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32, 창3:11-13,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AC.229-233) - '르네상스로 인해 더욱 악화된 상황'

 

11-13절,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232

오늘날은 그러나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더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고대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과학 지식을 포함, 여러 학문 관련 지식들 때문에 사람들이 이제는 감각마저 불신하게 된 건데요, 이로 인해 형언할 수 없는 어두움이 시작되었습니다. At this day, however, it is much worse than in former times, because men can now confirm the incredulity of the senses by memory-knowledges unknown to the ancients, and this has given birth to an indescribable degree of darkness.

 

※ 과학 혁명의 토대가 되어 중세와 근대를 이어주게 된 소위 르네상스 시대(대략 14세기에서 16세기 말)를 지나며 그동안 감각이 낳은 온갖 회의론마저 돋보기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는 이 주석을 1749년에 시작, 1756년에 마쳤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 어두움의 엄청난 실상을 알면 아마 기절할 만큼 놀라들 자빠질 겁니다. If men knew how great is the darkness from this cause they would be astou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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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31, 창3:11-13,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AC.229-233) - '악의 기원과 전승, 그리고 현재'

 

11-13절,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231

홍수 전 있었던 태고교회의 악, 뿐만 아니라 홍수 후인 고대교회의 악, 그리고 또 유대교회의 악, 계속해서 새 교회, 즉 주님 오신 후 시작된 이방교회의 악, 그리고 오늘날 현 교회의 악까지, 이 모든 악은 주님이나 주님의 말씀 대신 자신과 자신의 오운에 속한 감각(themselves and their own senses)을 믿은, 그리고 지금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은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으며, 신앙이 전혀 없는 곳에 이웃 사랑 역시 전혀 없고, 결과적으로 지금은 모든 것이 거짓이요 악입니다. The evi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existed before the flood, as well as that of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nd also that of the Jewish church, and subsequently the evil of the new church, or church of the Gentiles, after the coming of the Lord, and also that of the church of the present day, was and is that they do not believe the Lord or the Word, but themselves and their own senses. Hence there is no faith, and where there is no faith there is no love of the neighbor, consequently all is false and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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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30, 창3:11-13,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AC.229-233) - '네 번째 후손의 지배적인 악, 자기 사랑'

 

11-13절,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230

이들 네 번째 후손의 지배적인 악은 자기 사랑이었으며, 동시에 세상 사랑은 오늘날만큼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생활권이 그들 소유의 가정과 권속들 내였기 때문이며,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열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The ruling evil of this posterity was the love of self, without their having at the same time so much of the love of the world as exists at the present day; for they dwelt within their own households and families, and had no desire to accumulate w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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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29, 창3:11-13,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AC.229-233) - '창3:11-13 속뜻 개요'

 

11-13절,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229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는 앞서 설명되어온 내용으로 분명한데요,  인간 이성(the rational of man, 합리)이 오운(own)으로 말미암아 속임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오운은 인간 자신에게 무척 소중, 이걸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이라고 하는데, 그는 자기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은 뱀한테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 실제로 뱀이라는 건 존재하지도, ‘(the serpent)으로 상징된 감각적인 걸 특정하지도 않으셨다는 것이며, 대신 이 구절들에는 어떤 다른 의미가 들어 있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이들 감각으로 인해 속았음을 지각했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자기 사랑의 결과, 그들은 주님과 주님 신앙에 관해 귀로 들어온 것들의 사실 여부를 먼저 좀 확인할 수 있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걸 믿기 전에 말입니다.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explained before, namely, that the rational of man suffered itself to be deceived by its own, because this was dear to him (that is, by the love of self), so that he believed nothing but what he could see and feel. Everyone can see that Jehovah God did not speak to a serpent, and indeed that there was no serpent, neither did he address the sensuous part that is signified by the “serpent”; but that these words involve a different meaning, namely, that they perceived themselves to be deluded by the senses, and yet, in consequence of self-love, were desirous of ascertaining the truth of what they had heard concerning the Lord, and concerning faith in him, before they believed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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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3(D1)-주일예배(2533, 눅17,7-10),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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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3-03(D1)-주일예배(2533, 눅17,7-10),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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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의 속뜻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17:7-10)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천국으로부터 하는 것,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 하는 것은 무슨 일이든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이다. (계시록 해설 794:3, 이순철 역) whatever man does 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he does from heaven, that is, through heaven from the Lord; but anything that a man does 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this he does from self. (AE.794:3)

 

 

다음은 마태복음에 실린 주님의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5:1-4)

 

주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할 때는 생색을 내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말씀이지요. 누구나 자기를 자랑하고픈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지 말라 하십니다. 왜일까요?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높이는 건 자아에 대한 사랑이며, 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대신 자신만을 사랑하면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문이 닫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선(善, Divine Good)과 진리(眞理, Divine Truth)의 유입이 끊어집니다. 그런 상태가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서 살아가는 상태인데, 그때 우리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할 뿐 이웃에게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장 39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눅11:39-40)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바리새인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41절) 하십니다.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는’ 건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겉 사람으로부터 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행동이라도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고,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전자는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속 동기는 주님 보시기에 불순하고 악합니다. 반면, 후자, 즉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고 선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웃을 구제할 때는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익한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님 앞에 스스로 무익한 종이 되는 건 겉 사람의 마음으로는 어렵고, 속 사람의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 앞에서 무익한 종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해 오늘 본문의 말씀들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7절입니다.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종이 밭에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종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건 말씀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배워 익숙해지는 걸 의미합니다. 밭을 가는 건 진리의 지식을 배워 믿음이 자라가는 걸 의미하고, 양을 치는 건 그 믿음에 따라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면 밭은 무엇일까요? 밭은 교회를 뜻합니다. 신앙인은 교회를 통해 매일 선과 진리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묵상, 실천하는데요, 그것이 종이 밭을 일구고, 양을 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종이 밭에서 돌아와 앉아 누군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려고 합니다. 말씀에서 앉는 건 의지의 상태를, 먹는 건 진리와 선을 실천하는 거, 즉 삶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 종의 상태는 어떤 겁니까?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주님과 이웃을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진리에 대해 아는 걸 자랑하고, 진리를 이용해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 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상태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종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물으신 겁니다. 그러면 종은 어떻게 처신하는 게 옳을까요? 그에 대해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8절 말씀입니다.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종은 자기가 먹기 전에 마땅히 주인의 먹을 것을 먼저 준비하고, 주인이 먹는 동안 곁에서 수종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들이 진리를 가지고 선을 행할 때는 자기 자신보다 먼저 주님과 이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기쁨과 행복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주인이 먹은 다음, 종이 먹고 마실 음식은 바로 그런 천국의 것, 곧 천국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 된 사람은 허리에 띠를 두르고 먼저 주인을 수발해야 합니다. 말씀에서 허리는 생식능력과 관련이 있는데요, 그래서 영적으로는 선한 열매를 생산하는 것, 즉 선을 행하는 걸 뜻합니다. 그리고 띠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띠를 두르고 주인을 수종, 수발하는 건 선을 행함에 있어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진리에 따라 행하는 걸 의미합니다.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할 때, 주님과 이웃을 위한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걸 가지고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평화와 자유를 주십니다. 주님은 그걸 위해 종더러 먼저 주인을 수발하고, 그다음에 먹고 마시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에는 이와 같은 반전의 미학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육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영광을 얻으신 것이나, 신앙인들이 자아라는 생명을 버림으로 주님으로부터 참 생명을 얻는 건 겉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반전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인들 가운데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과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기보다 이웃들로부터 섬김받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주인보다 먼저 먹고 마시려는 종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잠깐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믿고, 그것에 따라 살 수 있음에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그걸로 추앙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걸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는 주님 앞에 스스로 무익한 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잘나거나 총명해서 참된 진리 안에 들어온 게 아닙니다. 내가 선해서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아주 작은 선도 스스로 행할 수 없고, 아주 작은 악도 스스로 끊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악하고 거짓된 것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하고 진실한 모든 게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걸 인정할 때,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고백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한 일들에 대해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겸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아시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속 사람이라는 마음과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이 계시고, 겉 사람 안에는 인간의 자아가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만 오고, 사람으로부터는 아니라는 건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선한 행위는 겉 사람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보기에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하고, 성실하고 공정하게 행동하더라도 그 동기가 주님과 이웃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서 하는 일이며, 그러므로 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속 사람이 열리고, 속 사람으로부터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주님과 이웃 앞에 겸손’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겸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주님과 함께’라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많은 것입니다. 시험을 잘 견디고 이김으로써 속 사람은 열립니다. 그리고 그때 무슨 일을 하든 자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매일 같이 띠를 두르고, 정성껏 주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에게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107:15)

 

아멘

 

원본

2021-08-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3-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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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1(D6)-추모예배(2532, 마24,35-40), '故 권성조(權聖祚, 1923생 - 2015졸, 향 91세) 9주기 추모(追慕) 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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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지금부터 작년 11월 5일, 포천 황동묘원에서 이곳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로 새롭게 모신 故 권성조(權聖祚, 1923생 - 2015졸, 향 91세) 아버지, 할아버지 추모(追慕)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설교

다들 오늘 특별히 삼일절(105주년) 아침, 원근 각처에서 서둘러 오시느라고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께서 그 귀한 걸음들 위에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민족의 아주 특별한 날인 삼일절이면서, 한편으론 고 권성조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9주기 되는 기일이기도 합니다.

 

이 ‘기일’(忌日)이라는 표현은 다른 말로는 제삿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는 이런 예배가 아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였을 것입니다.

 

원래 조선 말, 이 땅에 처음 기독교가 전파된 건 가톨릭(Catholic, 公, 보편적, 일반적), 그러니까 천주(天主)교를 통해서입니다.

 

※ 참고로, ‘기독교’라 하면 천주교를 포함, 개신(改新)교 전체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기독’(基督, 중국어로는 기두’로 발음)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에 대한 한자 표기인 基利斯督’(중국어로는 기리스두’로 발음)를 음역(音譯), 그러니까 우리식대로 축약해서 읽은 건데요, 가령, 프랑스를 佛蘭西(중국어 발음은 포란시), 즉 우리말 불란서로 읽는 것과 같은 겁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둘 다 그 뿌리가 ‘기독’,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타 종교 입장에서 봤을 땐 다 기독교인 것이지요. 이 외에도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뿌리로 하는 다양한 종파, 예를 들면, 정교회라든지, 콥트라든지 등등 모두 무슨 세계 종교 분포도 같은 통계를 낼 때는 다 합쳐서 기독교로 분류합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잠깐 위키백과를 보니 세계 종교에서 기독교가 25억이며, 그 안에서 가톨릭이 12억, 개신교가 6억, 정교회 3억 등으로 나오며, 현 전 세계 인구가 대략 80억으로 나오는 걸 보면, 기독교는 30프로 좀 넘네요. 주님의 시야엔 이 나머지 70프로, 55억의 인구 역시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자녀라는 사실과, 만일 개신교만 놓고 볼 때, 주님의 구원은 나머지 74억한테도 중요하여, 그래서 주님은 모두를 아우르는 어떤 공정한 ‘구원 시스템’을 구비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 개신교(1879)가 들어오기 백 년 전 천주교(1784)가 들어왔는데요, 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처음 들어온 천주교는 처음에는 서양 기독교 입장에서 당시 조선에 만연, 큰 폐단을 낳고 있던 조상 제사를 금했는데, 이게 나중에 수많은 구한말 천주교 박해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것이 바로 흥선 대원군 때 있었던 병인박해(1866-1872)입니다. 당시 심화되던 민심 이반을 달래느라 안 그래도 조상 제사를 금하던 천주교를 향해 가진 백성들의 반감을 이용했던 건데요, 전국적으로 이 기간 팔천 명이 참수(斬首)된,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박해였습니다.

 

이런 시행착오, 단순히 시행착오라기엔 그 흘린 피가 너무 진한 아픈 역사를 거쳐 천주교에서는 제사 허용으로 입장을 바꿨고, 그걸 미사 형태로 오늘날 드리고 있으며, 개신교는 교단마다 좀 다르지만 어디는 ‘추모’(追慕) 예배, 어디는 ‘추도’(追悼) 예배, 또는 편의상 기일 예배 등으로 부르면서 지금처럼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성경 어디에서도 죽은 자를 해마다 기억하여 무슨 의식을 진행하는 장면이 한 군데도 안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죽었을 때, 그와 관련된 장례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말입니다. 성경에도 이 ‘제사’ 이야기는 많이 나옵니다만, 우리말 번역 표현이 그저 ‘제사’일 뿐, 원어는 영어로 ‘worship’, 즉 예배하다, 경배하다입니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제사 정신인 것이지요. 성경의 유일한 예배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며, 이를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아래와 같이 아예 돌판에 새겨주셨습니다.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20:3-6)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명목상으로는 추모예배로 모였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것임을 하나님이 보시고, 이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만약 지상의 이 부모-자식, 남편과 아내 등의 혈연관계가 사후(死後) 천국에까지 영원히 이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좀 엉뚱해 보이기도 하는 이런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해본 적이 있는데요, 만일 사후 내가 천국에 가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또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리고 제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등 끝없이 이어지는 위아래 관계 속에서 아마도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 되지 않을까 한 적이 있습니다. 천국 전체가 아마 혼란도 그런 혼란이 없지 싶었는데요, 지상 혈연관계가 천국까지 이어진다면 말입니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썼던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는 그 시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대부분 자기가 개척한 교회들에게 신앙적 권면을 위한 편지, 서신들을 썼을 뿐인데, 그 서신들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아서인지 후대에 이르러 몇 차례 공의회를 거치며, 그 서신들이 성경에 포함된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은 그의 생전에 그를 한번 천국, 그것도 삼층천을 다녀와 보게 하셨는데요(고후12:2), 이런 일을 세월이 흘러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 주님은 또 한 사람, 그의 나이 57세에 찾아오셔서 천국을, 이번에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무려 27년 동안 구석구석 경험하여 글로 남기게 하셨습니다. 천국을 한 번만 다녀왔던 사도 바울의 글도 성경이 되었거든, 하물며 27년간을 다니며 라틴어로 수만 장의 기록을 남긴 사람의 글은 더 말할 게 없겠지요?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그가 남긴 기록을 참고한 건데요, 그의 글을 가급적 제가 소화한 걸로 말씀드립니다. 그의 기록을 이런 예배에서까지 인용할 정도로 제가 신뢰하는 이유는, 그 역시 참으로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서 남은 삶을 오직 주의 쓰임새의 삶을 살면서 지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하며 높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추모예배 관련, 사후의 일, 곧 천국의 실상을 논할 때, 이보다 더 생생한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스웨덴)이며,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톤(1643-1727, 영국)과 40년 정도 겹치는 시대를 산, 역량으로는 거의 동급의 천재였습니다.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통한 이 영계 체험을 시작하기 전 이룩한 과학적 성취는 당시 유럽의 학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가 나중에 과학계를 은퇴, 오직 주님 부르신 일에만 전념하자 당대 학자들이 다 만류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그때 한 대답입니다.

 

저와 같은 과학자는 얼마든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 곧 영계에 관한 진리를 남기는 일은 인류 전체의 생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 받은 이 특별한 소명은 제가 과학자로 공헌하는 것보다 수천수만 배 더 중요합니다...

 

그의 이름은 우리한테는 무척 생소하지만, 그는 서양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서 서양에서는 유명하며, 심지어 그의 모든 영적 저작은 인류 문화유산으로 등재까지 된, 그런 사람입니다.

 

 

자, 그럼 다시, 이 지상 혈연이 천국까지 이어지는가 하는 건데요, 그를 통해 주님이 계시하신 천국 실상에 의하면, 지상의 혈연관계는 지상 생활로 그치고, 천국에서는 모든 게 전혀 새롭게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부모-자식, 부부 등의 관계가 사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뭐랄까... 초기화가 된다고 해야 할까요? 네, 기존 지상의 모든 것, 곧 지상에서 익힌 모든 학문과 지식, 인맥, 경력, 경험 등은 다 휴면 상태로 들어가고, 이후 모든 걸 전혀 새롭게 시작한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진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한 가지, 아주 근본적인 게 궁금해집니다. 사후 어차피 초기화가 될 거라면, 굳이 생전에 효도다 뭐다, 부부 사랑이니 자식 사랑이니 애쓸 필요가 없지 않을까 말이지요. 네, 그런 생각이 당연히 들지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주님이 그런 걸 모르고 우리가 누구의 자식으로, 누구를 우리의 부모로 세상에서 이렇게 연결시켜 주셨겠습니까? 거기엔 주님의 깊으신 섭리, 신적(神的) 섭리와 목적이 있으신데요, 그건 바로 우리가, 그리고 온 인류가 지상 생활을 마치고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먼저 천국에 합당한 주님의 신적 성품을 지상에서 함양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에게 있어 지상은 천국을 위한 일종의 모종밭인데요, 지상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주님이 맺어주신 혈연관계를 통해 주님을 닮도록 연습하고 훈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아버지를 아버지의 모습으로 계신 주님으로, 어머니를 어머니의 모습으로 계신 주님으로, 형, 누나, 동생을, 남편 혹은 아내, 그리고 자녀를 각각 그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 주님으로 인식, 마치 주께 하듯 하여 어떤 인간관계에서든지 주님의 성품을 갖추어 나갈 수 있게 말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으로 가는 나라인데, 그 속 사람이 천국의 주(主)이신 주님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속 사람은 무슨 교리에 밝다고,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무슨 신학적 입장에 목숨을 걸 정도로 단호하다고 저절로 형성되는 게 아니고, 오직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오직 주님의 진리를 실천, 선한 삶을 살아야만 형성되는 겁니다.

 

 

다음은 톨스토이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주인공 마르틴은 구두를 만들고 고치는 제화공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그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5년 전에 자식 둘과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근래 하나 남은 막내아들까지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며, 자신도 빨리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고픈 마음이 들어 그날부터 성경을 읽다가 그리스도의 삶에 감동을 받고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더욱 성경 읽기에 열중했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마르틴, 내가 내일 찾아갈 테니 창밖을 보아라.

 

마르틴은 다음날 하루 종일 일 끝날 때마다 창밖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언제쯤 오시려나...”

 

하며,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신다던 하나님은 오시지 않고, 마침 창밖엔 늙은 청소부가 눈을 맞으며,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틴은 그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시게 한 뒤, 따뜻한 차를 대접하며 몸을 좀 녹이시게 하였습니다.

 

청소부가 나간 후, 두어 시간이 지나 창밖을 보니, 이번엔 아기를 안은 여인이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인을 가게 안으로 맞아들여 먹을 걸 대접하고, 그 사이 얼른 엄마와 아이를 위한 따뜻한 옷을 장만해 주었습니다.

 

또 시간이 흘러 거의 해가 질 무렵, 역시 창밖을 보니 이번엔 사과를 파는 노파가 사과를 훔친 소년을 붙잡고 야단을 치고 있었습니다.

 

마르틴은 밖으로 나가 소년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사과값을 대신 갚아주며, 노파가 소년을 용서하시도록 권유, 원만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마르틴은 날이 어두워지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마르틴은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자신이 낮에 대접했던 늙은 청소부와 아기 안은 여인, 노파와 소년이 나타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이후 마르틴은 꿈에서 깨어나 마침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니,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4:35-40)

 

 

이 단편의 핵심은 바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곧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하신 대목이지요. 즉 주님은 나이 많은 청소부의 모습으로, 아이를 안은 아이 엄마의 모습으로, 그리고 사과를 훔친 소년과 그 소년을 야단치는 노파의 모습으로 마르틴을 만나러 오셨고, 마르틴은 그 사실을 까맣게도 모르고 단지 그들을 주께 하듯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을 베풀었을 뿐인데,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이웃 사랑이 곧 주님 사랑이 되는 이유이며, 주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를 통해 내 안, 내 속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을 닮게 하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게 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마5:44)인데요, 이 말씀의 속뜻은, 비록 나를 힘들게 하고, 원한이 있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라 할지라도 그 역시 주님이 지으신 사람이므로 그의 안에도 역시 주님의 형상, 곧 주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으니, 비록 그는 미울지라도 그의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에 대해서는 예를 갖추고, 함부로 하지 말라는,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말씀인데요, 그러니까, 원수일지라도 그저 하나님 앞에 네 할 도리만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선을 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19-21)

 

사후 속 사람의 겉은 휴면 상태에 들어가고, 속 사람의 속이 드러나 그걸로 천국, 또는 지옥을 가게 된다는, 이것 때문에 지상 혈연관계가 천국까지 이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내용은 아래 소개하는 책자인,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그러나 오히려 이런 사실, 이런 영적 실상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끼치는 유익은 참 큰데요, 가장 큰 유익은, 우리가 이렇게 모든 관계가 지상 생활로 끝난다는 걸 알면, 더 이상, 무슨 자기 이름 석 자를 남기기 위해, 또는 가문의 이름을 빛나게 하기 위해, 아니면 재물을 쌓기 위해,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자녀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거나 큰 부담을 지우는 그런 무리수를 두는 인생을 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든 아니든 거진 다 공통인데요, 이런 건 어떤 말로 포장하든 사실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얼른 돌이키지 않으면, 그 속 사람이 지옥에게 먹히게 되어 살아서도 지옥에 연결되어 살게 됩니다. 그 끝이 비참하며, 사후 운명이 매우 안타깝게 되지요. 아주아주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을 열심히 사는 게 무조건 나쁘다거나 죄가 된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모든 노력과 방향, 초점이 주님이 원하시는 어떤 쓰임새에 맞춰진 게 아닌,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맞춰지는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 우리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아주 깔끔하게 살 수 있습니다. 부모-자식, 남편과 아내, 그리고 교회 교인들과 회사 동료들, 이웃들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마르틴처럼 주님을 대접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해도 정말 순수하게, 자식을 사랑해도 정말 순수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지상의 모든 관계는 지상 생활로 마감한다는 이 계시는 정말 정말 귀한 계시이며, 그래서 아마도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여신 많은 계시 중 하나로 이것을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작하면서 던진 일종의 화두지요. 성경엔 장례 관련 사례는 많으나 죽은 자를 기억하여 해마다 무슨 의전을 행한 기록은 전혀 없다는...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한 답이라고 할까요? 지금까지 살핀 바에 따른 당연한 결론인데요, 그것은 지상 모든 혈연은 지상 생활로 그치고, 천국에서는 전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이라는, 즉 지상 모든 혈연은 속 사람의 겉과 함께 영원히 휴면 상태로 가라앉는 대신, 속 사람의 속으로 천국의 새 삶을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론,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유는, 영계인 천국에서는 자연계에서 습득한, 자연적이기만 한 모든 것은 재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며, 소개하고픈 책 두 권이 있는데요, 이는 주님의 신성, 곧 선(, Divine Good)과 진리(眞理, Divine Truth)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진리와 관련된 책으로, 중간에 잠깐 언급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입니다. 바로 이 책입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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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하나는 ‘성 프란치스코’라는 이 책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은성출판사, 영성, 영성형성

eunsungpub.co.kr

 

프란치스코는 800년 전 사람으로서, 인류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음의 정신 그대로를 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의 신성 중 진리를 접한다면, 프란치스코를 통해 주님의 신성 중 선을 접할 수 있습니다. ‘아, 주님의 진리를 일상 가운데 저렇게 실천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선이구나!’ 깨달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권의 책이야말로 지상에서 주님의 신성을 연습하고 훈련하는데 결정적인 가이드요, 등불이 될 줄 믿습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 성경이 그 첫 자리임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도우심의 그 은혜와 사랑이 작년 이장 후, 오늘 이곳에서 처음 드리는 이 추모 형태의 예배를 통해 진정한 추모의 의미에 대해 듣고, 앞으로 더욱 서로를 주께 하듯 그렇게 사랑해야지 마음에 굳게 결심하고 돌아가는 모든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과 삶 가운데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2024-03-01(D6)

삼일절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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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28,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AC.226-228) - 천사들의 퍼셉션과 인간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의 정체

 

9-10절,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228

천사들에게는 말로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정말 차원이 다른 정교한 퍼셉션(perception)이 있는데요, 천사들은 이걸로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천사들의 입장을 허락하는지 아닌지를 발견합니다. It is impossible to describe the exquisite perception whereby the angels discover whether anything gains admission that is contrary to the truth of faith and the good of love.

 

※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사람의 생각 안으로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출입 기준은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어서 이에 부합하면 들어오고, 반대되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와 달리 천사들은 이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이 수천 배나 뛰어납니다.

 

※ 각 사람에겐 최소 두 명의 천사와 악한 영들이 와 있습니다. 천사들은 그 사람의 선과 진리의 기억 속으로, 악한 영들은 그 사람의 악과 거짓의 기억 속으로 들어갑니다. 천사 둘, 악령 둘인 이유는 사람이 의지와 이해로 되어 있기 때문인데, 사람의 의지에 해당하는 천적 천국에서 한 명, 사람의 이해에 해당하는 영적 천국에서 한 명이 오기 때문이며, 악령도 마찬가지, 서로 대칭이 되는 지옥에서 하나씩 오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입장하는 것의 퀄리티와 언제 입장하는지에 대해 그런 것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이 스스로 하는 것 보다 수천 배나 더 완벽하게 지각합니다. 사람 안의 가장 작은 생각조차도 천사들한테는 더욱 풀로 지각되는데요,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가장 그레이트한 것보다도 더 말이지요. 이런 얘기는 정말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백 프로 사실입니다. They perceive the quality of what enters, and when it enters, a thousand times more perfectly than the man himself, who scarcely knows anything about it. The least of thought in a man is more fully perceived by the angels than the greatest is by himself. This is indeed incredible, yet is most 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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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27,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AC.226-228) - 사람은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주님의 통치 아래 있다

 

9-10절,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227

퍼셉션, 내적 딕테이트 및 양심(perception, internal dictate, and conscience)의 기원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함에도, 오늘날 상황은 전혀 그게 아니기 때문에, 제가(Swedenborg, 스베덴보리, 1688-1772) 이 주제에 관한 말씀을 좀 드릴까 합니다. 정말 엄청난 사실은 사람은 누구든, 심지어 그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서 그에게 와있는 악한 영들의 지배가 시작되면, 역시 그에게 와있는 천사들은 악과 거짓들을 막느라 애를 쓰는데요, 그렇게 해서 하나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사람이 퍼셉션, 내적 딕테이트 및 양심에 의해 예리해져 가는 건 바로 이 전투를 통해서입니다. 이것과 또 시험을 통해 인간은 영들과 천사들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아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육체의 일에 아주 깊이 잠겨 영들과 천사들에 관한 걸 전혀 믿지 않는 그런 사람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지어 이런 영적 전투를 수백 번 느껴도 여전히 말하기를, 그런 건 다 상상이며, 마음이 어수선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허락하심을 받아 이런 영적 전투를 수천수만 번 느낄 수 있었고, 아주 생생하게 감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거의 수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이런 전투를 일으키는 그들이 누구며, 무슨 일을, 그리고 어디 출신인지, 그들이 올 때와 떠날 때 등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들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As it is desirable that the origin of perception, internal dictate, and conscience, should be known, and as at the present day it is altogether unknown, I may relate something on the subject. It is a great truth that man is governed by the Lord by means of spirits and angels. When evil spirits begin to rule, the angels labor to avert evils and falsities, and hence arises a combat. It is this combat of which the man is rendered sensible by perception, dictate, and conscience. By these, and also by temptations, a man might clearly see that spirits and angels are with him, were he not so deeply immersed in corporeal things as to believe nothing that is said about spirits and angels. Such persons, even if they were to feel these combats hundreds of times, would still say that they are imaginary, and the effect of a disordered mind. I have been permitted to feel such combats, and to have a vivid sense of them, thousands and thousands of times, and this almost constantly for several years, as well as to know who, what, and where they were that caused them, when they came, and when they departed; and I have conversed with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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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26,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AC.226-228) - 표현들 대부분의 속뜻은 이미 앞에서

 

9-10절,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226

부르시며(crying), ‘동산에서 나는 소리(the voice in the garden),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their being afraid because they were naked), ‘숨었나이다(hiding themselves)의 의미는 앞에서 지금까지 설명한 것입니다. 사람이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먼저 질문 받는 건 말씀에서 흔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미 다 아시면서 말이지요. 그러시는 이유는, 그러면 그가 혹시 시인하고 자백할까 해서입니다. The meaning of “crying,” of the “voice in the garden,” of their “being afraid because they were naked,” and of “hiding themselves” has been previously explained. It is common in the Word for man to be first asked where he is and what he is doing, although the Lord previously knew all things; but the reason for asking is that man may acknowledge and conf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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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25, 창3:8,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AC.218-225) - '동산 나무 사이에'의 속뜻

 

8절,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225

동산 나무 사이에(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가 자연적 선, 그 안에 ‘나무(a tree)라 하는 무슨 퍼셉션이 있는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건 천적 인간이 거주했던 ‘동산(the garden)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이 동산’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경작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선은 그 인모스트(inmost)가 천적이지 않으면 선이 아닌데요, 주님으로부터 이걸 통해서(from, through) 퍼셉션이 나옵니다. 이 인모스트를 여기서 사이(the midst)라 하는 건데요, 말씀 어디에서나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That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signifies natural good, in which there is some perception which is called a “tree,” is also evident from the “garden” in which the celestial man dwelt; for everything good and true is called a “garden,”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man who cultivates it. Good is not good unless its inmost is celestial, from which, or through which, from the Lord, comes perception. This inmost is here called the “midst,” as also elsewhere in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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