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8:12에서 모세는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합니다. 기름을 손이나 옷에 조금 바른 것이 아니라 ‘머리에붓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에서 왜 기름 부음이 이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출29의 병행 본문을 해설하면서 관유를 ‘신적선으로의취임’을 표상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아론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신적 선에 관하여 표상하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주님의 인성 전체에 있는 신적 선을 나타냅니다. 기름이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제사의 여러 규례에서도 반복해서 확인됩니다.
따라서 제사장직의 가장 깊은 중심은 ‘사랑의선’입니다. 제사장은 진리를 알고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그 진리의 생명은 선에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차갑고,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은 생명이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외적으로는 제사장의 옷을 입었어도 그 안에 관유가 없는 셈입니다.
관유가 ‘머리’에 부어진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머리는 몸 전체의 첫째와 가장 높은 부분이며,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첫째와 가장 높은 것은 전체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사랑의 선이 일부 행동에만 붙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람을 지배하고 질서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목회나 교회 봉사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정을 섬기든, 직장에서 일하든, 어려운 사람을 돕든, 말씀을 가르치든, 그 쓰임을 실제로 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똑같은 행동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할 수도 있고 이웃의 선을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레8에서는 씻음 다음에 옷을 입히고, 그 후 관유를 붓습니다. 진리로 정결하게 되고 진리를 입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랑의 선에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진리가 길을 보여 준다면 사랑은 그 길을 실제로 걷게 하는 생명입니다.
참된 기름 부음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의지 안으로 들어와 ‘선한것을알고있기때문에’가 아니라 ‘선한것을사랑하기때문에’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이 깊어지면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따라서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관유는 제사장이라는 지위에 권위를 더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모든 거룩한 쓰임의 근원이 사랑의 선이라는 선언입니다. 진리가 아무리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이 전체 사람을 채울 때 비로소 진리는 살아 있는 쓰임이 됩니다. (SWC.레8심화2)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창2:11, 12)
AC.115
태고인들은‘땅들’(lands)에관하여말할때그것들이뜻하는바를이해했습니다.오늘날에도가나안땅과시온산이천국을뜻한다는관념을가진사람들은이장소들이언급될때어떤땅이나산을생각하기보다그것들이뜻하는것만을생각하는것과같습니다.여기서‘하윌라땅’(landofHavilah)도마찬가지입니다.하윌라는창25:18에다시언급되는데,거기서이스마엘의아들들에관하여그들이‘하윌라에서부터앗수르로가는길에애굽앞술까지’(dweltfromHavilahevenuntoShur, whichisbeforeEgypt, asthougoesttowardAssyria)거주했다고합니다. When the most ancient people spoke of “lands,” they understood what was signified by them, just as those at the present day who have an idea that the land of Canaan and Mount Zion signify heaven, do not so much as think of any land or mountain when these places are mentioned, but only of the things which they signify. It is so here with the “landofHavilah,” which is mentioned again in Genesis 25:18, where it is said of the sons of Ishmael, that they “dweltfromHavilahevenuntoShur,whichisbeforeEgypt,asthougoesttowardAssyria.”
AC.115는 AC.110에서 ‘하윌라땅’이 마음을 뜻한다고 한 해석을 태고인들의 말씀 이해 방식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인들은 어떤 ‘땅’에 관하여 말할 때 단지 지리적인 장소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이 뜻하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오늘날에도 가나안 땅이나 시온산을 천국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들을 때 물리적인 땅이나 산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예를 듭니다. 즉 장소의 문자적 이미지 너머에 그 장소가 나타내는 영적인 관념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하윌라땅’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25:18에서 이스마엘의 아들들이 ‘하윌라에서부터앗수르로가는길에애굽앞술까지’ 거주했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명들을 곧바로 하나씩 암호처럼 치환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적인관념안에있는사람들’이 이 말씀에서 ‘지성과지성에서흘러나오는것’을 퍼셉션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하윌라를 포함한 이 지리적 묘사는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는 인간의 지성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내적인 질서와 관계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태고인들의 퍼셉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들은 ‘하윌라=마음’이라는 대응표를 머릿속에서 찾아 문자에 대입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은 그들이 그 말씀에서 지성과 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퍼셉션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104에서 퍼셉션을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단순한 상징 해독이나 지적인 연상과는 다릅니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 안에서 그것이 담고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을 알아차리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이어지는 ‘두르다’에 대한 설명은 창2:11의 움직임 자체에도 속뜻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비손 강이 하윌라 온 땅을 ‘두른다’는 말씀에서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유입’을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앞에서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뜻했고, 하윌라 땅은 마음을 뜻했습니다(AC.110). 따라서 비손이 하윌라 땅을 두르는 모습은 단순히 강이 어떤 지역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지리적 장면을 넘어, 지성과 관계된 것이 마음 안으로 흘러드는 생명의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것으로 시작된 ‘흐름’의 이미지가 여기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름’의 의미를 아론의 에봇에 있는 호마노를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출28:11에서 호마노는 금테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앞의 AC.113에서 금은 사랑의 선을 뜻했고, AC.114에서 호마노를 비롯한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15는 금이 호마노를 둘러싼 그 모습을 ‘사랑의선이신앙의진리안으로흘러들어야한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선과 진리가 단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유입되어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AC.110에서 처음에는 상당히 낯설었던 ‘사랑의선’과 ‘사랑에서나오는신앙의선’, ‘사랑의진리’와 ‘사랑에서나오는신앙의진리’라는 구별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서로 분리된 네 가지 항목으로 늘어놓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며, 그 결과 지혜와 지성과 선과 진리가 하나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그러면서도 AC.111에서 보았듯이 각각의 것은 서로 구별됩니다. 하나 됨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질서 있게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유입’의 궁극적인 근원입니다. AC.112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며 ‘따라서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네 차례에 걸쳐 반복했습니다. 그러므로 AC.115의 ‘사랑의선이신앙의진리안으로흘러든다’는 말도 인간 내부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자기 발생적인 과정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비손이 하윌라를 두르며, 금이 호마노를 둘러싸는 일련의 이미지들은 모두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흘러와 인간 안의 서로 다른 것들을 살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결합하는 모습을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AC.115해설)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창2:11, 12)
AC.113
말씀에서‘금’(gold)이지혜또는사랑의선을뜻하고표상하는것보다더흔한것은없습니다.궤와성전과금상과등잔대와기구들과아론의의복에사용된모든금은지혜또는사랑의선을뜻하고표상했습니다.선지서에서도마찬가지입니다.에스겔에서는,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the good of wisdom or of love to be signified and represented by “gold.” All the gold in the ark, in the temple, in the golden table, in the candlestick, in the vessels, and upon the garments of Aaron, signified and represented the good of wisdom or of love. So also in the prophets, as in Ezekiel:
여기서는지혜와지성에서‘금과은’(goldandsilver),곧선과진리가나온다고분명히말합니다.여기서‘은’(silver)은진리를뜻하며,궤와성전에서도마찬가지입니다.이사야에서는, where it is plainly said that from wisdom and intelligence are “goldandsilver,” or the good and the true, for “silver” here signifies truth, as it does also in the ark and in the temple. In Isaiah:
여기서도‘금’(gold)은선을뜻하고,‘유향과몰약’(frankincenseandmyrrh)은사랑과신앙에서나오기때문에기쁘게받아들여지는것들을뜻하며,그러므로그것들을‘여호와의찬송’(thepraisesofJehovah)이라합니다.그래서시편에서는, Here also “gold” signifies good; “frankincenseandmyrrh,” things that are grateful because from love and faith, and which are therefore called “thepraisesofJehovah.” Wherefore it is said in David:
AC.113은 AC.110에서 하윌라 땅의 ‘금’이 선을 뜻한다고 한 해석을 말씀의 여러 용례를 통해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금이 ‘지혜또는사랑의선’을 뜻하고 표상하는 것이 매우 흔하다고 하면서, 먼저 궤와 성전, 금상과 등잔대와 여러 기구, 그리고 아론의 의복에 사용된 금을 언급합니다. 이 거룩한 것들에 사용된 금은 단순히 값비싸고 아름다운 재료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표상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겔28:4은 금과 은을 함께 제시합니다. ‘네지혜와네지성으로재물을얻었으며금과은을곳간에저축하였다’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혜와 지성에 대응하여 금과 은을 각각 선과 진리로 읽습니다. 여기서 ‘은’은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금이 선을 뜻한다는 해석은 금이라는 물질 하나만 고립시켜 정한 의미가 아니라,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서로 대응하여 나타나는 말씀의 구조 안에서 제시됩니다. 앞의 AC.112에서 지혜는 사랑에서 나오고 지성은 신앙에서 나오며,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온다고 한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60:6에서는 스바 사람들이 ‘금과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찬송’을 전파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과 마2:1, 11의 동방박사 이야기를 서로 연결합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나신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금은 선을 뜻하고, 유향과 몰약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에 주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예물들은 단순히 귀중한 물품을 왕에게 바친 장면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것들을 주님께 드리는 표상으로 읽힙니다.
이 대목에서는 AC.113이 주님을 바라보는 방향도 주목할 만합니다. 동방박사들이 금을 가지고 와서 주님께 드렸다고 해서 선의 근원이 인간에게 있고 그것을 인간이 주님께 가져다드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112는 선이 사랑에서 나오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주님께 드리는 선조차 그 가장 깊은 근원에서는 먼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과 선을 받아 그것으로 다시 주님을 경배하는 질서가 여기에도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72:15의 ‘스바의금’은 사60의 스바와 연결되면서 같은 의미를 다시 뒷받침합니다. 금을 드리는 것과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사랑과 신앙에서 나와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여호와의찬송’이라고 설명한 뒤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금이 나타내는 선은 사람 안에 보관된 어떤 영적 재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에서 나와 주님을 향하는 삶과 예배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AC.113에서 ‘금=선’이라는 상응만 떼어 외우는 것은 이 번호가 보여 주려는 내용의 일부만 붙드는 것입니다. 궤와 성전에서부터 선지서와 동방박사의 예물에 이르기까지 금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까닭을 스베덴보리는 ‘지혜또는사랑의선’이라는 하나의 내적인 질서에서 바라봅니다. 그리고 앞의 AC.110-112와 연결하면 그 선의 근원 역시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윌라 땅에 금이 있다는 것은 천적 인간이 자기 힘으로 귀한 선을 만들어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생명 안에 선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금의 가치는 결국 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사랑의 선, 그리고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게 합니다. (AC.113해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5, 6)
AC.92
싸움이그칠때,곧탐욕과거짓으로말미암은불안이그칠때겉사람이누리는평화의평온이어떠한지는평화의상태를아는사람만이알수있습니다.이상태는너무나즐거워서즐거움에관한모든관념을뛰어넘습니다.그것은단지싸움이그친상태만이아니라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며,말로표현할수없는방식으로겉사람에게영향을미칩니다.그때평화의즐거움에서생명을얻는신앙의진리들과사랑의선들이태어납니다. The nature of the tranquility of peace of the external man, on the cessation of combat, or of the unrest caused by cupidities and falsities, can be known only to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a state of peace.This state is so delightful that it surpasses every idea of delight: it is not only a cessation of combat, but is life proceeding from interior peace, and affecting the external man in such a manner as cannot be described; the truths of faith, and the goods of love, which derive their life from the delight of peace, are then born.
해설
AC.92는 앞에서 말한 ‘평화의평온’이 단순히 싸움이 끝난 뒤의 고요함이 아님을 밝힙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아 싸움과 불안이 있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서 그 싸움이 그칩니다. 그러나 싸움이 없어졌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평화의 본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평온이 어떠한지는 실제로 평화의 상태를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평화는 너무나 즐거워서 즐거움에 관한 모든 관념을 뛰어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매우 기분 좋은 감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그 평화가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생명이 흘러나오는 상태입니다. 그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치는데, 그 방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설명은 AC.91의 ‘비’와 ‘안개’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거기서는 평화의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단순한 편안함이 아니라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은 단순히 싸움을 멈춘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새로운 것을 산출하게 됩니다.
그 결과 태어나는 것이 ‘신앙의진리들’과 ‘사랑의선들’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진리와 선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얻는다’는 설명입니다. 진리와 선이 단지 사람의 기억 속에 있거나 지식으로 존재하는 것과, 실제 생명을 가진 상태는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치고, 그 평화의 즐거움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생명을 얻어 태어납니다.
따라서 AC.92의 평화는 싸움이 사라진 빈자리가 아닙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친 자리에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 흘러들고, 그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쳐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을 살아 있게 합니다. AC.90의 ‘평화의평온’, AC.91의 ‘비와안개’, 그리고 AC.92의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은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천적 인간의 안식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생명으로 충만한 상태인지를 보여 줍니다. (AC.92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