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부터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더 많은 것들이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깊은 내용이 주님 자신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는 그러한 것이며, 말씀의 모든 생명은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구절도 그 가장 깊은 내용에서는 천국의 결혼을 바라봅니다. 천국의 결혼은 proprium 안에 존재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며, 이 proprium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 결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하는 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어떠한 것인지는 간단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한다는 점만 말해 두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곧 변화를 퍼셉션하는 그러한 보편적인 애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 안에 있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바로 이 proprium을 의미합니다. The words “a rib was built into a woman” have more things inmostly concealed in them than it is possible for anyone ever to discover from the letter;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uch that its inmost contents regard the Lord himself and his kingdom, and from this comes all the life of the Word.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regarded in its inmost contents. The heavenly marriage is of such a nature that it exists in the own, which, when vivified by the Lord,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Man’s own thus vivified has a perception of all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and consequently possesses all wisdom and intelligence conjoined with inexpressible happiness. But the nature of this vivified own, which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cannot be concisely explained. Suffice it therefore to observe that the angels perceive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although when not reflecting on the subject they know no other than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but there is 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 that at the least departure from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they perceive a change, and consequently they are in the enjoyment of their peace and happiness, which is inexpressible, while they are in their general perception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It is this own also that is meant in Jeremiah, where it is said: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이 구절에서도 천국의 결혼이 의미되며, 여기서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 여자에 관하여 ‘둘러싸는 것’(to compass)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까닭은 이 proprium이, 살이 된 갈빗대가 심장을 둘러싸는 것처럼 둘러싸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signified in this passage also, where by a “woman” is meant the own vivified by the Lord, of which woman the expression “to compass” is predicated, because this own is such that it encompasses, as a rib made flesh encompasses the heart.

 

해설

AC.155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말씀의 속뜻을 지금까지보다 훨씬 깊은 층위로 이끕니다.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라고 했습니다. AC.154에서는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은 악하고 흉측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5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은 ‘천국의 결혼’을 바라보고 있다고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이 주님 자신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며, 바로 여기에서 말씀의 모든 생명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말씀을 단순히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심리적 설명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도 이미 속뜻이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중심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주님과 어떤 관계 안에 들어가는가를 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여기서 ‘천국의 결혼’이라고 합니다.

 

그는 천국의 결혼이 proprium 안에 존재하며, 그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결합이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버린 뒤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됩니다. AC.151에서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자기 자신이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셔서 주님과 결합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proprium에는 놀라운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 결과 지혜와 지성을 누리고, 거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결합됩니다. 여기서도 순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와 지성이 인간 자신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함으로써 그것들을 누리게 됩니다. 앞에서 계속 강조된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라는 질서가 천국의 결혼 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생명을 얻은 proprium의 성질을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여기서 천국의 결혼이나 주님의 신부와 아내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끌어와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스베덴보리는 지금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천사들의 상태 한 가지를 제시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압니다. 이 짧은 설명은 AC.140 이후 계속되어 온 문제에 매우 중요한 답을 줍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산다’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천사들조차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지금 이 생명은 주님에게서 흘러오고 있다’고 의식적으로 분석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상태에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이라는 AC.140의 표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생명은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인간과 천사는 그것을 참으로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받아 누립니다.

 

그 보편적인 퍼셉션은 단순한 교리 지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즉시 변화를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명제를 머리로 암기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명의 질서 안에서 실제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질서에서 벗어나는 순간 상태의 변화를 느끼며,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 안에 있을 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AC.154에서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렘31:22의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를 인용하여 같은 천국의 결혼을 확증합니다. 여기서 ‘여자’(woman)는 다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하고, ‘둘러싸는 것’(to compass)은 살이 된 갈빗대가 심장을 둘러싸듯 이 proprium이 둘러싸는 성질을 가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신체의 모양을 보고 우리가 임의로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현재의 갈빗대와 여자, 심장의 관계 안에서 그 의미를 직접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붙들어야 합니다.

 

결국 AC.155는 지금까지의 proprium 논의를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이끕니다. 그 자체로 죽어 있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며, 그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되고, 그 안에서 천국의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상태의 천사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면서도 가장 깊은 곳에서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삶의 경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는 근원을 밝혀 줍니다. AC.140부터 계속되어 온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자기 자신의 것처럼 경험되는 proprium’의 문제가 여기서 상당히 깊고 아름다운 답을 얻습니다. (AC.155)

 

 

 

AC.156,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속 사람과 결합한 proprium’ (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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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4, 창2:22, ‘악 자체인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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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

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이며, 따라서 인간은 그 자체로는 악과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보이도록 제시될 때, 더 추한 것은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해 제게 분명해졌습니다. 다만 그 모습은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도록 제시되는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달아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나며,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을 한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며,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그들은 가슴을 두른 꽃 화환과 머리 위의 관으로 다양하게 단장하고, 다이아몬드 같은 기운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해설

AC.154는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강한 표현으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얼마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대조합니다. 첫 문장만 보면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이며 인간은 악과 거짓일 뿐’이라는 선언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후반부에서는 바로 그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154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두 상태를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며,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0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살려고 할 때, 그 proprium에서는 선과 진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AC.149-150에서 이미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proprium의 악은 단순히 인간이 개별적으로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정도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시 자신의 영계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때에는 더 추한 것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보이며, 그것을 자기 앞에서 보게 된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모습이 모두 똑같다고 하지 않고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proprium은 획일적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그러나’가 AC.154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앞의 흉측한 모습과 정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던 설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신다는 지금까지의 흐름이 여기서 다시 확인됩니다.

 

이 때문에 AC.154는 AC.141과 함께 읽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으며, 그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므로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라고 했습니다. 반면 AC.154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고 합니다. 두 문장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AC.154 자체가 그 구별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으로서의 proprium은 악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언제나 동일한 영적 성질을 가진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인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인지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후반부의 모습들은 이러한 차이를 영계의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고,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꽃 화환과 관으로 단장한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에서의 실제 나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의 성질입니다. 앞에서는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그 흉측함이 달라진다고 했고, 여기서는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아름다움도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영계에서 외적인 모습이 내적인 생명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설명이 이 대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은 현재 문맥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AC.148에서는 가슴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생명 없는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54에서는 체어리티를 부여받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proprium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점차 구체적인 내용을 얻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아직 체어리티와 proprium의 관계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이후의 설명을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상태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앞부분의 죽음과 추함, 뒷부분의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은 서로 대응되는 대조를 이룹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proprium 안에 갇혀 있을 때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있을 때의 차이가 영계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AC.154는 proprium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는 문장은 분명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에 같은 번호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말한다는 사실도 똑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살아 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AC.141에서 시작하여 AC.147-154를 거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 proprium의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154)

 

 

 

AC.155, 창2:22, ‘주님의 신부와 아내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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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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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짓는 것’(build)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하고, ‘갈빗대’(rib)는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며, ‘그 여자를 사람에게로 이끌어 오신 것’(he brought her to the man)은 그의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천적 인간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proprium으로 기울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었으며, 그러므로 ‘여자’(woman)라 하고, 뒤에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By to “build” is signified to raise up what has fallen; by the “rib,” man’s own not vivified; by a “woman,” man’s own vivified by the Lord; by “he brought her to the man,” that what is his own was granted him. The posterity of this church did not wish, like their parents, to be a celestial man, but 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 and, thus inclining to their own, it was granted to them, but still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nd therefore called a “woman,” and afterwards a “wife.”

 

해설

AC.151은 창2:22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는 말씀의 주요 표현들을 하나씩 풀이하면서, AC.131부터 이어져 온 proprium의 논의를 중요한 지점까지 정리합니다. 특히 이제 ‘갈빗대’와 ‘여자’의 차이가 명확하게 제시됩니다. 갈빗대는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입니다.

 

먼저 ‘짓는 것’(build)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여자를 지으신다는 것은 속뜻에서 전혀 없던 어떤 독립적인 proprium을 새로 만들어 인간에게 붙여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의 인도를 원하며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짓는다’는 것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의미를 가집니다.

 

‘갈빗대’(rib)는 AC.147-149에서 설명한 것처럼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는 이것이 매우 소중하고 심지어 모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이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뼈처럼 보이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갈빗대에서 여자가 지어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죽어 있는 proprium이 그대로 존속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로 생명을 얻는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여자’(woman)는 이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 대목은 앞의 AC.138을 읽을 때 우리가 조심스럽게 유보했던 부분을 본문 자체가 확정해 줍니다. AC.138에서는 ‘그를 돕는 배필’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고 뒤에서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라고 한다는 정도까지만 설명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때에는 ‘여자’를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proprium을 뜻하는 고정된 상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AC.151에 이르러서야 현재 창2:22의 문맥에서 ‘여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직접 밝혀집니다. 곧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입니다.

 

‘그 여자를 사람에게로 이끌어 오신 것’(he brought her to the man)은 그의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AC.132 이후 반복되어 온 ‘허락된 proprium’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욕구 자체를 인간 안에 악으로 주입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원하는 proprium을 그 자체로 죽어 있는 상태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proprium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둘째 문단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역사적·교회적 배경을 다시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사람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조상들처럼 천적 인간이 되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이 욕구 때문에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기울어진 상태에서조차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지만, 그것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이 창2의 이 장면을 단순한 타락의 묘사로만 읽을 수 없게 합니다.

 

여기서 AC.147의 ‘깊은 잠’도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기며, 자기에게 속한 것을 가진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AC.149-150에서 밝혀졌듯 실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제 AC.151은 인간이 원했던 바로 그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그에게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역사는 인간에게 자기 경험을 빼앗아 자기 자신이 없는 존재로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자기 것으로 경험하는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을 ‘여자’(woman)라 하고 뒤에는 ‘아내’(wife)라고 한다고 말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아직 ‘여자’와 ‘아내’라는 두 표현 사이의 차이를 자세히 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 차이에 별도의 의미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문맥의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이며, 그 proprium이 인간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설명에서 이 여자가 사람과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가 더 밝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51)

 

 

 

AC.152, 창2:22,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2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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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창2:21, ‘깊은 잠 -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인간이 자신의 proprium 안에 있을 때, 곧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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