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08/2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0, ‘전능왕 오셔서’, 찬90, ‘주 예수 내가 알기 전’입니다.

 

오늘부터 창4 절별 주석을 시작, 오늘은 그 첫 번째, 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338번에서 345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1-2)

 

제목은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38-345 요약입니다.

 

AC.338-345는 앞의 AC.324-337에서 제시된 창4 전체의 개요를 바탕으로, 이제 창4:1-2의 각 표현을 하나씩 풀어 가며 ‘가인’과 ‘아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본격적으로 밝히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는 태고교회를, 그들에게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은 그 교회 안에서 생겨난 신앙과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출생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가정에서 두 아들이 태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내적 생명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떻게 구별되고, 마침내 서로 분리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338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인’이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한 신앙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이라고 하며, 그것을 ‘가인’이라 부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신앙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에 사랑과 별개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바로 여기에서 ‘가인의 분리’가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이해할 때에는 ‘구별’과 ‘분리’를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날의 인간은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과정을 거칩니다. 문제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랑 없이도 신앙 자체가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본래 사랑을 섬겨야 할 신앙이 사랑과 독립하여 자기 자리를 주장하기 시작할 때 가인의 길이 열립니다.

 

AC.339-340은 창세기 초기의 ‘잉태’, ‘출생’, ‘자손’, ‘아들’, ‘딸’, ‘이름’,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태고인들은 이름을 통하여 어떤 교회적·교리적 실재를 나타냈으며, 그것들의 관계를 자연적인 출생과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자연계에서 자녀가 부모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듯이 교회 안에서도 하나의 교리와 상태가 다른 교리와 상태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창4의 계보를 단순히 개인들의 생물학적 족보와 시간적 연속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이러한 출생과 계보를 통하여 교회의 영적 상태들이 서로 어떻게 생겨나고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러한 원리는 창4뿐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이어집니다. ‘아들’은 교회의 진리와 신앙에 속한 것을, ‘딸’은 선과 사랑에 속한 것을 나타낼 수 있으며, ‘낳다’와 ‘출생’은 새로운 교리와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단순히 첫아들이 태어났다는 의미를 넘어, 태고교회의 생명 가운데서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영적 변화를 묘사합니다. 바로 이 원리를 이해해야 이후에 이어지는 가인의 후손들과 창5의 계보 역시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교리의 연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341에서는 두 번째 자손인 ‘아벨’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벨’과 ‘형제’가 체어리티를 상징한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형제’처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나중에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이는 사건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마침내 소멸시키는 교회의 내적 비극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깊이 있다고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엇이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이며,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 안에서 살아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진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완전히 분리되면 겉으로는 여전히 신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그 안의 생명은 사라지게 됩니다.

 

AC.342-344는 ‘아벨은 양 치는 자였다’는 말씀을 통하여 체어리티의 성격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양 떼’는 선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며, ‘양 치는 자’는 그러한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 치는 자였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단순한 감정이나 선한 의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체어리티에는 이웃의 선을 바라보고, 그것을 보호하고,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내려는 삶이 들어 있습니다.

 

반대로 AC.345의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다’는 말씀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땅’은 교회를 의미하지만, 가인이 ‘땅을 경작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체어리티 없이 신앙만을 붙들면서 점차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양 치는 자’인 반면,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낸 채 외적인 것에 머무는 ‘농사하는 자’가 됩니다. 이렇게 두 직업의 차이는 곧 두 교회적 상태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38-345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가인의 타락’이 처음부터 극단적인 악의 모습으로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출발점은 매우 미세했습니다. 참된 신앙을 버린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바라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분리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은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주장하고, 결국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게 됩니다. 이후 창4에서 나타나는 가인의 분노와 안색의 변화, 그리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바로 이 분리가 점차 심화된 결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내가 무엇을 믿는가?’가 아닙니다. ‘내가 믿는 진리가 내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는가?’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자신의 악을 더 잘 보고 버리며,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된다면 그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수록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사랑보다 교리적 우월성과 승리를 앞세우게 된다면, 아무리 그 교리 자체가 참되더라도 그 안에서 ‘가인의 분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이러한 분리를 처음부터 강제로 막지 않으신 데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중요한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된 방향을 원하시거나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십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는 강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보여 주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돌이킬 길을 마련하시지만 인간이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그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회복의 길을 계속 마련하신다는 섭리를 함께 보여 줍니다.

 

결국 AC.338-345의 중심은 ‘가인은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다’라는 단순한 대응에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입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을 때에만 참된 신앙입니다. 가인은 그 결합이 처음 흔들리기 시작한 상태를, 아벨은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양 치는 자’와 ‘농사하는 자’라는 대비를 통하여 두 길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한쪽은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쪽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점차 외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향합니다.

 

따라서 이 구간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신앙이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가?’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를 마침내 우리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선과 결합시키는 역사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을 줄 때 둘은 다시 본래의 질서를 이루게 됩니다. 그때 신앙은 단순히 옳은 것을 알고 고백하는 신앙을 넘어, 실제 삶에서 선을 낳는 ‘신앙다운 신앙’이 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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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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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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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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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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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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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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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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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보충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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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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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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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23(D1)

 

 

2665, 2, 창4.2, 2026-08-23(D1)-주일예배(창4,1-2, AC.338-345),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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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30, 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한 분 하나님께’, 찬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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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16, 창4, AC.324-337), ‘가인과 아벨,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하여’

※ 오늘(2026/08/1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9,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찬89, ‘샤론의 꽃 예수’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시작 전 먼저 창4 전체 개요를 살피는 ‘창4 본문, 개요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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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들으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부관계에 비유하면 AC.337의 차이를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 함부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기쁨을 자기 기쁨처럼 여깁니다. 그렇다고 매일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펼쳐 놓고 하나씩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이미 서로를 향한 사랑 안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규칙이나 원칙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원칙들이 사랑 안에 살아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신실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해가 되는 일을 피합니다. 규칙의 내용이 사랑 밖에서 억지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랑과 신앙의 관계도 이와 어느 정도 비슷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것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사랑과 별개로 신앙을 따로 떼어 내어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라고 독립된 체계로 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앙을 따로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다는 스베덴보리의 말은 바로 이 하나 된 질서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제 서로의 마음과 유익보다 조항을 먼저 살피고, ‘나는 20개 가운데 19개를 지켰으니 좋은 남편이다’, ‘당신은 14번을 어겼으니 나쁜 아내다’라고 서로를 평가합니다.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이 규칙만 정확히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본래 관계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사랑에서 나온 원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하고, 마침내 사랑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가인의 시작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면서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창4의 흐름은 이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 분리된 신앙의 예배가 생기며,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 마지막에는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규칙을 조금 더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관계의 생명 자체가 사라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이미 많이 식어 버린 부부에게는 오히려 ‘서로 모욕하지 말자’,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자’, ‘어려울 때 서로 돕자’ 같은 원칙을 다시 배우고 의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더라도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멈추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가운데 관계가 다시 회복될 여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사랑 자체를 단순한 규칙 준수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상태가 달라지면 원칙과 사랑의 관계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AC.337의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명확하게 고백하는 것 자체는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다시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독립된 목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부부간 준수 사항’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듯, 교리와 신앙고백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원칙은 그 사랑을 표현하고 지키는 형식이 될 수 있으며, 사랑이 약해진 상태에서는 올바른 원칙이 다시 관계의 질서를 배우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준수 사항이 사랑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신앙과 교리가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이것만 정확히 믿으면 된다’는 것으로 바뀌면 진리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부의 비유가 보여 주는 핵심은 ‘규칙이냐 사랑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올바른 질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이끄십니다. 어느 경우에도 최종 목적은 규칙이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바로 이 결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신앙을 가진 데 있지 않고,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낸 데 있습니다. 이 비유를 이렇게 이해하면 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에서 그 분리를 ‘엄청난 악’이라고 했는지를 조금 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AC.337 심화 3, ‘시72:1, 3, 5, 7은 왜 인용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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