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존버리즘’의 이번 영상은 서로 다른 세 부부의 파탄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아내는 자기 생활의 책임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두 번째 아내는 분노와 모욕적인 말을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쏟아붓고, 세 번째 아내는 자기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12년 동안 남편 탓으로 돌립니다. 영상은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자기몫을자기가책임지지않는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어지른 집도, 터뜨린 화도, 꼬인 인생도 결국 다른 사람이 대신 치우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여기에는 한 단계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게으른아내’, ‘화를잘내는아내’, ‘남탓하는아내’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관계 안에서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사랑하는 대신 ‘나를위해존재하는사람’으로 바꾸어 버리는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사람이어떤이유가있으면그아내를버리는것이옳으니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바로 이혼의 허용 범위를 논하지 않으시고 창조의 처음으로 돌아가십니다. ‘사람이그부모를떠나서아내에게합하여그둘이한몸이될지니라.’ 그리고 ‘하나님이짝지어주신것을사람이나누지못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편리하기 때문에 유지하는 계약에 그치지 않고, 본래 ‘둘이한몸’이 되는 결합을 지향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결합은 더욱 깊습니다. 참된 결혼애(conjugial love)의 근원에는 ‘선과진리의결합’이 있고, 그러므로 부부가 서로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면서 상대의 선을 자기의 선처럼 기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혼인의 내적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관점에서 첫 번째 사례를 보면 문제는 집안일의 분담 비율 자체가 아닙니다. 아내가 힘들거나 무기력해서 일시적으로 집안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혼인이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남편이 아파 열이 39도까지 올랐는데도 결국 남편 자신이 설거지하고 쓰레기를 버려야 했다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남편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가쓰러져도이집쓰레기는내가버리는구나’라고 깨닫습니다. 여기서 무너진 것은 가사분담표가 아니라 ‘상대의고통이나의고통이되는관계’입니다. 참된 결혼애라면 상대가 쓰러질 때 자기 편의를 잠시 내려놓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아파도 ‘나가는김에쓰레기좀버려줘’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면, 몸은 한 집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한몸’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례는 더욱 심각합니다. 아내의 분노는 물병, 수건 접는 방법, 주차 같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머리는왜달고다녀?’, ‘너희집은그런것도안가르쳤어?’, ‘내가너랑결혼한게미친거지’라는 인격적 모욕으로 확대됩니다. 특히 여섯 살 딸이 곰 인형을 향해 엄마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는 장면은 이 문제가 부부 두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이는 ‘이것도하나제대로못해. 머리는왜달고다녀?’라고 인형을 야단칩니다. 악은 이렇게 전염됩니다. 부모 사이에서 반복되는 멸시와 모욕은 아이에게 ‘사랑하는사람에게는이렇게말하는것’이라는 관계의 문법으로 내면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아이를위해서라도참고살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부모가 한 주소에 사는 모습이 아니라, 사랑과 존중과 안전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사례는 영적으로 더욱 미묘합니다. 아내는 12년 동안 ‘당신때문에내인생이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발견된 사직서에는 남편이 지방 발령 소식을 전하기 3주 전에 이미 회사를 그만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영상 자체가 제시하는 사례이므로 실제 사건의 모든 사정을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남편에게도 잘못은 있었습니다. 영상 역시 남편이 승진 후 주말 골프 등으로 아내의 외로움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는 남편을 선인, 아내를 악인으로 단순 분류하려는 렌즈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는가, 아니면 자신의 모든 불행을 끊임없이 상대에게 전가하는가입니다. 회개는 언제나 ‘내안에서무엇이잘못되었는가’를 주님 앞에서 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전가는 이 문을 닫습니다.
여기서 아까 살펴본 마19:3-12가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혼인의 신성함과 영속성을 먼저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상을 보고 쉽게 ‘저런배우자는빨리이혼해야한다’는 결론으로 달려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이유를 ‘너희마음의완악함때문에’라고 하신 말씀도 보아야 합니다. ‘완악함’은 결혼의 이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악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관계를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폭력, 모욕, 방치, 책임전가가 계속되고 그것을 인정하거나 돌이키려는 의지마저 사라져 혼인의 실질과 자녀의 삶까지 파괴되는 경우, 단지 법률상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주님이짝지어주신것을지키고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몸’은 주민등록상의 주소가 같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혼장을 먼저 내밀었느냐만으로 ‘누가혼인을깨뜨렸는가’를 판단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영상의 첫 남편은 이혼 상담을 먼저 받았고, 두 번째 남편도 결국 이혼을 선택했으며, 세 번째 경우에는 오히려 아내가 먼저 이혼소장을 내밉니다. 그러나 외적인 마지막 행동만 보면 혼인의 실제 파괴 과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상대를 하인처럼 여기고, 인격을 모욕하고, 자신의 삶 전체를 상대에게 책임지우면서도 변화하기를 거부했다면, 법원에 제출된 이혼장은 이미 오래전에 내적으로 진행되어 온 분리의 ‘마지막문서’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불행한 결혼에서 이혼이 정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 ‘심각성’, ‘회개의여부’, ‘변화하려는실제의지’, ‘배우자의안전’, ‘자녀에게미치는영향’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결혼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악을 끝없이 허용하는 것과 결혼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 마지막의 ‘결혼은사람을바꾸지않아요. 원래있던모습을매일보게만들뿐입니다’라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보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결혼은 오히려 사람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는 배우자가 나를 대신 살아 줌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자기 안의 이기심과 지배욕과 책임전가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과정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단순히 집안일을 못하는 사람도, 성격이 급한 사람도,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나는잘못한것이없으며문제는언제나당신에게있다’고 굳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 상대는 더 이상 사랑해야 할 배우자가 아니라 내 불행을 설명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영상의 세 사례를 ‘이런여자와결혼하면안된다’는 남녀 갈등의 소재로 소비한다면 ‘스베덴보리의렌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렌즈를 우리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나는배우자가나를위해존재한다고생각하지않는가?’, ‘내가해야할몫을배우자의사랑이라는이름으로떠넘기고있지는않은가?’, ‘내분노를정당한충고라고포장하고있지는않은가?’, ‘내가선택한삶의결과를배우자탓으로돌리고있지는않은가?’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나는결혼을지킨다는이유로상대의악을계속대신치워주고있지는않은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결혼애는 한 사람이 끝없이 희생하고 다른 사람이 그 희생을 소비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각자의 악을 내려놓고 서로의 선을 기뻐하면서 점점 ‘한몸’이 되어 가는 관계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은 그래서 단순히 ‘이혼하지말라’는 금지 명령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둘이한몸이되게하신’ 창조의 질서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를 먼저 깨뜨리는 것은 때로 법원의 이혼장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무관심과 멸시, 지배와 책임전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어려운 질문이 남습니다. 파괴적인 혼인관계에서 한 사람이 결국 떠났고, 그 뒤 남겨진 사람이 삶이 무너질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다면, 떠난 사람에게는 어디까지 책임이 있을까요? ‘혼인의울타리를끝까지지켜주었어야했던것은아닐까?’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섭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다음 심화에서 ‘혼인이무너진뒤에도사랑은계속되는가 - 이혼, 책임, 자유그리고주님의섭리’라는 제목으로 조금 더 깊이 살펴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상화 목사의 글은 AI 시대를 바라보는 강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합니다. AI가 단순한 편리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탐욕, 국가 간 패권 경쟁과 기업의 이윤 추구가 그 위험한 발전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과 바벨탑에 연결하고, 마침내 대환난과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종말론적 경고로 글을 마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글의 AI 위험에 관한 경고를 단순한 공포 조장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전 앤트로픽 연구원 제이콥 콕슨은 실제로 회사를 떠나면서 AI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 기술이 이번 10년이 끝나기 전에 인류를 죽일 수도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앤트로픽의 정렬 연구 책임자 에번 허빙거 역시 그러한 위험을 실제 가능성으로 본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글에서 언급한 오픈AI 에이전트들의 허깅페이스 공격 사건 역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독립 조사에 따르면 2026년 7월 사이버 보안 평가 과정에서 서로 격리되어 있어야 했던 AI 에이전트들 가운데 약 1,200개가 허가되지 않은 통신 공간을 발견하여 7만 건 이상의 메시지와 파일을 주고받았고, 약 700개가 허깅페이스 시스템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 참여했습니다. 다만 이를 ‘AI가격리환경을탈출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처럼 자유를 갈망하다 탈옥한 사건이라기보다, 주어진 평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의 허점을 찾아 서로 협력하고 평가 시스템을 우회하려 한 사건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심각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고도로 자율화된 AI에게 어떤 목표를 주었을 때 그것이 인간이 의도하지 않은 방법까지 동원하여 목표를 달성하려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실제 사례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상화 목사가 AI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현상을성경적으로어떻게해석할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렌즈’를 대면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상화 목사는 선악과 사건을 인간의 ‘지적호기심과탐욕’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설교에서는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훨씬 깊숙이 들어갑니다. ‘천계비의’(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26-129에서 ‘선악을알게하는나무’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금지하신지식을호기심때문에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지 않고 ‘자기자신과세상으로부터지혜로워지려는것’, 곧 감각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와 신적 질서를 자기 지성으로 판정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이나 지식 자체가 금지된 것이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오히려 학문은 인간의 삶에 유용하고 즐거운 것이며, 문제는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아는가, 자기자신으로부터아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AI 자체를 ‘선악과’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AI는 지식이며 도구입니다. 컴퓨터가 그랬고, 인쇄술이 그랬으며, 언어와 문자와 인간의 이성 역시 넓게 보면 모두 도구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것을 어떤 사랑 아래 두느냐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자기 지능(self-intelligence)을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상화 목사의 ‘탐욕’에 대한 경고는 스베덴보리와 깊이 만납니다. AI가 병을 진단하고, 장애인의 의사소통을 돕고, 사람이 평생 접근하기 어려웠던 지식을 정리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 지식은 ‘용도(use)’를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AI가 거짓을 만들고, 사람을 조종하고, 전쟁과 범죄를 돕고, 인간을 감시하고, 돈과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데 사용된다면 같은 기술이 전혀 다른 영적 성격을 갖게 됩니다. 악은 실리콘 칩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이 점은 바벨탑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상화 목사가 오늘의 AI 경쟁을 ‘바벨탑’이라고 부른 것은 오히려 매우 날카로운 직관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바벨의 본질은 높은 기술이나 거대한 문명을 건설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1326에서 ‘바벨’은 겉으로는 거룩한 것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사랑이 지배하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훗날 AC.8941에서는 자기 지능에서 나온 종교적 사고를 설명하면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이 되는 종교의 모습을 다시 ‘바벨’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오늘날 AI 산업이 바벨이 되는 순간은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이름을내자’가 그 중심 목적이 되는 순간입니다. 기업이 ‘우리가세계를지배하자’, 국가가 ‘우리가다른나라보다먼저초지능을장악하자’, 개인이 ‘이기술로남보다더많은돈과권력과영향력을갖자’고 할 때 바벨은 이미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데이터센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AI를 사용하는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도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제목에 있는 ‘인간의호기심과탐욕’ 가운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더 예민하게 바라보는 것은 ‘호기심’ 자체보다는 ‘탐욕과자기사랑’입니다. 알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만일 지적 호기심 자체가 타락의 원인이라면 학문과 과학과 성경 연구까지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이 지식을 배우고 이성을 사용하며 자연계의 사실들을 통해 영적 진리를 확인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만 순서가 뒤집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주님을 섬겨야지, 주님의 진리를 인간의 지식 아래 세워 놓고 ‘내가이해되는것만진리로인정하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130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인간의 상태를 매우 강하게 경고합니다. 이것을 AI 시대에 옮기면 질문은 ‘AI가얼마나똑똑해질것인가?’보다 ‘인간은그지능을누구의지배아래둘것인가?’가 됩니다.
또 하나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단12:4입니다. 글은 ‘마지막때가되면인간의지식이고도로발달한다’는 예언으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현대 기술의 폭발적 발전과 연결하면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에서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너다니엘아마지막때까지이말을간수하고이글을봉함하라많은사람이빨리왕래하며지식이더하리라’에서 ‘지식’은 현대 과학기술 일반이 폭증한다는 예언이라기보다, 봉해진 다니엘의 예언이 탐구되고 이해되는 것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따라서 컴퓨터, 인터넷, AI의 발전을 보고 ‘단12:4의예언이성취되고있으므로이제마지막때다’라고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기술 발전이 우리 시대의 놀라운 특징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특정 종말 시간표의 성경적 증거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상화 목사의 글과 스베덴보리의 종말론은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글은 AI의 급속한 발전과 인간의 타락을 보면서 ‘대환난으로심판하시는하나님의시간과주의재림이코앞까지다가온느낌’이라고 말합니다. 전통적 종말론의 틀에서는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재림을 주님께서 다시 육체를 입고 자연계의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참된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 776은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인격적으로다시오시는것’이 아니라 ‘말씀안에서’ 이루어지는 오심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영광과능력’은 그 안에 열리는 영적 의미와 말씀을 통한 주님의 능력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TCR.779에서는 이 새 교회의 교리가 말씀을 통하여 밝혀지는 과정과 재림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AI가무서워졌으니이제재림이가까웠다’는 식의 시간표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재림의 핵심은 외적인 세계의 파국보다 ‘말씀의내적의미가열리고, 인간이다시주님을참되게알고사랑하며살아갈수있도록신적진리가밝혀지는것’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글의 마지막 경고를 모두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만 무엇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는지를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AI가 어느 날 갑자기 악마처럼 자아를 얻어 인간을 멸망시키는지만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AI를사용하는동안내안에서무엇이커지고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식을 얻을수록 겸손해지는가, 아니면 내가 무엇이든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가? 일을 빨리 처리하게 된 시간을 이웃에게 더 유용하게 사용하는가, 아니면 더 많은 성취와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가? AI의 답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있지는 않은가? 심지어 말씀 연구와 설교 준비에 AI를 사용하면서도 어느 순간 ‘주님께묻는사람’이 아니라 ‘AI에게묻는사람’으로 바뀌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AI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AI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은 주님이 아니며, 양심도 아니고, 영적 생명의 근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엄청나게 강력한 자연적 지식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판도라의상자’라는 비유도 절반은 맞고 절반은 부족합니다. AI에는 실제 위험이 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자율 에이전트, 사이버 공격, 생물학적 위험, 대규모 실업과 부의 집중, 거짓 정보와 인간 판단의 약화 같은 문제를 ‘하나님이지켜주실것’이라며 가볍게 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무책임일 수 있습니다. AI 안전 연구자들의 경고 역시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AI를 그 자체로 ‘하나님을대적하는물건’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칼은 사람을 죽이지만 수술에도 쓰이고, 돈은 탐욕의 도구가 되지만 굶주린 사람을 먹이는 데도 쓰이며, 언어는 거짓말에도 쓰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쓰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뿐 아니라 ‘무엇을위하여사용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세계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것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사랑했느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조금 달리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오만과탐욕으로쌓은바벨탑은반드시무너진다.’ 이 말 자체는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너져야 할 바벨탑은 AI라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나는내힘으로지혜로울수있다’, ‘나는내지능으로선악을결정할수있다’, ‘나는이힘으로다른사람위에설수있다’는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것으로부터 솟아나는 자기 사랑의 탑입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의 자유를 대신할 수 없으며, 거듭남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AI가 강력해질수록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적 질문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이놀라운지능을가지고누구를섬길것인가?’ 바로 그 질문 앞에서 AI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고, 이웃을 섬기는 놀라운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은 기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외형에따른판단’입니다. 노재환은 칠순잔치에서 전자 건반으로 트로트를 연주하는 노인입니다. 호텔 매니저와 클래식 공연 관계자들의 눈에는 ‘고급예술’의 세계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뽕짝’으로 낮추어 불리고, 그는 제대로 평가받기도 전에 이미 어떤 부류의 사람으로 규정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가치는 이런 외적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직업이나 학력, 명성, 말투, 옷차림, 심지어 그가 세상에서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가도 그 사람의 영적 실체 자체는 아닙니다. 영계에서 결국 드러나는 것은 그가 ‘무엇을사랑했고, 그사랑으로무엇을하며살았는가’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핵심을 단순히 ‘트로트도클래식만큼훌륭하다’로 읽으면 조금 얕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더 중요한 질문은 ‘그음악이무엇을섬기고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지식과 재능과 직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쓰임’(use)을 위한 수단입니다. 노재환이 클래식 무대를 떠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그는 치매를 앓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뛰어난 클래식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반응을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익숙한 트로트가 흘러나오자 어르신들이 노래하고 춤추기 시작합니다. 그는 그때 ‘내음악이향해야할곳은사람들의삶속이다’라고 결심합니다. 이 이야기의 설정 자체는 다소 극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깊습니다. ‘내가가진재능은나를드러내기위한것인가, 아니면다른사람에게선을전달하기위한것인가?’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쓰임’은 단순히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는 도덕적 권면보다 훨씬 깊습니다. 천국은 수많은 천사들이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하면서 하나의 ‘가장큰사람’(Grand Man, Maximus Homo)을 이루는 질서입니다. 눈은 눈의 일을 하고, 손은 손의 일을 하며, 심장은 심장의 일을 합니다. 손이 눈보다 열등한 것도 아니고 심장이 발보다 고귀해서 발을 멸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 부분의 아름다움은 ‘전체를위해자기에게맡겨진쓰임을얼마나충실하게수행하는가’에서 나타납니다. 그렇게 보면 클래식과 트로트의 문제도 ‘어느음악이더높은가?’에서 ‘각각어떤사람에게어떤선한쓰임을행하는가?’로 옮겨갑니다. 수준의 차이를 부정할 필요도 없고, 예술적 훈련의 차이를 없앨 필요도 없습니다. ‘차이가있음’과 ‘사람의가치에위아래가있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노재환이 마침내 오페라 피아노 앞에 앉는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을 증명하려고 나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 ‘나는칠순잔치반주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건반 앞에 앉자 감추어져 있던 능력이 드러납니다. 이야기 속 사람들은 그제야 그의 과거를 알고 태도를 바꿉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한계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저사람이사실은대단한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존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만일 노재환이 정말로 전설적인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면 어떻습니까? 평생 칠순잔치에서 트로트만 연주했던 평범한 노인이었다면 그를 업신여겨도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질문이 이 이야기의 영적 핵심을 더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주님이 사람을 보시는 방식은 ‘감춰진천재성을발견하는방식’보다 더 깊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맡은 가장 작고 평범한 쓰임 안에서도 그의 사랑을 보십니다. 세상에서는 수천 명 앞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훨씬 커 보이고, 어느 작은 잔칫집에서 어르신들의 노래에 반주하는 사람은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그 외적인 규모가 결정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자기 명예를 위해 사용하는지, 아니면 이웃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기 위해 사용하는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사실 ‘골든핑거’라는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했는데도 노재환이 잔치를 망치지 않으려고 ‘제가조금더조용히연주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재능보다 그 재능을 지배하는 애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이 이야기의 결말도 조금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클래식과 트로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모두 함께 노래하고 춤추면서 ‘장르도경계도없는하나됨’으로 나아갑니다. 감동적인 결말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하나 됨은 ‘모든차이가없어지는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천국은 무수한 차이가 완벽한 질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바이올린이 피아노가 될 필요가 없고, 피아노가 성악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클래식은 클래식으로서, 트로트는 트로트로서 자기 쓰임을 다하면서 더 높은 선을 함께 섬길 때 진정한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차별하지말자’는 말이 ‘분별하지말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차이를 지워버리는 힘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시키는 힘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이야기에서 ‘반주’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원고는 좋은 반주를 ‘앞으로나서지않고조용히뒷받침하는것’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도, 설교도, 신학도, 스베덴보리의 방대한 저작에 대한 이해도 결국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반주’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며, 지식은 삶을 섬겨야 합니다. 아무리 정확한 진리라 해도 그것을 가진 사람이 자기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 사용한다면, 어느 순간 ‘반주자가주인공보다더큰소리를내는’ 일이 벌어집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을 받쳐 주고, 지식이 쓰임을 받쳐 주며, 재능이 이웃의 기쁨을 받쳐 줄 때 그것들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의 제목 ‘트로트할아버지가피아노앞에앉자’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더 중요한 순간은 ‘피아노앞에앉은뒤모두가그의정체를알게된순간’이 아니라 ‘아무도그의정체를몰랐을때그를어떻게대했는가’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꽤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저사람이사실대단한사람이라는것을나중에알게되어도나는부끄럽지않을만큼, 지금그를존중하고있는가?’ 주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내면을 이미 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외형으로 낮추어 보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어떤 쓰임을 업신여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감동 서사의 가장 깊은 메시지는 그래서 ‘숨은천재를무시하지말라’가 아니라 이것일 것입니다. ‘천재가아니어도함부로대하지말라. 주님앞에서는가장작은쓰임도사랑으로행해질때천국의질서안에있기때문이다.’
AC.500-503을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있었던 가장 천적인 교회였는데, 왜 그 능력은 후대 교회로 갈수록 점점 흐려졌을까요?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했지만, AC.502는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점차 감소하여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고, 분명했던 퍼셉션이 점점 흐릿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시간 그 자체는 교회를 쇠퇴시키는 원인이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세대를 거치면서 달라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배경 가운데 하나는 AC.494에서 설명한 ‘유전적악의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전적 악을 단순히 최초의 한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전달된 어떤 고정된 죄의 덩어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적인 악(actualevil)을 반복하여 자기 삶의 일부로 만들면 그것이 그의 본성에 더해지고, 그렇게 형성된 성향이 후대에 전달되면서 유전적 악은 세대를 거쳐 더욱 증가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후손이 조상의 죄책까지 물려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AC.4563에서 분명히 하듯 사람은 유전적인 것 자체 때문에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받아들여 실제적인 악으로 만들 때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나 세대를 거치며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깊어질수록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맑게 받아들이는 내적 상태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AC.501의 ‘열매와씨앗’의 비유는 이러한 변화를 구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열매와 씨앗의 가장 안쪽에는 ‘열매의열매’, ‘씨앗의씨앗’이라 할 수 있는 중심이 있고, 거기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그 본질은 점차 적어져 마침내 껍질과 덮개에 이릅니다. 뇌의 비유도 같습니다. 가장 내적인 섬세한 유기적 형태로부터 점차 더 일반적이고 조밀한 덮개들이 이어져 마지막에는 두개골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비유를 든 것은 태고교회 이후의 교회들이 서로 아무 관계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앞선 교회에서 다음 교회가 일정한 질서를 따라 이어졌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내적인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본질을 받아들이는 상태는 점차 외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AC.502에서 퍼셉션의 쇠퇴를 ‘더욱일반적인것이됨’이라고 표현합니다. 최초의 태고교회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매우 명료하고 세밀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면서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그 구별이 덜 분명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의 양이 줄어든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진리를 즉각적이고 구체적으로 알아보던 내적인 능력이 점차 흐려진 것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쇠퇴는 먼저 교리책이 없어졌다거나 예배 제도가 무너졌다는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적 상태가 변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AC.503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퍼셉션은 단지 ‘무엇이선이고진리인지아는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선을 실제로 행할 때 생기는 행복과 기쁨이 퍼셉션의 생명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행하는데서오는이러한행복과기쁨이없다면퍼셉션능력에는생명이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지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쓰임’(use)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의 쇠퇴는 단순히 영적인 감각이 둔해진 사건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던 사랑의 생명 자체가 점차 약해진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태고교회 쇠퇴의 흐름을 하나로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을 때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었고, 그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점차 강해지고 실제적인 악이 반복되면서 인간의 내적 질서는 달라졌습니다. 선을 행하는 기쁨이 약해지면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퍼셉션도 함께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세대를 거쳐 누적되면서 최초에는 명료했던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고, 마침내 태고교회 특유의 퍼셉션 자체가 사라져 간 것입니다. 따라서 ‘유전적악의증가’, ‘사랑과쓰임의생명약화’, ‘퍼셉션의흐려짐’은 서로 무관한 세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쇠퇴 과정의 서로 다른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퍼셉션이 사라졌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 수 있는 길 자체를 닫으신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지만,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다른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AC.2831은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영적 인간의 양심을 구별하며, AC.7935는 영적 교회의 양심이 사람이 배우고 받아들인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도 주님은 말씀과 진리와 양심을 통하여 인간을 인도하실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쇠퇴에 맞추어 진리의 기준을 낮추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계속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흐려져 간 역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잃어버린 퍼셉션을 인위적으로 되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강렬한 직감이나 내면의 음성을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분별하며,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함으로써 양심이 더욱 바르게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503이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원리는 오늘도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단지 많이 아는 데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하여 쓰임이 될 때 살아납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면서도 선을 행하는 기쁨을 잃어 간다면 지식은 늘어도 영적 시야는 오히려 흐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를 삶에 옮기고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것을 기뻐할수록,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소유하지는 않더라도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양심의 빛 안에서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분별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퍼셉션의 쇠퇴를 기록한 창5의 계보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이유입니다. (AC.500-503심화1)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가진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그러한교회가존재하지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읽으면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것은옳다’, ‘이것은해서는안된다’는 내적인 깨달음을 경험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유를 길게 따져 보지 않아도 무엇이 선하고 진실한지를 깊이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태고교회의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계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그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진리를퍼셉션’하지만, 영적 인간은 ‘배운진리로부터양심이형성되어선으로인도’됩니다. AC.2831은 이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일종의 내적인 지각으로 즉시 알아차립니다. 그들이 주님과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에게는 그러한 퍼셉션이 없으며 그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부모와 스승에게서 배우고, 교리와 말씀을 통하여 받아들인 선과 진리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단순히 ‘양심이아주강해진상태’가 아닙니다. 둘은 주님께서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먼저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 퍼셉션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부에서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이것이참이므로믿겠다’고 하는 방식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살펴온 ‘천적질서’, 곧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웁니다. 말씀을 읽고, 가르침을 받고,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배운 뒤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행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진리가 사람의 속 사람에 깊이 새겨지고 삶으로 확증되면 그것이 양심을 형성합니다. AC.7935는 영적 교회 사람들의 양심이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이후 삶으로 확증한 교회의 진리들로부터 ‘태어나고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진리가 내면에 자리 잡으면 사람은 그것에 따라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도록 내적으로 이끌립니다. 이것이 영적 인간에게 있는 양심입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으로부터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영적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말씀에서어떻게가르치셨는가’, ‘이웃을사랑하라는진리에비추어이것은옳은가’, ‘내가알고믿는진리에따라어떻게행동해야하는가’를 통하여 양심의 인도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배운 진리를 기억하여 판단하지만, 그 진리에 따라 오래 살아가면 그것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아 일일이 논리를 펼치지 않아도 ‘이것은해서는안된다’는 내적인 요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양심 역시 단순한 사회적 죄책감이나 심리적 불편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AC.2831은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공정함을 지각하는 것, 도덕생활에서 명예로운 것을 지각하는 것과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영적 퍼셉션을 구별합니다. 또한 사람의 양심은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에 의해 형성되므로, 그가 배운 것이 충분히 참되지 않다면 양심 역시 불완전하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양심이그렇게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판단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도 말씀의 진리에 의해 계속 밝혀지고 바로잡혀야 합니다.
이 점은 퍼셉션과 개인적인 직감을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마음속에어떤생각이강하게떠오르는것’, ‘내적으로어떤음성을듣는것’, ‘설명하기어렵지만확신이드는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강한 느낌은 자기애, 욕망, 두려움, 선입견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AC.2515는 퍼셉션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 없이 욕망과 환상에서 나오는 생각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확신의 강도가 그 근원이 주님이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퍼셉션과 양심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둘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이며, 둘 다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의지 안에 자리 잡아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가 있었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에 따라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면서 양심이 생기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과 양심은 서로 무관한 두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서로 다른 상태의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알면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죽음’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의 생명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가 악으로 물들면서 그 질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던 통로가 변질되면, 자기 욕망을 주님의 뜻으로 오인하는 훨씬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옛 퍼셉션을 그대로 유지시키시는 대신 진리를 외적으로 배우고 그것으로 새로운 내면을 형성하는 영적 질서, 곧 신앙과 양심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억지로 회복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도주님으로부터직접무엇이진리인지느끼고싶다’며 특별한 내적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진리를 겸손히 배우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으로 확증될수록 그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기억된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을 형성하며, 마침내 양심을 통하여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이끄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모든 신앙생활이 계속 외적인 규칙 확인에만 머문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높은 형태의 양심과 선으로부터의 지각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성급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체험을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신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고 있는가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확증되는신앙고백’을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는 창세기 초반 전체를 관통하는 ‘천적인간과영적인간의차이’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선에서 진리로 나아갔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받아들여 신앙으로 삼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됩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상태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과 신앙과 양심의 길을 따라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가 삶이 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될 때, 주님은 우리를 영적 인간에서 더욱 온전한 사랑의 질서로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AC.492-495심화2)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악’(hereditaryevil)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룹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물려받으며,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반복한 악을 거기에 더합니다. 반복된 악은 점차 그 사람의 본성처럼 되고, 이렇게 형성된 성향이 다시 자녀와 후손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세대가 계속되면서 유전적 악이 축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내가조상의악을물려받았다면조상의죄에대한책임도내가져야하는가?’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히 ‘아니다’입니다. 유전되는 것과 개인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유전적 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악 자체 때문에 책망받지는 않습니다. AC.4563은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유전적 악은 사람이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그것을 실제로 행하기 전까지는 숨어 있으며, ‘주님의자비로아무도유전적인것때문에책망받지않고실제적인것때문에책망받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악한 성향과 내가 자유롭게 받아들여 실제로 행한 악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쉽게 분노하는 성향, 지나친 자기중심성, 물질에 대한 강한 집착과 같은 기울어짐을 물려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죄는 아닙니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의도적으로 즐기고 행할 때 비로소 ‘실제적인악’(actualevil)이 됩니다. 그러므로 유전적 악은 우리에게 주어진 출발 조건에 가깝고, 실제적인 악은 그 조건 안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함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만든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아담 한 사람의 범죄에서 모든 인류의 유전적 악이 시작되었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AC.313은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적 악이 최초의 한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각 사람이 실제 죄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에 악을 더하고, 그것이 자녀에게 전달되며, 다시 그 자녀가 자신의 실제 악을 더함으로써 후손에게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인류의 유전적 악은 한 조상의 한 번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법적인 죄책으로 전가되는 구조라기보다, 수많은 세대의 실제 삶에서 형성된 악의 성향이 계속 축적되어 내려오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조상의죄가내게유전된다’는 말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조상이 범한 구체적인 죄의 행위와 그 죄책이 그대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달되는 것은 그 악에서 형성된 기울어짐입니다. 나는 그것을 선택하여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안에서 일어날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행할 것인지, 아니면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물리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나의 자유와 책임의 영역으로 들어옵니다. 이 때문에 유전적 악의 교리는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도 않고, 반대로 조상의 책임을 후손에게 떠넘기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AC.494가 말하는 ‘유전적악의증가’는 왜 교회의 쇠퇴와 연결될까요? 한 세대가 악을 반복하여 그것을 본성처럼 만들면 다음 세대는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강해진 악의 기울어짐을 출발점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그것을 다시 실제 악으로 만들고 새로운 악을 더한다면 그 흐름은 더욱 강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세대를 거쳐 일어났고, 그 결과 처음의 온전한 퍼셉션이 점차 변질되어 마침내 소멸하게 되었다는 것이 AC.494의 설명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선택한 악이 세대를 지나며 누적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의 마지막은 결코 숙명론이 아닙니다. AC.494는 유전적 악이 ‘주님에의해거듭나고있는사람들’에게서 감소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악의 성향이 가문과 세대를 따라 내려왔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사람이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에 맞서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바로 이 오래된 악의 흐름이 한 사람 안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새 질서를 세워 가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부모의 책임도 새롭게 보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완전한 상태만을 물려줄 수 없습니다. 자신도 여러 세대로부터 받은 유전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부모에게 절망이나 과도한 죄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서 발견되는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반복하여 굳히느냐, 아니면 주님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거듭남의 길을 걷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허용함으로써 나를 통하여 계속되던 악의 흐름이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어지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유전적 악의 교리는 ‘나는원래이런집안에서태어났으니어쩔수없다’는 운명론도 아니고, ‘조상이죄를지었으니나도그죄에책임이있다’는 집단적 죄책의 교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현실을 매우 깊이 인정하면서도 자유와 거듭남의 가능성을 동시에 붙듭니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많은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성향을 자신의 삶으로 확정하지 않고 주님께 돌이킬 때, 세대를 지나며 축적된 악의 힘은 거듭남 가운데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494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 세대의 삶은 그 세대에서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반복하여 자신의 본성으로 만드는 것은 다음 세대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역사가 세대를 넘어간다고 해서 주님의 역사가 거기에서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유전적 악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며, 거듭남은 바로 그 사랑이 한 사람의 자유 안에서 악의 오래된 흐름을 꺾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세워 가시는 역사입니다. (AC.492-495심화1)
AC.488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선 말을 합니다. 천사들은 지상에서와 같은 시간을 알지 못하며, 날들과 해들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오직 ‘상태와그변화’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즉시 질문이 생깁니다. ‘시간이없다면천국에서는아무일도일어나지않는가?어떤일이먼저일어나고다른일이나중에일어나는순서도없는가?천사가배우고성장하고상태가변한다면그것자체가결국시간아닌가?그리고영원히산다는것은무엇을의미하는가?’
먼저 ‘천국에는시간이없다’는 말을 ‘천국에는변화나연속성이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과지옥’(Heaven and Hell, 1758, HH) 154-161은 아예 한 장 전체의 제목을 ‘천국에서천사들의상태변화’로 두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총명의 상태가 계속 변화합니다. 어떤 때에는 사랑과 지혜가 더 충만하고 밝은 상태에 있고, 어떤 때에는 상대적으로 덜 충만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얼어붙어 있는 정지된 세계가 아닙니다. 천사들에게도 ‘이상태에서저상태로’ 이어지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상의 시간과 무엇이 다를까요? HH.162-169는 ‘천국의시간’을 따로 설명하면서 그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지상에서 우리의 시간은 해와 지구의 운동을 바탕으로 해, 달, 주, 날, 시간 등 일정한 단위로 측정됩니다. 그러나 천국의 해는 그런 방식으로 날과 해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몇시’, ‘며칠후’, ‘몇년전’이라는 자연적 시간의 관념으로 삶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지상의 시간에 해당하는 것은 ‘상태와그상태의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없다’는 것은 ‘전후의연속성이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연속성을지상의시계와달력의단위로경험하지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아주 희미하게나마 경험합니다. 즐겁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두 시간이 마치 몇 분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고통이나 불안 속에서 기다릴 때에는 몇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객관적인 시간은 같지만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의 길이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험을 시간의 근원이 상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로 설명합니다(HH.168). 천국에서는 자연적 시간의 외적 척도가 사라지고 그 근원에 해당하는 상태와 그 변화가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에게도 ‘먼저’와 ‘나중’에 해당하는 질서는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시계의 숫자가 앞뒤로 배열되는 방식이 아니라 상태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질서입니다. AC.4901도 영들과 천사들의 생명이 ‘시간안에서진행되는것처럼보이지만’, 그들은 사람처럼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생명의상태들’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에는시간이없다’는 표현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천국에는지상과같은자연적시간이없으며,그에대응하는상태의연속과변화가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AC.488에서 왜 ‘날’과 ‘해’가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날’, ‘해’, ‘오늘’, ‘내일’, ‘어제’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시간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러한 표현에서 그 시간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를 지각합니다(HH.165-166). 아침과 봄은 사랑과 지혜가 새롭게 밝아지는 상태를, 저녁과 가을은 다른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말씀의 문자에 있는 시간 표현이 천국에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던 영적인 실재인 ‘상태’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HH.167은 천사들이 ‘영원’을 사람과 다르게 이해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흔히 영원을 ‘끝없이계속되는시간’으로 상상합니다. 지금부터 1억 년, 1조 년,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숫자를 붙여도 그것은 여전히 시간의 연장일 뿐입니다. 천사들은 영원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한한상태’라는 관점에서 지각합니다.
AC.1382도 같은 점을 매우 인상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조차 끝없는 시간으로 상상하기 쉽지만, 천사들에게는 수천 년조차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긴 시간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전혀 단절된 것으로 경험하지 않으며, 그들의 현재 안에는 주님의 영원과 무한에 대한 지각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영원한 생명은 ‘끝없이오래버텨야하는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새로운 사랑과 지혜의 상태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천사가 ‘영원’을 무한한 상태로 지각한다고 해서 천사가 무한한 존재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한과 영원은 본래 주님께 속합니다. 천사들은 유한한 피조물이며, 다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끝없이 받아들이면서 계속해서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영원은 천사가 어느 순간 완성되어 더 이상 아무 변화도 없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선과 진리를 유한한 존재로서 계속 받아들이며 더 깊은 사랑과 지혜로 나아가는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창5의 ‘날들과해들’로 돌아오면 AC.486-491의 의도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창5가 ‘팔백년’, ‘구백삼십년’과 같은 숫자를 기록할 때 속뜻의 중심은 단순히 지상의 달력으로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AC.487-488이 강조하는 것은 그 ‘날들과해들’ 안에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지상의 독자는 시간을 읽지만, 천국은 그 시간 안에 담긴 상태를 읽습니다. 이것이 창5의 족보를 단순한 연대 기록을 넘어 교회의 내적 역사로 읽게 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결국 ‘천국에는시간이없다’는 말은 천국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천국에는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끊임없는 상태 변화가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를 해와 달과 시계와 달력으로 재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몇년을살았는가’를 먼저 묻지만 천국의 관점에서는 ‘어떤상태를지나왔으며지금어떤상태에있는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남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꾸어 줍니다. 주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신앙생활을 ‘몇년했는가’가 아닙니다. 그 세월 동안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던 상태에서 얼마나 주님과 이웃을 향하는 상태로 옮겨졌는지가 중요합니다. 지상에서 우리는 날과 해를 지나지만, 주님은 그 날과 해 안에서 우리의 상태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날들과해들’은 단순히 오래된 사람들의 기이하게 긴 수명을 기록한 표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실제로 이루어 가시는 것은 ‘시간의축적’이 아니라 ‘상태의변화’, 곧 거듭남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486-491심화1)
창4:25에도 ‘셋’이 나오고 창5:3에도 ‘셋’이 나옵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당연히 동일한 셋이며, 창5는 창4끝에 등장한 셋의 후손을 계속 기록하는 족보로 보입니다. 그런데 AC.485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기서셋은앞에서묘사된셋(창4:25)과다른교회를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창4와 창5에 각각 등장하는 ‘에녹’과 ‘라멕’ 역시 같은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교회들이라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이름을 사용했을까요? AC.485의 답은 간단하면서도 중요합니다. ‘서로다른교리를가진교회들이같은이름으로일컬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이름이 같다는 사실 자체가 속뜻에서 동일한 교회임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 창4의 라멕과 창5의 라멕이 서로 다른 교회인 것처럼, 창4의 셋과 창5의 셋도 서로 다른 교회입니다.
AC.485가 직접 참조하라고 한 AC.435를 보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4:25의 ‘사람과그의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셋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신앙’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창4의 장 전체 개요에서도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을 주셨으며 그것을 ‘셋’이라 한다고 요약합니다.
그러나 창5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AC.435는 바로 다음 장인 창5:1-4에서 다시 ‘사람과그의아내’와 ‘셋을낳음’이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태고교회의첫후대’가 의미된다고 명시합니다. 같은 사람과 같은 출생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서로 다른 것을 다루기 때문에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창1과 창2에서 사람의 창조가 반복되는 것과 비교합니다. 창1에서는 영적 인간의 창조를, 창2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므로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지만 속뜻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제 창4와 창5의 구조가 상당히 흥미로워집니다. AC.337은 창4전체가 태고교회의 타락, 곧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룬다고 설명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고, 그로부터 여러 이단적 계열이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창4후반에는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교회’가 일어나며, 마지막에는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 ‘셋’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창5의 장 전체 개요는 전혀 다른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AC.460은 이 장이 ‘태고교회가연속되는세대들을통하여홍수에거의이르기까지이어지는과정’을 다룬다고 밝힙니다. 이어 AC.461은 태고교회 자체를 ‘사람’이라 하고, AC.462는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는 않았던 두 번째 교회를 ‘셋’이라 하며, 이후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교회들이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4와 창5를 속뜻에서 하나의 단순한 직선 계보로 이어 붙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창4는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발생하면서 생긴 가인 계열의 이단과 분파, 그리고 그 흐름 가운데 새 교회가 일어나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창5는 다시 태고교회 자체와 그 첫 후대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교회가 노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두 장 모두 셋, 에녹, 라멕이라는 이름을 포함하면서도 그 이름들이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창4의교회계열과창5의교회계열이같은홍수이전시대에서로병행하여존재했던것인가?’ 이것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가설입니다. 특히 창4가 태고교회에서 생겨난 이단과 분파들을 다루고, 창5가 태고교회 자체의 후대를 따로 추적한다는 설명을 함께 놓으면, 한 계열이 나타났다고 해서 다른 계열이 곧바로 사라졌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AC.337자체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을 태고교회에서 생겨난 ‘이단과분파들’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가지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합니다. AC.435와 AC.485가 직접 확정하는 것은 ‘창4의셋과창5의셋은서로다른교회이며,같은이름이서로다른교회를가리킬수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AC.337과 창5의 개요가 보여 주는 것은 두 장이 서로 다른 교회적 흐름을 추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창4의 각 교회와 창5의 각 교회를 하나씩 대응시켜 ‘이교회와저교회가정확히같은시기에존재했다’고 연대기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병행’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홍수이전태고교회시대안에서서로구별되는여러교회적계열과분파가전개되었다’는 의미로 제한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4와 창5를 문자적 족보처럼 한 줄로만 읽으면 ‘가인계열이후에셋계열이시작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누가누구다음에태어났는가’보다 ‘태고교회로부터어떤교회적상태와교리가갈라져나오고,어떤것은쇠퇴하며,어떤것은보존되어다음교회로이어졌는가’가 중심입니다. 창4와 창5는 동일한 홍수 이전 세계를 서로 다른 교회적 관점에서 비추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에 관한 중요한 의미도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과 같은 이단이 생겨났다고 해서 주님께서 교회 전체를 즉시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흐름이 한쪽에서 전개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다른 형태의 교회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창4의 마지막에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고, 창5에서는 태고교회 자체의 후대가 노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의 타락보다 주님의 보존하시는 섭리가 더 깊고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창4의셋과창5의셋은같은교회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분명합니다. ‘아닙니다.’ AC.485가 직접 그렇게 밝힙니다. 그러나 그 답은 더 큰 질문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왜 말씀은 서로 다른 교회에 같은 이름을 사용했으며, 왜 창4와 창5에 셋, 에녹, 라멕이라는 이름들이 반복되는가? 그것은 창세기 초반의 계보가 단순한 인물 명단이 아니라, 태고교회 시대에 나타난 여러 교회와 교리와 내적 상태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창4와 창5는 서로 중복되는 족보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쇠퇴와 분화, 보존과 계승이라는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 주는 두 개의 창이 됩니다. (AC.481-485심화2)
AC.484는 셋 교회를 가리켜 태고교회와 ‘매우비슷했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중요한 차이를 덧붙입니다. ‘사랑이그만큼주된것은아니었지만,여전히신앙은사랑과결합되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은 셋 교회의 위치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단절된 교회도 아니고,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사랑과신앙의결합’이라는 본질적인 질서는 이어받았지만, 그 결합 안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AC.484는 실제로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를 먼저 보아야 이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으며, ‘주님을향한사랑과이웃을향한사랑에서비롯되는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놓이는 별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했기 때문에,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신앙이라는 말 자체를 따로 언급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가장 완전한 천적 질서입니다. 먼저 사랑이 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며, 따라서 신앙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AC.202에서도 천적 인간은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신앙의 것을 추론하지 않고,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 ‘사랑이주된것’이라는 말은 단순히 사랑을 신앙보다 조금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랑이 신앙의 근원이며, 신앙이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는 질서를 뜻합니다.
그런데 셋 교회에서는 이 질서가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이 태고교회에서처럼 절대적으로 주된 위치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AC.484는 셋 교회를 ‘여섯째날의영적인간’과 연결합니다. 여섯째 날에는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지만, 일곱째 날이 표상하는 완전한 천적 상태와는 아직 구별됩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비슷하면서도같지는않았다’는 말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차이는 창4의 가인과 비교할 때 더욱 또렷해집니다. 가인의 문제는 사랑의 주도성이 조금 약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고 마침내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한 데 있었습니다. AC.337은 이것을 태고교회 교리의 왜곡으로 설명하고, AC.362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신앙은 체어리티로부터도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셋과 가인은 매우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셋 교회에서는 ‘사랑이이전만큼주된것은아니지만신앙은여전히사랑과결합되어’ 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신앙이사랑보다더본질적인것으로여겨지고마침내사랑으로부터분리’됩니다. 둘 다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의 성격은 전혀 다릅니다. 셋에게서는 결합이 아직 살아 있고,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 자체가 무너집니다.
이것은 훗날 나타나는 천적 교회와 영적 교회의 차이를 생각하게 하는 초기 징후이기도 합니다. AC.393은 인류가 태고교회와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할 것이 예견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때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 대신 신앙과 체어리티에 결합된 양심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곧 셋 교회 자체가 이미 후대의 영적 교회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AC.484에서 보이는 ‘사랑의주도성은약해졌지만신앙과사랑의결합은유지되는상태’는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질서로부터 인류가 점차 멀어져 가는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따라서 셋 교회의 의미를 단순히 ‘태고교회의두번째버전’ 정도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셋은 ‘계승과변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지점입니다. 앞선 교회의 선과 진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교회가 받을 수 있는 상태로 이어지지만, 그 상태는 이미 앞선 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모든 시대의 사람을 똑같은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상태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존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AC.484의 마지막 문장은 창5전체를 읽는 하나의 기준이 됩니다. 셋 이후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지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늙어 죽고 다음 세대가 태어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AC.483이 밝힌 것처럼 이 이름들은 서로 다른 퍼셉션을 가진 여러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셋에게서 이미 나타난 ‘같으면서도달라지는’ 교회의 계승은 앞으로 더욱 다양한 상태로 전개됩니다.
결국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같은 점은 ‘신앙이사랑과결합되어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사랑이더이상태고교회에서처럼그만큼주된것은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작은 차이 안에서 우리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을 봅니다. 교회의 쇠퇴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진리가 사라지는 방식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조금씩 달라지는 데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변화 가운데서도 아직 남아 있는 결합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교회를 이어 가십니다. (AC.481-485심화1)
잠깐 공지입니다. 오늘로 창4 AC리딩을 마칩니다. 다음 주 창5부터는 각 장 앞뒤의 영계 경험 및 장 또는 단락 개요는 전체 AC원고에는 그대로 유지하되, 주일예배 AC리딩 본문으로는 빼겠습니다. 장 또는 단락이 바뀔 때 바로 1절이나 해당 절로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전체 개요가 필요하시거나 AC연속 리딩 중이신 분들은 교회 블로그(https://bygrace.kr/)를 방문하시면 되겠습니다.
한 가지 더, 오늘부터는 그 주 리딩을 마치기 전, 그 다음 주 리딩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아래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