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내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고, 그가 자기 형제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곧 그는 아벨(Abel)이 상징하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리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till the ground)이라고 했다는 것은 창3:19, 23에서 분명합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 되었다(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is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Jehovah had no respect to his offering, and that he slew his brother, that is, destroyed charity, signified by “Abel.” Those were said to “till the ground” who look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as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in Gen. 3:19, 23, where we read that the man was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3:19, 23)

 

 

해설

 

AC.345는 앞의 AC.341에서 제시했던 ‘양 치는 자’와 ‘농사하는 자’의 대비 가운데 이제 두 번째 표현, 곧 가인이 ‘농사하는 자’였다는 말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3-344에서는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이며, 신앙과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 체어리티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반대편에 있는 ‘농사하는 자’는 체어리티 없이 신앙에 속한 것만을 붙드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할 것은 ‘농사하는 자’ 또는 ‘땅을 경작하는 자’ 자체가 언제나 나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씀에서 ‘’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실제로 바로 앞 AC.343에서 인용한 사30:23에서는 땅에 씨를 뿌리고, 그 땅에서 양식이 나는 모습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농사=’, ‘목축=’이라는 식으로 자연적 직업 자체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상태와 창3에서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난 사람이 ‘땅을 경작하는’ 상태가 서로 연결되면서 부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가인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이후의 이야기 자체에서 확인합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둘째,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입니다. 특히 두 번째 사건이 결정적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하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속뜻으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무리 신앙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체어리티가 없다는 사실은 그가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이는 데서 최종적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의 결론과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AC.344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기억 지식(scientia)과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교리(doctrina)가 아무리 많아도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체어리티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했습니다. AC.345에서는 바로 그런 신앙의 모습을 ‘농사하는 자’ 가인을 통해 보여 줍니다.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목적지인 체어리티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를 단순히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겉으로는 신앙이 상당히 많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알고, 교리를 알고, 신앙을 고백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열심히 논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신앙에 대해 다시 한번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AC.345가 창3:19, 23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창3에서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나와 ‘땅을 경작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퍼셉션 가운데 살아가던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상태에서 물러난 뒤에는 이전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하지 못하고, 더 낮고 외적인 차원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AC.345는 바로 그 상태와 가인의 ‘농사하는 자’를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땅을 경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노동하게 되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시선이 주님과 천적인 것에서 육체와 세상적인 것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종교적인 것을 알고,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다루는 중심이 더 외적인 차원으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보면 창3과 창4 사이의 연결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창3에서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나와 땅을 경작하게 되고, 창4에서는 가인이 바로 ‘농사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을 단순한 역사적 시간 순서로 읽을 필요는 없지만, 말씀의 내적 연결에서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창3이 보여 준 인간의 내적 하강이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계속 주의해 온 점을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창4의 가인 계열과 이후 셋 계열을 자연적인 족보의 시간 순서만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창3의 ‘땅을 경작함’에서 창4의 가인이 역사적으로 곧바로 생겨났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보여 주는 것은 ‘영적 상태의 연결’입니다. 에덴으로 나타낸 천적 상태에서 멀어져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바라보는 상태와,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외적인 것으로 다루는 가인의 상태 사이에 내적인 친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바라본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사람은 자연계에 사는 동안 먹고 일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세상적인 지식도 배워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바라보는가’, 곧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가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긴다면 질서 안에 있지만, 영적인 것까지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가인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AC.344가 이미 보여 주었듯 그것들은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진리가 사람을 선으로 이끌고, 신앙이 사랑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단이 목적이 되고, 결국 체어리티라는 본래 목적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침내 ‘형제를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단지 신앙과 사랑을 ‘구별’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가 독립이 되며,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창4에서 아벨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AC.338부터 계속 설명해 온 ‘가인의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AC.345는 따라서 ‘농사하는 자’라는 짧은 표현을 통해 매우 중요한 대비를 보여 줍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로서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로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한쪽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점점 외적인 것이 됩니다.

 

결국 AC.345의 핵심은 ‘신앙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신앙이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이끌고 주님과 이웃을 향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머물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밀어낸다면 아무리 신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어도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버린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면서도 그 신앙의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를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농사하는 자’라는 표현을 통해 AC.345가 보여 주는 가인의 상태입니다.

 

 

 

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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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4:2)

 

AC.341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Abel)형제(brother)가 이를 상징합니다.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고,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는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비록 그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signified by “Abel” and “brother”; a “shepherd of the flock” denote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and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해설

 

AC.341은 매우 짧지만, 창4의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핵심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AC.338-340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했고, 그 신앙을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자손으로 ‘체어리티’가 등장하며, 이를 ‘아벨’과 ‘형제’가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처음부터 두 개인의 형제 관계를 중심으로 읽기보다,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그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아벨’뿐 아니라 ‘형제’도 상징한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후 창4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자기 동생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남남이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아벨을 계속 가인의 ‘형제’라고 하는 데에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을 때에만 참된 신앙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섬세하게 구별할 것이 있습니다. AC.338에서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했고, AC.341에서는 ‘두 번째 자손’을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이것을 시간순으로 ‘먼저 신앙이 생기고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겼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는 오히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질서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첫째와 둘째는 자연적인 출생 순서를 그대로 영적 우선순위로 옮긴 것이 아닙니다. 창4의 계보와 출생은 AC.339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나타나는지를 고대의 출생과 계보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과 함께 나오는 것이 ‘양 치는 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양 치는 자’를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가 단순한 감정이나 관념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는 실제로 선을 행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이웃의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하여 실제로 행동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행하는 것이 체어리티의 삶입니다. 따라서 ‘양을 친다’는 것은 속뜻으로 단순히 목축업에 종사한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양 떼’라는 표현도 이와 잘 어울립니다. 말씀에서 양은 순진함과 선, 그리고 주님께 인도받는 사람들과 연결됩니다. 목자는 양에게 먹을 것을 주고, 위험에서 보호하며, 길을 잃지 않도록 돌봅니다. 그러므로 ‘양 치는 자’라는 모습에는 체어리티가 무엇인지가 매우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무엇을 옳다고 주장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로 다른 사람의 선을 돌보고 보살피며 섬기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가인은 ‘농사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강하게 해석하여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칫 ‘농사’ 자체에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은 문맥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도 많습니다. 여기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상태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농사하는 자’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 몰두하면서 체어리티는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341의 마지막 말은 매우 단호합니다. 그런 사람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가 있다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이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4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명제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지 어떤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외형상 아무리 정교하고 확고한 신앙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신앙의 생명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가인의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처음은 반드시 명백한 거짓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AC.340에서 보았듯이, 원래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분리가 계속되면 결국 신앙은 자신의 형제인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AC.341은 그 결과를 미리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생각했던 ‘부부생활 준수 가이드 20가지’의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생활의 원칙과 약속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 자체보다 규칙이 중심이 되어 ‘나는 20가지를 모두 지켰으니 좋은 배우자다’라고 주장한다면 이상해집니다. 상대방을 향한 사랑과 배려는 사라졌는데 규칙 준수만 남았다면, 결혼의 형식은 유지해도 결혼의 생명은 크게 훼손된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교리와 신앙의 고백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 완결적인 것이 되면 신앙의 본래 생명을 잃습니다.

 

앞서 떠올리셨던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관한 비유도 여기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 자식 간에도 돈 계산은 분명해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 자체는 경우에 따라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재정 문제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 사이를 지탱하던 사랑과 신뢰보다 ‘계산의 원칙’이 더 근본적인 자리에 올라가 버린다면 관계의 성질이 달라집니다. 원칙이 사랑을 섬기는 동안에는 유익하지만, 사랑에서 독립하여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가인의 분리도 바로 이런 종류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AC.341의 ‘형제’라는 말이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중요하냐 사랑이 중요하냐’, ‘신앙이 먼저냐 행위가 먼저냐’라고 서로 맞세우는 순간 이미 가인의 문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밀어내지 않으며, 참된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형제’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는 신앙을 통하여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배우며 올바른 방향을 얻습니다.

 

여기서 ‘양 치는 자’와 ‘농사하는 자’의 대비도 단순한 두 직업의 대비를 넘어섭니다. 한쪽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을 돌보고 실제로 행하는 삶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래서 창4의 질문은 결국 ‘누가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실제로 어떤 사랑을 품고 있으며 어떤 선을 낳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신학적인 오류를 예리하게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참된 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지식과 신앙이 이웃을 향한 선으로 이어지는지, 다른 사람을 돌보고 용서하고 섬기는 체어리티로 나타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진리 없는 막연한 친절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의 진리로부터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지를 분별하며 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41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출발점을 마련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양 치는 자’는 그 체어리티의 선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며, ‘농사하는 자’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판단의 기준을 조금도 흐리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 한 문장이 앞으로 이어질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는 열쇠가 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이 자신의 생명을 이루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면서 결국 자기 자신도 참된 신앙이기를 그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창4의 비극은 아벨만 죽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를 죽이는 순간, 가인이 붙들고 있던 ‘신앙’ 역시 그 본래의 생명을 잃는다는 데 더 깊은 비극이 있습니다.

 

 

 

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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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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