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1 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창4의 에녹은 가인의 아들이고, 창5의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가 두 에녹에게 부여하는 속뜻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창4의 에녹은 AC.331에서 매우 간단하게 정의됩니다. ‘이 이단의 확장을 에녹이라 합니다.’ 여기서 ‘이 이단’은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입니다. 따라서 창4의 에녹은 가인이라는 분리된 신앙의 교리적 상태가 더 전개되고 확장된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에서 설명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을 모아 교리적 지식으로 정리하고 보존한 상태와 에녹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을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같은 상응이나 같은 교회적 상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상응은 단순한 암호표가 아닙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하나의 뜻’, ‘성은 언제나 하나의 뜻’, ‘물은 언제나 하나의 뜻’이라고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해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어떤 인물과 사물과 장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것이 놓인 전체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앞뒤에서 설명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두 번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상태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전혀 관계없는 상태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문맥에서 그 이름을 어떤 교회적 또는 영적 상태와 연결하는가입니다. 창4의 에녹은 가인의 계열 안에서 읽어야 하고, 창5의 에녹은 그 장에서 전개되는 태고교회의 계승과 퍼셉션의 변화라는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창4와 창5의 계보를 읽는 방식에도 중요한 도움을 줍니다. 두 장을 단순히 하나의 시간표로 이어 붙여 ‘누가 누구와 정확히 같은 시대에 살았는가’를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 각 계보가 어떤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를 보여 주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 중심은 생물학적 연대 계산이 아니라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창4와 창5의 두 계열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어떻게 병행되었는지를 AC.331만으로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속뜻에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과 상태를 읽을 수 있다는 것과, 각각의 세대가 시간적으로 정확히 일대일 대응하여 동시에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두 계열이 같은 태고교회 시대의 서로 다른 흐름을 보여 준다’는 큰 그림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세밀한 연대표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두 에녹의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창4의 에녹은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 확장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려진 것들을 수집하여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이미 일어난 분리가 더 전개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두 에녹에게 공통적으로 ‘교리적인 것’과 연결되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리의 성격과 기능은 매우 다릅니다. 창4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더욱 발전하는 쪽이고, 창5에서는 퍼셉션으로 받은 것을 잃지 않도록 모아 보존하는 쪽입니다. 같은 이름이지만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를 표상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 차이는 오늘 우리가 교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도 의미 있는 통찰을 줍니다. 교리화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교리화하며 무엇을 위해 보존하는가입니다. 생명에서 분리된 진리를 체계화할 수도 있고, 반대로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다음 상태를 위해 충실하게 보존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교리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교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어떤 쓰임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두 에녹은 오히려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는 분리가 굳어지고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이름 자체보다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교리가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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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

 

좀 성급한 질문일 수 있지만, 그리고 이미 몇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창4, 창5를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가인 이후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태고교회는 처음엔 어두운 세월을 지내다가 셋 이후 회복된 걸로 보기에는 ‘태고교회’라는 위상(?)에 어딘가 좀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창4를 시간순으로 읽으면,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나이만 먹다가 수백, 수천 년이 흐른 후에야 셋이라는 자녀를 본 게 되는데... 이건 좀... 차라리 창4 따로, 창5 따로, 그러니까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나란히 동시대를 살다가 홍수를 맞이하는, 이런 이해가 더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창4와 창5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창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여러 대가 이어지고, 라멕에게서 다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긴 계보가 모두 소개된 뒤 창4:25에 와서 다시 ‘아담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연대기처럼 직선적인 시간순으로만 읽으면, 마치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에야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을 해석하는 방식에서는 이러한 계보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개인들의 출생 연대를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에녹, 이랏 등의 이름은 말씀의 속뜻에서 특정한 교리와 교회적 상태를 나타내며, 셋과 에노스 및 창5의 여러 이름들 역시 이어지는 교회적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도 먼저 ‘누가 정확히 몇 년 먼저 태어났는가?’보다 ‘말씀이 어떤 교회적 계열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4는 특히 태고교회 안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들과 그 변화를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계열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 그 구별이 분리로 굳어지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며, 그 뒤에도 그 교리적 상태가 여러 형태로 파생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반면 창4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에서 다시 이어지는 계보는 태고교회 안의 또 다른 교회적 계승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열이 역사적으로 완전히 끝난 다음 창5의 셋 계열이 시작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은 한 계열의 영적 역사를 충분히 보여 준 뒤 서술의 초점을 다른 계열로 옮겨 그 계열의 상태들을 다시 처음부터 펼쳐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4와 창5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큰 시대 안에서 전개되는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의 서술로 함께 읽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여기서 ‘함께’ 또는 ‘나란히’라는 말을 역사적 동시성에 관한 정밀한 연대표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석이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은 각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적 상태와 그 상태들의 연속이지, 가인 계열의 어느 인물이 셋 계열의 어느 인물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살았는지를 확정하는 연대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두 계열이 같은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되었다’는 것과 ‘각 세대를 일대일로 맞추어 동시대라고 확정한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창4:25에서 셋이 등장하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집니다. 이것을 반드시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 비로소 셋이 태어났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 없이, 말씀의 서술 초점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적 계열에서 셋으로 표상되는 다른 교회적 계열로 옮겨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5에서는 다시 아담에서 시작하여 셋과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계열을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역사로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가인 계열을 단순히 ‘악한 계열’, 셋 계열을 ‘선한 계열’이라고 나누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아무런 진리도 없는 순수한 악을 뜻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이후 점차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변질됩니다. 반대로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 역시 아무런 쇠퇴 없이 처음의 가장 순수한 천적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노아까지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여러 상태를 거치며 결국 그 시대의 종말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는 단지 가장 처음의 순수한 ‘아담’ 상태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여러 후속 교회와 상태들을 거쳐 그 교회 시대의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큰 흐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매우 높은 천적 상태도 있고, 점차 쇠퇴하는 상태도 있으며, 본래의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적 상태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창1-9의 속뜻을 당시 지상에 살던 모든 사람의 역사적 상태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장들에서 직접 추적하는 것은 무엇보다 교회와 그 교회의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물론 그 속뜻에 담긴 영적 원리는 오늘의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수 있고, 한 교리나 지식을 전체보다 높일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에서도 다시 생명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적용과 당시 모든 인류가 똑같은 교회적 상태를 동시에 거쳤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결국 AC.324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두 가지 흐름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 교리들이 독립하면서 여러 교회적 상태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그 분열과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섭리가 계속됩니다. 창4와 창5를 이러한 관점에서 함께 읽으면, 가인과 아벨,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의 긴 계보는 단순한 고대 가족사의 연속을 넘어 ‘교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며,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교회의 생명을 이어 가시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AC.324, 창4,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들과 에노스라는 새로운 교회 (AC.324-337)

창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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