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16 심화

1. ‘비손은 지성을 뜻하는데 왜 첫째 강은 의지에 관계한다고 하는가?’

 

AC.110에서는 첫째 강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AC.116에 이르면 마음은 의지와 이해로 이루어져 있으며 ‘첫째 강에 관하여 말한 것은 의지에 관계하고, 이 둘째 강에 관하여 말한 것은 이해에 관계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깁니다. 지성은 일반적으로 이해와 관계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비손은 지성을 뜻하면서도 의지에 관계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얼핏 보면 AC.110과 AC.116의 설명이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AC.110이 비손을 단순히 ‘지성’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입니다. 여기서 지성이라는 한 단어만 떼어 내어 곧바로 이해에 배정하면, 스베덴보리가 앞에서부터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를 놓치게 됩니다. 비손의 지성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성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지성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천적 인간을 설명한 내용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AC.99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에게 지성과 신앙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사랑과 별개의 근원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고, 신앙과 지성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비손이 ‘지성’을 뜻하면서도 첫째 강에 관한 것이 의지에 관계한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천적 인간의 질서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AC.110-115의 흐름도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금은 사랑의 선을 뜻하고,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AC.115에서는 아론의 에봇에 있는 호마노가 금테로 둘러싸여 있는 것에서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한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즉 첫째 강을 설명하는 전체 문맥의 중심에는 사랑의 선이 있으며, 신앙의 진리는 그 사랑의 선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의 유입을 받습니다. 따라서 비손이 나타내는 지성도 그 근원을 사랑의 선에 두고 있습니다.

 

반면 둘째 강 기혼에 이르면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AC.116은 기혼을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이라고 설명한 뒤, 이러한 앎들은 이해에 속한다고 직접 말합니다. 여기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을 알고 이해하는 능력 자체가 전면에 나옵니다. 그래서 둘째 강에 관한 것은 이해에 관계합니다. 첫째 강과 둘째 강의 차이는 단순히 ‘첫째는 감정이고 둘째는 지성’이라는 식의 구분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 안에서 의지와 이해가 각각 어떤 방식으로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받아 나타내는가 하는 차이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11의 설명도 중요해집니다. 의지와 이해는 ‘하나의 마음’을 이루지만 서로 같은 것이 아니라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따라서 첫째 강이 의지에 관계하고 둘째 강이 이해에 관계한다고 해서 둘 사이에 아무런 연결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마음 안에서 서로 구별되면서 결합되어 있습니다. 첫째 강에서 설명되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 그리고 둘째 강에서 설명되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은 서로 단절된 두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천적 인간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의지에 관계한다’는 말을 ‘비손 자체가 곧 의지이다’라고 바꾸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116의 표현은 첫째 강에 관하여 말한 것이 의지에 ‘관계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둘째 강에 관한 것이 이해에 관계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비손이라는 상응의 의미를 AC.110에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해 놓고 AC.116에서 그것을 ‘의지’로 변경한 것이 아닙니다. 첫째 강을 둘러싼 전체 설명이 마음의 두 능력 가운데 어느 쪽에 관계하는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인정하면 두 번호 사이의 겉보기 모순은 상당 부분 풀립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질서의 근원에는 다시 주님이 계십니다. 천적 인간에게 사랑이 주된 것이라고 해서 그 사랑의 근원이 인간의 의지 자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105는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했고, AC.112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 역시 결국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강이 의지에 관계하고 둘째 강이 이해에 관계한다는 것은 인간 안에 서로 독립된 두 생명의 근원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에덴에서 하나의 강이 흘러나온 뒤 여러 강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하나의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인간 안에서 서로 구별되는 의지와 이해의 질서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손은 지성을 뜻하는데 왜 의지에 관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핵심은 비손의 ‘지성’만을 떼어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고 신앙과 지성이 그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그래서 첫째 강에 관한 전체 설명은 의지에 관계할 수 있습니다. 반면 기혼은 선과 진리에 관한 앎들을 나타내며, 그 앎들은 이해에 속하므로 둘째 강은 이해에 관계합니다. 이렇게 읽을 때 AC.110과 AC.116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 안에서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생명 질서를 이루는 모습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줍니다. (AC.116 심화 1)

 

 

 

AC.116, 창2:13, ‘기혼은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을 뜻함’ (AC.116-117)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창2:13) AC.116‘둘째 강’(second river), 곧 ‘기혼’(Gihon)은 선과 진리,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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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 심화

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도 이 표현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믿은 뒤, 그 믿음에 따라 사랑하고 살아가는 순서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오히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지혜와 지성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사랑에서 신앙과 지혜와 지성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것은 창2에서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AC.99). 또 생명나무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했으며(AC.102), 그 생명나무는 궁극적으로 ‘주님의 자비’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 따라서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AC.105). 그러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표현은 AC.111에서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창2의 천적 인간을 설명해 온 중심 질서입니다.

 

여기서 ‘사랑이 먼저’라는 것은 사람이 먼저 어떤 감정적인 사랑을 만들어 낸 다음 거기서 교리나 신앙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랑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가 받아들여지며,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에게 신앙은 사랑과 분리된 채 머리 안에 먼저 자리 잡고 있다가 나중에 사랑과 결합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처음부터 사랑의 생명 안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거듭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AC.111에서 왜 기억지식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겉 사람을 문제 삼는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사실을 알고 교리를 정확히 기억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성은 아닙니다. 기억지식은 필요하고 유용하지만, 그것 자체가 영적인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도 주님의 유입을 받습니다(AC.99). 그러므로 문제는 기억지식의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입니다.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신앙과 사랑을 만들어 내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 신앙과 지혜와 지성 안으로 흘러드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AC.112는 이 질서를 더욱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다.’ 그리고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혜와 지성의 차이를 지나치게 공식화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을 단순한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혜에는 사랑의 생명이 있고, 지성에는 신앙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이시므로 참된 지혜와 지성의 근원 역시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보면 AC.110에서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한 말도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오며, 그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입니다(AC.107). 그 강이 동산을 적셔 지성을 주고, 이제 첫째 강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서로 무관한 상응들을 차례로 늘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신앙에 지성이 있는 하나의 생명의 흐름을 여러 이미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113-115에서 금과 보석을 설명하는 것도 같은 질서 안에 있습니다. 금은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하고,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합니다. 특히 AC.115에서는 호마노를 둘러싼 금테에서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한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과 신앙이 단순히 나란히 놓여 있다는 것보다 더 깊은 관계를 보여 줍니다.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 그것을 살아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는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단순히 ‘사랑이 중요하고 신앙은 덜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111은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을 이루면서도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했고, 천국 전체도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주님께서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라고 해서 신앙의 고유한 성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과 신앙이 각각의 고유한 자리를 가지면서도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를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표현의 가장 깊은 초점은 결국 인간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서 사랑을 만들어 내고, 그 사랑으로 신앙을 만들고, 다시 그 신앙으로 지혜와 지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AC.112가 계속해서 ‘따라서 주님으로부터’라고 반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오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생명을 얻습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창2의 모습은 바로 이 생명의 질서를 그리고 있습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와 지성이 살아 있는 까닭은 그가 자기 안에 특별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10-115를 읽으며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비손이나 하윌라, 금과 호마노의 개별 상응을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 모든 상응을 하나로 연결하는 생명의 방향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오고,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바로 이 질서의 중심에 있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비손은 더 이상 낯선 고대의 강 이름에 머물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 신앙과 지성 안으로 흘러들어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말씀이 됩니다. (AC.111 심화 1)

 

 

 

AC.111, 창2:11-12,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과 그 지혜와 지성을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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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 심화

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선 해석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이것을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일까요? 더구나 이렇게 읽으면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위험하거나 악하다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문맥은 그렇게 읽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감각과 기억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생명의 질서 안에서 어디에 놓이며, 무엇이 무엇의 근원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102의 두 나무를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AC.105에 이르면 이 생명나무를 ‘주님의 자비’라고까지 설명합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질서에서는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인간의 감각이나 지식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신앙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옵니다’. 이 차이가 핵심입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배우고 기억한 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진실 여부를 스스로 세우려는 질서가 문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지식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가 신앙의 근원을 결정하는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러므로 생각하지 말라’, ‘이성을 사용하지 말라’, ‘증거를 살피지 말라’는 뜻으로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AC.102-106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은 계속 인간 안에 있으며 주님의 유입을 받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 자체가 참과 선을 판정하는 궁극적인 근원이 되는가 하는 질서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반지성주의라기보다 신앙의 생명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에 관한 설명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서로 다른 신앙의 질서와 연결하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질서이며, 다른 하나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는 질서입니다. 결국 두 나무의 차이는 단순히 ‘신앙 대 지식’이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AC.106은 ‘지식의 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본성이 ‘뒤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 의미를 모두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분명히 해 둘 것은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신앙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생명의 질서라는 점입니다. 왜 그것이 인간의 타락과 연결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따라가면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02 심화 1)

 

 

 

AC.102, 창2:9,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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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심화

1.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99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강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영적 인간 역시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인데, 그의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그가 잘못된 상태에 있다는 뜻일까요?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이 되기 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뜻일까요?

 

먼저 AC.99 자체가 말하는 것을 정확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뒤집혀 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생명의 근원은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입니다. 문제는 그 생명이 흘러드는 실제 질서와 사람이 그것을 경험하고 퍼셉션하는 방식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과 싸웁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는데도, 사람에게는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곧 ‘내가 배우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추론하여 이해하게 되었다’는 방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AC.99이 말하는 ‘뒤집힘’은 우선 이 질서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이 관계가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 없으므로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은 이성과 기억지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생명과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그 질서대로 퍼셉션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뒤집혀 있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단순히 ‘잘못된 사람’과 ‘올바른 사람’, 또는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으로 나누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AC.99가 강조하는 차이는 주님의 유입 자체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다만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앞서고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의 싸움이 아직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의 실제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싸움이 그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가 더 이상 거꾸로 보이지 않고 실제 그러한 것으로 퍼셉션됩니다.

 

따라서 ‘뒤집혀 있다’는 표현 때문에 영적 인간의 신앙과 이성, 기억지식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99는 그것들 안에도 이미 주님께서 흘러들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다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질서 안에서 그 유입의 근원이 더욱 직접적으로 퍼셉션됩니다. 바로 이 회복된 생명의 질서,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이 흘러드는 사람을 스베덴보리는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합니다. (AC.99 심화 1)

 

 

 

AC.99, 창2:8, ‘영적 인간에게 뒤집혀 있던 생명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됨’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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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

천적 질서의 본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동쪽’(East)이신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와 같이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이며,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천적 인간을 표상했기 때문에 ‘지혜롭고’(wise), ‘지성 있고’(intelligent), ‘아는’(knowing) 사람들이라 불렸습니다. (신1:13, 15) 그러므로 궤를 만든 브살렐에 관하여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 nature of celestial order, or how the things of life proceed, is evident from these rivers, namely, from the Lord, who is the “East,” and that from him proceeds wisdom, through wisdom intelligence, through intelligence reason, and so by means of reason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are vivified. This is the order of life, and such are celestial men; and therefore, since the elders of Israel represented celestial men, they were called “wise, intelligent, and knowing” (Deut. 1:13, 15). Hence it is said of Bezaleel, who constructed the ark, that he was:

 

1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2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출36:1, 2) Filled with the spirit of God, in wisdom, in understanding, and in knowledge [scientia], and in all work. (Exod. 31:3; 35:31; 36:1–2)

 

13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 15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 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 (신1:13, 15)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출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출35:31)

 

해설

AC.121은 에덴에서 흘러나와 네 갈래로 나뉜 강들에 관한 설명을 하나의 질서로 종합합니다. 지금까지 각 강을 따라가면서 지혜와 지성, 이성과 기억지식이 차례로 등장했는데,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서로 흩어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천적 질서’를 이룬다고 명시합니다. 그 질서의 출발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동쪽’이신 주님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나오며,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고, 마침내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이 순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AC.98과 AC.101에서 ‘동쪽’은 주님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07에서는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AC.112에서는 지혜는 사랑에서, 지성은 신앙에서 나오며, 따라서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1은 그동안 제시된 내용을 하나의 생명의 흐름으로 묶습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은 각각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가장 안쪽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질서 있게 생명을 받습니다.

 

여기서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온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앞의 AC.111은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의지와 이해가 서로 구별되며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21의 질서는 이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만드는 설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생명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지혜와 지성과 이성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아래에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과 단절되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 질서는 아닙니다.

 

특히 마지막 단계인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은 AC.80 이후의 논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를 제거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AC.118에서는 기억지식이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했고, AC.120에서는 그것이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의 지성과 지혜의 경계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1에서는 그 기억에 속한 앎들조차 이성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기억지식의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입니다. 기억지식이 스스로 출발점이 되어 위의 것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이르는 것이 올바른 질서입니다.

 

신1:13, 15의 이스라엘 장로들이 인용되는 것도 바로 이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지혜롭고’(wise), ‘지성 있고’(intelligent), ‘아는’(knowing) 사람들이라고 불린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히 행정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들이었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천적 인간을 표상했기 때문에, 그들을 묘사하는 세 표현도 천적 인간 안에 질서 있게 존재하는 지혜와 지성과 앎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앞에서 설명한 천적 질서가 말씀의 표현 속에도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브살렐에 관한 출31:3과 병행 구절들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성막과 그 기구들을 만드는 일을 맡은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출발점은 하나님의 영이며, 그로부터 지혜와 이해와 지식이 이어지고 마침내 실제 ‘일’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천적 질서가 단지 인간의 내면에서 끝나는 추상적인 단계가 아니라 가장 바깥의 실제 행위에까지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안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진행되고, 마침내 자연적인 삶의 쓰임 가운데 나타납니다.

 

따라서 AC.121은 에덴의 네 강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네 강은 서로 무관한 네 가지 상징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질서 있게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장 바깥의 이성과 기억에 속한 앎들도 버려져야 할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천적 인간이란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라, 자신의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 전체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도록 질서 지어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강들을 통하여 보여 주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AC.121)

 

 

 

AC.122, 창2:15,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다 - 주님의 것을 누리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창2:15) AC.122‘에덴동산’(garden of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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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0, 창2:14, ‘유브라데 -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은 지성과 지혜의 경계다’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0‘애굽’(Egypt)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Euphrates)도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또한 이러한 기억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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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안으로 흘러드시지만, 그의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 자신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통하여[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없으므로 그는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영적 인간에게서 뒤집혀 있던 질서가 이제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된 것으로 묘사되며, 이 질서, 곧 이 사람을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garden in Eden in the east)이라 합니다. 가장 높은 뜻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동쪽 에덴에 심으신 동산’(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은 주님 자신입니다. 가장 내적인 뜻, 곧 보편적인 뜻에서는 주님의 나라와,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는 천국입니다. 그때 사람의 상태는 천국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까지도 열려 있으며, 참으로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고, 그 안에 천적이고 영적인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 하나하나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으며,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는 퍼셉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Life, or the order of life, with the spiritual man, 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 through faith,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in ejus 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 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 but from the man himself, 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 [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But the life, or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 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 and this order, or man, is call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the supreme sense, 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is the Lord himself. In the inmost sense, 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 it is the Lord’s kingdom, 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 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 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 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 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 are open, even from the Lord, 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for each one [of these] has the Lord’s life within it, 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해설

AC.99는 앞의 AC.98에서 ‘동쪽 에덴동산’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한다고 한 이유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두 사람 모두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차이는 주님께서 흘러드시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유입이 어떤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며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퍼셉션하는가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십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실제 질서가 그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뒤집혀 있던 질서’라는 말은 주님께서 실제로 유입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그 유입의 참된 질서를 그대로 퍼셉션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이 질서가 회복됩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고,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도 그쳤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지성과 생명이 실제로 어디에서 오는지를 퍼셉션합니다. 이것은 AC.91에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면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른다고 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흘러드는 생명의 질서 안에 놓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회복된 질서, 더 정확히는 이러한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을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한 사람의 거듭남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가장 높은 뜻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쪽 에덴에 심으신 동산’이 주님 자신이며, 가장 내적인 뜻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뜻에서는 주님의 나라와 천국을 뜻합니다.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은 상태에 놓입니다. 사람은 본래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그러한 사람의 삶 전체가 어떤 질서 안에 놓이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의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뿐 아니라 말과 행동까지 열려 있으며, 그 안에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그의 내면에 어떤 특별한 종교적 생각이 더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 모든 것 하나하나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천적 인간은 자신의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동쪽 에덴동산’은 아름다운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이 흘러들고 그 질서가 사람의 이해와 이성, 기억지식,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이어지는 천적 인간의 온전한 생명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AC.99 해설)  

 

심화

1.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99 심화 1,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99 심화1.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99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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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0, 창2:8, ‘에덴은 사랑을, 동산은 지성을 뜻함을 보여 주는 이사야의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0‘동산’(garden)이 지성을 뜻하고, ‘에덴’(Eden)이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도 나타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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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동쪽 에덴동산,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 (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동산’(garden)은 지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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