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7,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리고 - 주님의 선을 받아 함께 누리는 화목의 완성’

 

1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는 지극히 거룩하니 2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건제의 번제물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3그 기름을 모두 드리되 곧 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4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고 5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속건제니라 6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라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7속죄제와 속건제는 규례가 같으니 그 제물은 속죄하는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8사람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 곧 그 제사장은 그 드린 번제물의 가죽을 자기가 가질 것이며 9화덕에 구운 소제물과 냄비에나 철판에서 만든 소제물은 모두 그 드린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10소제물은 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니라 11여호와께 드릴 화목제물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12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 13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14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15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6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17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19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20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21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무슨 물건을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 것이요 24스스로 죽은 것의 기름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의 기름은 다른 데는 쓰려니와 결단코 먹지는 말지니라 25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26너희가 사는 모든 곳에서 새나 짐승의 피나 무슨 피든지 먹지 말라 27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9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려는 자는 그 화목제물 중에서 그의 예물을 여호와께 가져오되 30여호와의 화제물은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지니 곧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31그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 것이며 32또 너희는 그 화목제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을지니 33아론의 자손 중에서 화목제물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자는 그 오른쪽 뒷다리를 자기의 소득으로 삼을 것이니라 34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35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아론에게 돌릴 것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 것이니 그들을 세워 여호와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한 날 36곧 그들에게 기름 부은 날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돌리게 하신 것이라 대대로 영원히 받을 소득이니라 37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식과 화목제의 규례라 38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령하신 날에 시내 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령하셨더라 (레7)

 

해설

레위기 7장은 레1부터 시작된 제사의 첫 큰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37절은 지금까지 나온 것을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식과 화목제의 규례’라고 한꺼번에 열거합니다. 그래서 레7은 새로운 제사 하나를 소개하는 장이라기보다 앞에서 배운 제사들을 다시 제사장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특히 화목제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제사의 목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죄를 깨닫고 정결하게 되는 것만이 끝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이 제거된 인간은 마침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웃과 함께 누리며, 주님과 결합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1절로 7절은 속건제를 다시 다룹니다. 속건제물은 번제물을 잡던 곳에서 잡고 피는 제단 사방에 뿌리며,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은 기름, 두 콩팥과 그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을 제단에서 불사릅니다. 이것들은 레3의 화목제에서 이미 만났던 요소들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3(출29:13)은 피를 신적 진리와, 기름을 신적 선과 연결하며, AC.10072(출29:22)는 내장을 덮은 기름을 가장 낮은 것 안에 있는 선과 연결합니다. AC.10074(출29:22)는 콩팥을 자연적 인간의 내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속건제가 단순히 ‘잘못에 대한 벌금’을 지불하는 제사가 아님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실제 삶에서 손상된 것을 바로잡게 하실 뿐 아니라 자연적 인간의 가장 안쪽과 바깥쪽까지 선과 진리의 질서로 다시 세우십니다.

 

6절과 7절에서는 속건제가 ‘지극히 거룩하다’고 다시 선언되며 제사장들이 그것을 먹습니다. 레6에서 보았듯이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닙니다. AC.2187(창18:8)은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을 교통, 결합, 자기 것으로 삼음과 연결합니다.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결해진 자리에 주님의 선이 들어와 인간의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버리는 것은 비움이고, 주님의 선을 받아 살아가는 것은 채움입니다. 레위기의 제사들은 이 두 방향을 계속 함께 보여 줍니다.

 

8절로 10절에서는 번제물의 가죽과 여러 소제물이 제사장에게 돌아갑니다. 이것은 제사의 모든 것이 제단 위에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진 것 가운데 어떤 것은 제사장을 통해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레7:8의 ‘가죽’ 자체를 이 문맥에서 무엇이라고 정확히 상응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이번에 충분한 직접 원전을 확보하지 못했으므로 세밀하게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7절로 10절 전체에 ‘돌아갈 것이요’,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니라’가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제사는 인간이 주님께 무엇을 빼앗기는 행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한 뒤 다시 그분에게서 받아 올바르게 누리는 질서를 가르칩니다.

 

11절부터 장의 중심인 화목제 규례가 시작됩니다. 레3에서 화목제의 기본 구조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화목제가 ‘감사’, ‘서원’, ‘자원’이라는 서로 다른 상태에서 어떻게 드려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가 함께 드려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3절에는 ‘유교병’, 곧 누룩이 들어간 빵도 함께 등장합니다. 레2에서는 누룩을 제단의 화제로 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화목제의 감사 식사에서는 유교병이 함께 놓이는 것입니다. 본문 자체가 감사 화목제에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조심스러운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누룩은 문맥에 따라 거짓이나 불순한 것을 의미할 수 있으며, 무교는 순수함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레7:13의 유교병이 왜 특별히 감사 화목제에 허용되는지를 직접 풀어 주는 강한 AC 원전은 이번 검색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유교병은 정확히 이것을 뜻한다’고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문자적 구조만으로도 중요한 차이는 분명합니다. 번제처럼 모든 것을 불살라 주님께 올리는 제사와 달리 화목제는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이 함께 먹는 제사입니다. 즉 인간의 실제 삶과 기쁨과 감사가 주님 앞의 교제 안으로 들어오는 제사입니다. 이 점은 별도 심화에서 원전상 확실한 부분과 해석상 유력한 부분을 구별하여 더 살펴보겠습니다.

 

15절로 18절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감사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하고 아침까지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서원이나 자원으로 드린 화목제는 이튿날까지 먹을 수 있습니다. 단 셋째 날에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며 남은 것은 불살라야 합니다. 실제 본문은 감사제와 서원·자원제 사이에 이 시간 차이를 명확히 둡니다. 여기에는 ‘오늘의 선을 어제의 것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매우 매력적인 영적 독법이 가능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로 확인되지 않은 세부를 확정적인 상응으로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거룩한 선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데에도 상태와 질서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인간의 proprium이 붙들어 자기 소유로 만들기 시작하면 처음의 거룩한 교통이 변질될 수 있습니다.

 

19절로 21절은 그래서 ‘먹는 사람의 상태’를 강조합니다. 화목제 고기가 부정한 것에 접촉되면 먹지 못하며, 부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거룩한 화목제물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앞에서 ‘먹음’이 교통과 결합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받아들이는가뿐 아니라 ‘어떤 상태에서 받아들이는가’도 중요합니다. 거룩한 진리를 많이 알고 입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거룩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붙든 채 거룩한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면 오히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섞게 됩니다. 그래서 정결은 결합보다 먼저 옵니다. 레4-6의 속죄제와 속건제가 레7의 화목제보다 앞에 놓여 있는 것도 이런 큰 질서와 잘 어울립니다.

 

22절로 27절에서는 레3 마지막에서 이미 보았던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다시 매우 강하게 반복됩니다. AC.5943(창45:18)은 바로 레7:23-26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의 기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 곧 천적인 신성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레3에서 확인했듯이 피는 신적 진리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기름과 피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은 선과 진리를 인간의 proprium이 자기 것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와 연결됩니다. 선은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들을 받아 살아갈 수 있지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선하다’, ‘내가 진리를 소유한다’고 하는 순간 주님에게서 온 것을 proprium의 것으로 바꾸기 시작합니다.

 

28절로 36절은 레7의 절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화목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기름과 가슴을 ‘자기 손으로’ 가져옵니다. 가슴은 여호와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삼고, 기름은 제단에서 불사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아갑니다. 또 오른쪽 뒷다리는 거제로 제사장에게 줍니다. 여기에는 매우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AC.10087(출29:26)은 가슴을 ‘체어리티의 선’, 더 높은 의미에서는 신적 영적인 것과 연결합니다. 가슴이 심장과 폐가 있는 부분이며, 중간 또는 둘째 천국의 영적 선과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슴을 흔드는 것은 그 선이 살아나게 되는 것과 연결됩니다.

 

오른쪽 뒷다리에 대해서도 원전이 놀랍도록 분명합니다. AC.10075(출29:22)는 오른쪽 넓적다리 또는 뒷다리를 가장 내적인 천적 선과 연결하고, 레7:32, 34-35를 직접 인용하면서 가슴은 영적 선, 오른쪽 뒷다리는 천적 선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가슴은 둘째 천국의 체어리티의 선을, 오른쪽 뒷다리는 가장 안쪽 셋째 천국의 천적 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둘이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것은 단순한 제사장의 몫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선과 천적 선의 교통과 받아들임을 표상합니다.

 

더구나 AC.10093(출29:27)은 ‘흔드는 것’과 ‘들어 올리는 것’의 차이까지 설명합니다. 가슴을 흔드는 것은 신적 진리가 ‘인정되어 살아 있게 되는 것’을, 오른쪽 뒷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은 주님에게만 속한 신적 선이 ‘지각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의 차이와 연결합니다. 영적 천국에서는 신적 진리를 이해를 통해 ‘인정’하고, 천적 천국에서는 신적 선을 의지를 통해 ‘지각’합니다. 레7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 요제와 거제의 작은 동작 안에 천국의 두 큰 질서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화목제의 ‘화목’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화목은 단지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다가 제물을 보고 마음을 푸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체어리티와 사랑의 삶으로 자기 것이 되고, 다시 주님께 그 근원을 인정하는 교통과 결합의 상태입니다. 제단에는 기름이 올라가고, 제사장에게는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가 돌아가며, 깨끗한 사람들은 화목제의 고기를 함께 먹습니다. 주님과 제사장과 백성이 하나의 제사 안에서 연결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37절과 38절은 레1-7 전체를 아주 아름답게 닫습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위임식, 화목제가 모두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 506도 레7:1, 11, 37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러한 제사 규례들을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에 속한 것으로 열거합니다. 각각의 제사는 따로 떨어진 종교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하나의 거듭남의 질서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레1의 번제에서 인간 전체가 주님의 사랑에 드려지는 모습을 보았고, 레2의 소제에서 선과 진리가 삶의 예물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레3의 화목제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레4와 5의 속죄제에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레5와 6의 속건제에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실제로 회복하는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레7은 다시 화목제로 돌아와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의 목적은 죄 없는 사람처럼 자신을 관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이 자기 삶이 되고, 그 선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결합의 삶에 있습니다. 그래서 레7의 마지막 모습은 제물을 잃어버린 인간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함께 먹고 누리는 인간입니다. 정결은 화목을 향하고, 회개는 결합을 향하며, 거듭남은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향합니다. (SWC.레7 해설)

 

심화

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SW.레7 심화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SW.레7 심화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레7:12-13은 레2를 읽은 사람에게 아주 뜻밖의 장면입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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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레7의 화목제에는 아주 미묘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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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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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SW.레7 심화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SW.레7 심화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레3의 마지막 말씀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였습니다. 그런데 레7:22-27에서는 같은 명령이 훨씬 더 길고 강하게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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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레7:30-34에는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재미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화목제물을 가져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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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8,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고 - 제사장 위임식에 감추어진 거듭남과 쓰임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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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 ‘제단의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 회복에서 영원한 사랑의 불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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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6 심화

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레6:1-7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범죄의 대상입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잃어버린 물건을 주워 놓고 부인한 것은 모두 이웃에게 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한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웃을 향한 부정직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실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건제의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범죄한 사람은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주운 물건을 먼저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오분의 일을 더합니다. 그런 다음 숫양을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가져갑니다. 본문은 실제 반환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하나의 회개 안에 묶어 놓습니다.

 

이것은 레5에서 보았던 ‘자복’과 ‘보상’을 한층 더 구체화합니다. 하나님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내가 부당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가 참되다면 가능한 곳에서는 외적 삶도 바뀌어야 합니다. 속에서 죄를 인정한 것이 겉에서는 반환과 보상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과거의 잘못을 문자적으로 원상복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도 있고 상대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의 방향입니다. 지금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도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니 끝났다’며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화해가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레6은 그래서 예배를 매우 현실적으로 만듭니다. 제단 앞에서 거룩한 말을 하는 것과 장터와 집과 인간관계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서로 다른 종교가 아닙니다. 맡긴 물건을 정직하게 돌려주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손해를 입혔다면 가능한 만큼 회복하는 삶 자체가 체어리티의 문제입니다.

 

결국 속건제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께 용서를 구하고 있는 그 일 가운데 아직 내가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 남아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있다면 회개는 그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와 이웃에게 행하는 체어리티가 하나가 될 때 속 사람에서 시작된 회개가 겉 사람의 삶까지 내려와 실제 거듭남이 됩니다. (SWC.레6 심화 1)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레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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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 ‘제단의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 회복에서 영원한 사랑의 불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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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6, ‘제단의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 회복에서 영원한 사랑의 불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3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4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잃은 물건을 주운 것이나 5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6그는 또 그 속건제물을 여호와께 가져갈지니 곧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고 갈 것이요 7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라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아침까지 제단 위에 있는 석쇠 위에 두고 제단의 불이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10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11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갈 것이요 12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서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불사를지며 13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14소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앞 여호와 앞에 드리되 15그 소제의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다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16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의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 17그것에 누룩을 넣어 굽지 말라 이는 나의 화제물 중에서 내가 그들에게 주어 그들의 소득이 되게 하는 것이라 속죄제와 속건제 같이 지극히 거룩한즉 18아론 자손의 남자는 모두 이를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대대로 그들의 영원한 소득이 됨이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 1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0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이러하니라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항상 드리는 소제물로 삼아 그 절반은 아침에, 절반은 저녁에 드리되 21그것을 기름으로 반죽하여 철판에 굽고 기름에 적셔 썰어서 소제로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 22이 소제는 아론의 자손 중 기름 부음을 받고 그를 이어 제사장 된 자가 드릴 것이요 영원한 규례로 여호와께 온전히 불사를 것이니 23제사장의 모든 소제물은 온전히 불사르고 먹지 말지니라 2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5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제물을 잡을 것이요 26죄를 위하여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곧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27그 고기에 접촉하는 모든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 28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릴 것이요 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닦고 물에 씻을 것이며 29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을지니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30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죄하게 한 속죄제 제물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지니라 (레6)

 

 

해설

레위기 6장은 앞의 장들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레4에서는 죄를 ‘깨닫는 것’, 레5에서는 그것을 ‘자복하는 것’과 ‘보상하는 것’이 강조되었다면, 레6:1-7에서는 그 보상이 아주 구체적인 이웃 관계 안으로 들어옵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전당물을 부인하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남이 잃은 물건을 주워 놓고도 모른다고 하며, 거기에 거짓 맹세까지 하는 경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이 이런 행동을 단순히 ‘이웃에게 신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한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웃에게 행한 부정직이 곧 주님께 대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와 예배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제사의 법 한가운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속건제의 순서도 중요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먼저 훔치거나 착취하거나 맡아 두었던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숫양을 속건제물로 여호와께 가져갑니다. 레5에서 이미 보았듯이 속건제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미안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으로 실제 손상이 생겼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가는 종교적 행위가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웃에게 바로잡을 것을 바로잡는 것과 주님 앞에서 속죄하는 것이 하나의 회개 안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레6은 그래서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으려 한다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가 저지른 실제 불의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까지가 레5 후반의 속건제를 완성하는 부분이라면 8절부터는 시선이 크게 바뀝니다. 이제 ‘누가 어떤 제물을 가져오는가’보다 제사장이 그 제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가 중심이 됩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의 규례가 다시 나오지만 레1, 2, 4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의 입장에서 제사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제단과 제사장의 입장에서 그 제사가 어떻게 계속되고, 어떻게 거룩하게 다루어지며,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레6은 레1-5에서 배운 제사의 의미를 한 단계 더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9절로 13절의 ‘불’이 있습니다. ‘제단의 불이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그리고 다시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부분에는 매우 분명한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단에서 계속 타고 있어야 했던 불은 ‘주님의 사랑, 곧 영원하고 영속적인 주님의 자비’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6832(출3:2)도 레6:1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단 위의 영속적인 불이 신적 사랑 자체를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불은 먼저 ‘우리의 열심이 꺼지지 않아야 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보다 먼저 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에는 아침과 저녁이 있고 뜨거울 때와 차가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날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지만 어떤 날은 말씀을 읽는 것조차 힘들 수 있습니다. 만일 거듭남이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라는 불에 달려 있다면 그 불은 오래전에 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단의 불은 인간이 처음 만들어 내는 불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사랑이 먼저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며 인간은 매일 아침 그 불 위에 나무를 놓고 번제를 벌여 놓습니다. 그러므로 ‘아침마다’라는 말씀과 ‘꺼지지 않는 불’이 함께 있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끊이지 않지만 인간은 날마다 새롭게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 뜨거워진 신앙으로 평생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흐르는 주님의 사랑을 매일 새롭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10절과 11절에서는 번제가 다 타고 남은 ‘재’가 등장합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입고 재를 제단 곁에 두었다가, 다시 옷을 갈아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갑니다. 여기에서도 세부를 함부로 상응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마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AC.9959(출28:42)는 세마포가 외적 또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6:10-11의 제사장이 재를 치울 때 세마포 옷과 속바지를 입었던 규정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마지막 남은 것까지 진리의 질서 아래 처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재가 ‘진영 밖’으로 나가지만 아무 데나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 곳’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입니다. 제사가 끝났다고 해서 그 결과가 부정한 폐기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재 자체의 세부 의미에 대해서는 이번에 확보한 직접 원전보다 더 나아가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14절로 18절의 소제 규례는 레2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의 일부를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를 아론과 그의 자손이 거룩한 곳에서 먹습니다. 그런데 AC.2177은 이 본문을 직접 해설하면서 고운 가루는 체어리티의 영적인 것을, 기름은 체어리티의 천적인 것을, 유향은 그렇게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은 온 힘과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것을, 누룩 없이 먹는 것은 순수하고 불결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특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것을 먹는 것은 인간 편에서의 ‘상호성’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표상하며,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제물은 제단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 드려진 선이 다시 인간에게 주어지고 인간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레6에서 ‘먹는다’는 행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2187(창18:8)에서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교통, 결합,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6:16, 18, 26을 직접 열거합니다. 제사장이 거룩한 것을 먹는 것은 단순히 제사장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표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 생명의 일부가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진리를 듣기만 하는 것과 그 진리가 내가 살아가는 선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먹어’ 자기 삶으로 만드는 것도 다릅니다. 거듭남은 결국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 생각과 의지와 행동 안으로 들어와 나의 삶이 되는 과정입니다.

 

19절로 23절에는 또 하나 특이한 소제가 나옵니다. 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아침과 저녁으로 나누어 드리되, 이 제물은 제사장이 먹지 않고 ‘온전히 불사르라’고 합니다. AC.9993은 아론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 드리는 레6의 소제를 직접 언급하면서 누룩 없는 떡과 기름이 결합된 여러 형태가 천적 선의 서로 다른 층위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모든 세부를 억지로 풀기보다 중요한 차이를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반 소제에서는 일부가 제사장에게 돌아가지만 제사장 자신을 위한 이 소제는 온전히 여호와께 돌려집니다. 주님께 봉사하는 직분 자체도 자기 소유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의 근원과 목적 전체가 주님께 있음을 보여 주는 매우 인상적인 규례입니다.

 

24절로 30절에서는 속죄제 규례가 다시 등장합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표현은 ‘지극히 거룩하다’입니다. 죄를 다루는 제물인데 왜 오히려 ‘지극히 거룩하다’고 부를까요? 스베덴보리는 정결이 단지 인간이 자기 악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실제로 건져 내시는 신적 역사라고 봅니다. AC.10132는 정결과 거듭남이 이노센스의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속죄제와 속건제가 레6:17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지극히 거룩하다’고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속죄제의 거룩함은 죄 자체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제거하고 인간을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주님의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27절과 28절은 더욱 놀랍습니다. 속죄제의 고기에 접촉하는 것은 거룩하게 되고, 피가 옷에 묻으면 거룩한 곳에서 빨아야 하며,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닦고 물로 씻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AC.10130(출29:37)은 레6:18, 27을 직접 인용하면서 ‘접촉’은 교통과 전달과 받아들임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10105(출29:31)는 레6:28을 직접 인용하면서 토기는 ‘선과 결합하지 않는 거짓’을, 유기는 ‘선이 들어 있는 교리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속죄제의 고기를 삶는 것은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기 위한 준비를 의미하므로, 선과 결합할 수 없는 거짓은 ‘깨뜨려야’ 하지만 선을 담고 있는 교리적인 것은 버리지 않고 ‘닦고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6의 가장 사소해 보이는 그릇 하나에도 거듭남의 놀라운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마지막 30절에서는 속죄제 가운데서도 차이가 나타납니다. 어떤 속죄제는 제사장이 먹지만, 그 피를 회막 안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속죄한 제물은 먹지 않고 불살라야 합니다. 본문 자체가 이 둘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이것을 현재 확보한 원전 이상으로 세밀하게 상응시키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레6 전체에서 한 가지 원리는 분명합니다. 제사의 모든 것이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은 제단에서 불살라지고, 무엇은 제사장이 먹으며, 무엇은 씻고, 무엇은 깨뜨리고, 무엇은 성소로 들어가고, 무엇은 다시 불살라집니다. 거듭남 역시 모든 것을 무조건 버리는 과정이 아닙니다. 악과 결합된 거짓은 깨뜨려야 하지만 선을 섬길 수 있는 진리는 정결하게 하여 보존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받아들여 자기 삶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레6은 놀랍도록 역동적인 장입니다. 처음에는 훔친 것을 ‘돌려보내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속죄제의 그릇 하나까지 어떻게 정결하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 모든 과정의 한가운데에는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자복하고, 돌려주고, 악과 거짓을 씻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근원은 결국 우리의 의지력이 아닙니다. 꺼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 영원한 불이 제단 위에 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오늘도 다시 정결하게 되고, 다시 선을 받아들이며, 다시 이웃에게 바로 행하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레6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SWC.레6 해설)

 

심화

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SW.레6.심화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SW.레6.심화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레6:1-7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범죄의 대상입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잃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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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레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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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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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레6에는 현대 독자에게 조금 낯선 장면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드린 소제와 속죄제의 일부를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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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레6.심화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레6.심화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6:28은 문자로만 읽으면 위생 규정처럼 보입니다. 속죄제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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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7, 레5,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 죄를 인정하는 데서 보상에 이르는 거듭남의 길’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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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5 심화

2. ‘왜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레5 전반부에는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후반부의 속건제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성물에 잘못을 범한 사람은 그 잘못을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실제 손상이 발생했다면 실제 회복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회개를 마음의 상태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으니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의 악이 다른 사람이나 어떤 질서에 실제 손상을 입혔다면 그 결과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훔친 물건은 여전히 상대에게 없고, 거짓말로 훼손된 명예는 여전히 손상되어 있으며, 내가 회피한 책임은 누군가가 대신 짊어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회개는 가능한 경우 그 손상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 점에서 속건제는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제사입니다. 회개가 진실한지는 감정의 강도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많이 흘리고 죄책감을 크게 느끼면서도 실제 행동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감정 표현은 크지 않아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돌려줄 것을 돌려주며 다시 같은 악을 행하지 않도록 삶을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레5의 속건제는 후자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특히 ‘오분의 일을 더하여’라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49(창6:15)는 레5: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보상 후 더해지는 오분의 일을 말씀에서 ‘다섯’이 어떤 것 또는 조금을 의미하는 사례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548(계9:5)은 레5:16을 비롯하여 율법에서 오분의 일을 더하도록 한 여러 경우를 직접 열거하면서, 양과 관련된 이 ‘오분의 일’이 ‘충분한 만큼’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규정을 단순한 고대의 벌금제도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잘못을 대충 덮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기에 충분하도록 회복하려는 태도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잘못에는 반드시 20퍼센트를 더 갚아야 한다’는 식으로 오늘날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상응의 핵심은 숫자를 현대의 계산식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가 최소한의 면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과했으니 됐지’, ‘원금은 돌려줬으니 됐지’가 아니라 내가 일으킨 손상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가능한 범위에서 충분히 바로잡으려는 마음입니다.

 

물론 모든 손상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직접 사과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오래전의 말 한마디가 남긴 상처를 완전히 없앨 수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찾는 것입니다. 같은 악을 반복하지 않고, 비슷한 상황에서 이제는 진실을 선택하며, 과거에 해쳤던 종류의 이웃을 이제는 돕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과거 복원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유 안에서 삶의 방향이 실제로 바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레5에서 ‘자복’과 ‘보상’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자복은 속의 인정이고 보상은 가능한 경우 그 인정이 겉의 삶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속 사람에서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한 것이 겉 사람의 행동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바로잡겠습니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입니다.

 

레5의 속건제는 우리에게 아주 간단하지만 피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용서를 구한 그 일 가운데 아직 내가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는가?’입니다. 있다면 회개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의 사함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고 가능한 것을 바로잡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힘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에서 시작된 회개가 ‘잘못을 보상하되’에까지 이르는 것, 그것이 레5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SWC.레5 심화 2)

 

 

 

SW.7 심화 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SW.7 심화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레4와 레5를 이어 읽으면 매우 중요한 변화가 보입니다. 레4에서 반복되는 말은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고, 레5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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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7 심화 1, ‘왜 가난한 사람에게는 고운 가루 한 줌까지 속죄제가 될 수 있었을까?’

SW.7 심화1. ‘왜 가난한 사람에게는 고운 가루 한 줌까지 속죄제가 될 수 있었을까?’ 레5의 속죄제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 가운데 하나는 제물이 사람의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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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5,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 죄를 인정하는 데서 보상에 이르는 거듭남의 길’

 

1만일 누구든지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증인이 되어 그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의 죄를 져야 할 것이요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2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들 곧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를 만졌으면 부지중이라고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 3만일 부지중에 어떤 사람의 부정에 닿았는데 그 사람의 부정이 어떠한 부정이든지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이요 4만일 누구든지 입술로 맹세하여 악한 일이든지 선한 일이든지 하리라고 함부로 말하면 그 사람이 함부로 말하여 맹세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그에게 허물이 있을 것이니 5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6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7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8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9그 속죄제물의 피를 제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제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10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잘못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11만일 그의 손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12그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기념물로 한 움큼을 가져다가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속죄제라 13제사장이 그가 이 중에서 하나를 범하여 얻은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그 나머지는 소제물 같이 제사장에게 돌릴지니라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5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네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을 양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16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17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18그는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가 부지중에 범죄한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19이는 속건제니 그가 여호와 앞에 참으로 잘못을 저질렀음이니라 (레5)

 

해설

레위기 5장은 4장의 속죄제를 이어가면서 거듭남의 길을 한층 더 실제적인 삶 속으로 끌어옵니다. 레4에서 반복된 핵심 표현은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었습니다. 인간은 먼저 자기 안의 악을 보아야 하며, 말씀의 진리가 그것을 비출 때 비로소 회개가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레5에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깨닫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죄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 후반의 속건제에 이르면 한 걸음이 더 이어집니다. 잘못으로 손상된 것을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레5 전체에는 ‘깨달음 → 자복 → 정결 → 보상 → 사함’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흐름이 있습니다.

 

1절로 4절은 그 회개가 필요한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을 보여 줍니다. 알고 있는 사실을 증언하지 않는 것, 부정한 짐승이나 사람의 부정에 접촉하는 것, 함부로 맹세하는 것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문제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죄는 단지 눈에 띄는 악행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침묵에도, 자기도 모르게 접촉한 부정에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도 영적인 결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1절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거짓말을 직접 하지 않았다고 해서 언제나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알고도 침묵함으로 거짓이 힘을 얻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4절의 함부로 한 맹세 역시 말의 책임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예배 시간의 종교적 상태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보고도 침묵하는지, 무엇에 접촉하는지, 어떤 말을 생각 없이 내뱉는지까지 다룹니다.

 

그런데 2절과 3절에는 레4에서 보았던 ‘부지중’이라는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인간은 어떤 부정에 접촉하고도 그것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이 알지 못한 것을 빌미 삼아 정죄하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의 영향이 있으며, 주님께서 말씀의 빛으로 그것을 보여 주실 때 새로운 책임과 새로운 회개의 가능성이 시작된다는 데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는 것은 정결의 시작입니다. 아직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인간은 그것을 숨기거나 변명할 것인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피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5절의 ‘자복’이 등장합니다. 레4에서는 주로 ‘깨달음’이 강조되었다면 레5에서는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서 잘못된 것을 발견하는 것과 ‘이것은 나의 죄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악을 발견하고도 환경 탓, 다른 사람 탓, 성격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에’, ‘나는 원래 성격이 이렇기 때문에’, ‘상황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복은 그 모든 설명을 넘어 ‘이것은 내가 주님 앞에서 피해야 할 악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죄를 입술로 열거하는 행위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그것을 피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레5의 자복은 단순한 종교적 죄책감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출발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레5는 매우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속죄제물을 드려야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형편이 되는 사람은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마저 힘들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실제 본문 자체가 제물의 경제적 차등을 분명히 규정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대의 복지 규정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줍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정결의 길이 재산에 의해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비둘기의 길이 열리고,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한 줌의 곡식으로 나아갈 길이 열립니다. 누구도 ‘나는 가진 것이 없어서 주님께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비둘기가 등장하는 것도 레1에서 이미 보았던 상응과 연결됩니다. AC.870(창8:8-9)은 비둘기를 거듭나는 사람 안의 신앙의 진리와 선에 연결하며, 제사에서 비둘기가 사용된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AC.1833(창15:10)은 레5:7-8의 속죄제까지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에서 새를 완전히 둘로 나누지 않았던 규정에 영적 의미가 있음을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이 더 낮은 가치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소나 양이 표상하는 선의 상태와 새가 표상하는 진리와 신앙의 상태가 서로 다를 뿐,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실제로 받을 수 있고 응답할 수 있는 상태에서 정결의 길을 여십니다. 거듭남에는 획일적인 한 가지 외적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놀라운 것은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고운 가루를 속죄제물로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레2에서 고운 가루는 소제의 중심이었고, 거기에는 기름과 유향이 함께 놓였습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는 레2:1-2를 직접 인용하면서 고운 가루는 순수한 진리를,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을,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레5의 가난한 사람의 속죄제에서는 같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면서도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라’고 합니다. 본문도 그 이유를 단호하게 ‘이는 속죄제인즉’이라고 밝힙니다. 여기서는 레2의 소제처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기쁨의 예배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드러나 정결되어야 하는 상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 확보한 스베덴보리 원전에서 레5:11의 ‘기름과 유향의 부재’를 각각 직접 해설하는 대목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그 세부를 지나치게 확대하여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같은 고운 가루라도 제사의 문맥이 달라지면 그 전체적인 의미와 쓰임도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레위기의 제사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상응은 사전처럼 ‘고운 가루 = 진리, 기름 = 선, 유향 = 이것’이라고 낱말을 대입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각각의 상응은 전체 계열과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레2에서는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이 더해져 선과 진리의 결합과 예배를 나타냈지만, 레5에서는 같은 고운 가루가 죄로부터의 정결이라는 전혀 다른 제사 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제사의 세세한 규정마다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다고 말한 이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한 가지 재료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과 함께 있고, 무엇이 빠져 있으며, 어떤 제사 안에서 사용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14절부터는 새로운 제사인 ‘속건제’가 시작됩니다. 첫 경우는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한 경우입니다. 흠 없는 숫양을 가져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잘못한 성물에 대해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속죄제와 구별되는 속건제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죄는 인간의 내면에 부정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 관계와 질서에 손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런 경우 회개는 ‘잘못했습니다’라는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가능한 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빼앗은 것이 있으면 돌려주고,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회복하며, 잘못된 관계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면 그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레5의 속건제는 회개가 실제 삶의 회복으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오분의 일을 더하여’라는 규정은 그냥 임의의 벌금이 아닙니다. AC.649(창6:15)는 레5: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보상 후 더하는 ‘오분의 일’을 최소한의 추가분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말씀에서 ‘다섯’이 ‘어떤 것, 조금’을 의미하는 용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계시록 해설’ 548(계9:5)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레5:16을 비롯한 여러 ‘오분의 일’ 규정을 직접 열거하면서, 양과 관련된 문맥에서 ‘오분의 일’이 ‘충분한 만큼’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5의 보상은 단지 원상복구를 계산적으로 해 놓고 끝내는 최소주의적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을 바로잡기에 충분하도록 회복하려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AC의 모든 ‘오분의 일’ 용례를 곧바로 동일한 세부 상응으로 합쳐서는 안 됩니다. 레5:16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보상이 실제적이어야 하며, 거기에 추가분까지 요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회개를 매우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해 놓고 하나님께만 ‘용서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남의 것을 부당하게 취하고도 마음으로 회개했다고 끝낼 수 있을까요? 거짓말로 관계를 손상시켰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진실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모든 잘못을 과거 그대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건제가 보여 주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참된 회개에는 ‘내가 할 수 있는 회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사함은 책임을 없애는 핑계가 아니라 책임을 정직하게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은혜입니다.

 

17절로 19절에서는 다시 ‘부지중’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레4와 레5 전반의 주제를 다시 확인합니다. 인간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악이 선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을 깨닫게 하실 때 정결의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 장 전체를 지나며 그 길은 점점 구체적으로 깊어집니다. ‘몰랐다’에서 ‘깨달았다’로, ‘깨달았다’에서 ‘자복한다’로, ‘자복한다’에서 ‘속죄한다’로, 그리고 실제 손상이 있는 경우에는 ‘보상한다’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죄책감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실제로 자유롭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레5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회개는 진실해질수록 구체적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 안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게 됩니다. 그다음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형편과 상태에 맞게 정결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내 죄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손상시켰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 모든 과정의 끝에 반복되는 말씀은 레4와 같습니다. ‘제사장이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사함은 현실을 외면하는 선언이 아니라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건져 내어 다시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레4가 우리에게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라고 말했다면 레5는 묻습니다. ‘깨달은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레5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그리고 바로잡을 것이 있다면 바로잡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악을 인정하고 피하며, 손상시킨 것을 가능한 만큼 회복하고, 다시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속죄제에서 속건제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회개는 마음속 후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는 마침내 삶의 방향을 바꾸고, 가능한 곳에서는 깨어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SWC.레5 해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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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7 심화 2, ‘왜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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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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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르고 지은 죄도 죄인가? - 무지와 이노센스, 그리고 책임의 문제’

 

SW.7 심화 5, ‘모르고 지은 죄도 죄인가? - 무지와 이노센스, 그리고 책임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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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6, 레4,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 - 속죄제에 감추어진 악의 인식과 정결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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