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회의 퀄러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할 게 없습니다.퍼셉션 역량 역시 그저 일반적이고 흐릿했음은‘노아’라는 교회에 관한 설명을 보시면 분명한데요,그 결과,완벽함의 감소와 함께 지혜와 지성 역시 그랬습니다.
25절,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
524
이 교회의 퀄러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할 게 없습니다. 퍼셉션 역량 역시 그저 일반적이고 흐릿했음은 ‘노아’라는 교회에 관한 설명을 보시면 분명한데요, 그 결과, 완벽함의 감소와 함께 지혜와 지성 역시 그랬습니다. Nothing is mentioned concerning the quality of this church; but that its perceptive faculty was general and obscure, is evident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 called “Noah”; so that perfection decreased, and with perfection wisdom and intelligence.
※‘에녹’이라 하는 사람들이 가진 퍼셉션의 상태와 퀄러티가 제게 경험된 적이 있었는데요,그것은 일종의 무슨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일반적인 뿌연 퍼셉션이었습니다.그럴 경우,마음은 자기 외부에 보이는 것들을 교리적인 것들로 정하기 때문입니다.
23-24절,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522
또한 ‘에녹’이라 하는 사람들이 가진 퍼셉션의 상태와 퀄러티가 제게 경험된 적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일종의 무슨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일반적인 뿌연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럴 경우, 마음은 자기 외부에 보이는 것들을 교리적인 것들로 정하기 때문입니다. The state and quality of the perception with those who were called “Enoch” have also been made known to me. It was a kind of general obscure perception without any distinctness; for in such a case the mind determines its view outside of itself into the doctrinal things.
※에녹의 경우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다음과 같습니다.그는 태고교회에서 퍼셉션에 속한 것을 교리 수준으로 낮아지게 했는데,이것은 그 시대 교회에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퍼셉션으로 아는 것은 교리를 가지고 학습하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퍼셉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교리 형태로 정리해서 굳이 따로 학습할 필요가 없습니다.그들은 이미 다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선하고 참된 것을 내적 방법으로 알게 하십니다.그러나 교리로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이 외적 방식,혹은 육체적 감각으로 주어지는데,이 둘의 차이는 마치 빛과 어두움 간 차이와도 같습니다.
23-24절,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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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의 의미는 그 교리를 후손들이 사용하도록 보존하신다는 뜻이며, 이에 관해 에녹의 경우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에서 퍼셉션에 속한 것을 교리 수준으로 낮아지게 했는데, 이것은 그 시대 교회에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퍼셉션으로 아는 것은 교리를 가지고 학습하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퍼셉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교리 형태로 정리해서 굳이 따로 학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잘 생각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생각하는 법을 예술 수준으로까지 올린 무슨 규칙들을 가지고 굳이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그의 잘 생각하는 타고난 재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스콜라 철학의 먼지를 스틱으로 빠르게 찌르고 있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선하고 참된 것을 내적 방법으로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교리로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이 외적 방식, 혹은 육체적 감각으로 주어지는데, 이 둘의 차이는 마치 빛과 어두움 간 차이와도 같습니다. 또한 천적 인간의 퍼셉션은 도무지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다는 점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가장 작고 특별한 것들 속으로 상태들과 환경들에 따라 온갖 다양성을 가지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사라질 것과, 그후 인류는 참되고 선한 것을 교리를 가지고 배우게 될 것을, 즉 어두움 후에 빛으로 나아오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여기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즉 후대의 사용을 위해 그 교리를 보존하셨다 하신 것입니다. As to the words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signifying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the case with Enoch, as already said, is that he reduced to doctrine what in the most ancient church had been a matter of perception, and which in the time of that church was not allowable; for to know by perception is a very different thing from learning by doctrine. They who are in perception have no need to learn by formulated doctrine that which they know already. For example: he who knows how to think well, has no occasion to be taught to think by any rules of art, for in this way his faculty of thinking well would be impaired, as is the case with those who stick fast in scholastic dust. To those who learn by perception, the Lord grants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by an inward way; but to those who learn from doctrine, knowledge is given by an external way, or that of the bodily senses; and the difference is like that between light and darkness. Consider also that the perceptions of the celestial man are such as to admit of no description, 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ould perish, and that afterwards mankind would learn by doctrines what is true and good, or by darkness would come to light, it is here said that “God took him,” that is, preserved the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하나님과 동행’,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의 속뜻
23-24절,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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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는 그들이 아주 적은 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의 ‘하나님과 동행’은 위에서처럼, 신앙 관련 교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를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By “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is signified that they were few. By his “walking with God” is signified, as above, doctrine concerning faith. By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is signified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태고교회와 그 후속 교회들 전반에 걸쳐 그중 퍼셉션과 관련된 것들로부터 교리들을 추출,뼈대를 세우며 조직하던 사람들이 그때 있었습니다.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 이유는,이걸 기준으로 무엇이 선이요,진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지요.이 사람들이 바로‘에녹’입니다.
22절,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519
태고교회와 그 후속 교회들 전반에 걸쳐 그중 퍼셉션과 관련된 것들로부터 교리들을 추출, 뼈대를 세우며 조직하던 사람들이 그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이걸 기준으로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이 사람들이 바로 ‘에녹’입니다. ‘그리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그래서 그들은 그걸 가리켜 교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에녹’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바와 비슷합니다. 이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이기 때문입니다. ‘동행하다’라는 표현 역시 같은 걸 상징하는데요, 그를 일컬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 하지 ‘여호와와 동행하였다’라고는 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가르치며 사는 것이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行)하다, 걷다, 살다’라는 표현은 살아가는 걸 상징하는 일상적인 말투입니다. 예를 들면, ‘법대로 살다’, ‘규범 가운데 살다’, ‘진실하게 살다’처럼 말입니다. ‘행하는 것’은 어떤 길이나 삶, 방식에 대한 적절한 레퍼런스를 갖는 것인데, 이 레퍼런스는 진리, 결과적으로는 신앙이나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말씀에서 ‘행함’이 상징하는 바는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입니다.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Micah 6:8)
여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상징하는 바는 여기서 가리키는 것들을 따라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표현에 대해서, 에녹에 대한 다른 성경(히브리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함께로부터’(from with God)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좀 애매합니다.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시편입니다.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시56:13)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Ps. 56:13)
여기 ‘하나님 앞에서 다니는 것’은 신앙의 진리, 곧 ‘생명의 빛’ 가운데 다니는 것입니다.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이사야에서도 같습니다.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9:2)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Isa. 9:1)
그래서 주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레26:12)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Lev. 26:12)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상징합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렘8:2)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Jer. 8:2)
여기 보면, 사랑에 속한 것들과 신앙에 속한 것들 사이 뚜렷한 차이를 두는데요, 전자는 ‘사랑하며’와 ‘섬기며’로, 후자는 ‘뒤따르며’와 ‘구하며’로 각각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언서들을 보면, 모든 표현들을 아주 정교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용어가 다른 것의 자리에 대신 사용되는 일조차 절대 없습니다. 말씀에서 ‘여호와와 함께 걷다’나 ‘여호와 앞에’라는 표현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22절,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518
‘하나님과 동행’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상징합니다. 그가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To “walk with God” signifies doctrine concerning faith.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signifies doctrinal matters concerning truths and goods.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선과 진리는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선한 것, 진실한 것, 성실하고 공정한 것을 속 사람과 관계없이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 행한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악이다. (계시록 해설 794:3, 이순철 역)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nd not from man, because they are done from the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But when a man does and speaks what is good, true, sincere, and just, for the sake of self and the world he does and speaks them from self, because from the external man without the internal; and such deeds or works are all evil (AE.794:3)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선하고 진실한 사람인지 아니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인지는 오직 주님만 아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판단할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고, 살아오면서 그가 했던 일들을 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와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1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주님 당시 유대교회 안에는 신학적 견해가 다른 몇 개의 분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에세네파 같은 사람들인데, 그 중 바리새파 사람들은 토라라고 하는, 모세의 오경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경건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의 신망이 아주 높았고, 그들 스스로도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세리는 유대 사회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나름 전문직이었고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천대를 받았던 까닭은 그들의 직업이 돈을 만지는 일이었고, 그러다 보니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며, 또 당시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서 아무래도 세리는 지배 계급의 수족 역할을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성전에서 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먼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십계명을 글자 그대로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토색을 하거나 간음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토색이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것인데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소득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바쳤으며, 유대교회의 전통인 이른바 장로의 전통에 따라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그 역시 토색질하는 자요 간음자였습니다. 말씀에서 간음은 영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왜곡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처럼 많이 아는 사람들이 말씀을 왜곡했고, 또한 그것으로 교인들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교인들에게서 진리와 선을 빼앗는 일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바로 간음이요 토색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자들이었지만, 속으로는 토색하는 자요, 간음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세리를 내려다보며,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음은 세리의 기도입니다.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자신이 저지른 악과 거짓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죄를 고백했습니다.
참고로, 이 기도는 특히 정교회에서 아주 유명한, 그리고 가장 기본이 되는 기도입니다. 정교회에서는 이를 ‘예수기도’라고 하는데 묵주를 한알 한알 돌리며, 밤을 새워 이 문장만 반복합니다.
주님께서 두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말씀의 영적 의미는 몰랐기 때문에, 오로지 문자적인 뜻만을 지켰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능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 이를테면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잘 지키며, 이웃에게 겸손한 사람들도 구원을 받습니다. 비록 속뜻을 모르더라도 말이지요. 그러나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계명을 지킨다고 자랑하며, 함부로 이웃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사람들에 대해 마태복음 7장 22, 2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영적인 마음과 자연적인 마음, 두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마음을 다르게 말하면 속 사람(internal man)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주님과 연결된 마음입니다. 그에 비해 자연적 마음은 겉 사람(external man)이라 불리고, 이는 세상과 연결된 마음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겉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다만 겉 사람이 하되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고,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즉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후자, 즉 겉 사람 혼자서 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겉과 속이 같으며, 그러므로 진실하고 선합니다. 반대로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은 겉과 속이 다르며, 그러므로 악하고 위선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3:2) 하였고, 거듭남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다른, 교활하고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주님은 그들에게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눅11:39-41)
라고 말씀하십니다. 잔은 포도주를 담는 그릇이므로 영적으로는 진리와, 그리고 대접은 떡을 담는 그릇이므로 영적으로는 선과 각각 관련됩니다. 포도주와 떡은 각각 진리와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악과 거짓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모두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셨습니다.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것은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의미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리의 심정으로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반성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14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계시록해설 794:3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선과 진리는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 행한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악이다.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자기도 모르게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말만 그럴듯하고 진심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축복을 하면서 속으로는 안 되기를 바랄 때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인간의 자아로부터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매사가 뜻대로 안 될 때는 니고데모처럼 은밀하게 말씀이신 주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무슨 일이든 겉 사람 혼자 하던 버릇을 버리고 겸손하게 속 사람의 뜻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