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그 모든 소산의 첫 열매, 그리고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도 ‘제물’(offerings)이라 불렀으며, 그들의 예배는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모두 주님을 가리켰으므로, 이러한 제물들이 참된 예배를 상징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것, 죽은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곧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표상교회의 모든 제물은 주님을 향한 예배를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앞으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각각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물’(offerings)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선지서 전반에서도 분명합니다. 말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 by an “offering” is meant worship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ves of the Jewish church, in which sacrifices of every kind, as well as the first fruits of the earth and of all its produce, and the oblation of the firstborn, were called “offerings,” in which their worship consisted. And as they all represented heavenly things, and all had reference to the Lord, it must be obvious to everyone that true worship was signified by these offerings. For what is a representative without the thing it represents? Or what is an external religion without an internal but a kind of idol and a thing of death? The external has life from things internal, that is, through these from the Lord. From these considerations it is evident that all the offerings of a representative church signify the worship of the Lord; and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reat in particular in the following pages. That by “offerings” in general is meant worship, is evident in the prophets throughout, as in Malachi: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말3:2-4) Who shall abide the day of his coming? He shall sit as a refiner and purifier of silver, and he shall purify the sons of Levi, and purge them as gold and silver, and they shall offer unto Jehovah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Then shall the offering of Judah and of Jerusalem be pleasant unto Jehovah, as in the days of eternity, and as in ancient years. (Mal. 3:2–4)

 

‘공의로운 제물’(offering in righteousness)은 내적 제물이며, ‘레위 자손’(sons of Levi), 곧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드릴 것입니다. ‘옛날’(days of eternity)은 태고교회를, ‘고대’(ancient years)는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is an internal offering, which the “sons of Levi,” that is, holy worshipers, will offer. The “days of eternity,” signify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e “ancient years,” the ancient church. In Ezekiel: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겔20:40) In the mountain of my holiness, in the mountain of the height of Israel, there shall all the house of Israel, all that land, worship me; there will I accept them, and there will I require your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your offerings, in all your sanctifyings. (Ezek. 20:40)

 

‘예물’(Oblations)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역시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된 행위를 뜻합니다. 스바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are likewise works sanctified by charity from the Lord. In Zephaniah: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습3:10) From beyond the rivers of Ethiopia my suppliants shall bring mine offering. (Zeph. 3:10)

 

‘구스’(Ethiopia)는 천적인 것들, 곧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Ethiopia” denotes those who are in possession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love, charity, and the works of charity.

 

해설

AC.349는 AC.346에서 제시한 세 번째 표현, 곧 가인이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다’는 말씀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제물’이 그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고 간단히 밝혔습니다. 이제 AC.349는 왜 말씀에서 제물이 예배를 의미하는지를 유대교회의 표상들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그 모든 소산의 첫 열매,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도 모두 ‘제물’이라고 불렀고, 그러한 것들이 유대교회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외적인 제물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궁극적으로 모두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에 예배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제물이 예배인 까닭은 제단 위에 어떤 물질을 올려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거룩한 실재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표상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외적인 의식이 사랑과 체어리티와 주님을 향한 예배를 표상한다면, 그 안에는 실제로 그 내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질문은 더욱 강합니다.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것, 죽은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앞 AC.348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고, 이제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를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행위든 예배든 외적인 형식 자체가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외적인 예배는 중요하지 않다’거나 ‘내적인 마음만 바르면 예배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외적인 것을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외적인 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349의 핵심 문장은 바로 이것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곧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질서는 주님에게서 시작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사람의 내면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와 행위 가운데 표현될 때 외적인 것은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는 서로 경쟁하는 두 종류의 예배가 아니라,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표현되고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하나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가인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예배가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46에서 이미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보았고, AC.348에서는 가인의 ‘땅의 소산’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죽은 행위를 뜻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AC.349에서는 그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겉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외적 예배의 존재만으로 참된 예배가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외적인 것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이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말3:2-4, 겔20:40, 습3:10의 인용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여러 방향에서 뒷받침합니다. 말라기의 ‘공의로운 제물’은 스베덴보리에게 ‘내적 제물’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드리는 ‘레위 자손’은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며, ‘옛날’은 태고교회, ‘고대’는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제사 형식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내적 본질입니다. 특히 레위가 등장하는 것은 앞의 AC.34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했고 그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와 체어리티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외적인 의식의 정교함이 예배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그 안에 있을 때 예배가 살아 있게 됩니다.

 

겔20:40은 이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물’과 ‘첫 열매’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된 행위’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AC.348과 AC.349를 연결하는 중요한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AC.348에서는 살아 있는 열매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제 AC.349에서는 그 체어리티의 행위가 다시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인간 자신의 선한 성품이나 공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참된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참된 예물이 되고 그 행위와 결합된 외적 예배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습3:10의 ‘구스’에 대한 설명도 같은 논증을 마무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스가 ‘천적인 것들, 곧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49에 인용된 여러 말씀을 각각 별개의 주제로 떼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라기의 ‘공의로운 제물’, 에스겔의 ‘예물과 첫 열매’, 스바냐의 ‘예물’은 모두 제물의 참된 영적 실재가 사랑과 체어리티와 그 행위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함께 인용되었습니다. 외적 제물이 참된 예배를 의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내적 실재를 담고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46부터 AC.349까지의 흐름도 매우 선명해집니다. AC.346은 ‘날들의 끝에’, ‘땅의 소산’, ‘제물’을 각각 시간의 경과,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개괄했습니다. AC.347은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리 분리되는 상태를 설명했고, AC.348은 그 상태에서 나온 ‘땅의 소산’이 왜 죽은 행위인지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AC.349는 이제 그러한 행위에서 나온 외적 예배 역시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결국 창4:3 전체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낳고, 더 나아가 예배의 형태까지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가인의 제물 이야기를 ‘가인은 나쁜 것을 드렸고 아벨은 좋은 것을 드렸다’는 물질적 차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곡식을 드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땅의 소산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고, 곡식 제물이 본질적으로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제물이 어떤 내적 상태에서 나왔는가입니다. 바로 다음 AC.350부터는 아벨의 제물이 다루어집니다. 가인과 아벨 모두 외적으로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두 제물의 차이는 제단 위에 놓인 물질보다 그 예배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의 차이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를 돌아볼 때도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헌금하고 성찬에 참여하며 설교하고 봉사하는 외적 예배는 모두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자동으로 예배에 영적 생명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AC.349가 묻는 것은 ‘예배 형식을 갖추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외적인 것에 무엇이 생명을 주고 있는가?’입니다. 예배가 우리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 예배는 정교하게 유지하면서도 자기 의와 지배욕과 다른 사람에 대한 멸시를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가인의 제물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예배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AC.349의 중심은 ‘예배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한 질문으로 압축됩니다. 외적 형식이 스스로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곧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이 번호의 중심 문장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외적인 것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외적인 형식만 충실하게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내적인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외적인 행위와 예배 가운데 표현되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바로 그 질서가 깨어졌을 때 외적 예배가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절의 아벨의 제물은 그와 반대로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게 됩니다.

 

 

 

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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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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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6 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이 대목은 AC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동물 제사는 좋아하시고 농산물 제사는 싫어하신 것인가?’ 그러나 AC.326의 초점은 제물의 물질적 종류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두 제물의 차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의 AC.325에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표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 역시 각각의 내적 상태에서 나오는 예배를 나타냅니다.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이고,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차이는 먼저 ‘무엇을 가져왔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성경이 단순히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며, 반대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배와 예배자의 내적 상태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드리는 외적인 행위만 따로 떼어 놓고 그것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예배 안에 어떤 사랑과 의도가 있으며, 그 사람의 삶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가 함께 관련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까닭을 ‘그가 덜 좋은 물건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26이 직접 제시하는 이유는 그 예배가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신앙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것이 문제입니다. 반대로 아벨의 예배가 받아들여진 것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셔서 그의 예배를 임의로 거부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습니다. 달라진 것은 인간 편의 상태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여 결합하는 질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은 변덕스러운 하나님의 감정이라기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와 영적 질서의 문제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예배에도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주일의 예배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찬송하지만 일상에서는 알고 있는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이웃의 선을 외면한다면, 외적인 예배 형식만으로 그 분리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일상에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려고 힘쓰며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고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는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그 삶과 예배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착하게 살기만 하면 신앙이나 교리는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문제는 진리와 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함께 있어야 할 것들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게 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삶 안에서 선으로 살아 있게 합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정확한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창4:3-5에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단순히 두 종류의 제물이 아니라 두 종류의 예배이며, 더 깊게는 그 예배가 나오는 두 가지 내적 상태입니다. 하나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AC.325에서 시작된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AC.326에서는 이렇게 ‘예배의 분리’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창4의 이야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가인은 자신을 돌아보거나 사랑과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기보다 분노하고 안색이 변합니다. 따라서 다음 AC.327부터는 ‘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창4의 비극은 이제 내적인 분리에서 예배의 분리로, 그리고 다시 분노와 체어리티에 대한 적대로 깊어져 갑니다.

 

 

 

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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