날 수 있기를 정말 진심으로 원하고 또 원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의 목자는 ‘진리가 무엇이고 선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이 어두울 때에도 여전히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법도를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그리고 주님을 만나 참된 회개, 진정한 거듭남을 결심한 모든 성도에게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게 하시기를, 이를 위해 오래전 오늘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저 목자들처럼 기뻐하고 감사, 찬송,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 되게 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늘 주님 오신 기쁨의 성탄절을 맞이하여 주님이 종을 보내사 이 교회에게 하시고픈 말씀을 힘써 다 전했습니다. 부디 이 말씀이 마음의 귀, 영의 귀 기울여 말씀을 들은 모든 성도의 안에서 불씨가 되어 불붙게 하시고, 그래서 주님 약속하신 영과 육의 연결이 일어나, 참으로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리는’ 놀라운 일이 이 교회 본당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게 하시기를, 주님은 참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온 교회가 목격하게 하시기를 우리를 사랑하신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옵니다.

 

아멘

 

설교

2023-12-25(D2), 성탄절

공주농아교회에서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수화 통역

공주농아교회 서미례 담임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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