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5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에서 가장 강하게 들리는 문장은 아마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인간에게는 의지 자체가 없으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하고 선택하고 결심하는 것은 모두 탐욕일 뿐이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또한 거듭난 사람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것조차 실제로는 그의 의지가 아니라는 뜻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AC.105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주제는 인간에게 선택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생명나무’가 왜 동산 ‘가운데’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동산 가운데’를 속 사람의 의지라고 설명하고, 말씀에서는 이 의지를 ‘마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말해지기는 하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으로서 사람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일상적인 선택이나 결심의 능력만을 가리키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맥의 초점은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생명의 중심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선한 의지의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반대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자기 의지라고 부를 때, AC.105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 목적은 선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두 가지 반대 방향의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지도 없으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선택하거나 행하지 않는다’는 식의 수동적인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선을 원했으므로 그 선은 나에게서 나왔다’는 자기 공로의 이해입니다. AC.105의 논지는 어느 쪽도 아닙니다. 이 번호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생명나무’가 중요해집니다. AC.105는 생명나무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한 뒤, 마지막에는 그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다’는 강한 표현만 따로 떼어 놓으면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선언처럼 보이지만, 전체 문맥에서 보면 강조점은 인간의 무가치함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05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네 안에서 선한 의지를 만들어 내어 그것으로 내게 오라’고 요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믿고 선을 원할 수 있게 하는 생명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이 생명을 만들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사랑하고 믿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중심에 있는 ‘생명나무’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일까요? AC.105 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의지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을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이 번호가 직접 다루는 범위에서는 인간의 모든 선택과 책임의 구조를 설명하기보다, 참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적어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고백과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국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 바로 뒤에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주님의 자비이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온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서 선의 독립적인 근원을 거두어 가는 까닭은 인간을 생명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께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에덴동산 한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자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105 심화 1)

 

 

 

AC.105, 창2:9,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 의지의 중심에 있는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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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 심화

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선 해석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이것을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일까요? 더구나 이렇게 읽으면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위험하거나 악하다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문맥은 그렇게 읽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감각과 기억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생명의 질서 안에서 어디에 놓이며, 무엇이 무엇의 근원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102의 두 나무를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AC.105에 이르면 이 생명나무를 ‘주님의 자비’라고까지 설명합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질서에서는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인간의 감각이나 지식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신앙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옵니다’. 이 차이가 핵심입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배우고 기억한 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진실 여부를 스스로 세우려는 질서가 문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지식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가 신앙의 근원을 결정하는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러므로 생각하지 말라’, ‘이성을 사용하지 말라’, ‘증거를 살피지 말라’는 뜻으로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AC.102-106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은 계속 인간 안에 있으며 주님의 유입을 받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 자체가 참과 선을 판정하는 궁극적인 근원이 되는가 하는 질서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반지성주의라기보다 신앙의 생명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에 관한 설명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서로 다른 신앙의 질서와 연결하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질서이며, 다른 하나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는 질서입니다. 결국 두 나무의 차이는 단순히 ‘신앙 대 지식’이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AC.106은 ‘지식의 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본성이 ‘뒤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 의미를 모두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분명히 해 둘 것은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신앙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생명의 질서라는 점입니다. 왜 그것이 인간의 타락과 연결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따라가면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02 심화 1)

 

 

 

AC.102, 창2:9,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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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곧 퍼셉션의 본성이 어떠한지, ‘생명나무’(tree of lives), 곧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의 본성이 어떠한지, 그리고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본성이 어떠한지는 뒤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But the nature of the “tree of the garden,” or perception; of the “tree of lives,” or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nd of the “tree of knowledge,” or faith originating in what is sensuous and in mere memory-knowledge, will be show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106은 창2:9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짧게 정리하면서, 이 절에서 등장한 세 가지 중요한 주제가 앞으로 더 자세히 밝혀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곧 ‘동산의 나무’인 퍼셉션, ‘생명나무’인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지식의 나무’인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입니다. AC.102에서 먼저 제시했던 세 가지 의미를 AC.103-105에서 일부 설명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으로 이 주제들이 모두 설명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금 창2:9을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안내가 됩니다. 특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아직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그것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을 뜻한다는 데까지입니다.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 사람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이후의 타락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앞으로 이어지는 설명을 더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지식의 나무’를 지식이나 이성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아직 하지 않은 말을 앞질러 하는 것이 됩니다.

 

‘생명나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C.105에서는 그것을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하면서, 마침내 ‘주님의 자비’라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06은 그 생명나무의 ‘본성’ 역시 뒤에서 더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붙들어야 할 중심은 생명나무를 어떤 교리적 정의 하나로 완전히 파악했다는 생각보다,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 있다는 지금까지의 질서입니다.

 

퍼셉션 역시 아직 다 밝혀진 것이 아닙니다. AC.104에서 그것은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중요한 설명이지만, AC.106은 그 ‘본성’이 앞으로 더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낯선 개념을 처음 만났을 때 즉시 익숙한 개념으로 바꾸어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점차 어떤 내용을 더해 가는지를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AC.106은 내용은 짧지만 독자에게 중요한 여백을 남깁니다. 주님의 말씀과 그 속뜻을 이해하는 일은 한 표현의 뜻을 한 번 확인하고 끝내는 일이 아니라, 이어지는 말씀 안에서 그 뜻이 점차 열리고 서로 연결되는 과정을 따라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창세기 첫 부분처럼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하게 읽어 온 말씀을 전혀 다른 깊이에서 다시 접할 때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기 이해 안에 넣으려 하기보다 지금 밝혀진 만큼 충실히 받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은 기다리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AC.106에서 우리는 퍼셉션과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에 관한 결론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턱에 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분명해진 것은 참과 선을 퍼셉션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의 근원도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신앙의 근원을 찾는 문제는 앞으로 더 밝혀질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에게 결론을 서두르게 하지 않고, 이어지는 말씀과 설명을 따라 그 차이를 더 분명히 보도록 이끕니다. (AC.106 해설)

 

 

 

AC.107, 창2:10,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뜻함’ (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에덴에서 흘러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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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 창2:9,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 의지의 중심에 있는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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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며, ‘동산 가운데’(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의지는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서 가장 먼저 소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으므로,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에 관하여 말해지기는 하지만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탐욕이며, 이것이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지가 생명나무가 놓여 있는 ‘동산 가운데’(midst of the garden)이고,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으므로,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주님의 자비이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옵니다. The “tree of lives”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in the midst of the garden” is in the will of the internal man. The will,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heart,” is 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with man and angel. But as no one can do good of himself, the will or heart is not man’s, although it is predicated of man; cupidity, which he calls will, is man’s. Since then the will is the “midst of the garden,” where the tree of lives is placed, and man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the “tree of lives” is the mercy of the Lord, from whom comes all love and faith, consequently all life.

 

해설

AC.105는 창2:9의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라는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가장 깊은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고, 그것이 있는 ‘동산 가운데’는 속 사람의 의지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이 의지를 ‘마음’이라고도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서 가장 먼저 소유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명나무가 동산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의 생명의 중심과 관계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설명은 매우 강합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으므로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니며, 사람이 자기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탐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능력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선한 의지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선을 원하고 행하게 하는 선의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앞의 AC.99와 AC.104에서 계속 밝혀진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의 지성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하며, 퍼셉션 자체도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05는 그보다 더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의 지성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선을 원하는 의지의 생명 역시 그 근원이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인간이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있는 것은 ‘단지 탐욕’이라고까지 말할까요? 이 표현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철저히 구별하려는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생명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AC.105가 가리키는 생명의 질서는 그 반대입니다. 선한 의지와 사랑과 신앙과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며, 인간은 그것들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갑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나무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뜻한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모습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사람에게서 생명을 요구하시면서 그 생명을 스스로 만들어 내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선한 의지를 만들어 내어 먼저 주님께 가져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AC.105가 말하는 질서에서는 오히려 주님께서 그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사랑도 주님으로부터 오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도 주님으로부터 오며, 따라서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명나무’를 마지막에는 ‘주님의 자비’라고까지 풀이합니다. 생명나무의 중심에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없애기보다, 우리가 가진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묻습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사랑하고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AC.105가 보여 주는 천적 질서와 맞닿아 있습니다. 에덴동산 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결국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중심에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자비가 계셔야 함을 보여 줍니다. (AC.105 해설)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 심화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에서 가장 강하게 들리는 문장은 아마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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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6, 창2:9, ‘퍼셉션과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의 본성은 뒤에서 더 밝혀진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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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4, 창2:9, ‘퍼셉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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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2:9)

 

AC.102

‘나무’(tree)는 퍼셉션을 뜻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tree desirable to behold)는 진리의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tree good for food)는 선의 퍼셉션을 뜻합니다.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A “tree” signifies perception; a “tree desirable to behold,” the perception of truth; a “tree good for food,” the perception of good; the “tree of live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해설

AC.102는 창2:9에 나오는 여러 ‘나무’의 속뜻을 먼저 한꺼번에 제시합니다. ‘나무’ 자체는 퍼셉션을 뜻하고, 그 가운데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진리의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의 퍼셉션을 뜻합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에서,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나무’를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교리를 뜻한다고 하지 않고 ‘퍼셉션’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에덴동산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했습니다(AC.98-101). 그러므로 그 동산에서 자라는 나무들도 그 사람 안에 독립적으로 축적된 지식의 목록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와 ‘먹기에 좋은 나무’가 각각 진리와 선의 퍼셉션을 뜻하는 것도 이 문맥 안에 있습니다.

 

특히 ‘생명나무’가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와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사랑이 근원이 되고 신앙이 거기서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곧바로 ‘감각이나 기억지식은 악하다’고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앞의 여러 번호에서도 이성과 기억지식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놓여야 함을 보았습니다. AC.102에서 대비되는 것은 지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신앙의 근원과 질서입니다.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려는 질서가 서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AC.102는 아직 이 각각의 의미를 자세히 증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창2:9의 여러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제시하는 개요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기본 구조를 붙들고, 이어지는 설명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AC.102 해설)  

 

심화

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 심화 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 심화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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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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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1, 창2:8, ‘동쪽은 주님을 뜻하며, 기도할 때 동쪽을 향한 표상적 관습’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주님이 ‘동쪽’(east)이시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the Lord is the “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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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그 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동산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뜻하고, 지식[scientiae]의 나무는 신앙을 뜻합니다. (8-9절) 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 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 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verses 8–9).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8, 9절)

 

해설

AC.77은 천적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개요로 보여 줍니다. AC.75에서는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을 다루었고, 이제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이 문맥에서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의 지성과 관계되는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다만 왜 ‘에덴’이고 왜 ‘동쪽’인지까지 AC.77이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 구체적인 속뜻은 뒤따르는 해설을 기다려야 합니다.

 

동산 안의 나무들도 구별됩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진리와 선의 ‘지식’을 말하지 않고 ‘퍼셉션’을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개요만 가지고 퍼셉션의 성격을 모두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천적 인간의 지성 안에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 있으며, 창2:9의 서로 다른 나무들이 그것을 묘사한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두 나무가 언급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뜻하고,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뜻합니다. 이 대목은 이후 창2와 창3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지식의 나무’ 자체를 처음부터 악한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AC.77에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분명히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후 지식의 나무와 관련하여 문제가 생길 때에는 신앙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단순화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이 어떤 질서와 관계 안에 놓이는지가 어떻게 설명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77은 이처럼 천적 인간의 지성을 하나의 동산으로, 그 안의 나무들을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으로, 그리고 그 중심적인 두 나무를 사랑과 신앙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창2:8-9의 상세 해설이 아니라 개요입니다. 그러므로 에덴, 동쪽, 나무, 보는 것, 먹는 것,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를 각각 고정된 상응표처럼 미리 완성하기보다,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천적 인간의 지성 안에서 서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전체 그림을 붙들고 뒤따르는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AC.77 해설)

 

 

 

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강,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것들’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뜻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흘러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앎[cognitio]입니다. 이것들은 속 사람에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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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창2:1-17 개요, ‘그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 (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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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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