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창4:21)

 

AC.417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his brother’s name was Jubal)는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By “his brother’s name was Jubal”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the spiritual things of the same church; by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해설

AC.417은 야발에 이어 그의 아우 유발의 속뜻을 밝힙니다. 앞의 AC.412-416에서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했습니다. 이제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두 형제는 서로 무관한 두 교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교회 안에서 구별되는 두 종류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같은 교회’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야발과 유발은 모두 가인의 계보에 속하며, 스베덴보리는 두 사람을 설명하면서 사랑에 관한 교리와 신앙에 관한 교리를 구별합니다. 야발에게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이 강조되고, 유발에게서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이 구별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대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속한 교리들이 각각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유발에 관한 문자적 기록은 그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었다고 말합니다(창4:21). 앞의 야발이 장막과 가축에 관한 표현으로 소개되었다면, 유발은 악기에 관한 표현으로 소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단순한 직업이나 기술의 차이로만 읽지 않습니다. 야발의 장막과 가축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나타내듯이, 유발의 수금과 퉁소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나타냅니다.

 

이때 ‘영적인 것들’과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어떤 내용을 알고 있거나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에는 진리뿐 아니라 선도 함께 언급됩니다. AC.417이 유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신앙의 진리들’이라고만 하지 않고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이라고 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번호는 그 진리들과 선들이 각각 어떤 세부적인 내용을 가리키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구체적인 근거는 이어지는 번호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유발이 인류 최초의 악기 연주자였다는 역사적 주장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앞의 AC.416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최초의 목축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들어, ‘조상’이라는 표현의 속뜻에 주목하도록 했습니다. 유발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이 표현이 어떤 교리를 나타내는지를 살피는 것이 이번 해설의 중심입니다. 그렇다고 악기의 구조나 소리의 성질에 관한 세부적인 상응을 이 번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야발과 유발을 함께 읽으면 두 형제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이 구별을 통해 우리는 말씀에서 사랑에 관한 것과 신앙에 관한 것이 각각 다른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유발에게도 신앙의 ‘선들’이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은, 신앙을 선과 무관한 지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AC.417은 유발의 이름과 악기에 관한 기록을 통해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밝힙니다. 야발의 장막과 가축에 이어 유발의 수금과 퉁소를 읽는 우리는, 말씀의 서로 다른 표현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신앙의 진리들 및 선들을 어떻게 구별하여 나타내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이 번호에서는 그 기본적인 구별을 분명히 붙들고, 수금과 퉁소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417 해설)

 

 

 

AC.418, 창4:21, ‘수금과 퉁소는 왜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8앞 절은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지만, 이 절은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다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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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6, 창4:20, ‘야발이 최초의 목축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 의미된다는 사실은, 야발이 ‘장막과 가축의 우리에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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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 의미된다는 사실은, 야발이 ‘장막과 가축의 우리에 거주한’(dwelt in tents and in folds of cattle) 사람들 가운데 최초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둘째 아들 아벨에 대해서도 그가 ‘양 떼의 목자’(a shepherd of the flock)였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야발은 가인의 계보에서 일곱 번째에 해당합니다. That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abal was not the first of those who “dwelt in tents and in folds of cattle,” for it is said likewise of Abel, the second son of Adam and Eve, that he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Jabal was the seventh in the order of descent from Cain.

 

해설

AC.416은 앞의 AC.412-415에서 밝힌 야발의 속뜻을 짧지만 중요한 논거로 뒷받침합니다.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으로 불린다고 해서, 그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장막을 짓거나 가축을 길렀다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자체에 이미 기록된 아벨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창4:2에 따르면 아벨은 ‘양 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창4:20에 이르러 야발을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두 기록을 단순한 직업의 발생 순서로만 읽으면 의문이 생깁니다. 아벨이 이미 양을 쳤는데, 어떻게 훨씬 뒤에 등장하는 야발이 가축을 치는 자들의 조상일 수 있겠습니까? AC.416은 바로 이 의문을 통해 독자가 문자적 기록에 담긴 속뜻을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가인의 계보에서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아벨보다 뒤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계보의 순서로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에 별도의 상응을 부여하는 것이 이번 번호의 논점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야발을 최초의 목축인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조상’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앞의 AC.412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AC.414에서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AC.415에서는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낸다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야발에 관한 기록을 단순한 생업의 기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벨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합니다.

 

아벨과 야발이 모두 목축과 관련된다고 해서 두 사람의 속뜻까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앞서 아벨은 체어리티의 선과 관련하여 설명되었고,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와 관련하여 설명되었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을 비교할 때에는 ‘누가 먼저 가축을 쳤는가?’라는 질문에 머물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기록에서 무엇을 밝히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 번호는 말씀의 속뜻을 읽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기록을 무시한 채 임의로 새로운 의미를 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4:2의 아벨과 창4:20의 야발을 함께 읽고, 계보의 순서까지 확인하면서 문자적 기록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말씀의 한 구절을 다른 구절과 대조하여 읽는 일이 속뜻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AC.416의 핵심은 야발이 실제로 어떤 목축 기술을 처음 개발했는지를 밝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벨이 이미 양을 쳤다는 사실은 야발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단순한 직업의 최초 창시자로만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의 번호들에서 밝혀진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따라,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낸다는 설명을 이해하게 됩니다. (AC.416 해설)

 

 

 

AC.417, 창4:21, ‘유발과 수금과 퉁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AC.417-420)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창4:21) AC.417‘그의 아우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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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5, 창4:20, ‘가축의 조상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가축의 조상’(father of cattle)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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