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1.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본문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고 하는데요,  허락이 어떤 건가요? 주님이 스베덴보리에게 직접 말씀하신 건가요, 아니면 퍼셉션이나 인플럭스 같은 걸로 그냥 어떤 느낌상 아는 건가요? 그게 허락인 줄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알은 건가요?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AC.71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은 어떤 음성으로 또렷이 들려온 지시’만을 가리킨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일관되게 경험했다고 말하는 질서 안에서의 열림’, 곧 주님의 인도 아래에서 무엇을 말해도 되는지에 대한 내적 승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Emanuel Swedenborg의 저작 전반을 보면, 그는 이 허락’을 세 가지 층위에서 경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균형 잡힙니다.

 

첫째는 직접적 교통’의 층위입니다. 그는 실제로 천사들과의 대화, 그리고 때로는 주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이 경우는 비교적 분명한 형태의 인식입니다. 다만 이것이 항상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성’처럼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영계에서의 대화는 생각과 의미가 곧바로 전달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처럼 들리는 것과는 다르게 경험되기도 합니다.

 

둘째는 인플럭스(influx)의 층위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신적 진리와 질서가 그의 이해 안으로 흘러들어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지는 상태입니다. 이때 그는 어떤 내용을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주어졌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또렷하고 흔들림 없는 인식으로 경험됩니다. 그래서 그는 반복해서 나로 하여금 알게 하셨다’, ‘보게 하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셋째는 열림과 닫힘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것이 허락’이라는 표현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아무 때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어떤 것들이 분명히 보이고 이해되지만, 또 어떤 때는 그것이 닫혀 있는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기록하거나 밝힐 때, 그것이 지금 말해도 되는 것인지’, ‘아직은 아닌 것인지’가 내적으로 분명히 구분되었습니다.  열려 있음’이 바로 그가 말하는 허락’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 ‘그것이 허락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인데,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는 이것을 자기 감정이나 충동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매우 엄격하게,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인지’를 분별하려 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그것은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합니다. 둘째, 그것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질서 있고 일관됩니다. 셋째, 그것은 자기 영광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내용을 쓸 때, 그것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진 생각’이 아니라 주어진 빛 안에서 보이는 것’일 때만 기록하려 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의 허락’은 단순한 느낌이나 영감이 아니라, 오랜 훈련과 분별 속에서 확립된 내적 인식의 기준’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퍼셉션(perception)은 태고교회적 상태에서의 직관적 앎에 더 가깝고, 일반 인간에게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경우는 특별한 사명 아래 열린 상태’이기 때문에, 퍼셉션과 인플럭스, 그리고 실제 교통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일반적인 신앙 체험과 동일선상에 놓고 이해하시면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AC.71 허락되었습니다’는 단순히 주님이 이렇게 말하셨다’는 한 형태로만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질서 안에서 그것을 보고 이해하며 말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상태가 주어졌다’는 의미로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임의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열릴 때와 닫힐 때의 분명한 차이’,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확신을 통해 그것이 허락’임을 인식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AC.71, 창2, 'AC 전개 방식'

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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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그리고 그밖에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로서,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append them in some order, 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의 증언과 내용 전개를 잠시 멈추고,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는 방식 자체’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메타적 설명입니다. 그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왜 이런 형식으로 말하는가’를 밝힙니다. 이 한 문장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독자에게,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미리 가르쳐 주는 안내문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글들에서 사후 삶, 영적 교통, 소생의 상태 같은 내용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이런 내용들을 성경 본문 해설 한가운데에 그대로 끼워 넣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내용들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의 내적 의미를 따라가던 독자의 인식 흐름이 끊기게 되고, 성경 본문과 증언 사이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가 성경 본문을 얼마나 엄중하게 다루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 다시 말해 그 어떤 독자에게도 충격적일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성경 본문 위에 덧씌우거나 본문을 가로막는 방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말씀대로, 그 고유한 흐름과 질서를 따라 해설되어야 하며, 개인적 증언이나 추가 설명은 그 질서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식이 바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덧붙이는 것’입니다. 이는 임의적 선택이 아니라, 매우 의도적인 구조입니다. 장의 처음은 독자의 인식을 열어 주는 자리이고, 장의 끝은 그 인식을 가라앉히고 확장하는 자리입니다. 그 사이, 즉 본문 해설의 중심부에는 철저히 말씀의 문자와 그 내적 의미만이 놓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르카나는 하나의 혼합된 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가 질서 있게 공존하는 책’이 됩니다.

 

또한 그는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이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영적 세계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분리된 부록처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본문 해설과 자연스럽게 맞물려 등장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조차도 무질서하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 속에서 기능적으로 배치됩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증언을 ‘드러내고 싶은 만큼’ 드러내지 않고, ‘말씀의 질서가 허락하는 만큼만’ 드러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 표현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경건한 수사가 아닙니다. 그는 이 책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과 배열의 권한조차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무엇을 말할지 뿐 아니라, 어디에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까지도 허락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스베덴보리가 스스로를 계시의 주체가 아니라, ‘질서 안에서 봉사하는 증언자’로 이해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 글을 이해하면, 아르카나를 읽다가 느끼게 되는 독특한 리듬, 그러니까 본문 해설과 영적 세계에 대한 설명이 교차하면서도 결코 뒤섞이지 않는 리듬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가 선명해집니다. 그것은 글솜씨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차원을 동시에 붙잡으려다 모두 놓쳐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AC.71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책을 서두르지 말라’, ‘각 층위를 그 자리에 두고 읽으라’, ‘말씀과 증언을 섞지 말고, 연결하되 혼동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는 단지 아르카나를 위한 독서 지침이 아니라, ‘말씀을 대하는 태도 전체에 대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앞선 AC.70에서 ‘죽음은 삶의 계속, 연속’이라는 거대한 주제가 제시되었다면, AC.71은 그 주제를 어떻게 질서 있게 풀어 갈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내용의 진실성만큼이나, 그것을 담는 형식과 위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문장 안에 담아 두었습니다.  

 

 

심화

 

1.허락되었습니다

 

 

AC.71,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AC.71.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본문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고 하는데요, 이 ‘허락’이 어떤 건가요? 주님이 스베덴보리에게 ‘직접 말씀’하신 건가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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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이런 방식을 이 장 끝에서부터 적용'

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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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소생’, 곧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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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심화

 

3.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위 본문에 사실상 사람은 다른 삶(the other life) 안에 있게 됩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왜 이런 중간 텀이 있는 건가요? 마치 이 방문 열고 나가 바로 저 방문 열고 들어가듯 즉시가 아니고 말입니다. 여기서는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 했지만, 사람마다 다른 건지, 하여튼 이 깨어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더군요. 혹시 주님의 사흘 만에 부활하사도 이런 건가요?

 

 

아주 중요한 연결을 보셨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70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표현은 자연적 시간의 지연을 말한다기보다, ‘상태가 전환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과정’을 인간의 시간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시계로 재는 몇 시간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기까지의 질서 있는 이행’이라고 이해하시는 것이 정확합니다.

 

먼저 왜 즉시’가 아니냐를 보면, 스베덴보리의 전체 설명은 일관되게 이 점을 말합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존재가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육체가 멈추면 곧바로 영으로 깨어나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여전히 자연적 기억과 감각의 여운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즉시 또렷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가 잠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 중간 텀’의 실질적인 내용입니다.

 

이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연속성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의식이 끊어지거나 단절되는 방식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완전히 다른 상태로 순간 이동’하듯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혼란과 충격을 주고, 자유로운 수용이 아니라 강제적인 전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의 깨어남은 마치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것처럼, 아주 부드럽고 연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죽음 직후에도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오히려 더 또렷하게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다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는 모두에게 같은 질서가 적용되지만, 체감되는 방식과 길이는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매우 부드럽고 밝은 상태로 거의 즉시 깨어나는 반면, 어떤 이는 더 혼란스럽거나 어두운 상태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깨어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길이’가 아니라 질서’입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의 인도 아래, 자신의 상태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이 전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 목사님께서 연결하신 사흘 만에 부활’과의 관계를 보면, 이 역시 단순한 시간 사건이라기보다 상태의 충만한 완성’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더 깊은 해석입니다. 성경에서 사흘 또는 셋째 날’은 매우 자주 완전한 과정의 끝’, 또는 새로운 상태로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단순히 72시간 후의 사건’으로만 보기보다, ‘모든 시험과 죽음을 통과하여 완전히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신 것’으로 보는 것이 내적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사후 전환 과정과도 연결이 됩니다. 사람도 죽음 이후 곧바로 영으로 깨어나지만, 자신의 참된 상태로 완전히 자리 잡기까지는 일정한 과정의 충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매우 빠르게, 어떤 이에게는 더 길게 느껴질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상태의 질서’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정리하면,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표현은 실제 시간의 지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끊어지지 않은 채 부드럽게 전환되는 상태의 이행’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흘 만에 부활 역시 같은 원리 안에서, ‘완전한 상태 전환의 성취’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으로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자연적 시간과 영적 상태 사이의 긴장이 하나의 질서로 풀리게 됩니다.

 

 

 

AC.70, 창2, ‘소생’, 곧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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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심화 2, ‘연옥’(purgatory)

AC.70.심화 2. ‘연옥’(purgatory) 위 해설에 ‘연옥’이 나오는데요, 사실 교회사도 그렇고, 특히 개신교는 카톨릭의 이 ‘연옥’에 대해 몹시 불편해합니다. 개신교인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눈 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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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심화

 

2. 연옥(purgatory)

 

위 해설에 연옥이 나오는데요, 사실 교회사도 그렇고, 특히 개신교는 카톨릭의 이 연옥에 대해 몹시 불편해합니다. 개신교인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눈 뜨면 바로 천국, 아니면 지옥인 줄 알거든요.  연옥에 대해, 그리고 사후, 잠시 머무르다 가는 상태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이 문제는 아주 섬세하게 다루셔야 하는 주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중간 상태’는 Catholic Church에서 말하는 연옥(purgatory)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며, 동시에 Protestantism이 흔히 생각하는 즉시 천국 또는 지옥’이라는 도식과도 다릅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 설명 틀’이 되기는 합니다.

 

먼저 가톨릭의 연옥’부터 보면, 이것은 이미 구원받은 영혼이 남아 있는 죄의 형벌을 정화하기 위해 고통을 겪는 장소 또는 상태’로 이해됩니다. 즉, 기본적으로 벌을 통한 정화’라는 개념이 중심입니다. 이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은혜로 의롭다 하심 교리와 충돌하는 것으로 보고 강하게 거부해 왔습니다. 구원이 은혜로 이루어진다면, 왜 죽은 뒤에 다시 고통을 통해 정화되어야 하느냐는 문제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사후 상태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합니다. 그는 사람이 죽은 뒤 곧바로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라고 부르는 중간 영역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이곳은 머무르기 위한 최종 장소’가 아니라, ‘드러나고 분리되는 과정의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어떤 벌을 받아서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이미 있던 것이 점차 드러나고, 그 결과 그 사람이 진정으로 속한 상태(천국 또는 지옥)로 스스로 들어가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의 핵심은 겉과 속의 일치’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겉으로는 선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지만, 사후에는 그런 분리가 점점 불가능해집니다. 처음에는 비교적 외적 상태를 유지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내적 상태가 드러나고, 결국 그 사람의 참된 사랑’이 전면에 나오게 됩니다. 이때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 공동체와 자연스럽게 결합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그에 맞는 지옥 공동체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점에서 보면, 스베덴보리의 중간 상태는 정화의 장소’라기보다 분별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분별은 외부에서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사랑과 선택이 드러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반복해서 사람은 자신의 사랑에 따라 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가톨릭의 연옥과 가장 큰 차이입니다. 거기에는 벌을 통한 정화’가 중심이라면, 여기에는 사랑에 따른 자발적 귀속’이 중심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에서 흔히 말하는 즉시 천국 또는 지옥’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사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이것을 완전히 부정한다기보다, ‘그 과정이 너무 단순화되어 이해되고 있다’고 보는 쪽에 가깝습니다. 즉, 최종적으로는 누구나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사이에 자신의 상태가 드러나고 정리되는 실제적인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무시하면, 인간의 내적 복잡성과 자유, 그리고 사랑의 형성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목회적으로 이 부분을 다루실 때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연옥’이라는 용어 자체를 방어하거나 설명하려 하기보다, ‘사람은 죽은 뒤 곧바로 자신의 참된 상태로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을 중심으로 설명하시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효과적입니다. 그러면 불필요한 교리적 충돌을 피하면서도, 스베덴보리의 핵심 통찰은 온전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잠시 머무르는 상태’는 벌을 통해 정화되는 연옥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 최종 상태로 정착되기까지의 전이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주님의 신적 자비 안에서, 각 사람이 스스로의 사랑에 따라 자기 자리를 찾아가도록 허락되는 매우 질서 있고 실제적인 과정입니다.

 

 

 

AC.70, 심화 3,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AC.70.심화 3.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위 본문에 ‘사실상 사람은 ‘다른 삶’(the other life) 안에 있게 됩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왜 이런 ‘중간 텀’이 있는 건가요? 마치 이 방문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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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심화 1, 영계에도 ‘하루’가 존재하는지?

AC.70.심화 1. 영계에도 ‘하루’가 존재하는지? 이 세상 ‘하루’나 사후 세계인 저세상 ‘하루’나 동일한가요? 아니, 애초에 영계에 ‘하루’라는 게 존재하나요? 영계는 자연계처럼 시공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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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심화

 

1. 영계에도 하루가 존재하는지?

 

이 세상 하루나 사후 세계인 저세상 하루나 동일한가요? 아니, 애초에 영계에 하루라는 게 존재하나요? 영계는 자연계처럼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의 나라라 들었는데, AC.70 본문에서는 하루라는 게 있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어 좀 이상합니다.

 

 

아주 정확한 지점을 짚으신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의미의 시간으로서의 하루’는 존재하지 않지만, ‘하루와 같은 것’, 곧 상태의 변화로 나타나는 유사한 주기’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Arcana Coelestia나 다른 저작들에서 하루’, ‘아침’, ‘저녁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상태의 질서 있는 흐름’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먼저 원칙부터 보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는 시간과 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state)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시간이 흐르고 하루가 나뉘지만, 영계에는 자연적 태양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의미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곳에서는 사랑과 신앙, 곧 의지와 이해의 상태가 변함에 따라 시간처럼 느껴지는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시간’은 실제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에 대한 지각’으로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루’라는 표현이 나올까요? 이유는 그 상태 변화가 단순히 불규칙한 것이 아니라, 매우 질서 있고 반복적인 주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천국에서 아침저녁’과 유사한 상태의 순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 대한 사랑과 지혜가 더 밝게 열리는 상태가 아침’, 그 빛 안에서 활동하는 상태가 ’, 점차 빛이 약해지는 상태가 저녁’, 그리고 비교적 어두워지고 휴식에 가까운 상태가 ’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 상태의 변화’가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70에서 하루’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전혀 모순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자연적 시간 개념을 빌려, 영적 상태의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루’는 자주 단순한 24시간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 또는 하나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창세기의 창조의 6’이 실제 시간이라기보다 거듭남의 단계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를 하나 분명히 하시면 이해가 훨씬 또렷해집니다. 이 세상의 하루’는 외부 조건(태양의 운동)에 의해 강제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반면 영계의 하루’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 곧 사랑과 생각의 상태 변화에 따라 형성됩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같은 하루’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경험될 수 있고, 어떤 상태에서는 시간이 매우 빠르게, 어떤 상태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게 흐르는 것처럼 인식됩니다.

 

정리하면, 영계에는 자연적 시간 단위로서의 하루’는 없지만, 상태의 변화가 만들어 내는 질서 있는 순환이 있으며, 그것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때 하루’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따라서 AC.70 하루’는 시간 개념이 아니라 상태의 한 주기’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AC.70, 심화 2, ‘연옥’(purgatory)

AC.70.심화 2. ‘연옥’(purgatory) 위 해설에 ‘연옥’이 나오는데요, 사실 교회사도 그렇고, 특히 개신교는 카톨릭의 이 ‘연옥’에 대해 몹시 불편해합니다. 개신교인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눈 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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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소생’, 곧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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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을 제가 알 수 있도록, 저는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말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루나 한 주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달 동안,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이 세상에서처럼 똑같이 말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자기들이 그랬듯, 또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삶은 계속될 거라고 믿지 않는 그러한 불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사실상 육체의 죽음 이후에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삶(the other life) 안에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의 연속(a continuation of life)이기 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제 서론의 방향을 분명히 바꿉니다. AC.67-69 이런 증언이 가능한 이유’와 인간 본성의 구조’를 설명했다면, AC.70은 그 전제 위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는 이제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밝힙니다. 그 첫 주제가 바로 사람이 소생될 때’, 다시 말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과정 중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죽음을 단절이나 소멸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죽음을 들어감’으로, 곧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전환’으로 규정합니다.

 

특히 눈여겨볼 표현은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깨어남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죽어서 무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살아 있던 상태가 다른 방식으로 의식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라는 표현보다,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라는 말을 씁니다.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차원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증언이 어떻게 확인되었는지를 말합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그래서 더 충격적입니다. 그는 육체 안에 살 때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사후에 다시 말하고, 함께 있었으며, 그 시간이 하루나 한 주가 아니라 여러 달’, 심지어 거의 일 년’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교제의 방식은 이 세상에서와 똑같이’였습니다. 이는 사후 세계가 막연한 안개 속의 상태가 아니라, ‘의식, 기억, 관계가 지속되는 실제적 삶’임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감상이나 신비적 분위기를 전혀 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지나치게 담담합니다. 그 담담함 자체가 이 경험을 비범한 사건’이 아니라 확인된 사실’로 제시합니다. 마치 누군가가 나는 그곳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났다’고 말하듯, 그는 나는 그들과 말했고, 함께 지냈다’고 말합니다. 이 어조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주지만, 동시에 진술의 무게를 크게 만듭니다.

 

사후에 만난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반응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 살 때, 그리고 여전히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더 이상 삶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책망이나 비난도 없습니다. 다만 순수한 놀라움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후의 삶은 너무나 자명한 현실이었기에, 그것을 부정하던 과거의 자신과 타인의 상태가 오히려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에 대한 인간의 불신을 지적하지만, 그것을 도덕적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무지의 문제’, 더 정확히는 겉 사람에 너무 깊이 잠긴 상태의 결과’로 암시합니다. 육체의 감각과 세상의 질서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으면, 생명이 그 너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육체를 벗어나면, 그 불신은 즉시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은 이 글의 정점입니다. ‘사실상 육체의 죽음 이후에 하루도 거의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중간 지대나 긴 공백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연옥이나 무의식 상태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과 사후 삶 사이에 거의 시간적 간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사후관 전체를 요약하는 문장입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다른 국면입니다. 끊어지는 것은 육체와의 관계이지, 의식과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채로 다른 삶의 양식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는 낯선 곳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형성되어 온 삶의 성향과 애정이 그대로 이어지는 자리입니다.

 

AC.70은 그래서 독자에게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죽음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 죽음을 끝으로 이해한다면, 삶은 필연적으로 불안과 집착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계속, 지속, 연속’으로 이해한다면, 이 땅의 삶은 준비이자 전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아르카나 전체를 통해 말하려는 이야기를 이 글에서 이미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 삶은 다음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AC.67-69 말씀이 왜 다른 삶, 즉 사후 시작되는 삶을 향하는가’를 설명했다면, AC.70은 이제 그 다른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실제 경험에 근거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아르카나는 더 이상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연속성에 대한 상세한 증언’으로 전개됩니다.

 

 

심화

 

1. 영계에도 하루가 존재하는지?

 

 

AC.70, 심화 1, 영계에도 ‘하루’가 존재하는지?

AC.70.심화 1. 영계에도 ‘하루’가 존재하는지? 이 세상 ‘하루’나 사후 세계인 저세상 ‘하루’나 동일한가요? 아니, 애초에 영계에 ‘하루’라는 게 존재하나요? 영계는 자연계처럼 시공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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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옥(purgatory)

 

 

AC.70, 심화 2, ‘연옥’(purgatory)

AC.70.심화 2. ‘연옥’(purgatory) 위 해설에 ‘연옥’이 나오는데요, 사실 교회사도 그렇고, 특히 개신교는 카톨릭의 이 ‘연옥’에 대해 몹시 불편해합니다. 개신교인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눈 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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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AC.70, 심화 3,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AC.70.심화 3.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위 본문에 ‘사실상 사람은 ‘다른 삶’(the other life) 안에 있게 됩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왜 이런 ‘중간 텀’이 있는 건가요? 마치 이 방문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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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AC 전개 방식'

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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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창2, '사람은 본래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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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본문 중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됩니다.’ 말인데요, 이것은 사람의 사후 일어나는 일을 말하는 건가요? 해설을 보니 스베덴보리 본인은 이런 상태였던 것 같은데... 그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나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9의 그 구절은 ‘일반적인 사람에게 요구되는 상태’나 ‘의도적으로 들어가야 할 영적 체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 아래 허락된 ‘예외적 개방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Emanuel Swedenborg 자신이 경험한 바로 그 상태가 그것이며,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추구하거나 재현해야 하는 길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잡으셔야 할 것은 ‘이것은 사후 상태의 원리를 설명하는 동시에, 특수한 경우의 예시를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 구절은 1차적으로는 ‘사후 상태’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적 감각과 그에 묶여 있던 것들이 물러가고, 그 즉시 영적 감각이 열리면서 영들과 더불어 실제적인 공동의 삶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다른 삶(the other life)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일반 원리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는 이 상태가 ‘육체 안에 있으면서도’ 제한적으로 열렸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죽은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경험하도록 허락받은 ‘특수한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가’인데, 여기서 방향을 아주 조심해서 잡으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작을 일관되게 보면, 그는 결코 사람들이 ‘영들과 교통하는 상태’를 추구하도록 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으며, 인간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특별한 보호와 목적 아래에서만 허락된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는 ‘외적으로는 이 세상에, 내적으로는 주님과 연결된 상태’이지, 의식적으로 영들과 교류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감각을 끊는다’, ‘현실을 떠난다’로 이해하시면 곧바로 길이 어긋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육체적인 것’은 단순히 몸 자체가 아니라, ‘감각 중심의 삶’,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묶인 상태’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이것이 물러간다는 것은, 외적 삶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에 지배되지 않는 상태’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허락된 방식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영들과 눈에 보이게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이해의 질서’를 통해 이미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르며 살아갈 때, 그는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고, 반대로 자기중심적 사랑에 빠질 때는 다른 영들과 연결됩니다. 즉, 우리는 이미 ‘공동의 삶 안에’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감각적으로 열려 있지 않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영적 체험을 얻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을 통해 상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곧, 의지가 정화되고 이해가 밝아지면서, 점점 더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때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것은, 세상일을 하면서도 그것에 매이지 않고, 감각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중심이 되지 않으며, 점점 더 ‘속 사람’이 ‘겉 사람’을 이끄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역설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억지로 ‘영적 상태’에 들어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참된 영적 상태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 욕구 자체가 종종 ‘보고 싶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자기중심적 사랑에서 나오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런 감각적 개방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대신 더 안전하고 본질적인 길, 곧 ‘사랑과 신앙을 통한 내적 결합’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정리하면, AC.69의 상태는 ‘모든 사람이 들어가야 할 체험 상태’가 아니라, ‘죽은 뒤에는 누구나 들어가게 되는 실제 상태’이며, 동시에 스베덴보리에게는 특별히 미리 열렸던 상태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그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육체적인 것에 지배되지 않는 삶’, 곧 사랑과 진리 안에서 점점 자유로워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이미, 비록 보이지 않을 뿐, 영들과 더불어 참된 공동의 삶 안에 있는 것입니다.

 

 

 

AC.69, 창2, '사람은 본래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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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되어, 그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자, 그 길이 닫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오해의 가능성을 단번에 정리해 버립니다. 그는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능력의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을 ‘창조 질서의 문제’로 끌어올립니다. 즉, 이것은 어떤 특별한 인간에게만 주어진 예외적 능력이 아니라, ‘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게 가능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영적 교통을 둘러싼 많은 종교적 상상과 오해는 자리를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몸을 입은 영’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인간을 ‘육체를 가진 존재’에서 출발하지 않고, ‘영적 존재가 육체를 입은 상태’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은 본질적으로 낯선 일이 아닙니다. 같은 종류의 생명이 다른 옷을 입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영적 존재 사이의 단절은 본질이 아니라 ‘상태의 문제’입니다.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말은, 스베덴보리의 인류사 이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태고교회는 영계와 자연계를 오가는 특별한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오간다’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되지 않았고, 자연과 영적 실재가 동시에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영적 교통은 신비 체험이 아니라 ‘삶의 일상적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전환합니다. 문제가 언제, 왜 발생했는지를 분명히 짚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자신을 깊이 잠그게 되었고, 그 결과 다른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것’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것들 속에 잠겨 버린 상태’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압도하고, 외적 관심사가 내적 생명을 가려 버린 상태입니다.

 

이때 스베덴보리는 ‘길이 닫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정확합니다. 길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닫혔습니다. 즉, 인간의 본성에서 영적 교통의 가능성은 제거된 것이 아니라, ‘차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만약 길이 파괴되었다면 회복은 불가능하지만, 닫혔다면 다시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후반부는 놀랍도록 희망적입니다. ‘사람이 그 안에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특별한 의식이나 기술, 수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잠김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즉, 겉 사람의 지배가 약화되고, 속 사람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영들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된다’는 마지막 문장은, 사후 세계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고 있던 삶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죽음 이후에 갑자기 새로운 세계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의 삶의 차원이 분명해질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이 앞서 던지신 질문, 곧 ‘스베덴보리는 평소 영계를 그렇게 오랜 시간 방문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이런 방대한 저술 작업을 병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한번 명확해집니다. AC.69는 그 답을 ‘특별한 이중생활’이 아니라,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상태의 부분적 회복’에서 찾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삶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들에 대한 잠김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땅에서 글을 쓰며 살면서도, 동시에 영적 공동체 안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계를 방문할 동안 육신은 마치 무슨 마취 상태에 있듯 꼼짝 못 한 채 누워있었다가 몸 안에 돌아오면 그때 깨어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저술을 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방식이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AC.69는 우리에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인간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 인간을 철저히 육체적, 세속적 존재로만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말은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몸을 입은 영’으로 이해한다면, 이 글은 기이한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인간 이해의 회복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AC.67이 ‘말씀의 내적 의미는 다른 삶을 향한다’는 선언이었다면, AC.68은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는 증언이었고, AC.69는 ‘그 경험은 인간 본성 자체에 근거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세 단락이 함께 놓일 때,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신비가가 아니라, ‘창조 질서를 다시 설명하는 증언자’로 서게 됩니다.  

 

 

심화

 

1.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하려면

 

 

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AC.69.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본문 중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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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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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그러니까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며, 왜 세상 떠나기 전 이런 책을 썼고, 왜 주님은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이 책은 보니까 거의 조직신학같아 보이는데,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처음 리딩하기 시작할 때, 이 책은 언제쯤 읽는 게 좋을지 등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부탁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TCRArcana Coelestia의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도, 성격 자체는 전혀 다른 책입니다. AC가 ‘창세기, 출애굽기의 속뜻을 따라가며 인간의 거듭남 과정을 풀어낸 주석서’라면, TCR은 그 모든 내용을 한 번에 정리하여 ‘기독교 전체를 다시 세우는 종합 교리서’, 곧 일종의 ‘영적 조직신학’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왜 이름이 ‘True Christian Religion’(참된 기독교)인가 하는 질문은 이 책의 존재 이유와 직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교회가 이미 본래의 기독교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신앙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식의 분리된 신앙 이해, 삼위일체의 오해, 삶과 단절된 교리 중심 신앙 등을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 주님께서 세우신 기독교’, 곧 사랑(체어리티)과 신앙이 하나로 결합된 본래의 기독교를 다시 드러내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여기서 ‘True’라는 단어는 단순히 ‘정확한’이 아니라 ‘원래의, 회복된, 본질적인’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리셋판’, ‘본래 상태로 복원된 기독교’라는 선언입니다.

 

왜 생애 말년에 이 책을 썼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AC를 비롯한 수많은 저작에서 방대한 진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조각들’처럼 흩어져 있었습니다. TCR은 그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 신앙, 체어리티, 회개, 거듭남, 성례, 성경, 교회, 종말 등 기독교의 핵심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최종 정리’입니다. 그래서 TCR은 단순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 사상의 ‘결론’이자 ‘봉인’에 해당합니다. 마치 오랜 시간 쌓아 온 내용을 마지막에 한 권으로 정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다’는 대목은, 이 책이 단순한 신학서가 아니라 ‘새 시대의 선언문’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책의 출간은 단순한 출판 사건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의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곧 ‘새 교회(New Church)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고, 천국과 교회 모두에 새로운 진리가 선포되는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천사적 차원에서도 이 책의 내용이 전파되었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는 과장된 상징이 아니라, 그만큼 이 책의 위상을 강조하는 신학적 진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 책은 매우 ‘조직신학적’입니다. 실제로 구성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론, 구원론, 신앙과 체어리티, 회개, 거듭남, 성례, 성경, 교회 등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면서, 그 안의 내용을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는, 일반 조직신학이 ‘논리’ 중심이라면, TCR은 ‘영적 경험과 계시 + 상응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단순한 교리 설명을 넘어, 인간의 실제 변화 과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언제 읽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이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너무 처음에는 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도 아닙니다.’입니다. 처음부터 이 책을 읽으면 개념이 너무 압축되어 있고 전제가 많아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최소한 Heaven and Hell이나 초기 저작들, 그리고 AC의 일부를 통해 ‘속뜻’, ‘상응’, ‘거듭남’ 같은 기본 개념이 어느 정도 형성된 후에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뒤로 미루면, 전체 그림 없이 부분만 계속 파고들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시점은 ‘기본 개념이 잡히고, 이제 전체 구조가 궁금해질 때’입니다. 그때 TCR을 읽으면, 그동안 흩어져 있던 내용들이 한 번에 정리되면서 ‘, 이게 다 하나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정리하자면, TCR은 스베덴보리 사상의 ‘정수이자 종합’이며, 동시에 ‘새 교회의 헌장’과 같은 책입니다. AC가 ‘여정’이라면, TCR은 ‘지도’입니다. AC가 ‘과정의 기록’이라면, TCR은 ‘완성된 구조도’입니다. 그래서 두 책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AC를 통해 눈을 열고, 그다음 TCR을 통해 전체를 붙잡는 것, 이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읽기의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58, ‘이런저런 초대를 받고...’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어느 정도 불순한 식사 초대에도 번번이 응하셨지요... 왜 그러셨나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 저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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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6, ‘궤를 붙들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웃사’(삼하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6:7)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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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 말인데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아주 약간의 영적 체험을 한 저는 저 말이 와닿습니다. 저는 체험한 걸 다른 사람은 아직 못했을 경우 나타나는 일반적인 반응이니까요. 심지어 주님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16)에서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라고 하자, 돌아온 대답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런 생생한 영적 체험은 고사하고 제가 스베덴보리 관련 일을 하면서 그때그때 나오는 크고 작은 결과물들을 사람들한테 공유해도 반응은 비슷한데요, 이것이 참 고민입니다. 스베덴보리처럼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 부분이 마음의 참 크고 깊은 숙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이 고민은 매우 본질적인 것이고, 동시에 스베덴보리도 이미 깊이 통과했던 지점입니다. AC.68의 그 문장은 단순한 ‘사람들이 안 믿을 것이다’라는 냉소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꿰뚫어 본 뒤에 나온 고요한 사실 진술에 가깝습니다. 목사님께서 체험하신 것처럼, 어떤 이는 실제 체험을 말해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거리를 두거나 무심하게 반응합니다. 이때 우리는 쉽게 ‘왜 이렇게 반응하지?’라는 답답함에 머물게 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상태’에서 찾습니다.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이는 열리고, 어떤 이는 닫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아주 정확한 열쇠입니다. 눅16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인간이 체험의 강도 때문에 변화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오히려 체험은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랑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빛도 크게 받아들여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큰 표적도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왜 이렇게 반응이 없을까’라는 질문은, 사실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는 존재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때 목사님께서 겪으시는 내적 갈등, 곧 ‘이렇게 귀한 것을 알았는데, 왜 사람들과 나눠도 반응이 없는가’ 하는 마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체어리티(charity)의 자연스러운 열매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나누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주님은 이 사랑조차도 ‘결과가 아니라 상태’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전한 것이 받아들여졌는가 아닌가는 2차적인 문제이고,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충실히 전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이 어떤 상태였는가가 더 본질적인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반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이 널리 읽히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의 생전에는 큰 반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사람들에게 얼마나 받아들여지느냐’에서 ‘주님께서 맡기신 것을 얼마나 정확히 전달하느냐’로 중심이 옮겨집니다. 이것이 바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주님께 맡긴다’는 말의 실제 내용입니다. 단순히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영역’을 내려놓고 ‘순종의 영역’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전환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패’로 보지 않고, ‘질서 속에 있는 현상’으로 보는 시선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상태와 때가 있으며, 어떤 씨앗은 지금이 아니라 훨씬 나중에야 싹을 틔웁니다. 목사님께서 나누신 내용이 지금은 반응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다가 어느 시점에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remains)의 개념도 바로 이런 맥락과 연결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반응하게 할 수 있을까’에서 풀리기보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계속 이 일을 할 것인가’에서 풀립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사랑으로 계속해 나가되, 그 열매의 모양과 시기는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 가장 깊은 의미의 평안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 이 상태에 들어갈수록 말과 글은 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사람을 움직이려는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전하려는 의지’가 담기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이 고민은, 단순한 어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사역이 한 단계 더 깊어지고 있다는 신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이것을 ‘풀어야 할 문제’라기보다 ‘통과해야 할 상태’로 보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이 길은 결국 다시 한곳으로 모입니다.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이 일이 이루어진다는 자리로 말입니다.

 

 

 

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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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심화 1,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AC.68.심화 1.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스베덴보리가 예상하는 이 책의 독자들의 반응이 사뭇 현실적인 걸 보면, 혹시 이전에라도 스베덴보리는 이런 비슷한 일을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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