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5:17은 읽는 사람을 멈추게 하는 말씀입니다. ‘만일누구든지여호와의계명중하나를부지중에범하여도허물이라벌을당할것이니.’ 알면서 고의로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 ‘부지중에’, 곧 알지 못하고 범했는데도 왜 허물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만 떼어 읽으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알지도 못했던 잘못까지 찾아내어 책임을 묻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원전을 함께 보면 이 문제는 훨씬 섬세하게 읽어야 합니다.
먼저 아주 중요한 원전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3519(창27:9)는 제사에 사용되는 염소 새끼가 이노센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레5:6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실수로범한죄’는 ‘무지에서비롯된죄’이며, 그 무지 안에는 이노센스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몰랐어도죄는죄니까고의로지은죄와똑같이책임져야한다’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는가를 함께 봅니다.
AC.9262(출23:7)는 이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신명기의 한 정결 의식을 해설하면서 어떤 악한 결과가 ‘이노센스가있는무지’에서 비롯된 경우에는 ‘책임이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그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과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죄책을 구별합니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었다면 그 행위는 악한 결과를 낳았더라도 그 사람의 의지에서 악을 선택하여 나온 것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5:17의 ‘부지중에범하여도허물이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어떤것이객관적으로신적질서에어긋나는가’와 ‘그것을행한사람에게어느정도의죄책이귀속되는가’입니다. 인간이 모르고 독을 마셨다고 해서 독이 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해서 그 상처 자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떤 악을 악인 줄 모르고 행했다고 해서 그것이 갑자기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 질서에 어긋난 것은 여전히 바로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선택한 사람과 정말 모르고 행한 사람의 내적 상태까지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레5자체도 이 차이를 보여 줍니다. 2절과 3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부정한 것에 접촉했지만 ‘부지중’이었다가 나중에 그것을 깨닫는 상황이 나옵니다. 4절에서도 함부로 맹세한 일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도 ‘부지중’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중요한 전환점은 ‘깨닫게되는것’입니다. 알지 못했던 때와 알고 난 뒤의 상태가 같지 않습니다. 알지 못했을 때에는 이노센스가 있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 말씀과 양심을 통해 그것을 보여 주신 뒤에도 계속 같은 악을 붙들고 있다면 더 이상 같은 의미의 무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5의 속죄제가 이해됩니다. 제사는 ‘몰랐으니너도고의범과똑같이유죄다’라고 정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인간의 자연적 삶에 들어온 부정과 무질서를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시는 길을 보여 줍니다. AC.3519가 실수로 범한 죄를 ‘무지에서비롯된죄이며그안에이노센스가있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5의 속죄제를 연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노센스가 있는 무지는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이노센스’를 단순히 ‘아무것도몰랐으니나는잘못이없다’는 자기변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노센스는 훨씬 깊은 상태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는 선과 진리가 나오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려는 상태입니다. AC.9262는 이노센스를 바로 이런 태도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노센스가 있는 사람은 ‘나는몰랐으니까책임없어’라고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을 알게 되었을 때 ‘주님,제가몰랐습니다.이제보여주셨으니돌이키겠습니다’라고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듭남을 시작할 때 자기 안의 모든 악을 한꺼번에 알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거친 악만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배우고 양심이 형성되며 주님의 빛이 더 깊이 들어올수록 이전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던 말과 행동, 동기와 욕망 속에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제는 몰랐던 것을 오늘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어제의 무지를 이용해 우리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보여 주심으로 오늘부터 그것에서 자유로워질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5:17의 ‘알지못하였을지라도허물이라’는 말씀은 두려움을 조장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의 무지가 악을 선으로 바꾸지는 않는다는 엄중한 진리인 동시에, 아직 알지 못했던 잘못까지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실 수 있다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악에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새롭게 발견되는 더 깊은 악과 거짓에서도 계속 정결하게 됩니다.
결국 문제는 ‘몰랐는가,알았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알게된뒤어떻게하는가?’입니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고의적인 악과 똑같이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에는 새로운 자유와 책임이 시작됩니다. 그때 그것을 인정하고 피하면 어제의 무지는 오늘의 거듭남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레5의 부지중의 죄는 인간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죄책의 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조금씩 비추시고 정결하게 하여 마침내 더 온전한 자유로 이끄시는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SWC.레5심화5)
레위기 5장은 4장의 속죄제를 이어가면서 거듭남의 길을 한층 더 실제적인 삶 속으로 끌어옵니다. 레4에서 반복된 핵심 표현은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이었습니다. 인간은 먼저 자기 안의 악을 보아야 하며, 말씀의 진리가 그것을 비출 때 비로소 회개가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레5에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중하나에허물이있을때에는아무일에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 깨닫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죄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 후반의 속건제에 이르면 한 걸음이 더 이어집니다. 잘못으로 손상된 것을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레5전체에는 ‘깨달음→자복→정결→보상→사함’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흐름이 있습니다.
1절로 4절은 그 회개가 필요한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을 보여 줍니다. 알고 있는 사실을 증언하지 않는 것, 부정한 짐승이나 사람의 부정에 접촉하는 것, 함부로 맹세하는 것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문제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죄는 단지 눈에 띄는 악행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침묵에도, 자기도 모르게 접촉한 부정에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도 영적인 결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1절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거짓말을 직접 하지 않았다고 해서 언제나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알고도 침묵함으로 거짓이 힘을 얻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4절의 함부로 한 맹세 역시 말의 책임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예배 시간의 종교적 상태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보고도 침묵하는지, 무엇에 접촉하는지, 어떤 말을 생각 없이 내뱉는지까지 다룹니다.
그런데 2절과 3절에는 레4에서 보았던 ‘부지중’이라는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인간은 어떤 부정에 접촉하고도 그것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깨달았을때에는허물이있을것이요’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이 알지 못한 것을 빌미 삼아 정죄하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의 영향이 있으며, 주님께서 말씀의 빛으로 그것을 보여 주실 때 새로운 책임과 새로운 회개의 가능성이 시작된다는 데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는 것은 정결의 시작입니다. 아직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인간은 그것을 숨기거나 변명할 것인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피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5절의 ‘자복’이 등장합니다. 레4에서는 주로 ‘깨달음’이 강조되었다면 레5에서는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서 잘못된 것을 발견하는 것과 ‘이것은나의죄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악을 발견하고도 환경 탓, 다른 사람 탓, 성격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사람이먼저그랬기때문에’, ‘나는원래성격이이렇기때문에’, ‘상황이어쩔수없었기때문에’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복은 그 모든 설명을 넘어 ‘이것은내가주님앞에서피해야할악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죄를 입술로 열거하는 행위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그것을 피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레5의 자복은 단순한 종교적 죄책감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출발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레5는 매우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속죄제물을 드려야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형편이 되는 사람은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의힘이어린양을바치는데에미치지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마저 힘들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실제 본문 자체가 제물의 경제적 차등을 분명히 규정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대의 복지 규정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줍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정결의 길이 재산에 의해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비둘기의 길이 열리고,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한 줌의 곡식으로 나아갈 길이 열립니다. 누구도 ‘나는가진것이없어서주님께돌아갈수없다’고 말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비둘기가 등장하는 것도 레1에서 이미 보았던 상응과 연결됩니다. AC.870(창8:8-9)은 비둘기를 거듭나는 사람 안의 신앙의 진리와 선에 연결하며, 제사에서 비둘기가 사용된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AC.1833(창15:10)은 레5:7-8의 속죄제까지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에서 새를 완전히 둘로 나누지 않았던 규정에 영적 의미가 있음을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이 더 낮은 가치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소나 양이 표상하는 선의 상태와 새가 표상하는 진리와 신앙의 상태가 서로 다를 뿐,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실제로 받을 수 있고 응답할 수 있는 상태에서 정결의 길을 여십니다. 거듭남에는 획일적인 한 가지 외적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놀라운 것은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고운 가루를 속죄제물로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레2에서 고운 가루는 소제의 중심이었고, 거기에는 기름과 유향이 함께 놓였습니다.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는 레2:1-2를 직접 인용하면서 고운 가루는 순수한 진리를,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을,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레5의 가난한 사람의 속죄제에서는 같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면서도 ‘기름을붓지말며유향을놓지말라’고 합니다. 본문도 그 이유를 단호하게 ‘이는속죄제인즉’이라고 밝힙니다. 여기서는 레2의 소제처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기쁨의 예배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드러나 정결되어야 하는 상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 확보한 스베덴보리 원전에서 레5:11의 ‘기름과유향의부재’를 각각 직접 해설하는 대목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그 세부를 지나치게 확대하여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같은 고운 가루라도 제사의 문맥이 달라지면 그 전체적인 의미와 쓰임도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레위기의 제사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상응은 사전처럼 ‘고운가루=진리,기름=선,유향=이것’이라고 낱말을 대입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각각의 상응은 전체 계열과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레2에서는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이 더해져 선과 진리의 결합과 예배를 나타냈지만, 레5에서는 같은 고운 가루가 죄로부터의 정결이라는 전혀 다른 제사 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제사의 세세한 규정마다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다고 말한 이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한 가지 재료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과 함께 있고, 무엇이 빠져 있으며, 어떤 제사 안에서 사용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14절부터는 새로운 제사인 ‘속건제’가 시작됩니다. 첫 경우는 ‘여호와의성물에대하여부지중에범죄’한 경우입니다. 흠 없는 숫양을 가져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잘못한 성물에 대해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속죄제와 구별되는 속건제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죄는 인간의 내면에 부정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 관계와 질서에 손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런 경우 회개는 ‘잘못했습니다’라는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가능한 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빼앗은 것이 있으면 돌려주고,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회복하며, 잘못된 관계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면 그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레5의 속건제는 회개가 실제 삶의 회복으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오분의일을더하여’라는 규정은 그냥 임의의 벌금이 아닙니다. AC.649(창6:15)는 레5: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보상 후 더하는 ‘오분의일’을 최소한의 추가분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말씀에서 ‘다섯’이 ‘어떤것,조금’을 의미하는 용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계시록해설’ 548(계9:5)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레5:16을 비롯한 여러 ‘오분의일’ 규정을 직접 열거하면서, 양과 관련된 문맥에서 ‘오분의일’이 ‘충분한만큼’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5의 보상은 단지 원상복구를 계산적으로 해 놓고 끝내는 최소주의적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을 바로잡기에 충분하도록 회복하려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AC의 모든 ‘오분의일’ 용례를 곧바로 동일한 세부 상응으로 합쳐서는 안 됩니다. 레5:16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보상이 실제적이어야 하며, 거기에 추가분까지 요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회개를 매우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해 놓고 하나님께만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남의 것을 부당하게 취하고도 마음으로 회개했다고 끝낼 수 있을까요? 거짓말로 관계를 손상시켰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진실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모든 잘못을 과거 그대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건제가 보여 주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참된 회개에는 ‘내가할수있는회복은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사함은 책임을 없애는 핑계가 아니라 책임을 정직하게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은혜입니다.
17절로 19절에서는 다시 ‘부지중’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여호와의계명중하나를부지중에범하여도허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레4와 레5전반의 주제를 다시 확인합니다. 인간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악이 선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을 깨닫게 하실 때 정결의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 장 전체를 지나며 그 길은 점점 구체적으로 깊어집니다. ‘몰랐다’에서 ‘깨달았다’로, ‘깨달았다’에서 ‘자복한다’로, ‘자복한다’에서 ‘속죄한다’로, 그리고 실제 손상이 있는 경우에는 ‘보상한다’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죄책감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실제로 자유롭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레5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회개는진실해질수록구체적이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 안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게 됩니다. 그다음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내가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형편과 상태에 맞게 정결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내 죄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손상시켰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 모든 과정의 끝에 반복되는 말씀은 레4와 같습니다. ‘제사장이그의허물을위하여속죄한즉그가사함을받으리라.’ 사함은 현실을 외면하는 선언이 아니라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건져 내어 다시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레4가 우리에게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이라고 말했다면 레5는 묻습니다. ‘깨달은다음에는무엇을할것인가?’입니다. 레5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 그리고 바로잡을 것이 있다면 바로잡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악을 인정하고 피하며, 손상시킨 것을 가능한 만큼 회복하고, 다시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속죄제에서 속건제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회개는 마음속 후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는 마침내 삶의 방향을 바꾸고, 가능한 곳에서는 깨어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SWC.레5해설)
레위기 4장을 읽으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일부러지은죄도아닌데왜속죄해야하는가?’입니다. 레4는 반복해서 ‘부지중에범하여’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도, 온 회중도, 족장도, 평민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여호와의 계명을 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지중에지은죄’라는 말은 인간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죄로 계산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관한 매우 깊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생각보다 잘 모릅니다. 어떤 행동을 선한 의도에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바르게가르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상대를 지배하고 싶었던 마음이 섞여 있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의견을 사랑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 사람에게 그 악은 상당 부분 ‘부지중’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은 내가 그것을 미움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사랑이 되지 않으며, 교만은 내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겸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주십니다. 진리는 단지 교리를 많이 알게 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 빛이 삶에 들어오면서 어느 날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레4가 반복해서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깨닫는 순간은 정죄의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4의 속죄제 규정들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목적은 인간을 죄책감 속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 악과 거짓에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깨닫기전’과 ‘깨달은후’입니다. 아직 보지 못할 때와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의 상태는 같지 않습니다. 보지 못했던 악을 보게 된 뒤에도 그것을 붙들고 정당화한다면 이제 문제는 더 깊어집니다. 반대로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하기 시작하면 거듭남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영적 성장은 ‘나는이제죄가별로없다’는 느낌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미세한 동기와 욕망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퇴보의 표시가 아닙니다. 더 밝은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발견했을 때 낙심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아직도이런것이내안에있는가?’라는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께서이것을왜지금보여주셨는가?’입니다. 보여 주셨다면 피할 수 있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레4의 속죄제는 바로 그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먼저 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진리를 통하여 정결하게 되고 악이 물러나며, 마침내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부지중에지은죄도왜속죄가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 때문에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악에서도 우리를 건져 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보게 하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말씀의 빛에서 보게 되는 순간, 거듭남의 새로운 문이 열립니다. (SWC.레4심화1)
레위기 4장에 들어서면 제사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레1의 번제에서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보았고, 레2의 소제에서는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삶의 예물이 되는 모습을 보았으며, 레3의 화목제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하여 주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결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레4에서는 처음부터 ‘죄’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누구든지여호와의계명중하나라도그릇범하였으되.’ 그리고 이 한 장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 이스라엘 온 회중, 족장, 평민 한 사람의 경우를 차례로 다룹니다.
그렇다면 속죄제는 무엇을 표상할까요? 이 문제에서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매우 직접적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이라고 설명하면서, 바로 그 근거로 레4:3, 8, 14, 20, 21, 24, 25, 29, 33, 34를 직접 열거합니다. 따라서 레4를 읽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처음부터 분명합니다. 속죄제는 단순히 형벌을 면제받기 위한 제사가 아니라 ‘악과거짓으로부터인간이정결하게되는것’을 표상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죄는 어떤 법적 장부에 기록된 항목만이 아닙니다. 죄는 인간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며, 그것이 인간을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죄의 기록만 지워지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AC.10122(출29:36)는 속죄제가 ‘자연적인간안의악과거기에서나오는거짓을계속해서제거하는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은 완전히 없어져 인간 자신의 본성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물러나 있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에서 말하는 정결입니다.
레4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부지중에’ 범한 죄입니다. 제사장도, 온 회중도, 족장도, 평민도 처음에는 자신이 범한 것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족장과 평민의 경우 특별히 ‘그가범한죄를누가그에게깨우쳐주면’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악을 회개할 수 없습니다. 먼저 악이 악이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인간의 삶을 비추면서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생각과 욕망과 행동이 주님의 질서에 어긋난다는 것을 깨닫게 할 때 비로소 실제적인 회개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죄를깨닫는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책감이 없는 상태를 평안이라고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보지 못하던 악을 보게 되는 것이 주님께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시는 시작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내 안의 교만을 발견하고, 어떤 관계를 돌아보다가 내가 품어 온 미움을 발견하며, 선을 행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불편하지만 바로 그 발견에서 회개의 문이 열립니다.
흥미롭게도 레4에서는 죄를 범한 사람의 위치에 따라 제물과 피의 처리 방식이 달라집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했을 때와 온 회중이 범죄했을 때에는 수송아지를 드리고, 그 피를 회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들에 바릅니다. 반면 족장이나 평민 한 사람이 범죄했을 때에는 피를 회막 안으로 가져가지 않고 번제단 뿔에 바릅니다. 이 차이는 우연한 의식상의 변형이 아닙니다. 대표교회의 모든 세부에는 서로 다른 영적 상태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나치게 빨리 ‘제사장=이것,회중=저것,족장=이것,평민=저것’이라고 세밀한 상응을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현재 확보한 원전이 확실하게 보여 주는 핵심은 죄와 정결이 인간의 서로 다른 차원에 영향을 미치며, 그에 따라 정결의 표상도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특히 제사장과 온 회중의 경우 피가 성소 깊숙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그 죄의 영향이 예배와 교회의 더 내적인 차원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번’ 뿌립니다. ‘일곱’은 말씀에서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AC.716(창5:24)은 바로 레4:2-3, 6의 속죄제를 인용하면서, 피를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도록 한 것은 속죄가 오직 주님에게 속하며 따라서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죄를 씻는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휘장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AC.9670(출26:31)은 성막의 휘장이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나누면서 동시에 이어 주는 ‘결합의중간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지성소가 가장 내적인 천국과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을, 그 바깥 성소가 영적 천국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한다면 휘장은 그 둘을 이어 주는 중간입니다. 따라서 레4에서 피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려지는 장면은 정결하게 하는 신적 진리가 인간의 내적 삶 깊은 곳까지 미치는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어 피는 향단의 뿔에 발라집니다. 이것 역시 매우 분명한 상응이 있습니다. AC.2832(창22:13)는 ‘뿔’이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능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바로 레4:3, 7의 제사장 속죄제와 레4:22, 25의 족장 속죄제, 레4:27, 30, 34의 개인 속죄제를 직접 인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성별과 정결과 속죄가 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진리가선으로인도하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악은 막연한 종교적 감정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나는죄인입니다’라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진리가 필요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이것은악이다’, ‘이생각은주님의질서와맞지않는다’, ‘이행동은이웃을해친다’고 구체적으로 보여 줄 때 인간은 비로소 악과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단의 뿔, 곧 ‘선에서나오는진리의능력’에 피가 발라지는 장면은 속죄와 정결에서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16(계5:6)역시 레4:7, 25, 30, 34를 직접 인용하면서, 속죄와 정결이 제단의 뿔에서 이루어진 이유는 모든 속죄와 정결이 ‘선에서나오는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향단 자체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높여지는 것을 표상하고, 그 뿔은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레4의 피는 단순히 죽음의 형벌을 대신 치렀다는 표지로만 읽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피의 긍정적이고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입니다. AC.4735는 구약의 성별과 속죄와 정결에서 피가 사용된 수많은 경우 가운데 레4:6-7, 17-18, 25, 30, 34도 직접 열거하면서, 피가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것, 곧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제 레3에서 살펴보았던 ‘기름’이 다시 등장합니다. 속죄제에서도 내장의 기름, 콩팥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을 떼어 번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레3에서 확인했듯 기름은 선을 표상합니다. 이것은 속죄가 악을 찾아내고 제거하는 부정적인 과정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을 물러나게 하신 뒤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주십니다. 정결의 목적은 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채워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악을하지않는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도둑질하지 않는 것에서 정직으로, 미워하지 않는 것에서 체어리티로, 거짓말하지 않는 것에서 진실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은 선이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것이며, 그 자리에 주님께서 선을 심으십니다. 그래서 속죄제에서도 기름은 여전히 제단의 불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온 회중을 위한 수송아지의 나머지는 전혀 다른 처리를 받습니다.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까지 ‘송아지의전체’를 진영 밖 정결한 곳으로 가져가 불사릅니다. 이것 역시 매우 강한 원전 근거가 있습니다. AC.10038(출29:14)은 이 수송아지의 살과 가죽과 똥을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것이 그것들이 표상하는 악들을 지옥으로 내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므로 ‘진영밖’은 천국과 교회가 아닌 곳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속죄의 또 하나의 중요한 면을 봅니다. 악은 거룩하게 만들어 제단에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악으로 인식되어 물러나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선으로 변장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리하여 제거하십니다. 반면 그 인간 안에서 주님께 속한 선은 보존되고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같은 수송아지 안에서도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지고, 악을 표상하는 나머지는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실제 회개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악을 설명하고 합리화합니다. ‘성격이원래그렇다’, ‘상대가먼저그렇게했다’, ‘다들그렇게산다’, ‘그정도는죄가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악을 드러냈을 때 필요한 것은 악을 자기 안에 계속 보관하면서 종교적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악을 죄로 인정하고 피하며, 주님께 그것을 제거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레4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죄를 범한 사람이 누구이든 속죄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도 죄를 범할 수 있고, 온 회중도 잘못될 수 있으며, 족장도, 평민 한 사람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직분이 높다고 죄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공동체 전체가 동의한다고 그것이 반드시 진리인 것도 아니며, 평범한 개인의 죄가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는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동시에 각 사람에게 요구되는 제물이 다릅니다. 제사장과 온 회중은 수송아지, 족장은 숫염소, 평민은 암염소 또는 암양을 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서로 다른 동물이 서로 다른 선과 진리의 상태를 표상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각 동물을 레4의 네 계층에 기계적으로 대응시켜 세부 의미를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은 외적 방식으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상태와 책임에 맞게 정결의 길을 마련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마지막에는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사장이그를위하여속죄한즉그가사함을받으리라.’ 여기서 ‘사함’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장부에서 죄목을 지워 주시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레4전체의 긴 정결 의식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속죄제가 표상하는 것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입니다. 따라서 사함은 악을 붙들고 있으면서 법적 선언만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 악에서 돌이킬 때 주님께서 그 악을 물러나게 하시고 인간을 선과 진리 안으로 이끄시는 구원의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레4의 영적 질서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입니다. 처음에는 ‘부지중’입니다. 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죄를 ‘깨닫습니다’. 진리가 비춥니다. 그다음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남의 것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피가 뿌려지고 제단의 뿔에 발라집니다. 신적 진리가 정결하게 하는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회복됩니다. 악에 해당하는 것은 진영 밖으로 내보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함을받으리라’는 말씀이 옵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놀라운 그림입니다. 죄를 보지 못하던 사람이 말씀의 빛에서 죄를 보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피하며, 악과 거짓이 물러난 자리에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4의 속죄제는 죄책감에 인간을 붙잡아 두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발견한 인간에게 ‘여기에서나올길이있다’고 보여 주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레4를 읽으며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죄인인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나는지금까지보지못했던어떤악을주님께서말씀을통해보여주고계시는가?’, ‘그것을정말죄라고인정하는가?’, ‘나는그것을설명하고합리화하고있는가,아니면진영밖으로내보내려하는가?’, ‘그악이물러난자리에어떤선을주님께서심기원하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레4에서 가장 희망적인 말은 어쩌면 ‘죄를범하지않으리라’가 아니라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보지 못하는 악이 있다는 사실은 두렵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보여 주시는 순간부터 정결의 길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진리도 주님에게서 오고, 악과 거짓을 제거하시는 능력도 주님에게서 오며, 그 자리에 선을 심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말씀은 선언합니다. ‘제사장이그를위하여속죄한즉그가사함을받으리라.’ 이것이 속죄제 안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SWC.레4해설)
심화
1.‘부지중에지은죄도왜속죄가필요할까?’
레위기 4장을 읽으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일부러지은죄도아닌데왜속죄해야하는가?’입니다. 레4는 반복해서 ‘부지중에범하여’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도, 온 회중도, 족장도, 평민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여호와의 계명을 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지중에지은죄’라는 말은 인간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죄로 계산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관한 매우 깊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생각보다 잘 모릅니다. 어떤 행동을 선한 의도에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바르게가르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상대를 지배하고 싶었던 마음이 섞여 있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의견을 사랑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 사람에게 그 악은 상당 부분 ‘부지중’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은 내가 그것을 미움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사랑이 되지 않으며, 교만은 내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겸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주십니다. 진리는 단지 교리를 많이 알게 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 빛이 삶에 들어오면서 어느 날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레4가 반복해서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깨닫는 순간은 정죄의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4의 속죄제 규정들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목적은 인간을 죄책감 속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 악과 거짓에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깨닫기전’과 ‘깨달은후’입니다. 아직 보지 못할 때와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의 상태는 같지 않습니다. 보지 못했던 악을 보게 된 뒤에도 그것을 붙들고 정당화한다면 이제 문제는 더 깊어집니다. 반대로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하기 시작하면 거듭남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영적 성장은 ‘나는이제죄가별로없다’는 느낌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미세한 동기와 욕망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퇴보의 표시가 아닙니다. 더 밝은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발견했을 때 낙심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아직도이런것이내안에있는가?’라는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께서이것을왜지금보여주셨는가?’입니다. 보여 주셨다면 피할 수 있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레4의 속죄제는 바로 그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먼저 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진리를 통하여 정결하게 되고 악이 물러나며, 마침내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부지중에지은죄도왜속죄가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 때문에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악에서도 우리를 건져 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보게 하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말씀의 빛에서 보게 되는 순간, 거듭남의 새로운 문이 열립니다. (SW.6레4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