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31

‘상처’(wound)와 ‘타박상’(bruise)이 더 이상 성한 곳이 없음을 뜻하고, ‘상처’(wound)는 신앙이 황폐해졌음을, ‘타박상’(bruise)은 체어리티가 황폐해졌음을 뜻한다는 사실은 ‘상처’가 ‘사람’(man)에 관해, ‘타박상’이 ‘어린아이’(little one)에 관해 쓰였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신앙의 황폐와 체어리티의 황폐는 이사야에서도 같은 표현들로 묘사됩니다. That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soundness no longer,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and by a “bruise” that charity was devastat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wound” is predicated of a “man,” and “bruise” of a “little one.” The desolation of faith and the vastation of charity are described in the same terms in Isaiah: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사1:6) From the sole of the foot even unto the head there is no soundness in it; but wound and bruise and a fresh sore they have not been pressed out, neither bound up, neither mollified with oil. (Isa. 1:6)

 

이 말씀에서 ‘상처’(wound)는 황폐해진 신앙에 관해, ‘타박상’(bruise)은 황폐해진 체어리티에 관해, ‘종기’(sore)는 그 둘 모두에 관해 쓰였습니다. In this passage “wound” is predicated of faith desolated, “bruise” of charity devastated, and “sore” of both.

 

해설

AC.431은 라멕이 ‘내가 한 사람을 죽여 내게 상처를 입혔고, 어린아이를 죽여 내게 해를 입혔다’고 한 말의 마지막 부분을 설명합니다. 앞의 AC.429에서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는 근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두 표현에 각각 연결된 ‘상처’와 ‘타박상’의 의미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표현이 더 이상 성한 곳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며,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어 하나만 떼어 놓고 의미를 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상처’가 ‘사람’에 관해 쓰였고, ‘타박상’이 ‘어린아이’에 관해 쓰였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앞에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으므로, 그들에게 연결된 상처와 타박상도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의 속뜻을 이해할 때 개별 표현뿐 아니라 표현들 사이의 관계도 함께 살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1: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고 상처와 타박상과 새로 생긴 종기뿐인 모습을 묘사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온몸이 상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가 묘사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인용은 라멕의 말에 나오는 상처와 타박상이 단순한 육체적 부상을 넘어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 세 표현은 서로 구별됩니다. ‘상처’는 황폐해진 신앙을, ‘타박상’은 황폐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종기’는 신앙과 체어리티 둘 모두에 관해 쓰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비슷해 보이는 상처의 표현들을 하나의 뜻으로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서로 다른 표현이 사용된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미의 구별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세 상처가 실제로 어떤 순서로 발생하는지, 각각 어떤 구체적인 악이나 거짓에 대응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이사야의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상처가 한 부분에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에 성한 곳이 없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용하면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고백을 단순히 신앙의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체어리티가 잠시 약해진 상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427에서도 그는 상처와 타박상이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상처들을 ‘짜내지도, 싸매지도,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다’고 이어집니다. 이러한 표현은 상처가 돌봄을 받지 못한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AC.431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풀이하는 것은 상처와 타박상과 종기의 의미입니다. 짜내는 일이나 싸매는 일, 기름을 바르는 일의 개별 속뜻까지 이 번호에서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표현들을 곧바로 특정한 회복 과정에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우선 이사야가 묘사하는 상처의 심각성을 함께 읽는 것이 원문에 충실합니다.

 

이번 번호를 읽을 때 ‘황폐’와 일상적인 영적 연약함을 구별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거나 이웃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31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 곧 신앙과 체어리티에 더 이상 성한 곳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말씀을 자신의 모든 부족함에 즉시 적용하여 회복할 수 없는 상태라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특히 AC.431은 황폐의 의미를 밝히는 번호이지, 어떤 개인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번호가 아닙니다.

 

결국 AC.431은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상처’와 ‘타박상’이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바탕으로 두 상처를 구별하고, 사1:6에서 같은 표현들이 사용된 사실을 통해 그 해석을 확인합니다. 이사야의 ‘성한 곳이 없다’는 말씀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가 교회의 영적 온전함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AC.431 해설)

 

심화

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1 심화 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0 심화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1:6은 읽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말씀입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표현은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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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창4:24, ‘라멕의 일흔일곱 배 보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2-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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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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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우리는 ‘순진무구’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어린아이의 해맑은 표정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를 단순히 나이가 어리거나 경험이 적은 상태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참된 순진무구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참된 체어리티도 순진무구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독자가 이번 번호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두 가지가 왜 함께 언급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 경험이 적고 남을 쉽게 믿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에게 참된 체어리티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행동의 내면까지 저절로 순진무구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도움을 주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 할 수 있고, 상대방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는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하도록 돕습니다.

 

AC.430은 이 두 가지의 관계를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라는 표현으로 밝힙니다. 순진무구가 참된 사랑과 분리될 수 없고, 체어리티도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진무구를 단순한 무지나 무력함으로, 체어리티를 단순한 외적 선행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둘의 구체적인 내적 구조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지만, 어느 한쪽만을 떼어 내어 참된 영적 상태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관계를 생각하면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가까이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지식과 판단력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린아이를 통해 밝히는 것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에 관한 영적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면서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마음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 라멕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AC.429에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AC.430은 그 어린아이가 순진무구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라멕의 황폐를 이해할 때 체어리티의 소멸만 따로 떼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와 참된 순진무구는 서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가 왜 심각한지 이해하는 데 이번 번호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읽으며 자신에게 순진무구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곧바로 자신이 라멕처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30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으며, 앞의 번호들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일과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AC.430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가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아이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그저 순수하고 해맑은 모습을 떠올리는 데 머물지 않고, 사랑과 연결된 순진무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할 때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이 왜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내는지도 더 분명해집니다. (AC.430 심화 1)

 

 

 

AC.430 심화 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 심화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는 그 단계들을 ‘젖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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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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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9 심화

1, ‘신앙에서 체어리티가 태어난다는 말은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낮다는 뜻인가?’

 

AC.429에서 처음 읽는 독자가 특히 멈칫할 만한 표현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입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문제를 강조했는데, 이번에는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태어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설명을 단순히 ‘어느 쪽이 먼저인가’라는 순서의 문제로만 읽으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려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우열이 아니라, 라멕이 소멸시킨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이번 번호의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라멕은 ‘한 사람’과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신앙으로 풀이하고, ‘어린아이’를 체어리티로 풀이합니다. 이어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함께 부인하고 죽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태어난다’는 표현은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서로 다른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의 내용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아직 그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배운 진리가 삶 속에서 사랑과 선행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 신앙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예는 AC.429의 문장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지,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모든 단계를 상세히 구분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는 체어리티가 신앙에 비해 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를 떼어 놓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라멕의 고백에서 신앙을 죽이는 일은 체어리티를 죽이는 일과 함께 나타납니다. 신앙의 소멸을 말하면서 체어리티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번호를 모든 사람의 거듭남에서 반드시 신앙이 시간적으로 먼저 생기고 체어리티가 나중에 생긴다는 공식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AC.429는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설명하는 자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전체를 이해하려면 앞에서 다룬 가인과 아벨의 해설, 그리고 이어지는 번호들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한 문장의 표현을 떼어 내어 스베덴보리의 전체 설명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번 번호가 던지는 질문은 오히려 분명합니다. 내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단지 알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하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연약함이나 일시적인 실패를 곧바로 라멕의 ‘소멸’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설명하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황폐의 상태입니다.

 

결국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라는 표현은 체어리티의 가치를 낮추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AC.429에서는 신앙을 부인하고 소멸시키는 일이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의 소멸과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면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고 한 말이 왜 교회의 황폐를 나타내는지 조금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AC.429 심화 1)

 

 

 

AC.429, 창4:23, 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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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29

‘사람’(man [vir])이 신앙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 장의 첫 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와가 가인을 낳았을 때 ‘내가 한 사람을 얻었다, 여호와를’(I have gotten a man, Jehovah)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인은 신앙의 교리를 뜻했으며, 그 교리를 ‘한 사람, 여호와’(a man, Jehovah)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앞에서 사람 또는 남자가 이해력을 뜻한다고 밝힌 내용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해력은 신앙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기서 ‘어린 것’(a little one), 곧 ‘어린아이’(a little child)라고 부르는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는 사실도 여기에서 따라 나옵니다.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동시에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부인하고 죽이기 때문입니다. That by a “man” [vir] is signified faith is evident from the first verse of this chapter, in that Eve said, when she bare Cain, “I have gotten a man, Jehovah”; by whom wa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a man, Jehovah.” It is evident also from what was shown above concerning a man or male, that he signifies understanding, which is of faith. That he had also extinguished charity, here called a “little one,” or a “little child,” follows, for he who denies and murders faith, at the same time also denies and murders the charity that is born from faith.

 

해설

AC.429는 앞의 AC.427에서 라멕의 말을 풀이하면서 제시한 두 가지 상응의 근거를 설명합니다. 라멕이 ‘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고,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왜 ‘사람’이 신앙을 나타내는지 밝힌 다음, 신앙의 소멸이 체어리티의 소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이 신앙을 뜻한다는 첫 번째 근거는 창4:1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내가 한 사람을 얻었다, 여호와를’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이 구절의 가인이 신앙의 교리를 뜻한다고 풀이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사람’은 단순히 남성이나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가인에게 적용된 ‘사람’이라는 표현을 앞선 해설과 연결하여, 그것이 신앙을 나타낸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근거는 사람 또는 남자가 ‘이해력’을 나타낸다는 앞선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력이 신앙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해력을 통해 신앙에 관한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신앙’의 관계는 단순히 한 단어에 임의의 뜻을 붙인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과 신앙의 관계를 통해 설명됩니다. 다만 이해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살아 있는 신앙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해력이 신앙에 속한다는 관계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다면 왜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신앙에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동시에 부인하고 죽인다고 말합니다.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고 한 것은, 신앙의 소멸과 체어리티의 소멸이 서로 무관한 두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라는 표현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며,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따라서 이 한 문장만으로 체어리티가 언제나 신앙보다 낮거나 부차적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AC.429의 직접적인 논지는 신앙을 소멸시키면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함께 소멸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설명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창4장의 앞부분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는 문제를 다루었고, 라멕의 말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가 나타납니다. AC.429는 그 가운데 ‘사람’과 ‘어린아이’라는 표현을 통해 두 소멸의 관계를 밝힙니다. 라멕의 고백을 단순히 두 사람을 죽였다는 문자적 진술로만 읽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결국 AC.429는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 왜 신앙을 뜻하는지 창4:1과 이해력에 관한 앞선 설명을 통해 밝힙니다. 또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하는 이유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신앙을 부인하고 소멸시키는 일은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의 소멸과도 연결됩니다. 이처럼 라멕의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사라진 교회의 황폐를 드러냅니다. (AC.429 해설)

 

심화

1, ‘신앙에서 체어리티가 태어난다는 말은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낮다는 뜻인가?’

 

AC.429 심화 1, ‘신앙에서 체어리티가 태어난다는 말은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낮다는 뜻인가?’

AC.429 심화1, ‘신앙에서 체어리티가 태어난다는 말은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낮다는 뜻인가?’ AC.429에서 처음 읽는 독자가 특히 멈칫할 만한 표현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입니다.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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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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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8, 창4:23, ‘라멕의 말은 왜 황폐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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