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를 쉽게 퍼셉션할 수 없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구별되며, 참으로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 그리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이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는 겉 사람에게 속한 그들의 proprium을 원한 결과 너무나 달라져, 그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이러한 퍼셉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 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 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 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 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 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해설

AC.159는 앞에서 다루어 온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결합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사라져 둘이 뒤섞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59는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교리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결합’이 함께 존재하는 질서였습니다.

 

특히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주도권의 근원은 겉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겉 사람이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속 사람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창2 전반에서 계속되어 온 천적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와 모든 능력이 주님께 속한 것임을 퍼셉션했습니다. 이제 같은 질서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의 후손들에게서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은 AC.131 이후 계속된 흐름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그 proprium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C.159는 이러한 변화가 단지 ‘자기 것을 갖고 싶어 했다’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퍼셉션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후손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는 AC.156에서 말한 올바른 결합과 구별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면서도 주님의 질서 안에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후손들은 그 구별 자체를 잃어버리고 둘을 하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참된 결합은 구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를 다시 proprium과 연결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는 이러한 지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서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를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겉 사람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곧 자기 존재 전체의 생명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159는 AC.147-155에서 계속 다루어 온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AC.155의 천사들도 특별히 그 근원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반면 여기의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그 질서를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AC.159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는 열쇠는 ‘구별되어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음’에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다른 것에 속하지만 분리되어 제각기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심으로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으로 기울면 이 질서에 대한 퍼셉션이 흐려지고, 사람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AC.159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단순한 도덕적 타락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생명의 근원과 내적 질서를 퍼셉션하는 방식의 변화이기도 했음을 보여 줍니다. (AC.159)

 

 

 

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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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창2:23, ‘사람 - 지혜롭고 지성 있는 속 사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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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7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했기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 사람들[proprii]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곧 한 집안이나 한 가족에 속하거나 어떤 정도로든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에게, Inasmuch as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ied the own of the external man in which was the internal, therefore in ancient times all those were called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who could be called their own [proprii], and were of one house, or of one family, or in any degree of relationship. Thus Laban said of Jacob,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라고 했습니다. 또 아비멜렉은 그의 외삼촌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 관하여, And Abimelech said of his mother’s brethren, and of the family of the house of his mother’s father,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삿9:2)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Judges 9:2)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도 자신들에 관하여 다윗에게, The tribes of Israel also said of themselves to David,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라고 했습니다.

 

해설

AC.157은 AC.156에서 설명한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라는 표현이 고대에는 실제로 어떤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는지를 성경의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 줍니다. AC.156에서는 이 표현이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7은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고대 사람들이 한 집안이나 한 가족에 속하거나 어떤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이라는 표현입니다. AC.156에서는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하고,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7은 그 둘을 한 문장 안에서 다시 결합하여, 이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속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뼈와 살’은 속 사람과 아무 관계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겉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이 그 안에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같은 ‘뼈와 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원문의 ‘[proprii]’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사용해 온 ‘proprium’과 같은 어근에 속하지만, 현재 문맥에서는 한 사람의 내적인 proprium을 그대로 가리키는 전문용어라기보다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곧 자기 집안과 가족과 친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같은 뜻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다’는 기본적인 의미가 인간의 proprium과 친족을 가리키는 고대 표현 사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는 라반이 야곱에게 한 말입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라고 합니다. 야곱이 라반과 친족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아비멜렉은 외가 친족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골육’임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나아와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세 본문 모두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속해 있는 가까운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세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2:23의 표현이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문자에서도 자기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자기에게 속한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이며, 고대의 언어에서도 같은 방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창2의 표현이 속뜻에서 속 사람과 결합된 겉 사람의 proprium을 나타낸다는 해석은 이러한 고대의 언어 사용과도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 AC.157은 앞의 ‘이름’에 관한 AC.144-145와도 방법상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표현의 속뜻을 제시한 뒤 그것을 임의의 상징 풀이로 끝내지 않고, 고대인들이 실제로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했는지, 그리고 말씀의 다른 곳에서 그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살핍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고대 표현이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속뜻만을 가진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번호가 확증하는 것은 ‘뼈와 살’이 자기에게 속한 사람과 밀접한 결합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AC.157은 앞 번호에서 설명한 ‘여자’에서 ‘아내’로의 변화도 간접적으로 더 이해하게 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이제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AC.157에서는 그 결합이 ‘자기에게 속함’이라는 관계의 언어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은 단순히 두 부분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proprium이 서로 결합되어 하나에게 속한 것으로 관계 맺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결국 AC.157의 핵심은 ‘뼈와 살’이라는 표현 안에 들어 있는 ‘자기에게 속함’과 ‘결합’의 의미입니다. 라반과 야곱, 아비멜렉과 그의 친족, 이스라엘 지파들과 다윗의 사례는 모두 그 의미를 문자적 언어의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2:23의 속뜻에서는 그 관계가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에 적용됩니다. 이렇게 AC.156에서 제시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 AC.157에서는 고대의 친족 언어를 통하여 한 번 더 확증됩니다. (AC.157)

 

 

 

AC.158, 창2:23, ‘사람 - 지혜롭고 지성 있는 속 사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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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6,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속 사람과 결합한 proprium’ (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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