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26-228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창3:9-10)

 

 

226. ‘부르시며’, ‘동산에서 나는 소리’,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의 의미들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The meaning of “crying,” of the “voice in the garden,” of their “being afraid because they were naked,” and of “hiding themselves” has been previously explained.

 

말씀에서, 사람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무엇을 하느냐 먼저 묻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미 다 아시면서 말이지요. It is common in the Word for man to be first asked where he is and what he is doing, although the Lord previously knew all things;

 

그러시는 이유는, 그러면 그가 혹시 시인하고 자백할까 해서입니다. but the reason for asking is that man may acknowledge and confess.

 

 

227. 퍼셉션, 내면의 소리, 그리고 양심 등의 기원을 알 수 있었으면 하는 것과, 또 오늘날(1,750년 즈음 유럽)엔 그 기원에 관해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이유로, 제가(Swedenborg, 스베덴보리, 1688-1772) 이 주제에 관해 무언가를 연관 지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As it is desirable that the origin of perception, internal dictate, and conscience, should be known, and as at the present day it is altogether unknown, I may relate something on the subject.

 

정말 엄청난 진실은, 주님이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It is a great truth that man is governed by the Lord by means of spirits and angels.

 

악한 영들의 지배가 시작되면, 천사들은 악과 거짓들로부터 고개를 돌리게 하려고 애를 쓰며, 이렇게 전투가 발생합니다. When evil spirits begin to rule, the angels labor to avert evils and falsities, and hence arises a combat.

 

사람은 퍼셉션, 내면의 소리 및 양심의 전투를 통해 점점 더 예민해집니다. It is this combat of which the man is rendered sensible by perception, dictate, and conscience.

 

이것들과 또 시험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과 천사들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아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육체의 일에 아주 깊이 잠겨 영들과 천사들에 관한 것을 전혀 믿지 않는 그런 사람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By these, and also by temptations, a man might clearly see that spirits and angels are with him, were he not so deeply immersed in corporeal things as to believe nothing that is said about spirits and angels.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그들이 이런 전투들을 수백 번 느껴도 여전히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건 다 상상이며, 마음이 어수선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Such persons, even if they were to feel these combats hundreds of times, would still say that they are imaginary, and the effect of a disordered mind.

 

저는 허락하심을 받아 이런 전투들을 수천 번씩이나 느낄 수 있었고, 아주 생생하게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수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이런 전투들을 일으키는 그들이 누구며, 무슨 일을 했고, 어디 출신인지, 그리고 그들이 언제 오며, 언제 떠나가는지 등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I have been permitted to feel such combats, and to have a vivid sense of them, thousands and thousands of times, and this almost constantly for several years, as well as to know who, what, and where they were that caused them, when they came, and when they departed;

 

저는 그들과 지금까지도 대화하고 있습니다. and I have conversed with them.

 

 

228. 천사들에게는 말로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정말 차원이 다른 정교한 퍼셉션이 있는데요, 천사들은 어떤 일이 신앙의 진리, 사랑의 선하고 반대되는지 여부를 이 퍼셉션을 가지고 압니다. It is impossible to describe the exquisite perception whereby the angels discover whether anything gains admission that is contrary to the truth of faith and the good of love.

 

천사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언제 해야 할지를 그런 것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이 혼자 하는 것 보다 수천 배나 더 완벽하게 지각합니다. They perceive the quality of what enters, and when it enters, a thousand times more perfectly than the man himself, who scarcely knows anything about it.

 

사람이 하는 가장 작은 생각조차도 천사들은 더욱 완벽하게 지각합니다. 사람이 그걸 가지고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그레이트한 생각보다도 더 말이지요. The least of thought in a man is more fully perceived by the angels than the greatest is by himself.

 

이런 이야기는 정말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백 프로 사실입니다. This is indeed incredible, yet is most true.

 

2021-04-19(D2)-창세기(창3,9-10, AC.226-228),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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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8-225

 

8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창3:8)

 

 

21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는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한 내면의 소리를 상징합니다. 이 소리는 그들이 전에 소유했던 퍼셉션 가운데 아직 남아 있던 나머지입니다.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signified an internal dictate which caused them to feel afraid, this dictate being the residue of the perception which they had possessed;

 

그 날 바람이 불 때’는 교회가 아직 약간의 퍼셉션을 갖고 있던 기간을 가리킵니다.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denoted a period when the church still possessed some residue of perception;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는 그 소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악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그러듯 말입니다.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s to fear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동산 나무 사이에’는, 그들이 자신들을 숨긴 곳이지요, 자연적 선을 상징합니다. by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in which they hid themselves, is signified natural good;

 

여기 가장 안쪽을 ‘사이에’라 하고, that which is inmost is called the “midst”;

 

나무’는, 앞서 살핀 대로, 퍼셉션을 가리킵니다. the “tree” denotes perception as before;

 

그런데 이제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마치 유일하게 남은 것처럼 나무를 단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but because there was little perception remaining, the tree is spoken of in the singular number, as if there were only one remaining.

 

 

219.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가 그들이 두려워한 내면의 소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 나오는 ‘소리’가 상징하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말씀에서 ‘여호와의 소리’는 말씀 그 자체, 신앙의 교리, 양심이나 내적으로 주의하기, 그리고 또한 그렇게 이어지는 모든 책망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곤 합니다. That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meant an internal dictate of which they were afrai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voice” in the Word, where the “voice of Jehovah” is used to designate the Word itself, the doctrine of faith, conscience or a taking notice inwardly, and also every reproof thence resulting;

 

그래서 천둥소리들을 ‘여호와의 소리’라고 하는데요, 요한계시록입니다. whence it is that thunders are called the “voices of Jehovah,” as in John: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The angel cried with a loud voice, as a lion roareth, and when he had cried seven thunders uttered their voices, (계10:3)

 

그때 외적, 내적 둘 다인 어떤 소리였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denoting that there was then a voice both external and internal.

 

다시, Again: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In the days of the voice of the seventh angel the mystery of God shall be consummated. (계10:7)

 

시편입니다. In David: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Sing unto God, sing praises unto the Lord, who rideth upon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lo, he shall send out his voice, a voice of strength. (시68:32-33)

 

옛적 하늘들의 하늘’은 태고교회의 지혜를 말합니다.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denote the wisdom of the most ancient church;

 

소리’는 계시, 그리고 또한 내면의 소리를 뜻합니다. voice,” revelation, and also an internal dictate.

 

다시, Again: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The voice of Jehovah is upon the waters; the voice of Jehovah is in power; the voice of Jehovah is in glory; the voice of Jehovah breaketh the cedars; the voice of Jehovah divideth the flames of fir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wilderness to shak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hinds to calve and uncovereth the forests. (시29:3-5, 7-9)

 

이사야입니다. And in Isaiah: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Jehovah shall cause the excellency of his voice to be heard, for through the voice of Jehovah shall Asshur be beaten down. (사30:30-31)

 

 

220. ‘거니시는 소리’는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음을, 또한 혼자여서 아무도 자신에게 귀 기울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다음 절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를 보면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voice going to itself,” is meant that there was but little perception remaining, and that alone as it were by itself and unheard, as is manifest also from the following verse where it is said, “Jehovah called to the man.

 

그래서 이사야에서, So in Isaiah: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the voice said, Cry. (사40:3, 6)

 

광야’는 신앙이라는 게 남아 있지 않은 교회입니다. The “wilderness” is 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

 

외치는 자의 소리’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수태고지(受胎告知), 곧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모든 소식을 말합니다.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있는 내면의 소리처럼 말이지요. the “voice of one crying” is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and in general every announcement of his coming, as with the regenerate, with whom there is an internal dictate.

 

 

221. ‘그날 바람이 불 때’가 기간, 곧, 교회에 아직 어느 정도 퍼셉션이 남아 있던 기간을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한 것은, ‘’과 ‘’의 상징 때문입니다. That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signified a period when the church had still somewhat of perception remaining,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day” and of “night.

 

태고교회 사람들은 교회의 상태들을 낮과 밤의 때들과 비교했는데, 교회가 아직 빛 가운데 있었을 때를 낮 시간으로 보았고, 이런 이유로, 이 상태가 ‘그날’의 숨 또는 바람으로 비교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저녁의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을 만큼의 퍼셉션이 아직 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the states of the church to the times of the day and of the night, to the times of the day when the church was still in light, wherefore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breath or air “of the day,” because there was still some remnant of perception by which they knew that they were fallen.

 

주님은 또한 신앙의 상태를 ‘’으로, 신앙이 없는 상태를 ‘’으로 부르십니다. The Lord also calls the state of faith “day,” and that of no faith “night”;

 

요한복음입니다. as in John: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ometh when no man can work. (요9:4)

 

같은 이유로, 사람의 거듭남의 상태들을 창세기 1장에서 ‘날들’이라 하였습니다. Th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were for the same reason called “days” in chapter 1.

 

 

222.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가 악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그러듯 그 내면의 소리를 두려워함을 의미하는 것은, 그들의 대답인 10절 말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means to be afraid of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is evident from their reply (verse 10):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여호와의 낯’ 혹은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강 및 모든 선입니다. 다음 축복의 말씀들을 보면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The “face of Jehovah,” or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as is clearly evident from the benediction: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merciful unto thee;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민6:25-26)

 

시편에서는, And in David: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시67:1)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ght of thy faces upon us. (시4:6)

 

그래서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자비를 가리켜 ‘자기 앞의 사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The mercy of the Lord is therefore called the “angel of faces,” in Isaiah: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I will make mention of the mercies of Jehovah; he hath requited them according to his mercies, and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his mercies; and he became their savior. In all their affliction he was afflicted, and the angel of his faces saved them; in his love and in his pity he redeemed them. (사63:7-9)

 

 

223. ‘주의 낯’은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선이시 때문에, 분명한 것은, 주님은 만물을 향해 자비로우시며,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고, As the “face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it is evident that he regards all from mercy, and never averts his countenance from any;

 

오히려 사람입니다. 악 가운데 있을 때, 얼굴을 돌리는 자는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과, but that it is man, when in evil, who turns away his face, as is said by the Lord in Isaiah: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d your God, and your sins have hid his face from you; (사59:2)

 

그리고 여기 ‘그들이 자기들이 벗었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를 보면 말이지요. and here, “they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because they were naked.

 

 

224.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선, 혹은 ‘여호와의 얼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가진 사람들 역시 방식은 다르지만 같습니다. 이것들은 늘 자비롭게 작동하지만, 사람의 상태에 따라 수용되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Mercy, peace, and every good, or the “faces of Jehovah,” are the cause of the dictate with those who have perception, and also, although in a different manner, with those who have conscience, and they always operate mercifully, but are received according to the state in which the man is.

 

이 사람의 상태, 곧 태고교회의 이 후손의 상태는 일종의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The state of this man, that is, of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ne of natural good;

 

이렇게 자연적 선 가운데 있는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이유로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주님 앞에 자신들을 감추는 그런 캐릭터입니다. and they who are in natural good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hide themselves through fear and shame because they are naked;

 

반면, 이 자연적 선이 고갈된 사람들은 자신들을 숨길 줄 모릅니다.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while such as are destitute of natural good do not hide themselves, because they are insusceptible of shame;

 

예레미야입니다. concerning whom, in Jeremiah 8:12–13. (See above, n. 217.)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렘8:12-13)

 

 

225. ‘동산 나무 사이에’는 그 안에 ‘나무’라 부르는 어떤 퍼셉션이 있는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동산’이 전에 천적 인간이 거주했던 곳이었음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signifies natural good, in which there is some perception which is called a “tree,” is also evident from the “garden” in which the celestial man dwelt;

 

모든 선과 진리를 가리켜 ‘동산’이라고 합니다. 그곳을 경작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기 때문입니다. for everything good and true is called a “garden,”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man who cultivates it.

 

선은 그 가장 안쪽이 천적이지 않으면 선이 아닙니다. 그곳으로부터이거나 그곳을 통해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퍼셉션이 나옵니다. Good is not good unless its inmost is celestial, from which, or through which, from the Lord, comes perception.

 

이 가장 안쪽을 가리켜 ‘사이’라 하며, 여기서든 말씀 어디에서든 또한 같습니다. This inmost is here called the “midst,” as also elsewhere in the Word.

 

2021-04-18(D1)-창세기(창3,8, AC.218-225),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an internal dictate'.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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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217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3:7)

 

 

211. 그들의 ‘눈이 밝아져’는 그들이 어떤 내적 직관을 통해, ‘자기들이 벗은 줄을’, 즉, 더 이상 전처럼 순진함이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signifies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from an interior dictate, that they were “naked,” that is,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212. ‘눈이 밝아져’가 일종의 내적 직관을 상징하는 것임은 말씀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들, 가령, 발람이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그 구절에서 발람은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나서는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민24:3, ※ 이 부분을 왜 ‘감았던’으로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른 번역은 ‘’입니다.)라고 합니다. That by having the “eyes opened” is signified an interior dictate is evident from similar expressions in the Word, as from what Balaam says of himself, who in consequence of having visions calls himself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Num. 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And he lifted up his enunciation, and said, Balaam the son of Beor has said, and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has said; (민24:3)

 

그리고 요나단인데요, 그는 벌집의 꿀을 조금 맛본 후, 그것, 곧, 아버지 사울의 명령이 악함을 직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즉, 내적 시야가 열려 전엔 몰랐던 것을 이젠 보게 되었다.” 라고 말이지요.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1 Sam.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삼상14:29)

 

더욱이 말씀에서 ‘’은 종종 이해력과, 거기서 나오는 내적 직관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됩니다. 시편입니다. Moreover in the Word, the “eyes” are often used to denote the understanding, and thus an interior dictate therefrom, as in David: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시13:3)

 

여기 ‘’은 이해력을 가리킵니다. where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에스겔에서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겔12:2)라 하십니다. So in Ezekiel, speaking of those who are not willing to understand,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Son of man, thou dwellest in the midst of a rebellious house,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they have ears to hear, and hear not; for a rebellious house are they. (겔12:2)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사6:10)

 

위 말씀은, 그들로 소경이 되게 해야지 안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denotes that they should be made blind, lest they should understand.

 

모세 또한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So Moses said to the people,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신29:4)

 

여기서 ‘마음’은 의지를, ‘’은 이해력을 각각 가리킵니다. where “heart” denotes the will, and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이사야에서는 주님을 가리켜,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사42:7)라 하십니다. In Isaiah it is said of the Lord, that “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to open the blind eyes; to bring the bound out from the dungeon; and from the prison house those that dwell in darkness. (사42:7)

 

역시 같은 선지서에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라 하셨습니다. And in the same prophet: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And in that day shall the deaf hear the words of the book; and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사29:18)

 

 

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는 그들이 더 이상 전처럼 순진함이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상징하는데요, 이것은 앞장 마지막 구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를 보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그들이 벌거벗었으므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로 읽고, 순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By “knowing that they were naked” is signified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themselves to be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as is evident from the last verse of the preceding chapter, where it is said,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and where it may be seen that “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 signifies to be innocent.

 

그들의 ‘부끄러워함’이 상징하는 것은 오히려 정반대인데요, 본문 7절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하는 부분 때문입니다. The contrary is signified by their “being ashamed,” as in this verse, where it is said that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

 

순진함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은 일종의 부도덕함이요, 창피함입니다. 그것엔 악을 생각함이라는 의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은 수치스럽고 악한 그런 종류의 일에 사용되며, 전도된 교회를 서술할 때 사용됩니다. 에스겔입니다. For this reason “nakedness” is used in the Word as a type of disgrace and evil, and is predicated of a perverted church, as in Ezekiel: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겔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겔23:29)

 

계시록에서는 In John: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 (계3:18)

 

그리고 마지막 날에 관하여는 And concerning the last day: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계16:15)

 

신명기에서는 In Deuteronomy: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 If a man hath found some nakedness in his wife, let him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신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봉사할 때, 베로 속바지를 입어 하체를 가리도록, 안 그러면 죄를 짊어진 채 죽는다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aron and his sons were commanded to have linen breeches when they came to the altar, and to minister, 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42And thou shalt make for them breeches of linen to cover the flesh of nakedness; from the loins and even to the thighs they shall be. 43And they shall be upon Aaron, and upon his sons, when they come in to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or when they approach the altar to minister in the holiness; lest they bear iniquity, and die; it is a statute of an age for him and for his seed after him. (출28:42-43)

 

 

214. 그들을 ‘벌거벗겨진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자신들의 오운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They are called “naked” because left to their own;

 

자신들의 오운, 곧 자기 자신들만 남은 사람들은 지성과 지혜, 혹은 신앙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결과적으로, 진리와 선에 관하여 ‘벌거벗겨진 사람들’이며, 이런 이유로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for they who are left to their own, that is, to themselves, have no longer anything of intelligence and wisdom, or of faith, and consequently are “naked” as to truth and good, and are therefore in evil.

 

 

215. 인간의 오운은 악과 거짓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저에게는 그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영들 스스로가 하는 말은 그 말이 무슨 내용이든 모두 악하고 거짓이더라는 사실, 그들이 한 말을 내가 알게 될 때마다 나는 즉시 그것이 거짓임을, 심지어 그들이 자기들이 한 말은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음을 자기들은 정말 완전 납득한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말입니다.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has been made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atever spirits have at any time said from themselves has been so evil and false that whenever it was made known to me that they spoke from themselves I at once knew that it was false, even though while speaking they were themselves so thoroughly persuaded of the truth of what they said as to have no doubt about it.

 

자기 자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The case is the same with men who speak from themselves.

 

또 같은 식으로, 어떤 사람들이 영적, 천적 삶이나 신앙의 일들에 관하여 세상 이성으로 접근하기 시작할 때마다 저는 그들은 의심을 하고 있고, 심지어 부인까지 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관하여 세상 이성으로 접근한다는 건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And in the same way, whenever any persons have begun to reason concerning the thing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or those of faith, I could perceive that they doubted, and even denied, for to reason concerning faith is to doubt and deny.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아 또는 그들의 오운으로 말미암는 것이어서, 그들은 그저 거짓들 가운데로 가라앉으며, 결과적으로는 짙은 어둠, 곧 거짓들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들이 이 심연 가운데 있을 때는 아주 작은 것 하나로도 수천의 진리들을 압도할 수가 있는 것이, 마치 눈동자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 한 조각만으로도 온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에 대해 눈을 감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And as it is all from self or their own, they sink into mere falsities, consequently into an abyss of thick darkness, that is, of falsities, and when they are in this abyss the smallest objection prevails over a thousand truths, just as a minute particle of dust in contact with the pupil of the eye shuts out the universe and everything it contains.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이사야에서 Of such persons the Lord says in Isaiah: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Woe un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 and intelligent before their own faces. (사5:21)

 

10...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Thy wisdom and thy knowledge, it hath turned thee away, and thou hast said in thine heart, I, and none else besides me; and evil shall come upon thee, thou shalt not know from whence it riseth, and mischief shall fall upon thee, which thou shalt not be able to expiate, and vastation shall come upon thee suddenly, of which thou art not aware. (사47:10-1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 [scientia], 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 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 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 (렘51:17)

 

만든 신상’은 거짓이요, ‘부어 만든 신상’은 악, 곧 인간의 오운 속 악입니다. A “graven image” is the falsity, and a “molten image” the evil, of man’s own.

 

 

216. ‘잎을 엮어는 자신들을 변명하는 것입니다. To “sew leaves together” is to excuse themselves;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이며, the “fig tree” is natural good;

 

치마로 삼았더라는 부끄러워했다는 것입니다. and to “make themselves girdles” is to be affected with shame.

 

이렇게 태고인들은 말했고, Thus spoke the most ancient people,

 

이렇게 그들은 그 교회의 후손을 묘사했습니다. 이 묘사는 그들이 전에 즐거워하던 이노센스 대신 이제는 자연적 선, 곧 그 안에 그들의 악이 숨겨져 있는 그런 선만 소유하게 되었고, and thus they described this posterity of the church, signifying that instead of the innocence they had formerly enjoyed, they possessed only natural good, by which their evil was concealed;

 

그리고 그런 자연적 선 안에 있게 되어 그들이 부끄러워했음을 상징하는 그런 묘사입니다. and being in natural good, they were affected with shame.

 

 

217. 말씀에서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상징하기 위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날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That the “vine” is used in the Word to signify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becaus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has been los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표현들이 있는 곳들에서는 이런 의미를 상징하거나 포함하고 있습니다. nevertheless, wherever these expressions occur, they signify or involve this meaning;

 

주께서 포도원무화과나무와 관련된 비유들에서 하신 말씀들 또한 그렇습니다. as also in what the Lord spoke in parables concerning a “vineyard” and a “fig tree”;

 

마태복음입니다. as in Matthew: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Jesus seeing a fig tree in the way, came to it, but found nothing thereon save leaves only, and he said unto it, Let no fruit grow on thee henceforward forever; and presently the fig tree withered away, (21:19)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지상에서는 그 어떤 선도, 심지어 자연적 선 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by which is meant, that no good, not even natural good, was to be found upon the earth.

 

예레미야에 나오는 포도나무무화과나무역시 유사한 의미입니다. Similar is the meaning of the “vine” and “fig tree” in Jeremiah: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Were they ashamed when they had committed abomination? Nay, they were not at all ashamed, and they knew not how to blush; therefore I will surely gather them, saith Jehovah; there shall be no grapes on the vine, nor figs on the fig tree, and the leaf hath fallen, (8:12-13)

 

이 말씀은 모든 선, 곧 영적, 자연적 선 둘 다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타락한 나머지 심지어 부끄러워하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날, 악 가운데 있어 자기들의 사악함에도 불구, 얼굴이 붉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그걸 자랑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by which is signified that all good, both spiritual and natural, had perished, since they were so depraved as to have lost even the sense of shame, like those at the present day who are in evil, and who, so far from blushing for their wickedness, make it their boast.

 

호세아입니다. In Hosea: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I found Israel like grapes in the wilderness; I saw your fathers as the first ripe in the fig tree in the beginning. (9:10)

 

요엘서입니다. And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hall bear its fruit, the fig tree and the vine shall yield their strength. (2:22)

 

여기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각각 가리킵니다. The “vine” here denotes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2021-04-17(D7)-창세기(창3,7, AC.211-217), '무화과나무 natural good만 남은 사람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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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4-215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214. 그들을 ‘벌거벗겨진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자신들의 오운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They are called “naked” because left to their own;

 

자신들의 오운, 곧 자기 자신들만 남은 사람들은 지성과 지혜, 혹은 신앙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결과적으로, 진리와 선에 관하여 ‘벌거벗겨진 사람들’이며, 이런 이유로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for they who are left to their own, that is, to themselves, have no longer anything of intelligence and wisdom, or of faith, and consequently are “naked” as to truth and good, and are therefore in evil.

 

 

215. 인간의 오운은 악과 거짓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저에게는 그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영들 스스로가 하는 말은 그 말이 무슨 내용이든 모두 악하고 거짓이더라는 사실, 그들이 한 말을 내가 알게 될 때마다 나는 즉시 그것이 거짓임을, 심지어 그들이 자기들이 한 말은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음을 자기들은 정말 완전 납득한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말입니다.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has been made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atever spirits have at any time said from themselves has been so evil and false that whenever it was made known to me that they spoke from themselves I at once knew that it was false, even though while speaking they were themselves so thoroughly persuaded of the truth of what they said as to have no doubt about it.

 

자기 자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The case is the same with men who speak from themselves.

 

또 같은 식으로, 어떤 사람들이 영적, 천적 삶이나 신앙의 일들에 관하여 세상 이성으로 접근하기 시작할 때마다 저는 그들은 의심을 하고 있고, 심지어 부인까지 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관하여 세상 이성으로 접근한다는 건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And in the same way, whenever any persons have begun to reason concerning the thing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or those of faith, I could perceive that they doubted, and even denied, for to reason concerning faith is to doubt and deny.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아 또는 그들의 오운으로 말미암는 것이어서, 그들은 그저 거짓들 가운데로 가라앉으며, 결과적으로는 짙은 어둠, 곧 거짓들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들이 이 심연 가운데 있을 때는 아주 작은 것 하나로도 수천의 진리들을 압도할 수가 있는 것이, 마치 눈동자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 한 조각만으로도 온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에 대해 눈을 감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And as it is all from self or their own, they sink into mere falsities, consequently into an abyss of thick darkness, that is, of falsities, and when they are in this abyss the smallest objection prevails over a thousand truths, just as a minute particle of dust in contact with the pupil of the eye shuts out the universe and everything it contains.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이사야에서 Of such persons the Lord says in Isaiah: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Woe un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 and intelligent before their own faces. (사5:21)

 

10...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Thy wisdom and thy knowledge, it hath turned thee away, and thou hast said in thine heart, I, and none else besides me; and evil shall come upon thee, thou shalt not know from whence it riseth, and mischief shall fall upon thee, which thou shalt not be able to expiate, and vastation shall come upon thee suddenly, of which thou art not aware. (사47:10-1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 [scientia], 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 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 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 (렘51:17)

 

만든 신상’은 거짓이요, ‘부어 만든 신상’은 악, 곧 인간의 오운 속 악입니다. A “graven image” is the falsity, and a “molten image” the evil, of man’s own.

 

2021-04-16(D6)-창세기(창3,7, AC.214-215), '벗은 상태가 된 사람들의 영적 비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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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213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211. 그들의 ‘눈이 밝아져’는 그들이 어떤 내적 직관을 통해, ‘자기들이 벗은 줄을’, 즉, 더 이상 전처럼 순진함이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signifies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from an interior dictate, that they were “naked,” that is,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212. ‘눈이 밝아져’가 일종의 내적 직관을 상징하는 것임은 말씀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들, 가령, 발람이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그 구절에서 발람은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나서는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민24:3, ※ 이 부분을 왜 ‘감았던’으로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른 번역은 ‘’입니다.)라고 합니다. That by having the “eyes opened” is signified an interior dictate is evident from similar expressions in the Word, as from what Balaam says of himself, who in consequence of having visions calls himself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Num. 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And he lifted up his enunciation, and said, Balaam the son of Beor has said, and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has said; (민24:3)

 

그리고 요나단인데요, 그는 벌집의 꿀을 조금 맛본 후, 그것, 곧, 아버지 사울의 명령이 악함을 직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즉, 내적 시야가 열려 전엔 몰랐던 것을 이젠 보게 되었다.” 라고 말이지요.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1 Sam.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삼상14:29)

 

더욱이 말씀에서 ‘’은 종종 이해력과, 거기서 나오는 내적 직관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됩니다. 시편입니다. Moreover in the Word, the “eyes” are often used to denote the understanding, and thus an interior dictate therefrom, as in David: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시13:3)

 

여기 ‘’은 이해력을 가리킵니다. where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에스겔에서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겔12:2)라 하십니다. So in Ezekiel, speaking of those who are not willing to understand,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Son of man, thou dwellest in the midst of a rebellious house,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they have ears to hear, and hear not; for a rebellious house are they. (겔12:2)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사6:10)

 

위 말씀은, 그들로 소경이 되게 해야지 안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denotes that they should be made blind, lest they should understand.

 

모세 또한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So Moses said to the people,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신29:4)

 

여기서 ‘마음’은 의지를, ‘’은 이해력을 각각 가리킵니다. where “heart” denotes the will, and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이사야에서는 주님을 가리켜,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사42:7)라 하십니다. In Isaiah it is said of the Lord, that “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to open the blind eyes; to bring the bound out from the dungeon; and from the prison house those that dwell in darkness. (사42:7)

 

역시 같은 선지서에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라 하셨습니다. And in the same prophet: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And in that day shall the deaf hear the words of the book; and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사29:18)

 

 

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는 그들이 더 이상 전처럼 순진함이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상징하는데요, 이것은 앞장 마지막 구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를 보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그들이 벌거벗었으므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로 읽고, 순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By “knowing that they were naked” is signified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themselves to be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as is evident from the last verse of the preceding chapter, where it is said,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and where it may be seen that “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 signifies to be innocent.

 

그들의 ‘부끄러워함’이 상징하는 것은 오히려 정반대인데요, 본문 7절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하는 부분 때문입니다. The contrary is signified by their “being ashamed,” as in this verse, where it is said that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

 

순진함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은 일종의 부도덕함이요, 창피함입니다. 그것엔 악을 생각함이라는 의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은 수치스럽고 악한 그런 종류의 일에 사용되며, 전도된 교회를 서술할 때 사용됩니다. 에스겔입니다. For this reason “nakedness” is used in the Word as a type of disgrace and evil, and is predicated of a perverted church, as in Ezekiel: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겔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겔23:29)

 

계시록에서는 In John: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 (계3:18)

 

그리고 마지막 날에 관하여는 And concerning the last day: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계16:15)

 

신명기에서는 In Deuteronomy: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 If a man hath found some nakedness in his wife, let him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신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봉사할 때, 베로 속바지를 입어 하체를 가리도록, 안 그러면 죄를 짊어진 채 죽는다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aron and his sons were commanded to have linen breeches when they came to the altar, and to minister, 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42And thou shalt make for them breeches of linen to cover the flesh of nakedness; from the loins and even to the thighs they shall be. 43And they shall be upon Aaron, and upon his sons, when they come in to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or when they approach the altar to minister in the holiness; lest they bear iniquity, and die; it is a statute of an age for him and for his seed after him. (출28:42-43)

 

2021-04-15(D5)-창세기(창3,7, AC.211-213), '눈이 밝아져, 벗은 줄을 알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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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7-210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창3:6)

 

 

207. ‘먹음직도 하고’는 탐욕을 상징합니다. Good for food” signifies cupidity;

 

보암직도 하고’는 판타지를, pleasant to the eyes,” fantasy;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은 쾌락을 상징합니다. and “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 pleasure:

 

이것들은 다 오운, 곧 ‘여자’에 속한 것들입니다. these are of the own, or “woman”;

 

그도 먹은지라’는 래셔널의 동의를 상징합니다.(n. 265) by the “husband eating” is signified the consent of the rational (n. 265).

 

 

265. ‘남편’이 래셔널을 의미한다는 것이 이 장 6절에 보면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즉, 그의 동의를 의미합니다. That by “man” [vir] is signified the rational appears from verse 6 of this chapter, in that the woman gave to her man with her, and he did eat, by which is meant his consent;

 

같은 내용이 158번 글, 사람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분명한데요, 거기 보면, 사람은 지혜와 지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and the same is also evident from what was said of the man in n. 158, where by him is meant 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

 

하지만 여기 나오는 ‘사람’은 래셔널입니다. 지식의 나무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래셔널은 지성을 모방하는 것이요, 말하자면, 지성의 겉모습이기 때문입니다. Here however “man” denotes the rational, because in consequence of the destruction of wisdom and intelligence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nothing else was left, for the rational is imitative of intelligence, being as it were its semblance.

 

 

158. 사람(man, 아담)이 내적 인간, 같은 말이지만, 지성과 지혜의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or what is the same, one who is intelligent and wise, is plain from Isaiah:

 

내가 본즉 한 사람(vir)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사41:28)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meaning none wise and intelligent.

 

※ 위 본문의 ‘사람’은 라틴어로 ‘비르(vir)’입니다. 라틴어에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homo)’라는 말이 따로 있지만, ‘호모’에 비해 ‘비르’는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도 보면은, Also in Jeremiah: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Run ye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and see if ye can find a man, if there be any executing judgment, seeking the truth (렘5:1)

 

여기 ‘정의를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을, One who executes judgment” means a wise person;

 

진리를 구하는 자’는 지성인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one who seeks the truth,” an intelligent one.

 

 

208. 이것이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아를 사랑함으로써 스스로를 유혹에 빠트려 고통을 겪게 했고, 감각과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자기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This was the fourth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o suffered themselves to be seduced by self-love [amore proprio] and were unwilling to believe what was revealed, unless they saw it confirmed by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209. 여기 사용된 표현들, 즉,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같은 표현들은 저 태고 때 살던 사람들의 지니어스에 채택된 그런 표현들인데요, 특별히 그들의 의지를 레퍼런스해야 합니다. 그들의 악이 그 의지로부터 물줄기처럼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The expressions here employed, as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 are such as were adapted to the genius of those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having especial reference to the will, because their evils streamed out from the will.

 

말씀에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이 나오는 데를 보면, 위 표현들은 의지보다는 이해력에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Where the Word treats of the people who lived after the flood, such expressions are used as relate not so much to the will as to the understanding;

 

태고인들은 선에서 진리를 얻었지만, 홍수 후 사람들은 진리에서 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for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ruth from good, but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had good from truth.

 

 

210. 사람의 오운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What man’s own is may be stated in this way.

 

사람의 오운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주님과 말씀 대신 자기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또한 감각적으로, 그리고 기억-지식을 가지고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샘솟는 모든 악과 거짓입니다. Man’s own is all the evil and falsity that springs from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nd from not believing in the Lord or the Word but in self, and from supposing that what cannot be apprehended sensuously and by means of memory-knowledge [sensualiter et scientifice] is nothing.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그저 악하고 거짓되어 갑니다. 그리고 그래서 모든 걸 거꾸로 봅니다.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nd therefore regard all things pervertedly;

 

악한 일을 그들은 선하다 하고, 선한 일을 악하다 합니다. things that are evil they see as good, and things that are good as evil;

 

거짓된 일을 그들은 참이라 하고, 참된 일을 거짓이라 합니다. things that are false they see as true, and things that are true as false;

 

분명히 있는 걸 그들은 없다 하고, 없는 걸 그들은 모든 것이라 합니다. things that really exist they suppose to be nothing, and things that are nothing they suppose to be everything.

 

증오를 사랑이라 하고, 어두움을 빛이라 하며, 죽음을 삶이라 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They call hatred love, darkness light, death life, and the converse.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다리를 전다’, ‘앞을 못 본다’ 합니다. In the Word, such men are called the “lame” and the “blind.

 

이런 게 사람의 오운입니다. 그 자체로 지옥이요, 저주받은 것이지요. Such then is the own of man, which in itself is infernal and accursed.

 

2021-04-14(D4)-창세기(창3,6, AC.207-210),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운, man’s own'.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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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창3:4-5)

 

 

206.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동시에 세상 배움에 탁월한 사람들보다 더 강한 믿음을 가진 걸까요? Who have a stronger belief that their eyes are open, and that as God they know what is good and evil, than those who love themselves, and at the same time excel in worldly learning?

 

그렇다 하더라도 누가 더 눈이 먼 걸까요? And yet who are more blind?

 

그들에게 묻기만 해도 확인되는 사실은, 그들은 영의 존재를 알기는커녕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Only question them, and it will be seen that they do not even know, much less believe in, the existence of spirit;

 

그들은 정말이지 영적, 천적 삶이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서 너무하다 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with the nature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they are utterly unacquainted;

 

그들은 영원한 삶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they do not acknowledge an eternal life;

 

그들은 자기들을 사라질 짐승과도 같은 존재들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for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like the brutes which perish;

 

그들은 주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대신 오직 자신들과 자연만 숭배합니다. neither do they acknowledge the Lord, but worship only themselves and nature.

 

그들 가운데 자신들의 표현들 안에서 보호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잘 모르는 본성을 가진 어떤 최고의 존재가 만물을 다스린다고 합니다. Those among them who wish to be guarded in their expressions, say that 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 of the nature of which they are ignorant rules all things.

 

감각과 기억-지식의 일들을 가지고 그들은 다양하게 자신들을 컨펌하는 원리들이 있으며, 만일 그들이 하려고만 하면 그들은 온 우주를 앞에 놓고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These are the principles in which they confirm themselves in many ways by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nd if they dared, they would do the same before all the universe.

 

그런 사람들은 신(神) 또는 최고의 현자(賢者) 대접을 받고 싶어 하지만, 만일 ‘당신은 자기가 가진 것 가운데 없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질문받으면 대답하기를, ‘그런 건 없는데... 만약 제가 가진 이 모든 것을 잃게 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라고 합니다. Although such persons desire to be regarded as gods, or as the wisest of men, if they were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 they would answer that it is to have no existence, and that if they were deprived of everything that is their own, they would be nothing.

 

이들은 만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질문을 받으면, 생각하기를, ‘그런 건 판타지인데...’ 합니다. If they are asked 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 they think it a fantasy.

 

‘양심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는 질문에는, ‘그건 그저 상상력에 불과한 것으로, 천민(賤民)들 통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conscience is, they would say it is a mere creature of the imagination, which may be of service in keeping the vulgar under restraint.

 

‘퍼셉션이 무엇인지는 아십니까?’ 하는 질문에는, 그들은 씨익 비웃으며, ‘그런 건 광적인 쓰레기입니다.’ 합니다.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perception is, they would merely laugh at it and call it enthusiastic rubbish.

 

이런 게 그들의 지혜이며,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소위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입니다. Such is their wisdom, such “open eyes” have they, and such “gods” are they.

 

이런 원리들, 그들 생각에는 대낮보다 더 밝은 원리들인데, 이런 원리들을 가지고 그들은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삼으며, 그렇게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신앙의 신비들을 추론합니다. Principles like these, which they think clearer than the day, they make their starting point, and so continue on, and in this way reason about the mysteries of faith;

 

그 결과는 과연 어둠의 깊은 심연밖에 뭐가 더 있을까요? and what can be the result but an abyss of darkness?

 

무엇보다도 이런 것들이 바로 세상을 꾀는 ‘뱀들’인 것입니다. These above all others are the “serpents” who seduce the world.

 

하지만 태고교회의 후손은 아직 이런 캐릭터는 아니었습니다. But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as yet of such a character.

 

이런 모습은 본 장 14절로 19절에서 다루게 됩니다. That which became such is treated of from verse 14 to verse 19 of this chapter.

 

2021-04-13(D3)-창세기(창3,4-5, AC.206),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 사람들(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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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4-205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창3:4-5)

 

 

204.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가 상징하는 것은, 만일 그들이 신앙에 관한 것들을 조사하되 감각과 지식에 속한 것, 곧, 자기들 인간의 것으로 하면, 그들은 분명 그 신앙의 일들을 마치 무슨 오류가 있는 것처럼 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 signifies that if they were to examine the things of faith from what is of sense and knowledge [ex sensuali et scientifico], that is, from themselves, they would plainly see those things as if erroneous.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은, 만일 그들이 자기 것으로 그런 짓을 하면, 그들은 하나님처럼 되어 자기가 자기를 가이드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And that they would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denotes that if they did so from themselves, they would be as God, and could guide themselves.

 

 

205. 모든 구절에는 교회의 어떤 특별한 상태나 상태의 변화가 들어 있습니다. Every verse contains a particular state, or change of state, in the church:

 

선행구절들은, 비록 그렇게 기울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불법으로 지각했다는 내용인 반면, the preceding verses, that although thus inclined they nevertheless perceived it to be unlawful;

 

이 구절들은, 그것이 자기들에게는 합법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선조로부터 그동안 전해져온 말들이 과연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그렇게 그들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these verses, an incipient doubt 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whether the things they had heard from their forefathers were true, and so their eyes would be opened;

 

마침내 자아-사랑이 우위를 점하게 되자, 그들은 자기들이 자기들을 리드할 수 있다, 자기들이 주님처럼 될 수 있다 착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at length, in consequence of the ascendancy of self-love, they began to think that they could lead themselves, and thus be like the Lord;

 

자아 사랑은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을 꺼리며, 자기 스스로 하기를 더 좋아하고, 믿음의 영역을 감각과 기억-지식의 것들을 가지고 스스로 컨설팅을 하는 등, 이런 것이 바로 자아 사랑의 정체이기 때문입니다. for such is the nature of the love of self that it is unwilling to submit to the Lord’s leading, and prefers to be self-guided, and being self-guided to consult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s to what is to be believed.

 

2021-04-12(D2)-창세기(창3,4, AC.204-205),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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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8-203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창3:2-3)

 

 

198. ‘동산 나무의 열매’는 태고교회 때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선과 진리입니다.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is the good and tru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 말라’는 신앙에 속한 선과 진리인데, 이것은 그들이 절대 자신들로부터 배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 i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which they were not to learn from themselves;

 

 

만지지 말라’는 스스로 혹은 감각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가지고 선과 신앙의 진리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금지입니다. not to touch it” is a prohibition against thinking of the good and truth of faith from themselves, or from what i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 et scientifico];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는 그렇게 신앙 혹은 모든 지혜와 지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lest ye die” is because thus faith, or all wisdom and intelligence, would perish.

 

 

199. 본문,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가 태고교회 때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선과 신앙의 진리 혹은 신앙 지식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것은,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라고 하고 있지, 지난 번 천적 인간 또는 태고교회를 다룰 때 살피던 ‘동산 각종 나무’(창2:16)라고 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 signifie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t is said to be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 and not the “tree of the garden,” as before when treating of the celestial man, or the most ancient church (Gen. 2:16).

 

동산의 나무’는 거기 언급된 대로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퍼셉션입니다. The “tree of the garden,” as it is there called, is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선과 진리는 그 근원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열매’로 부르며, 그래서 말씀에서도 또한 자주 ‘열매’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which good and truth, because they are from that source, are here called “fruit,” and are also frequently signified by “fruit” in the Word.

 

 

200. 앞서 창세기 2장 9절에서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로 지식의 나무가 아닌 생명 나무가 언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지식의 나무’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라고 하는 이유는 동산의 ‘중앙’이 가장 깊은 곳, 맨 안쪽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he “tree of knowledge” is here spoken of as being “in the midst of the garden,” although previously (Gen. 2:9), the tree of lives was said to be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not the tree of knowledge, is that the “midst” of the garden signifies the inmost;

 

천적 인간 또는 태고교회의 맨 안쪽,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는 ‘생명 나무’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and the inmost of the celestial man, or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the “tree of lives,” which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그러나 천적 영적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사람, 혹은 그 후손한테서는 신앙이 동산 혹은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의 ‘중앙’이 되었습니다. whereas with this man, who may be called a celestial spiritual man, or with this posterity, faith was the “midst” of the garden, or the inmost.

 

태고 때 살던 사람들의 퀄러티를 아주 충분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누구의 재능하고도 완전히 다른 그들의 지니어스에 대해서는 오늘날 정말 끔찍할 정도로 알려진 게 없기 때문입니다. It is impossible more fully to describe the quality of the men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because at the present day it is utterly unknown, their genius being altogether different from what is ever found with anyone now.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니어스에 관한 한 조각 아이디어를 전하는 목적은, 그들은 선을 통해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사랑을 통해 무엇이 신앙에 속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언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For the purpose however of conveying some idea of their genius, it may be mentioned that from good they knew truth, or from love they knew what is of faith.

 

그러나 그 세대가 끝났을 때, 이후 일어난 새로운 세대는 완전히 다른 지니어스를 계승했습니다. 그들은 선을 가지고 진리를 식별하거나 사랑을 가지고 무엇이 신앙인지를 알아차리는 대신, 진리를 가지고 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지식을 습득하거나, 신앙의 지식들을 가지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지식을 획득했습니다. 그들 중 정말 많은 사람이 지식 밖에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But when that generation expired, another succeeded of a totally different genius, for instead of discerning the true from the good, or what is of faith from love, they acquired the knowledge of what is good by means of truth, or what is of love from the knowledges of faith,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이것이 바로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홍수 후 생겨난 변화였습니다.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201. 홍수 전 태고 때 사람들의 것과 같은 그런 지니어스는 오늘날은 찾을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들의 지니어스로 기록된 이 구절, 단어들의 의미를 인텔리전트하게 설명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Seeing therefore that such a genius as that of the most ancient people anterior to the flood is not found and does not exist at the present day, it is no easy matter to explain intelligibly what the words of this passage in their genuine sense imply.

 

하지만 이 말씀들은 천국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이해됩니다. 천적이라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전 거듭난 태고 때 사람들과 같은 지니어스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They are, however, perfectly understood in heaven, for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called celestial are of the same genius as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regenerate before the flood;

 

한편, 영적이라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의 지니어스는 홍수 후 거듭난 사람들의 지니어스와 유사합니다. 두 경우 다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지만 말입니다. while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termed spiritual are of a similar genius to the regenerate after the flood, although in both cases with indefinite variety.

 

 

202.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교회의 캐릭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지식의 나무를 먹는 일’, 곧 신앙에 속한 것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배우는 일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그 나무를 만지는 일, 곧 어떤 신앙 관련 일들을 그런 걸 가지고 생각하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안 그러면 그들은 천적 삶에서 미끌어져 영적 삶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밑으로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a celestial man, was of such a character as not only to abstain from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that is, from learning what belongs to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but was not even allowed to touch that tree, that is, to think of anything that is a matter of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lest they should sink down from celestial life into spiritual life, and so on downward.

 

천적 천사들의 삶 또한 바로 이와 같은데요, 천사들이 더 내적일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무슨 이름 같은 걸로 불리거나 무엇이든지 어떤 영적인 일에 관여되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Such also is the life of the celestial angels, the more interiorly celestial of whom do not even suffer faith to be named, nor anything whatever that partakes of what is spiritual;

 

만일 타인에 의해 거론되면, 그들은 신앙 대신 자기들만 아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사랑에 관한 퍼셉션을 취합니다. and if it is spoken of by others, instead of faith they have a perception of love, with a difference known only to themselves;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어떤 것이든지 그들은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출발합니다. thus whatever is of faith they derive from love and charity.

 

그들은 신앙 관련 무슨 토론 듣는 걸 아주 아주 싫어합니다. 또한 그에 관한 어떤 기억-지식도 정말 힘들어 합니다. Still less can they endure listening to any reasoning about faith, and least of all to anything of memory-knowledge respecting it;

 

그들은 사랑으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을 받기 때문입니다. for, through love, they have a perception from the Lord of what is good and true;

 

그리고 이 퍼셉션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어떤 일이 그런지, 안 그런지를 즉시 압니다. and from this perception they know instantly whether a thing is so, or is not so.

 

그래서 그들은 신앙에 관한 무슨 말을 들을 때, 그저 단순히 그렇다, 안 그렇다로 대답합니다. 그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걸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Therefore when anything is said about faith, they answer simply that it is so, or that it is not so, because they perceive it from the Lord.

 

이것이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Matthew: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마5:37)

 

이것이 바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만지지도 말라’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This then is what was meant by their not being allowed to touch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만일 그들이 그걸 만지면, 그들은 악 가운데 있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은 ‘죽기’ 때문입니다. for if they touched it, they would be in evil, that is, they would in consequence “die.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적 천사들은 다른 천사들처럼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서로 대화합니다. 그러나 천적 언어를 가지고 하는데요, 이 언어는 사랑으로 되어 있고,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훨씬 형언할 수 없는 언어입니다. Nevertheless the celestial angels converse together on various subjects like the other angels, but in a celestial language, which is formed and derived from love, and is more ineffable than that of the spiritual angels.

 

 

203. 반면, 영적 천사들은 신앙 관련 대화를 하며,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들을 가지고 신앙의 일들을 심지어 컨펌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런 그라운드에서 신앙의 일들 관련 무슨 결론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The spiritual angels, however, converse about faith, and even confirm the things of faith by those of the intellect, of the reason, and of the memory,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matters of faith on such grounds:

 

그렇게 하면 악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those who do this are in evil.

 

주님은 이들에게 신앙에 관한 모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관련 퍼셉션을 주시는데 물론 이것은 천적 천사들의 퍼셉션과는 다른 것입니다. They are also endowed by the Lord with a perception of all the truths of faith, although not with such a perception as is that of the celestial angels.

 

영적 천사들의 퍼셉션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생해지는 일종의 양심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는 천적 퍼셉션처럼 나타납니다만 그러나 사실은 그건 아니고, 오직 영적 퍼셉션일 뿐입니다. The perception of the spiritual angels is a kind of conscience which is vivified by the Lord and which indeed appears like celestial perception, yet is not so, but is only spiritual perception.

 

2021-04-11(D1)-창세기(창3,2-3, AC.198-20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에 대한 태고교회 사람들의 태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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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4-197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창3:1)

 

 

※ 오늘은 창3:1 총정리입니다.

 

194. 여기서 ‘’은 사람이 기대는 자신의 감각 파트를, By the “serpent” is here meant the sensuous part of man in which he trusts;

 

들짐승’은 앞서 살핀 것처럼, 겉 사람의 모든 affection을, by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here, as before, every affection of the external man;

 

여자’는 사람의 own을, by the “woman,” man’s own;

 

뱀의 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는 그들이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각각 표현한 것입니다. by the serpent’s saying,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that they began to doubt.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에 관한 건데요, 이들은 비록 계시된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그런지 자기들 두 눈으로 보고, 느낌으로 알 수 있기 전까지는 안 믿기 시작했습니다.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third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이들의 첫 번째 상태는 의심의 일종이었는데, 그것을 여기,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서 설명합니다. Their first state, that it was one of doubt, is described in this and in the next following verse.

 

 

195. 태고인들은 사람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짐승이나 새하고 비교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did not compare all things in man to beasts and birds, but so denominated them;

 

이런 식의 그들의 일상 언어 매너는 심지어 홍수 후 고대교회에도 남아있었고, 선지자들 중에도 보존되었습니다. and this their customary manner of speaking remained even in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nd was preserved among the prophets.

 

사람한테 있는 감각적인 것들을 그들은 ‘’이라고 했습니다. 뱀이 땅에 달라붙어 지내는 것처럼 감각적인 것들 또한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The sensuous things in man they called “serpents,” because as serpents live close to the earth, so sensuous things are those next the body.

 

그래서 또한 그들은 신앙의 신비들에 관한 추론, 그리고 확실한 감각에 기초한 추론을 가리켜 ‘뱀의 독’이라 했고, 그런 사람들을 ‘뱀들’이라고 했습니다. Hence also reasonings concerning the mysteries of faith,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were called by them the “poison of a serpent,” and the reasoners themselves “serpents”;

 

이런 사람들은 많은 걸 감각, 곧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추론하기 때문에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하신 것입니다. 보이는 것들은 예를 들면, 땅, 육체, 일상 및 자연에 관한 것들입니다. and because such persons reason much from sensuous, that is, from visible things (such as are things terrestrial, corporeal, mundane, and natural), it is said that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2] 그래서 시편에서도 추론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자들을 가리켜 And so in David, speaking of those who seduce man by reasonings: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시140:3)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They go astray from the womb, speaking a lie. Their poison is like the poison of a serpent, like the deaf poisonous asp that stoppeth her ear, that she may not hear the voice of the mutterers, of a wise one that charmeth charms [sociantis sodalitia] (시58:3-5)

 

여기 ‘뱀의 독’이라는 표현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혜로운 사람이 하는 말이나 그들의 목소리조차 작정하고 듣지 않게 하는 그런 추론들을 가리킵니다. Reasonings that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 men will not even hear what a wise one says, or the voice of the wise, are here called the “poison of a serpent.

 

그래서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라는 표현이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잠언이 되었습니다. Hence it became a proverb among the ancients, that “The serpent stoppeth the ear.

 

아모스에 In Amos: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As if a man came into a house, and leaned his hand on the wall, and a serpent bit him. Shall not the day of Jehovah be darkness and not light? even thick darkness, and no brightness in it? (암5:19-20)

 

손을 벽에 대었다가’는 자기 자신한테서 나오는 힘을 말하며, 감각적인 것들을 신뢰한 결과, 여기서 말하는 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The “hand on the wall” means self-derived power, and trust in sensuous things, whence comes the blindness which is here described.

 

[3]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The voice of Egypt shall go like a serpent, for they shall go in strength, and shall come to her with axes as hewers of wood. They shall cut down her forest, saith Jehovah, because it will not be searched; for they are multiplied more than the locust, and are innumerable. The daughter of Egypt is put to shame; she shall be delivered into the hand of the people of the north (렘46:22-24)

 

애굽’은 주님의 것들을 감각과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추론하는 걸 말합니다. Egypt” denotes reasoning about Divine things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뱀의 소리’는 그런 추론들을, Such reasonings are called the “voice of a serpent”;

 

그리고 ‘북쪽 백성’은 그런 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블라인드니스, 곧 앞을 못 보는 것을 말합니다. and the blindness thereby occasioned, the “people of the north.

 

욥기에, In Job: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 the viper’s tongue shall slay him. he shall not see the brooks, the flowing rivers of honey and butter (욥20:16-17)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은 영적이고 천적인 일들인데 그저 추론만 하는 자들의 눈엔 절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Rivers of honey and butter” are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cannot be seen by mere reasoners;

 

독사의 독’, ‘뱀의 혀’는 추론의 일들을 말합니다. reasonings are called the “poison of the asp” and the “viper’s tongue.

 

뱀 관련, 더 자세한 건 아래 14절, 15절을 보시면 됩니다. See more respecting the serpent below, at verses 14 and 15.

 

 

196. 고대에 ‘’으로 부르던 사람들은 계시의 일들보다는 감각의 일들을 더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In ancient times those were called “serpents” who had more confidence in sensuous things than in revealed ones.

 

지금도 여전히 그러나 훨씬 더 악화되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모든 것을 그저 안 믿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때 고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지식들을 가지고는 ‘절대 고분고분 믿지 않겠다’ 작정들을 하기 때문이며, 그 결과, 자신들을 훨씬 더 심각한 어두움 가운데로 내몰고 있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worse at the present day, for now there are persons who not only disbelieve everything they cannot see and feel, but who also confirm themselves in such incredulity by knowledges [scientifica] unknown to the ancients, and thus occasion in themselves a far greater degree of blindness.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장님이 되게 하는지, 그래서 정말 아무 것도 못 보고, 못 듣게 하는지, 또한 이들은 천국의 일들을 감각과 기억-지식들, 그리고 철학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인데, 말씀에서 자주 ‘귀머거리 독사’, ‘날으는 뱀’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정말 아주 치명적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 알려질 수 있도록 이런 사람들이 영에 대해서는 무엇을 믿고 있는지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In order that it may be known how those blind themselves, so as afterwards to see and hear nothing, who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heavenly matters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who are not only “deaf serpents,” but also the “flying serpents” frequently spoken of in the Word, which are much more pernicious, we will take as an example what they believe about the spirit.

 

 

[2] 감각적인 사람, 오직 감각적으로 확실한 것만 믿는 사람은 영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가 그걸 볼 수 없기 때문인데요, 그는 말하기를, “그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내가 그걸 느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라야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 sensuous man, or he who only believes on the evidence of his senses, denies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ecause he cannot see it, saying, “It is nothing because I do not feel it: that which I see and touch I know exists.”

 

그 다음, 기억-지식의 사람, 자기의 기억-지식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말하기를, The man of memory-knowledge [scientificus], or he who forms his conclusions from memory-knowledges says,

 

영이라는 게, 가령 증기나 열, 아니면 무슨 다른 과학적 엔터티의 일종으로 그냥 즉시 옅은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입니까? What is the spirit, except perhaps vapor or heat, or some other entity of his science, that presently vanishes into thin air?

 

동물들 또한 몸, 감각, 그리고 이성과 유사한 뭔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람의 영은 살고, 동물들의 영은 죽는다라고들 주장되고 있지요. Have not the animals also a body, senses, and something analogous to reason, and yet it is asserted that these will die, while the spirit of man will live.

 

이걸 보면 그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Thus the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3] 철학자들 또한, 어쩌면 이들은 남은 인류 가운데 가장 예리한 사람들일 것 같은데요, 이들은 영에 대하여 자기들도 이해하지 못 하는 용어들을 가지고 말을 합니다. 이들은 물질이나 유기체, 혹은 그밖의 것들로부터 나오는 영을 한 가지 표현만 가지고 적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을 반박하기 때문입니다. Philosophers also, who would be more acute than the rest of mankind, speak of the spirit in terms which they themselves do not understand, for they dispute about them, contending that not a single expression is applicable to the spirit which derives anything from what is material, organic, or extended;

 

이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추상화시켜 결국 소멸,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만들어 버립니다. thus they so abstract it from their ideas that it vanishes from them, and becomes nothing.

 

보다 분별 있는 사람들은 영은 사고(思考)다 주장합니다. The more sane however assert that the spirit is thought;

 

그러나 이들은 사고에 관해 추론하면서 사고를 모든 실재성으로부터 분리하게 되고, 결국은 ‘몸이 기능을 다하면 영도 사라져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맙니다. but in their reasonings about thought,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rom it all substantiality, they at last conclude that it must vanish away when the body expires.

 

이와 같이 감각이나 기억-지식, 그리고 철학을 가지고 추론하는 사람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 결과 영과 영적인 일들에 관한 말들을 하나도 믿지 않습니다. Thus all who reason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and therefore believe nothing of what is said about the spirit and spiritual things.

 

하지만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Not so the simple in heart:

 

그들은 영의 존재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자기들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고, 왜냐 하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사후에도 그들이 살리라 하셨기 때문이라고, if these are questioned about the existence of spirit, they say they know it exists, because the Lord has said that they will live after death;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이성을 끄는 대신,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것을 생생하게 합니다. thus instead of extinguishing their rational, they vivify it by the Word of the Lord.

 

 

197. 태고인들은 천적인 사람들이었는데, 그들 사이에서는 ‘’ 하면 ‘세심한 주의’ 및 그들의 감각 파트를 상징하였습니다. 그들은 평소 이 감각 파트를 잘 훈련하여 각종 신체적 상처로부터 안전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신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celestial men, by the “serpent” was signified circumspection, and also the sensuous part through which they exercised circumspection so as to be secure from injury.

 

’에 관한 이러한 상징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분명한데요, This signification of a “serpent” is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to his disciples: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s; be ye therefor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 (마10:16)

 

또. 광야에 세웠던 ‘놋뱀’으로부터도 분명합니다. 이 놋뱀은 주님 안 감각 파트를 가리키는데요, 오직 주님만이 천적인 사람이시며, 오직 주님만이 모든 사람을 돌보시고, 또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And also from the “brazen serpent” that was set up in the wilderness, by which was signified the sensuous part in the Lord, who alone is the celestial man, and alone takes care of and provides for all;

 

그래서 그때 그 뱀을 쳐다 보는 사람들은 모두 보호를 받은 것입니다. wherefore all who looked upon it were preserved.

 

2021-04-10(D7)-창세기(창3,1, AC.194-197), '뱀, the sensuous part of man'.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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