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4강 1부

죄론 문을 열다 : 죄를 행위가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사랑으로 보기

4강은 앞선 강의들과 연결되면서도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교회시대의 이기는 자, 광야의 연단, 영계의 구조와 사후의 상태 등을 비교적 큰 틀에서 살펴보았다면, 이제 강사는 그 모든 문제를 한 사람의 실제 내면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강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죄론’을 시작합니다. 죄론을 공부하는 목적도 명확하게 밝힙니다.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게 나타나는 어두운 마음과 몸의 행실과 생활’을 세밀하게 분별하고, ‘선과 , 빛과 어둠, 영성과 육성, 영적 행실과 육적 행실’을 구별함으로써 철저한 자기 성찰과 회개생활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도 거듭남은 막연하게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 앞에서 물리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죄론을 ‘기본 진리’ 가운데 하나의 독립된 과목 정도로 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과목들을 꿰는 중심축으로 이해합니다. ‘입문’에서 말하는 휴거 성도의 자격도 죄 문제와 관계되고, ‘교회시대 이기는 ’도 죄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된 성도이며, ‘영계론’에서도 사후 심판과 천국·지옥의 문제가 결국 죄와 연결되고, ‘속죄복음’은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를 다루며,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는 죄 문제를 해결한 성도들의 삶이고, ‘성장론’ 역시 죄와 싸우며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앞서 목사님께서 보여 주신 ‘핵심진리’의 목차와 여러 권의 책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여기서 아주 잘 드러납니다. ‘핵심진리’는 여러 교리를 병렬적으로 모아 놓은 책이라기보다, ‘인간이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변화되는가?’라는 하나의 문제를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는 체계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출발점에는 상당한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 죄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몇 가지 외적인 행위를 먼저 떠올립니다. 거짓말, 음란, 탐욕, 미움, 폭력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처음부터 훨씬 깊은 곳을 보려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범죄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을 낳는 ‘죄성’과 ‘정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4강은 단순한 윤리 강의가 아니라 일종의 ‘내면 해부’로 들어갑니다.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 행동을 하게 만든 안의 무엇이 있는가?’를 묻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은 접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단순히 밖으로 나타난 행위가 아닙니다. 행위 이전에 의지가 있고, 의지 안에는 사랑이 있으며, 그 사랑에서 생각과 의도가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주 경건하고 선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 행위의 목적이 자기 영광, 자기 명예, 자기 이익이라면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은 외관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보잘것없는 행동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안에는 천국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외관을 보지만 주님은 그 행위를 낳은 의지와 목적을 보십니다.

 

이번 강의에는 이것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강사는 자기 자신을 예로 들면서 지금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지만, 마음속에 ‘여러분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여러분들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강단도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인데 거기서 ‘자기 자랑’이 나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뿌리를 ‘타락한 정욕’에서 찾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이번 4강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정욕’이라는 말은 이미 성적 욕망이라는 일상적인 의미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칭찬받고 싶다’, ‘내가 일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정욕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번 강의에서 말하는 정욕은 단순히 육체의 몇 가지 본능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려는 광범위한 애정과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바로 여기서 AC를 읽어 온 우리에게는 ‘proprium’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둘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욕심이 많다’ 정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선을 행한다고 여기는 그 ‘자기 ’, 그리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타락한 의지 전체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음식과 성욕과 재물욕을 상당히 절제하고도 proprium에 깊이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과 달리 정결하다’, ‘나는 영적인 사람이다’, ‘나는 진리를 제대로 알고 있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오히려 훨씬 알아보기 어려운 proprium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강단 위의 자기 자신에게까지 칼날을 돌리는 것은 귀하게 볼 부분입니다. 죄론을 남에게 적용하기 시작하면 금세 위험해집니다. ‘ 사람은 탐욕스럽다’, ‘ 목사는 명예욕이 많다’, ‘ 성도는 육적이다’ 하면서 죄론이 타인을 분류하고 판단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는 나에게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론의 칼날이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의 기본 질서와도 잘 맞습니다. 회개는 타인의 악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살피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강의에는 이 문제를 아주 일상적인 자리까지 끌어내리는 재미있는 경험담도 등장합니다. 강사가 평신도 시절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주간 살아 보자고 했다고 합니다.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물 한 모금을 마셔도 ‘하나님께 영광’, 밥 한 숟가락을 먹어도 ‘하나님께 영광’ 하며 감사했는데,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무렵 그릇 밑에서 죽은 바퀴벌레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평안하게 하나님께 감사하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화가 다소 우스워 보이지만 강사가 하려는 이야기는 상당히 진지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먹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환경 하나가 바뀌자 내면의 상태가 즉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평온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만으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내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는지를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내면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시험 이해에서도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험은 인간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 안에 잠재해 있던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평상시에는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자신이 인내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신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뜻과 반대되는 일이 생기고, 인정받지 못하고, 손해를 보고, 자존심이 상하고,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사랑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시험은 고통스럽지만 거듭남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악은 싸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번 강의의 ‘죄론’이 단순한 죄 목록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 다시 분명해집니다. 강사가 원하는 것은 ‘이것은 , 이것은 아님’이라는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 가운데 사는 행실과 어둠 속에 사는 행실을 세밀하게 분별하는 ’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분별하는 눈을 갖자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것을 왜 하고 있는가, 내가 이것을 얻었을 때 왜 기쁜가, 이것을 빼앗겼을 때 왜 이렇게 화가 나는가,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 왜 마음이 무너지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죄론은 추상적인 조직신학이 아니라 영성생활의 실제가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자기 안을 깊이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나친 자기 관찰은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만 시선을 두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 안에 이런 악이 있구나’를 발견한 다음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 삶에서 그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며,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와 싸우는 일조차 proprium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까지 끊었다’, ‘나는 사람보다 정결하다’, ‘나는 정도로 연단받았다’는 또 하나의 자기 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회개의 방향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을 향합니다. 인간은 자기 안의 악을 보지만 악만 바라보고 앉아 있지 않습니다. 악에서 얼굴을 돌려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으로 행합니다. 악을 제거하는 이유도 ‘아무 욕망도 없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빈집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집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4강 첫머리에 흐르는 ‘정결’이라는 주제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결은 인간성의 삭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과 애정과 기쁨을 하나씩 없애어 무감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난 사람은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사랑하고 더욱 깊게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서 기쁨을 얻는지가 달라집니다. 자기만을 위한 기쁨에서 이웃의 선을 기뻐하는 쪽으로, 소유하는 기쁨에서 유용하게 쓰는 기쁨으로, 인정받는 기쁨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쪽으로 사랑의 중심이 이동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4강의 첫 질문인 ‘무엇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가?’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답한다면, 단순히 ‘욕망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기보다 ‘우리 사랑의 질서가 정결해져야 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 왜 사랑하는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 아래 다른 모든 사랑들이 어떤 질서로 놓여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도 이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4강은 이제 본격적인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죄성’과 ‘정욕’을 구별하기 시작하고, 정욕 자체는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기능인데 타락하면서 자기 만족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정욕을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과 여러 욕망으로 세분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부터는 ‘핵심진리’의 인간론과 스베덴보리의 ‘사랑의 질서’가 상당히 가까이 접근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4강 2부에서 별도의 주제로 충분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4강 1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습니다. ‘죄를 알려면 먼저 행동만 보아서는 됩니다. 행동을 낳고 있는 안의 사랑과 목적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탭니다. ‘ 사랑을 발견하는 목적은 자신을 정죄하는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랑의 질서를 주님께서 바로잡으실 있도록 자유 가운데 악을 죄로 알고 물리치는 있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공용복 선생의 ‘죄론’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상당히 깊은 대화를 시작합니다.

 

 

4강 2부

정욕 처음부터 악한 것이 아니다 : 창조된 애정과 타락한 욕망, 그리고 사랑의 질서

4강 1부에서 강사는 죄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서 찾지 않고, 그 행동을 낳는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2부에서는 그 내면을 움직이는 ‘정욕’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강의가 사용하는 ‘정욕’이라는 말의 범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정욕’이라고 하면 성적인 욕망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 강의에서의 정욕은 훨씬 넓습니다. 강사는 그것을 크게 ‘애정’과 ‘욕망’으로 나누고, 애정에는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 등이 있으며, 욕망에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수면욕 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욕’은 인간의 자연적 삶을 움직이는 광범위한 애정과 욕구를 가리키는 하나의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강의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 하나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정욕 자체가 처음부터 죄악된 것은 아니다’라고 봅니다. 인간에게 애정이 있고 음식에 대한 욕구가 있고, 이성에게 끌리는 마음이 있고,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고 인간관계를 이루며 자연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신 기능입니다. 문제는 타락 이후 이 기능들이 본래의 질서를 잃고 ‘자기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이번 4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핵심진리’의 죄론을 모든 자연적 욕구를 악하게 보는 금욕주의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대목에서 강사가 말하는 것은 ‘배고픔이 죄다’, ‘남녀간의 애정이 죄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죄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정상적인 기능이 타락을 통하여 방향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강의가 문제 삼는 것은 욕구의 ‘존재’보다 욕구의 ‘지배’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야 할 인간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능들이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를 만족시키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연적인 애정과 욕구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쉬는 것, 가족을 사랑하는 것, 직업을 갖고 일하는 것, 재산을 소유하는 것,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런 것들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낮은 사랑이 높은 사랑을 섬기면 선한 질서 안에 있지만, 낮은 사랑이 높은 사랑 위로 올라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면 질서가 전도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목적-원인-결과’의 질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가장 안쪽에는 사람이 무엇을 궁극적으로 사랑하는가라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생각과 판단이 ‘원인’이 되며, 그것이 실제 행동이라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돈을 버는 사람이라도 돈을 버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족을 돌보고 맡겨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며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재산을 얻는 것과, 재산 자체를 최고의 선으로 여기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 위에 서려는 것은 외적으로는 모두 ‘돈을 버는 행위’이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명예나 지위를 갖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그 지위를 통하여 더 큰 유용성을 수행하고 공동체를 섬기기 원한다면 명예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용성은 핑계가 되고 ‘내가 높아지는 ’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때 사람은 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존경을 이용하여 자기 proprium을 만족시키게 됩니다. 1부에서 강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던 ‘말씀을 전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핵심진리’가 말하는 ‘타락한 정욕’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질서가 전도된 사랑’ 사이에는 상당히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 기능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보다 정교하게 ‘사랑들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사랑이 있으며, 그 사랑들은 서로 위아래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는 주님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 아래에는 이웃 사랑이 있으며, 그 아래에서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봉사해야 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도 그 자체로 완전히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랑을 섬기는 위치에 있을 때에는 유용한 기능을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사랑’을 무조건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돌보거나 좋아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신앙은 병적인 자기부정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돌보고, 건강을 지키고, 필요한 것을 얻고, 자신의 직업과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자기 사랑의 악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질서 안에 있다면 오히려 필요합니다. 문제는 ‘’가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기 행복과 자기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때 자기 사랑은 지옥적인 사랑으로 전도됩니다.

 

바로 여기서 ‘핵심진리’가 정욕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자기 만족’이라는 표현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만족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선을 행하고 기뻐하는 만족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돕고 기뻐하는 만족도 있으며, 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느끼는 만족도 있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에게도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국의 기쁨은 자연계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만족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무엇에서 만족을 느끼느냐’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결정적입니다.

 

가령 누군가 어려운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회복되는 것을 보며 기뻐합니다. 그 기쁨 자체는 악한 자기 만족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는 선을 행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중심이 되고, 칭찬을 받지 못하면 섭섭하고, 다른 사람이 더 인정받으면 불편해진다면 그때 숨어 있던 다른 사랑이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동일한 선행이지만 내적으로는 두 사랑이 서로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이 두 가지가 아주 깔끔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순수한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만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도 인정받고 싶고, 봉사하면서도 감사받고 싶으며,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남은 이런 혼합된 동기 속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가진 작은 선한 의도를 붙드시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안에 섞여 있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조금씩 드러내어 정결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 동기가 100퍼센트 순수하지 않으니 나는 위선자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른 결론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혼합된 동기를 발견하는 것이 거듭남의 일부입니다. 어제까지는 ‘나는 주님만을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누군가 나를 인정하지 않자 화가 납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사랑 안에 아직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섞여 있구나.’ 이것을 보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 악을 물리치면서 선한 동기가 점점 더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의 강한 자기 성찰은 매우 유익하면서도 동시에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끝없이 파헤쳐 ‘이것도 정욕, 저것도 정욕, 이것도 자기 만족’이라고만 하면 결국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자기 정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자기 성찰의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선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선해질 수 없음을 알게 될수록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실제 삶에서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proprium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부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처음 읽는 독자는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기라는 것은 없어져야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인격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자유롭게 자기 것처럼 행하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때때로 말하는 ‘천적 proprium’, 곧 주님에게서 받은 새로운 own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사랑하고 행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아는 상태입니다. 거듭남은 ‘’가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라, 거짓된 ‘’에서 참된 ‘’로 변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에서 ‘정욕을 죽인다’는 표현도 이러한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애정 자체를 죽인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죽이고, 부부간의 애정을 죽이고, 음식의 맛을 느끼는 기쁨을 없애고, 일을 성취하는 만족을 제거하는 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애정들이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것은 애정 그 자체라기보다 그 애정을 지배하고 있는 자기중심적 질서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우상’이라는 강한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올라가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성경적으로도 매우 직관적입니다. 우상은 반드시 나무나 돌로 만든 신상일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고, 그것을 잃으면 자기 존재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실제로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지배적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더욱 깊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애정이 있지만 그 모든 애정을 조직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깊은 목적으로 삼으면 다른 자연적 사랑들이 그 아래에서 질서를 찾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가장 높은 목적으로 삼으면 종교적 행위조차 그 사랑을 섬길 수 있습니다.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설교도 하고, 헌금도 하면서 그 모든 것을 자기 명예와 자기 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보는 한 방법은 ‘무엇을 잃을 내가 가장 크게 흔들리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돈을 잃을 때인가, 명예를 잃을 때인가, 사람의 인정을 잃을 때인가,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인가, 가족에 대한 내 뜻이 좌절될 때인가. 이런 순간에 평소 감추어져 있던 지배적 사랑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강사가 정욕의 첫 번째 형태로 ‘혈육간의 애정’을 다루기 시작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매우 깊고 자연스러운 사랑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마태복음 10장 37절, 곧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는 말씀을 가져와, 가족 사랑조차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강의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순위입니다.

 

이 점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혈육간의 사랑은 자연적 사랑이지만, 거듭나면서 그것이 영적 사랑으로 높아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 자녀니까’, ‘ 부모니까’, ‘ 가족이니까’ 사랑합니다. 이것은 자연적 혈연애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면서 ‘ 사람이 주님께 속한 영혼이기 때문에’, ‘ 사람의 영원한 선을 원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더해집니다. 그러면 혈연을 넘어서는 체어리티가 그 자연적 사랑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차이는 실제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서 자녀의 잘못을 무조건 감싸는 것은 영적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며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악의 기준을 바꾼다면 혈육간의 애정이 높은 사랑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랑의 자리를 빼앗은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의 영원한 선을 위해 때로는 바로잡아 주고, 부모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양심에 어긋나는 요구에는 따르지 않는다면 자연적 사랑이 영적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모나 자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적인 사랑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을 더욱 참된 사랑으로 만들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면 결국 자녀를 ‘나의 ’으로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를 주님의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그의 영원한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애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애정의 ‘’을 변화시킵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을 받아들이면서 같은 행동 안에도 전혀 다른 생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난 뒤에도 사람은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음식도 즐깁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더 이상 삶의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더 높은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이번 4강의 ‘정욕’이라는 용어를 독자는 특별히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가 사용하는 넓은 의미의 ‘정욕’을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음란한 욕망’과 동일시하면 강의 전체가 크게 왜곡됩니다. 이 강의에서 정욕은 인간의 자연적 애정과 욕망이라는 넓은 영역을 가리키며, 핵심 문제는 그것이 타락하여 ‘자기 만족’과 결합하고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등의 설명 역시 ‘ 욕구가 존재하는 것이 죄인가?’보다 ‘ 욕구가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작은 차이도 점점 보이기 시작합니다. ‘핵심진리’는 정욕을 ‘십자가에 박고’, ‘끊고’, ‘죽이는’ 언어를 강하게 사용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악한 사랑을 물리치는 싸움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전체 구조를 ‘질서의 회복’으로 설명하는 데 훨씬 강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설명을 함께 놓으면 서로를 보완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핵심진리’의 언어는 악과 실제로 싸워야 한다는 긴장을 일깨우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그 싸움의 목적이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 아래 바른 질서로 되돌리는 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4강 2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욕이 있다’는 사실보다 ‘정욕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는 종의 자리에 있으면 그것은 자연적 삶을 풍성하게 하는 기능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인의 자리로 올라가면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깁니다. 바로 그때 자연적인 것이 육적인 것으로 전도되고, 선물로 주어진 것이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부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거듭남은 사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애정과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천국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사랑이 가장 깊은 중심을 차지하고, 그 사랑 아래 이웃 사랑과 자연적 애정들이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는 것이 천국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가 지금 이 땅에서부터 사람의 내면에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이제 강의는 여기서 한층 더 구체적으로 들어갑니다. 혈육간의 애정을 비롯한 여러 정욕이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보다 앞자리를 차지하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과 ‘사람이 떡으로만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을 통하여 식욕과 인간의 육적 요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강한 표현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지점부터는 ‘절제’와 ‘억압’, ‘시험’과 ‘거듭남’을 구별하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그것을 4강 3부에서 충분히 살펴보겠습니다.

 

 

4강 3부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 : 억압이 아니라 주님 아래로 돌아오는

4강은 ‘정욕’을 인간에게 처음부터 악하게 주어진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망이 타락 이후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강의는 자연스럽게 매우 실천적인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타락한 정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반복하여 사용하는 표현이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 ‘끊는다’, ‘죽인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박았느니라’는 말씀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이 표현은 강렬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그 의미를 조금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있는 모든 욕구와 애정을 없애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거듭남은 곧 자기 억압이나 금욕생활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실제로 겨냥하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식욕도 있고, 성욕도 있고, 가족에 대한 애정도 있으며, 친구와 사물에 대한 애정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능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나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말을 이 강의 자체의 앞뒤 맥락에서 읽어도,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한다는 뜻보다는 하나님보다 앞선 자리를 차지한 욕망의 지배를 끝낸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악은 생각으로 ‘악이구나’ 하고 아는 것만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합니다. 그것도 단지 사회적 평판이 나빠질까 봐, 처벌받을까 봐, 건강을 해칠까 봐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주님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강의의 강한 언어에는 단순히 악을 이해하는 데 머물지 말고 실제로 싸우라는 중요한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과 ‘악한 애정 자체가 사라진 ’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 욕망의 뿌리까지 이미 제거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올라오는데도 말씀 때문에 하지 않는 단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 사람 안에서는 실제 전투가 일어납니다. 한쪽에서는 오래된 proprium의 애정이 끌어당기고, 다른 쪽에서는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그것은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은 바로 이런 내적 충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초기에는 ‘억제’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화가 난다고 즉시 화를 쏟아내지 않고, 욕심이 생긴다고 그대로 따라가지 않으며, 음란한 욕망이 일어난다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을 조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계속 이를 악물고 평생 욕망을 눌러 놓는 상태가 천국적인 상태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더 깊은 일을 하십니다. 인간이 악을 반복해서 죄로 알고 물리칠 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악에 대한 애정 자체가 약해지고 반대로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애정이 강해지도록 하십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십자가에 박는다’는 말이 훨씬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예전에는 하고 싶었던 것을 이제는 원하지 않는 ’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쁜 ’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단순한 행동 교정과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행동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문제를 주님의 광야 시험과 연결합니다. 주님께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뒤 주리셨을 때 시험하는 자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것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강의에서는 이것을 식욕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는 예로 읽습니다. 육체는 떡을 요구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떡보다 더 높은 곳, 곧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적용에는 분명한 실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배고픔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주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필요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 필요에 지배당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음식이 삶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성욕은 결혼과 인류의 지속에 관계된 자연적 기능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자기 만족의 대상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전도될 수 있습니다. 휴식은 몸과 마음의 회복을 위해 필요하지만, 쉼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 맡겨진 유용성을 외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재물 역시 생활과 유용성을 위해 필요하지만, 소유 그 자체가 최고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욕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 욕구가 어떤 질서 아래 있느냐’입니다.

 

다만 주님의 광야 시험을 ‘식욕을 절제하신 사건’ 정도로만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시험들은 한 인간이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절제한 사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계로부터 취하신 유전적 인간성을 통하여 지옥들과 싸우셨고, 계속되는 시험과 승리를 통해 그 인간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영화의 과정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험 역시 지옥 전체와의 신적 전투라는 깊은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에도 말씀의 속뜻에서는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강의의 실천적 적용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층위를 구별하면 됩니다. 문자적 차원에서는 ‘육체의 요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해서는 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의 속뜻에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신적 전투와 영화라는 훨씬 깊은 실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전자의 적용을 폐기하기보다 후자의 깊이를 더해 줍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정욕을 ‘죽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강한 의지력을 가진 사람은 금식할 수도 있고, 술을 끊을 수도 있으며, 성적 욕구를 억제할 수도 있고, 돈과 명예를 포기하고 매우 검소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도 상당한 수준의 금욕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 자체가 거듭남의 증거일까요?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신중합니다. 외적인 절제만으로는 사람의 내적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버린 것처럼 보이면서도 ‘나는 세상을 버린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고, 명예를 포기하면서도 ‘나는 명예를 초월한 영적인 사람’이라는 더 은밀한 명예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겸손 자체를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 욕망 하나를 억제했는데 그 에너지가 더 깊은 proprium으로 옮겨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악과 싸우는 방식은 매우 독특한 긴장을 갖습니다. 사람은 악과 싸울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워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주님께서 알아서 제거하시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결단하고, 피하고, 거절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싸움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유와 인플럭스가 함께 작용하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싸우지만 승리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끊어라’, ‘죽여라’, ‘십자가에 박으라’는 언어에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그 말을 ‘ 의지력으로 나를 정결하게 만들라’고 받아들이면 신앙생활은 엄청난 자기 프로젝트가 됩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은 자기 의에 빠지고 실패한 사람은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악을 물리친다’고 이해하면 인간의 책임과 주님의 역사가 동시에 살아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험’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시험은 단순히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약한지를 알게 되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나는 이것쯤 이길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시험이 오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경험합니다. 그때 사람은 proprium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시험의 목적은 강한 ‘자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새로운 사람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AC의 거듭남 이야기와도 아주 깊이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악한 영들과 선한 천사들의 인플럭스 사이에서 실제적인 영적 싸움을 경험한다고 설명합니다. 악한 영들은 인간의 악과 거짓을 자극하고,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해 선과 진리를 흘려보내십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에게는 그것이 ‘ 생각’, ‘ 욕망’, ‘ 갈등’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그 가운데 자유가 보존됩니다. 인간은 어느 쪽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하며, 반복되는 선택을 통해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어 갑니다.

 

그래서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것은 단 한 번의 극적인 결단으로 모든 욕망이 사라지는 사건이라고 보기보다, 긴 거듭남의 과정으로 보는 편이 좋습니다. 오늘 하나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싸우고, 얼마 뒤 그보다 더 깊은 동기를 발견하고 또 싸우며, 어느 정도 정결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더 은밀한 자기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때로 평생 계속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 생애 전체에 걸친 일이며, 그 깊이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여기에서 ‘완전’이나 ‘성화’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공용복 선생의 전통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앞으로 매우 중요한 대화가 필요해집니다. ‘죄성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두 체계 사이의 거리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유전적 악 자체가 마치 어떤 물질처럼 뽑혀 없어져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악은 주님에 의해 억제되고 사람이 그 악에서 돌이켜 선을 사랑하도록 변화됩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도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기 proprium만 놓고 보면 아무 선도 없음을 압니다. 바로 그 인정 때문에 더욱 자유롭게 주님의 선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화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나는 이제 악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있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내적 인식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점입니다. 거듭날수록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 위대한 존재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욱 깊이 압니다. 동시에 그것이 비참함이나 자기혐오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평안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표현의 궁극적인 방향도 조금 달리 들립니다. 그것은 ‘나는 이제 아무 욕망도 느끼지 않는다’는 상태가 아니라 ‘ 이상 욕망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상태입니다. 배고픔은 있지만 음식이 주인은 아닙니다. 재산은 있지만 재물이 주인은 아닙니다. 가족을 깊이 사랑하지만 가족이 주님보다 위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기쁠 수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선을 행하는 이유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자연적 삶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 위에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실천적 의미를 깊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인간성을 없애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지배가 죽는 자리입니다.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요구, 내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요구, 내가 소유해야 한다는 요구가 주님 앞에서 내려놓아지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악을 끊는 것 뒤에는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이 와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핵심진리’의 강한 금욕적 언어를 굳이 약화시킬 필요도 없고, 반대로 문자 그대로 자연적 욕망의 제거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언어를 ‘사랑의 질서 회복’이라는 더 큰 틀 안에 놓아 줍니다. 정욕과 싸우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적 생명 자체와 싸우지는 마십시오. 악을 끊으십시오. 그러나 선한 애정까지 잘라내지는 마십시오. 자기 사랑의 지배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자기 자신을 돌보는 책임까지 버리지는 마십시오. 핵심은 무엇을 없애느냐보다 ‘누가 주인인가’입니다.

 

그래서 4강 3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애정과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지배를 끝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이 싸움은 단순한 억압에서 사랑의 변화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지만 말씀 때문에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나중에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제 강의는 이 원리를 혈육간의 애정과 가족 관계에 더욱 구체적으로 적용하면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사랑하는 ’,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복음서의 매우 강한 말씀을 다룹니다. 그리고 이 대목을 ‘대환란’이라는 공용복 선생의 독특한 종말론적 틀과 연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가 상당히 가까이 가다가 다시 분명하게 갈라지는 중요한 지점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4강 4부에서 충분히 살펴보겠습니다.

 

 

4강 4부

혈육의 사랑보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 가족애의 제거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 그리고 대환란 대한 중요한 구별

앞선 4강 2부와 3부에서 강사는 ‘정욕’이 처음부터 악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연적 애정과 욕망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욕구를 억압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데까지 왔습니다. 이제 강의는 그 원리를 가장 민감한 영역 가운데 하나인 ‘혈육간의 애정’에 적용합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형제자매처럼 인간에게 가장 깊고 자연스러운 사랑도 주님보다 앞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마태복음 10장 37절의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과 누가복음 14장 26절의 매우 강한 말씀을 가져옵니다. 강의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혈육간의 애정 자체가 악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귀한 사랑이라도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영적 질서가 뒤집힌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자칫 오해하기 쉽습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 ‘자녀에게 정을 떼라’, ‘가족을 멀리할수록 영적이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복음의 방향 자체가 이상해집니다. 예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폐기하신 것도 아니고, 자녀와 배우자를 냉정하게 대하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 사랑하는 ’입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주님 사랑과 충돌할 때 무엇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랑의 양을 줄이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사랑의 질서를 묻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매우 섬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혈연에 기초한 사랑은 자연적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창조 질서 안에 있는 매우 중요한 애정입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랑이라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영적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과 ‘ 사람의 선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자연적 혈연애만으로도 가능하지만, 후자에는 체어리티가 들어옵니다. 거듭남은 전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전자 안에 후자가 들어오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녀가 악을 행해도 무조건 감싸 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부모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반드시 선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악을 도와주고 그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결국 그 자녀의 영원한 선을 해친다면, 사랑처럼 보이는 애정 안에 소유욕과 자기애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 자식이니까’라는 이유로 선과 진리의 기준까지 바꾸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가 당장은 싫어하더라도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해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사랑한다면 자연적 혈연애 안으로 영적 사랑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을 더 바르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을 ‘ ’으로 사랑하는 데서 주님께 속한 한 사람으로 사랑하는 데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배우자도, 자녀도 궁극적으로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모두 주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도록 잠시 관계 안에 맡겨진 것입니다. 이 질서가 세워지면 가족에 대한 사랑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자유로워지고, 상대의 진정한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지상에서의 혈연관계 자체가 영원한 관계의 최종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사랑과 상태가 드러나며, 같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결합합니다. 그렇다고 지상의 부모와 자녀, 부부의 사랑이 무의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의 관계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을 돌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요한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혈연 자체가 영원한 결합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혈육간의 애정을 끊는다’는 강의의 표현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선과 진리보다 앞세우는 자기중심적 애착을 끊는다’고 이해하면 훨씬 안전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자연적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사랑을 영적인 것 아래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4강 전체에서 계속 발견되는 중요한 보완입니다. ‘핵심진리’에서는 ‘끊는다’, ‘죽인다’, ‘십자가에 박는다’는 전투적 표현이 강하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를 ‘질서’라는 언어로 보다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부분부터 강의는 가족애의 문제를 종말론과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현재의 ‘교회시대’에는 사람이 자원하여 말씀에 순종하면서 혈육간의 애정과 여러 정욕을 다룰 수 있지만, 앞으로 ‘7년 대환란’, 특히 ‘ 3년 ’과 같은 극심한 환경에서는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유와 가족과 자기 생명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강의는 ‘반강제적으로’ 행실을 닦게 되는 상황을 말하고, 적그리스도의 통치와 대환란을 실제 미래 역사 속에서 일어날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핵심진리’ 사이의 차이가 상당히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작은 용어 차이가 아니라 말씀을 읽는 기본 방식의 차이와 관계됩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실제 역사적 미래 사건의 시간표와 연결하는 종말론적 틀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서 보여 주신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시대 비교표’에서도 이러한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교회시대’, ‘대환란’, ‘천년그리스도왕국’, ‘ 하늘과 ’ 등을 역사적 순서 안에 배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을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특히 ‘마지막 ’, ‘심판’, ‘ 하늘과 ’은 자연계 우주의 물리적 파괴와 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종결, 심판, 그리고 새 교회의 출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전쟁’도 단순히 미래의 군사전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전투를 나타내며, 숫자와 기간 역시 말씀의 상응에 따라 영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7년’이나 ‘3년 ’을 미래 달력의 정확한 기간으로 놓고 종말의 시간표를 구성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존중하면서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진리’가 종말의 환난을 강조하는 목적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은혜의 때에 자기 신앙을 점검하고, 세상과 육에 붙들리지 말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강력한 목회적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면의 영적 핵심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메시지를 미래에 일어날 특정한 7년의 정치·사회적 재난에만 묶어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시험받고, 기존의 종교적 외관이 무너지고,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드러나는 영적 상태로 더 깊이 읽습니다.

 

특히 ‘반강제적으로 정결하게 된다’는 개념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자유’가 본질적이기 때문입니다. 강제된 것은 인간의 내적 생명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외부의 공포 때문에 악을 하지 않는 것과 악 자체를 죄로 미워하여 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감옥에 있기 때문에 범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악한 사랑이 제거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환란 같은 극단적인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지고, 어떤 사람은 절망하며, 어떤 사람은 주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고난 자체에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신비한 자동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 속에서 인간이 자유롭게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주님께서는 환난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섭리 가운데 선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지만, 환난이 사람의 자유를 대신하여 거듭남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시험과 강제를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시험은 매우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자기 자유가 사라진 것처럼 느낄 만큼 내적인 압박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자유가 보존됩니다. 선과 진리를 붙들 것인지, 악과 거짓에 굴복할 것인지의 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지켜 주십니다.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으면 어떤 것도 인간 자신의 생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원하여 정욕을 끊지 않으면 나중에 환난을 통해 강제로 끊게 된다’는 식의 설명은 목회적으로는 강한 경각심을 줄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지금 자유 가운데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과 싸우는 것이 중요하며, 인간이 그것을 계속 거절할수록 자기 안의 악은 더욱 굳어질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환난은 그 사람의 상태를 드러낼 수 있고, 거짓된 의존을 흔들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을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목회적 차이를 낳습니다. 신앙생활의 동기가 ‘앞으로 대환란이 오니까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두려움에만 놓이면, 신앙의 중심이 자칫 미래의 재난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은 ‘오늘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대환란이 내일 오든 오지 않든, 오늘 내 안에서 자기 사랑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세상의 종말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내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종말론도 갑자기 우리의 현재 삶 가까이로 옵니다. ‘마지막 ’는 단순히 먼 미래의 세계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오래된 영적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과도 상응적으로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의지하던 거짓이 무너지고, 내가 감추어 두었던 악이 드러나며, 주님께서 새로운 진리와 선을 세우시는 과정에는 작은 의미의 심판과 새 창조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개인 심리로 환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무엇보다 교회의 보편적 영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형성을 다룹니다. 다만 그 동일한 신적 질서가 개인의 거듭남에도 반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다시 가족애의 문제로 돌아오면 강의가 왜 이 두 주제를 연결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은 ‘내가 정말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를 드러냅니다. 평상시에는 ‘나는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재산과 명예와 안전과 주님의 진리가 충돌하는 순간이 오면 사랑의 질서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대환란의 세부 시간표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강의가 던지는 실존적인 질문은 그대로 남습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가?’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에게 냉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할수록 사람은 가족을 더욱 선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은 중요하지 않다’며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다면, 그것은 높은 사랑이 아니라 종교적 언어를 입은 proprium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주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맡겨진 이웃 가운데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하여 가족을 버린다’는 식의 극단적인 영성을 경계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관계를 충실하게 돌보는 것도 유용성(use)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가족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는 것과 가족에 대한 책임을 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는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의무를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자기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은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위험이 생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강한 말씀도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를 감정적 증오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를 실제로 미워하라는 뜻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과 충돌하는 경우 어떤 자연적 애정도 최종적인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철저한 우선성을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말하면 모든 낮은 사랑이 가장 높은 사랑 아래에서 질서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서 목사님께서 보여 주신 ‘영적 성장에 대한 도표’를 생각하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핵심진리’는 출애굽-광야-가나안이라는 성경의 역사를 인간의 영적 성장과 연결합니다. 그렇다면 가족, 재산, 명예,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이 흔들리는 경험은 일종의 ‘광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평소 의지하던 것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광야의 목적 역시 단순한 박탈이 아닙니다. 옛것을 빼앗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게서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광야 뒤에는 가나안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어야 하고, 악을 버린 자리에는 선한 사랑이 들어와야 합니다.

 

결국 4강에서 반복되는 ‘끊는다’는 언어를 우리는 계속 이 방향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혈육간의 애정을 끊는다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자기중심적 소유욕을 끊는 것입니다. 식욕을 끊는다는 것은 음식을 즐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지배를 끊는 것입니다. 물욕을 끊는다는 것은 재산을 전혀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명예욕을 끊는다는 것은 모든 책임과 직분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결국 끊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의 기능이 아니라 그 기능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놓은 ‘전도된 질서’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proprium이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무엇이든 ‘나의 ’으로 붙잡으려 합니다. ‘ 자녀’, ‘ 재산’, ‘ 명예’, ‘ 사역’, 심지어 ‘ 신앙’, ‘ 성화’, ‘ 영성’까지 붙잡습니다. 거듭남은 이 모든 것을 물리적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자녀도 주님의 것이고, 재산도 주님께서 유용성을 위해 맡기신 것이며, 사역도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내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인식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맡겨진 것을 더 충실하게 돌볼 수 있습니다.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강 4부의 중심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가족보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것으로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서 더욱 참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의 핵심 역시 고난 자체가 사람을 정결하게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가 드러나고 그 자유 가운데 주님을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부분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 상당히 가까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주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연적 애정은 내려와야 한다’는 데서는 깊이 만납니다. 그러나 미래의 문자적 ‘7년 대환란’과 ‘ 3년 ’을 통해 사람이 반강제적으로 정결해진다는 종말론적 틀에서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이 차이를 어느 한쪽을 조롱하거나 재단하는 방식으로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그 표현을 통해 무엇을 경고하려 했는지를 먼저 충분히 듣고, 그 다음 스베덴보리는 같은 문제를 자유와 사랑, 영적 심판과 말씀의 속뜻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다르게 설명하는지를 보여 주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음부터 지키려 했던 ‘스베덴보리의 렌즈’의 역할일 것입니다.

 

그리고 4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혈육간의 애정에서 다른 정욕들, 특히 인간의 육체적 욕망과 자기 만족의 문제로 시선이 이동하면서 ‘죄성’과 ‘정욕’의 관계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동시에 ‘악을 끊는 ’과 ‘성화된 사람이 되는 ’이 과연 같은 것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도 생깁니다. 이 부분은 4강의 죄론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므로, 다음 4강 5부에서 충분히 이어가겠습니다.

 

 

4강 5부

죄성정욕 어떻게 결합하는가 :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을 지배하는 생명의 문제

4강은 이제 한층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강사는 ‘정욕’을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과 식욕·성욕·물욕·명예욕·수면욕 등으로 넓게 설명하면서, 이것들이 본래부터 죄악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연적 삶을 위해 주신 기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어떻게 죄의 통로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는 ‘죄성’과 ‘정욕’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을 이 둘이 결합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이번 4강의 죄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의 설명을 먼저 그대로 따라가 보면, 정욕은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자연적 기능입니다.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식욕이 있고, 인류가 이어지도록 남녀간의 애정과 성적 기능이 있으며, 가족 공동체를 이루도록 혈육간의 애정이 있고, 자연계에서 살아가도록 사물과 소유에 대한 관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강사는 ‘죄성’은 이와 다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죄성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마귀의 죄악된 성질이 인간에게 들어와 하나님께서 주신 정욕과 결합함으로써 그 정욕을 변질시켰다고 봅니다. 그 결과 본래 생명을 보존하고 질서를 이루기 위한 기능이었던 정욕이 ‘자기 만족’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서 반드시 붙들어야 할 좋은 통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된 인간성’과 ‘타락한 인간성’을 구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몸이 악해서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감정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도 아니며,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원하는 능력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몸과 자연적 욕구 자체를 죄악시하면 구원은 자연스럽게 ‘몸에서 벗어나는 ’, ‘감정을 없애는 ’, ‘욕구를 느끼지 않는 ’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관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처음부터 악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창조된 것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자기중심적으로 사용되는 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자연적 차원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며 자연계의 삶도 버려야 할 저급한 실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것은 더 높은 영적인 것을 받아 표현하는 최종적인 그릇입니다. 그래서 거듭남도 자연적인 것을 폐기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순종하도록 질서를 바로잡는 과정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자기만을 위해 독립적으로 살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며, 속사람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실제 삶으로 표현할 때 자연적인 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자리가 됩니다.

 

다만 ‘죄성은 마귀의 것이 인간 안으로 들어와 정욕과 결합한 것이다’라는 설명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조금 다른 언어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어떤 악한 ‘물질’이나 ‘성질’이 마귀에게서 인간 안으로 옮겨 들어온 것처럼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인간 안에 독립적인 실체처럼 주입되는 어떤 물질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영계로부터 끊임없는 인플럭스가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악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흘러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가운데 자유를 가지고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며, 자기가 사랑하여 받아들인 것을 자기 것으로 삼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귀가 안에 죄성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만 말하면 자칫 악의 책임을 외부로 돌릴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악한 인플럭스가 지옥에서 온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결코 없애지 않습니다. 악이 밖에서 유입된다는 것과 내가 그것을 자유 가운데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반복하여 행하면 그 악은 그의 삶에 습관으로 자리 잡고, 마침내 그의 의지와 결합합니다. 그때 그는 ‘악이 들어왔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그것을 받아들여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에게서 선한 것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고, 악한 것 역시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독립적인 생명이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유입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 ’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이 ‘마치 자기 것처럼’ 느끼는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고, 거듭남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자유 안에서 무엇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죄성과 정욕의 결합’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바꾸어 표현한다면, 자연적 애정과 욕구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욕 자체가 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식욕이 절제되지 않고 오직 자기 쾌락만을 목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재물을 얻는 능력이 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유용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우월감과 안전과 지배의 궁극적인 근거가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기쁠 수 있지만, 인정받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면 진리조차 사람의 박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강사가 반복하는 ‘자기 만족’이라는 말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2부에서 살펴보았듯 모든 만족을 악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선을 행한 뒤 느끼는 기쁨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을 때의 기쁨도 있으며, 맡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을 때 느끼는 만족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기쁨이 없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만족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가’입니다.

 

이것은 죄를 분별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고 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기쁩니다. 그 기쁨이 곧 자기중심적인 정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에게 감사하지 않자 갑자기 화가 나고, ‘내가 너에게 얼마나 주었는데’라는 마음이 올라온다면 그 순간 내 선행 안에 섞여 있던 다른 목적 하나가 드러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선만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 사람에게서 인정과 보답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행한 선을 전부 거짓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동기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흔히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과 악이 처음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나는 순수한 선으로 이것을 했다’거나 ‘전부 악한 동기였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경우보다, 선한 애정과 자기 사랑이 섞여 있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혼합된 상태에서 인간을 이끌어 가십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전합니다. 동시에 설교를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자의 사랑까지 가짜였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어느 날 후자의 동기를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설교를 더 칭찬하거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때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때 비로소 ‘, 안에 이것도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바로 그 발견이 회개의 재료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 성찰은 자신에게서 악을 발견하는 작업이지만, 자기 자신을 끝없이 의심하는 작업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것을 좋아하니 정욕인가? 이것을 먹고 기쁘니 육적인가? 가족을 사랑하니 혈육의 정에 빠진 것인가? 칭찬을 받고 기쁘니 모든 사역이 거짓이었는가?’ 하는 식으로 가면 영적 삶은 자유를 잃고 끊임없는 자기검열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그렇게 인간을 자기 내면에 갇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악을 발견하면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운 뒤, 다시 주님과 이웃을 향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성과 정욕을 찾아낸다’는 강의의 요청을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모든 감정의 밑바닥을 끝없이 파헤쳐 숨은 죄를 찾아내라는 뜻이라기보다, 실제 생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악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내가 계속해서 사람을 깎아내리는가,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가, 돈 때문에 진리를 양보하는가, 가족의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가, 성적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인격이 아니라 대상으로 보는가, 분노 때문에 사람을 해치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악을 주님 앞에서 다루는 것이 회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회개를 매우 실제적인 생활의 문제로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내적 악을 한꺼번에 볼 수도 없고, 그것을 모두 자기 힘으로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싸우면 그 싸움을 통하여 더 깊은 내면이 열립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양파 껍질을 한꺼번에 벗기는 것처럼 일시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상태에서 상태로 진행됩니다.

 

이것을 ‘리메인스’와 연결해서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AC에서 우리가 계속 만나게 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인간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들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에 보존해 두신 선과 진리를 시험과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성과 정욕을 발견했다고 해서 ‘ 안에는 악밖에 없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AC의 인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온 것은 악하지만, 주님께서 인간 안에 심고 보존하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새로운 생명을 위한 토대가 됩니다.

 

이 차이는 죄론의 분위기를 크게 바꿉니다. 자기 안의 악을 보는 일은 분명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발견의 배후에는 이미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악을 보여 주시는 것은 정죄하여 버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입니다.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어둠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의 어둠을 더 선명하게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영적으로 퇴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진리의 빛 아래 드러나기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죄성’이라는 말도 조금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죄성을 인간 존재의 본질 그 자체처럼 이해하면 ‘나는 존재 자체가 악하다’는 결론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은 악 그 자체가 아닙니다.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온 존재이지만, 동시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생명을 받고 있으며 거듭날 수 있도록 자유와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악한 존재를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악의 지배에서 건져내어 새로운 의지와 이해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성을 죽인다’는 표현도 인간의 인격이나 자아 자체를 파괴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나에게서 선이 나온다’, ‘ 지혜로 진리를 안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라고 여기는 proprium의 지배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proprium의 지배가 내려갈수록 인간은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더 참된 개성을 갖게 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지만 서로 똑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애정과 유용성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합니다. 주님에게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획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고유한 모습을 더 온전히 드러냅니다.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죄론이 가진 강한 ‘자기부인’의 언어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이해는 매우 흥미롭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은 인간 안의 죄성과 정욕을 철저히 찾아내어 끊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촉구합니다. 그 강점은 신앙을 지식이나 교리적 동의에 머물지 않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 삶이 변해야 하고, 숨은 욕망과 싸워야 하며, 하나님보다 앞선 것이 있다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진지한 성화의 요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그러나 누가 그것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집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죄성을 제거하여 마침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자유 가운데 악을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후자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싸워야 하지만 승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성화는 쉽게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악이 물러난 자리는 반드시 선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탐욕을 끊었는데 체어리티가 생기지 않았다면 아직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음란을 끊었는데 결혼의 거룩함과 상대방을 인격으로 존중하는 사랑이 생기지 않았다면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명예욕을 끊었는데 유용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빈자리만 생긴 것입니다. 혈육에 대한 소유욕을 끊었는데 가족의 영원한 선을 바라는 사랑이 생기지 않았다면 사랑 자체가 메말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악을 제거하는 과정’인 동시에 ‘선이 심어지는 과정’입니다. 둘은 함께 갑니다. 거짓이 제거되는 만큼 진리가 자리를 잡고, 악한 애정이 물러나는 만큼 선한 애정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단순한 금욕과 거듭남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금욕은 ‘하지 않는다’에서 끝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사랑한다’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여기서 4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강사가 죄론을 공부하는 목적을 ‘선과 , 빛과 어둠, 영성과 육성, 영적 행실과 육적 행실을 분별하고 철저히 자기 성찰하여 회개생활을 하기 위한 ’이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론의 목적은 죄에 관한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실제 삶에서 그 질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그 변화의 가장 깊은 곳에는 ‘지배적 사랑’의 변화가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향해 살아갑니다. 생각은 그 사랑을 섬기고, 지식도 그 사랑을 섬기며, 심지어 종교도 그 사랑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이면 성경 지식마저 자기 우월감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적이면 자연적 재산과 능력과 지위까지 이웃의 유용성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궁극적인 질문은 ‘내게 욕망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 생명의 중심에서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성’과 ‘정욕의 결합’이라는 이번 강의의 설명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더 깊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애정들이 proprium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섬기는 것이 타락의 질서이며, 거듭남은 그 자연적 애정들이 다시 속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같은 식욕, 같은 재산, 같은 가족, 같은 직업, 같은 재능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움직이는 중심 사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목적은 인간을 ‘욕망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사람에게도 애정이 있고 열망이 있으며 기쁨이 있습니다. 오히려 지상에서보다 훨씬 강하고 순수합니다. 다만 그들은 자기만을 위해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고, 남보다 높아지기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유용성을 수행하기를 기뻐하며, 자기 영광보다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질서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4강 5부의 중심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죄성의 문제는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망이 자기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자기 만족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게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욕망들을 하나씩 잘라내어 무감각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다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공용복 선생의 ‘죄성과 정욕을 철저히 다루라’는 요청은 약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단순히 식욕이나 성욕처럼 눈에 잘 보이는 욕망 몇 가지를 절제했다고 안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내가 옳아야 한다’,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 ‘ 뜻대로 되어야 한다’, ‘ 신앙이 높아야 한다’는 proprium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연적 욕망을 이기는 것보다 종교적인 모습을 입은 자기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 때로는 훨씬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핵심진리’의 죄론과 AC의 거듭남 이해가 서로에게 가장 유익하게 말을 걸 수 있는 자리일 것입니다. ‘핵심진리’는 우리에게 ‘실제로 싸우고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에 ‘ 싸움에서 누구의 힘을 의지하고 있으며, 무엇이 당신의 새로운 사랑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라고 한 질문을 더합니다. 두 질문을 함께 붙들면 죄론은 단순한 금욕도, 단순한 교리도 아닌 실제 거듭남의 문제가 됩니다.

 

이제 4강은 이러한 죄성과 정욕의 문제를 더욱 실제적인 생활의 영역으로 가져가면서, 인간이 자신의 행실을 어떻게 살피고 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하는지로 나아갑니다. 여기에서는 특히 ‘성화’를 죄를 하나씩 제거하여 어떤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이 사람의 의지와 삶을 점점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 사이의 공통점뿐 아니라 차이까지 가장 섬세하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4강 6부에서는 바로 그 ‘성화와 거듭남’의 문제를 중심으로 4강의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4강 6부

죽은 행실 회개한다는 : 큰일보다 생활 구석구석, 그리고 성화는 사랑의 열매로 드러난다

4강의 마지막 흐름은 지금까지 다루어 온 ‘죄성’과 ‘정욕’을 다시 매우 평범한 일상으로 끌어내립니다. 강사는 죄론을 연구하는 목적을 단지 인간의 타락 구조를 설명하는 데 두지 않습니다. ‘죽은 행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있다’고 말합니다. 죽은 행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철저한 회개생활도, 영적인 성장도 제대로 이루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론은 결국 ‘ 가운데 사는 행실’과 ‘어둠 속에 사는 행실’을 생활 속에서 세밀하게 분별하기 위한 공부라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서 4강 전체의 초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죄성’, ‘정욕’, ‘타락’, ‘마귀’ 같은 상당히 무거운 단어들이 등장했지만, 강의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거대한 악행 몇 가지가 아닙니다. 평범한 하루 가운데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무엇 때문에 화를 내며,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작은 불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입니다. 죄론을 공부하는 이유가 죄에 관한 전문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생활 구석구석의 죽은 행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강사가 들었던 ‘밥그릇 밑의 죽은 바퀴벌레’ 이야기가 그래서 단순한 웃음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고 결심하여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에도 감사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불쾌한 상황 하나가 나타나자 방금 전까지의 평안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강사는 바로 그런 순간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던 내면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평소에는 숨어 있어서 자신도 모르던 것이 환경의 자극을 만나 ‘행실’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내적인 사랑과 애정은 외적 상황을 통해 모습을 드러냅니다.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진행될 때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온유하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과 다른 일이 생기고, 무시당하고, 손해를 보고, 기대가 좌절되고, 몸이 불편해질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proprium의 일부가 드러납니다. 시험이 인간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바퀴벌레를 보고 불쾌해진 것 자체를 곧바로 영적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꼭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가 불결한 것을 싫어하고 위험한 것을 피하려는 자연적 반응 자체는 창조된 기능입니다. 문제는 그 자연적 반응이 어떤 마음과 결합하여 밖으로 나타나느냐입니다. 불편을 느끼는 것과 그 불편 때문에 사람에게 분노를 쏟아붓는 것은 다릅니다. 싫은 맛을 느끼는 것과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것도 다릅니다. 자연적인 감각과 영적인 악을 그대로 동일시하면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반응을 죄로 의심하는 과도한 자기검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강의 후반부는 오히려 이 문제를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가져갑니다. 식사에서 음식이 조금 짜더라도 짜증을 내기보다 물을 타서 먹든지 덜 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그런 작은 상황에서 ‘입으로 상급을 쌓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상급을 보실 때 ‘ 사업을 했는가, 교회를 목회했는가, 많은 헌금을 했는가’ 같은 외적 규모를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했는가’를 보신다고 강조합니다. 큰일을 했든 작은 일을 했든, 유명한 사람이든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든 생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죄와 정욕을 회개하면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이 4강 전체에서 매우 귀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앞에서 ‘죄성 제거’, ‘정욕을 십자가에 박음’, ‘이기는 ’, ‘익은 열매’ 같은 매우 높은 단계의 언어가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언어만 듣다 보면 독자는 자칫 성화를 어떤 특별한 영적 경지, 평범한 사람이 좀처럼 도달할 수 없는 높은 단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강의의 끝으로 갈수록 성화의 현장이 다시 식탁과 말투와 사람 관계와 작은 불편으로 내려옵니다. 큰일보다 작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생활의 종교’를 생각하면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천국적인 삶은 특별한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직업과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맡겨진 일을 정직하고 충실하게 수행하고, 다른 사람의 선을 바라며, 불의와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것이 영적인 삶의 실제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야 거듭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직업을 버리고 종교적 활동만 해야 천국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연계의 수많은 관계와 책임 가운데서 선과 진리를 삶으로 만들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 교회를 목회했는가’보다 ‘순간순간 사랑의 열매를 맺었는가’라는 강사의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의미 있게 들립니다. 외적 결과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 안의 사랑이 자기 명예와 자기 지배를 향하고 있다면 영적인 성질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이 자기 가족과 이웃에게 정직하고 온유하게 대하며, 자기에게 맡겨진 작은 쓰임을 충실히 행했다면 그 삶 안에는 실제 천국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급’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강의는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 ‘ 상급’을 쌓을 수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상급을 외부에서 별도로 지급되는 보상으로만 이해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된 선의 행위 안에는 이미 그 행위의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선에서 기뻐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상태가 천국적 상급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나중에 상을 받는다’는 계산으로 선을 행하면 아직 자기 유익이 목적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 일이 선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웃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행하고 그것 자체에서 기쁨을 얻는다면 선과 상급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천국은 공로점수를 많이 모은 사람이 더 좋은 상품을 받는 곳이 아니라, 각 사람이 사랑하는 선과 쓰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행복을 받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강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의 내용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말과 행함’은 천국에서 상급받지 못하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버리고 주님께서 칭찬하실 은밀한 선행을 하라는 방향으로 강의가 마무리됩니다. 결국 4강의 죄론이 도착하는 곳은 ‘죄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고 있느냐’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귀결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의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을 조금 더 정밀하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죄성의 뿌리가 제거되고, 영적 할례를 받고, 생명과를 먹으며,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어 ‘익은 열매’가 되는 비교적 분명한 완성 단계가 강조됩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성화가 사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 있는 동안 가능하며, 그런 사람들이 ‘처음 익은 열매’, 곧 이기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거듭남이 단지 죽은 뒤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연계의 삶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분명합니다. 인간이 이곳에서 자유와 이성을 가지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의지와 이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실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공용복 선생의 강한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그러나 ‘완성’을 말하는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 안의 모든 유전적 악이 존재론적으로 뿌리째 뽑혀 다시는 아무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악은 주님에 의해 질서 아래 놓이고 억제되며, 인간은 그 악을 사랑하지 않고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에게서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proprium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선하지 않으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계속 흘러온다는 것을 압니다.

 

이 점은 ‘성화’를 자기 소유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안전장치가 됩니다. ‘나는 죄성 문제를 해결했다’, ‘나는 익은 열매다’, ‘나는 생명과를 먹은 사람이다’라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확정적으로 소유하기 시작하면, 역설적으로 그 순간 proprium이 가장 거룩한 옷을 입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명예욕은 버렸지만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명예’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용복 선생의 전승 안에도 이 위험을 완화하는 매우 귀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앞서 확인했듯 ‘훌륭한 성도는 무엇을 많이 가진 사람도,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라 회개를 잘하는 성도’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를 잘 지키지 못하더라도 진리는 낮추지 말고 그대로 증거하되, 자신의 부족함은 회개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높은 ‘완전’의 언어와 함께 반드시 붙들어야 할 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은 ‘나는 이제 회개할 것이 없다’로 가기보다 오히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짐에 따라 자기 안의 더 미세한 동기까지 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간음과 도둑질 같은 큰 악만 죄로 보였는데, 나중에는 말 한마디 안의 자기 자랑, 사람을 은근히 낮추는 마음, 감사받고 싶은 동기,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아집까지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퇴보가 아닙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 햇빛이 희미할 때는 방 안이 깨끗해 보이지만 강한 햇빛이 들어오면 공중의 먼지까지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 더 깊이 들어올수록 자기 proprium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드러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 ‘나는 안에서 악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오히려 ‘악을 빨리 알아차리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께 돌이키는 ’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공용복 선생의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훌륭한 성도’라는 말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꽤 아름답게 만납니다. 완전함을 자기 무결점의 확신으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빛 앞에서 계속 자기 것을 내려놓으며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상태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화’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영혼을 완성하여 하나님께 제출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자신의 질서를 세워 가시는 과정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회개’도 죄책감을 오래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강의는 죄와 정욕을 ‘철저히 회개’하라고 반복하지만, 스베덴보리의 회개에는 반드시 실제 생활의 변화가 포함됩니다. 악을 보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다음 실제 상황에서 그것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화를 내고 나서 오래 자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한 번 말을 삼키는 것이 회개의 실제 열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강의가 말하는 ‘생활 구석구석’과도 정확히 만납니다. 대단한 순교의 순간이 와야만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찾아오는 작은 선택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끊고 싶을 때 기다려 주는 것, 내 공로를 이야기하고 싶을 때 입을 다무는 것,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즉시 변명하지 않는 것, 불편한 사람에게도 필요한 친절을 베푸는 것,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는 것 같은 작은 선택들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사랑과 진리가 실제 자연적 삶 속에 내려옵니다.

 

다른 강의에서 소화 데레사를 예로 들어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사람이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감당했다’고 설명하고, 생활 속의 ‘작은 원수’ 앞에서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오래 참는다’는 말씀을 적용해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한 것도 바로 이 전통의 일관된 방향을 보여 줍니다. 거대한 ‘익은 열매’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작은 일상의 선택을 통해 익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익은 열매’를 특별한 신비 체험이나 높은 영적 상태의 자기 인식으로만 이해하면 평범한 성도는 언제나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은 관계와 작은 말과 작은 책임 안에서 선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열매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천국적 생명은 특별한 장소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엌과 식탁과 사무실과 교회 복도와 전화 한 통 속에서도 자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자연적 차원에까지 선과 진리가 내려와야 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속으로 좋은 생각만 하고 실제 행위가 없다면 거듭남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선은 의지를 통하여 행위가 되어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적인 행위가 영적인 것의 최종적인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연계에 살아 있는 동안의 실제 행위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자연적 삶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그것이 인간의 생명에 고정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행실’의 반대는 단순히 ‘종교적으로 보이는 행실’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는 행실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진리를 통하여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똑같이 설교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식사하고, 일하지만 그 안을 움직이는 생명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기 인정과 자기 유익이 움직이면 외관은 선해도 내적인 성질은 달라지고, 체어리티와 쓰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하면 일상적인 작은 행동 안에도 천국적 생명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4강 전체가 처음과 끝에서 아름다운 원을 이룹니다. 처음에는 ‘죄론을 공부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답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그렇다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답은 거대한 사건보다 ‘생활 구석구석’입니다. 결국 죄론은 지옥의 죄 목록을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라, 내 삶의 작은 자리들에서 어떤 사랑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를 살피는 공부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4강의 강점을 상당히 높이 보고 싶습니다. 죄를 추상적인 ‘원죄’나 법적인 유죄 상태로만 놓아두지 않고, 사람의 애정과 욕망과 행실까지 들어가 실제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문제는 끝났다’는 식으로 삶의 변화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신앙이 실제 성품과 행동에까지 내려와야 한다는 긴장은 매우 귀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여기에 계속 보태는 것은 세 가지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연적 애정과 욕망 자체를 악으로 만들지 말고 그 ‘질서’를 보자는 것입니다. 둘째, 죄와 싸우는 인간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셋째, 성화를 ‘죄가 전혀 없는 자기완성’보다 지배적 사랑이 변화되어 선과 진리가 삶의 기쁨이 되는 거듭남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특히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과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완전히 같은 표현이 아닙니다. 전자는 두려움이나 억압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후자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단지 악을 못 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자유이고 기쁨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완성 방향은 ‘하지 않음’에서 ‘사랑하여 행함’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의 마지막 찬양의 ‘사랑으로 행하라’는 방향과도 잘 만납니다. 결국 오랜 죄론 강의의 마지막 말이 ‘죄를 무서워하라’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라’가 된다는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벗는 목적이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정욕의 지배를 끊는 목적도 더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자기중심적 만족을 내려놓는 목적도 주님과 이웃의 선에서 기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4강 전체를 관통했던 ‘정욕’이라는 말도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정욕은 이 강의의 용법에서 인간의 애정과 욕망을 넓게 가리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모두 악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자연적 기능으로 주어졌지만 타락하여 자기중심적 방향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자연적 애정들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간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애정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 아래 다시 질서 있게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식욕도 쓰임을 섬기고, 재물도 쓰임을 섬기며, 명예도 쓰임을 섬기고, 가족 사랑도 그 사람의 영원한 선을 섬깁니다. 인간의 자연적 삶 전체가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린다’보다 더 깊은 변화일 수 있습니다. 물건을 버리기는 비교적 쉬울 수 있지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은 훨씬 깊은 질서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칭찬을 전혀 듣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는 것보다 칭찬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영광으로 붙잡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자유일 수 있습니다. 가족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가족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 ’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사랑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 사랑에 지배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거듭남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자연계의 삶과 쓰임을 매우 중요하게 보는 이유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자연계 밖으로 꺼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 안에 천국의 질서를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삶도 무위와 정지가 아니라 쓰임의 삶입니다. 사람은 지상에서부터 그 쓰임의 기쁨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4강의 ‘생활 구석구석’이라는 표현은 아주 좋은 끝맺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영계 지식도, 복잡한 종말론도, 성화의 단계도 결국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생명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특별한 지식이 많지 않아도 하루의 작은 관계들 속에서 악을 죄로 피하고 선을 사랑하며 쓰임을 행하는 사람 안에는 이미 천국의 질서가 형성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훌륭한 성도’라는 말도 다시 떠올릴 만합니다. 완전한 사람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 아래 무엇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훌륭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익은 열매’와 함께 읽으면 ‘핵심진리’의 성화론을 지나치게 딱딱한 완전주의로만 읽지 않게 해 주는 중요한 균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한 문장을 더할 수 있겠습니다. ‘회개를 잘한다는 것은 자기 악을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실제로 돌아서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삶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마지막은 죄책감이 아니라 새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이번 4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죄론의 목적은 인간을 죄에 사로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주님의 생명을 막고 있는지를 발견하여 그것을 회개하고,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게 하는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더하면 이렇게 깊어집니다. ‘ 열매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가운데 악을 물리칠 주님께서 그의 의지와 안에 심어 자라게 하시는 선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해서 4강은 6부로 마무리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처음에는 ‘죄란 무엇인가’에서 출발하여 ‘정욕’, ‘죄성’, ‘사랑의 질서’, ‘십자가에 박음’, ‘가족애와 대환란’, ‘성화와 거듭남’을 지나 마지막에는 ‘생활 구석구석의 사랑의 열매’로 돌아왔습니다. 앞서 한 편으로 너무 압축해서 보았을 때보다, 이렇게 여섯 부분으로 따라오니 이 강의가 단순히 ‘욕망을 죽이라’는 금욕 강의가 아니라 ‘무엇이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것이 실제 생활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묻는 꽤 치밀한 죄론이라는 점이 훨씬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이 이 강의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정욕의 제거’보다 ‘사랑의 질서 회복’, ‘인간의 성취’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쪽으로 한층 더 깊게 열어 줄 수 있다는 것도 보입니다.

 

 

 

SY.58,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5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5강 1부‘말씀을 아는 것’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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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53,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3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3강 1부‘영계의 구조와 실상’ - ‘익은 열매’와 사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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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의 성경적 출발점은 사사기 31절의 매우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시려고’ 몇몇 민족을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에서 곧바로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명제를 끌어내고, 그것을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안보 현실, 북한과 공산주의, 주한미군,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대결에 연결합니다. 이어 사사기 전체를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다시 번성’이라는 순환구조로 설명하고, 이것을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에 적용합니다. 설교의 성경적 골격 자체는 분명히 사사기의 중요한 특징 하나를 포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남, 압제당함, 부르짖음, 사사가 일어남, 구원받음, 다시 타락함이라는 반복 구조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사사기 3장의 ‘전쟁을 알게 하심’은 설교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가리킵니다. 말씀에 기록된 전쟁은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전쟁이지만, 말씀의 속뜻에서 전쟁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 곧 시험을 표상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려면 반드시 이 싸움을 통과해야 합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고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악한 욕망이 일어날 때 그것을 거절하고, 거짓된 생각이 밀려올 때 진리를 붙들며,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전쟁을 배우는 ’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본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졌지만, 모든 적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민족들은 그대로 남겨졌습니다. 자연적 의미만 보면 ‘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셨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놀랍도록 정확한 인간의 영적 현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처음 주님께 돌아왔다고 해서 자기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악을 보게 하시고, 싸우게 하시며, 이기게 하십니다.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악은 당분간 잠잠하게 남겨 두십니다. 그것까지 한꺼번에 드러난다면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악을 좋아하셔서 보존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영적 성장을 위해, 시험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난 여호수아 설교에서 살펴본 ‘허용의 섭리’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지만, 악이 사람에게 드러나고 그것과 싸우는 과정까지 섭리 안에 사용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악이 있는지도 모른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은 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숨어 있던 악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사기 31절의 ‘전쟁을 알지 못한 자에게 전쟁을 알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은 외부의 군사전쟁보다 먼저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설교자가 ‘전쟁을 모르면 인간이라고 없다’고 강하게 표현했는데, 그 표현을 영적으로 바꾸어 보면 오히려 깊은 진리가 됩니다. 거듭남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 싸움을 알게 됩니다. 자기애와 이웃 사랑이 충돌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가 충돌하며, 탐욕과 정직이 충돌하고, 자기 지혜를 믿고 싶은 마음과 주님의 지혜를 의지해야 한다는 신앙이 충돌합니다. 이 싸움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악을 아직 심각하게 대면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전쟁’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다만 그 적은 먼저 북한이나 공산주의자나 특정 정당의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번 설교와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중요한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설교자는 성경의 ‘가나안 전쟁’을 거의 즉시 대한민국의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옮겨 갑니다. 6·25전쟁, 북한, 주한미군, 특정 대통령과 정치세력, 광화문 집회가 계속해서 사사기의 ‘전쟁’과 겹쳐집니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말씀은 밖의 적을 찾아내기 전에 내 안의 적을 찾아내도록 사람을 이끕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블레셋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오늘날의 어떤 정치세력이나 종교집단을 지목하기 시작하면, 말씀은 쉽게 타인을 공격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 안의 블레셋은 무엇인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말씀은 나를 회개시키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이 일관되게 후자를 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주님의 나라와 지옥 사이의 싸움입니다.

 

설교자가 제시한 ‘사사기의 사이클’도 이 관점에서 읽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설교에서는 ‘번성하면 부패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잘되고 형편이 좋아지면 교만해지고, 심지어 ‘여자 하나 가지고 살고 바람을 피게 된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예도 듭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께서 ‘매를 때리시고’, 징계를 받은 사람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사사를 보내 회복시키며, 다시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반복되는 타락을 아주 쉽게 기억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실제 영적 사이클은 단순한 ‘경제적 번성도덕적 부패재난기도경제적 회복’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보면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김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거짓과 악에 사로잡힘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없음을 깨달음주님께 도움을 구함진리를 통한 구원새로운 영적 자유’의 순환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번성’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번성이 언제나 돈이 많아지고 사업이 잘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번성과 증가는 선과 진리가 많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이웃을 섬기는 기쁨이 늘어나며, 말씀을 이해하는 빛이 밝아지는 것이 진정한 번성입니다. 그러므로 ‘번성하는 상태에 계속 있으라’는 설교자의 권면을 영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대단히 좋은 권면이 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말고 계속 주님께 돌려드리라’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타락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평안해지면 여호와를 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생활에서도 반복됩니다. 시험 가운데 있을 때는 간절히 기도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자기 힘으로 해결한 것처럼 느낍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선을 자기 성품과 능력으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proprium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마침내 자기가 선하고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지닙니다.

 

따라서 ‘번성하면 부패한다’는 설교자의 관찰은 영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번성 그 자체가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풍성함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 ’으로 돌리는 순간입니다. 천사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과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주 가진 것이 적은 사람도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며 교만하면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패의 원인은 풍요가 아니라 appropriation, 곧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어 ‘부패하면 하나님이 때리신다’, ‘뒤지도록 맞는다’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성경의 문자에는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가 그렇게 표현되는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분노하시거나 사람을 해치기 위해 매를 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며 자비 그 자체이십니다. 사람이 악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 악 자체가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가능한 한 사람을 구원 쪽으로 돌리십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때리셨다’고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결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게 압제당하는 것도 같은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욕망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욕망이 나를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화를 필요할 때만 낸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분노가 나를 끌고 갑니다. 처음에는 돈을 필요에 따라 추구하지만 나중에는 탐욕이 모든 판단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이방 민족의 압제’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적에게 넘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악이 마침내 그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스라엘은 ‘부르짖습니다’. 설교자가 ‘부르짖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사기의 문자적 흐름을 잘 포착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의 한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주님을 진실하게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주님의 도움을 입술로만 구할 수 있지만, 자신의 무능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면 기도가 깊어집니다. 이 점에서 설교자가 ‘부르짖으라’고 반복하는 데는 목회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큰소리로 주여를 외치면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음량에 있지 않습니다. 통성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고, 아무 소리 없는 묵상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의지의 방향입니다. 말없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한 사람의 마음이 수천 명의 함성보다 더 깊은 기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크게 ‘주여’를 외쳐도 자기 악을 그대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 외침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또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다’는 표현도 내적으로는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향한 주님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입니다. 변하는 것은 사람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등지고 있을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심판처럼 느껴지고, 사람이 돌아서 주님을 향하면 같은 사랑이 자비와 평화로 경험됩니다. 태양이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늘에서 햇빛 쪽으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었다’기보다 사람이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더 깊은 설명입니다.

 

사사기의 다음 단계는 ‘사사를 보내 주심’입니다. 설교에서는 이것을 ‘오늘날의 선지자’를 보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하고, 선지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선지자의 본질은 미래 사건을 예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선지자가 ‘진리의 가르침’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사사는 그 진리에 따라 악과 거짓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주님의 구원 능력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사사를 보내신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카리스마적 지도자 한 사람을 보내신다는 뜻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말씀 한 구절을 통해서도, 양심을 통해서도, 한 사람의 조용한 충고를 통해서도, 때로는 실패와 고난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구원의 진리를 보내십니다. 핵심은 그 사람을 특정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설교를 해설할 때 특별히 중요합니다. 예배 전 기도에서부터 특정 목회자를 ‘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특정 날짜의 광화문 집회와 정치적 승리를 하나님의 뜻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어 설교 중에도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신다는 말과 현재의 정치운동 지도력이 서로 가까이 놓입니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 회중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성경의 사사·선지자오늘의 특정 지도자’라는 연결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구약의 사사나 선지자의 표상을 오늘날 특정 개인에게 직접 이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씀의 표상은 먼저 주님 자신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인간 지도자는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자기애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해도 말씀의 ‘사사’나 ‘선지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선지자는 앞으로 것을 미리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한 부분 역시 수정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참된 예언은 미래의 정치 사건을 맞히는 능력보다 훨씬 깊습니다. 말씀은 ‘악을 계속 사랑하면 결국 악의 종이 된다’, ‘회개하면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자기 사랑의 마지막은 지옥이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마지막은 천국이다’라는 영원한 미래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말씀의 예언적 성격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본문 자체가 놀랍도록 선명하게 ‘영적 전쟁’을 말할 수 있는 본문인데도, 그 전쟁이 거의 전부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밖을 향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사사기 31절은 ‘전쟁을 알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깊이 파고들었다면 ‘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이 필요한가’, ‘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악한 성향을 한꺼번에 없애주시지 않는가’, ‘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반복해서 같은 악과 싸우는가’, ‘시험 가운데 천사들과 악한 영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람의 자유는 어떻게 보존되는가’ 같은 매우 깊은 영적 주제들이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에서는 이 놀라운 내적 전쟁이 6·25전쟁과 북한, 주한미군, 특정 정치인, 광화문 집회로 빠르게 치환됩니다. 정치와 국가 문제를 설교에서 전혀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의와 자유, 국가의 평화와 국민의 안전 역시 이웃 사랑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영적 전쟁을 특정 정치세력과의 전쟁으로 동일시하는 순간,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편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반대편은 가나안 족속이나 마귀의 세력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 안의 무엇이 주님을 거역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저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 안의 간첩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자기애와 탐욕과 거짓과 교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외부의 실제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면 말씀은 자기 성찰의 거울에서 정치적 무기로 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설교에서는 정치적 상대를 향한 매우 강한 욕설과 모욕적 표현이 반복됩니다. 특정 인물을 향하여 ‘개자식’, ‘늙은 새끼’, ‘죽은 ’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일부 정치인이나 공직자에게 극형이 필요하다는 발언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을 단지 설교자의 독특한 화법이나 정치적 열정으로만 넘기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설교의 본문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과 싸우면서 내가 그 악과 같은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과 싸우다가 증오에 빠지고, 불의와 싸우다가 모욕과 복수를 사랑하게 된다면, 외적으로는 적과 싸우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그 적이 상징하는 악에게 패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천국의 선은 악에 단호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거짓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데서 기쁨을 얻지 않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매우 엄하게 책망하셨지만 그들의 영원한 멸망을 즐거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전투성’은 증오가 강한 상태가 아니라, 악을 향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

 

설교 중 ‘성경 전체가 정치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도 위대한 정치가이고 모세도 정치가’라는 주장은 설교자의 정치신학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물론 성경에는 왕과 국가, 전쟁과 법, 사회질서와 권력이 많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중심이 정치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본질을 지나치게 외적 차원으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중심은 주님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국가와 왕, 전쟁과 평화도 결국 이 영적 실재를 표상하기 때문에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모세는 말씀 자체 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율법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단순한 정치 지도자로 읽히지 않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과 그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되어 가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이 인물들을 곧바로 현대 정치 지도자의 모델로 읽는 것은 말씀의 깊이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설교 후반에 다시 등장하는 ‘천년왕국’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전천년·후천년·무천년설을 설명하면서 천년왕국을 매우 강조합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말했듯, ‘천년왕국을 죽은 뒤에만 기다리지 말고 땅에서부터 체험해야 한다’는 직관 자체에는 중요한 영적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 ’을 문자적인 천 년짜리 정치 체제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하고 충만한 어떤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어느 정당이 집권하거나 어떤 국가 체제가 세워졌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이 왕이 되실 때 시작됩니다. 자기애가 내려가고 주님 사랑이 올라오며,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다스리며, 복수하고 싶은 욕망보다 용서와 정의가 우위를 차지할 때 그 사람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가 교회의 내적 모습이며, 궁극적으로 천국의 질서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반복되는 ‘회복’과 ‘번성’도 이 관점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나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나를 번성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인도합니다. 이것이 건강과 물질, 사회적 성공의 회복을 뜻한다면 신앙의 범위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회복은 인간 안에 잃어버린 천국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 거짓말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이 진실을 사랑하게 되는 것, 자기 이익밖에 모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사기의 사이클을 끝내는 길입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사이클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또 타락하고, 부르짖고 또 구원받고, 다시 타락합니다. 사사기 마지막에 가면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결국 인간 사사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구원이 필요합니다. 말씀 전체의 흐름으로 보면 이 반복은 궁극적으로 참된 구원자이신 주님을 기다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거듭남의 과정과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한 번의 회개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더 깊은 악이 드러나고 또 싸웁니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원을 무한히 도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순종한다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험마다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외적인 행동의 악과 싸우고, 다음에는 생각의 거짓과 싸우며, 더 나아가 그 밑에 있는 자기애와 지배욕의 뿌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사이클은 절망의 사이클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주님을 잊어버리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사람이 아무리 반복해서 넘어져도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는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다는 자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설교자가 반복해서 강조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메시지는 소중한 복음적 요소를 지닙니다. 다만 그것을 ‘큰소리로 기도하면 원하는 상황을 바꾸어 주신다’는 차원보다,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 악의 속박에서 건져 주신다’는 차원으로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의 찬송과 통성기도에서도 상당한 생명력은 느껴집니다. 설교자가 ‘찬송은 곡조 있는 설교’라고 표현한 것도 기억할 만합니다. 실제로 찬송은 진리를 정서와 결합시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음악과 노래는 정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가 단지 머리에만 있을 때보다 사랑과 정서에 결합될 때 사람의 생명에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이런 면에서 이 예배가 지적인 강의에 머물지 않고 회중의 정서 전체를 움직이려 한다는 점은 분명한 특징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분별이 필요합니다. 찬송과 통성기도로 마음이 강하게 고양된 직후 특정 정치적 주장과 집단행동이 하나님의 명령처럼 제시되면, 회중은 자신이 느끼는 종교적 감동과 특정 정치적 판단을 구분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강한 정서적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반드시 승리한다’는 표현이 반복될수록 그 위험은 커집니다. 영적 감동이 있다고 해서 그 감동과 함께 제시된 모든 인간적 판단까지 신적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계속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자유와 이성의 보존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믿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이성을 압도하고 자유를 빼앗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여 삶으로 선택할 때 그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 역시 회중에게 강한 감동을 주면서 동시에 각자가 말씀 앞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분별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끝으로 이번 설교 전체에서 가장 아깝게 느껴지는 것은 설교자가 잡은 본문의 핵심 자체는 상당히 좋았다는 점입니다. ‘사사기는 사이클로 되어 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 ‘번성 가운데 부패하지 말아야 한다’, ‘징계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시고 회복하신다’는 각각의 명제에는 깊이 발전시킬 수 있는 영적 씨앗들이 들어 있습니다. 자막에서도 설교자는 이 순환을 반복해서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번성’으로 요약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단계 더 안으로 들어가면, 이 사이클의 무대가 먼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전쟁은 내 안의 선과 악의 전쟁이며, 가나안 족속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악과 거짓이고, 압제는 내가 사랑한 악이 도리어 나를 지배하는 상태이며, 부르짖음은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회개이고, 사사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진리이며, 회복은 주님께서 내 의지와 이해성을 다시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사기는 정치적 전투의 교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책이 됩니다. 왜냐하면 적을 밖에서 찾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가 문제다’, ‘ 정치인이 문제다’, ‘ 세력이 문제다’라고 말하기 전에, 말씀은 ‘ 안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족속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다른 사람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과장은 용납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치인의 교만은 비난하면서 자신의 영적 교만은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반대편 사람을 증오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사사기 3장이 가르치는 가장 깊은 ‘전쟁을 아는 ’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는 사람은 적을 향해 가장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입니다. 강한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외부의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믿고 자신은 선과 진리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지난 여호수아 설교가 ‘땅을 분배받는 ’이었다면 이번 사사기 설교는 그 땅을 받은 뒤 ‘ 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거듭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더 깊은 싸움이 시작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계속 주님의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자기 것으로 취하여 우상을 섬길 것인가 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새롭게 만든다면,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겠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과 악이 싸우는 영적 전쟁을 반드시 알게 되며, 싸움에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사이클’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릴 사람은 악의 지배 아래 들어가지만,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는 진리를 보내어 그를 다시 영적 자유와 선의 삶으로 회복시키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사기의 전쟁을 오늘 우리의 전쟁으로 읽는 가장 내적인 길입니다.

 

 

 

SY.69, 전광훈 목사, 20260816,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1부, ‘하나님의 나라’와 ‘대한민국’이 하나로 겹쳐질 때이 긴 예배와 설교를 처음부터 따라가다 보면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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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8, 전광훈 목사, 20260802,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이 점령한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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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3강 1부

요한계시록 6장의 심판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번 3강은 찬송 ‘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로 문을 엽니다. 강사는 ‘오직 예수님 분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이어지는 기도에서도 ‘진리의 영으로 저희들을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전개되는 복잡한 종말론적 도식보다 먼저 붙들어야 할 이 강의의 영적 중심입니다. 강사가 무엇보다 주님을 삶의 가장 귀한 분으로 모시고자 하며, 말씀을 통해 자신과 청중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출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중심은 어떤 종말 시간표를 정확하게 아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해석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견되더라도, 이 강의의 첫 고백 자체는 소중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앞서 살펴본 요한계시록 4장을 ‘총사령부’, 5장을 어린양이신 ‘총사령관’이 등장하는 장으로 정리한 뒤, 6장을 ‘무엇으로 심판하실 것인가’, 곧 ‘심판의 재료’를 보여 주는 장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일곱 인을 떼는 과정 자체를 7년 대환란으로 보지 않고, 대환란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봅니다. 첫째부터 넷째 인에서는 백마·홍마·흑마·청황마라는 네 가지 심판의 재료가 제시되고, 다섯째 인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채워지며, 여섯째 인에서는 천재지변 가운데 고통받는 인류가 나타나고, 일곱째 인이 떼어질 때 비로소 일곱 나팔과 함께 본격적인 7년 대환란이 시작된다는 구조입니다. 강사는 이를 스가랴 6장의 네 종류의 말과 요한계시록 7장의 ‘사방의 바람’까지 서로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는 강사 자신의 계시록 독법입니다. 이 해석 안에는 주목할 만한 장점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한 절씩 고립시켜 읽지 않고, 4장부터 8장까지의 구조와 스가랴의 환상을 함께 놓고 성경 전체의 연결을 찾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 ‘바람’, ‘’, ‘나팔’과 같은 이미지가 서로 무관한 장식물이 아니라 어떤 영적 의미를 전달한다고 보는 태도는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도 일정 부분 접점을 가집니다. 성경의 환상적 이미지에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찾으려면 다른 말씀과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강사의 해석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갑니다. 차이는 ‘상징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상징을 인정합니다. 진짜 차이는 ‘ 상징이 무엇과 상응하는가’에 있습니다. 강사는 백마·홍마·흑마·청황마를 앞으로 자연계에서 일어날 공의의 심판·전쟁·기근·사망이라는 사건들과 연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말들을 인간의 영적 상태, 더 정확히는 교회 안에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문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부터 같은 요한계시록 6장을 바라보면서도 두 해석은 전혀 다른 풍경을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은 말씀에 대한 이해, 곧 진리를 이해하는 지적 능력과 상응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6장에 갑자기 만들어진 해석 원리가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서 말이 지닌 상응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19장의 백마도 같은 원리로 풉니다.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자가 있으니’라는 환상은 단순히 미래 어느 날 주님께서 실제 흰색 말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광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의 속뜻을 열어 주시고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를 회복시키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백마’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이며, 그 위에 타신 분은 말씀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이 점에서 흥미롭게도 강사와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6장의 백마 탄 자를 ‘사탄’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서는 만납니다. 강사는 백마 탄 자를 공의로 심판하시는 예수님과 연결하면서, 이를 사탄으로 해석하는 일부 종말론적 해석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백마를 악한 존재의 상징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이유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흰색은 진리를 나타내고, 말은 말씀의 이해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째 인을 뗄 때 나타나는 백마는 ‘전쟁을 시작하는 어떤 존재’라기보다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은 각각 따로 떨어진 네 사건이라기보다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쇠퇴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이번 3강 1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스베덴보리의 렌즈’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합니다. 이것이 백마입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선과 사랑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붉은 말입니다. 이어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빈곤해지고 왜곡됩니다. 이것이 검은 말입니다. 마침내 선도 진리도 사라져 영적 생명 자체가 죽은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이 청황색 말입니다. 그러므로 백마 → 홍마 → 흑마 → 청황마의 진행은 외부 세계에서 ‘공의 전쟁 기근 죽음’이 차례로 일어나는 시간표라기보다, 교회가 말씀의 참된 이해로부터 점차 사랑과 진리를 잃어 마침내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둘째 인의 ‘붉은 ’도 훨씬 내면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본문은 붉은 말을 탄 자가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한다고 말합니다. 강사는 이를 실제 전쟁으로 읽고, 나아가 미래의 세계적 전쟁 및 아마겟돈과 연결합니다. 물론 전쟁은 인류의 악이 자연계에 나타나는 참혹한 결과이므로 영적 의미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전쟁’은 더 근본적으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을 나타냅니다. 특히 ‘땅에서 화평을 제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사라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같은 성경을 가지고도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진리는 상대를 살리는 빛이 아니라 상대를 정죄하는 칼이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백마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사랑이 떠나면 신앙의 언어는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 안에서 ‘화평’이 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면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확증과 정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붉은 말은 단지 먼 미래의 세계대전을 예언하는 그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영적 사건입니다.

 

셋째 인을 떼었을 때 나타나는 ‘검은 ’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사는 검은색을 기근과 연결하고, ‘ 데나리온에 되요 데나리온에 보리 ’라는 말씀을 실제적인 흉년과 식량 부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으로 보면 여기서 기근은 단순히 먹을 양식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핍입니다. 성경에서 ‘먹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이며, ‘양식’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영적인 기근은 성경책이 없어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은 여전히 있고 설교도 계속되고 신학도 풍성한데, 그 말씀을 통해 실제로 사랑과 선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를 돌아볼 때 매우 엄중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책이 넘쳐나고 설교와 강의가 인터넷에 가득하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 풍년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악을 보고 회개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실제 삶을 고쳐 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보는 풍성하면서도 영적으로는 기근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경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알고 있는 진리 하나를 붙들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보다 ‘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삶이 되었는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계시록 6장을 ‘심판의 재료를 보여 주는 ’이라고 표현한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달리 받아들이면 뜻밖에도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재료’가 자연계의 전쟁·기근·천재지변이라기보다, 심판 때 드러나는 인간과 교회의 내적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외부에서 갑자기 어떤 재앙을 던져 사람을 파괴하시는 행위가 아니라, 그동안 사람 안에 형성되어 온 것이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사랑했는지,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였는지,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살았는지가 드러나는 것이 심판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인을 떼신다’는 표현도 중요해집니다. 봉인된 것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인이 떼어지면 감추어져 있던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린양께서 인을 떼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파괴하기 위한 재앙을 하나씩 방출하신다는 뜻이라기보다, 말씀과 교회의 내적 상태를 밝히 드러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 앞에서는 감추어진 것이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좋아 보였지만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 진리를 말했지만 그 진리를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했는지, 혹은 부족한 지식 가운데서도 선을 사랑하며 살았는지가 드러납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심판은 ‘폭로’이면서 동시에 ‘분별’입니다.

 

이 지점은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말씀대로 실제로 살아야 한다’는 수도적 영성과도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받은 말씀을 삶에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과 상당히 가까이 다가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말씀을 삶으로 옮기는 과정 자체가 인간 안의 영적 질서를 변화시키는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를 반복할 때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점차 질서 안에 놓으십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6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제3차 세계대전은 언제 일어나는가?’, ‘7년 대환란은 언제 시작되는가?’, ‘첫째 인은 이미 떼어졌는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지금 안의 말은 무슨 색인가?’입니다. 나는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진리를 사랑과 결합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과의 화평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혹은 진리를 많이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영적인 기근 가운데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자기 밖의 미래 사건으로만 돌려놓으면 우리는 구경꾼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비추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요한계시록은 갑자기 현재의 말씀이 됩니다.

 

또 하나 조심스럽게 짚어야 할 부분은 강사가 말하는 ‘7년 대환란은 모든 인류의 죄를 없이 하시는 7년간의 번제 기간’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표현은 강사의 종말론 체계 안에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죄는 외부의 환난을 겪는다고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고난 자체가 악을 제거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선해지고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 속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며, 그 악을 실제 삶에서 피하려 하는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인간의 악을 강제로 뽑아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진리를 보여 주시고 악을 보게 하시며, 사람이 자유롭게 그 악을 거부하도록 끊임없이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목적을 파괴 그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신적 질서의 회복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옥에 보내기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천국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끝내 사랑하는 악을 놓지 않으면, 사후에는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가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결국 사람이 평생 무엇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았는지가 완전히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강의 중에는 또 ‘성도들의 기도의 분량이 차야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행하신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강사는 요한계시록 8장의 향과 성도들의 기도를 근거로 이것을 심판이 시작되는 조건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도 문자적으로 ‘기도가 일정량 누적되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시작하신다’고 이해하기보다는, 기도가 나타내는 영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향은 예배와 기도, 특별히 주님께 올라가는 영적 애정과 상응합니다. 따라서 향연이 올라간다는 것은 단순한 기도 횟수의 축적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 선과 진리를 향한 애정이 주님께 향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읽으면 요한계시록의 장면은 훨씬 내면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결국 3강 1부에서 강사는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을 앞으로 임할 심판의 네 가지 ‘바람’, 곧 공의·전쟁·기근·사망의 심판으로 읽으며 이를 7년 대환란 직전의 준비 과정에 배치합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같은 네 말을 교회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상태의 변화로 읽습니다. 백마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 붉은 말은 선과 사랑의 상실, 검은 말은 진리의 황폐, 청황색 말은 마침내 선과 진리가 모두 사라진 영적 죽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두 해석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렸다’는 식으로만 다루기보다, 강사가 외적 역사 속에서 발견하려 한 심판의 질서를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내면과 교회의 영적 역사 속으로 더 깊이 가져간다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차이가 이번 사경회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이유를 가장 잘 보여 줍니다. 강사는 우리에게 ‘다가올 환난에 준비되어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질문을 없애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가져옵니다. ‘ 환난이 오기 전에 준비되어 있는가?’를 넘어 ‘오늘 주님께서 안의 인을 떼어 내면을 보여 주신다면 무엇이 드러나겠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내고 있는가, 신앙을 고백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렇게 보면 요한계시록의 심판은 먼 미래의 공포스러운 사건만이 아닙니다. 말씀의 빛이 오늘 나에게 임하여 내 속의 거짓과 악을 드러내고, 그것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매일의 작은 심판이 먼저 있습니다. 이 심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지막 심판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밝히시는 것은 멸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며, 드러내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3강 첫머리에서 함께 부른 찬송의 고백이 오히려 이 모든 복잡한 종말론을 꿰뚫는 가장 단순하고 깊은 결론이 됩니다. ‘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 사람이 실제로 이 고백대로 살아간다면, 요한계시록이 궁극적으로 준비시키려는 사람도 바로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3강 2부

뿌리는 비유와 가지 마음밭

이번 3강 2부에서는 강사가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배운 ‘핵심진리’를 종합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를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로 읽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서론,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가라지 비유를 본론, 그물 비유를 결론처럼 배열하고, 이것이 앞으로 공부할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과 666을 이해하는 준비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이 사경회의 독특한 종말론적 체계가 이미 상당히 들어와 있습니다. 특히 ‘14만 4천’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성장한 성도들로, ‘666’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어두운 영혼들과 연결하려는 방향이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가운데 먼저 귀하게 받아들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사가 성경 공부의 목적을 단순한 지식 습득에 두지 않고 ‘영적인 목표’, ‘신앙의 방향’, ‘영적 가치관’을 분명히 하는 데 둔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무엇을 추구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세상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영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지배적 사랑, 곧 생명의 중심을 이루는 사랑에 따라 형성되며, 사후에도 바로 그 사랑이 그 사람의 영적 방향을 결정합니다.

 

다만 마태복음 13장을 곧바로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 666’을 해석하기 위한 일종의 암호표로 사용하는 부분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요한계시록 사이에 깊은 내적 연결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연결은 ‘겨자씨 비유 = 14만 4천의 성장’, ‘누룩 비유 = 14만 4천의 행실’, ‘가라지 = 666’과 같이 인물 집단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방식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영적 상태,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따라서 어떤 비유를 특정 종말 집단의 정체를 밝히는 열쇠로 제한하면, 오히려 그 비유가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보편적인 영적 의미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부분의 핵심인 ‘ 뿌리는 비유’로 들어오면 오히려 강사의 설명과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가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강사는 씨를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 씨가 떨어지는 밭을 ‘사람의 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길가·돌밭·가시밭·좋은 밭이라는 네 상태를 사람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마음 상태로 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비유의 문자적 의미에 충실한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라는 표현 자체가 매우 깊습니다. 씨에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땅에 받아들여져야 하고, 뿌리를 내려야 하며, 자라고 마침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듣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기억하는 것도 시작입니다. 이해하는 것도 아직 완성이 아닙니다.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되고, 그 진리로부터 선이 행해질 때 비로소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는 사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이라고 부르는 과정 전체를 놀랍도록 간결하게 보여 주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하면,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되는 인간의 내면입니다. 같은 씨가 뿌려집니다. 씨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다릅니다. 어떤 씨는 새가 먹고, 어떤 씨는 잠깐 자랐다가 말라 버리고, 어떤 씨는 가시에 눌리며, 어떤 씨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합니다. 차이는 씨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그릇’에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동일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강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말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밭이 어디에 해당하는지 스스로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험을 영적 성장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상당히 깊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는 표현의 의미를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적 시험, 곧 temptation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공격을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가운데, 인간 안에 이미 존재하던 것이 드러나고 주님께서 그것을 이기도록 인도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평안할 때에는 자신이 어떤 밭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나는 세상보다 천국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심하게 상했을 때, 손해를 보게 되었을 때,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돈과 명예와 안락함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할 때 비로소 마음밭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가 말하는 ‘시험을 통해 자신의 밭이 드러난다’는 설명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네 가지 밭을 반드시 세상 사람들을 네 부류로 영원히 고정하여 나누는 분류표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하나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어느 시점에서 사람의 주된 상태를 그렇게 구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네 밭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아직 길가 같은 부분도 있고, 돌밭 같은 부분도 있으며, 가시떨기가 우거진 부분도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오래 갈아엎고 준비하셔서 좋은 땅이 된 부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씨 뿌리는 비유가 타인을 분류하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추는 말씀이 됩니다. ‘ 사람은 길가다’, ‘ 사람은 돌밭이다’, ‘나는 좋은 밭이다’라고 판정하는 순간 이 비유의 칼날이 밖으로 향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떤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였다가 어려움이 오자 버렸는가?’, ‘내가 알고 있는 말씀 가운데 세상 염려와 자기애 때문에 열매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이 비유는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먼저 ‘길가’는 말씀이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강사는 길가가 사람들이 계속 밟고 다녀 딱딱해진 땅인 것처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강퍅한 마음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것은 진리가 내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기억의 표면을 스쳐 지나가고 자신의 삶과 무관한 정보로 머문다면, 씨는 아직 ‘땅속’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성경에서 새는 문맥에 따라 생각과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좋은 의미의 새도 있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된 사고, 곧 진리를 빼앗아 가는 잘못된 추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들은 직후 자신의 기존 욕망에 맞추어 ‘ 말씀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요즘 세상에 그렇게 살면 손해만 보지’, ‘그건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야’라고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막 뿌려진 진리가 내면에 들어가기 전에 거짓된 추론에 의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새가 씨를 먹는’ 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다음의 ‘돌밭’은 더욱 미묘합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문제는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상당히 자주 볼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하고,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어떤 진리를 발견하고 크게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자신의 사랑과 의지를 바꾸는 데까지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말씀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견디지 못합니다. 진리가 감정에는 닿았지만 생명에는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뿌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식물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뿌리가 식물 전체를 지탱합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종교 활동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혼자 있을 때 무엇을 사랑하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진리를 따르는가 하는 내면의 상태입니다. 거기에 진리가 뿌리를 내릴 때 신앙은 외부 환경에 따라 쉽게 말라 버리지 않습니다.

 

강사가 좋은 밭을 설명하면서 ‘ 겸손하고, 충성하고, 인내하고, 온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부분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또한 ‘적당히 천국만 가면 되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세상의 쾌락이나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말고 ‘좁은 ’을 선택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표현의 체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이 실천적 강조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다만 강사가 이것을 ‘생명책이라는 저금통장’에 선행과 인내가 상급으로 적립되는 것처럼 설명하는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달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의 상태는 선행을 많이 해서 점수를 많이 쌓은 결과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형성하신 사랑과 지혜의 상태입니다. 선한 행위는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위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천국의 공로를 적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 속에서 사람의 사랑이 실제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한 것과 이웃의 유익을 사랑해서 한 것은 외적으로는 같아 보여도 내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행위’ 또는 ‘’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공로 사상을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얼마나 많이 했는가’만 계산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부터 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했는가,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원하여 했는가입니다. 결국 행위는 사랑의 외적 형상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실제 행위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말하는 ‘밝은 ’도 이렇게 이해하면 한층 깊어집니다.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단순히 신앙적 업적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그의 이해를 밝히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생활로 흘러나오는 사람입니다. 빛은 진리이고, 그 빛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빛만 있고 따뜻함이 없다면 겨울 햇빛과 같을 수 있습니다. 진리는 많이 알지만 체어리티가 없다면 영적 생명을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거듭남은 이 둘, 곧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열매’가 최종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땅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라고 하시면서 그 결과를 ‘결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씨가 목적이 아니며 싹도 목적이 아니고 줄기와 잎도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열매가 목적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듣는 것, 공부하는 것, 이해하는 것, 교리를 정리하는 것 모두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사람이 선하게 되고, 주님의 사랑이 그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강의가 계속 강조하는 ‘영적 성장’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매우 아름답게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은 특별한 체험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며, 비밀스러운 종말론적 지식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중심성이 조금씩 물러가고 주님의 뜻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던 사람을 용서하게 되고, 자기 자존심 때문에 참지 못하던 것을 진리를 위해 참게 되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보다 그 사람에게 실제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가 바로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번 3강 2부에서 특별히 소중한 것은 ‘14만 4천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려는 종말론적 도식 자체라기보다, 그 도식 아래에서 강사가 계속 붙들고 있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강사는 가장 밝은 빛을 따라 살고, 좁은 길을 선택하며, 세상적 가치보다 영적 가치를 추구하고, 인내와 겸손과 사랑 가운데 성장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 대목을 더 깊이 붙듭니다. 그리고 ‘특별한 종말의 성도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 살아야 한다’기보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원하시는 거듭남의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좋은 ’도 특별한 소수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우월한 마음이 아닙니다. 밭은 갈아야 합니다. 돌을 골라내야 하고 가시를 뽑아야 하며 굳은 땅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을 통하여 그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악을 죄로 알고 피하려고 힘쓰며,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읽으면서 ‘나는 가운데 어디인가?’라고 묻는 것도 필요하지만, 거기에서 멈출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오늘 주님께서 밭의 어느 부분을 갈고 계시는가?’일 것입니다. 아직 딱딱한 길가가 있다면 부드럽게 하시고, 돌이 있다면 드러내어 치우게 하시며, 가시가 있다면 뽑게 하시고, 이미 좋은 땅이 된 곳에는 더 많은 씨를 심으십니다. 거듭남은 단번에 ‘좋은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평생에 걸쳐 인간의 내면을 천국에 적합한 땅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번 3강 2부의 중심은 의외로 단순해집니다. ‘나는 14만 4천에 속하는가?’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이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가?’입니다. ‘마지막 시간표를 얼마나 정확하게 아는가?’보다 먼저 ‘오늘 내게 주어진 진리를 얼마나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사가 서두에서 말한 ‘영적인 목표와 방향’, ‘영적 가치관’이라는 표현과도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결국 좋은 밭의 가장 깊은 특징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씨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씨의 생명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열매를 가능하게 하는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할 일은 그 생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주님께서 일하실 길을 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밭을 내어 드릴 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라는 차이는 있어도 주님께서는 각 사람 안에서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의 천국을 이루어 가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는 종말을 계산하기 위한 비유를 넘어, 지금 이 순간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듭남의 비유’가 됩니다.



3강 3부

돌밭과 가시떨기에서 좋은 땅으로 : 말씀의 뿌리, 시험, 세상 염려와 참된 결실

3강 3부에서는 앞서 살펴본 씨 뿌리는 비유가 한층 더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2부에서 길가와 돌밭, 가시떨기와 좋은 땅이라는 네 가지 마음밭의 큰 구조를 살펴보았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 어떤 사람에게서는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가’, ‘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시험이 오면 넘어지는가’, ‘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열매가 막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사가 이 비유를 단순히 불신자와 신자를 나누는 비유로만 다루지 않고 영적 성장과 시험, 그리고 실제 삶의 열매라는 방향으로 가져가는 것은 이 사경회의 전체적인 영성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곳에서 반복되는 ‘연단’, ‘인내’, ‘순종’, ‘좁은 ’, ‘사랑의 실천’이라는 언어가 씨 뿌리는 비유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돌밭의 특징은 씨를 받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길가와 돌밭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길가에서는 씨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지만, 돌밭에서는 싹까지 납니다. 외적으로 보면 상당히 좋은 신앙의 시작처럼 보입니다. 말씀을 듣고 감동하고, 기도하기 시작하며, 새로운 결심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집회나 수련회에서 큰 은혜를 경험하고 자신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상태에 대해 ‘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넘어지는 ’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처음의 기쁨이 거짓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기쁨이 아직 충분히 깊은 곳까지 내려가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뿌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기억에 들어가는 것과 이해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마침내 의지와 사랑에 들어가는 것은 서로 다른 단계입니다. 어떤 진리를 듣고 ‘맞다’고 인정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 진리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 때문에 자기 욕망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대할 때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아멘 하는 것과 자신의 이익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후자를 선택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여기까지 내려오면 비로소 뿌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험은 말씀을 파괴하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이 어디까지 뿌리내렸는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평안할 때에는 자기 신앙의 실제 깊이를 알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말할 수 있고, 겸손을 말할 수 있으며, 주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욕을 받았을 때에도 상대를 악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는지, 자신의 옳음이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평안을 지킬 수 있는지, 예상하지 못한 손해가 생겼을 때에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할 수 있는지를 통해 그 진리가 단순히 기억과 이해에 있는지 아니면 의지 안으로 내려가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연단’은 씨 뿌리는 비유의 ‘뿌리’와 깊이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시험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더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악을 보내 시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시험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공격이며,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허용하시고 그 가운데 사람을 지키시며 선한 결과를 이루십니다. 인간에게는 시험이 마치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그 시험 가운데 싸울 힘과 진리, 보호와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귀하게 여긴다고 해서 고통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거나 일부러 고통을 찾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고난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주님을 의지하고 악과 거짓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선과 진리를 붙들 때 고난이 거듭남의 쓰임으로 바뀝니다.

 

이 구별은 수도적 영성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금식과 절제, 침묵과 순종, 불편을 감수하는 훈련 자체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외적 훈련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다루고,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구하며, 이웃을 더 사랑하도록 돕는다면 귀한 쓰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만큼 견뎠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많이 희생했다’, ‘나는 깊은 영적 훈련을 받았다’는 자기 공로로 바뀌면 바로 그 수도적 훈련이 새로운 proprium의 토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단의 결과를 판별하는 가장 좋은 기준은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으로부터 이어진 이 사경회의 수도적 강조를 존중하면서도, 그 연단의 내적 목적을 거듭남의 관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돌밭 다음에는 가시떨기가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씨가 싹만 내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 자랍니다. 그러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상태는 어쩌면 돌밭보다 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돌밭에서는 환난이나 박해가 왔을 때 곧 넘어지므로 문제가 비교적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가시떨기에서는 신앙생활 자체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읽으며, 교회생활도 합니다. 씨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른 것들이 함께 자라서 말씀의 생명을 압박한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라는 말도 세상일을 걱정하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자녀를 돌보고, 직업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노후를 준비하는 것은 자연계에서 필요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 삶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영적 삶을 섬겨야 할 질서입니다. 문제는 질서가 뒤집힐 때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목적이 되고 영적인 것이 수단이 되는 순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사업이 잘되기 위해서이고, 기도하는 이유가 건강과 성공을 얻기 위해서이며, 교회생활의 목적이 사회적 관계와 자기 평판을 위한 것이라면 외적으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실제 중심에는 세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돈은 자연계에서 수많은 쓰임을 가능하게 하는 유용한 수단입니다. 가족을 돌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선한 사업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재물의 유혹’, 곧 재물이 주는 안전감과 우월감과 자유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재물을 소유하는 것과 재물이 사람을 소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재산이 많으면서도 그것을 주님께 받은 쓰임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고, 반대로 가진 것이 많지 않으면서도 온 마음이 돈을 향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은 통장 잔액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입니다.

 

가시떨기의 또 다른 특징은 ‘말씀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세상 사랑과 자기애가 반드시 말씀을 공개적으로 부정해야만 진리를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인정하면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뒤로 밀어낼 수 있습니다. ‘맞는 말씀이지. 하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그렇게 살겠다’, ‘지금 문제만 해결되면 그때 주님께 충실하겠다’고 하면서 진리에 따른 삶을 계속 연기할 수 있습니다. 씨는 살아 있지만 가시가 더 빨리 자랍니다. 그렇게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면 신앙의 언어는 남아 있어도 열매가 매우 적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가시떨기를 단순히 ‘세상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판정하기보다 우리 각자의 삶 속에 들어와 보게 합니다. 목회자에게도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성장과 사역의 성취가 어느 순간 주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보다 ‘내가 깊은 것을 안다’는 만족이 커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당연히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를 발견하는 기쁨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고 자신이 더 높은 진리를 가졌다고 느끼는 데 머문다면 귀한 진리의 씨 주변에 아주 미세한 가시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다른 사람을 확대해서 보는 렌즈이기 전에 자기 자신을 비추는 렌즈여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를 해설하는 작업에서도 계속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도식과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다른 곳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의 영적 우월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진리를 접했다면 그만큼 더 겸손하고, 더 온유하며, 더 체어리티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높은 진리가 높은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진리는 지식으로만 남을 수 있습니다.

 

이제 좋은 땅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좋은 땅은 처음부터 아무 돌도 없고 아무 가시도 없는 완벽한 인간을 의미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에서도 좋은 밭은 농부가 손을 대지 않아도 저절로 만들어지는 땅이 아닙니다. 굳은 땅을 갈고,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으며, 물을 대고, 씨를 심고, 오랜 시간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매우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인간의 마음도 주님께서 그렇게 경작하십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악을 드러내시고, 말씀의 진리를 통해 그것이 악임을 알게 하시며, 실제 생활에서 그것을 피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악을 거절할 때 조금씩 돌이 치워지고 가시가 뽑힙니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나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내가 노력해서 나를 좋은 밭으로 만들었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을 설명할 때 반복하는 중요한 원리는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하지만, 실제 능력과 선은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가 없으면 사랑이 형성될 수 없고, 주님의 힘이 없으면 인간은 어떤 악도 실제로 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땅에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이 있다는 것도 경쟁적 상급표처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천국에는 모두가 똑같은 정도의 선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획일성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주님께 받을 수 있는 그릇과 쓰임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삼십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백 배를 맺지만 중요한 것은 각자가 주님께 받은 것에 따라 충실하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천국의 완전함은 모든 천사가 똑같아지는 데 있지 않고, 서로 다른 수많은 선과 쓰임이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 밝은 ’, ‘ 상급’을 향해 나아가라고 권면하는 부분을 이해할 때에도 유익합니다. 그 권면을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영적 경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나는 삼십 배가 아니라 배짜리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 속에 자기 우월감이 들어오면 좋은 밭을 만들려다가 오히려 새로운 가시를 심을 수 있습니다. 참된 천국적 열망은 ‘내가 높은 사람이 되겠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하나도 헛되게 하지 않고 가능한 온전히 받아 이웃을 섬기는 사용하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지옥적 사랑도 높은 곳을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기 위해서’ 높은 곳을 원합니다. 천국적 사랑도 더 큰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 많이 사랑하고 유용하게 섬기기 위해서’ 원합니다. 겉으로는 둘 다 열심이고 희생적일 수 있지만 내적 동기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십니다.

 

강의에서 강조하는 ‘좁은 ’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면 좋습니다. 좁은 길은 일부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길이 아닙니다.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거스르는 길이 좁게 느껴집니다. 복수하고 싶은데 용서하는 길, 인정받고 싶은데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섬기는 길, 자기 이익을 챙길 수 있는데 정직을 선택하는 길,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데 관계의 선을 위해 말을 절제하는 길이 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길을 오래 걸으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좁았던 길이 점점 자유의 길이 됩니다. 악의 욕망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에서 일어나는 ‘즐거움의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이고 자기부인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 의지를 형성해 가시면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용서하는 것이 억지가 아니라 평안이 되고, 섬기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기쁨이 되며,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억압이 아니라 자유가 됩니다. 그때 좋은 땅은 단순히 ‘말씀을 지키는 사람’의 상태를 넘어, 말씀대로 사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상태가 됩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이 강조해 온 ‘연단’도 그 최종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연단의 목적은 평생 이를 악물고 자신을 억누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기 욕망을 거슬러 싸워야 하지만, 주님께서 거듭나게 하실수록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결국 천국에서는 아무도 억지로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수도적 훈련의 가장 아름다운 결실은 ‘나는 이렇게 많이 참았다’가 아니라 ‘이제는 예전과 달리 이것이 기쁘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리메인스’와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이 경험한 순수한 사랑, 선한 정서, 말씀을 통해 받은 진리, 부모나 교사에게서 배운 선한 것들을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보존하십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러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을 악과 거짓에서 끌어내실 때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현재 마음밭이 매우 굳어 보인다고 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 안에 무엇을 보존하고 계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를 크게 바꿉니다. ‘ 사람은 길가니까 된다’, ‘ 사람은 돌밭이라 오래 간다’, ‘ 사람은 가시밭이다’라고 판정하기보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밭을 어떻게 경작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합니다. 오늘은 돌밭처럼 보여도 내일 큰 시험을 통해 돌이 드러나 제거될 수 있고, 오랫동안 가시에 눌려 있던 씨가 어느 순간 주님의 섭리 가운데 다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씨 뿌리는 비유는 사람을 네 종류로 나누는 비유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오래 참고 경작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비유로도 읽힙니다.

 

그렇게 보면 이번 3강 3부에서 강사가 강조하는 영적 성장과 연단, 좁은 길과 결실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하여 더욱 깊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씨가 들어오고, 시험을 통해 돌이 드러나며, 세상 염려와 자기애라는 가시가 드러나고, 사람이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그것들을 피할 때 밭이 조금씩 좋은 땅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좋은 땅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삶의 열매가 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 앞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지금 좋은 밭인가 아닌가?’라는 자기 판정만은 아닐 것입니다. 더 살아 있는 질문은 ‘주님께서 오늘 안에서 어떤 돌을 보여 주고 계시는가? 어떤 가시를 뽑으라고 하시는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진리를 이제 실제 삶으로 옮기라고 하시는가?’일 것입니다. 바로 그 질문에 하루하루 응답하는 것이 밭을 내어 드리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강사의 권면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히 가까운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겸손하고, 충성하고, 인내하고, 사랑하라’는 권면을 자기 공로를 쌓기 위한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께서 내 안에 심으신 씨가 충분히 열매 맺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라는 초청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십 배든 육십 배든 백 배든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 열매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좋은 밭은 ‘나는 좋은 밭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께 자기 밭을 내어 드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돌이 드러나면 인정하고, 가시가 보이면 뽑으려 하며, 말씀이 자기 욕망과 충돌할 때 말씀 편을 선택하고,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해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안에서 말씀은 더 이상 머리에만 있는 씨가 아니라 의지에 뿌리를 내리고 삶으로 열매 맺는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사경회가 강조해 온 ‘연단을 통과한 신앙’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깊고 아름다운 의미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3강 4부

겨자씨와 누룩,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 영적 성장의 본질

3강 4부에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시작된 ‘영적 성장’이라는 주제가 겨자씨와 누룩,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를 통하여 더욱 깊어집니다. 앞에서 네 가지 마음밭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질문은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어떻게 자라는가’, 그리고 ‘ 성장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를 서로 연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무엇을 가장 귀한 가치로 발견하며, 결국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해 온 ‘영적 목표’, ‘연단’, ‘좁은 ’, ‘온전한 사랑’이라는 주제가 여기에서 보다 적극적인 성장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겨자씨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시작할 때에는 매우 작지만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게 됩니다. 강사는 이것을 성도의 영적 성장과 연결합니다. 처음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에는 작고 연약하지만 말씀을 받고 순종하며 시험과 연단을 통과하면서 점차 성장하여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까지 유익을 주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듭남 역시 처음부터 완성된 천국적 인간이 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께서 작은 시작으로부터 사람 안에 새로운 생명을 형성하시고 그것을 점차 자라게 하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작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 지식이 적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거듭남의 시작은 인간에게 매우 미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행동을 어느 날 ‘이것이 정말 주님 앞에서 옳은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작은 양심의 움직임, 미워하던 사람에게 악으로 갚지 않으려는 작은 결심,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기보다 인정하려는 작은 움직임도 겨자씨와 같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 것이고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인다면 그 안에는 천국 전체를 향하여 자랄 수 있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 성장을 평가하는 기준도 바꾸어 놓습니다. 사람은 흔히 눈에 띄는 변화와 특별한 체험을 영적 성장으로 생각합니다. 기도를 오래 하고, 성경을 많이 알고, 큰 사역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성장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근본적인 성장은 사람의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던 사람이 조금씩 이웃의 선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이 주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주 작은 변화처럼 보여도 영계에서는 이것이 훨씬 큰 변화일 수 있습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에서 나무는 사람의 지각과 지식, 그리고 그로부터 형성되는 영적 생명과 관련됩니다. 씨였던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자라 하나의 질서를 이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각각 떨어져 있던 진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연결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라’, ‘용서하라’, ‘정직하라’는 말씀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생명 체계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 이것을 해야 하지?’를 일일이 계산하지 않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하기 시작합니다. 씨가 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든다’는 말씀도 아름답습니다. 앞서 길가의 씨를 먹어 버린 새는 반대 의미에서 거짓된 사고와 추론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좋은 의미입니다. 말씀에서 새는 사고와 이해에 속한 것들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나무의 가지에 새들이 깃든다는 것은 사람 안에 선한 생명이 형성되면서 수많은 진리와 생각들이 그 생명 안에서 제자리를 찾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영적 성장은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과 지식과 이성이 선한 사랑을 섬기도록 질서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적 영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점입니다. 자기부인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개성을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해와 재능과 개성을 자기애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선한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개성이 제거된 사람들의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각 사람이 지상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한 고유성을 가지면서도 그 고유성이 공동의 선을 섬깁니다. 따라서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은 ‘작은 ’가 ‘대단한 ’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생명이 충분히 성장하여 다른 생명들을 품을 수 있는 쓰임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강사가 다루는 누룩의 비유는 영적 성장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어 ‘전부 부풀게’ 합니다. 겨자씨가 눈에 보이는 외적 성장의 이미지라면 누룩은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누룩은 반죽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작용하지만 마침내 반죽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강사는 이것을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행함으로써 사람 전체가 변화되는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 역시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좋은 이미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거듭남은 사람의 종교적 영역 하나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는 부분, 성경 읽는 부분, 기도하는 부분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의 생각과 감정, 인간관계, 직업생활, 돈을 사용하는 태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누룩이 반죽 전체로 퍼지듯 진리가 사람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는 매우 경건하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면 아직 누룩이 반죽 전체에 퍼졌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변화의 주체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뜯어고쳐 천국적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진리에 반대되는 악을 발견할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때 실제로 사람 안의 질서를 변화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변화에 대해 자랑하기보다 더욱 주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 수련해서 이렇게 되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셨다’는 고백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매우 중요한 접점과 동시에 경계선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자기부인과 절제, 순종과 인내를 강조해 온 전통은 사람의 삶 전체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통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훈련이 ‘내가 나를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자기 공로로 돌아가는 순간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참된 수도적 훈련이라면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는 의식보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깊어져야 할 것입니다. 연단이 깊어질수록 proprium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져야 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눈보다 이해하고 품는 사랑이 깊어져야 합니다.

 

이어서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 두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만큼 귀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상인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 가치관의 문제와 연결합니다. 무엇이 정말 귀한 것인지 발견한 사람은 이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경회가 반복해서 강조해 온 ‘세상적인 가치와 영적인 가치’라는 구분이 다시 나타납니다. 사람이 세상의 성공과 재물과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힘을 사용합니다. 반대로 천국과 영원한 생명, 주님과의 관계를 가장 귀한 것으로 발견하면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집니다. 강사가 좁은 길과 희생, 자기부인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가치의 전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보화’와 ‘진주’를 더욱 깊이 말씀의 선과 진리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진주’는 진리를 나타내는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가치는 단순히 희귀한 지식을 알게 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그의 삶을 선하게 만들기 때문에 귀합니다. 따라서 가장 귀한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은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알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새롭게 질서 지을 만큼 주님의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알게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인물과 장소와 숫자가 인간의 거듭남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정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소유를 파는’ 것입니다. 곧 기존의 자기중심적 가치와 생각을 내려놓고 발견한 진리에 따라 삶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아는 것보다 그 아르카나 때문에 한 가지 악이라도 실제로 피하게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기 소유를 판다’는 표현도 문자적으로 모든 재산을 처분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에서 소유는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붙들고 있는 생각과 사랑까지 포함하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버리기 어려운 소유는 때로 돈이 아니라 ‘내가 옳다’는 생각입니다. 자기 명예, 자기 공로, 자기 판단, 자기 방식, 심지어 자기가 오랫동안 붙들어 온 종교적 확신도 주님의 진리 앞에서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가 proprium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과 지혜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느끼고 싶어 합니다. ‘ 생각’, ‘ ’, ‘ 신앙’, ‘ ’, ‘ 공로’를 붙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가장 깊은 질서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팔아 값진 진주를 산다’는 말씀은 가장 깊게는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는 질서를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변화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때 ‘기뻐하여 돌아가’ 자기 소유를 판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천국적 자기부인은 이를 악물고 모든 것을 빼앗기는 상태가 아닙니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전의 것을 기꺼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손에 쥔 돌멩이를 억지로 빼앗기면 울지만, 더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면 스스로 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방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단순히 ‘세상을 사랑하지 마라’, ‘자기를 부인하라’고 강제로 빼앗으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적 사랑의 더 큰 기쁨을 조금씩 맛보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전에 그렇게 중요했던 것들이 점차 덜 중요해집니다.

 

이것은 앞서 3부에서 살펴본 ‘즐거움의 변화’와도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악을 포기하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복수하지 않는 것이 억울하고,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 손해 같으며, 자기 뜻을 포기하는 것이 죽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선한 사랑을 형성해 가시면 그보다 더 깊은 평안과 기쁨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부인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더 귀한 것을 얻기 위한 자유로운 내려놓음이 됩니다.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기뻐하여’ 모든 것을 판다는 말씀은 바로 이 천국적 자유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수도적 자기부인의 건강한 기준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이 사람을 점점 어둡고 경직되고 타인에게 엄격하게 만든다면 그 열매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부인을 통하여 더 자유로워지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워지고, 자기 명예가 손상되어도 이전보다 평안하며, 주님과 이웃의 선을 더 기뻐하게 된다면 그 훈련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빈 껍데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옥적 즐거움을 비우고 천국적 즐거움으로 채우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누룩, 보화, 진주를 하나의 흐름으로 놓으면 이번 3강 4부의 구조가 매우 아름답게 보입니다. 겨자씨는 ‘생명의 시작과 성장’을 보여 줍니다. 누룩은 ‘ 생명이 사람 전체로 퍼지는 변화’를 보여 줍니다.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는 ‘ 변화가 가능해지는 가치의 전환’을 보여 줍니다. 결국 사람이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무엇을 선택할지가 결정되고, 반복된 선택이 그의 사랑을 형성하며, 그 사랑이 그의 영적 생명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사후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살아온 사랑이 사후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지금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지가 중요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이 가장 귀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실제 선택에서는 계속 자기 명예와 이익을 먼저 선택한다면 아직 보화를 충분히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완전하지 않고 자주 넘어지더라도 선택의 방향이 점차 주님과 이웃의 선을 향한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사랑을 변화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영적 목표’를 반복하여 강조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표가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목표를 ‘가장 높은 등급의 성도가 되는 ’이나 ‘특별한 14만 4천에 들어가는 ’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가장 높은 목표는 주님과 결합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자기 생명이 되며, 그 생명으로 이웃에게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위대함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지 않고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은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 배의 결실’도, ‘가장 밝은 ’도, ‘값진 진주’도 모두 다른 사람보다 높은 영적 지위를 얻는 언어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에게서 더 많은 선과 진리를 받아 더 온전히 살아내는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강사가 강조하는 ‘최선을 다해 영적으로 성장하라’는 권면의 힘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자기 공로나 영적 경쟁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목표는 ‘내가 얼마나 높은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이 얼마나 자유롭게 흘러가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하나의 접점이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으로부터 이어져 온 이 수도적 전통이 ‘세상보다 영적인 것을 택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좁은 길을 가라’, ‘연단을 통과하라’고 반복해 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언어를 거듭남이라는 더 내적인 구조 안에 놓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자연계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 아래 두는 것이고,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를 내려놓는 것이며,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고통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거슬러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수도원에 들어가느냐 세상 가운데 사느냐가 가장 중요한 구분도 아닙니다. 사람은 수도원 안에서도 자기애와 명예욕을 키울 수 있고, 세상 한가운데서 직업과 가정을 돌보면서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외적 장소보다 내적 질서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정한 ‘세상 포기’는 세상의 쓰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랑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천국적 인간일수록 자연계의 맡겨진 책임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그것을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3강 4부를 읽으면서 ‘나는 겨자씨가 얼마나 크게 자랐는가?’라고만 묻기보다 ‘ 사랑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물어야겠습니다. ‘ 안에 누룩이 얼마나 퍼졌는가?’, 곧 신앙이 예배 시간뿐 아니라 가정과 인간관계와 돈과 말과 생각에까지 들어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보화와 진주로 여기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기꺼이 다른 것을 포기하는지를 보면 그가 실제로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겨자씨의 비밀은 크기에 있지 않고 그 안의 생명에 있습니다. 누룩의 비밀은 양에 있지 않고 안에서부터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에 있습니다. 보화와 진주의 비밀은 값비싸다는 데만 있지 않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가치체계 전체를 바꾸어 놓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비유의 중심에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씨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고, 누룩처럼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진리의 힘도 주님에게서 오며, 우리가 발견해야 할 궁극적인 보화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성장이란 결국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었는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처럼 시작된 주님의 진리가 내 안에서 자라고, 누룩처럼 삶 전체로 퍼지고, 마침내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다른 모든 것보다 귀한 보화가 되어 삶의 우선순위 전체가 달라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사람은 억지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여’ 내려놓습니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변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거듭남이며, 이번 3강 4부에서 강사가 말하는 ‘영적 성장’을 가장 깊은 자리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3강 5부

이긴 ’, 맞은 , 14만 4천과 생명수 : 가장 밝은 빛과 주님과의 결합

3강 5부에 이르면 강의의 무게중심이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를 설명하는 데서, 그 비유들을 통해 지금까지 말해 온 ‘영적 성장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쪽으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앞선 강의에서 다룬 ‘영적 성장론’과 성화된 신앙인들의 생애를 다시 불러오면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 반복되는 ‘이기는 ’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특히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권면이 일곱 번 반복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것은 교회 시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긴 ’를 연단을 통과하여 정결해진 성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간 성도,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의 ‘ 맞은 ’과 14만 4천에 연결합니다.

 

여기서 먼저 이 강의의 중심 의도를 충분히 살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14만 4천이라는 숫자 자체에 호기심을 집중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14만 4천에 들어가는가?’라는 질문 아래 실제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말씀을 인내로 지키고, 시험과 연단 가운데 악과 싸우며,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마침내 ‘이긴 ’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성화된 신앙인들의 삶을 ‘이렇게 살아라’고 보여 주는 모델로 제시하고, 영적 성장의 길에는 출애굽에서 완덕에 이르는 과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해설할 때 14만 4천의 숫자 해석만 놓고 스베덴보리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강사가 전달하려는 실천적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기는 ’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다만 누구를 이기는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이겨야 할 대상은 밖에 있는 세상이나 다른 종교인이나 다른 교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스르는 악과 거짓입니다. 그리고 그 악과 거짓의 뿌리에는 proprium, 곧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며 자기를 중심에 놓으려는 인간의 고유한 자기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이기는 ’라는 말은 영적 경쟁에서 다른 성도보다 높은 등급에 올라간 사람이라기보다,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대적하여 그것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가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욱 깊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아주 현실적인 예를 듭니다. 자신이 ‘이긴 ’인지 알려면 극단적으로 말해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해 보면 알 수 있다는 취지의 설명입니다. 평소에는 자신이 상당히 성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생기면 즉시 내면의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표현은 다소 익살스럽고 강하지만, 그 안에 담긴 영적 통찰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는 평안할 때의 자기평가보다 자기 사랑이 공격받을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통해 더 잘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살펴본 ‘시험’의 의미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말씀을 듣고 ‘나는 용서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모욕을 당했을 때 용서하는 것은 다릅니다. ‘나는 겸손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었을 때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다릅니다. ‘나는 주님만 의지한다’고 고백하는 것과 모든 자연적 안전망이 흔들릴 때에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은 다릅니다. 시험은 사람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사랑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이러한 드러남이 필요합니다.

 

다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참았다’는 외적 행동만으로 이김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악을 이긴 것은 아닙니다. 속에서는 증오와 복수심을 품으면서 체면 때문에 참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분노가 올라왔지만 그것이 죄임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상대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려 싸울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아직 분노를 느꼈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그곳에서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악한 충동이 한 번도 올라오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올라오는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진리에 따라 거절하는 데서 진행됩니다.

 

따라서 ‘이긴 ’는 한 번도 넘어져 본 적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넘어질 때마다 자기 악을 보고 주님께 돌아가 다시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이 거듭될수록 처음에는 억지로 참던 사람이 점차 참는 것을 덜 힘들어하고, 마침내 상대의 선을 실제로 원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기통제와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자기통제는 겉 행동을 억제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사랑 자체의 방향을 변화시킵니다.

 

강사는 이어서 이러한 ‘이긴 ’를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 곧 ‘ 맞은 ’과 연결합니다. 특히 자신이 강조하는 ‘생명수의 부어짐’ 또는 생명수의 강력한 영적 체험을 인 맞은 종의 중요한 표지로 제시하며, 그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대목에서는 허드슨 테일러가 주님과의 깊은 일치와 내면에서 강물처럼 흐르는 생명을 경험했다고 고백한 내용을 소개한 뒤, 이를 ‘생명수 유입’을 경험한 인 맞은 종의 사례로 해석합니다.

 

바로 이 부분은 이번 재해설에서 상당히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생명수’는 주님과의 깊은 결합에서 오는 영적 생명과 충만을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 자체에는 매우 귀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이 단순한 교리적 동의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실제 자기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상태를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안다’에서 ‘주님으로 산다’로 나아가려는 갈망입니다. 수도적 영성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외적 금욕 자체가 아니라 이런 주님과의 깊은 결합이라면, 그 방향은 충분히 존중할 수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생명수’가 매우 중요한 상응이라는 점입니다. 물은 일반적으로 진리를 나타내며, 특히 ‘생명수’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 그리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영적 생명을 나타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그러므로 ‘생명수가 흐른다’는 이미지는 상응의 관점에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생명수의 유입은 반드시 어떤 특별한 감각적·신비적 체험을 경험해야만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내면에서 강물이 흐르는 것 같은 압도적인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의 영적 등급이나 천국의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체험은 실제일 수도 있고, 사람에게 큰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안전하고 본질적인 기준은 그 체험 이후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세계와 인간의 내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강렬한 감정, 환상, 음성, 황홀감, 몸의 특별한 감각이 반드시 그 자체로 천국적 상태를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그런 체험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조용히 자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행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선을 선택해 온 사람이 오히려 매우 깊은 천국적 생명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 맞은 ’을 특정한 신비 체험을 가진 극소수와 동일시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록의 ‘’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어떤 외적인 표식이나 일회적 영적 체험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생명 안에 받아들여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마’ 역시 중요합니다. 얼굴은 인간의 내적 애정을 나타내고, 특히 이마는 사랑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보이지 않는 표식이 영적 신체에 찍혀 있다는 것보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진리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생명의 성격이 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더 내적입니다.

 

이름’도 말씀에서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질과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성품, 곧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그들의 사랑 안에 새겨져 있다는 뜻이 됩니다. 강사는 필라델피아 교회의 이긴 자와 14만 4천을 연결하면서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아름다운 이미지를 외적 신분 표시에서 내적 생명의 형성으로 가져갑니다.

 

그러면 ‘14만 4천’이라는 숫자도 자연스럽게 다시 보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14만 4천이 교회 시대 가운데 가장 밝은 빛으로 살고 연단을 완성하여 큰 환난을 면제받으며 휴거되는 특별한 성도들의 집단입니다. 강사는 이들을 천국에서 가장 큰 상급을 받는 사람들로 설명하고, 시온산 및 새 예루살렘과 연결합니다. 이 체계 안에서 14만 4천은 사실상 영적 성장의 최고 단계에 도달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숫자를 전혀 다르게 읽습니다.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은 자연적 산술로 정확히 144,000명의 특별한 사람을 세는 숫자가 아닙니다. 12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 곧 교회의 모든 것을 나타내며, 12에 12를 곱한 144는 그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여기에 천이 결합되면서 그 의미가 더욱 충만하게 표현됩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특정한 소수 엘리트 성도들의 정원이라기보다, 주님의 새 교회에 속하여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의 완전한 총체를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숫자 해석의 차이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14만 4천을 ‘가장 높은 극소수의 영적 엘리트’로 이해하면 신앙생활이 자칫 등급 경쟁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반 구원만 받아서는 된다. 14만 4천에 들어가야 한다’는 열망은 처음에는 거룩한 열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미세하게 자기 우월감과 결합할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다른 성도보다 연단받았다’, ‘나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 ‘나는 밝은 가운데 있다’는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영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proprium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강사가 말하는 ‘ 높은 것을 사모하라’는 권면 자체를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방향을 바꾸면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은 천국에 가기 위해 거룩해져야 한다’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많은 진리를 받아들이며, 온전히 이웃에게 쓰임 있기 위해 거듭나기를 원한다’가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자기의 높음을 바라보고, 후자는 주님의 선이 더 많이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 ’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높음은 지배의 높음이 아니라 사랑과 쓰임의 깊이입니다. 더 높은 천사는 더 많은 사람을 자기 아래 두는 천사가 아니라, 더 큰 사랑과 지혜로 더 넓은 쓰임을 행하는 천사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선과 지혜가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더욱 분명히 압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높아질수록 오히려 겸손해집니다.

 

이 원리를 적용하면 강사가 반복해서 말하는 ‘가장 밝은 ’도 더욱 아름답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나는 남들보다 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더 잘 보는 사람입니다. 자연계에서도 밝은 햇빛이 들어오면 어두울 때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듯, 주님의 진리가 밝게 비칠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미세한 자기애와 거짓을 더 분명히 발견합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성장은 자기 확신을 크게 만들기보다 회개를 깊게 합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 가운데 특별히 필라델피아 교회를 높이 평가하면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큰 환난의 면제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의 이긴 자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받는 것을 14만 4천과 연결합니다. 이 해석의 역사적·종말론적 도식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다르지만,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부분은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진리를 삶에 보존하는 것입니다. 특히 시험 가운데 진리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사랑하기 어려운 순간에 사랑의 편을 선택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거짓말하면 유리한 순간에 정직을 선택하며,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복수하고 싶은 순간에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때 진리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행위 안에 ‘새겨진’ 말씀이 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참된 ‘인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사가 ‘나는 번까지 참는데 번째에는 참는다. 이제 번째까지 참아 가야 한다’는 식으로 인내를 설명하는 것도 재미있으면서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참는 횟수를 하나씩 늘려 천국 점수를 올리는 과정은 아닙니다. 더 깊은 목표는 ‘참아야 하는 ’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참을 있는 ’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참습니다. 다음에는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참습니다. 더 깊어지면 상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예전 같으면 상처받았을 일에도 자기 자존심이 덜 반응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랑 자체를 변화시키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긴 ’의 가장 깊은 표지는 초자연적 능력이나 특별한 체험보다 사랑의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만 사랑했는데 이제는 불편한 사람의 선도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이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했는데 이제는 이름 없이 섬기는 것을 기뻐하며, 이전에는 자기 옳음을 증명해야 했는데 이제는 상대의 구원과 공동의 선을 위해 자기 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이런 변화가 가장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번 3강 재작업에서 특별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후의 가르침’ 문제로 들어갈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지상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정도의 교리적 지식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깊은 신학을 공부하고, 어떤 사람은 매우 단순한 신앙만 알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환경 자체가 달라 기독교의 교리를 제대로 접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이 지상에서 정확한 교리 지식을 얼마나 많이 습득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사후 중간영계에서 선한 영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은 바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지상에서 몰랐던 ‘구원 공식’을 죽은 뒤에 처음 듣고 그것에 지적으로 동의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사후에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근본적으로 뒤집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계는 의지와 사랑의 기본 방향이 형성되는 곳입니다. 사후의 가르침은 이미 선을 사랑하는 사람 안에 있는 선과 그에 맞는 진리를 결합하여, 그가 천국의 질서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지상에서 단순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정직하고 자비롭게 살았지만 복잡한 교리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선한 사랑이 형성되어 있다면, 사후에는 그 선과 조화되는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은 진리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 성경과 신학을 많이 알았지만 실제 사랑이 자기애와 지배욕에 있었다면, 사후에 더 많은 진리를 설명해 준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에 맞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가르침은 ‘몰랐던 정답을 외우게 하는 보충수업’이 아닙니다. 이미 사람 안에 형성된 선한 사랑이 그 사랑에 합당한 진리를 만나 완전해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의 결합을 그렇게 중요하게 말하는 이유입니다. 선만으로는 방향을 분명히 알기 어렵고, 진리만으로는 생명이 없습니다. 선은 진리를 원하고 진리는 선을 향합니다. 천국은 바로 그 둘이 결합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오히려 이번 사경회가 그토록 강조해 온 ‘’의 중요성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줍니다. 사후에도 가르침이 있다고 해서 ‘그럼 땅에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죽은 다음 배우면 되겠네’가 되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 자체가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어떤 것을 반복하여 선택하고 사랑했는지가 사후에 어떤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자연계의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연단을 통하여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조와 스베덴보리의 사후 교육은 서로 뜻밖에 깊은 접점을 가집니다. 강사는 지상에서 연단을 통과하여 정결해지고 좋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지상에서 사람의 사랑과 의지가 형성되는 것을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봅니다. 다만 ‘완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지상에서 모든 교리적 이해와 영적 성장을 완전히 끝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향하고 선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생명의 방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후에도 천사들은 영원히 지혜와 사랑 가운데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졸업장을 받은 완성품들이 들어가는 정지된 박물관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더 많은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살아 있는 나라입니다. 천사도 영원히 더 지혜로워질 수 있고 더 깊은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기쁨은 ‘내가 얼마나 높은 천사가 되었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더 많이 받아 더 온전히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14만 4천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꾸어 놓습니다. ‘나는 특별한 안에 들어갈 있을까?’라는 불안이나 영적 경쟁보다 ‘나는 지금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수 체험을 했는가?’보다 ‘생명수가 삶에서 실제 열매가 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생명수가 정말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왔다면 그 물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의 말이 부드러워지고, 판단이 자비로워지고, 자기 고집이 약해지고,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함께 깊어져야 합니다.

 

이 기준은 신비 체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해 줍니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깊은 기도 가운데 주님의 임재와 생명을 강력하게 경험했다면 그것은 귀한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을 자기 영적 신분을 증명하는 훈장으로 삼지 않고, 그 경험으로 인해 더 겸손하고 더 사랑하며 더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비로소 그 체험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체험은 씨가 될 수 있지만 열매는 삶에서 확인됩니다.

 

또한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과 같은 수도적 공동체의 역할을 생각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강사는 혼자서 영적 싸움을 잘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사경회에 다시 모여 ‘충전’하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다시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실제적입니다. 사람은 혼자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그것을 살아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공동 예배와 말씀, 서로의 간증과 권면, 함께하는 기도는 사람이 다시 방향을 주님께 돌리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은 철저히 공동체적입니다. 천사는 혼자 완전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각 천사는 자신과 상응하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천사들과 연결되고, 공동의 쓰임 안에서 더 큰 한 사람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숙을 ‘ 혼자 높은 단계에 도달하는 ’으로 생각하면 이미 천국의 질서와 어긋납니다. 참된 성숙은 사람을 고립시키지 않고 더 깊은 관계와 쓰임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다만 공동체 역시 사람을 대신하여 거듭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충전’되어 돌아가도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악을 만나고 그것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일은 각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강사가 ‘각자 처소에 가서 열심히 영적인 싸움을 해서 이기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집회가 목적이 아니라 삶이 목적입니다. 수도원이 목적이 아니라 거듭남이 목적입니다. 말씀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그 말씀이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3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종합하면, 강사가 말하는 ‘이긴 ’, ‘ 맞은 ’, ‘14만 4천’, ‘생명수’, ‘가장 밝은 ’이라는 여러 표현은 모두 한 중심으로 모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 들어와 그의 사랑과 생각과 삶을 점차 변화시키고, 마침내 사람의 생명의 성격이 되는 ’입니다. 이때 ‘’은 외적인 신분표가 아니라 생명에 새겨진 주님의 질서가 되고, ‘생명수’는 특별한 체험만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삶으로 흘러드는 것이 되며, ‘이긴 ’는 다른 성도보다 우월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해 온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기는가’입니다. 인간의 의지력이 최종적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심에는 언제나 어린양이 계십니다. 사람이 싸우기는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이기게 하는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참된 이김의 마지막 고백은 ‘내가 이겼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밝은 ’을 추구한다는 말도 전혀 다른 울림을 갖습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주님의 빛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이며, 그 빛으로 남을 비추기 전에 먼저 자기 안의 어둠을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 맞은 ’이 되고 싶다는 갈망도 특별한 신분을 얻으려는 갈망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곧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자기 생명에 깊이 새겨지기를 원하는 갈망이 됩니다. ‘생명수’를 원한다는 것도 특별한 신비 체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자기 안으로 흘러와 말과 행동과 관계와 쓰임 전체를 살려 내기를 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3강 5부의 가장 깊은 질문은 ‘나는 14만 4천에 속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이 지금 이마, 사랑에 새겨지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특별한 생명수 체험을 했는가?’보다 ‘주님의 생명이 오늘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이긴 자인가?’보다 ‘오늘 드러난 하나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고 있는가?’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강사가 그토록 강조하는 ‘이긴 자가 되라’는 권면의 힘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가까워집니다. 종말의 어느 날 특별한 성도가 되기 위한 명령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싸움에서 주님 편에 서라는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승리들이 거듭될 때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시고, 생명수를 흐르게 하시며, 마침내 그 사람을 천국의 선과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시키십니다. 사후의 가르침조차 그때 전혀 낯선 무엇을 억지로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지상에서 주님께 향하기 시작한 그 사랑을 더욱 밝은 진리로 완성해 가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이번 3강 5부에서 ‘이긴 ’와 ‘ 맞은 ’을 바라볼 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열어 주는 가장 깊은 지평이라고 하겠습니다.



3강 6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차례의 영적 싸움과이기는 ’ : 거듭남의 과정

3강 6부에서는 지금까지 다루어 온 ‘영적 성장’이 출애굽의 여정과 본격적으로 결합됩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겪은 싸움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고, 이것을 성도의 영적 성장 단계와 연결합니다. 첫 번째는 바로의 군대에 쫓기는 단계, 두 번째는 아말렉과 직접 싸우는 단계, 세 번째는 아모리 왕들과 바산 왕 옥을 비롯한 강한 세력들과 싸우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이를 요한일서의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의 단계와 연결하면서, 처음에는 악의 세력 앞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던 사람이 점차 싸울 수 있게 되고, 마침내 강한 적과도 싸워 이긴 뒤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을 ‘이기는 ’가 되어 가는 영적 성장으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이번 3강 전체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가장 흥미롭게 만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강사가 제시하는 ‘바로의 추격 = 아이 단계, 아말렉 = 청년 단계, 아모리·바산과의 전쟁 = 아비 단계’라는 일대일 도식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역사를 단순한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 이동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영적 성장과 싸움의 과정으로 읽으려 한다는 방향에서는 놀랄 만큼 가까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출애굽기는 그 깊은 속뜻에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악과 거짓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수많은 시험을 통과하여 마침내 선과 진리가 결합된 거듭난 상태로 인도되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강사의 해석을 먼저 충분히 따라가면서 그 아래에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겹쳐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첫 번째 상태는 바로의 군대에 쫓기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싸우지 못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군사적 훈련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합니다. 백성은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아직 영적으로 어린 성도가 악의 세력 앞에서 제대로 싸울 힘이 없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장면이 거듭남 초기의 인간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은 진리를 처음 받아들이고 ‘이제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전의 악한 습관과 사랑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받아들인 뒤에야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악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는 바로의 지배가 일상이었지만, 나오기 시작하자 바로가 추격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거듭남을 시작했기 때문에 싸움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싸움이 생겼다는 것이 반드시 뒤로 물러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악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싸울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 이제 서로 반대되는 두 질서가 만나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갖기 시작한 뒤 자신의 악이 더 많이 보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화를 내면서도 그것이 크게 문제라고 느끼지 않았는데, 말씀을 받아들인 뒤에는 작은 분노까지 마음에 걸립니다. 예전에는 자기 명예를 위해 행동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여겼는데, 이제는 그 동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악이 갑자기 더 많아졌기 때문이라기보다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어둠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모르면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서 ‘나는 신앙생활을 할수록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느껴질까?’ 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거듭남의 초기에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악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배우게 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분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이어서 백성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길을 여시고 인간은 그 길을 걸어갑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이루시지만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열어 주신 길로 자유롭게 걸어가는 응답이 요구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아말렉이 공격해 왔을 때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일방적으로 도망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사람들을 선택하여 직접 싸웁니다.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들고 있고, 여호수아와 백성은 아래에서 전쟁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여 이제 악과 직접 싸울 수 있게 된 ‘청년’의 단계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악 앞에서 두려워 도망치던 사람이 이제는 훈련을 받아 싸워 이기기도 하고 때로는 지기도 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매우 중요한 거듭남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에서 반복되는 핵심 원리입니다. 사람이 ‘주님이 하시니까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하면 자유와 이성이 사용되지 않으며, 악을 자신의 선택으로 거절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 의지력으로 악을 이기겠다’고 하면 proprium에 의존하게 됩니다. 올바른 질서는 ‘나는 최선을 다해 싸우지만 실제 힘은 주님에게서 온다’입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은 이 두 요소를 아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아래에서는 여호수아가 실제로 칼을 들고 싸웁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모세의 손이 들려 있어야 합니다.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기고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깁니다. 문자 그대로만 보면 기이한 전쟁 장면이지만, 상응으로 읽으면 인간의 실제 노력과 주님에게서 오는 능력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은 아래에서 싸워야 하지만 승리의 능력은 위에서 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악습을 끊는 문제를 매우 실제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악습은 성령의 도움으로 비교적 쉽게 끊어지지만, 어떤 악습은 우리의 의지를 들여 계속 싸우면서 끊게 하시는 훈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발의 등이요’라는 말씀을 들고, 주일 설교를 들은 뒤 제목조차 잊어버리는 데서 끝나지 말고 한 주간 그 말씀을 계속 되새기고 묵상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만합니다. 특히 ‘악습에 따라 싸움의 양상이 다르다’는 관찰은 실제 거듭남에서도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악을 한꺼번에 인간에게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차례로 드러내십니다. 어떤 외적 악은 비교적 빨리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 아래 숨어 있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뿌리는 훨씬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이라는 외적 행동을 끊는 것보다 ‘나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깊은 명예욕을 다루는 것이 훨씬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분노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내가 무시당해서는 된다’는 자기 사랑을 다루는 것이 더 깊은 싸움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싸움이 반드시 쉬워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은 악이 드러나면서 전쟁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강사가 말하는 세 번째 단계와도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 같은 강력한 적들과 싸웁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성숙한 ‘아비’의 단계, 곧 더욱 깊은 연단과 싸움을 통과하는 단계로 설명합니다. 초기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과 싸웠다면, 성장할수록 인간의 더 깊은 사랑과 동기 속에 숨어 있는 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초신자보다 자기 자신을 더 부족하게 느끼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상합니다. 더 오래 신앙생활을 했으니 자신이 더 거룩하다고 느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 깊은 영적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반대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이 더 깊이 들어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애와 자기 의, 자기 공로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장은 ‘나는 이제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자기 확신을 키우기보다 주님의 자비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더 깊이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이라는 강사의 구분도 영적 우열의 계급표처럼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국의 성장은 누가 더 높은 계급인가를 겨루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더 깊은 것을 열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어린 단계에는 어린 단계에서 필요한 보호와 은혜가 있고, 청년 단계에는 싸움과 힘이 있으며, 아비의 단계에는 더 깊은 지혜와 사랑이 있습니다. 어느 단계에서도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나안’의 의미가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세 차례의 싸움을 통과하고 가나안에 들어간 성도를 ‘이기는 ’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가나안은 매우 중요한 표상입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나라와 교회, 인간 안에서는 천국적·영적 생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간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의 생명의 중심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모든 싸움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넌 뒤에 오히려 가나안 족속들과 계속 싸워야 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어느 순간 완덕에 도달하면 이상 악과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로 이해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사람은 지상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거듭납니다. 더 나아가 사후 천국에서도 영원히 사랑과 지혜 가운데 완전해져 갑니다.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하신 주님의 선과 지혜를 끝까지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종착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기는 ’도 완성된 무결점 인간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긴 악보다 내일 더 깊은 악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악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나타날 때 누구의 편에 서는가입니다. 악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고 변호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주님의 질서에 반대됨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하는가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씀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더욱 깊어집니다. 영적 싸움에서는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proprium은 놀라울 만큼 자기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것은 ‘정의감’이라고 부르고, 내 고집은 ‘신념’이라고 부르며, 명예욕은 ‘사명감’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은 단순히 싸울 때 힘을 주는 격려문이 아니라 무엇이 실제 선이고 진리인지를 밝혀 주는 빛입니다.

 

주의 말씀은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에서 ‘’이라는 표현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발은 인간의 가장 바깥 자연적 삶, 곧 실제 행위의 차원과 관계합니다. 말씀이 ‘발의 ’이라는 것은 진리가 단지 높은 신학적 사색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오늘 내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빛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이 관계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이 욕망을 따라가야 하는지 거절해야 하는지와 같은 실제 삶의 자리에서 말씀이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강사가 주일에 들은 말씀을 한 주간 계속 되새기라고 권하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영적 훈련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말씀을 단순히 반복해서 기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진리를 기억에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을 실제 상황에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어느 순간 ‘, 바로 상황에서 내가 말씀대로 해야 하는구나’ 하는 때가 옵니다. 그때 진리가 기억에서 삶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 진리를 따라 실제로 행동할 때 진리는 선과 결합합니다.

 

이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입니다. 말씀을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선행만 있으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통해 방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게 하시며, 마침내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이 결합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거듭납니다.

 

이렇게 보면 출애굽 여정 전체는 단순한 ‘연단 코스’보다 훨씬 풍성한 의미를 갖습니다. 애굽은 속박입니다. 홍해는 이전 상태와의 결정적 분리입니다. 광야는 진리를 배우고 시험을 통하여 그것을 삶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만나와 물은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선과 진리입니다. 아말렉과 여러 적들은 거듭남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요단은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경계이고, 가나안은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형성되는 상태입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주체는 인간의 의지력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계속 반복되는 ‘여호와께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지혜로 길을 찾아 가나안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앞서 갔습니다. 만나도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반석의 물도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싸움에서는 그들이 칼을 들었지만 승리는 여호와께로부터 왔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전 과정이 주님의 역사임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애굽에서 나와야 했고, 홍해 앞에서 앞으로 걸어가야 했으며, 만나를 거두어야 했고, 아말렉과 싸워야 했으며, 요단을 건너야 했습니다. 이것이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하는 인간의 자유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돌처럼 끌고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선택하고 선을 행하게 하시며, 그 자유 안에서 주님과 결합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하는 ‘악습을 끊는 훈련’도 매우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직 마음으로는 이것을 좋아하니까 억지로 끊는 것은 위선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악을 좋아하는 욕망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이 죄임을 알고 행하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처음에는 의지와 행동 사이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싸움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해 가시면 언젠가는 이전에 좋아했던 악 자체를 싫어하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 악을 끊었다고 해서 거듭남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술이나 도박이나 음란 같은 눈에 띄는 악습을 끊는 것은 매우 귀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지배욕과 자기애, 교만, 타인에 대한 멸시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외적인 애굽에서 끌어내신 뒤 광야를 지나 더 깊은 적들과 만나게 하십니다. 이 과정이 때로 길고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영적 성장에는 ‘세월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강의 첫머리에서도 복음의 씨가 싹이 되고 이삭이 되고 마침내 익은 열매가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거듭남은 조급하게 완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시면서 수많은 상태와 경험을 통하여 사랑의 질서를 바꾸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은 기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땅 위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겨울 동안에도 뿌리에서는 일이 일어나듯,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도 계속됩니다.

 

이 점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중요합니다. ‘ 사람은 아직 모양인가’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영적 여정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로의 군대 앞에서 떨고 있는 단계인지, 아말렉과 싸우다가 넘어지는 단계인지, 아니면 겉으로는 평범해 보여도 매우 깊은 내적 싸움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보존해 두신 리메인스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론은 다른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를 오래 참고 돕게 하는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이번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연단’, ‘좁은 ’, ‘자기부인’, ‘싸워 이김’을 강조해 온 것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을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하려는 강한 실천적 영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강사 자신도 성결수도회 수도사로서 공용복 선생 시절부터 이 전통 안에 함께해 온 분이라는 배경을 알고 들으면, ‘광야’와 ‘연단’이라는 말이 단순한 강단의 수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삶으로 붙들어 온 언어일 수 있음을 존중하게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수도적 연단을 한 가지 방향으로 더 깊게 가져갑니다. 연단의 목적은 ‘강한 영적 전사’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 의지가 강해져 웬만한 고난은 다 버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 깊이 알고 주님의 힘에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악을 이겨야 한다’고 싸웠다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 아니시면 나는 이길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때 더 힘 있게 싸울 수 있습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를 한 사람의 거듭남으로 읽으면 이것이 선명해집니다. 처음에는 바로가 너무 커 보이고 이스라엘은 너무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정이 계속될수록 사람이 강해진다기보다 ‘여호와께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점점 배우게 됩니다. 아말렉과 싸우면서도 모세의 손이 들려 있어야 하고, 여리고 앞에서는 인간의 군사 전략보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기 능력을 더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시록의 ‘이기는 ’와 다시 만납니다. 이기는 자는 자신의 영적 근육이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린양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기는 사람입니다. 계시록 전체가 결국 보여 주는 승리는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입니다. 사람은 그 승리에 참여합니다. 주님 편에 서서 싸우고, 진리를 선택하고, 악을 거절하면서 주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자기 생명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바로의 추격을 받고,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며, 강한 적들과의 전쟁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의 여정은 단지 성도가 단계의 연단 코스를 통과하여 영적 강자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속박에서 끌어내어 진리를 가르치시고, 시험 가운데 진리를 삶으로 만들게 하시며,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과 거짓을 거절하게 하시는 가운데 실제 모든 승리는 주님께로부터 받게 하시고, 마침내 선과 진리가 결합된 천국적 질서를 사람 안에 이루어 가시는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그리고 이 해설의 끝에서 가장 오래 남았으면 하는 것은 강사의 매우 소박한 권면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훈련을 해야 된다.’ 이 말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생명줄입니다. 광야에서는 길을 잃기 쉽고, 자기 생각이 주님의 뜻처럼 느껴질 때도 있으며, 악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그때 우리의 ‘발에 ’이 됩니다. 아주 먼 미래를 한꺼번에 비추는 탐조등이라기보다, 오늘 내딛어야 할 한 걸음을 보여 주는 등입니다. 오늘 이 사람에게 화를 낼 것인가 참을 것인가, 이 일을 정직하게 처리할 것인가 편법을 택할 것인가, 내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관계의 선을 지킬 것인가, 받은 상처를 붙들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를 비춥니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을 주님의 힘으로 옮길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애굽에서 멀어지고 가나안을 향해 갑니다.

 

결국 ‘이기는 ’가 되는 길은 어떤 거대한 마지막 시험에서 한 번 영웅적으로 승리하는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작은 진리 하나를 실제로 살아내고, 내일 또 하나의 악이 드러나면 그것을 주님 앞에 인정하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그러면서 점점 자기 힘보다 주님의 힘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을 오래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가나안을 향해 걸어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자기 손을 꼭 붙잡고 이끌고 계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강의 첫머리에서 함께 부른 ‘예수님 손을 잡아 주소서’라는 찬송이 그래서 3강 6부 전체의 영적 내용을 뜻밖에 정확하게 압축하고 있습니다.



3강 7부

예루살렘의 이름 시온산, 14만 4천 : 천국의 장소와 상태, 그리고이름이 기록된다

3강 7부에서는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이기는 ’의 문제가 계시록 3장 12절의 약속 가운데 특히 ‘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집중됩니다. 강사는 생활 속의 작은 일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이기는 ’이라고 강조한 뒤,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 이것이 열매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 번째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넘어가, 이기는 자에게 ‘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는 약속을 풀이하기 시작합니다. 이 흐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강사에게 ‘ 예루살렘’은 단순한 종말론적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실제로 연단을 통과하고 이긴 사람이 마침내 들어가게 되는 최고의 천국적 목적지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앞부분에서 강사가 ‘이김’을 거창한 순교나 위대한 업적보다 일상생활의 작은 사랑과 연결한 것은 이번 3강 가운데서도 특히 귀하게 받아들일 만한 대목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났을 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반갑게 인사하는 것, 가족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 오히려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 배우자가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했을 때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 같은 매우 구체적인 예를 듭니다. 강사는 이것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바로 이런 작은 승리들이 쌓여 ‘익은 열매’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큼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대부분 거대한 사건보다 아주 작은 선택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평생 한두 번 경험할 극적인 사건보다 매일 수십 번 만나는 작은 선택들이 그의 사랑을 형성합니다. 말을 한마디 더 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상대의 허물을 들추어낼 것인가 덮어 줄 것인가, 나에게 돌아올 이익을 먼저 생각할 것인가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생각할 것인가, 인정받지 못했을 때 마음속으로 상대를 깎아내릴 것인가 자기애의 움직임을 보고 거절할 것인가 하는 선택들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작은 선택이 단순한 ‘착한 행동 점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 안에는 어떤 자극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반응하려는 오래된 proprium의 경향이 있습니다. 무시당하면 화를 내고 싶고, 손해를 보면 보복하고 싶으며, 자존심이 상하면 상대를 낮추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 순간 말씀의 진리가 떠오르고, 사람이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자기 욕망을 거절한다면 아주 작은 사건 속에서 실제 영적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밖에서 보면 인사 한 번 하고 지나간 일에 불과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자기애가 한 걸음 물러나고 주님의 질서가 한 걸음 들어온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 것보다 생활 속의 작은 것으로 승부를 보자’고 말한 것은 상당히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적 성격은 추상적인 신앙 고백이 아니라 반복되는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의지 안에 형성됩니다. 진리를 한 번 아는 것과 그 진리를 반복하여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기억에 있고, 다음에는 이해에 있으며, 실제로 행하기 시작하면 의지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기쁨이 되면 진리와 선이 결합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이런 흐름 뒤에서 강사는 계시록 3장 12절의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위에 기록하리라’를 다룹니다. 강사는 이 가운데 ‘ 예루살렘의 이름’을 특별히 천국의 특정한 장소와 연결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가나안 전체가 천국을 표상한다면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왕이 거하는 도성, 곧 수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역시 천국 전체가 아니라 ‘천국의 수도’이며, 이기는 자들이 특별히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상당히 구체적인 공간적 천국관을 제시합니다.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말씀을 정육면체의 실제 공간적 구조로 이해하고, 그것을 천국 안의 특별한 중심 도성으로 봅니다. 이어서 구약의 모리아산, 시온산, 예루살렘을 동일한 장소가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 설명하면서, 이것을 천국에도 적용합니다. 지상의 모형에서 모리아산이 시온산이 되고 예루살렘이 되었듯, 현재 천국의 수도가 ‘시온산’이며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면 그것이 ‘ 예루살렘’이라 불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강사의 해석 사이에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어느 쪽을 공격하거나 재단하는 방식보다 ‘말씀의 표상을 어디까지 자연적 공간으로 읽고, 어디서부터 영적 상태로 읽을 것인가’라는 차이로 설명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강사는 가나안과 예루살렘의 지리적 구조를 천국의 실제 지리적 구조에 비교적 직접적으로 대응시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가나안과 예루살렘, 시온을 모두 상응에 따라 영적인 상태와 교회,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읽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 예루살렘’은 특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천국 안에 있는 거대한 정육면체 형태의 수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내려오는 ‘ 교회’를 표상합니다. 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도 어떤 물질적 도시가 우주 공간을 통과하여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이름 자체의 상응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교회를 나타내며, 특히 교회의 교리와 진리의 측면을 나타냅니다. 그곳에 성전이 있고 예배가 이루어지며, 율법과 가르침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새롭게 세우시는 교회, 곧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참된 이해와 그 이해에 따른 생명이 새롭게 형성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먼저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야 할 도시라기보다 ‘어떤 상태인가?’를 물어야 할 영적 실재입니다.

 

이 차이는 계시록 전체를 읽는 방법과 직결됩니다. 계시록의 성, 문, 성벽, 보석, 금, 강, 생명나무, 숫자와 치수를 자연계의 건축물과 동일한 방식으로 읽으면 계시록은 미래 천국의 지리와 건축을 묘사하는 책이 됩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읽으면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와 인간의 상태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영적 그림이 됩니다. 성벽에도 의미가 있고, 열두 문에도 의미가 있으며, 열두 기초석과 각종 보석에도 의미가 있고, 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것에도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것은 정육면체의 천국 건축물을 정확하게 측량하도록 주어진 정보라기보다, 새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완전하고 조화로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더 가깝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자연적 산술을 위한 숫자가 아니라 영적 질과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을 몇 리, 몇 킬로미터 크기의 실제 도성으로 계산하기 시작하면 문자적 형상은 선명해질 수 있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아르카나는 오히려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온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사는 시온산을 현재 천국의 수도 이름으로 이해하고, 장차 그것이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시온은 예루살렘과 아주 가까우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일반적으로 ‘시온’은 교회와 천국 가운데에서도 사랑의 선, 특히 주님을 향한 천적 사랑과 관련되고, ‘예루살렘’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교리에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시온과 예루살렘은 단순히 같은 장소의 옛 이름과 새 이름이라기보다 선과 진리,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가르침이라는 서로 구별되면서 결합되는 영적 실재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매우 아름다운 부분입니다. 성경에서 ‘시온과 예루살렘’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단순한 시적 반복만은 아닙니다. 시온은 선과 사랑에 속한 것을, 예루살렘은 진리와 신앙에 속한 것을 나타내며, 둘이 함께 언급될 때에는 교회의 선과 진리가 결합된 전체 상태가 표현될 수 있습니다. 결국 천국의 본질도 장소보다 이 결합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합당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가 천국입니다.

 

따라서 ‘시온산에 14만 4천’이라는 장면도 훨씬 깊어집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14만 4천을 ‘교회 시대 이긴 자들’, 곧 ‘ 맞은 종들’로 이해합니다.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계시록 3장 12절에서도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기록하겠다고 했으므로 양쪽을 동일한 집단으로 연결합니다. 이 논리 안에서 강사는 결국 ‘이긴 = 맞은 = 14만 4천 = 시온산에 서는 사람 =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하나의 체계를 세웁니다.

 

이 체계는 강사의 ‘핵심진리’ 전체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단순히 ‘스베덴보리와 다르다’고 지나가면 강의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강사가 왜 그토록 ‘연단’, ‘이김’, ‘완덕’, ‘익은 열매’를 강조하는지 여기에서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 위한 덕목이 아니라, 그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는 실제로 14만 4천의 ‘이긴 ’가 되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보완을 제공합니다. 계시록의 14만 4천은 정확히 그 숫자만큼의 특별한 사람을 선발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12’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 따라서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수입니다.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이 모두 이 구조 안에 있습니다. 144는 12 곱하기 12이고, 144,000은 그 의미가 충만하게 확대된 것입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구원받은 최고 등급의 정확히 144,000명’이라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새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충만한 전체를 표상한다고 보는 것이 상응에 더 가깝습니다.

 

강사는 실제로 ‘14만 4천이면 너무 적지 않느냐’는 질문을 예상하면서 ‘적지 않다’고 말하고, 그 숫자를 실제 예정된 수로 이해합니다. 또한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고 광야 과정에 있는 사람들과, 가나안에 들어간 14만 4천의 ‘ 맞은 ’을 구별합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체계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당히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성장을 자연적 숫자의 정원과 결합하는 순간 ‘나는 안에 들어가는가?’라는 경쟁적·선발적 신앙이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초점은 천국의 정원 제한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사람을 일정 숫자까지만 받아들이고 문을 닫는 사랑이 아닙니다. 천국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몇 명을 받아 주시는가가 아니라 사람이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었는가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기뻐하는 사람은 천국의 분위기를 기뻐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가장 깊은 분별은 ‘명단에 들어갔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랑이 사람의 생명이 되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계시록 3장 12절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말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나 신분증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어떤 존재의 ‘이름’은 그 존재의 질, 곧 그 성품과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에게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문자적 이름 몇 글자가 영적 이마에 쓰인다는 의미를 넘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생명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 예루살렘의 이름을 위에 기록하리라’는 말씀 역시 ‘ 예루살렘에 입장할 자격증을 붙여 주겠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새 예루살렘이 주님의 새 교회와 그 교회의 진리와 선을 나타낸다면, 그 이름이 사람에게 기록된다는 것은 그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질이 그 사람 안에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 자신이 ‘ 예루살렘적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전환입니다. 질문이 ‘나는 죽어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있을까?’에서 ‘ 예루살렘이 지금 안에 내려오고 있는가?’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1장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합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위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와 그의 생각과 사랑과 행위를 새롭게 질서 지을 때, 작은 의미에서 새 예루살렘이 그 사람 안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과 ‘ 예루살렘이 사람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면 사후에는 그 내적 상태와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천국에서 장소는 상태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영계에서는 비슷한 사랑과 진리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가까이 있고, 다른 상태의 사람들은 멀리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영계의 공간은 자연계의 물리적 공간과 동일하지 않고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공간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강사가 말하는 ‘천국의 수도’라는 표현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자연계의 서울이나 워싱턴처럼 중앙정부가 위치한 물리적 수도로 상상하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가장 중심적인 선과 진리가 가장 충만하게 나타나는 영적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는 실제 공동체들이 있고 장소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치는 거리와 좌표보다 사랑과 지혜의 상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중심’이라는 말 역시 영적으로는 주님과의 결합 상태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있다’는 표현이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시온산의 주소가 어디인가?’가 아니라 ‘어린양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 것은 황금길도, 보석 성벽도, 거대한 도성도 아닙니다. 주님의 임재입니다. 그리고 그 임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14만 4천이 시온산에 서 있다는 말씀의 중심은 특별한 엘리트들이 최고급 천국의 수도에 입성했다는 데 있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교회의 충만한 전체가 어린양과 결합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또 그들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마는 얼굴 가운데에서도 특히 사랑과 의지의 상태와 관련됩니다. 얼굴이 인간의 내적 애정을 나타낸다면 이마는 그 중심적인 사랑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지적 기억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에게서 오는 선이 그들의 지배적 사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3강 7부 앞부분의 ‘작은 승리’와 뒷부분의 ‘이마에 기록된 이름’이 사실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전혀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한쪽에서는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라고 하고, 배우자가 기분 나쁘게 맞는 말을 했을 때 참으라고 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시온산과 새 예루살렘과 14만 4천이라는 거대한 계시록의 환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둘 사이에 놀라운 연결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은 바로 그런 작은 선택들을 통해 사람 안에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영적 이마에 도장이 ‘’ 찍혀 천국의 특별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싶은 순간에 사랑을 선택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고 싶은 순간에 이웃의 선을 생각하고,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순간에 진리를 선택하고, 자기 공로를 주장하고 싶은 순간에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선택들이 쌓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선과 진리가 조금씩 인간의 의지 안에 새겨집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작은 쌓이고 쌓이고 쌓여 가지고 익은 열매가 된다’고 말한 것은 오히려 ‘이름이 기록된다’는 계시록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매우 좋은 실천적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은 단순히 적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집니다. 주님의 이름을 입술로 부르는 것과 주님의 성품이 사람의 생명에 새겨지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의 이름을 생명에 기록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정직과 겸손과 쓰임의 질서가 사람의 실제 선택 속에서 자기 것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자기 것이 된다’는 표현은 조심해야 합니다. 선 자체가 인간의 소유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선은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천사들도 자기 안의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사가 천사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기 안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것을 기쁘게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선이 ‘생명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자기 공로로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이기는 ’ 개념도 한층 부드럽고 깊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영적 전쟁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14만 4천의 제한된 정원 안에 선발되는 사람이기 전에, 날마다 자기 안의 proprium과 싸우면서 주님께서 이기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가장 큰 승리는 ‘내가 이겼다’는 의식마저 내려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승리자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영성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과도 아주 깊은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의 최종 목적은 고통을 많이 견디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영적 등급을 획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질서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중심이 되시는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광야 연단’도 자기 의지를 강철처럼 단련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자기 의지를 주님의 질서 아래 놓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됩니다. 이 사경회의 오랜 수도적 전통을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깊이 보태 줄 수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강사는 이어 ‘광야 연단 과정 속에서 자기 , 자기 행실을 깨끗하게 빨아서 정결해진 행실이 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권세를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매우 귀한 핵심이 있습니다. 계시록의 ‘’이 인간의 삶과 관계된다는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의복은 인간의 내적인 것을 감싸고 표현하는 진리, 그리고 그 진리에 따른 외적 삶과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옷을 깨끗하게 한다는 이미지를 실제 삶의 정결과 연결하는 방향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그 옷을 사람이 자기 힘으로 깨끗하게 만들어 입장 자격을 획득한다고 이해하면 자기 공로의 위험이 생깁니다. 계시록의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합니다. 중심은 언제나 어린양입니다. 인간은 회개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악을 제거하시고 선을 주시는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나는 광야에서 충분히 연단받아 자격을 얻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께서 나를 수없이 넘어지는 가운데 붙들어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익은 열매’의 의미도 바꾸어 놓습니다. 익은 열매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실제 행위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자기 자신에게 먹이려고 맺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존재에게 양식이 됩니다. 따라서 영적 열매의 가장 분명한 표지는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연단을 받았는가보다 그 연단을 통해 내가 얼마나 더 온유하고 자비롭고 정직하고 유용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높은 ’을 생각할 때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천국의 수도이고 14만 4천의 이긴 자들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높음은 지위의 높음보다 사랑과 쓰임의 깊이입니다. 가장 높은 천사는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천사가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 때문에 가장 넓은 쓰임을 기쁨으로 행하는 천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가장 낮게 여깁니다. 자기 안의 모든 선이 주님의 것임을 가장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약속은 어떤 의미에서는 ‘천국 시민권’보다 훨씬 더 큰 약속입니다. 단순히 좋은 장소에 보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와 상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사람을 외적으로 집어넣는다고 천국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안에 천국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선과 진리의 결합이 그 사람의 생명이 되어야 그 사람은 천국의 분위기 속에서 숨 쉬듯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가장 깊은 준비는 새 예루살렘이 먼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내 이해를 새롭게 하고, 그 진리에서 오는 선이 내 의지를 새롭게 하며, 그 선과 진리가 결합하여 내 실제 삶을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은 먼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작은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하신다는 말씀은 연단을 완성한 정확히 14만 4천 명의 특별한 성도가 천국의 물리적 수도에 입성할 자격을 얻는다는 뜻으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자기애와 거짓을 이기시고 사람이 자유롭게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교회의 질서가 그의 사랑과 삶에 새겨지며, 마침내 내적 상태와 상응하는 천국의 공동체 안에서 어린양과 결합하게 된다는 아르카나로 읽을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7부에서는 뜻밖에도 강사가 앞에서 한 아주 소박한 말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작은 쌓이고 쌓이고 쌓여 가지고 익은 열매가 된다.’ 이것은 거대한 새 예루살렘 환상을 우리의 오늘 하루와 연결해 줍니다. 새 예루살렘은 계시록 마지막 장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하는 그 순간, 배우자의 옳은 말을 자존심 때문에 거부하지 않는 그 순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하는 그 순간, 내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선을 먼저 생각하는 그 순간,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한 뒤 ‘내가 잘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도우셨다’고 마음을 돌리는 그 순간, 새 예루살렘의 한 조각이 우리 안으로 내려옵니다.

 

그렇게 작은 선택이 쌓이고,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선이 점차 사랑이 되어 갈 때 주님의 ‘이름’은 더 이상 성경책의 글자에만 있지 않고 사람의 생명에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위에 기록하리라’는 약속의 가장 아름다운 성취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새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를 새 예루살렘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3강 8부

천년왕국, 첫째 부활과 노릇’ : 주님의 나라와 부활의 참된 의미

3강 8부에서는 앞서 다룬 ‘ 예루살렘의 이름’과 14만 4천에 관한 설명에서 자연스럽게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광야의 연단 가운데 ‘자기 ’, 곧 자기 행실을 깨끗하게 하여 익은 열매가 된 이기는 자에게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가 주어진다고 정리한 뒤, 계시록 20장 1절 이하의 천년왕국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종말론적 체계에서는 예수님께서 지상 재림하시고 아마겟돈 심판을 행하신 뒤 이 땅에 실제적인 ‘천년 그리스도 왕국’, 곧 메시아 왕국을 세우십니다. 따라서 이번 8부는 앞서의 개인적 영적 성장론이 본격적인 미래 종말론의 시간표와 결합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눈여겨볼 것은 강사가 ‘천년왕국’을 말하면서 지상의 천국을 주장하는 여러 이단적 재림주 운동과 자기 해석을 분명하게 구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이단들이 쓰는 단골 메뉴’ 가운데 하나가 영계의 천국은 말하지 않고 ‘내가 재림 메시아로 왔으니 땅에 지상천국을 이루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의 주님의 승천과 재림 말씀을 근거로 그러한 자칭 재림주들을 배격합니다. 이 부분은 중요합니다. 강사의 천년왕국론을 단순히 ‘지상천국론’이라는 한 단어로 묶어 버리면 강의 자체가 의도적으로 구별하고 있는 지점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여기서 한 걸음 더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참된 재림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님의 나라는 어디에 어떻게 임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재림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주님께서 자연계의 구름을 타고 지상에 다시 나타나시는 사건이고, 그 뒤 실제적인 메시아 왕국이 이 땅에 천 년 동안 세워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주님께서 다시 육체를 입고 자연계에 오시는 두 번째 성육신이나 자연적 구름을 타고 물리적으로 내려오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의 속뜻이 열리고 그 안에 계신 주님께서 신적 진리로 새롭게 나타나시는 영적 강림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큽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어느 해석은 틀리고 어느 해석은 맞다’는 식으로 처리하기보다, 두 해석이 계시록의 언어를 바라보는 층위가 다르다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강사는 계시록의 사건들을 미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날 일들의 모형과 예언으로 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사건들의 자연적 형상 안에서 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 그리고 주님의 신적 질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봅니다. 앞서 새 예루살렘을 실제 천국의 수도로 보는 것과 주님의 새 교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생겼습니다.

 

계시록 20장의 ‘ ’도 같은 원리로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말씀의 숫자는 대부분 자연적 산술을 목적으로 주어진 숫자가 아닙니다. 특히 ‘’은 정확히 1,000년이라는 시간 단위를 가리키기보다 많음, 충만함, 완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천년왕국’을 달력으로 정확히 1,000년 동안 존속하는 미래의 지상 정치체제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숫자 ‘’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의 충만함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계시록을 읽는 방향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질문은 ‘천년왕국은 언제 시작되는가?’, ‘휴거 전인가 후인가?’, ‘누가 왕국에 들어가는가?’, ‘그곳에서 누가 노릇하는가?’가 됩니다. 그러나 속뜻으로 들어가면 질문은 ‘주님의 통치가 인간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악과 거짓의 세력이 결박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첫째 부활은 무엇인가?’, ‘주님과 함께 노릇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로 바뀝니다. 계시록의 관심이 미래 연표에서 현재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강사가 지금까지 반복해서 강조한 ‘연단’과 ‘이김’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 내적 독법이 강의의 실천적 중심을 더 깊게 살려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나라가 먼 미래에만 세워지는 것이라면 지금의 영적 싸움은 그 미래 왕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한 준비가 되기 쉽지만, 주님의 나라가 지금 인간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영적 싸움 자체가 이미 그 나라가 임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기애의 요구를 거절하고 주님의 진리에 순종할 때, 바로 그만큼 내 안에서 자기의 왕국이 물러나고 주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은 먼저 장소이기 전에 상태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사랑과 생각을 다스리는 상태가 천국이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지배하는 상태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왕이 되신다’는 것은 단지 먼 미래에 예루살렘에 왕좌를 설치하신다는 의미에 앞서, 인간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지배적인 원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 노릇한다’는 계시록의 표현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왕 노릇은 다른 사람 위에 서서 명령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 노릇’은 그런 지배와 정반대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의 권세는 다른 사람을 자기 뜻 아래 굴복시키는 권세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로 악과 거짓을 다스리고, 그 진리를 통해 선한 쓰임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안 노릇하리라’는 말씀을 어떤 특별한 성도들이 미래 천년왕국에서 정치적 통치권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다스린다는 그림으로만 읽으면 천국적 ‘왕권’의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은 먼저 자기 밖의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무질서를 주님의 진리 아래 두는 것입니다. 분노가 올라와도 분노가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명예욕이 올라와도 명예욕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하며, 탐욕이 올라와도 그것이 삶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다스리고 사랑이 목적이 되는 질서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강사가 강조해 온 ‘이기는 ’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진정한 왕은 다른 사람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실제 승리자는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적 진리로 악과 거짓을 굴복시키십니다. 인간은 주님의 편에 서서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웁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이 가장 깊이 아는 것은 ‘ 권세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시록의 ‘보좌’도 단순한 왕실 의자로만 볼 수 없습니다. 보좌는 심판과 통치, 그리고 그 통치를 이루는 신적 진리와 관련됩니다. 사람이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권력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 악과 거짓을 분별하는 상태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천국마저 지상의 권력구조처럼 상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천국은 지상 왕국을 크게 확대해 놓은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질서와 등급과 통치가 있지만, 그 모든 질서는 사랑과 쓰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높은 천사는 낮은 천사를 지배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높은 사랑과 지혜를 가진 만큼 더 넓은 쓰임을 행합니다. 천국의 통치는 자기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가장 높은 자들은 자신을 가장 낮게 여깁니다.

 

이 점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영성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과도 아주 중요한 접점을 가집니다. 자기부인이 깊어질수록 ‘내가 남보다 높은 영적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욕망까지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일 연단과 금욕과 순종을 오래 한 결과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 ‘나는 이긴 자다’, ‘나는 높은 천국에 사람이다’라는 의식이 강해진다면, 외적인 proprium은 억제했을지 몰라도 더 미세한 영적 proprium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깊은 연단을 거친 사람이 갈수록 부드러워지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이해하며,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 연단은 천국적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가 이번 사경회 전체에서 반복하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개회기도에서도 ‘자기와의 싸움’, 환경과의 싸움 가운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고, 순간순간 회개하며 감사함으로 봉사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드려집니다. 이 기도에는 이 사경회의 영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종말론적 시간표가 아무리 상세하더라도 이 공동체가 실제로 요구하는 삶은 결국 자기와 싸우고, 회개하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봉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실천적 중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 공정한 해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계시록 20장의 ‘첫째 부활’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문자적 미래주의에서는 첫째 부활을 미래 어느 시점에 죽었던 특정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먼저 부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강사의 천년왕국 체계에서도 부활은 종말의 시간표 속에 배치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부활 자체를 먼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봅니다. 인간은 자연적 육체가 죽은 뒤 오랜 세월 무덤에서 무의식적으로 기다렸다가 먼 미래에 다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적 몸이 죽으면 영은 영계에서 깨어나 계속 살아갑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 역시 무덤 속 육체가 먼저 일어나는 장면만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깊게는 사람이 자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일어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를 형성하시고, 사람이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영적 죽음과 영적 생명은 자연적 심장이 뛰느냐 멈추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가 영적 죽음이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생명이 되는 상태가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가 하나의 부활입니다. 사람이 회개할 때마다 죽은 부분에서 일어납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옮겨 갈 때 일어나고, 거짓에서 진리로 옮겨 갈 때 일어나며, 자기 공로에서 주님의 은혜로 옮겨 갈 때 일어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시록의 부활은 먼 미래의 기적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야 할 영적 현실입니다.

 

이것은 강사가 앞서 ‘구원이 완성되었다’, ‘광야 과정을 통과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표현한 것과도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어느 순간 인간이 완덕의 선을 넘어 더 이상 거듭날 필요가 없는 완성품이 된다고 보기보다, 주님께로 향하는 지배적 사랑이 형성되고 그 사랑이 계속해서 더 깊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천사들조차 영원히 사랑과 지혜에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구원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상당히 중요합니다. 만일 ‘나는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확신이 ‘이제 나는 익은 열매이며 사람은 아직 광야에 있다’는 판단으로 이어지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동기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주님만이 그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자기 위치를 확정하는 것보다 오늘 주어진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강사가 ‘14만 4천도 많은 숫자’라고 하면서 그 수를 실제로 예정된 수로 이해하는 부분도 앞서 살펴본 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응적으로 다시 읽게 됩니다. 천년이 정확한 1,000년을 반드시 뜻하지 않는 것처럼 14만 4천도 정확한 인원수를 반드시 뜻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영적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표현합니다. 이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면 계시록은 ‘ ’, ‘ ’, ‘ ’, ‘ 나라’의 계산에서 벗어나 훨씬 더 깊은 영적 구조를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계시록에서 역사적 사건의 차원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계시록이 교회의 역사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도래를 다룬다고 봅니다. 다만 그 사건들은 자연계의 국제정치 시간표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심판과 교회의 영적 상태 변화라는 차원에서 이해됩니다. 이 점은 강사의 미래주의적 계시록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가장 큰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마지막 심판’은 자연계의 지구가 불타 없어지고 모든 죽은 육체가 무덤에서 일어나 한 장소에 모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심판은 영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죽은 즉시 영으로 살아 있으며, 자신의 지배적 사랑이 드러남에 따라 결국 자신과 상응하는 천국이나 지옥으로 갑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마지막 심판은 영계에 오랫동안 형성되어 있던 거짓된 영적 사회들이 분리되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사건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천년왕국을 지상의 국제정치적 왕국으로 세밀하게 구성해야 할 필요도 줄어듭니다. 주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영적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의 나라가 인간 안에 임하면 자연계에도 결과가 나타납니다. 더 정직한 사회, 더 자비로운 관계, 더 정의로운 제도, 더 선한 쓰임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천국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외적 제도를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도 인간의 사랑이 자기중심적이면 그 제도는 결국 변질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지상천국’에 대한 강사의 경계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뜻밖에 만납니다. 강사는 자칭 재림주가 나타나 ‘내가 땅에 지상천국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을 이단의 전형적 주장으로 경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외적 사회체제를 바꾸는 것만으로 천국을 만들 수 없다고 봅니다. 천국은 인간의 내면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기애와 지배욕이 그대로인데 완벽한 제도만 만들면 그 제도는 결국 그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나라는 먼저 ‘누가 통치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내 삶에서 돈이 왕인가, 명예가 왕인가, 내 의견이 왕인가, 아니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왕인가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는 천년왕국이 더 이상 먼 미래의 종말론적 호기심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내 안에서 어느 나라가 세워지고 있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강사가 개회 설교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를 중심으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리고 빛의 열매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강조한 것도 다시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사실 천년왕국의 가장 깊은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왕이신 나라는 사람들이 종말론적 지식을 많이 가진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빛이 그들의 삶에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나라입니다.

 

강사는 또한 성령께서는 ‘진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강조하고, 흐리고 세상적이며 기복적이고 정욕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순수하고 누룩이 섞이지 않는 밝은 진리’를 통해 영성이 살아나고 삶이 밝아지며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가까운 지점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고 선한 삶으로 인도하는 빛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알았는데 삶이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쉽게 정죄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아직 생명과 결합되지 못한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밝은 진리’를 무엇으로 판별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더 세밀하고 비밀스러운 종말 시간표를 알고 있다는 것이 반드시 더 밝은 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밝음은 그 진리가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얼마나 분명히 드러내고, 인간을 악에서 떠나 선한 삶으로 인도하는가와 관계합니다. 높은 진리는 높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는 오히려 자기 지성의 우월감을 키우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번 사경회 전체를 해설하면서 계속 붙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이 사경회에는 강한 종말론적 확신과 독특한 계시록 해석이 있습니다. 동시에 자기부인, 회개, 사랑, 봉사, 연단, 성결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요청도 있습니다. 이 둘 가운데 후자를 가볍게 여기면서 전자의 교리적 차이만 비판하면 이 사경회의 실제 영성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반대로 실천적 열심이 귀하다고 해서 모든 종말론적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할 일은 좋은 것은 충분히 알아보고, 문자적 해석이 속뜻을 가릴 수 있는 곳에서는 조용히 더 깊은 층을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3강 8부의 ‘천년왕국’은 폐기해야 할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주제입니다. ‘ 년이 정말 1,000년인가?’만 묻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의 통치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누가 그때 노릇하는가?’에서 ‘지금 안에서 무엇이 노릇하고 있는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은 언제 일어나는가?’에서 ‘나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년왕국은 갑자기 오늘의 문제가 됩니다. 화를 내고 싶은 순간에 주님의 진리가 내 분노를 다스리면 그 작은 영역에서 주님께서 왕이 되십니다. 돈 때문에 진리를 타협하고 싶은 순간에 정직을 선택하면 그 자리에서 주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내 의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상대의 선을 먼저 생각하면 자기 왕국이 조금 무너지고 주님의 왕국이 조금 더 세워집니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을 거절할 때 첫째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강사가 말한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 익은 열매가 된다’는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천년왕국과 새 예루살렘이라는 거대한 계시록의 환상이 결국 한 사람의 작은 일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미래에 주님께서 왕이 되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먼저 오늘 자기 안에서 주님께 왕좌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먼저 말씀의 신적 진리가 자기 생각과 사랑 안으로 오시도록 받아들여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새 예루살렘의 선과 진리가 자기 삶 안으로 내려오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천년왕국의 문자적 그림을 내적 의미로 옮기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종말의 긴장감을 약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종말을 훨씬 더 가까이 가져오기 위해서입니다. 자연적 미래주의에서는 종말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날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종말’은 낡은 자기중심적 질서가 끝나고 주님의 새로운 질서가 시작될 때마다 우리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교회 전체에도 그러하고 개인에게도 그러합니다.

 

3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과 첫째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노릇한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미래 어느 시점에 자연계로 다시 내려오셔서 정확히 동안 지상 정치왕국을 세우시고 특별히 선발된 성도들에게 통치권을 나누어 주신다는 시간표로만 읽기보다, 마지막 심판을 통하여 악과 거짓의 거짓된 지배가 무너지고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에서 오는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세워지며, 개인 안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일어나 주님의 선과 진리가 다스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읽을 속뜻이 더욱 깊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8부에서 특히 귀하게 남길 것은 ‘ 노릇’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높은 영적 단계에 올라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지옥적 사랑들이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거듭납니다. 그러고 나면 놀랍게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도 점차 잃어버립니다. 천국적 사랑은 지배하려 하지 않고 섬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깊이 거듭난 사람은 ‘나는 왕이 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만이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 지혜도, 자기 의도, 자기 공로도 왕좌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앉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주님과 함께 ‘ 노릇’합니다. 자기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왕이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년왕국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언제입니까?’보다 ‘누가 지금 나를 다스리고 있습니까?’일 수 있습니다. 그 답이 조금씩 ‘’에서 ‘주님’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강사가 말하는 광야의 연단과 이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욱 깊이 읽었을 때 보이는 거듭남의 길이며, 계시록의 천년왕국이 우리의 오늘과 만나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3강 9부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그리고 천년왕국의 부류’ : 부활, 천국의 다양성, 그리고 쓰임의 질서

3강 9부에서는 앞서 살펴본 천년왕국의 논의가 한층 더 구체화됩니다. 강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고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라는 말씀을 근거로 부활의 순서를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이시며, 그 다음에는 주님의 강림 때 그분에게 ‘붙은 자들’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는 자신이 앞서 세운 ‘공중 강림’과 ‘지상 재림’의 구분을 적용하여, 공중 강림 때 휴거되는 성도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이들이 천년왕국에서 ‘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한다고 설명합니다. 나머지는 둘째 부활에 속한다고 구별합니다.

 

이어서 강사는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 부류’로 나눕니다. 이 구분은 그의 ‘핵심진리’ 체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왕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 왕들을 보필하는 사람이 있으며, 일반 백성으로서 땅을 분배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형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갈 때의 구조에서 찾습니다. 곧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는 일반 백성’이라는 세 부류가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세 종류의 성도들을 미리 보여 주는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번 3강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천국에 서로 다른 상태와 쓰임이 있다’는 강사의 기본 직관은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왕-왕을 보필하는 자-일반 백성’이라는 지상 왕국의 신분구조로 이해하는 데서는 상당한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질서정연하지만, 그 다양성은 특권과 신분의 서열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종류, 그리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쓰임’의 차이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먼저 강사의 논리를 조금 더 충분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에 있는 14만 4천을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부르는 데 주목합니다. 만일 익은 열매가 한 종류뿐이라면 굳이 ‘처음’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가 있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익은 열매도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그 수가 세 종류인 이유를 구약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에서 찾습니다.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은 일반 백성이라는 세 종류가 있었으므로 천국에도 세 종류의 익은 열매가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두 번째 익은 열매를 순교자들과 연결합니다.

 

이러한 해석법의 장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구약과 신약, 특히 출애굽-광야-가나안의 구조와 계시록을 하나의 구속사적 그림으로 연결하려고 합니다. 구약의 사건을 단순한 과거 역사로 끝내지 않고 신약의 영적 실재를 미리 보여 주는 모형으로 읽으려는 것입니다. 이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와 성막, 제사장, 레위인, 가나안, 예루살렘 등을 모두 더 깊은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표상한다’는 것이 곧 자연적 구조가 미래에 그대로 재현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한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제사장과 레위인과 일반 백성이 있었으므로 천년왕국에도 정확히 그에 상응하는 세 계급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읽는 것은 ‘모형’을 자연적 차원에서 반복시키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표상의 핵심은 자연적 형상 안에 감추어진 영적 실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질문은 ‘천국에서 누가 제사장 계급이고 누가 레위인 계급인가?’보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각각 어떤 영적 선과 진리, 그리고 쓰임을 표상하는가?’가 됩니다.

 

특히 말씀에서 ‘제사장’과 ‘’은 매우 중요한 두 축을 이룹니다. 제사장적인 것은 선과 사랑에 관계하고, 왕적인 것은 진리와 신앙에 관계합니다. 주님께서 왕이시며 동시에 제사장이신 것도 그분 안에 신적 선과 신적 진리가 완전히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 같은 제사장’이라는 표현 역시 천국에서 다른 사람 위에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특별 계급을 뜻하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 노릇’이라는 표현을 다시 정확하게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8부에서도 살펴보았듯, 천국적 왕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더 이상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주님의 진리가 다스리는 상태입니다. 자연적 왕은 백성을 지배하지만 영적 의미의 왕은 진리로 거짓을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노릇한다’는 것은 천국에서 많은 부하를 거느린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 안에서 악과 거짓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만일 천국을 지상의 왕국처럼 상상하면 신앙생활의 동기 속에 아주 미세한 야망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반 백성보다 높은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나는 첫째 부활에 들어야 한다’, ‘나는 14만 4천 안에 들어야 한다’, ‘나는 예루살렘의 높은 자리에 가야 한다’는 식입니다. 처음에는 거룩한 열심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 자기 높임이 숨어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천국에서 높아진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 위에 올라간다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길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쓰임이 넓어지고, 지혜가 클수록 다른 사람의 선을 더 섬세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높은 천사일수록 자신을 높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모든 선과 지혜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압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 부류’라는 직관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계급’에서 ‘쓰임’으로 옮겨 읽으면 매우 풍성해집니다. 천국에는 실제로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공동체와 쓰임이 있습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천사도 있고, 어린아이를 돌보는 천사도 있으며, 새로 영계에 온 사람을 돕는 천사도 있고, 다른 공동체와 연결되는 쓰임을 맡는 천사도 있습니다. 천국 전체가 한 사람과 같은 ‘가장 사람’, 곧 막시무스 호모(Maximus Homo)를 이루기 때문에 각각의 공동체는 서로 다른 기관과 기능에 상응합니다.

 

사람의 몸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심장과 폐와 눈과 손과 발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심장이 손보다 ‘높은 계급’이고 발이 눈보다 ‘낮은 계급’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몸의 질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 생명을 위해 서로 필요합니다. 손이 눈이 되려고 하지 않고 눈이 심장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쓰임을 완전하게 수행할 때 전체 몸이 건강합니다. 천국의 질서도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제사장, 레위인, 일반 백성이라는 구약의 세 구분 역시 ‘누가 높은가?’보다 ‘각각 어떤 쓰임을 맡았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사장은 성소의 예배와 관련된 쓰임을 맡았고, 레위인은 성막과 제사장의 봉사를 돕는 여러 쓰임을 맡았으며, 각 지파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자기 기업을 받아 생활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이스라엘을 이루었습니다. 누구 하나만으로 이스라엘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강사의 모형론이 훨씬 천국적으로 열립니다. ‘천국에는 계급이 있다’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에는 서로 다른 선과 진리와 쓰임들이 질서 있게 결합되어 있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바로 시흥영성수련원과 같은 실제 신앙 공동체를 생각할 때도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씀을 가르치고, 누군가는 기도하고, 누군가는 식사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청소하고, 누군가는 방문자를 맞으며,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동체를 유지합니다. 천국적 관점에서는 어느 쓰임이 더 화려한가보다 그 쓰임이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에서 이루어지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점은 수도생활에도 특히 중요합니다. 수도적 공동체에서는 오랜 연단을 받은 사람, 가르치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권위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공동체에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천국적 권위는 언제나 쓰임을 위한 권위여야 합니다. ‘내가 오래 연단받았으므로 너보다 높다’가 아니라 ‘내가 많이 받았으므로 많이 섬겨야 한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외적 질서가 내적 천국의 질서와 상응하게 됩니다.

 

이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강사는 첫째 부활을 휴거 성도들, 특히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할 어린양의 신부들과 연결하고, 그 밖의 부활을 둘째 부활로 구별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종말 시간표 안에서는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부활 자체에 대한 전제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람은 죽은 뒤 육체와 함께 무덤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마지막 날에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 육체가 죽으면 영은 영계에서 깨어나 계속 살아갑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자기 자신임을 알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말하고, 다른 영들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온전한 인간적 감각과 사고를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었던 자연적 육체가 먼 미래에 다시 살아나는 것에 중심이 있지 않고, 사람이 자연계의 몸을 벗고 영적 생명으로 일어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20장의 ‘첫째 부활’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특히 중요합니다. ‘첫째 부활’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저 무덤에서 일어나는 한 집단의 육체 부활이라기보다, 주님께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아 천국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부활의 핵심은 몸의 재조립보다 생명의 방향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표현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사람이 자연적으로 살아 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만을 생명으로 삼고 있다면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사람이 되어 갈 때 그는 영적으로 살아납니다.

 

따라서 거듭남 자체가 이미 ‘부활’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부활을 사후의 일에서 현재의 삶으로 끌어옵니다. ‘나는 첫째 부활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는 지금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뀝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자기중심성에서 쓰임으로, 자기 공로에서 주님의 은혜로 옮겨 가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한 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강사가 계속 강조하듯 광야 여정이 있습니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고, 어떤 시험을 통과한 뒤 더 깊은 시험을 만나며, 한때 이긴 줄 알았던 악이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강의에서도 성도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해야 하며, 오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신앙의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권면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직선적인 상승이 아닙니다.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가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고, 밝은 상태 뒤에 어두운 상태가 오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의 교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사람이 언제나 동일한 영적 고양 상태에 있다면 자신의 자유 안에서 선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때로 주님의 임재가 선명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상태를 지나면서 사람의 자유가 보존되고 그의 사랑이 실제로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드러납니다.

 

강사가 ‘ 하나도 응답이 없으면 주님이 싫어질 때도 있다’고 상당히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이런 인간의 실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신앙은 언제나 감정적으로 뜨겁고 확신에 가득 찬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기도 응답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붙들고, 선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과정에서 신앙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첫째 부활’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영적 특권이라기보다 사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지배적이 되어 가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예전에는 자기 뜻이 거절되면 곧바로 화를 냈지만 이제는 잠시 멈출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이제는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 하나하나가 영적 생명이 죽은 proprium을 밀어내며 일어나는 작은 부활입니다.

 

강사는 또한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세 번째 부류 가운데 ‘살아서 육체를 가지고 들어가는 성도들’을 말하고, 이들을 통해 천년왕국의 백성이 다시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는 강사의 천년왕국이 얼마나 구체적인 자연계의 왕국으로 이해되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부활체를 입은 사람들과 자연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한 왕국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자연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자녀를 낳아 인구가 증가한다는 그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 역시 자연적 미래 사건으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계에서는 자연계와 같은 방식의 생물학적 출산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결혼은 존재하지만 자연계처럼 육체적 자녀를 출산하는 결혼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결혼의 결실은 선과 진리의 새로운 출생, 곧 사랑과 지혜와 쓰임의 증가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열쇠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자녀가 많아지는 것을 뜻하지만 속뜻에서는 선과 진리의 증가를 나타냅니다. ‘생육’은 선의 증가와, ‘번성’은 진리의 증가와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사람들에게 자녀와 후손의 언어가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태어나고 증가하는 것을 표상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에서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것을 영적으로 읽으면 매우 아름다워집니다.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세워질수록 사랑에서 더 많은 선이 태어나고, 그 선을 섬기는 더 많은 진리가 생겨납니다. 한 가지 참된 사랑에서 수많은 선한 행동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사랑에서 인내도 나오고, 용서도 나오고, 배려도 나오고, 정직도 나오며, 필요한 때에는 바르게 권면하는 지혜도 나옵니다. 하나의 선한 사랑이 수많은 ‘자손’을 낳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근거로 ‘대환난을 눈앞에 사람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몰두할 때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적용하는 부분은 강사의 강한 임박한 종말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은 강의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지만, 보편적인 신앙생활의 원리로 곧바로 확대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바울의 특정 권면을 모든 시대의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한 일반적 축소 명령으로 읽으면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결혼과 가정의 선한 쓰임을 충분히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결혼 자체를 매우 높은 영적 표상으로 봅니다. 참된 결혼 사랑은 선과 진리의 결합에 상응하고, 더 깊게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부부 사랑과 가정은 단지 종말이 가까우므로 가능한 한 줄여야 할 자연적 부담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거듭남의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통해 자기애가 드러나고, 용서와 인내와 책임과 섬김을 배우며, 자녀를 통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번 강의 전체에서 강사가 가장 실제적인 연단의 예로 자주 드는 것도 부부와 가족관계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고, 배우자가 맞는 말을 했을 때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고,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이김’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정은 종말을 기다리느라 영적 삶에서 밀어내야 할 영역이라기보다 바로 그 ‘이김’이 가장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광야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둘째 부활’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특별한 성도들과 나머지 둘째 부활 사이에 시간적·신분적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계시록의 ‘첫째’와 ‘둘째’를 단순한 시간표의 두 시점으로만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은 영적 상태의 질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둘째 사망’이라는 표현과 함께 읽으면 이것이 더 분명해집니다. 자연적 죽음은 모든 사람이 겪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자연적 몸의 죽음이 아니라 악과 거짓을 자기 생명으로 선택함으로써 천국의 생명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의 복됨도 자연적 몸이 남보다 먼저 일어나는 특권보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 둘째 사망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은 서로 대조되는 영적 언어가 됩니다. 한쪽에서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나고, 다른 쪽에서는 자기애와 거짓이 그의 지배적 생명이 됩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날마다 이 두 방향 가운데 하나를 향해 자기 생명의 성격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전혀 낯선 판결이 갑자기 외부에서 내려오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평생 자유롭게 사랑해 온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임의로 천국에 넣고 다른 사람을 지옥에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 자신이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그 사람의 영원한 방향을 결정합니다. 다만 그 자유와 생명과 선을 선택할 모든 능력 자체는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원리는 강사가 말하는 ‘ 부류의 익은 열매’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열매의 차이는 천국의 계급장을 의미하기보다 사람이 받아들인 선의 서로 다른 질을 생각하게 합니다. 천국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와 형태의 사랑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이 중심인 천적 선에 속하고, 어떤 사람은 이웃 사랑이 중심인 영적 선에 속하며, 또 어떤 사람은 보다 외적인 순종과 쓰임 가운데 선을 받아들입니다. 천국에는 이러한 무수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세 천국, 곧 천적 천국,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강사의 ‘제사장-레위인-일반 백성’과 기계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두 체계의 출발점과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천국은 단조로운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깊이의 사랑과 진리를 가진 무수한 공동체들이 완전한 질서를 이루는 ’이라는 점에서는 중요한 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경쟁을 만들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는 높은 자리를 보면 올라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각 사람이 자기 사랑과 쓰임에 가장 알맞은 공동체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영적 천사가 천적 천사의 상태를 억지로 차지하려 하지 않고, 어느 공동체도 다른 공동체의 쓰임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쓰임을 행하는 기쁨 자체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급’을 이해할 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좁은 길을 가는 어려움과 함께 ‘상급의 진리’를 강조하는 흐름이 나타납니다. 상급을 말하는 것 자체는 성경적입니다. 문제는 상급을 세상의 보상체계처럼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많이 희생했으므로 높은 자리와 많은 권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급에 자기 공로가 섞입니다.

 

천국의 참된 상급은 선 자체를 행하는 기쁨입니다. 이웃을 사랑한 사람이 천국에서 받는 상급은 ‘사랑했으니 이제 특별한 지위를 받는다’가 아니라, 더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 사람의 상급은 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쓰임을 사랑한 사람의 상급은 더 넓고 깊은 쓰임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상급은 천국적 사랑의 능력이 더욱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 같은 제사장’의 가장 큰 상급도 왕좌가 아닙니다.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지혜롭게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의 왕과 천국의 왕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입니다. 지상의 왕은 많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지만 천국적 왕은 더 많은 사람을 섬깁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 원형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여기서 3강 전체의 ‘연단’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왜 광야에서 연단받는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왜 자기부인을 하는가? 영적 강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proprium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지배하려는 힘을 잃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말씀을 배우는가? 남보다 더 많이 알아 우월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여 실제로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 중 ‘성경은 밀어붙이는 아니에요. 자기를 죽여야 ’라고 말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설교가 맞는지 틀리는지만 검사하는 신앙을 경계하면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축적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자기를 죽인다’는 표현은 다시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인격과 개성, 자유와 이성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유한 개성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보존됩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고,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며, 자기 지혜를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으려는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이 내려갈수록 오히려 주님께서 주신 참된 인간성이 살아납니다.

 

강사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성경 가지고 싸우고 신학 가지고 싸우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진리와 교리는 중요합니다. 잘못된 진리는 삶의 방향도 잘못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목적이 사랑과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사람의 외적 기억에 머물 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생명책도 실제 천국 어딘가에 놓인 거대한 명부에 사람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은 사람의 내적 상태가 기록된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이 사랑하고 의도하고 생각하고 행한 모든 것은 그의 영에 새겨집니다. 그래서 사후에는 숨길 수 없습니다. 자기 생명 자체가 책이 됩니다. 어떤 외부의 심판자가 증거자료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어떤 명단에 등록되었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그 사람의 성품에 새겨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7부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이름과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질을 나타냅니다. 결국 문제는 ‘ 이름이 어느 명단에 있는가?’만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삶에 얼마나 기록되고 있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도, 생명책도, 왕 같은 제사장도, 세 부류의 익은 열매도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종말론의 모든 그림이 결국 인간의 생명으로 돌아옵니다.

 

이 점에서 이번 3강의 강사가 천년왕국과 14만 4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매우 구체적인 미래 시간표로 설명하면서도 계속해서 ‘오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라’, ‘작은 죄까지 철저하게 회개하라’, ‘자기를 죽여야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라’고 삶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교리적 구조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실제 목회적 권면에서는 다시 거듭남의 핵심에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해설할 때 어느 한쪽만 보면 안 됩니다. 천년왕국의 자연적 시간표만 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와의 차이가 매우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표를 통해 강사가 성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보면 ‘끝까지 악과 싸우라’, ‘자기를 부인하라’, ‘작은 죄도 회개하라’, ‘주님을 사랑하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라’는 실천적 중심이 보입니다. 이 중심은 충분히 존중하면서, 그 실천을 떠받치는 계시록의 문자적 도식은 상응의 빛 아래에서 한층 깊게 읽어 볼 수 있습니다.

 

3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같은 제사장과 그를 보필하는 자와 일반 백성, 그리고 종류의 익은 열매라는 강사의 천년왕국 구조는 미래 지상왕국의 신분과 부활 순서를 문자적으로 확정하는 도식으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서로 다른 사랑과 진리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각각의 쓰임에 맞게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일어나 주님의 선과 진리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서로 다른 쓰임을 통해 하나의 천국을 이루게 하시는 영적 질서의 표상으로 읽을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9부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것은 어쩌면 ‘ 부류’가 아니라 ‘ 나라’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제사장도 있고 레위인도 있고 땅을 분배받은 백성도 있지만 모두 하나의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몸에는 눈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지만 모두 하나의 몸입니다. 천국에도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과 자연적 천국이 있고 그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지만 모두 하나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표는 ‘나는 어느 등급까지 올라갈 것인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선과 진리를 가지고 나는 어떤 쓰임을 것인가?’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쓰임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쓰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잊을수록 더욱 천국적이 됩니다.

 

강사가 말한 ‘ 같은 제사장’도 이렇게 읽으면 전혀 다른 빛을 띱니다. 왕관을 쓰고 다른 사람 위에 앉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먼저 자기 안의 악을 다스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왕관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영광의 왕관이 아니라 주님께 돌려 드릴 왕관입니다.

 

결국 첫째 부활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남보다 먼저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무엇으로 살아났는가?’일 것입니다. 자기애로 살아 있는 사람인가,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나는 사람인가. 다른 사람 위에 서고 싶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고 싶은 사람인가. 자기 공로를 쌓는 사람인가,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인정하는 사람인가.

 

그렇게 보면 천년왕국의 ‘ 부류’는 경쟁의 세 등급이 아니라 천국의 놀라운 다양성을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고유한 성품과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서로 다른 선과 진리와 쓰임 안에서 완성해 가십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다름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동일한 계급도, 동일한 지식도, 동일한 수도적 훈련도 아닙니다. 오직 한 분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은 섬기고, ‘제사장’은 자기 공로를 내려놓으며, ‘백성’은 자기 쓰임을 기뻐합니다. 바로 그때 서로 다른 모든 사람이 한 천국을 이루게 됩니다.



3강 10부

종류의 익은 열매에서 두아디라 교회의 약속까지 : 추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

3강 10부에서는 지금까지 길게 이어져 온 ‘이기는 ’, ‘광야 연단’, ‘14만 4천’, ‘순교자’, ‘천년왕국’의 논의가 ‘ 종류의 익은 열매’라는 구조로 최종 정리되고, 이어서 계시록 2장의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약속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을 ‘처음 익은 열매’, 교회 시대와 대환난 가운데 순교하는 이들을 ‘ 번째 익은 열매’,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하여 지상 재림하신 주님께 추수되는 성도들을 ‘ 번째 익은 열매’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 세 부류를 구약의 가나안에 들어간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은 일반 백성이라는 세 부류와 연결합니다. 그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목적이 익은 열매를 추수하는 있다. 따라서 우리도 처음이나 번째나 번째나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3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가 지금까지 왜 그토록 ‘익어야 한다’, ‘연단받아야 한다’, ‘이겨야 한다’,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는지가 여기에서 하나로 모이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체계에서 신앙생활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어느 정도까지 익었느냐에 따라 마지막 때의 추수와 천년왕국에서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는 이 강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이 핵심을 충분히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신앙의 목적은 단순히 교리를 알고 입으로 믿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가 삶 속에서 선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씨가 뿌려졌다고 농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며, 싹이 났다고 추수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되고,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시험 가운데 그것을 따라 살며, 마침내 선한 삶이 그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하는 ‘익음’은 거듭남과 매우 가까운 실천적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익은 열매’를 세 종류의 종말론적 신분집단으로 고정하기보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실제 생명으로 결합되는 것으로 읽습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매우 자주 선한 행위와 쓰임, 더 깊게는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표상합니다. 나무가 그 본질을 열매로 드러내듯 인간의 내적 사랑도 결국 삶의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신 말씀은 사람의 신앙이 무엇인지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생명을 사는지를 통해 드러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익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아직 설익은 열매와 익은 열매의 차이는 단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진리가 얼마나 의지와 결합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처음에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압니다. 다음에는 그것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말씀 때문에 억지로라도 선하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매우 귀한 시작입니다. 그런데 오랜 거듭남을 거치면서 어느 순간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그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한 것입니다. 열매가 익어 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익음’은 완벽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완덕’, ‘익은 열매’, ‘이기는 ’를 이해할 때 꼭 붙들어야 할 구별입니다. 익었다는 것은 더 이상 결점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는 방향이 주님께로 향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약함이 있고 실수도 할 수 있지만,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의 도움으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선을 억지로만 행하는 데서 조금씩 선 자체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옮겨 갑니다. 강사는 첫 번째 익은 열매인 14만 4천이 추수된 뒤 두 번째 익은 열매인 순교자들이 추수되고, 마지막으로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한 세 번째 성도들이 추수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오순절 이후 교회 시대 동안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했으나 14만 4천의 처음 익은 열매 반열에는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며, 그들의 수가 채워질 때까지 기다린다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천국의 가장 거룩한 곳부터 채워 가시는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강사의 천국관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천국이 일정한 공간적 구조와 등급을 가지고 있고, 그 높은 곳부터 자격을 갖춘 성도들이 차례로 채워진다는 그림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 예루살렘은 천국의 수도’, ‘14만 4천은 그곳에 들어가는 이긴 자들’, ‘ 같은 제사장’이라는 설명도 모두 이 구조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에는 분명히 높고 낮음이 있으며 세 천국과 무수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지상의 신분계급처럼 외적으로 부여되는 차이가 아닙니다. 각 사람이 받아들인 사랑과 지혜의 질에 따른 내적 차이입니다. 더 깊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랑과 상응하는 천국에 있고, 보다 외적인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 선과 상응하는 천국에 있습니다. 어느 누가 행정적으로 사람을 등급별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적 상태 자체가 그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게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거룩한 곳부터 채워진다’는 표현도 ‘먼저 선발된 엘리트들이 최고층 천국의 정원을 채운다’는 방식보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사랑과 선의 질에 따라 가장 적합한 천국의 쓰임과 공동체로 인도하신다는 방향으로 읽으면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천국의 차이는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상응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적 삶에서는 ‘ 사람보다 높은 곳에 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천국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을 원하는 사랑은 이미 자기 우월과 지배의 요소를 포함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자기보다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를 시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선과 쓰임 안에서 완전한 기쁨을 누립니다. 이 원리를 ‘익은 열매’에 적용하면 경쟁의 문제가 사라집니다. 사과가 포도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포도가 무화과가 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선이 충분히 열매 맺는 것입니다. 천국은 똑같은 열매만 가득한 창고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선들이 하나의 주님 아래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특히 ‘순교자’를 두 번째 익은 열매라는 고정된 신분으로 이해하는 문제도 여기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순교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숭고한 신앙의 증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 생명까지 내어놓으면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은 사람들의 충성은 가볍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죽음의 방식 자체가 자동적으로 영적 등급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그 행위가 어떤 사랑에서 나왔느냐입니다. 겉으로 같은 순교처럼 보여도 사람의 내면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것과, 자기 종교집단의 명예나 자기 의를 증명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은 내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외적 사건보다 그 안의 사랑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순교의 영적 가치는 죽음 자체에 있다기보다 그 죽음 안에 있는 사랑과 충성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순교’에는 일상적인 영적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문자적으로 목숨을 잃는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모든 거듭나는 사람은 자기 proprium의 어떤 것을 날마다 죽이는 경험을 합니다.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도 작은 죽음이고,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작은 죽음이며, 미움을 품고 싶은 욕망을 거절하는 것도 자기중심적 생명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반드시 문자적 순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는 삶 전체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이 의미에서 수도적 전통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은 거듭남과 매우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 사랑을 방해하는 자기중심적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강사는 세 번째 익은 열매를 ‘7년 대환난을 인내하고 말씀을 지키며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살아남아 육체로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첫째, 둘째, 셋째 익은 열매가 차례로 추수되어 천국이 채워진다고 정리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강사의 핵심은 결국 ‘끝까지 지키는 신앙’입니다. 이 실천적 중심은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끝까지’라는 말은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한때 뜨거운 신앙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평생 형성하는 지배적 사랑이 중요합니다. 한때 선한 감정을 느꼈다는 것, 한때 큰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 한때 열심히 봉사했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형성하시는 선이 그의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딘다’는 것도 인간의 이를 악문 의지력만을 의미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나는 반드시 끝까지 버티겠다’고 하면 그 힘 자체가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강의의 시작 기도에서 ‘헌신과 수고를 통한 주님의 나라에 봉사할 하늘로부터 주시는 힘으로 하게 하시고 자기 의지로 하지 않도록 붙잡아 달라’고 기도한 것은 그래서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하게 붙들 수 있는 표현입니다. ‘자기 의지로 하지 않도록.’ 수도적 연단에서 이 한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금식도 자기 의지로 할 수 있고, 철야기도도 자기 의지로 할 수 있으며, 오랜 수도생활도 자기 의지로 견딜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부인조차 ‘나는 이만큼 나를 부인했다’는 새로운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연단보다 더 깊은 연단은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해야 하지만, 실제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이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거듭남에 필요한 자유로운 협력이 사라지고, ‘내가 해냈다’고 하면 자기 공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악과 싸우면서도 승리 후에는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익은 열매’의 매우 중요한 표지일 수 있습니다. 덜 익었을 때에는 자기 선을 자랑하기 쉽습니다. ‘나는 이것을 끊었다’, ‘나는 시험을 이겼다’, ‘나는 이만큼 기도한다’, ‘나는 이런 깊은 진리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분명히 압니다. 열매가 익을수록 가지가 오히려 아래로 숙여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와 겸손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익은 사람은 자기가 익었다고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악을 더 섬세하게 보며 주님의 자비를 더 필요로 합니다. 다른 사람의 미숙함을 보아도 쉽게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얼마나 오랜 시간 주님께 붙들려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이번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중요한 분별 기준이 됩니다. 연단의 결과가 사람을 강퍅하게 하고 다른 신앙인들을 쉽게 ‘ 익은 사람’, ‘광야에 있는 사람’, ‘낮은 반열’로 분류하게 한다면 그 연단에는 다시 살펴볼 부분이 있습니다. 반대로 연단을 오래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약함에 더 인내하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적게 자기 공로를 말하며, 더 많이 섬긴다면 그 열매에는 천국적인 것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공동체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연단’과 ‘자기부인’을 가장 선한 방향으로 이해하려면 결국 이 열매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강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전환을 합니다. ‘요렇게 해서 이제 살펴봤습니다’라고 지금까지의 세 종류의 익은 열매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두아디라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주신 약속으로 넘어갑니다. 두 가지 축복, 곧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계시록 2장 26절 이하의 ‘이기는 자와 끝까지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전환은 3강 전체의 주제인 ‘이기는 ’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누가 익은 열매인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는 ‘이긴 자에게 무엇을 주시는가?’를 다루는 것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 권세가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실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역시 먼저 내적으로 읽습니다. 말씀에서 ‘나라들’, 곧 ‘만국’은 좋은 의미에서는 선들, 반대 의미에서는 악들과 관계합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영적 의미에서 진리로 악과 거짓을 질서 아래 두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은 다른 민족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받는다는 의미에 앞서, 주님의 진리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다스릴 능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서 ‘ 노릇’의 의미와 같습니다. 천국적 권세의 첫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안에 들어오는 지옥의 영향, 곧 악과 거짓입니다.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자기 분노 하나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천국적 왕권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으면서 명예욕의 명령에는 꼼짝없이 복종한다면 그는 실제로 왕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종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아무 직위도 없는 사람이 자기 안의 탐욕과 미움과 복수심을 주님의 진리로 거절할 수 있다면 영적으로는 왕의 권세를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능력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이 권세를 이기는 자가 ‘얻어낸다’고 하기보다 주님께서 ‘주신다’고 합니다. 이어 ‘철장으로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는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미래의 성도들이 철장으로 이방 나라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는 장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열립니다. ‘’은 자연적 차원에 있는 진리, 곧 삶과 행위에 적용되는 강한 진리를 나타낼 수 있고, ‘막대기’ 또는 ‘지팡이’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철장’은 자연적 삶의 차원에서 악과 거짓을 제어하는 진리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질그릇’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릇은 무엇인가를 담는 것이며,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진 가장 외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질그릇을 깨뜨린다는 것은 사람을 폭력적으로 파괴한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외적이고 거짓된 형식들이 무너지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자기 합리화, 잘못된 신앙의 형식, 악을 감싸고 있던 거짓된 논리들이 주님의 진리 앞에서 깨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의 거듭남에 적용하면 아주 실제적입니다. 사람은 자기 악을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질그릇’을 만듭니다. ‘다들 그렇게 산다’, ‘나는 원래 성격이 그렇다’, ‘ 사람이 먼저 잘못했다’, ‘ 정도는 죄가 아니다’, ‘목회를 위해서 어쩔 없다’, ‘좋은 목적이니까 괜찮다’와 같은 합리화들입니다. 악한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는 동안 사람은 그 그릇을 소중히 지킵니다.

 

그런데 말씀의 진리가 강하게 들어오면 그 그릇이 깨집니다. ‘, 이것은 상황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이었구나.’ ‘나는 정의를 위해 화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무시당한 것이 싫었던 것이구나.’ ‘사명을 위한 열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구나.’ 이런 깨달음이 일어날 때 질그릇 하나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장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무서운 통치의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의 매우 정밀한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때때로 우리를 위로하지만 때로는 아주 단단하게 우리의 거짓을 깨뜨립니다. 말씀은 언제나 부드러운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거짓을 깨뜨려야 할 때에는 철장처럼 단호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얽매고 있는 거짓을 파괴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와 가르침에서도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철장’을 문자적으로 모방하여 지도자가 사람들에게 강압적 권위를 행사하면 위험합니다.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너희를 다스릴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종교적 지배욕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드러내지만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인정하고 버리도록 이끄십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권위는 사람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힘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께 자유롭게 순종하도록 돕는 힘입니다. 좋은 목회자는 성도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좋은 영적 스승은 제자가 평생 자기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 앞에 서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수도적 전통의 ‘순종’ 역시 세심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적 순종은 훈련의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최종 목적은 인간 지도자의 뜻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순종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인간의 권위는 그 순종을 돕는 한에서만 영적 권위입니다. 이것이 지켜지면 수도적 순종은 proprium을 내려놓는 귀한 훈련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이 뒤집히면 사람을 지배하는 종교적 권력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의 두 번째 약속이 ‘새벽별’입니다. 이 표현은 이번 3강 전체의 마지막 부분을 아주 아름답게 밝힐 수 있는 상징입니다. 계시록 22장에서 주님께서는 친히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새벽별은 주님 자신과 관련됩니다.

 

새벽별은 밤이 완전히 끝난 뒤 뜨는 별이 아닙니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을 때 나타나 곧 아침이 올 것을 알립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상응입니다.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은 아직 완전한 낮에 있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의 어둠이 있고, 주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며, 무엇이 어떻게 될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둠 가운데 작은 빛이 나타납니다.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고 희망이 생기며 주님의 임재가 다시 느껴집니다. 이것이 새벽별의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은 천사적인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빛과 관련됩니다. 별이 밤하늘을 비추듯 진리의 지식은 아직 완전한 영적 낮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새벽별’은 단순한 지식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에도 이런 새벽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어떤 악과 싸웠는데 전혀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같은 시험이 반복되며, 자신이 정말 변하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전 같으면 크게 화냈을 상황에서 마음이 조금 덜 흔들립니다. 예전에는 미워했던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예전에는 억지로 했던 선을 조금 기쁘게 행합니다. 아직 대낮은 아니지만 새벽별이 뜬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새벽별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매우 개인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기는 사람에게 단지 외적 상급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진리와 사랑, 궁극적으로는 주님 자신의 임재를 주십니다. 상급의 본질이 주님입니다.

 

이것은 ‘상급’에 대한 이번 사경회의 강조를 매우 아름답게 보완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좁은 길을 걸으면 상급이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그 말 자체는 충분히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천국적 상급의 가장 깊은 형태는 더 높은 지위나 더 큰 통치권이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결합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왕좌’가 아니라 ‘새벽별’, 곧 주님 자신입니다. 이렇게 보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이라는 두 약속의 순서도 의미심장합니다. 먼저 악과 거짓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고, 그 다음 새벽별이 주어집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이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거절할수록 내면이 깨끗해지고, 깨끗해진 만큼 주님의 빛을 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악을 버리는 것과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과정의 두 면입니다.

 

단순히 악을 끊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은 아닙니다. 빈집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들어오시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미움을 버리는 목적은 단지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거짓을 버리는 목적은 단지 오류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애의 지배를 내려놓는 목적은 자아가 텅 빈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자리를 채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수도적 자기부인 역시 ‘없애는 ’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자기 욕망을 끊고, 자기 뜻을 내려놓고, 세상 즐거움을 절제하는 것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가가 중요합니다. 더 많은 주님 사랑, 더 깊은 이웃 사랑, 더 넓은 쓰임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부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업적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3강 처음부터 이어져 온 ‘광야’의 의미도 완성됩니다. 광야는 사람이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지나가는 곳입니다. 연단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사랑이 목적지입니다. 자기부인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주님과의 결합이 목적입니다. 싸움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평화가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싸움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평화와 다릅니다. 악을 모르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 아니라, 악과 싸우면서 주님만이 승리자이심을 배운 뒤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평화입니다. 이것이 거듭남 이후의 안식이며, 창세기의 일곱째 날과도 연결되는 천국적 평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3강을 통해 계속 말해 온 ‘익은 열매’는 매우 좋은 표현입니다. 다만 ‘어느 반열에 들어갈 만큼 익었는가?’보다 ‘무엇으로 익어 가고 있는가?’를 물으면 더욱 깊어집니다. 지식으로 익는가, 자기 확신으로 익는가, 종말론적 정보로 익는가가 아니라 사랑과 쓰임으로 익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무의 크기를 보시기보다 열매를 보십니다. 얼마나 오래 교회에 다녔는지, 얼마나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특별한 체험을 했는지, 얼마나 혹독한 연단을 받았는지 그 자체가 마지막 기준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더 정직해졌는가, 더 온유해졌는가, 더 쉽게 용서하게 되었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더 기뻐하게 되었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이것이 ‘익음’입니다.

 

그래서 3강 10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 14만 4천, 순교자인 번째 익은 열매,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하는 번째 익은 열매라는 구분과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다는 말씀은 미래 천년왕국에 들어갈 성도들을 신분으로 나누고 가운데 높은 반열에 특별한 통치권을 부여하는 종말론적 구조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을 그의 고유한 선과 쓰임에 따라 거듭나게 하시고, 말씀의 진리로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를 깨뜨리시며, 마침내 모든 싸움과 자기부인의 목적이 다른 사람 위에 높아지는 있지 않고 새벽별이신 주님 자신과 더욱 깊이 결합되는 있음을 보여 주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읽을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10부에서, 더 나아가 이번 3강 전체에서 가장 귀하게 남길 수 있는 것은 강사의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절박함 자체를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절박함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줍니다. ‘나는 첫째인가, 둘째인가, 셋째인가?’를 묻기보다 ‘오늘 안에서 주님의 진리가 선한 열매가 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 질문은 훨씬 조용하지만 훨씬 피하기 어렵습니다. 종말 시간표는 공부할 수 있지만, 보기 싫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14만 4천의 정체를 논할 수 있지만, 내 자존심 하나 내려놓는 것은 어렵습니다. 천년왕국의 세 부류를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하기는 어렵습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구별할 수 있지만, 오늘 내 안의 죽은 사랑 하나가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의 최종적인 표지는 지식의 많음보다 사랑의 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익을수록 사람은 이상하게도 자기를 덜 높입니다. 가지가 열매 때문에 아래로 숙여지듯, 주님의 선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이것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도 안전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싶은 욕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새벽별’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빛으로 빛나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고 오직 주님의 빛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3강이 처음부터 말해 온 ‘이기는 ’란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끝까지 버틴 사람도 아니며, 남보다 높은 영적 반열을 차지한 사람도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 앞에서 주님의 진리를 선택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며, 선을 행하되 그것을 자기 공로로 여기지 않고, 마침내 자기 삶의 중심에서 proprium이 내려오고 주님께서 왕이 되시도록 허용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단지 ‘무엇’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십니다. ‘내가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이 약속을 그렇게 읽으면 3강 전체를 관통했던 연단과 자기부인과 이김과 익은 열매와 상급이 마지막에 한곳으로 모입니다. 광야의 끝에 있는 것은 높은 지위가 아니라 주님이며, 이김의 상급도 주님이고, 천국의 기쁨도 주님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마침내 알게 되는 가장 깊은 사실은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붙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았는데, 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SY.57,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4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4강 1부‘죄론’의 문을 열다 : 죄를 행위가 아니라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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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48,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2강 (7/27),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2강 1부‘모형적 진리’와 구원의 여정 - 출애굽은 지나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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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설교의 중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를 교회의 성장이나 성공, 은사나 신비 체험, 신학적 지식, 심지어 선교적 업적 자체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자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빌3:14의 ‘푯대를 향하여’를 중심에 놓고,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제사장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 골리앗에게 달려가는 다윗, 아합 앞에 서는 엘리야의 모습을 연이어 제시하면서 이제 막 출발하는 교회가 처음부터 방향을 정확히 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GPS’라는 친숙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출발점에서 좌표가 조금만 어긋나도 먼 훗날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하므로 교회의 좌표를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이 중심 명제는 매우 귀합니다.

 

특히 설교 초반에 제시되는 교회상은 주목할 만합니다. 설교자는 건물이나 숫자보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죄인이 들어와도 과거 때문에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부자나 유명인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특별대우를 받는 대신 연약한 사람이 사랑받고, 서로의 것을 나누며, 직분과 서열보다 겸손과 순결과 거룩함이 존중받는 교회를 꿈꿉니다. 반대로 직분과 권위, 시기와 경쟁, 험담과 배척으로 가득한 교회를 매우 강하게 비판합니다. 표현은 때때로 거칠지만 그가 지향하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외적 규모나 사회적 힘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실제로 살아 있느냐에 따라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곳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본질적으로 건물이나 교단, 조직 자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있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천 명이 모이고 거대한 조직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천국적인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며, 아주 작은 공동체라고 해서 교회성이 약한 것도 아닙니다. 외적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그 외적 형식 안에 내적인 것이 살아 있을 때입니다. 설교자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보다 ‘ 죄인이 회개하는 ’을 더 귀하게 여기자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설교자가 예수님 곁에 세리와 죄인들과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부분도 중요합니다. 그의 요지는 ‘과거가 더러웠던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을 그의 과거를 계속 꼬리표처럼 붙여서는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 이상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사람은 현재 자연계에서 드러나는 이력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과거에 어떤 악 가운데 있었더라도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의 과거를 끊임없이 끄집어내어 현재의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거듭남이라는 복음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가장 힘 있게 전개되는 곳은 바울에 관한 부분입니다. 설교자는 바울에게 선교도, 신유도, 신비 체험도, 신학도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였고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으며 ‘셋째 하늘’에 관한 체험도 있었고 뛰어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를 얻는 ’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3:8 이하의 ‘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를 중심으로 설교가 깊어집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서신은 스베덴보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는 ‘말씀’의 책들과 동일한 방식의 내적 의미, 곧 연속적인 아르카나를 지닌 책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빌3의 각 문구를 창세기나 출애굽기, 선지서나 복음서처럼 상응을 따라 속뜻으로 풀어 가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말이 영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여기서 표현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다’는 신앙적 고백은 매우 귀하며, 그 내용을 주님의 가르침과 스베덴보리가 밝힌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거나 예수님에 대해 뜨거운 감정을 갖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 역시 외적인 행동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의 푯대’라는 선언은 결국 ‘ 사랑의 질서가 주님의 질서를 닮아 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유용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실제 내용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설교가 강조하는 ‘내가 죽는 ’도 조금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기를 원했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난과 죽음을 마치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돌에 맞은 바울이 다시 성으로 들어간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죽고 싶어서’라고까지 표현하고, 뒤에서는 ‘내가 죽기를 미치도록 갈망하고’라는 강렬한 말을 사용합니다. 설교자의 의도가 육체적 죽음이나 자살을 권하는 것이 아님은 문맥상 분명합니다. 그 자신도 이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영적으로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의 지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인격을 살리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 존재를 혐오하라는 말이 아니며, 고통 자체를 사랑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상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는 상태, 자신의 지성과 의를 신뢰하는 상태가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설교 후반의 ‘고통이 오면 뛰어가서 환영하십시오’라는 권면은 그 열정은 이해하면서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통 자체를 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난은 때로 시험의 장이 되고,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통해 우리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시고 정화하시며 선을 더욱 굳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니거나 부당한 학대를 계속 허용하거나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상황을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통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진리와 선을 선택할 때 그 시험이 거듭남을 섬기게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셨으므로 나도 고난받아야 한다’보다 더 깊은 질문은 ‘예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 무엇을 이루셨는가’입니다. 주님의 전 생애는 지옥들과 싸우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계속적인 시험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의 양을 주님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올라오는 악과 거짓의 충동과 싸우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시험과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설교자가 벧전2를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는 것은 천국적 삶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상대방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내가 죽어야 한다’는 설교자의 표현은 신학적으로 구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에 복수하지 않고 그것을 견딜 수는 있으며, 용서하고 그 사람의 회복을 바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악 자체를 내가 대신 담당하여 구속하는 것은 주님께 속한 일입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가운데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용서는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반복적으로 해를 입으면서도 무조건 참는 것이 언제나 사랑인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진리를 말하고 경계를 세우며 악이 더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사랑에는 따뜻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보완된다면 설교자가 말하는 ‘욕을 당하고도 욕하지 않는 ’은 훨씬 건강하고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설교 후반부에서 다시 교회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설교자는 ‘자기 의로 충만한 의인’보다 자기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교회, 큰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큰 자로 여김받는 교회,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보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는 교회를 꿈꿉니다. 여기에는 복음서에서 반복되는 주님의 가르침과 통하는 매우 중요한 직관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지상의 지위와 명성이 질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적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이 어떠한지가 중요합니다. 섬김을 사랑하는 사람은 높아지려 하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천국의 질서 안에서는 큰 자가 됩니다.

 

다만 ‘자기 의는 전혀 없고 죄밖에 없다’는 표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을 인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은 옳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거듭난 인간에게 실제로 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지 죄인으로 남겨 두고 외부에서 의를 덮어씌우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실제로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본래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난 삶의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내가 행하지만 그것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가장 귀한 문장인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문장의 깊이가 훨씬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한 지식을 늘리는 것도, 감동적인 체험을 많이 갖는 것도,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자 자신이 선교와 신유와 신비 체험과 신학을 모두 궁극적 목표에서 내려놓은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천국적이 되는 것도 아니며, 없다고 해서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비 체험 자체를 경계하거나 낮게 보는 방향으로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방대한 영계 경험을 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영적 체험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환상이나 계시나 놀라운 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허락하신 영적 체험이 그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고, 말씀을 더욱 사랑하게 한다면 그 열매를 함부로 멸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냐 이성이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것이 선과 진리의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설교자가 교회의 미래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라고 그리는 마지막 장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말은 ‘모두가 비슷한 종교적 말투와 행동을 갖게 되는 공동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입니다. 각 사람은 서로 다른 성품과 은사와 유용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하나의 중심, 곧 주님을 향합니다. 마치 인체의 서로 다른 기관들이 하나의 생명을 섬기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모두가 똑같아지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따라 서로를 섬기면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이 점에서 설교 초반과 마지막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어떤 교회를 꿈꾸는가’를 묻고, 마지막에는 성도들에게 눈을 감고 그 교회를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습니다. 이것은 목회적 호소로서 힘이 있습니다. 교회의 출발점에서 건물과 숫자와 영향력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것인가’를 묻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름다운 공동체 이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속 사람에서 실제로 거듭남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피하고, 주님께 선을 행할 힘을 구하며, 실제 생활에서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외적인 신앙이 내적인 신앙이 되고, 알고 있던 진리가 삶의 선과 결합합니다. 그때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의 ‘GPS’ 비유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바꾸어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목적지를 ‘예수님’이라고 입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내가 걷는 길이 그 목적지와 일치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가, 아니면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는가. 내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는가, 아니면 유용한 사람이 되려 하는가.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속으로 계속 정죄하는가, 아니면 진실을 분별하면서도 그의 최종 상태는 주님께 맡기는가. 내가 가진 신학과 체험과 은사를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데 사용하는가, 아니면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가. 바로 이런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 실제 GPS의 경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가장 좋은 부분은 역설적으로 가장 단순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 이 문장을 굳이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우리에게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해 간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더욱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것은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며, 신비 체험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신학적으로 누구보다 정확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자신의 실제 삶에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푯대를 향하여’라는 제목도 새로운 깊이를 갖습니다. 푯대는 단순히 저 멀리 바라보는 목표가 아닙니다. 주님은 목적지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향해 내딛는 매 걸음의 생명이십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 애쓸 때, 나보다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보호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할 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우리는 이미 그 푯대를 향하여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전체적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 폐기하거나 경계해야 할 설교라기보다, 상당히 귀한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몇몇 강한 표현들을 거듭남과 시험, proprium,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조금 더 깊고 안전하게 다듬어 들으면 좋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성공보다 예수 그리스도’, ‘직분보다 겸손’, ‘정죄보다 용서’, ‘유명인보다 회개하는 영혼’, ‘자기 자랑보다 섬김’을 앞세우는 방향은 소중합니다. 여기에 ‘자기 죽음’을 자기혐오가 아니라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으로, ‘고난’을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 선과 진리가 굳어지는 시험의 장으로, ‘그리스도를 닮음’을 외적인 고난의 모방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오히려 더욱 풍성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설교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고 있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듭니다. ‘내가 주님을 푯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나의 사랑, 생각, , 판단, 돈의 사용,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용서, 정직, 섬김과 유용한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렇다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영웅이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proprium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삶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일 때, 설교자가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도 비로소 외적인 이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조금씩 드러내는 실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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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해설

2 1

죽음 이후의 세계와 중간영계 : 천국과 지옥은가는 장소이기 전에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2강의 출발점은 매우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강사는 우리가 흔히 죽은 사람을 곧바로 ‘천국에 갔다’고 표현하지만, 실제 영계에는 그보다 훨씬 세밀한 질서와 과정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반갑게 만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이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곧바로 최종적인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에 정착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먼저 영들의 세계, 곧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영계에 들어가며, 거기서 지상생활 동안 형성된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는 과정을 거칩니다. 따라서 이 강의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단순히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두 공간으로만 보지 않고 그 사이의 과정과 질서를 설명하려 한다는 점은 중요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부터 하나의 중요한 기준을 세워 둘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간영계는 구원 여부를 다시 결정하는 두 번째 기회의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사후에 점차 드러나는 곳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유와 이성 가운데 선과 악을 선택하고, 반복된 선택을 통하여 자기 사랑의 방향을 형성합니다. 육체가 죽는다고 그 사람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와 사회적 환경 때문에 가려져 있던 그의 참된 내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중간영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이라기보다 지상에서 이미 되어 온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죽음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하나의 거대한 경계선으로 생각합니다. 이쪽에서는 지상의 삶을 살다가 죽는 순간 갑자기 전혀 다른 영적 세계로 옮겨지고, 그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천국이나 지옥으로 배치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의 형성’입니다. 죽음은 사람의 지배적 사랑을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고 있던 자연적 몸을 벗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영원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의 지상생활입니다.

 

강사가 영계의 여러 영역과 상태를 설명하려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곧바로 모든 것이 단순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제 내적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과정을 어떤 복잡한 사후 행정 절차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영계에서는 외적 조건보다 내적 사랑이 질서를 결정합니다.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서로 반대되는 사랑을 가진 영들은 함께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강제로 어느 장소에 배치되는 것이라기보다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상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 실제 영계의 공동체와 장소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장소를 결정하는 것은 상태입니다. 천국에 있는 천사가 천국적인 이유는 천국이라는 좌표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천국적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옥의 영이 지옥적인 이유도 어떤 지하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질서 밖에서 지배적 사랑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영계의 공간은 내적 상태와 상응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서로 미워하는 두 사람이 같은 방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완전히 드러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다른 사랑들은 오래 함께 머물 수 없습니다.

 

이 원리는 죽음 이후의 심판도 매우 다르게 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생애를 장부처럼 검토하신 뒤 ‘너는 천국’, ‘너는 지옥’이라고 외적으로 판결하시는 장면만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모든 심판은 주님의 신적 질서 아래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핵심은 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향하여 갑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이 있는 곳에서 숨을 쉬듯 편안함을 느끼고, 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의 선과 진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으로 던지고 싶어 하지 않으시지만, 악을 자기 생명으로 만든 영은 천국에 머무는 것을 오히려 고통스럽게 느낍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구원’이라는 말도 훨씬 깊어집니다. 구원은 단순히 죽은 뒤 지옥 대신 천국이라는 좋은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억지로 천국 한가운데 데려다 놓는다고 해서 그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의 모든 기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숨 막히는 상태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상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단순히 ‘천국 입장 자격’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사랑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하는 ‘연단’의 의미도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지상의 삶을 사람이 영원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보고, 여러 시험과 고난을 통하여 죄와 정욕이 다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매우 귀합니다. 신앙을 단순한 교리적 동의나 일회적 결단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사람의 변화와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거듭남 없는 천국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연단의 목적을 ‘천국에 들어갈 점수를 쌓는 ’이나 ‘특별히 높은 영적 등급에 도달하는 ’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연단과 시험의 목적은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분노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자기 분노를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사람이 잘못했으니 내가 화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자기 분노 안에 있는 지배욕과 자기애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분노가 올라올 때 그것을 자기의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싸움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그는 단순히 화를 참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외적 행동의 억제에서 시작하여 사랑 자체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시험을 통과했는가?’가 아니라 ‘ 시험을 통하여 사랑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입니다.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자동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때문에 오히려 더 완고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고난 가운데 자기 힘의 한계를 알고 주님을 의지하며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이해하게 된다면 그 고난은 거듭남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 자체를 사랑하시거나 고난을 목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허용된 어려움까지도 가능한 한 영원한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강의에서 다루는 중간영계의 의미도 이 관점에서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중간영계에서는 사람이 지상에서 쌓아 놓은 외적 모습이 점차 벗겨집니다. 지상에서는 신분, 직책, 학력, 명성, 말솜씨, 종교적 지식 등이 사람의 실제 내면을 가릴 수 있습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반드시 내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며, 평범한 성도라고 해서 영적으로 낮은 것도 아닙니다. 매우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내적으로는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품을 수도 있고, 신학적 지식은 많지 않아도 진실하게 이웃의 선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는 이 둘을 정확히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중간영계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외적 사람과 내적 사람의 일치입니다. 사람은 점차 자기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을 그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게 됩니다. 위선적 외피를 계속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외적 결함과 잘못된 관념들이 제거되면서 그 안에 있던 선이 더 자유롭게 드러나고, 악한 사람에게는 외적으로 선하게 보이게 했던 위장과 억제가 벗겨지면서 그가 실제로 사랑했던 악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두려운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매우 위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모습으로 영원을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로가 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의 외적인 미숙함만 보고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리를 잘못 알고 있을 수 있고, 성격적으로 거칠거나 표현이 서툴 수도 있으며, 여러 약점 때문에 외적으로 완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진심으로 주님을 향하고 선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선을 보십니다. 사후에는 선과 어울리지 않는 거짓과 결함이 제거되고 그 사람 안의 참된 선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매우 바른 교리를 알고 경건한 말을 하며 종교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도 그 모든 것을 자기 명예와 지배를 위해 사용했다면 사후에는 그 내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심판의 중심은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만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는가?’입니다. 물론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목적은 선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면서 그 진리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지배하는 데 기쁨을 느낀다면 진리가 오히려 proprium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은 이 사경회처럼 영적 성숙과 성결을 강하게 강조하는 전통을 바라볼 때도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수도적 훈련, 금식, 기도, 말씀 공부, 자기부인, 절제는 모두 귀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 자체로 천국적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 모든 훈련을 통하여 자기애가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깊어져야 합니다. 오래 기도한 결과 다른 사람에게 더 온유해졌는가, 많은 말씀을 배운 결과 자기 판단을 덜 절대화하게 되었는가, 절제와 자기부인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품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수도적 훈련의 참된 열매는 ‘나는 많이 훈련받은 사람’이라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체어리티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영계의 여러 상태를 세밀하게 구분하려는 노력과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 사이에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영계의 구조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영적 성숙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천국과 영들의 세계와 지옥을 기록했지만, 그 목적은 사람들에게 사후세계에 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설명은 결국 ‘그러므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돌아옵니다. 천국의 공동체를 백 가지 알아도 이웃을 미워한다면 그 지식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계에 관한 참된 지식은 현재의 삶을 비추어야 합니다. ‘사후에는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이 서로 모인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을 가장 즐거운가?’를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험담하고 우월감을 나눌 때 즐거운가, 아니면 선한 쓰임과 진리를 나눌 때 즐거운가? ‘사후에는 내적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지금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와 주님 앞의 내가 얼마나 같은가?’를 물어야 합니다. 영계의 지식은 이렇게 자기 성찰로 이어질 때 비로소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용복 선생 시절부터 이 사경회가 강조해 온 실제적인 자기부인과 연단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도 좋은 접점을 제공합니다. 이 전통의 가장 귀한 부분은 영계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내려 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핵심진리’를 반복해서 배우는 목적도 결국 그 진리가 사람의 삶이 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전통을 바라볼 때에도 먼저 그 열망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연단의 목표가 자기 완성이나 영적 특권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임을 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중간영계라는 개념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지금 나에게서 모든 외적 조건이 벗겨진다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목사라는 직함도, 수도사라는 이름도, 교단도, 학력도, 책도, 블로그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내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만 남는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 것인가? 이것이 사후세계에 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명해집니다. 자연계에서는 외적인 조건들이 우리를 규정하지만 영계에서는 사랑이 우리를 규정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획일적인 인간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고유한 성향과 재능과 경험을 정결하게 하여 고유한 쓰임으로 만드십니다. 거듭남은 ‘’를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를 제거하여 주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신 참된 ‘’가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자기부인이라는 말도 새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자기부인은 인격과 개성과 자유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보다 자기를 앞세우는 proprium의 지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기부인은 사람을 무색무취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자유롭고 고유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천국에서 모든 천사가 서로 다른데도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가 같아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면서도 중심이 한 분 주님이시기 때문에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2강의 첫 부분에서 다루는 ‘죽음 이후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주는 가장 깊은 대답은 단순히 ‘먼저 중간영계로 갑니다’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대답은 ‘사람은 자기가 되어 사랑의 상태로 들어갑니다’입니다. 중간영계는 그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이고, 천국과 지옥은 그 사랑이 완전히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계의 지도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사랑이 천국의 질서를 향하도록 주님의 도움 가운데 거듭나는 것입니다.

 

21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단순하게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최종 장소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중간영계에서 지상생활 동안 형성된 내적 사랑과 실제 성질이 드러나는 과정을 거친다는 강사의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중요한 접점을 가지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과정을 사후에 구원의 기회를 다시 얻는 과정이나 외부적 심사 절차라기보다 자연계에서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외적 가림을 벗고 드러나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단순한 사후의 장소보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또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영원한 생명의 상태로 보며, 결국 사후세계에 관한 모든 지식의 목적도 ‘죽은 어디로 것인가?’라는 호기심보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거듭남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2강의 첫 문을 열면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영계의 복잡한 구조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오히려 자신이 실제로 사랑해 온 사람이 됩니다. 지상에서는 감출 수 있었던 것이 영계에서는 드러나고, 억지로 유지하던 것은 벗겨지며, 실제로 사랑했던 것이 삶 전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영원을 준비하는 일은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기 전에 사랑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연단’도, ‘광야’도, ‘자기부인’도, 이후 2강에서 계속 등장하게 될 ‘흰옷’, ‘할례’, ‘생명과’, ‘감추인 만나’, ‘ 이름’, ‘이긴 ’도 결국 하나의 질문 아래 놓입니다. ‘ 모든 것을 통하여 사랑의 중심이 정말 달라지고 있는가?’입니다. 자기애가 조금씩 물러나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바로 거기서부터 천국은 사후의 먼 장소가 아니라 이미 한 사람 안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강 2

천국과 예루살렘’ : 천국의 높고 낮음은 계급이 아니라 사랑의 차이입니다

 

2강의 흐름은 사람이 죽은 뒤 중간영계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가 드러난다는 설명에서, 그 이후 천국의 구조와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강사는 천국이 단순히 하나의 동일한 공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단계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하고, 특히 ‘ 예루살렘 ’과 ‘만국’을 구별하면서 지상에서 더 깊은 성결과 연단을 통과한 ‘이긴 ’, 곧 ‘처음 익은 열매’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고 다른 구원받은 성도들은 만국에 속하게 된다는 구조를 제시합니다. 여기에는 2강 전체를 관통하는 강사의 중요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똑같아지는 것은 아니며, 지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변화되었는가는 사후의 상태와도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획일적인 하나의 세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으며, 크게는 세 천국으로 구별됩니다. 가장 내적인 천적 천국, 그 다음의 영적 천국, 그리고 보다 외적인 자연적 천국입니다. 이것은 천국에 실제적인 질서와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면 모두 완전히 동일한 천국 상태가 된다’는 식의 단순한 천국관보다, 강사가 지상에서 형성된 영적 상태와 사후 상태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세 천국의 차이는 ‘누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서 높은 등급을 획득했는가’라는 공로적 서열이 아닙니다. 더구나 천국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성공한 신자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덜 성공한 신자들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세 천국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사람이 어떤 방식과 깊이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른 서로 다른 영적 상태입니다. 가장 내적인 천적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 사랑의 선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받아들이며, 영적 천국의 천사들은 이웃 사랑의 선과 그에 속한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자연적 천국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상태에 맞게 받아들입니다. 모두가 천국에 있으며 모두가 자기 상태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립니다.

 

따라서 ‘높은 천국’이라는 말을 자연계의 계급 개념으로 이해하면 곧바로 오해가 생깁니다. 지상에서는 높은 자리가 더 많은 권력과 명예와 특권을 뜻합니다. 그래서 ‘첫째 천국’, ‘둘째 천국’, ‘셋째 천국’이라고 하면 자연적 사고는 곧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 같은 그림을 만듭니다. 그러나 천국은 정반대입니다. 더 내적인 천국에 있을수록 자기 자신을 더 낮게 여기며, 모든 선과 지혜와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지각합니다. 더 높다는 것은 더 많은 특권을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자유롭게 섬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 질서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지만, 주님의 나라에서는 큰 자가 섬기는 자가 됩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가장 높은 천사는 자기 자신을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천사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 아무 선도 없고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가장 깊이 인정하는 천사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영적 체계가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다른 신자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는 의식을 강화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 체계는 천국의 높음을 자연계의 높음으로 바꾸어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처음 익은 열매’와 ‘이긴 ’도 이 원리 안에서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상에서 더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더 깊은 연단을 통과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강조하는 것은 귀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영적 계급으로 만들 때입니다. ‘일반 성도’가 있고, 그 위에 ‘광야 성도’가 있으며, 그 위에 ‘이긴 ’ 또는 ‘처음 익은 열매’가 있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배열하기 시작하면, 원래 자기부인을 위해 시작된 영성이 오히려 새로운 proprium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 일반 성도가 아니라 이긴 자의 반열에 들어갔다’는 의식 자체가 매우 정교한 영적 자기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람을 외부에서 이렇게 등급화하는 데 매우 신중합니다. 한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를 아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적으로 대단한 수도적 훈련이나 특별한 체험이 없어 보여도 오랜 세월 자기에게 맡겨진 가족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일하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자기 유익보다 앞세우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며 살아왔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랜 금식과 기도와 많은 영적 체험을 말하는 사람이 내적으로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을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는 이 둘의 실제 내적 상태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외적인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사랑은 행위를 통하여 형태를 얻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실제로 행하면서 그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듭니다. 따라서 천국의 차이는 임의적인 보상의 차이가 아니라 지상에서 자유롭게 형성된 사랑의 차이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더 좋은 천국을 상으로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덜 좋은 천국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은 자신이 주님의 인도 아래 받아들인 선의 질에 가장 완전하게 맞는 천국 공동체에서 살아갑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원리가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천국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거나 더 많은 것을 가지면 비교와 질투가 생기지만, 천국에서는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선과 쓰임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립니다. 눈이 손을 부러워하지 않고 귀가 눈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각 기관이 자기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때 몸 전체가 하나가 됩니다. 천국 역시 하나의 ‘가장 사람’, 곧 막시무스 호모(Maximus Homo)의 형태를 이루며,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다른 기관과 기능처럼 하나의 주님 아래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다양성은 불평등이 아니라 완전한 질서입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다면 오히려 천국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은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형태 역시 무수히 다양합니다. 어떤 공동체는 지혜와 관련된 선을 더 뚜렷하게 나타내고, 어떤 공동체는 순진함과 관련된 선을, 어떤 공동체는 서로를 돌보고 섬기는 특정한 쓰임의 선을 나타냅니다. 그 모든 다양성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하나의 주님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룰 때 천국의 아름다움이 이루어집니다.

 

이 관점은 강사가 계시록의 ‘ 예루살렘’을 특정한 이긴 자들이 들어가는 가장 높은 영역으로 설명하는 부분에도 중요한 보완을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 예루살렘’은 근본적으로 어떤 특별한 천국 도시의 명칭이기 전에 ‘ 교회’를 의미합니다. 계시록 마지막에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이전 교회의 종말 이후 세우시는 새로운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 성의 성벽과 문과 기초석과 길과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까지 모두 새 교회의 선과 진리, 교리와 삶의 여러 측면을 상응적으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 예루살렘 안에 들어가는 사람’과 ‘ 만국에 있는 사람’을 곧바로 천국의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으로 나누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계시록의 도시는 자연적 도시가 아니라 교회의 교리와 질서를 표상하고, ‘ ’과 ‘ ’ 역시 단순한 지리적 위치보다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계시록을 문자적 영계 지도로 바꾸어 읽기 시작하면 금으로 된 거리, 열두 문, 열두 기초석, 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 같은 모든 것을 자연적 구조물로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읽으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완전한 영적 체계를 이룹니다.

 

예루살렘이 말씀에서 교회를 표상하는 이유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고, 성전에서는 여호와를 예배했으며,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이 그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말씀의 속뜻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교회, 특히 교회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 예루살렘’은 새로운 도시 건설보다 새로운 교회의 형성을 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참된 교회의 교리와 생명이 인간의 지성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라는 작업 자체에도 매우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새 교회는 스베덴보리라는 한 사람을 높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도 목적은 자신을 중심에 세우는 데 있지 않고 말씀의 속뜻을 열어 주님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 예루살렘’의 중심은 어떤 인간적 교리 체계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계시록이 마지막에 ‘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성전이심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모든 교리와 모든 진리의 목적은 결국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이긴 ’를 강조하는 것도 한 단계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긴 자가 특별한 천국 도시의 특권적 주민이 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주님의 나라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핵심입니다.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이 새 교회를 나타낸다면, 개인적 차원에서는 그 교회의 질서가 한 사람 안에 세워지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그의 생각을 다스리며, 자기애가 물러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의 의지를 다스리기 시작할 때, 그 사람 안에도 일종의 ‘ 예루살렘’의 질서가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나는 안에 들어갈 등급인가?’가 아닙니다. ‘ 성이 나타내는 주님의 질서가 지금 안에 세워지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영성의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전자의 질문은 자칫 자기의 영적 위치에 관심을 갖게 하지만, 후자의 질문은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보고 주님의 질서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전자는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를 묻고, 후자는 ‘주님께서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를 묻습니다.

 

강사가 천국의 여러 상태를 설명하면서 지상의 삶을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래서 귀합니다. 사람은 사후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천국 상태를 갑자기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가는 방식이 영원의 형태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행위’ 역시 공로적 점수가 아니라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하실 때, 외적인 행위의 숫자만 세시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 안에는 의지와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헌금도 사랑에서 할 수 있고 명예욕에서 할 수 있으며, 같은 설교도 영혼의 선을 위해 할 수 있고 자기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영계에서는 그 내적 질이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천국의 ‘상급’이라는 말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을 행한 대가로 외부에서 보너스처럼 주어지는 것이 천국의 상급이 아닙니다. 선 자체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이웃의 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잘되는 것을 보는 것 자체에서 기뻐합니다.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은 쓰임을 행하는 것 자체에서 행복합니다. 이것이 천국적 상급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더 높은 천국의 상태는 더 많은 특권을 받는 상태가 아니라 더 깊은 선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선 자체에서 더 내적인 기쁨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수도적 연단과 성결을 추구하는 목적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나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처음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가 사람에게 강한 동기를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 안에 ‘다른 성도보다 높은 곳에 가겠다’는 사랑이 섞이는 순간 천국적 목적과 충돌합니다. 천국에서는 높아지고 싶은 사람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 섬기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더 내적인 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연단은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한 훈련이 아니라 높은 자리를 원하던 자기애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긴 ’라는 표현의 역설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이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이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승자는 자기 이름을 높이지만, 천국의 승자는 모든 승리를 주님께 돌립니다. 세상에서 높은 사람은 섬김을 받지만, 천국에서 높은 사람은 섬기는 데서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이기는 ’를 세상의 승자 개념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수도적 전통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소중한 분별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기도와 절제와 연단, 자기부인의 전통이 귀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을 특별한 영적 계급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고 주님과 이웃을 향하도록 돕는다면 귀한 것입니다. 수도적 삶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나는 남들과 다르다’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깊은 겸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겸손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향한 온유와 체어리티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세 단계와 수많은 공동체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국의 질서를 아는 것입니다. 그 질서는 ‘ 높은 자가 많이 소유한다’가 아니라 ‘ 깊이 사랑하는 자가 많이 섬긴다’는 질서입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질서를 뒤집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천국은 천국입니다. 자기 높임이 사라지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모든 관계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2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사후 상태가 획일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영적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특별히 연단을 통과하여 이긴 자와 처음 익은 열매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고 다른 구원받은 성도들은 만국에 속한다는 강사의 설명은 천국에 실제적인 상태의 차이와 질서가 있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통찰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천적·영적·자연적 세 천국의 차이를 영적 공로에 따른 상·중·하 계급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질과 깊이의 차이로 이해하고, ‘ 예루살렘’ 역시 특별한 영적 엘리트가 거주하는 천국의 최상위 도시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내려오는 신적 진리와 그 진리에 따른 삶으로 이루어진 새 교회를 표상하는 것으로 보며, 따라서 참된 ‘이긴 ’란 다른 성도보다 높은 위치를 획득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여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생명의 중심이 되어 가는 사람이라고 이해할 때 천국의 질서와 새 예루살렘의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결국 천국의 높고 낮음을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는가?’입니다. 천국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천사가 자신을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그 상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 가까이 있는 존재일수록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의 가장 깊은 형태는 ‘가장 높은 천국에 가고 싶다’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 예루살렘’은 죽은 뒤 찾아가야 할 먼 도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주님의 나라가 됩니다. 자기 의가 한 걸음 물러나고 진리가 그 자리를 차지할 때, 지배하려는 사랑이 한 걸음 물러나고 섬기는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할 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 물러나고 그의 선을 기뻐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새 예루살렘의 질서가 조금씩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세 천국과 수많은 공동체에 관한 지식도 결국 우리를 그 한 가지 삶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어느 천국에 것인가?’를 넘어서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게 하는 것, 바로 거기에서 영계에 관한 지식은 호기심을 넘어 거듭남의 진리가 됩니다.



2강 3

흰옷과 세마포, ‘옷을 빠는 ’ : 성결은 죄를 덮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실제로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2강의 흐름은 중간영계와 천국의 여러 상태, 새 예루살렘에 관한 설명에서 이제 계시록이 반복해서 말하는 ‘흰옷’과 ‘세마포’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이 부분에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계시록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사람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강사는 이것을 단순한 천국의 의복 묘사가 아니라 지상에서 이루어진 성결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특히 계시록 19장의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직접 설명되는 점을 중요하게 받아들여, 천국에서 입는 옷과 지상에서의 실제 삶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 방향은 2강 전체에서 강사가 붙들고 있는 핵심, 곧 구원은 입술의 신앙고백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변화와 성결로 나타나야 한다는 주장과 이어집니다.

 

이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은 대체로 진리를 표상합니다. 사람의 몸을 옷이 둘러싸듯, 내적인 선은 진리를 통하여 외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선은 의지와 사랑에 속하고, 진리는 그 선이 어떤 형태로 생각되고 표현되고 행해져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입는 옷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와 상응합니다. 영계에서는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상응하기 때문에 천사의 의복 역시 그가 가진 진리의 상태에 따라 나타납니다. 더 내적인 지혜 가운데 있는 천사들의 옷은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보이며, 그 빛남 역시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강사가 천국의 옷을 지상에서의 삶과 연결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지상에서 선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사후에 좋은 옷을 상으로 받는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상응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천국의 옷은 외부에서 지급되는 포상물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천사가 희고 빛나는 옷을 입는 까닭은 그가 지상에서 선행 점수를 많이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삶으로 살아온 결과 그 진리가 그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바로 그 내적 상태가 의복이라는 외적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왜 옷이 ‘희다’고 할까요? 말씀에서 흰색은 빛과 관계하고, 빛은 신적 진리와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흰옷은 정결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결한 진리’라는 말을 단순히 ‘정확한 교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거짓 교리를 버리고 참된 교리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알면서 그것을 자기 우월감을 세우거나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지배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 진리는 그의 기억 속에는 있어도 아직 흰옷이 되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아는 것이 많지 않아도 알고 있는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 진리는 그의 선과 결합되어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계시록에서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설명되는 것도 바로 이 점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행위구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 행위가 그 자체로 인간을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 사랑과 신앙은 반드시 삶으로 형태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결국 그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선을 사랑한다면서 계속 악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친다면 그 사랑은 아직 실제 생명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며 선을 행하려고 애쓴다면, 그 진리가 삶의 옷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강조하는 ‘옷을 빠는 ’이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계시록 7장에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하고, 계시록 22장에는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라고 합니다. 강사는 이 말씀들을 성도의 실제 정결과 성화의 과정으로 읽습니다. 즉 사람에게 아직 죄와 정욕과 불결함이 있으므로 그것이 씻겨야 하고, 그렇게 옷을 깨끗하게 한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을 실제 정결과 연결하려는 강사의 강조는 가볍게 지나칠 부분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씻음’은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무엇이 씻기는가입니다.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자기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님께 합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게 하는 진리와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배우고, 그 진리의 빛 가운데 자기 악을 보며, 주님의 힘을 구하여 그 악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는 주님의 역사와 인간의 응답이 함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능력을 주시지만 인간은 그 능력을 받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는다’는 역설적인 표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자연적으로 생각하면 피로 옷을 씻으면 오히려 붉게 물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피에 씻었더니 옷이 희어졌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표현 자체가 이것을 자연적 피와 자연적 세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 특별히 인간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거짓과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지점에서 보혈에 관한 일반적인 기독교적 표현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중요한 차이도 나타납니다. ‘예수의 피가 죄를 덮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죄를 보지 않으신다’는 식으로만 이해하면, 인간의 실제 내적 상태가 변하지 않아도 법적인 신분만 바뀌면 된다는 방향으로 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구속은 인간의 죄를 단순히 외적으로 가리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인간이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 구속의 능력을 받아 실제로 악에서 돌이키고 거듭나는 것이 구원의 삶입니다.

 

따라서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죄가 그대로 있는데 흰 천으로 덮어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생각과 악한 삶이 실제로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완전무결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외적인 악부터 보게 됩니다. 거짓말, 부정직, 음란한 행동, 폭력 같은 명백한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그보다 더 내적인 것들이 드러납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는 태도, 선을 행하고도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 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마치 옷의 큰 얼룩을 먼저 씻은 뒤 밝은 빛 아래에서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얼룩들이 새롭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이 반드시 ‘나는 이제 훨씬 깨끗한 사람이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질수록 자기 안의 proprium이 얼마나 깊은지를 더 분명히 보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으로 이어집니다. 영적으로 성숙할수록 자기의 완전함을 크게 말하기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점은 강사가 2강에서 계속 발전시키는 ‘완전한 성결’과 ‘이긴 ’의 개념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합니다. 강사는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죄성이 제거되고 옷이 깨끗해진 사람을 ‘이긴 ’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에는 죄를 실제로 이겨야 한다는 매우 강한 윤리적 진지함이 있습니다. 신앙을 죄에 대한 면허증처럼 사용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결을 ‘ 안에서 죄의 가능성이 완전히 제거되어 이제 나는 없는 단계에 들어갔다’는 자기 판정으로 이해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악은 인간에게서 마치 뿌리째 뽑혀 존재하지 않게 되는 방식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을 억제하시고 사람이 그 악에서 돌아서 선을 사랑하도록 새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인간에게 있는 유전적이고 획득된 악은 주님의 질서 아래 밀려나 지배력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내게 이제 악이 없다’가 아니라 ‘악이 올라올 그것을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니라 성결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자신을 ‘이미 완전히 씻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직 씻기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다른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순간 주님의 진리와 선을 받아야 깨끗하게 있는 사람’이라고 안다면 다른 사람의 연약함 앞에서도 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 역시 주님의 자비가 아니면 설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흰옷은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높게 보이게 하는 옷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공로를 가리고 주님의 선과 진리만 드러나게 하는 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가 ‘흰옷’과 ‘세마포’를 ‘옳은 행실’과 연결하는 부분에서는 특히 ‘행실’의 내적 근원을 보아야 합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그 근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칭찬을 받기 위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한 거래의 마음으로 헌금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 행동은 선해 보이지만 내적 목적에는 proprium이 강하게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이웃에게 필요한 일을 조용히 하고 그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그 행위 안에는 전혀 다른 영적 질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단순한 행동 목록이 아니라 선한 사랑이 진리를 통하여 형태를 얻은 삶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단순한 자선행위로 제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사랑이 각 사람의 직업과 관계와 책임 속에서 올바른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도, 직장에서 정직하게 맡은 일을 하는 것도, 목회자가 자기 명예보다 성도의 영적 선을 먼저 생각하는 것도, 상인이 속이지 않고 거래하는 것도 모두 체어리티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적 삶은 특별한 종교행위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수도적 성결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수도생활이나 사경회, 금식과 철야, 장시간의 기도는 인간이 자기 욕망을 돌아보고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는 귀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단의 결과가 일상의 체어리티로 나타나야 합니다. 수련원에서 며칠 동안 깊은 은혜를 받고 돌아왔는데 가족에게는 여전히 거칠고, 교회에서는 자기 의견과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며, 사회생활에서는 정직하지 않다면 아직 옷의 정결이 실제 삶 전체로 이어졌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특별한 체험을 말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점점 더 온유하고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 간다면, 그 사람의 옷은 실제로 씻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수도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과 연단을 중시하는 전통은 ‘옷을 빨아야 한다’는 계시록의 강한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믿기만 하면 되었으니 삶은 상관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소중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진지함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결의 방향을 더욱 내적으로 가져갑니다. 외적 욕망의 절제에서 더 깊이 들어가 자기 의와 영적 우월감과 공로의식까지 씻겨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마지막까지 씻겨야 하는 얼룩이 ‘나는 깨끗하다’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육체적 욕망이나 세속적 욕심은 비교적 쉽게 악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기 신앙이 옳다는 자부심이나 다른 사람보다 더 성숙하다는 의식은 선한 것처럼 붙들 수 있습니다. 특히 많은 기도와 연단과 성경 공부를 한 사람에게는 이 유혹이 더욱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깊은 진리를 안다’, ‘나는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종교적 proprium의 매우 깊은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도 이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을 다시 씻을 필요는 없지만 발은 씻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에서 ‘’은 인간의 가장 낮은 자연적 차원과 관계합니다. 사람은 주님을 알고 진리를 받아들였어도 일상생활에서 자연적 욕망과 자기중심성이 계속 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발을 씻어야 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거대한 정결 체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실제 삶에서 이루어지는 정결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흰옷을 입었는가, 아직 입지 못했는가?’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여 영적 등급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게 됩니다. ‘오늘 옷에는 무엇이 묻었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오늘 누군가의 말을 듣다가 왜 그렇게 불쾌했는가,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왜 화가 났는가, 선을 행한 뒤 왜 알아주기를 바랐는가,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며 왜 마음이 불편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실제로 옷을 빠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옷을 씻는 물과 피, 곧 정결하게 하는 진리는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비추어 주셔야 자기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빛으로 자기를 보면 대부분 자기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리가 들어오면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 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원래 성격이 이렇다’고 하던 것이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자기애로 보이고, ‘나는 진리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태도 속에 자기 의와 지배욕이 섞여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적 진리의 씻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로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주님의 구속을 믿는 것과 주님의 진리에 따라 실제로 회개하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구속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악과 싸울 수 있고, 그분의 신적 진리를 받아들여 악을 보고 거절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력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아무런 실제 변화 없이 ‘피가 덮었다’고 선언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고 인간은 그 구원을 자유롭게 받아 실제 삶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흰옷과 세마포는 매우 아름다운 복음의 표상이 됩니다. 흰옷은 ‘나는 죄가 없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나를 악과 거짓에서 건져 진리 안에서 살게 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세마포가 빛나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빛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이 진리를 통하여 삶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자기 옷을 자랑하지 않는 것처럼 거듭난 사람도 자기 성결을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옷의 빛은 근원적으로 주님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2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의 흰옷과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는 사람들과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을 지상에서의 실제 성결과 옳은 행실에 연결하여, 구원은 단순한 신앙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정욕에서 실제로 정결해지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하는 강사의 설명은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통찰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을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로, 그 옷의 ‘흰빛’을 선과 결합하여 정결해진 신적 진리의 빛으로, ‘어린양의 피에 씻음’을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를 받아 악과 거짓에서 실제로 정결해지는 거듭남으로 이해하고, 성결 역시 인간 안에서 악의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되어 스스로 완전한 존재가 되는 상태라기보다 주님의 힘으로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면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새 의지가 점차 지배권을 얻는 과정으로 볼 때, 흰옷과 세마포의 아르카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구속과 인간의 실제 회개와 삶이 결합되는 더욱 깊은 의미로 열립니다.’

 

결국 흰옷에 관한 말씀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나는 흰옷을 받은 특별한 사람인가?’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오늘 삶의 무엇을 씻고 있는가?’입니다. 어제까지 악인 줄 몰랐던 것을 오늘 악으로 보게 되었다면 이미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한다면 옷을 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조금 더 정직함과 온유함과 체어리티가 들어온다면 옷이 조금 더 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결의 가장 분명한 표지는 ‘나는 성결해졌다’는 자기 확신보다 사랑의 변화일 것입니다. 오래 기도할수록 더 온유해지고, 말씀을 깊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되며, 연단을 많이 받을수록 약한 사람에게 더 자비로워지고, 선을 많이 행할수록 자기 공로를 덜 생각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옷에는 주님의 빛이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결을 말할수록 사람을 더 쉽게 등급화하고 자기 위치를 높게 여기게 된다면, 아직 씻어야 할 매우 미세한 얼룩이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옷을 빠는 ’은 평생의 거듭남을 보여 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형상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옷을 버리고 전혀 다른 사람의 옷을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진리가 실제 선과 결합하도록 끊임없이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진리가 기억 속의 교리에서 삶의 진리로 바뀌고, 삶의 진리가 사랑과 하나가 될수록 사람의 옷은 밝아집니다. 천국에서 빛나는 세마포는 바로 지상에서부터 시작된 그 거듭남의 삶이 영계에서 그 본래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강 4

영적 할례와 광야의 연단 :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 나를 지배하려는 proprium입니다

 

2강의 앞부분에서 중간영계와 세 천국, 새 예루살렘, 흰옷과 세마포를 살펴본 강의는 이제 한층 더 직접적으로 ‘성결’의 문제 안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를 단지 죄 사함을 받은 상태에 머물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그 안의 죄성과 정욕을 실제로 처리하시며, 이것을 구약의 ‘할례’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육체의 할례에서 몸의 일부를 잘라 내듯 영적 할례에서도 사람 안의 죄성이 잘려 나가야 하며, 이 과정을 충분히 통과한 사람이 ‘이긴 ’가 되어 생명과와 감추인 만나를 먹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핵심진리’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앞에서 말한 흰옷과 세마포가 성결의 외적 형상이라면, 이제 할례와 광야는 그 성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강의가 죄를 단순히 ‘용서받으면 끝나는 ’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은 충분히 귀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죄의 용서와 죄에서의 실제적인 변화 사이를 구별하려 합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 욕망과 정욕과 분노와 교만을 아무 거리낌 없이 따라 살아간다면 그것을 완성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가 필요하고 ‘연단’이 필요하며 ‘할례’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신앙이 실제 인간의 성품과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 강한 요청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구원을 단순한 법정적 선언이나 지적 신앙으로 보지 않고,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며 주님에게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거듭남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할례’ 역시 실제로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할례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사랑들을 제거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특별히 할례가 생식기관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연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생식과 출생은 영적으로 선과 진리가 생겨나는 것, 곧 거듭남과 관계합니다. 그런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욕망이 그 생성을 가로막습니다. 따라서 포피를 제거하는 할례는 자연적 육체의 일부를 잘라 내는 의식 자체에 궁극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 자기 안의 불결한 사랑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표상합니다. 구약의 외적 할례가 신약에서 ‘마음의 할례’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영적 할례’를 성결과 연결하는 방향은 상당히 깊은 접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려 나가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칫하면 거듭남을 ‘ 안에 있는 죄성이라는 어떤 덩어리를 완전히 잘라 내어 이상 악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으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설명에는 때때로 이러한 이미지가 상당히 강하게 나타납니다. 광야의 연단을 충분히 통과하면 사람 안의 죄성이 제거되고, 그 결과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이긴 ’의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에서 실제로 벗어나야 한다는 뜻에서는 귀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는 여기에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proprium, 곧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느끼는 고유한 것은 그 자체로 자기애와 거짓에 기울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인간의 인격이나 개성, 자유와 이성을 제거하여 ‘’를 없애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proprium을 억지로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악으로 보고 자유롭게 거절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의지, 곧 천국적 proprium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형성하십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의지로 사랑하고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며 자기 손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거듭날수록 모든 선한 의지와 참된 생각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적 할례에서 잘려 나가야 할 것은 인간의 ‘자기’ 자체가 아니라, 그 자기를 주님에게서 독립된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게 하는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자기를 죽인다’, ‘자아가 죽어야 한다’, ‘나는 없어져야 한다’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밀어붙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고유성과 자유까지 부정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을 없애기 위해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 거듭나게 하십니다. 자기애와 거짓이 지배할수록 인간은 오히려 노예가 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수록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천국의 다양성과도 연결됩니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성격과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 천사는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뚜렷한 고유성을 가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개성을 없애지 않으시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주신 따뜻함, 어떤 사람에게 주신 치밀함, 어떤 사람에게 주신 용기와 추진력, 또 어떤 사람에게 주신 섬세함과 사려 깊음은 제거되어야 할 ‘자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자기애를 섬기는가, 주님과 이웃의 선을 섬기는가입니다. 강한 추진력이 지배욕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쓰임을 위한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솜씨가 자기 명예의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진리를 전달하는 쓰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적 할례는 그 능력 자체를 잘라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하려는 불결한 사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광야’가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매우 복합적인 표상을 갖지만, 거듭남의 문맥에서는 시험과 정화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뒤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광야를 통과했던 것처럼, 사람도 악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서 곧바로 천국적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애굽에서 몸은 나왔지만 애굽의 욕망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시작한 인간의 모습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도 이전의 욕망을 여전히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광야는 단순한 고생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모든 일이 잘될 때에는 누구나 자기가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과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고, 인정받지 못하고, 계획이 무너지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기다려야 할 때 비로소 무엇을 실제로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나는 주님의 뜻을 원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는지, ‘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기를 원했는지가 시험 가운데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주님께서 인간을 괴롭히시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도 감추어져 있던 proprium이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고난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내신 ‘연단 프로그램’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계에는 인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생기는 고통도 있고, 다른 사람의 악으로 인한 고통도 있으며, 질병과 사고와 자연적 조건에서 오는 고통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이나 고통 그 자체를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 섭리는 그것들을 허용하시되, 허용된 것 가운데서도 가능한 한 인간의 영원한 선을 이루도록 역사합니다. 따라서 ‘고난이 많을수록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경계해야 합니다. 고난의 양이 거듭남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응답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수도적 연단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금식하고, 절제하고, 편안함을 포기하고, 일정한 규율 아래 자신을 훈련하는 것은 proprium을 드러내는 매우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먹지 못할 때 짜증이 올라오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불평이 나오며,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야 할 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보면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적 규율은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편함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굶었다는 사실, 잠을 적게 잤다는 사실, 오랜 시간 기도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영적 할례를 이루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외적 고행을 많이 한 뒤 ‘나는 이만큼 대가를 치렀다’는 의식이 생긴다면 proprium은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을 뿐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세속적 자랑은 버렸는데 영적 자랑이 생기고, 돈에 대한 우월감은 버렸는데 기도시간에 대한 우월감이 생기며, 사회적 지위 대신 영적 단계로 사람을 비교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겉으로는 자기를 부인했지만 훨씬 더 미세한 proprium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는 외적인 악뿐 아니라 종교적 proprium까지 보여 주십니다.

 

이 점에서 영적 할례는 단 한 번의 사건이라기보다 거듭남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비교적 거친 욕망을 잘라 냅니다. 명백한 부정직과 음란, 폭력, 탐욕 같은 것들을 죄로 알고 멀리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더 미세한 것들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는 마음, 자신이 옳다는 데서 느끼는 쾌감, 선을 행하고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나는 이제 상당히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기의식까지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할례의 결과는 ‘이제 안에는 죄성이 없다’는 자신감보다 겸손에 가깝습니다. 주님의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주님의 질서와 어긋나 있는지를 더 잘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으로 이어지는 자기혐오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나온 악을 악으로 인정하면서도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음을 신뢰하게 합니다. 자기혐오는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을 수 있지만, 참된 회개는 시선을 주님께 돌립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말하는 ‘죄성이 제거된다’는 표현을 가장 선하게 받아들이는 방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인간에게서 악의 모든 가능성이 존재론적으로 사라진다는 뜻보다, 이전에 인간을 지배하던 악이 더 이상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훨씬 가까워집니다. 예전에는 분노가 올라오면 곧바로 그것을 정당화하고 행동했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분노가 올라와도 ‘이것은 주님의 질서가 아니다’라고 보고 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악한 충동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서 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악임을 알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선한 것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거듭난 사람에게 악한 생각이 다시 올라오는 것 자체를 ‘아직 죄성이 제거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내면을 검사하며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거듭남의 실패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험은 선과 진리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았기 때문에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충돌하면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싸움이 있다는 것은 두 세력이 모두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며, 그 가운데 인간은 주님의 힘을 받아 어느 쪽에 동의할 것인지 자유롭게 선택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시험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시험을 통하여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더 깊이 결합됩니다. 진리를 단지 알고 있을 때와 그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실제 욕망과 싸워 본 뒤에는 그 진리의 깊이가 다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아는 것과, 실제로 나를 깊이 상하게 한 사람을 앞에 두고 복수하고 싶은 욕망과 싸우면서 용서를 선택하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의 과정에서 진리는 단순한 기억 지식에서 삶의 진리로 내려옵니다. 이것이 시험이 거듭남에 쓰이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반드시 ‘특별한 수도생활’에서만 경험되는 것도 아닙니다. 일상생활 자체가 거대한 광야가 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와 부딪힐 때, 자녀 때문에 자기 계획을 포기해야 할 때,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정직을 지켜야 할 때, 교회에서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해야 할 때, 그 모든 순간에 proprium이 드러납니다. 오히려 일상은 도망갈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실제적인 영적 훈련장이 됩니다.

 

이것은 수도생활과 일상생활을 경쟁시키려는 뜻이 아닙니다. 수도적 환경은 집중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수 있는 귀한 장점이 있고, 일상생활에는 관계와 책임 속에서 사랑을 실제로 살아야 하는 고유한 시험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수도원 안에서도 proprium을 키울 수 있고, 시장과 직장과 가정에서도 깊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특정한 생활양식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광야에서의 ‘죽음’이라는 표현도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애의 지배입니다. ‘ 뜻대로 되어야 행복하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야 가치가 있다’, ‘ 판단이 옳아야 한다’, ‘내가 선은 공로다’라는 proprium의 주장들이 하나씩 힘을 잃어 가는 것이 영적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있습니다. 옛사람이 약해지고 새사람이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자기부인은 자기파괴가 아닙니다. 참된 자기부인은 오히려 인간을 자기애의 감옥에서 해방합니다. 인정받아야만 행복한 사람은 사람들의 평가에 묶여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어야 평안한 사람은 환경의 노예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야 만족하는 사람은 끊임없는 비교 속에 삽니다. 그러나 이런 proprium의 요구가 약해지면 사람은 훨씬 자유로워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어도 기뻐할 수 있고,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평안을 잃지 않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적 자유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인간의 의지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실제 이기는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균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하시니 나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고 하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사라지고, ‘내가 연단해서 죄성을 제거한다’고 하면 자기 공로가 들어옵니다.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싸우지만 주님께서 이기십니다. 사람은 문을 열지만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긴 ’라는 말도 다시 빛을 얻습니다. 이긴 자는 영적으로 강한 자기 자신을 완성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주님의 힘을 받아 악을 거절하는 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이겼다’는 의식보다 ‘주님께서 건져 주셨다’는 고백이 깊어집니다. 만일 연단의 끝에서 인간의 자기 확신이 더 강해진다면 무언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연단의 끝에는 proprium의 강화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의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다시 할례를 받는 장면도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광야를 통과했다고 자동으로 가나안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언약의 표지가 필요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시험을 많이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시험을 통하여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결함이 실제로 제거되고 주님의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광야 경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통하여 무엇이 잘려 나갔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에서 강조해 온 ‘연단’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그 가치를 축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깊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연단은 단순히 육체를 힘들게 하고 욕망을 억제하는 훈련을 넘어, 사람 안에 숨어 있는 자기애와 자기 의와 공로의식까지 주님의 빛 앞에 드러내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외적인 정욕을 이겼는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면 아직 광야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전보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이해하고, 자기 판단을 덜 절대화하며, 선을 행하고도 공로를 주님께 돌리게 되었다면 광야는 실제로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결’을 분별하는 매우 실제적인 기준이 됩니다. 성결은 특별한 표정이나 말투나 생활양식으로 먼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자기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비판받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이 칭찬받을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정직한가에 드러납니다. 이런 곳에서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고 있다면 영적 할례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의 할례를 성도의 영적 성결과 연결하고,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인간 안의 죄성과 정욕이 잘려 나가 이긴 자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강조하는 강사의 설명은 사함을 실제 삶의 변화와 분리하지 않고 신앙을 거듭남으로 이끌려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통찰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할례를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사랑들의 제거로, 광야를 사랑들이 드러나 주님의 선과 진리와 싸우는 시험의 상태로 이해하되, 거듭남을 인간의 인격이나 자유 또는 악의 가능성 자체를 잘라 없애는 과정으로 보기보다 proprium에서 나오는 악이 지배권을 잃고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의지와 천국적 사랑이 점차 지배권을 얻는 과정으로 보며, 따라서 참된 자기부인은 ‘’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명의 주인이고 선의 근원이다’라는 proprium의 환상을 내려놓는 것이고, 참된 이김 역시 연단을 통하여 강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 없이는 아무 악도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실제로 악을 거절하는 데 있음을 볼 때, 영적 할례와 광야의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결국 광야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얼마나 고생했는가?’가 아닙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입니다. 이전보다 더 많이 참을 수 있게 되었는가보다,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전보다 욕망을 더 강하게 억제할 수 있는가보다, 다른 사람의 선을 더 진심으로 기뻐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전보다 자신을 더 혹독하게 다룰 수 있는가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영적 할례의 가장 깊은 칼끝은 마지막에 바로 이곳을 향할 것입니다. ‘나는 이제 많이 연단받았다’, ‘나는 많이 버렸다’, ‘나는 상당히 성결해졌다’, ‘나는 이긴 자에 가까워졌다’고 말하고 싶은 그 미세한 proprium입니다. 그것마저 주님 앞에서 내려놓을 때 사람에게 남는 것은 자기 성취가 아니라 감사입니다. ‘제가 해냈습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여기까지 붙드셨습니다’가 됩니다. 그때 광야는 인간을 강한 자기로 만드는 곳이 아니라 자기 힘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영적 할례’가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거듭남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강 5

생명나무, 감추인 만나와 :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상급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2강은 중간영계와 천국의 질서에서 시작하여 흰옷과 세마포, 영적 할례와 광야의 연단을 거쳐 이제 계시록 일곱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의 약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갑니다. 강사는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여 죄성과 정욕이 처리된 ‘이긴 ’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계시록에서 주님께서 이긴 자들에게 약속하신 여러 복을 실제적인 영적 상급으로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이 ‘생명나무의 열매’, ‘감추인 만나’, ‘ ’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것들이 일반적인 구원과는 구별되는, 연단을 통과한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복과 깊이 연결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새 예루살렘, 흰옷, 세마포, 영적 할례가 모두 이 지점으로 모여드는 셈입니다.

 

먼저 에베소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는 약속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표상입니다. 이미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 한가운데 등장하는 생명나무에서부터 계시록 22장의 새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말씀의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생명나무는 근본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생명, 더 깊게는 주님 자신과 그분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천국의 과실 하나를 먹고 특별한 영적 능력을 얻는다는 뜻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자연계에서 음식은 몸 밖에 있을 때에는 아직 우리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고 소화하여 몸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도 ‘먹는 ’은 이와 상응합니다. 선과 진리를 단순히 보고 아는 것을 넘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생명과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주님 사랑에 관한 교리를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랑을 받아 삶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2강 전체에서 강사가 강조해 온 ‘삶으로 이루어지는 성결’과도 매우 중요한 접점을 가집니다.

 

다만 여기에서 ‘누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가?’라는 질문을 둘러싸고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는 ‘이긴 ’라는 특정한 상태에 도달한 성도에게 생명나무의 열매가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구원과 이긴 자의 상급 사이에 비교적 뚜렷한 구별을 둡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천국 안의 특별한 계급에게만 지급되는 영적 음식으로 보기보다,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이기면서 주님의 선을 실제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 상태로 읽습니다. ‘이긴 ’가 생명나무를 먹는 까닭은 어떤 영적 시험에 합격하여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악의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에 이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급’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꾸어 놓습니다. 자연적 사고에서 상급은 일을 마친 뒤 외부에서 추가로 받는 보상입니다. 시험을 잘 보면 상을 받고, 일을 많이 하면 임금을 더 받습니다. 그러나 천국적 상급은 본질적으로 선 자체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과 결합되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웃의 선을 이루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는 선행의 대가로 지급되는 천국의 상품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그 사랑 자체가 기쁨과 생명이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원리는 ‘감추인 만나’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버가모 교회에 주님께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만나라고 하면 우리는 곧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떠올립니다. 애굽에서 나온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 사건 자체가 2강에서 계속 강조하는 ‘광야’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광야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매일 하늘에서 주어지는 양식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만나에는 인간의 영적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공급된다는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만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선, 곧 사람이 자기 공로 없이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는 사랑과 선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특히 ‘감추인 만나’라는 표현은 그 선의 내적인 성격을 더욱 강조합니다. 자연적 눈에는 보이지 않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과의 결합 가운데 누리는 내적인 선과 평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데서 오는 기쁨도 아니고, 영적 성취를 자랑하는 데서 오는 만족도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 자체가 양식이 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천국적 사랑이 깊어지면 선을 행하는 것은 더 이상 의무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기쁨이 됩니다. 처음 거듭남을 시작할 때에는 악을 거절하는 것이 매우 힘들 수 있습니다. 용서하기 싫지만 말씀 때문에 용서하려 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면 손해를 보지만 진리 때문에 정직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선이 사람 안에 깊이 자리 잡을수록 이전에 힘들게 순종하던 것이 점차 기쁨이 됩니다. 선 자체에서 맛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만나를 먹는 ’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천국적 기쁨은 자연적 인간에게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유익을 얻는 데서만 기쁨을 느끼는 사람에게 ‘아무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섬기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배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섬기는 기쁨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에서 생명을 얻는 사람에게 아무도 모르게 선을 행하는 기쁨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면 이전에는 맛을 느끼지 못했던 선에서 새로운 맛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감추인 만나가 그의 생명 안에 열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광야의 의미도 다시 깊어집니다. 광야는 단순히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무엇으로 사는가’를 배우는 곳입니다. 애굽에는 고기 가마와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삶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그것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 매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받아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사람은 거듭남 과정에서 이전에 자기를 행복하게 했던 인정, 성공, 지배, 소유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참된 양식이 아님을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광야의 목적은 사람을 굶기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종류를 바꾸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단의 깊이는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느냐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새 양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세상적 즐거움을 많이 끊었는데 마음에는 기쁨이 없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만 강해졌다면 아직 만나의 맛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전에는 자기 유익에서만 기쁨을 느끼던 사람이 점차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 진리를 행하는 일, 맡겨진 쓰임을 충실히 하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의 영적 입맛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행동의 변화일 뿐 아니라 ‘무엇을 달게 느끼는가’의 변화입니다.

 

이어지는 ‘ ’ 역시 매우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감추인 만나와 함께 흰 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강사는 이 흰 돌을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실제적인 표지와 연결하고, 그 위에 기록된 새 이름과 함께 이긴 자의 특별한 신분과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이라는 강사의 일관된 구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의 관점에서는 흰 돌을 외적인 신분증이나 천국의 특별한 표찰처럼 이해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먼저 보게 됩니다.

 

말씀에서 ‘’은 진리와 관계합니다. 특별히 기초가 되고 확고하게 세워진 진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이 돌판에 기록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신적 진리가 인간의 삶에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돌이 ‘희다’고 합니다. 흰색은 앞에서 흰옷을 살펴보았듯 빛과 진리의 정결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흰 돌은 선과 결합하여 정결해지고 확고해진 진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는 교리가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면서 삶에 새겨진 진리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진리를 책에서 읽고 동의하는 것과, 오랜 세월 자기 공로와 싸우면서 실제로 선을 행한 뒤에도 그것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처음에는 그 진리가 기억 속의 문장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시험을 통과하면서 그 진리가 의지와 결합하면 마치 돌에 새겨진 것처럼 그 사람의 삶의 원리가 됩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 ’은 싸움을 마친 뒤 외부에서 받는 메달보다, 싸움을 통하여 진리가 그의 생명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로 이해할 때 훨씬 깊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 흰 돌 위에 ‘받는 자밖에는 이름을 사람이 없는 이름’이 기록됩니다. ‘이름’은 말씀에서 단순한 호칭보다 그 사람 또는 사물의 질 전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은 거듭남을 통하여 새롭게 형성된 영적 성질을 뜻합니다. 사람이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있을 때의 사랑과 생각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달라지면 그는 실제로 ‘ 사람’이 됩니다. 기억이 없어지고 전혀 다른 인격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을 지배하는 사랑의 중심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는 여러 장면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며,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는 것은 단순한 개명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름의 변화는 상태와 성질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흰 돌 위의 새 이름 역시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 이루신 새로운 영적 상태와 관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받는 자밖에는 이름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거듭남이 얼마나 고유한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형태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유전적 성향과 환경, 자유로운 선택과 시험, 쓰임이 다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각 사람을 인도하여 형성하시는 천국적 성질도 고유합니다. 같은 진리를 믿고 같은 주님을 사랑하지만 천국의 천사들이 모두 서로 다른 이유입니다. 주님은 획일성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다양성을 하나의 질서 안에 결합하십니다.

 

이 점은 수도적 영성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훈련에는 일정한 공동 규율이 필요할 수 있지만, 그 규율의 목적이 모든 사람을 똑같은 영적 성격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깊은 침묵이 유익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극적인 섬김이 더 중요한 훈련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에 대한 애착과 싸워야 하고, 어떤 사람은 인정욕과 싸워야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는 습관과 싸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루시는 지점이 서로 다르므로 거듭남의 길도 기계적으로 동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긴 ’의 표준을 지나치게 외적으로 고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특정한 광야 과정, 특정한 체험, 특정한 수준의 금식이나 기도, 특정한 영적 현상을 경험해야 이긴 자가 된다고 규정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각 영혼을 고유하게 인도하시는 섭리를 하나의 인간적 틀 안에 넣을 위험이 있습니다. 말씀은 분명 모든 사람에게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며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지만,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서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그 일을 이루시는지는 무한히 다양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은 서로 떨어진 세 가지 상품이 아닙니다. 하나의 거듭남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줍니다. ‘생명나무’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생명이 중심에 있고, ‘감추인 만나’에서는 그 선을 받아 누리는 내적인 기쁨이 나타나며, ‘ ’에서는 그 선과 결합된 진리가 사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 이름’에서는 그 결과 그 사람의 영적 성질 자체가 새롭게 형성되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는 생명, 하나는 양식, 하나는 진리, 하나는 새로운 인격의 질을 보여 주지만 모두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하나의 중심을 향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긴 자의 상급’이라는 말도 훨씬 아름답게 들립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고생했으니 이제 특별한 물건 가지를 주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거절한 사람에게 선을 주시고, 거짓을 버린 사람에게 진리를 주시며, 자기애의 즐거움을 버린 사람에게 천국적 사랑의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선과 진리가 그의 생명이 되도록 하십니다. 결국 상급은 주님께서 주시는 어떤 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자체입니다.

 

이 원리는 신앙생활의 동기도 점검하게 합니다. ‘이긴 자가 되면 특별한 상을 받는다’는 생각은 사람을 열심히 살도록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계속 외적 보상에 머물러 있다면 아직 자연적 수준의 신앙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상을 받기 위해 착한 일을 시작할 수 있듯 신앙 초기에는 천국의 복이나 상급을 바라보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선 자체를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결국에는 ‘상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한다’에서 ‘선하기 때문에 선을 행한다’로 옮겨가야 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선을 행하면서 ‘ 일을 하면 천국 등급이 올라갈까?’라고 계산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선을 이루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를 돌본 뒤 ‘이만큼 돌봤으니 보상을 얼마 받을까?’라고 계산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랑은 자기 안에 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선을 이루는 것이 곧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연단과 자기부인의 전통도 이 지점에서 더욱 깊은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 ‘생명과를 먹어야 한다’, ‘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한다’는 목표가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단이 깊어질수록 그 목표 자체도 정결해져야 합니다. ‘내가 이긴 자가 되고 싶다’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싶다’로, ‘특별한 상급을 받고 싶다’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고 싶다’로, ‘높은 천국에 가고 싶다’에서 ‘어디에서든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기쁘게 하고 싶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연단이 실제로 proprium을 다루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때 ‘감추인 만나’는 매우 아름다운 분별 기준이 됩니다. 연단을 많이 받은 뒤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를 보면 됩니다. ‘나는 이만큼 훈련받았다’는 사실에서 기쁨을 느끼는가, 아니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가? ‘나는 이긴 자의 반열에 속한다’는 자기 인식이 기쁜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주님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쁜가? 후자의 기쁨이 자라난다면 감추인 만나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 ’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수많은 말씀을 들은 뒤 내 안에 실제로 무엇이 ‘’처럼 자리 잡았는가? 설교의 문장들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험이 왔을 때 그 진리가 나를 붙들어야 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선택하고, 상처를 받더라도 복수를 거절하며, 칭찬받지 못해도 맡은 쓰임을 계속하고, 선을 행한 뒤 공로를 주님께 돌릴 수 있다면 진리가 조금씩 흰 돌처럼 삶의 기초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2강의 앞부분들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중간영계에서 결국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가입니다. 세 천국의 차이는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는 사랑의 질과 관계합니다. 흰옷과 세마포는 선과 결합된 진리가 삶에 나타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영적 할례는 그 선과 진리를 방해하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결함이 제거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은 그 결과 주님의 사랑과 선과 진리가 실제로 인간의 생명이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교리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거듭남을 여러 방향에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2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광야의 연단과 영적 할례를 통하여 죄성과 정욕이 처리된 이긴 자에게 생명나무의 열매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이 특별한 상급으로 주어진다는 강사의 설명은 신앙의 목적을 단순한 죄 사함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성결과 주님이 약속하신 영적 복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힘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생명나무를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과 생명으로, 그 열매를 먹는 것을 그 선을 받아 자기 생명으로 삼는 것으로, 감추인 만나를 자기 공로 없이 주님에게서 받아 누리는 내적인 천국적 선과 그 기쁨으로, 흰 돌을 선과 결합하여 삶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정결한 진리로, 그 위의 새 이름을 거듭남을 통하여 형성된 각 사람의 고유한 새로운 영적 성질로 이해하며, 따라서 이 모든 것을 특정한 영적 계급에 외적으로 지급되는 별개의 특전들이라기보다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사람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실제 생명이 되어 가는 하나의 거듭남의 여러 모습으로 볼 때,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의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결국 생명나무와 만나와 흰 돌이 가리키는 중심에는 ‘주님에게서 받음’이 있습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받고, 양식도 주님에게서 받고, 진리도 주님에게서 받으며, 그 결과 형성되는 새 사람의 모든 선한 것 역시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여 영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서 나온 선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순간순간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감추인 만나’의 역설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proprium은 무엇인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할 때 기뻐하지만, 천국적 사람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할 때 자유로워집니다. ‘내가 이루었다’고 붙들 필요도 없고, ‘내가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필요한 생명을 오늘 주님께 받고, 오늘 필요한 진리를 오늘 받아 살아가면 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다음 날의 만나까지 쌓아 둘 수 없었던 것처럼 영적 생명도 주님에게서 계속 받아야 합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긴 자의 모습은 손에 많은 상급을 들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빈손으로 주님 앞에 서서 끊임없이 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도, 감추인 만나도, 흰 돌도 결국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을수록 그는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고백에 더 가까워집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광야와 할례를 통과한 사람이 마침내 배우게 되는 가장 깊은 승리이며, 계시록이 말하는 ‘이기는 ’의 가장 천국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강 6

이름과 둘째 사망, 그리고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 : 모든 약속의 끝은 높은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2강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사는 지금까지 길게 살펴온 ‘이긴 자가 받는 축복’을 마무리합니다. 앞에서 생명나무의 열매,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을 다룬 데 이어 흰 돌 위에 기록되는 ‘ 이름’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서머나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자신이 정리한 ‘이긴 자가 받는 열두 가지 축복’을 모두 살펴보았다고 선언합니다. 실제 강의에서도 3시간 16분경 강사는 ‘이렇게 해서 이긴 자들에게 받는 열두 가지 축복을 살펴봤습니다’라고 정리합니다. 따라서 이번 6부는 단순히 마지막 두 항목만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라, 3시간이 넘는 2강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한곳에 모아 보는 결론이기도 합니다.

 

먼저 ‘ 이름’입니다. 계시록 217절에서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 ’을 주시고 ‘ 위에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이름을 사람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강사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이긴 자 역시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고 이해합니다. 특히 강사는 여기서 상당히 구체적인 견해를 제시합니다. 이긴 자, 곧 교회 시대의 ‘처음 익은 열매’는 아직 지상에서 육체로 살아 있을 때 새 이름을 받고, 다른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간 뒤 새 이름을 받을 것이라고 봅니다. 동시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은 그렇게 믿어도 상관없습니다’, ‘구원하고 상관없는 ’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견해를 구원의 절대 조건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해석과 구원의 본질을 구별하는 태도는 해설자로서도 존중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름’은 대단히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 곧 그의 사랑과 신앙과 삶으로 형성된 영적 성질 전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 이름을 받는다’는 말씀의 중심도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김 아무개, 이 아무개라는 이름 대신 영계에서 새로운 호칭 하나를 배정받는 데 있다고 보기보다, 거듭남을 통하여 그 사람의 영적 성질 자체가 새로워지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더 깊습니다. 앞의 5부에서 살펴본 ‘ ’이 선과 결합하여 사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진리를 나타낸다면, 그 돌 위에 새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그 진리가 이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새로운 영적 성질과 생명이 되었다는 의미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 이름’은 죽은 뒤에만 관계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새 이름은 지상에서부터 형성됩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가 ‘이긴 자는 살아 있을 이름을 받는다’고 강조한 직관 속에 매우 의미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다만 ‘살아 있는 동안 영계에서 사용할 문자적인 이름 하나를 미리 받는다’는 방향보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실제로 새로운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간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면 훨씬 깊어집니다. 예전에는 자기 이익이 모든 선택의 기준이었던 사람이 점차 이웃의 선을 생각하게 되고, 인정받는 데서 기쁨을 느끼던 사람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쓰임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며, 자기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던 사람이 진리 앞에서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이미 ‘ 이름’이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옛사람을 조금 개선하는 ’보다 더 깊은 변화입니다. 물론 기억과 인격과 고유한 개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중심 사랑이 바뀝니다. 이것이 새 이름입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랑으로 사는 사람, 같은 기억과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 사람’이고, 계시록의 표현을 빌리면 ‘ 이름’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는 자밖에는 이름을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한 사람의 거듭남이 얼마나 고유한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외적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얼마나 기도하고 금식하는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고 봉사하는지, 어떤 신앙체험을 했는지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무엇을 다루고 계시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가장 큰 광야는 재물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정욕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의, 어떤 사람에게는 분노,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 가운데 주님께서 형성하시는 새로운 영적 성질 역시 각 사람에게 고유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영적 등급을 쉽게 판단하지 못하게 합니다. 외적으로 보아 매우 평범한 사람이 주님 앞에서는 깊은 싸움을 통과하고 있을 수 있고, 많은 영적 체험을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아직 자기 인정욕과 싸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질서는 사람을 인간의 눈으로 ‘일반 성도’, ‘광야 성도’, ‘이긴 ’라고 쉽게 분류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섬세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한 사람의 전체 사랑과 의도와 자유로운 선택의 역사를 완전히 아십니다. ‘받는 자밖에는 사람이 없는 이름’이라는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영혼의 고유성과 주님의 섭리의 은밀함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강사는 2강의 마지막 약속인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로 갑니다. 강사는 성경에 두 종류의 사망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체가 죽는 것이고, 둘째 사망은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 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합니다. 일반적으로 구원받은 성도 역시 지옥에 가지 않는다면 왜 주님께서 특별히 ‘이긴 ’에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약속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강사는 그 답을 자신의 종말론적 시간표 안에서 찾습니다. 계시록 9장에서 무저갱이 열리고 황충으로 묘사된 악령들이 올라와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괴롭히는데, 이긴 자들은 그 대환란에 들어가지 않고 휴거되기 때문에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이 악령들의 ‘’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를 대환란을 면제받고 휴거된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강사의 미래주의적 계시록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차이가 상당히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의 무저갱과 황충과 불못과 둘째 사망을 미래 어느 시기에 자연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의 암호로 읽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 그리고 영계에서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심판받는 상태를 상응적 형상으로 보여 줍니다. 따라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 역시 대환란 직전에 휴거되어 특정한 다섯 달의 악령 재앙을 피한다는 의미보다 훨씬 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말씀에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영적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 악과 거짓을 자기 생명으로 삼아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의 죽음을 통과한 사람도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 안에 있다면 더욱 충만하게 살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깊은 차원을 열어 줍니다. 자연적 몸의 죽음이 참된 생명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 사망’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지옥이라는 형벌 장소에 던져 다시 죽이시는 사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애와 거짓을 지배적 생명으로 선택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천국적 생명과 스스로 분리된 상태의 완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옥은 주님께서 사람을 미워하여 가두시는 곳이 아니라 악을 사랑하는 영들이 자기 사랑과 상응하는 곳을 찾아가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기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거부하고 자기애의 즐거움을 자기 생명으로 굳힌 영은 천국의 사랑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은 놀랍도록 깊은 거듭남의 약속이 됩니다. 사람이 주님의 힘으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과 싸우면서 그것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점차 지배적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의 참된 생명은 더 이상 지옥에 속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죽음도 그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적 몸이 벗겨지면 지상에서 형성된 그 내적 생명이 더욱 자유롭게 드러납니다. ‘둘째 사망이 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의 재앙 하나를 피한다는 약속을 넘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그 사람 안에 형성되어 악과 거짓의 영적 죽음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약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기는 ’의 의미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2강 전체에서 강사는 이긴 자를 일반 성도와 구별되는 특별한 성결의 상태로 설명해 왔습니다. 광야를 통과하고 죄성과 정욕이 제거되어 생명과를 먹으며, 흰옷을 입고, 감추인 만나와 흰 돌과 새 이름을 받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이 체계에는 신앙을 안일하게 만들지 않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믿었으니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신앙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실제로 악과 싸우고 삶이 변해야 한다고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2강 전체에서 거듭 인정해야 할 중요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긴 자를 별도의 영적 엘리트 계급으로 고정하기보다 모든 거듭남의 본질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계시록의 ‘이김’은 먼저 다른 성도들을 앞서는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주님에게 반대되는 악과 거짓에 대한 승리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독립적으로 이루어 낸 승리조차 아닙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실제로 싸워야 하지만, 이기는 능력은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참된 이긴 자는 ‘나는 다른 성도보다 높은 단계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악도 이길 없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이 점은 2강 전체를 읽을 때 가장 조심스럽게 붙들어야 할 균형 가운데 하나입니다. 강사가 성결과 연단을 매우 강하게 강조하는 것은 귀하지만,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영적 위치를 계속 측정하게 한다면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 광야 단계인가?’, ‘나는 생명과를 먹었는가?’, ‘나는 이긴 자인가?’, ‘나는 예루살렘에 들어갈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지나치게 커지면 시선이 주님보다 자기 영적 상태에 집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목적은 끊임없이 자기 등급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오늘 주어진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고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등급을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질수록 자기 안의 proprium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외적인 죄 몇 가지를 이기고 나면 상당히 깨끗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더 깊은 빛이 들어오면 자기 의와 인정욕, 지배욕, 공로의식 같은 훨씬 미세한 것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천적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높은 사람이다’라는 의식보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식이 깊어집니다. 이것이 천국의 높음이 자연계의 높음과 정반대인 이유입니다.

 

여기서 2강 전체에서 살펴본 ‘이긴 자의 축복들’을 다시 바라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생명나무의 열매, 감추인 만나, 흰 돌, 새 이름, 흰옷,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것,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는 것, 주님의 보좌와 관련된 약속,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새벽별,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 등은 얼핏 보면 이긴 자가 하나씩 획득하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상급처럼 보입니다. 강사 역시 이것들을 ‘열두 가지 축복’으로 묶어 설명하고 마지막에 그 목록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모든 약속을 하나의 거듭난 생명을 서로 다른 상응적 형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생명을 봅니다. 감추인 만나에서는 그 선을 받아들이면서 누리는 내적인 천국의 기쁨을 봅니다. 흰 돌에서는 선과 결합하여 확고하게 된 진리를 보고, 새 이름에서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하여 새롭게 형성된 영적 성질을 봅니다. 흰옷과 세마포에서는 그 내적 선이 진리를 통하여 삶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봅니다. 성전의 기둥에서는 주님의 교회와 천국 안에서 굳게 서는 진리와 쓰임을 생각할 수 있고, 생명책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에 속하게 된 상태를 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약속에서는 악과 거짓의 생명이 더 이상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를 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중심은 하나입니다.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따라서 이 열두 가지를 천국에 들어간 뒤 각각 따로 지급되는 열두 개의 상품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나면 그 하나의 생명이 여러 측면에서 나타납니다. 마치 햇빛 하나가 여러 색과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에서는 생명나무이고, 내적인 기쁨에서는 만나이며, 진리에서는 흰 돌이고, 새롭게 된 성질에서는 새 이름이며, 삶으로 나타난 진리에서는 흰옷입니다. 결국 모든 약속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사시고 사람이 주님 안에서 산다’는 하나의 사실을 여러 상응으로 풀어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상급’의 개념도 마지막으로 정리됩니다. 이긴 자가 받는 최고의 상급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상급이고, 이웃의 선에서 더 깊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상급이며,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는 것이 상급입니다. 천국적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질 보상을 계산하면서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선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무엇을 받을 것인가?’라는 관심은 줄어들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내가 이웃에게 어떤 선한 쓰임이 있는가?’라는 관심이 커집니다.

 

이 점에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수도적 전통과 2강의 강한 ‘이긴 ’ 영성은 매우 소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부인과 절제, 연단과 순종을 강조하는 전통은 오늘날 신앙을 단순한 위로나 축복의 수단으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에 강한 도전을 줍니다. 실제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우지 않으면서 성결을 말할 수 없고, 삶의 변화 없이 거듭남을 말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바로 이 진지함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 그 연단의 마지막 대상 가운데 하나가 ‘연단받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육체적 정욕을 버리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것이 영적 공로를 버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재물을 자랑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쉽게 알면서도 ‘나는 많이 기도했다’, ‘나는 많은 연단을 받았다’, ‘나는 깊은 진리를 안다’,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는 생각은 경건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proprium이 자기 생명을 주장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광야의 마지막에는 ‘나는 이긴 자다’라는 자기의식마저 주님 앞에 내려놓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역설적으로 ‘이긴 ’라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긴 자는 자기 자신을 가장 강하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힘에 대한 신뢰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자기 욕망을 이겼지만 그 승리를 자기 공로로 만들지 않는 사람, 진리를 깊이 알지만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지 않는 사람, 많은 연단을 통과했지만 아직 연약한 사람을 더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승리의 열매라면, ‘이긴 ’라는 말은 영적 특권의 명칭이 아니라 깊은 겸손의 명칭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마지막 약속이 참으로 아름답게 2강 전체를 닫습니다. 자기애는 결국 영적 죽음으로 향하지만 주님 사랑은 생명으로 향합니다. proprium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 끌어오려 하지만 천국적 사랑은 모든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전자는 스스로를 중심에 놓으면서 점점 고립되고, 후자는 주님을 중심에 모시면서 다른 사람들과 더욱 깊이 결합합니다. 그러므로 둘째 사망을 이긴다는 것은 단순히 지옥의 형벌을 면제받는 것보다 더 깊이, 죽음의 사랑에서 생명의 사랑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2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긴 자가 흰 돌 위에 기록된 새 이름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이로써 이긴 자에게 약속된 열두 가지 축복이 완성된다는 강사의 설명은 신앙을 실제 성결과 영적 싸움으로 이끌고 주님의 약속을 진지하게 붙들게 한다는 점에서 큰 힘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 이름’을 특정한 영적 계급에게 부여되는 새로운 호칭보다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형성하시는 고유한 새로운 사랑과 신앙과 쓰임의 영적 성질로, ‘둘째 사망’을 미래 대환란 중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황충 악령의 재앙보다 더 깊이 자기애와 거짓을 지배적 생명으로 삼아 주님의 천국적 생명과 분리되는 상태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음’을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거절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지배적 생명이 된 사람에게 영적 죽음이 더 이상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과 새 이름과 흰옷과 생명책을 비롯한 이긴 자의 모든 약속 역시 서로 독립된 특전의 목록이라기보다 주님과 결합된 하나의 천국적 생명이 여러 상응으로 펼쳐진 것으로 읽을 때, 2강 전체의 중심이 ‘얼마나 높은 단계에 이르렀는가?’에서 ‘얼마나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실제로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로 옮겨집니다.’

 

이제 2강 전체를 돌아보면 처음의 중간영계에서 마지막 둘째 사망까지 하나의 선이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중간영계에서 그가 지상에서 형성한 내적 사랑이 드러납니다. 천국의 서로 다른 상태도 그 사랑의 질과 관계합니다. 흰옷과 세마포는 선과 결합한 진리가 삶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영적 할례와 광야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함이 드러나고 다루어지는 거듭남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의 생명과 기쁨이 되고, 흰 돌과 새 이름에서는 그 선과 진리가 한 사람의 고유한 영적 성질로 굳어집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 해하지 못한다는 마지막 약속에서는 그렇게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긴 2강을 다 듣고 난 뒤 우리에게 남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 가운데 가지를 받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말씀을 많이 알수록 이웃에게 더 체어리티를 행하게 되었는가, 연단을 많이 받을수록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이해하게 되었는가, 선을 행할수록 자기 공로를 덜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영적 성장의 참된 표지는 자기 등급에 대한 확신보다 사랑의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2강의 ‘이긴 ’라는 표현도 가장 아름다운 자리로 돌아옵니다. 이긴 자는 ‘나는 이루었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도 자기 안에 올라오는 악을 보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악을 정당화하지 않고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싸우면서도 그 힘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의 마지막 말은 ‘제가 이겼습니다’보다 ‘주님께서 이기셨습니다’에 가까워집니다.

 

그렇다면 2강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어도 좋겠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감추인 만나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돌과 이름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흰옷의 빛도 주님에게서 오며, 둘째 사망을 이기는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일은 생명을 받을 있도록 악을 죄로 알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며, 받은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수록 사람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식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그때 ‘이긴 ’의 열두 가지 축복은 열두 개의 상급을 소유한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점점 충만해지는 하나의 거대한 약속으로 읽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주님이 계십니다.

 

 

 

SY.53,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3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3강 1부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과 심판을 어떻게 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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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4,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1강 (7/27),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1강 1부‘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제79차 심령부흥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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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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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렌즈 79 심령부흥대사경회

첫 강의는 다른 날의 강의들과 조금 다르게 시작됩니다. 곧바로 교재 강의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찬양과 합심기도, 그리고 제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의 개회예배가 상당한 시간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첫 영상 자체가 하나의 ‘강의’라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사경회 전체의 문을 여는 자리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제로 개회예배에서는 ‘마지막 때를 향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다시 이 사경회에 모였다는 고백이 나오고, 말씀을 통하여 새로워지고, ‘생명의 ’, ‘진리의 ’로 인도받기를 간구합니다. 이 대목은 이후 강의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이 사경회가 단순히 종말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성경 세미나가 아니라, 말씀을 배우는 일을 통하여 실제 사람의 영적 상태가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집회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출발점은 매우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진리는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어집니다. 사람이 말씀을 많이 알고, 천국과 영계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종말과 심판에 관하여 상세히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의지와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그의 생명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경회가 처음부터 ‘은혜받고 결단하며’, 말씀을 통하여 생명과 진리의 길을 걷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출발입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그 ‘진리’가 무엇을 뜻하며,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사람의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개회예배가 마무리된 뒤 전요한 강사의 ‘종말론적 입문’ 강의가 시작됩니다. 강사는 처음부터 자신이 독립된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려 하기보다 이 사경회가 오랫동안 전해 온 ‘핵심진리’의 전체 흐름 안에서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 점을 먼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후 여러 강사의 강의를 계속 듣다 보면 각 강사의 표현과 강조점은 조금씩 달라도, 그 밑바탕에는 하나의 공통된 신앙 구조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강의는 바로 그 구조를 처음 접하는 자리입니다.

 

특히 이 첫 시간에서 제시되는 중요한 개념이 ‘하나님의 밝은 ’입니다. 강사는 세상적이고 기복적이며 정욕적인 것과 뒤섞인 흐린 진리가 아니라 ‘순수하고 누룩이 섞이지 않는 밝은 진리’가 증거될 때, 사람의 영성이 다시 살아나고, 미지근한 신앙이 뜨거워지며, 회개가 일어나고, 삶이 빛의 자녀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말하는 ‘’이 단순한 성경 지식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진리가 사람의 내면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천국의 빛은 단순한 자연적 광명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Divine Truth)와 상응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진리를 이해한다는 것이고, 어둠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모른다는 뜻을 넘어 진리를 보지 못하는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강의에서 반복되는 ‘밝은 ’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옮기면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일수록 그의 이해성(understanding), 즉 이해하는 능력이 밝아지고,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될수록 그는 실제로 빛 가운데 걷게 됩니다.

 

다만 여기에는 앞으로 계속 유념해야 할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습니다. ‘밝은 진리’라고 강하게 확신하는 것과 실제로 신적 진리를 밝게 보는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교리 체계 안에서도 매우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가 참으로 진리인지를 단지 확신의 강도나 특별한 체험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것이 말씀에서 나오는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선으로 인도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하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따라서 앞으로 ‘핵심진리’를 해설할 때도 ‘이것이 맞다, 틀리다’라는 식으로 성급하게 재단하기보다, 이 가르침이 사람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이어 강사는 이 사경회가 중요하게 다루는 또 하나의 축으로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난 모형적 진리’를 제시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건들을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민족사의 기록으로만 읽지 않고, 신약의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영적 과정의 모형으로 읽으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러한 모형적 진리를 통하여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지금의 시대, 그리고 성도의 영적 성장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흥미로운 접점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구약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을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만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국의 비밀(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 출 속뜻 주석, 10,837개 글)에서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인물, 장소, 이동, 전쟁, 광야생활 등을 사람의 거듭남과 주님의 구원 섭리에 관계되는 영적 실재의 표상으로 해설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오늘 성도의 영적 여정을 보여 준다’는 이 사경회의 기본 직관 자체는 스베덴보리 독자에게 상당히 익숙하게 들립니다. 출애굽, 홍해, 광야, 가나안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과정을 나타낸다는 생각에는 분명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두 해석의 길을 세심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경회에서 말하는 ‘모형적 진리’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은 겉으로는 매우 비슷해 보여도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모형론은 흔히 구약의 한 사건을 신약 시대의 어떤 사건이나 미래의 종말 사건과 연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더 근원적으로 자연계의 사물과 사건이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질서를 다룹니다. 따라서 같은 출애굽 사건을 보더라도 단순히 ‘이것은 훗날 일어날 어떤 사건의 예표다’에서 멈추지 않고, 애굽·바로·홍해·광야·만나·가나안 각각이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시험, 거듭남의 단계에서 무엇과 상응하는지를 살피게 됩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강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될수록 매우 중요해질 것입니다.

 

강사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모형적 진리’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믿음과 은총으로 구원받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원리가 나타났다고 설명하며, 그래서 아브라함이 혈통적인 이스라엘만의 조상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설명을 곧바로 부정하기보다 한 단계 더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천국의 비밀’에서 아브라함은 단순히 한 신앙인의 모범이나 후대 성도들의 믿음의 조상으로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의 가장 깊은 속뜻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역사를 통하여 주님 자신의 인성이 어떻게 신성과 하나 되어 가셨는가 하는 지극히 깊은 아르카나가 드러납니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거듭남과도 상응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사경회는 구약의 역사를 주로 ‘성도의 구원과 영적 성장’이라는 방향에서 읽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더 깊은 중심을 주님께 둡니다. 말씀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있으며, 인간의 거듭남은 그 주님의 영화 과정과 상응하는 질서 안에서 이해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강의의 모형적 해석을 없애 버리는 렌즈라기보다, 그것을 더 깊은 중심으로 이끄는 렌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첫 강의의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 ‘신인 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입니다. 강사는 밝은 진리와 모형적 진리에 이어, 하나님과 깊이 연합한 성도들의 삶을 살펴보겠다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 역시 이후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곳에서 신앙의 최종 목표는 단순히 교리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도가 실제로 하나님과 깊은 연합에 이르고, 그의 삶이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후 강의에서 성화, 영적 성장, 연단, 수도적 삶, 성숙한 신앙인의 생애가 반복해서 등장하게 됩니다.

 

이 지점 역시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는 인간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이신 주님의 구별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그의 생명이 될 때,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진리를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행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경회가 추구하는 ‘신인 합일’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심스럽게 옮긴다면, 인간이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삶으로 살아감으로써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되는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하겠습니다.

 

그래서 첫 강의의 도입부만 놓고 보면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만나는 지점이 적지 않습니다. ‘밝은 진리’, ‘모형적 진리’, ‘영적 성장’, ‘성화’, ‘하나님과의 깊은 결합’이라는 큰 방향은 모두 단순한 교리 지식보다 실제 영적 생명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서 ‘밝은 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형’과 ‘상응’은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지, ‘종말’과 ‘재림’을 외적 역사 사건 중심으로 이해하는지 아니면 교회와 인간 내면의 영적 상태까지 함께 보는지 등을 하나씩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11부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개별 종말론의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이 사경회가 처음부터 제시하는 전체 방향입니다. ‘진리를 배우되 진리가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 명제만큼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진리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그가 진리를 많이 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진리를 따라 살면서 진리가 선과 결합되고, 마침내 그의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이어질 이 긴 사경회의 강의들을 살펴볼 때, 우리가 계속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일 것입니다. ‘ 가르침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와 더불어, ‘ 진리는 사람을 어떤 사랑으로, 어떤 삶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과 어떤 결합으로 이끌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면, 이 사경회의 장점은 충분히 살리면서도 스베덴보리를 통하여 더 깊은 말씀의 질서까지 함께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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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합일’, 광야 연단과 성화 : 신앙의 목표는 어디까지인가

12부에서는 앞서 말한 ‘밝은 진리’와 ‘이스라엘을 통한 모형적 진리’에 이어, 이 사경회의 영성적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세 번째 주제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신인 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의 생애와 사상과 체험을 비교·분석함으로써 성경의 핵심 진리를 선명하게 해석하겠다고 말합니다. 특히 로마서 7장과 8장을 언급하면서, 단순히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주님의 생명과 합일되었다고 말하는 신앙과, 실제로 죄와 치열하게 싸우고 ‘광야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성결의 은총과 ‘완덕의 경지’에 이르는 체험적 신앙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목표’, ‘신앙의 방향’, ‘신앙의 가치관’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이번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후 여러 강의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광야’, ‘연단’, ‘이기는 ’, ‘익은 열매’, ‘성화’, ‘완덕’이 이미 첫 강의의 이 대목에서 하나의 큰 그림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경회가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예수를 믿었으므로 사함을 받고 천국에 간다’는 한 순간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 삶에서 죄와 싸우고, 여러 연단을 통과하며, 성결의 은총을 받고, 마침내 하나님과 깊은 연합에 이르는 긴 영적 여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사경회의 관심은 ‘구원받았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로 나아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중요한 접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구원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믿는 순간 인간의 법적 신분만 바뀌는 사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거듭남이며, 거듭남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 사랑과 사고, 그리고 실제 삶의 질서가 주님에 의해 점차 새롭게 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따라 살면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선을 행하며, 그렇게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었다’는 고백과 ‘예수님의 생명이 실제로 삶을 다스린다’는 상태 사이에는 긴 거듭남의 여정이 있다는 이 강사의 기본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특히 강사가 강조하는 ‘광야 연단’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매우 풍성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뒤 광야가 있었습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는 해방되었지만, 그들 안에는 여전히 애굽에서 형성된 욕망과 습관과 두려움과 불신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배고픔과 목마름, 원망과 반역, 만나와 메추라기, 아말렉과의 전쟁, 불뱀 등 수많은 사건이 이어집니다.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이 거듭나는 사람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험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사람이 악에서 돌아섰다고 해서 그 악의 뿌리와 즐거움까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영적 통찰입니다. 사람이 어느 날 깊이 회개하고 ‘이제부터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결단할 수 있습니다. 그 결단은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똑같은 상황이 찾아오면 옛 성질이 다시 올라옵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자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살아나고, 명예욕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이 인정받는 것을 보자 마음이 흔들립니다. 이때 사람은 ‘ 회개가 거짓이었나?’라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질서를 알면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것은 실제이지만 아직 가나안에 도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사이에 광야가 있습니다.

 

따라서 광야는 구원이 실패한 장소가 아니라 구원이 실제 생명으로 깊어지는 장소입니다. 사람 안에 숨어 있던 악과 거짓이 시험을 통해 드러나고, 사람이 자유 가운데 그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성이 형성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사경회가 ‘광야 연단’을 신앙생활의 중요한 과정으로 보는 것은 매우 귀한 통찰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고난과 시험을 무조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거나 ‘기도를 잘못해서 생긴 ’로 해석하지 않고, 그 가운데 영적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욱 세밀하게 구별합니다. 모든 고난이 자동적으로 ‘연단’은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더욱 자기연민에 빠질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오히려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 가운데 어떤 영적 선택이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시험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사람 안의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실제로 충돌하고 사람이 자유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영적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많이 겪었다는 사실 자체가 영적 성숙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자기애가 낮아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라났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점은 수도적 연단을 이해할 때도 매우 중요합니다. 금식, 철야, 절제, 침묵, 노동, 공동생활, 순종과 같은 외적인 훈련들은 인간의 proprium을 드러내고 절제하는 데 매우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훈련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까지 훈련했다’, ‘나는 보통 신앙인과 다르다’, ‘나는 이만큼 나를 죽였다’는 자기 의와 영적 우월감이 생긴다면 외적인 자기부인 속에서 더 미세한 proprium이 자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연단의 열매는 ‘강한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고 더 온유하고, 더 겸손하고, 더 쉽게 용서하며, 다른 사람의 선을 더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강사가 ‘신인 합일의 경지’를 말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 표현은 자칫하면 인간이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거나 인간 자체가 신적인 존재로 변한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의의 문맥에서는 성화된 성도들이 죄와 싸우고 광야 연단을 통과한 끝에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 안에서 강하게 역사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의 의도를 먼저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말로 조금 더 정밀하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영원히 창조주이십니다. 천사가 아무리 높은 천국에 있어도 하나님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사가 더 천국적일수록 자기 안의 모든 선과 지혜와 생명이 자기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들어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압니다. 인간과 주님의 결합은 두 존재가 하나의 본질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자유롭게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처럼 살아가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결합입니다. 주님은 주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지만, 인간의 사랑과 생각과 삶이 점점 주님의 질서와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역설을 낳습니다. 사람은 주님과 더 깊이 결합될수록 자기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됩니다. proprium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이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망과 두려움과 명예욕과 탐욕의 지배를 받습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수록 그는 그러한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고, 주님께서 창조하신 고유한 인격과 쓰임을 더욱 온전히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인 합일’의 목표를 자기 소멸이나 신격화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을 통하여 참된 인간성이 회복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훨씬 안전하고 깊어집니다.

 

강사는 또한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와 사상과 체험’을 비교 분석하겠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이 사경회의 특징입니다. 교리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깊은 신앙의 길을 걸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교리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후 존 웨슬리와 존 버니언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강사는 훗날 ‘이기는 ’를 설명하면서 웨슬리는 이를 ‘성결의 은총을 받은 성도’, 버니언의 ‘천로역정’에서는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 여러 성자들의 표현에서는 ‘신인 합일의 경지에 이른 성도’라고 연결합니다. 결국 서로 다른 전통의 언어들이 하나의 영적 성숙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성숙한 신앙인의 실제 삶을 살피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특별한 체험을 곧바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영적 법칙으로 만드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영적 체험은 그 사람의 상태와 쓰임, 종교적 배경과 사고의 형식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강렬한 체험을 하고 어떤 사람은 평생 특별한 체험 없이도 조용히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외적인 체험의 강도가 내적인 천국의 깊이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영계를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경험하고 천사들과 대화했다고 기록한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그의 저작에서 중요한 것은 ‘나에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체험의 과시가 아니라, 그 체험을 통해 말씀의 속뜻과 천국의 질서,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의 섭리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국에 들어가는 본질적인 조건을 환상이나 계시나 특별한 영적 현상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삼았는가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성도의 신비 체험을 읽을 때에도 ‘그가 무엇을 보았는가?’와 함께 ‘ 체험이 그의 사랑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강의는 이 모든 내용을 ‘신앙의 목표’, ‘신앙의 방향’, ‘신앙의 가치관’이라는 세 표현으로 모읍니다. 이 세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도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교회에 출석하고, 죄 사함을 확신하고, 어려울 때 기도하며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정도로 신앙을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변화되어야 하고, 성화되어야 하며, 주님과 더 깊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전적으로 중요합니다. 다만 그 목표를 ‘어느 특별한 경지에 도달하는 ’으로만 생각하면 또 하나의 위험이 생깁니다. 영적 성장 자체가 자기 성취 프로젝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느 단계인가?’, ‘나는 완덕에 들어갔는가?’, ‘나는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성화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중심이 되면 어느새 시선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영적 성숙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영적 자기애가 자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는 그래서 ‘상태’와 ‘쓰임’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높은 영적 단계에 도달했는지를 자꾸 측정하는 것보다, 오늘 자기 자리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 교회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 돈과 명예 앞에서의 정직, 자기에게 불편한 사람을 대하는 마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선택이 실제 거듭남의 자리입니다. 천국은 어떤 신비한 고급 영성 상태를 소유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실제 쓰임으로 살아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사경회의 ‘완덕’이라는 표현도 조금 다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완덕은 ‘나는 이제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자기 인식이라기보다,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는 중심 사랑이 점점 주님과 이웃을 향하여 정돈되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악한 성향은 남아 있고, 그는 계속 주님의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천사조차 자기 자신에게 맡겨지면 악으로 기울 수 있으며, 천사의 모든 선도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숙의 표지는 ‘나는 완전해졌다’는 확신보다 ‘주님 없이는 아무 선도 행할 없다’는 더욱 깊은 인식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뒤에서 말하는 ‘영적 성장론’과도 연결됩니다. 강사는 이 과목을 ‘성경의 가장 핵심적 진리’라고까지 부르면서, 이를 통하여 성경적 구원론을 알게 되고 성도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생활환경과 사건들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영적 성장을 이해하면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단순한 행운과 불운으로만 보지 않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내적 상태가 드러나고 변화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 이해 역시 이 지점에서 깊이 만납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이 이 세상에서 편안하고 성공하도록 모든 환경을 배열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영원한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삶의 수많은 상황을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실패처럼 보이는 일이 더 깊은 자기 인식을 가져올 수도 있고, 성공이 오히려 숨겨져 있던 자기애를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만남이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고, 어떤 상실이 우리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말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건을 직접 일으키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은 악을 만드시거나 사람에게 악을 행하도록 시키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자유에서 나온 악과 지옥의 영향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허용하시지만, 그 허용된 것들조차 궁극적으로 선한 목적을 위하여 굽혀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섭리’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만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연단하려고 이것을 보내셨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원인들이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의 원인을 모두 설명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그 상황 속에서도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사는 뒤이어 영적 성장론에서 ‘ 차례, 차례, 차례 연단’과 ‘ 차례, 차례, 차례 시련’을 살피며, 그 하이라이트로 ‘하나님의 생명수가 유입되는 체험’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영적 성장론을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와 연결한 뒤 요한계시록으로 나아가겠다고 전체 학습 구조를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첫 강의 초반에 제시되는 이 사경회의 큰 지도가 거의 완성됩니다. 종말론적 입문에서 출발하여 모형적 진리,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 영적 성장론, 마태복음 13장, 그리고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체계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특히 ‘생명수가 유입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흥미롭게 들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에게 속한 생명은 본래 인간에게서 자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인간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옵니다. 다만 사람은 그 생명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야 자유와 합리성이 가능하고, 자유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수가 유입된다’는 말을 반드시 어떤 특별한 신체적·신비적 체험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의 생명은 언제나 인간에게 유입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유입의 유무보다 수용의 상태입니다. 햇빛은 동일하게 비추지만 창문이 닫혀 있거나 더러우면 빛이 충분히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과 진리는 끊임없이 유입되지만 인간의 자기애와 거짓이 그것을 왜곡하거나 막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생명원을 인간 안에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오는 생명을 점점 더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간의 수용 그릇이 질서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말하는 ‘신인 합일’, ‘광야 연단’, ‘성결의 은총’, ‘완덕’, ‘영적 성장’, ‘생명수의 유입’은 서로 따로 떨어진 주제들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의 질문을 향합니다.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입니다. 바로 이 질문 때문에 이 사경회의 가르침이 단순한 종말론 강의를 넘어 수도적 영성의 성격을 갖게 됩니다. 마지막 때의 사건을 아는 것이 목적이라면 종말의 시간표만 배우면 됩니다. 그러나 이 사경회는 계속해서 ‘ 마지막을 맞이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질문을 더욱 내면으로 가져옵니다. 마지막 때가 정확히 언제인가를 아는 것보다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끝나야 하는가를 묻게 합니다. 자기애의 어떤 지배가 끝나야 하는가, 어떤 거짓이 심판받아야 하는가, 어떤 오래된 proprium이 광야에서 드러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어떤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종말이 단지 세계 밖에서 일어날 미래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한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이며, 개인에게도 옛사람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사람의 질서가 세워지는 거듭남의 차원에서 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인 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의 생애를 살피고, 광야 연단과 성화와 완덕을 통하여 신앙의 목표와 방향과 가치관을 분명히 하려는 사경회의 가르침은, 구원을 단순한 신앙고백이나 일회적 사함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생명의 변화로 나아가려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으며, 이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빛에서 보면 목표는 인간이 어떤 특별한 영적 경지를 획득하거나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는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 악과 거짓을 죄로 알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며,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되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 삶과 쓰임으로 살아감으로써 주님과 점점 깊이 결합되는 있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2부에서 특별히 오래 붙들 만한 것은 강사가 세 번 반복하게 한 ‘신앙의 목표, 신앙의 방향, 신앙의 가치관’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적 반복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신앙의 목표로 삼느냐에 따라 그의 모든 영적 훈련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특별한 체험을 목표로 하면 체험이 없는 날에는 신앙이 흔들립니다. 높은 영적 단계를 목표로 하면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게 됩니다. 종말의 비밀을 많이 아는 것을 목표로 하면 지식이 신앙의 척도가 됩니다. 심지어 ‘완덕’을 자기 성취의 목표로 삼으면 성화 자체가 proprium의 업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가 ‘주님과의 결합’이라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말씀을 읽는 이유도 주님을 더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이고, 기도하는 이유도 특별한 체험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뜻을 주님의 뜻 아래 놓기 위해서이며, 광야 연단을 견디는 이유도 강한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이 드러날 때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내려놓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이유도 영적 점수를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실제 쓰임으로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보면 ‘완덕’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도 뜻밖에 화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큰 신비 체험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괴롭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 자기 잘못을 알았을 때 변명하지 않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정직한 사람,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인정받을 때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에게서 어떤 선한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들지 않고 ‘이것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광야의 목적도, 연단의 목적도, 성화의 목적도 결국 그런 사람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신인 합일’이라는 강한 표현도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얻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가 왕 노릇하던 자리에 주님께서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로 밝아지고, 내 의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기뻐하는 새로운 의지로 거듭나며, 내 개성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고유한 쓰임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며, 어쩌면 이 사경회가 ‘광야 연단’을 통하여 그토록 간절하게 도달하고자 했던 영적 목표의 가장 깊은 자리이기도 할 것입니다.



1 3

종말론적 입문 : ‘말세 세상의 파멸인가, 교회의 끝인가

13부에 들어오면서 강의는 이제 본격적으로 ‘종말론적 입문’이라는 제목에 걸맞은 문제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앞에서 이 교재의 특징을 ‘하나님의 ’, ‘이스라엘 백성을 통한 모형적 진리’, ‘하나님과 인간이 합일되는 체험적 신앙’,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한 요한계시록의 체계적 해석으로 요약한 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도 말세라고 한다’고 말하고,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늘날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제 관심이 개인의 성화와 영적 성장에서 교회와 인류 역사의 상태로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 문제 제기는 가볍게 지나갈 부분이 아닙니다. ‘말세’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그리스도인은 먼저 전쟁, 지진, 전염병, 경제위기, 도덕적 타락, 국제정세의 격변 같은 외적 현상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들이 심해질수록 ‘이제 정말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사경회의 종말론 역시 앞으로 요한계시록의 사건들을 실제 미래의 역사와 상당히 구체적으로 연결해 나갑니다. 그러나 이 첫머리에서 강사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고 말한 것은 흥미롭게도 시선을 세상 바깥의 재난만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로 돌려놓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중요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말하는 ‘마지막 ’, ‘세상 ’, ‘심판’은 자연계의 지구가 물리적으로 파괴되는 사건을 일차적으로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교회가 더 이상 참된 교회로 기능할 수 없을 정도로 선과 진리를 잃어버린 마지막 상태를 뜻합니다. 교회가 겉으로는 여전히 존재하고, 예배당도 있고, 성직자도 있고, 성경도 읽고, 예배도 드리지만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사라지고 진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그 교회는 영적으로 마지막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말세인가?’라는 질문을 ‘지구가 언제 끝나는가?’보다 먼저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의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표현은 상당히 무거운 영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문제는 단순히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떨어졌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의 기준으로도 교회의 탐욕과 권력욕과 분열과 부도덕이 비판받는다면, 우리는 먼저 세상의 타락을 꾸짖기보다 교회 안의 빛이 얼마나 밝은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졌다는 사실보다 더 심각한 것은 등불이 빛을 잃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상 가운데 두신 까닭이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 세상에 전달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첫 강의 초반에 강사가 강조했던 ‘밝은 진리’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밝은 진리’는 단지 남들이 모르는 종말의 비밀을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밝은 진리라면 먼저 그것을 가진 사람의 내면을 밝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잘 보면서 자기 안의 자기애와 명예욕과 지배욕은 보지 못한다면, 많은 진리를 알고 있어도 아직 그 빛이 자기 내면까지 비춘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빛은 먼저 밖을 비추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자신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종말론은 놀랍게도 회개의 교리가 됩니다. ‘세상 끝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아내는 학문이기 전에 ‘ 안에서 무엇이 끝나야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오래된 자기애의 질서가 끝나야 하고,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신앙이 끝나야 하며, 종교를 자기 명예와 권위를 위해 사용하는 마음이 끝나야 합니다. 그렇게 옛 질서가 심판받고 끝날 때 새로운 질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종말’과 ‘ 창조’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가 끝나는 것은 다른 하나가 시작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 안에도 여러 차례 ‘마지막 ’가 있습니다. 이전까지 자기를 지배하던 어떤 사랑과 사고방식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고, 주님의 진리 앞에서 그것이 심판받아 무너지는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자기 의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어느 시험을 통하여 ‘내가 옳다는 ’을 사랑한 것이 실제로는 주님과 진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우월감을 사랑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영적으로는 하나의 작은 ‘종말’입니다. 이전의 자아 질서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끝에서 새로운 겸손과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은 반드시 절망적인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끝내시는 것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 악의 지배이며, 거짓 자체이며, 더 이상 선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낡은 영적 질서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종말론은 공포의 교리가 되지만, 이 점을 붙들면 종말론은 소망의 교리가 됩니다. 심판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질서 회복을 위한 구별이며, 낡은 교회의 끝은 새 교회의 시작을 준비합니다.

 

이 사경회가 앞으로 종말의 여러 징조와 요한계시록의 사건들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다루게 되더라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기본 원리를 계속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적 사건이 무엇인가를 논하기 전에 그것이 어떤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한 미래 사건의 암호표가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진리에서 멀어지고, 악과 거짓이 어떻게 그 안에서 세력을 얻으며, 주님께서 어떻게 그것들을 심판하시고 마침내 새 교회를 세우시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에게 ‘최후의 심판’은 지구가 불타 없어지는 날이 아닙니다. 영계에서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거짓된 영적 질서가 주님의 신적 진리에 의해 드러나고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선한 자와 악한 자가 겉으로 뒤섞여 있던 상태가 끝나고, 각자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에 따라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의 본질은 주님께서 사람들을 임의로 천국과 지옥에 보내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곳으로 스스로 향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말세’를 바라보는 태도에도 중요한 차이를 만듭니다. 종말을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단지 미래의 재난을 피할 준비가 안 된 사람이 아니라, 악을 사랑하면서 그것을 진리로 가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하며, 자기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려는 사람에게 심판은 본질적으로 두려움의 소식이 아닙니다. 진실한 것이 거짓된 것에서 분리되고, 억눌렸던 선이 자유롭게 되는 질서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사경회가 왜 ‘종말론’과 ‘영적 성장’을 하나의 교재 안에서 연결하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는 세계의 마지막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성화를 다루므로 전혀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둘이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교회 전체에서 일어나는 심판의 원리가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드러나고, 악이 분리되고, 선과 진리가 새로운 질서를 이루는 과정이 개인에게서는 거듭남이며, 교회 전체의 차원에서는 한 교회의 종말과 새 교회의 시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라는 강사의 질문에는 두 가지 차원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실제 교회와 사회의 상태를 분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지금 어떤 영적 시대를 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내 신앙은 아직 애굽인가, 광야인가,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식으로 자기 상태를 살피는 것도 가능하겠습니다. 다만 이것을 지나치게 기계적인 단계표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단순히 한 단계를 완전히 졸업한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직선적 과정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상당히 거듭난 사람에게도 새로운 광야가 올 수 있고, 이전보다 더 깊은 층의 자기애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앞으로 이 사경회가 제시하는 ‘영적 성장의 단계’를 읽을 때에도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단계와 질서를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거듭남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 보며, 시험을 거치고, 진리가 의지와 결합하면서 선이 되고, 마침내 사람은 선에서 진리를 보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외적 사건이 똑같은 순서로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유전적 성향과 환경, 자유, 합리성, 쓰임을 모두 고려하여 개별적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모형적 진리’를 사용할 때도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거듭남의 놀라운 표상입니다. 실제로 이 사경회의 영적 성장론은 이스라엘의 과정을 ‘성경에 감춰진 보고’이자 ‘성경을 해석하는 설계도’로 강하게 강조합니다. 이 직관에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계도’를 지나치게 외적인 도식으로 고정하면 모든 성도의 삶을 하나의 동일한 시간표에 맞추려는 위험도 생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거듭남을 표상한다는 것은 ‘당신에게도 반드시 자연적 사건 A 일어난 다음 사건 B 일어나고 사건 C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건들 안에 담긴 영적 상태와 질서가 보편적이라는 뜻입니다. 속박에서 해방되는 상태, 시험을 통하여 악이 드러나는 상태, 주님의 공급을 배우는 상태, 자기 힘을 내려놓는 상태, 선과 진리가 결합되는 상태 등이 모든 거듭남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외적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적 질서에는 상응이 있습니다.

 

이 구별은 이후 강의에서 매우 중요해질 것입니다. 이 사경회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 차례 연단’을 받은 것을 성도들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영적 성장의 원리로 강하게 적용합니다. 실제 다른 강의에서는 ‘광야에서 차례 연단의 과정을 반드시 받아야 익은 열매가 되어 천국 곡간에 추수될 있다’고까지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의 중심에는 ‘구원받았다고 해서 영적 성장이 끝난 것이 아니며 반드시 시험과 정결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 차례’라는 자연적 횟수를 모든 개인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하기보다, ‘’이 나타내는 완전한 과정과 그 안의 영적 질서를 보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말씀의 숫자는 단순한 산술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은 시작과 진행과 완성이라는 하나의 충만한 과정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 차례 연단’을 꼭 모든 사람이 세 번의 구별 가능한 대형 사건을 경험해야 한다는 공식으로 이해하기보다, 거듭남에는 시험을 통한 충분하고 완전한 정결의 과정이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사경회의 귀한 강조점을 보존하면서도 그것을 지나치게 경직된 단계론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말세’의 문제와 ‘광야 연단’의 문제가 다시 만납니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도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있지만 점차 선에서 분리되고, 진리를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되며, 마침내 교회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그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거의 사라지는 상태까지 진행될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자기 명예와 이익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 진리는 오히려 자기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위험한 상태는 ‘진리를 전혀 모르는 상태’만이 아닙니다.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그것을 살지 않는 상태가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많지만 사랑이 없고, 교리는 정확하다고 자부하지만 체어리티가 없으며, 종말의 징조는 잘 분별하면서 자기 안의 악은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지속되면 신앙은 점점 외적인 것이 되고, 결국 진리와 선의 결합이 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교회의 ‘’은 바로 이러한 분리가 완성되는 상태와 깊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종말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태도는 공포도 아니고 호기심도 아니며 겸손일 것입니다. ‘나는 마지막 때의 비밀을 안다’는 의식이 커질수록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많이 알수록 그 진리가 자기 삶을 더 엄격하게 비추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바벨론을 밖에서만 찾지 않고 내 안의 지배욕을 보고, 짐승을 밖에서만 찾지 않고 자연적 추론이 악한 사랑을 섬기는 모습을 보며, 거짓 선지자를 밖에서만 찾지 않고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려는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시록이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책이 아니라 나를 거듭나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이런 관점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강사의 첫 진단을 다시 우리 자신에게 돌려놓게 합니다. 교회의 회복은 먼저 세상을 향해 더 큰 목소리를 내는 데서 시작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다시 교회다워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진리를 말하면서 선을 행하고, 주님을 고백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며, 권력을 얻으려 하기보다 섬기고, 자기 교회의 성공보다 주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다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점은 시흥영성수련원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연단’, ‘자기부인’, ‘성결’이라는 강조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이 전통이 단순히 ‘마지막 때가 가까웠으니 세상을 피하자’는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그러므로 먼저 내가 정결해져야 한다’는 방향을 강하게 붙들어 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종말론이 외부 세계에 대한 공포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성결을 요구한다면 적어도 그 방향에는 중요한 영적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그 성결 역시 특별한 집단의 우월성을 만드는 방향이 아니라 더 깊은 겸손과 체어리티로 열매 맺어야 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진정한 새 교회는 단순히 새로운 조직이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사람 안에서 주님을 향한 새로운 사랑과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옛 교회의 끝과 새 교회의 시작은 역사적으로도 일어나지만 동시에 인간의 내면에서도 일어납니다. 내가 알고 있던 신앙이 무너지고 더 깊은 진리가 열리며, 그 진리가 삶으로 들어가 새로운 사랑을 형성할 때 내 안에도 하나의 ‘ 교회’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말세’를 말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날짜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언제 끝나는가?’보다 ‘무엇이 끝나고 있는가?’가 중요하고,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새롭게 세우고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종말론은 어둡고 무서운 교리가 아니라 놀랍도록 희망적인 교리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끝내기 위해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 새롭게 하시기 위해 낡은 것을 끝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말세로 진단하고 교회의 타락과 세상의 혼란 속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경회의 종말론적 문제의식은 신앙을 안일함에서 깨운다는 점에서 귀하게 받을 있으며, 이를 스베덴보리의 빛에서 깊이 읽으면 말세란 단순히 지구의 물리적 종말이나 미래 재난의 시간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무너져 교회의 영적 기능이 끝에 이르는 상태이고, 심판은 거짓된 질서를 드러내고 분리하여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 과정이며, 동일한 아르카나는 개인의 거듭남 안에서도 자기애의 질서가 끝나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새로운 질서를 이루는 과정으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을 배우면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마지막 때를 모르는 ’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더 위험한 것은 마지막 때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자기 안에서 끝나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징조는 예민하게 살피면서 자기 마음의 징조에는 둔감할 수 있습니다. 전쟁과 지진과 국제정세는 분석하면서 자기 안에서 사랑이 식어 가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몰락은 기다리면서 자기 안의 지배욕은 그대로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먼저 ‘’에게 옵니다. 종말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누가 짐승인가?’를 묻기 전에 ‘ 자연적 인간은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를 묻게 하고, ‘바벨론은 어디인가?’를 묻기 전에 ‘나는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 위에 서고 싶어 하지는 않는가?’를 묻게 하며, ‘주님은 언제 오시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오늘 주님께서 안으로 오실 길을 준비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렇게 종말론을 읽을 때 ‘말세’는 남을 두렵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깨어 있게 하는 말이 됩니다. ‘심판’은 남에게 내릴 형벌이 아니라 내 안의 거짓이 진리 앞에서 드러나는 은혜가 되고, ‘재림’은 먼 미래에만 기다리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새로운 빛과 권능으로 사람과 교회 안에 임하는 사건으로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첫 강의가 처음부터 강조해 온 ‘밝은 ’이라는 표현도 가장 깊은 뜻을 얻게 됩니다. 밝은 빛은 종말의 비밀을 남보다 더 많이 아는 빛이 아니라, 그 빛 앞에서 먼저 자기 자신을 보고 회개하며, 마침내 그 진리가 선한 삶이 되어 세상에 비치는 빛입니다.



1 4

교회 시대, 공중강림, 지상재림과 이스라엘의 고토 귀환 : 종말의 시간표에서 교회의 영적 상태로

14부에서는 앞서 전체 교재의 구조와 ‘영적 성장론’을 소개하던 강의가 이제 본격적인 종말론의 용어와 시간 구조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영적 성장론을 종합하여 요한계시록을 살펴보겠다고 말한 뒤, ‘요한계시록은 과학적이고 질서 정연하며 논리적’이라고 강조하고, 이어 자신이 사용하는 종말론의 주요 용어들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가 ‘교회 시대’입니다. 강사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교회가 세워진 때부터 예수님의 지상 재림 때까지를 ‘교회 시대’라고 부르며, 지금도 이 교회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교회들이 등장하지만 4장 이후에는 ‘교회’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고 성도들이 등장한다는 점도 자신의 종말론적 구조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로 제시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사경회의 종말론을 이해하는 중요한 특징이 드러납니다. 강사는 성경의 마지막 역사를 하나의 시간축 위에 배열합니다. ‘교회 시대공중강림휴거대환란지상재림천년왕국’과 같은 구조입니다. 특히 재림을 한 번의 단일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공중강림’과 ‘지상재림’으로 구별합니다. 공중강림은 주님께서 ‘도적같이’ 은밀하게 오셔서 준비된 성도들을 휴거시키는 사건이고, 지상재림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이후의 거의 모든 계시록 해석이 이 틀 위에서 진행되므로, 첫 강의에서 이 용어를 먼저 설명하는 것은 강사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상당히 큰 해석의 차이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선 강사의 의도를 존중해서 보면, 이 시간표의 목적은 단순히 미래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 ‘그러므로 준비해야 한다’, ‘교회 시대는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긴장을 성도들에게 주려는 것입니다. 이후 강의에서 계속 ‘익은 열매’, ‘이기는 ’, ‘광야 연단’, ‘정결’, ‘휴거 준비’를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종말론적 긴장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표의 세부 해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아래에 있는 ‘지금의 신앙 상태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요청까지 함께 보아야 공정한 해설이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교회 시대’는 단순히 오순절 이후 어느 날까지 이어지는 달력상의 기간만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교회’란 외적인 조직이나 종파보다 더 깊은 의미에서 주님을 인정하고 말씀에서 진리를 받아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시작과 끝도 단순히 조직의 설립과 소멸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선과 진리의 결합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교회가 살아 있지만, 진리는 많아도 선이 사라지고 체어리티가 소멸하면 외적인 교회는 그대로 남아 있어도 내적으로는 마지막 상태에 접근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교회 시대가 언제 끝나는가?’라는 질문이 ‘교회라는 조직이 어느 사라지는가?’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언제 이상 교회를 이루지 못할 정도로 소멸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깊어집니다.

 

강사는 이어 ‘말세’, ‘종말’, ‘마지막 ’를 설명하면서 대환란을 예수님께서 죄악 세상을 심판하시는 기간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다시 심판의 의미를 내적으로 가져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마지막 심판은 자연계의 지구가 파괴되는 과정이나 일정 기간 동안 자연재앙이 집중되는 사건에 중심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계에서 선과 악,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더 이상 함께 뒤섞여 있을 수 없게 되어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개인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사람 안에서 진리가 들어오면 그 진리는 단순히 지식을 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동안 숨어 있던 악과 거짓을 드러내어 분별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은 먼저 ‘빛이 비추어 감추어진 상태가 드러나는 ’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대환란’ 역시 단지 미래의 극심한 자연적 재난으로만 한정하기보다, 교회에서 진리가 심각하게 왜곡되고 선이 고갈되어 영적 생명이 큰 위기를 겪는 상태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환난은 내면의 선과 악이 충돌하는 시험의 상태로 나타납니다. 사람은 진리를 알고 난 뒤 오히려 자기 안의 악 때문에 더 큰 갈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죄를 죄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안했던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인 뒤에는 그동안 자연스럽게 즐기던 것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더 힘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적 생명이 깨어났기 때문에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강사의 ‘공중강림’과 ‘지상재림’ 구분은 스베덴보리와 더욱 분명히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강사는 주님께서 먼저 은밀히 공중에 강림하시고, 준비된 성도들을 휴거한 뒤 대환란이 지나가고,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지상에 재림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재림을 주님께서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고 공간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주님의 초림은 실제 성육신이었고, 그분은 인성을 신성하게 하신 뒤 다시 육체를 입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재림은 말씀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열리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께서 교회에 새롭게 나타나시는 영적 강림입니다.

 

이 차이는 단지 ‘공중에 오시느냐 아니냐’의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방식 자체가 달라집니다. 문자적 미래주의에서는 ‘어느 주님께서 밖에서 오신다’는 사건을 기다리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를 통하여 지금 이해와 의지 안으로 오시도록 나는 준비되어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물론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단순히 개인의 내적 체험으로 축소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재림을 교회 전체에 관련된 실제 신적 사건으로 봅니다. 다만 그 방식이 자연계의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과 신적 진리의 개방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강사는 도적이 미리 날짜를 알려 주지 않는 것처럼 공중강림도 은밀하고 갑작스럽게 일어난다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도적같이’라는 표현을 주님께서 실제로 숨어 들어오시는 방식의 묘사라기보다, 사람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 심판과 상태의 변화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닥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날짜를 모른다는 사실보다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다’는 것은 종말 뉴스에 민감한 것이 아니라 오늘 받은 진리를 삶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실제적 강조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강사가 공중강림과 휴거를 말하는 목적은 결국 성도들에게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준비의 내용을 더 깊게 묻습니다. 준비란 무엇인가? 마지막 때에 관한 도표를 정확하게 아는 것인가, 아니면 악을 죄로 알고 실제로 피하며 선을 행하는 것인가? 말씀 전체의 관점에서는 후자가 본질입니다. 종말론의 시간표를 정확히 알았더라도 자기애와 미움과 탐욕을 생명으로 삼고 있다면 그 지식 자체가 천국의 상태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종말의 시간표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위해 살아가며 자기 악을 회개하는 사람 안에는 천국의 상태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앞으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휴거’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강사는 모든 신자가 자동적으로 휴거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준비된 성도만 휴거된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이것을 뒤에서 ‘익은 열매’의 추수와 연결하겠다고 예고합니다. 실제로 강의에서는 ‘모든 성도가 휴거되는가, 일부만 휴거되는가’를 하나의 중요한 쟁점으로 제기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성도에게 긴장감을 주고 ‘나는 준비되었는가?’를 묻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자연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어느 날 지상에서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는 휴거는 종말론의 중심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들려 올라감’은 사람의 마음과 사랑이 자연적·자기중심적인 것에서 영적·천국적인 것으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높음’과 ‘낮음’은 영계의 상태와 상응합니다. 높은 곳은 더 내적이고 천국적인 사랑의 상태를, 낮은 곳은 더 외적이고 자연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을 영접하러 올라간다’는 말씀에는 사람의 영적 상태가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 질서로 높아진다는 깊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누가 휴거되는가?’라는 강사의 질문을 ‘누가 주님과 결합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 볼 수 있습니다. 답은 특별한 종말 지식을 가진 사람도, 특정 교단에 속한 사람도,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신의 생명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강사가 ‘익은 열매’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과 뜻밖에 깊이 만납니다. 다만 익은 열매를 공중휴거의 선발 자격으로 보기보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삶이 된 상태로 읽는 것입니다.

 

이제 강의는 종말의 징조로 넘어가면서 첫 번째 징조로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 귀환’을 제시합니다. 강사는 에스겔 3928~29절의 ‘그들을 모아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다’는 말씀을 인용하고, 이것을 고레스 시대의 바벨론 귀환으로 끝난 예언이 아니라 마지막 때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본토로 돌아오고 장차 구원받게 될 사건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 자체를 ‘종말의 번째 징조’라고 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특별히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이스라엘’, ‘유다’, ‘예루살렘’, ‘시온’을 읽을 때 혈통적인 민족 자체에 영원한 영적 특권이 부여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교회를 표상하도록 선택된 민족이며, 그 민족의 역사와 제도와 땅과 성전은 주님의 나라와 교회의 영적 실재를 나타내기 위한 표상적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는 예언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특정 혈통의 사람들이 특정 영토로 귀환하는 정치적 사건보다, 교회 가운데 잃어버렸던 진리와 선이 회복되고 사람들이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모이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유대 민족이나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무시하거나 그 역사적 의미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예언의 속뜻’입니다. 자연계의 역사에는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말씀의 영원한 거룩성은 어느 한 시대의 정치적 사건만으로 소진될 수 없습니다. 만일 에스겔의 말씀을 20세기 이후 유대인들의 특정 지역 귀환으로만 완성된 것으로 본다면, 그 사건이 지나간 뒤에는 그 말씀이 더 이상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을 향해 말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보면 ‘고토로 돌아옴’은 지금도 모든 거듭나는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고토’는 주님께서 주시는 천국적 질서, 곧 교회의 선과 진리의 상태를 표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사로잡혀 ‘이방 ’과 같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를 자기 욕망에 종속시키면 내적으로는 본래의 질서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사람을 회개로 이끄시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며, 선과 진리를 다시 결합시키실 때 그는 영적으로 ‘고토로 돌아옵니다’.

 

강사가 이어 읽는 에스겔 36장의 말씀은 오히려 이러한 속뜻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며’, ‘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영을 너희 속에 두며’, ‘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고’, ‘ 영을 너희 속에 두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는 내용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장차 고토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여 그들이 구원받는 예언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말씀은 거듭남의 거의 완전한 그림처럼 보입니다.

 

맑은 ’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사람의 잘못된 생각과 삶을 씻습니다. ‘ 마음’은 새로운 의지, 곧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는 의지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은 그 선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이해와 진리의 생명을 생각하게 합니다. ‘ 같은 마음’은 진리가 들어가도 움직이지 않는 굳은 자기 의지이며, ‘부드러운 마음’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는 의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율례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최종 목적이 지식이나 체험이 아니라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이스라엘의 고토 귀환’을 종말의 징조로 읽는 것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면서도, 그 강사가 인용한 예언 본문 자체는 오히려 매우 깊은 거듭남의 메시지를 품고 있습니다. 자연적 이스라엘이 어디로 이동하느냐보다 더 내적인 문제는 ‘이스라엘’이 표상하는 교회가 다시 주님의 선과 진리 안으로 돌아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에게서는 ‘ 마음이 다시 주님의 질서로 돌아오고 있는가?’가 됩니다.

 

이 차이는 이후 계시록을 읽을 때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강사는 ‘이스라엘’을 상당히 문자적으로 혈통적 유대 민족으로 읽고, 마지막 때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그 민족이 다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고 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이스라엘’을 교회와 영적 인간,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표상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회복’도 영적 교회의 회복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어느 한쪽의 언어를 가볍게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자적 의미는 말씀의 기초이고, 역사적 이스라엘은 실제로 성경 계시의 중요한 역사적 그릇이었습니다. 주님도 그 민족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표상의 목적은 그 민족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보편적인 영적 실재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성막이 실제 성막이었다고 해서 성막의 속뜻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도 말씀의 더 깊은 상응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는 말도 더욱 넓어집니다. 한 교회가 진리를 잃고 외적인 종교 형식만 남았을 때, 주님께서는 새로운 사람들 가운데 다시 선과 진리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교파와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있어도 주님을 한 분으로 인정하고,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 영적으로는 하나의 이스라엘로 모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가장 중요한 징조를 ‘특정 민족이 특정 영토로 돌아왔는가?’만으로 판단하기보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다시 결합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는 ‘흩어져 있던 생각과 욕망들이 주님의 질서 아래 다시 모이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주일의 신앙과 평일의 생활이 따로 있고, 교회의 나와 가정의 내가 따로 있고, 신학적 지식과 실제 인간관계가 따로 있다면 아직 ‘흩어진 이스라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삶 전체를 하나로 묶기 시작하면 영적으로 고토 귀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종말의 징조는 밖을 두리번거리는 신호가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신호가 됩니다. 강사가 현대 역사 속에서 종말의 표지를 찾는 긴장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사람과 교회의 내적 상태로 가져옵니다. 그렇다고 깨어 있음의 긴장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엄격해집니다. 국제정세는 내가 바꿀 수 없지만 오늘 내 안의 미움과 자기 의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것은 내가 응답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1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 강림부터 지상 재림까지를 교회 시대로 보고, 공중강림과 휴거, 대환란과 지상재림을 구별하며,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 귀환을 종말의 징조로 읽는 강사의 종말론은 성도들에게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강한 긴장을 제공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빛에서는 교회의 마지막은 먼저 선과 진리의 결합이 소멸하는 영적 상태이며, 주님의 재림은 말씀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열리는 강림이고, 이스라엘의 귀환은 교회와 인간 안에서 흩어지고 잃어버렸던 선과 진리가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모이는 회복의 아르카나로 읽을 의미가 더욱 보편적이고 내적으로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4부에서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강사가 에스겔 36장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정결’, ‘ 마음’, ‘ ’, ‘하나님의 ’, ‘율례를 행함’을 모두 하나로 연결했다는 점입니다. 종말론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거듭남의 언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어쩌면 이 사경회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종말의 징조를 말하지만 결국 목표는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돌아오는 이유도 단지 땅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고 정결해지기 위해서라고 강사는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그 지점을 붙들어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 같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뀐다.’ 이것보다 더 정확한 거듭남의 그림을 찾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인격을 없애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애 때문에 굳어져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의지를 부드럽게 하시고,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그리고 ‘ 영을 너희 속에 두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고 합니다. 생명수의 유입도, 신인합일도, 광야 연단도 결국 여기에 도달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제로 기쁘게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깊은 준비는 비상식량이나 세계정세의 해석이 아니라 ‘ 마음’일 것입니다. 공중강림의 시점을 정확히 아는 것보다 주님께서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씻고 계시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어느 민족이 어느 땅으로 돌아오는지를 보는 것보다 내 의지가 주님께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 직접적인 영적 과제입니다. 결국 종말론이 참으로 주님에게서 온 진리라면 사람을 공포와 호기심에 묶어 두지 않고 회개와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나타날 때, 이 사경회가 처음부터 말한 ‘밝은 진리’는 비로소 지식의 밝음이 아니라 생명의 밝음이 됩니다.



1 5

이스라엘의 회복과 이스라엘의 구원’ : 혈통적 이스라엘에서 영적 이스라엘로

15부에서는 앞서 시작된 ‘종말의 번째 징조’, 곧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 귀환에 대한 설명이 한층 구체화됩니다. 강사는 에스겔 39장의 ‘그들을 모아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이 예언을 고레스 시대의 바벨론 귀환으로 끝난 말씀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흩어짐 끝에 다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오고 국가를 세운 현대의 역사적 귀환, 그리고 장차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는 사건까지 하나의 종말론적 과정으로 연결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 ‘고토 귀환’은 단순한 민족적·정치적 귀환이 아니라 마지막 때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 과정인 셈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 구원받느냐?’ 그리고 교회 시대 동안에는 이방인의 구원이 이루어지지만, ‘이방인의 충만한 ’가 채워지고 교회 시대가 끝나면 성령께서 두 증인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에스겔 3624절 이하의 ‘열국 중에서 모아 고토에 돌아가게 하겠다’, ‘맑은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겠다’, ‘ 마음과 영을 주겠다’,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는 말씀을 이 미래적 이스라엘 회복의 예언으로 읽습니다.

 

이 대목에서 강사의 종말론적 체계는 매우 선명해집니다. ‘이스라엘의 흩어짐고토 귀환교회 시대의 완성공중강림이스라엘에 대한 성령의 역사이스라엘의 회개와 구원대환란’이 하나의 연속적인 역사적 시간표를 형성합니다. 실제로 강사는 로마서 11장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것이라.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이 구조에 넣고, 이방인의 구원이 충만해져 교회 시대가 끝난 직후 공중강림하신 주님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을 먼저 그 자체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민족을 단순히 종말의 시간표를 알려 주는 표지판으로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약속하신 백성을 끝내 버리지 않으시며, 그들을 다시 모으고 회개시켜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의 정서적 중심에는 심판보다 회복이 있습니다.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을 그들 안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적용할 때에는 강사의 해석을 단순히 ‘틀렸다’고 밀어내기보다, 말씀의 의미가 어디까지 더 깊어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이스라엘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만 그 중요성의 성격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민족 자체가 다른 민족보다 내적으로 거룩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와 천국의 것들을 외적으로 표상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선택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땅, 성막과 성전, 제사, 절기, 왕과 제사장, 출애굽과 광야생활, 가나안 정복에 이르는 모든 것이 더 깊은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등장할 때 가장 깊은 속뜻에서는 언제나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교회, 더 구체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 인간을 표상합니다. ‘유다’가 천적인 것, 곧 사랑의 선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면, ‘이스라엘’은 영적인 것, 곧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신앙의 삶과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흩어진 이스라엘이 다시 모인다는 말씀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영원한 아르카나를 품게 됩니다.

 

여기에서 ‘흩어짐’이라는 상태부터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은 죄와 자기애에 의해 실제로 흩어집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원하는 것이 다르고, 주일에 고백하는 것과 평일에 살아가는 것이 다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자기 명예와 이익을 삶의 중심에 둘 수 있습니다. 진리는 한쪽에 있고 사랑은 다른 쪽에 있으며, 신앙과 삶이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포로됨’이며 ‘흩어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에는 이 흩어진 것들을 다시 모으십니다. 진리와 선을 결합시키고, 이해성과 의지를 하나의 질서 아래 두시며,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실제로 사랑하고 행할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돌아가서’라는 에스겔의 말씀은 한 민족의 지리적 이동이라는 문자적 장면을 넘어, 주님께서 흩어진 인간의 내면을 다시 하나로 모으시는 거듭남의 과정을 담게 됩니다.

 

그리고 에스겔 36장은 바로 그 귀환이 무엇인지를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은 일반적으로 진리, 특히 사람이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신앙의 진리와 상응합니다. 물이 육체의 더러움을 씻듯 진리는 인간에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보여 줌으로써 그의 삶을 정결하게 합니다. 진리가 없다면 사람은 자기 욕망을 선이라고 착각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진리가 들어올 때 비로소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것이 사실은 주님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구나’ 하고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물로 씻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어 ‘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영을 너희 속에 두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더욱 깊은 단계입니다. 단순히 잘못된 행동을 고치는 것을 넘어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바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면 되니까’ 악을 피합니다. 진리가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악 자체를 싫어하고 선을 기뻐하는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 마음’이라는 표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변화입니다.

 

특히 ‘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는 말씀은 거듭남의 본질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돌 같은 마음은 단지 성격이 냉정하다는 뜻으로만 볼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들어도 자기 뜻을 내려놓지 않는 완고한 proprium의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옳은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나는 방식대로 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이해성까지 들어왔지만 의지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굳은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억지로 깨뜨려 로봇처럼 순종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시험과 회개와 삶을 통해 점차 부드럽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용서하던 사람이 나중에는 용서하는 것을 기뻐하고, 처음에는 의무 때문에 섬기던 사람이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섬기게 됩니다. 바로 그때 진리가 더 이상 밖에서 명령하는 율법으로만 남지 않고 사람의 새 의지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말씀은 마지막에 ‘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라고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행하게 하리니’입니다. 결국 모든 정결과 새 마음과 새 영은 삶으로 귀결됩니다. 이것은 첫 강의에서 계속 반복되어 온 ‘밝은 진리’, ‘영적 성장’, ‘광야 연단’, ‘신인합일’이라는 주제들을 하나로 묶어 줍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사랑이 되고 사랑이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이 사경회의 강조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가 상당히 깊게 만납니다. 차이는 주로 그 예언의 대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강사는 에스겔 36장을 마지막 때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령이 부어져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될 미래 사건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것을 주님께서 모든 시대의 교회와 모든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행하시는 영적 회복의 말씀으로 읽습니다. 전자는 ‘누구에게 언제 일어날 것인가?’를 중심으로 보고, 후자는 ‘ 말씀은 인간 안에서 어떤 영적 상태의 변화를 말하는가?’를 중심으로 봅니다.

 

강사는 이어 로마서 11장의 ‘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를 혈통적 이스라엘의 미래적 구원과 연결합니다.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갖는 표상성을 먼저 봅니다. 주님의 나라는 혈통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느 민족에서 태어났는지, 어느 교파에 속했는지, 어떤 종교적 외형을 가졌는지가 그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였고 어떤 사랑으로 살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가장 내적으로 읽으면 주님의 영적 이스라엘,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유대인도 있고 이방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사실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혈통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습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특정 민족을 다른 민족보다 본질적으로 더 사랑하시고 그 민족에게만 별도의 구원 원리를 적용하시는 것처럼 말씀을 읽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섭리를 이해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태어난 민족과 문화와 시대를 넘어 각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은 속뜻에서는 모든 시대의 주님의 교회를 향한 약속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역사적 이스라엘의 역할을 가볍게 여길 이유는 없습니다. 바로 그 민족을 통하여 말씀이 보존되었고, 그 민족의 역사와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했으며, 무엇보다 주님께서 그 민족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표상하는 그릇’과 ‘표상되는 실재’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성막이 실제로 거룩한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내면을 표상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 역시 실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더 높은 영적 실재를 표상했습니다.

 

강의는 이후 현대 이스라엘의 형성 과정을 설명합니다. 19세기 유대인의 귀환 운동, 1890년대 시오니즘 운동, 1917년의 밸푸어 선언,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차례로 언급하면서 이 모든 역사를 유대 민족이 고토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구별은 꼭 필요합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실제 역사에 속하는 사건들이고, 그 역사적 의미는 역사학과 국제정치의 차원에서 따로 살펴야 합니다. 반면 ‘ 사건들이 에스겔 예언의 직접적 성취이며 종말의 번째 징조인가?’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종말론적 해석입니다. 둘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 신중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강사가 코로나 시대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의 전쟁과 같은 현대의 사건들까지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귀환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하는 대목입니다. 강사는 여러 국제적 격변의 ‘종국적인’ 목적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들을 고토로 돌아오게 하려는 뜻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특히 조심스러워집니다.

 

신적 섭리는 분명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특정 전쟁이나 재난에 대해 ‘하나님께서 바로 목적 때문에 이것을 일으키셨다’고 단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서 주님은 악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자유에서 발생한 악과 그 결과를 허용하시고, 허용된 것들이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향하도록 끊임없이 굽혀 이끄십니다. 이것이 ‘허용의 섭리’입니다.

 

따라서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고 삶의 터전을 잃는 현실을 보면서 그 전쟁이 어떤 종말론적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일으키신 사건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전쟁의 악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악 속에서도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고 가능한 선을 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인간에게는 섭리의 전체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특정 사건의 신적 목적을 너무 구체적으로 단정할 때 오히려 인간의 추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섭리는 대부분 뒤에서, 그리고 인간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신적 이유를 미리 명백하게 알게 된다면 그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이것을 하셨는지 나는 정확히 안다’고 말하기보다 ‘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영원한 선을 위하여 일하고 계신다’고 신뢰하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이 구별은 이 사경회의 영성을 낮추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강의가 강조했던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깊고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한 것입니다. 삶의 모든 환경이 우연만은 아니며 주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섭리하신다는 믿음은 매우 귀합니다. 그러나 섭리를 믿는 것과 섭리의 구체적인 이유를 내가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첫 번째는 신뢰이고, 두 번째는 자칫 인간의 확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고토 귀환’으로 돌아가 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표현은 개인의 거듭남에 매우 아름답게 적용됩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고토’는 주님께서 창조하신 질서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본래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그 생명을 선과 진리의 쓰임으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이 중심이 되면서 그는 그 본래의 질서에서 떠납니다. 자기 사랑이 왕이 되고 진리는 그 사랑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영적으로는 타국에 포로가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 다시 부르십니다. 먼저 진리를 주십니다. ‘맑은 ’을 뿌리십니다. 진리로 자기 상태를 보게 하십니다. 그다음 시험을 통하여 돌 같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사람은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시험 속에서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분노와 시기와 지배욕과 자기 의가 있는지 보게 됩니다.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귀환의 과정입니다. 그 악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지 않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할 때 조금씩 ‘부드러운 마음’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선을 행하는 데 기쁨이 생깁니다. 진리가 밖에서 명령하는 상태에서 선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하게 보는 전환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 선에서 진리를 보고 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의 귀환’과 앞서 공부한 ‘광야 연단’도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시작이고, 광야는 아직 남아 있는 proprium이 시험을 통해 드러나고 정돈되는 과정이며,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이루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포로 된 이스라엘이 다시 고토로 돌아오는 것은 한때 무너졌던 교회의 질서가 다시 회복되는 또 다른 형상입니다. 말씀 전체가 서로 다른 역사적 장면을 통하여 하나의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반복해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사경회가 이스라엘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와 스베덴보리가 이스라엘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의 차이를 비교하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사경회에서는 현대 이스라엘이 ‘종말 시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귀환과 구원이 마지막 때의 시간표를 알려 주는 표지가 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의 이스라엘은 ‘거듭남의 지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주님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여정을 보여 주는 표상적 역사입니다.

 

전자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지금 종말의 시간표가 어디까지 왔는가?’를 묻습니다. 후자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지금 영적 여정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전자는 주로 역사적 시간에 관심을 두고, 후자는 영적 상태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둘 모두 이스라엘의 역사가 단순한 고대 민족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관계된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종말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까지 바꿉니다.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이것이 번째 종말 징조인가?’를 계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통해 내 안에서 아직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보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모아 고토로 돌아가게 하겠다’는 말씀 앞에서 ‘주님, 안에 흩어진 것들도 다시 모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맑은 물을 뿌리겠다’는 말씀 앞에서 ‘말씀의 진리로 삶을 씻어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고, ‘ 같은 마음을 제거하겠다’는 말씀 앞에서는 ‘제가 진리를 알면서도 고집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종말 예언은 미래를 알아맞히는 자료가 아니라 현재 나를 변화시키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종말론을 읽을 때 계속 붙들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영원합니다. 어느 한 시대의 정치적 사건 하나가 지나갔다고 해서 그 말씀의 효력이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문자 안에 담긴 영적 의미가 모든 시대의 교회와 모든 사람에게 계속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1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 귀환을 종말의 첫 번째 징조로 보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진 뒤 공중강림과 대환란의 시작과 함께 혈통적 이스라엘에게 성령이 부어져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된다고 보는 강사의 해석은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을 역사 속에서 붙들려는 강한 종말론적 확신을 보여 주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스라엘이 주님의 교회와 영적 인간을 표상하므로, 흩어진 이스라엘의 귀환은 선과 진리가 분리되어 흩어졌던 교회와 인간이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모이고, 맑은 물인 진리로 정결하게 되며, 돌 같은 proprium의 마음이 새 마음으로 바뀌어 마침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행하게 되는 거듭남과 새 교회의 회복이라는 보편적 아르카나로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5부에서 가장 깊이 붙들 만한 말씀은 어쩌면 ‘고토’보다도 ‘ 마음’일 것입니다. 고토로 돌아왔는데 마음이 그대로라면 진정한 귀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땅은 바뀌었는데 사랑이 바뀌지 않을 수 있고, 종교는 바뀌었는데 삶은 그대로일 수 있으며, 교회는 옮겼는데 proprium은 그대로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는데 그 진리를 가지고 이전보다 더 교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적으로는 귀환했어도 내적으로는 아직 포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모으시고, 돌아오게 하시고, 씻으시고,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두시고, 마침내 ‘행하게’ 하십니다. 귀환의 완성은 장소가 아니라 생명의 변화입니다. 이 점에서는 이 사경회가 말하는 ‘신인합일’, ‘광야 연단’, ‘성결’, ‘익은 열매’라는 표현들도 결국 하나의 자리에서 만납니다.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 삶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도 깊이 만납니다. 사람이 주님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가 중심이던 사람이 ‘무엇이 주님의 뜻이며 이웃에게 선한가?’를 묻게 되고, 자기 생각을 관철하는 데 기쁨을 느끼던 사람이 진리 앞에서 자기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며, 선을 행하고도 자기 공로를 붙들던 사람이 그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영적 이스라엘의 귀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먼 미래 어느 민족에게만 남겨진 문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흩어진 모든 선과 진리를 다시 모아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루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 교회는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시작됩니다. 돌 같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며, 신앙이 삶과 하나가 되는 곳, 바로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귀환’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1 6

휴거의 여섯 징조 : 외적 종말의 표적에서 내적깨어 있음으로

16부에서는 앞서 이스라엘의 고토 귀환을 종말의 첫 번째 징조로 살펴본 데 이어, 강의의 초점이 ‘휴거가 가까워질 나타나는 현상들’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리니’라는 말씀을 휴거의 대표적인 본문으로 제시하면서, 휴거는 실제로 일어날 것이며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때가 가까워졌음을 알려 주는 여러 징조는 알아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에녹과 엘리야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올라간 사건을 휴거의 예표로 제시합니다. 강사의 관심은 분명합니다. ‘휴거가 정말 있는가?’를 논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날이 가까운 알고 준비하라’는 데 있습니다.

 

강사가 제시하는 징조들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 예루살렘 성전산의 이슬람 성전이 없어지고 제3 성전이 세워지는 일,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화되고 종교 탄압이 일어나는 일, 세계정부와 화폐의 단일화 및 세계 대통령의 등장,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일입니다. 이 일들이 점점 현실화되면 성도들은 휴거가 가까웠음을 알고 영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강사의 종말론적 그림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는 성경 본문에 직접 기록된 내용과, 그 본문을 현대 정치와 국제정세에 연결한 강사의 해석이 상당히 긴밀하게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4장의 ‘난리와 난리 소문’,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기근과 지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세상에 전파되리니’ 등은 성경 본문에 직접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특정 정치 체제나 국가, 세계 단일정부, 단일화폐, 특정 비밀조직에서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출현한다는 설명 등은 그 성경 본문 자체가 직접 말하는 내용이라기보다 강사가 자신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 현실의 사건들과 연결한 해석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서 듣는 것이 이 강의를 존중하면서도 신중하게 읽는 방법일 것입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정치적 판단이 상당히 강하게 등장합니다. 강사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휴거 직전의 징조와 연결하고, 교회와 목회자는 이에 분명히 맞서야 한다고 강조하며, 심지어 교회가 정치적으로 어느 방향에 서야 하는지까지 매우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또한 당시의 미국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가 적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자신의 판단과 함께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특정 세력 가운데서 나올 것이라는 전망까지 제시합니다. 이 대목은 이번 재작업에서 특별히 차분하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시대 인식과 문제의식은 그대로 소개하되, 그것을 곧 말씀 자체의 확정적인 속뜻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징조’를 읽는 방식입니다. 말씀에 전쟁이 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어느 현대 국가 사이의 전쟁을 직접 예언한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전쟁’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을 나타냅니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도 전쟁이 일어나며, 교회 전체에서도 전쟁이 일어납니다. 참된 진리가 거짓된 교리와 충돌하고, 체어리티에 기초한 신앙이 자기애와 지배욕에 기초한 종교성과 충돌합니다. 그러므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난다’는 말씀은 자연계의 실제 전쟁을 문자적 바탕으로 가지면서도, 속뜻에서는 교회와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질서가 무너지고 거짓들이 서로 충돌하는 마지막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전쟁을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쟁은 실제로 끔찍한 악이며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그 전쟁 하나하나를 곧바로 종말 시계의 바늘로 사용하는 것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는 거의 끊임없이 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이번이 바로 마지막 징조다’라고 판단한다면 말씀의 영원한 의미가 그때그때의 국제정세에 종속될 위험이 있습니다. 말씀은 한 시대의 뉴스보다 훨씬 깊고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강사가 두 번째로 제시하는 제3 성전 문제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강사는 현재 예루살렘 성전산에 있는 이슬람 성전이 어떤 방식으로든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제3 성전이 세워지며, 적그리스도가 그곳에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것을 마태복음 2415절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문자적 미래주의 종말론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성전’은 무엇보다 주님의 신적 인성, 그리고 파생적으로 주님의 교회와 사람 안에서 주님이 거하시는 내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에 가증한 것이 선다는 것은 훨씬 더 내적인 경고가 됩니다. 본래 주님과 그분의 선과 진리가 중심이어야 할 자리에 자기애와 거짓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사람의 권력과 명예를 섬길 수도 있고, 개인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을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외적으로는 여전히 ‘성전’의 모습이 남아 있어도 그 중심에는 다른 것이 서게 됩니다.

 

이것은 오히려 훨씬 가까운 종말의 징조입니다. 예루살렘의 어느 건물이 언제 없어질지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의 ‘거룩한 ’에 무엇이 서 있는지는 오늘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중심에 주님이 계신가, 설교자인 내가 있는가? 교회의 중심에 주님의 나라가 있는가, 조직의 성공이 있는가? 말씀 공부의 중심에 진리를 따라 살려는 마음이 있는가, 남보다 더 많이 안다는 만족이 있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말씀은 갑자기 매우 개인적이고 엄중한 말씀이 됩니다.

 

강사가 세 번째 징조로 제시하는 정치 체제의 변화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자유를 억압하고 종교를 탄압하며 국가가 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체제가 확대되는 것을 마지막 때의 징조로 봅니다. 여기에는 ‘자유’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이 점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자유는 인간의 거듭남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유 가운데 진리를 선택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강제로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자유를 특정 현대 정치 이념 하나와 그대로 동일시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가장 깊은 자유는 정치적 제도 이전에 ‘영적 자유’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여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반대로 가장 깊은 속박은 외적인 정치 제도만이 아니라 자기애와 탐욕과 미움과 거짓에 지배되는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도 나를 억압하지 않아도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영적으로는 종입니다. 반대로 외적인 억압 속에서도 주님과 진리를 사랑한다면 내적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자유를 지키는 일은 중요하지만, 교회의 복음을 어느 특정 정치 진영과 동일시하는 순간에는 또 다른 위험이 생깁니다. 신적 진리는 인간의 정당이나 이념보다 큽니다. 어떤 정치 진영 안에도 선과 악이 함께 있을 수 있고, 어떤 제도도 인간의 자기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치 세력 자체를 ‘하나님의 ’으로 동일시하기 시작하면 정치적 판단이 영적 분별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사람은 ‘우리 편이 하는 것은 선이고 저쪽이 하는 것은 ’이라고 생각하기 쉬워집니다. 그러나 말씀의 기준은 진영이 아니라 선과 진리입니다.

 

이 점은 강의 후반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한마디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지금 시대가 ‘악한 것을 선이라고 하고 선한 것을 악이라고 하는’ 상태라고 탄식합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구별이 흐려지고 심지어 뒤집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분별의 기준을 정치적 진영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 말했는가?’보다 ‘그것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에 부합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강사의 염려를 오히려 더 엄격하게 적용합니다.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배욕을 ‘영적 권위’라고 부를 수 있고, 자기 의를 ‘진리를 지키는 용기’라고 부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를 ‘거룩한 분노’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탐욕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고, 자기 교단이나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악을 선의 이름으로 부르는 더욱 미세하고 위험한 형태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의 분별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선악을 뒤집었다고 말하기 전에 ‘나는 악에 선한 이름을 붙이고 있지는 않은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종말의 말씀을 읽을 때 반복해서 강조하는 방향입니다. 말씀은 먼저 나를 심판합니다.

 

네 번째 징조로 강사는 세계정부, 단일화폐, 그리고 세계 대통령의 출현을 말합니다. 세계의 정치와 경제가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고 그 정상에 한 통치자가 등장하면 휴거가 매우 가까워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 그 세계적 지도자가 장차 적그리스도로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특정 비밀결사들에 대한 설명도 이어집니다. 이 부분은 성경 본문 자체와 강사의 시대적 해석을 더욱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는 대목입니다. 해당 강의 자료만으로는 특정 비밀조직이 세계경제와 전쟁을 실제로 배후 조종한다거나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그 조직에서 반드시 출현한다는 주장을 확인할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강사의 종말론적 판단으로 소개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겠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세계적 통합’이라는 이미지에서도 중요한 영적 원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악과 거짓도 한동안 하나로 결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 안의 여러 악한 욕망들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여도 결국 자기애라는 하나의 중심을 섬길 수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고, 권력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기를 원하는 여러 욕망이 모두 proprium을 왕으로 세우는 데 협력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짐승에게 권세를 주는 여러 세력이 하나의 뜻을 갖는 장면도 이러한 악과 거짓의 결집이라는 차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108부에서도 깊이 살펴보았듯, 악의 연합은 참된 하나 됨이 아닙니다. 자기애에 기초한 존재들은 공동의 이익이 있는 동안에는 결합하지만 궁극적으로 서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가 중심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은 마지막에는 자기 내부에서 분열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결합과 지옥의 결합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천국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주님과 공동의 선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지만, 지옥은 각자의 자기 유익 때문에 잠시 결탁할 뿐입니다.

 

강사가 다섯 번째 징조로 말하는 것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424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예로 들며, 특별히 기적과 표적 때문에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을 수 있는 경고입니다.

 

영적 진리의 여부를 기적이나 초자연적 현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그 가르침이 신적 진리라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놀라운 것을 보면 판단력이 약해지기 쉽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분별하는 기준은 기적의 크기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주님과 말씀에 부합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회개와 선한 삶으로 이끄는가입니다.

 

더 깊게 보면 ‘거짓 그리스도’는 반드시 ‘내가 예수다’라고 말하는 특정 인물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주님의 신적 진리와 관계되므로, 거짓을 진리처럼 내세워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모든 것은 내적으로 ‘거짓 그리스도’의 성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proprium이 주님의 자리에 올라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일도 밖의 이단 지도자를 찾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안에도 ‘거짓 선지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정해 놓고 성경 구절을 찾아 그것을 정당화할 때, 내 욕망이 말씀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겉으로는 성경을 인용하지만 실제로는 proprium이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가까이 경계해야 할 미혹입니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징조로 강사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을 듭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 종족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적어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진 뒤에 ‘끝이 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선교적 열정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은 특정 민족이나 문화의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말씀의 보편성을 더욱 넓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만 역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며, 각 사람이 태어난 종교와 문화와 환경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자연계에서 명시적으로 들어 보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동적으로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으며 선을 사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후에는 그러한 사람에게 주님에 관한 진리가 가르쳐질 수 있고, 선을 사랑한 사람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을 단순히 세계의 모든 언어권에 기독교 정보가 한 번씩 전달되는 통계적 조건으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의 모든 영역에 충만하게 증거되고, 각 사람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빛이 주어지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판에는 언제나 먼저 계시가 있습니다. 빛이 와야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6부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사실 이 여섯 징조 자체보다 그 뒤에 나오는 강사의 ‘준비’에 관한 설명일 수 있습니다. 강사는 여러 종말의 징조를 말한 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회개해야 하고 거룩해야 하며 준비할 것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매 순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의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배할 때도, 사람과 다툴 때도, 직장에서 일할 때도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를 생각한다면 행동이 달라지고 절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긴 종말론적 설명은 뜻밖에 매우 실제적인 영성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세계정부가 언제 생길지, 제3 성전이 언제 세워질지,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누구일지를 아는 것보다 오늘 내가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실제 준비라는 것입니다. 이 지점은 귀하게 붙들 만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표현도 조금 더 깊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밖에서 계속 나를 감시하시며 잘못하면 벌점을 주시는 것처럼 받아들이면 신앙이 두려움에 머물 수 있습니다. 더 깊은 상태에서는 ‘지금 생각과 행동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합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처음에는 ‘주님이 보고 계시니까 하지 말아야지’라고 악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이것은 악이기 때문에, 주님과 이웃을 해치기 때문에 나는 원하지 않는다’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외적 순종에서 내적 순종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보고 있기 때문에 잘못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하면 부모가 보지 않아도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하지 않습니다. 영적 성장도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심판이 두려워 악을 피할 수 있고, 천국에 가기 위해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지면 악 자체를 싫어하고 선 자체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휴거 준비’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옮기면 아주 실제적인 말이 됩니다. 오늘 내게 들어오는 생각과 욕망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 자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영계로부터 여러 생각과 정서가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동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계명에 어긋난다고 보고 거절할 것인지는 중요합니다. 바로 그 선택들이 쌓여 사람의 영원한 사랑을 형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깨어 있음’은 세계 뉴스를 하루 종일 확인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기 내면의 움직임을 주님의 말씀 앞에서 살피는 상태입니다. ‘ 나는 지금 사람에게 화가 나는가? 정말 진리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인가? 나는 말을 하고 싶은가? 상대를 돕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인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도적 영성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수도생활의 핵심이 단순히 세상에서 물러나 외적 자극을 줄이는 데만 있다면 장소가 바뀌었을 뿐 proprium은 그대로 수도원까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참된 수도적 깨어 있음은 자기 생각과 정서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살피면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무엇이 자기애에서 올라오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 순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를 의식하라고 한 것은 이 사경회의 수도적 성격과도 잘 연결됩니다.

 

1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 제3 성전, 정치 체제의 변화, 세계정부와 단일화폐 및 세계적 통치자의 출현,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그리고 모든 민족에 대한 복음 전파를 휴거가 가까워지는 여섯 징조로 읽는 강사의 종말론은 성도들에게 시대를 분별하고 깨어 준비하라는 강한 긴장을 주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러한 외적 징조들을 특정 현대 국가·정당·정치인·비밀조직과 곧바로 동일시하기보다, 전쟁은 선과 악 및 진리와 거짓의 영적 싸움으로, 성전의 훼손은 인간과 교회의 거룩한 중심에 자기애와 거짓이 들어서는 상태로, 세계적 악의 결집은 proprium을 중심으로 여러 악과 거짓이 하나가 되는 상태로,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은 거짓을 신적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상태로 읽으며, 궁극적인 종말 준비는 미래의 사건을 정확히 알아맞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매 순간 주님의 선과 진리 앞에서 자기 사랑과 삶을 살피고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는 ‘깨어 있음’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6부에서는 한 가지를 특별히 기억할 만합니다. 강사는 세계정부와 적그리스도처럼 거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한 사람이 누군가와 다투는 아주 작은 장면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다투고 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라고 생각하면 절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그곳에 이 긴 종말론 강의에서 우리가 건져 올릴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영적 핵심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정말 내일 오신다고 해도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잘못했으면 인정하고,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재림이 자연적 시간으로 아주 멀리 있다 해도 이러한 삶을 미룰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지상 생명의 마지막 시간이 언제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가장 실제적인 힘은 날짜를 감추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오늘’을 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언젠가 회개하겠다’, ‘나중에 거룩해지겠다’, ‘상황이 좋아지면 용서하겠다’가 아니라 지금 주어진 진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은 미래에 한꺼번에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작은 선택들 속에서 형성됩니다.

 

이렇게 보면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과 거듭남을 살아가는 사람 사이에 뜻밖의 접점이 생깁니다. 강사는 ‘ 주님께서 오시니 준비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이렇게 덧붙일 수 있겠습니다. ‘ 준비는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를 알아내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말씀의 진리로 내게 오실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종말의 가장 중요한 표지는 하늘이나 국제정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들은 뒤 내 마음과 삶이 실제로 달라지고 있는가 하는 데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1강 처음부터 반복되어 온 ‘밝은 진리’, ‘광야 연단’, ‘신인합일’, ‘영적 성장’, ‘종말의 징조’는 결국 하나로 모입니다. 밝은 진리는 미래를 많이 아는 진리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밝히는 진리이고, 연단은 그 빛 아래 드러난 악과 싸우는 과정이며, 영적 성장은 그 싸움 속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삶이 되는 과정이고, 주님과의 결합은 그 결과 인간의 사랑과 삶이 점점 주님의 질서와 하나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깊은 의미에서 ‘휴거를 준비한다’는 것 역시 결국 하나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를 준비하는 ’과 ‘오늘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 가는 ’은 서로 다른 두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 7

재림의 목적과익은 열매’ : 추수는 선발인가,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완성되는 것인가

17부에 이르면 강의는 종말의 징조들을 살펴본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다시 오시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먼저 19921028일 휴거를 주장했던 시한부 종말론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뒤 한국 교회 안에서 재림 신앙 자체를 부정적이거나 부담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진단하면서,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가 추구하는 두 축을 ‘영생활의 진보’와 ‘건전한 재림 신앙’으로 제시합니다. 즉 종말에 관한 지식만 쌓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성경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은 먼저 귀하게 받을 만합니다. 특정 날짜를 정하여 주님의 재림을 예고하는 시한부 종말론이 실패했다고 해서 주님의 재림이라는 성경의 거대한 주제 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또 다른 극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재림론을 경계하는 것과 재림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강사가 ‘영생활의 진보’와 ‘건전한 재림 신앙’을 함께 놓은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종말론이 사람을 현실도피와 공포로 몰아가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신앙생활이 현재의 안락함 속에 완전히 정착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을 잊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적용하면 ‘건전한 재림 신앙’이라는 말 자체가 훨씬 깊은 질문을 불러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주님께서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고 구름을 타고 공간적으로 내려오시는 사건이 아니라, 말씀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열리고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께서 새 교회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 어느 시점의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가 내 이해와 의지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생활의 진보’와 ‘재림 신앙’은 사실 둘이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가 사람에게 와서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개인의 차원에서 주님의 임재를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이어 재림의 첫 번째 목적을 ‘익은 열매를 추수하기 위해서’라고 제시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추수 비유와 마가복음 426~29절을 연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씨가 자라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고, ‘열매가 익으면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는 말씀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끌어냅니다. ‘’이나 ‘이삭’ 상태에서는 추수하지 않고 ‘ 익은 곡식’이 되었을 때 추수한다는 것입니다.

 

이 ‘익은 열매’는 사실 이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서 광야 연단을 설명할 때도 강사는 성도가 단순히 구원받은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익은 열매’가 되어 천국 곡간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는 모형도 이 영적 성숙의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이제 종말론에 들어와서는 바로 그 ‘익은 열매’가 재림과 추수의 언어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경회에서 영적 성장론과 종말론은 별개의 두 교리가 아닙니다. ‘어떻게 익은 열매가 것인가?’가 성장론이라면, ‘익은 열매를 언제 어떻게 추수하시는가?’가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연결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종말론을 미래 사건의 시간표로만 공부한다면 ‘나는 어느 사건을 피할 것인가?’가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익은 열매’라는 관점이 들어오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나는 지금 얼마나 익어 가고 있는가?’가 됩니다. 실제로 강사의 강조점도 단순히 휴거를 피난 수단으로 삼는 데 있지 않습니다. 휴거될 수 있는 영적 상태, 곧 열매가 충분히 익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익음’이라는 표현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삶으로 나타난 선을 뜻합니다. 씨가 진리의 시작이라면 열매는 그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서 선이 된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듣고 기억하는 것은 씨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은 싹이 나고 자라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것만으로 열매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실제 행동과 습관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는 것은 씨입니다. 그 말씀이 옳다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은 성장 과정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만났을 때 보복하고 싶은 욕망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고 그 사람의 선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열매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다가, 거듭남이 깊어지면서 실제로 용서와 체어리티를 사랑하게 된다면 열매가 점점 익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익는다는 것은 성경 지식이 많아진다는 뜻과 같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이 오래되었다는 뜻도 아니고, 특별한 영적 체험을 많이 했다는 뜻도 아니며, 심지어 많은 사역을 했다는 뜻과도 자동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핵심은 진리가 사랑과 결합했느냐입니다. 알고 있는 선을 실제로 사랑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사랑하는 선을 삶에서 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익은 열매’ 강조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가까이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단순한 지적 동의로 보지 않습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해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해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이 그의 사랑과 삶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직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선의 것이 되고 선에서 진리가 흘러나오는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동시에 매우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는 이 ‘익은 열매’를 장차 공중강림 때 휴거될 특정 성도들의 자격과 연결해 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는 자연계에서 살아 있는 성도 가운데 특별히 성숙한 일부가 육체째 공중으로 올라가는 ‘휴거 선발’이라는 구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라는 영적 통찰은 충분히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을 ‘누가 번째 휴거 대상자가 되는가?’라는 시간표에 그대로 결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익은 열매’는 한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무엇으로 형성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는 편이 더 깊습니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천사가 되거나 악한 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하여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삼을 것인지 점차 결정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사랑과 동기가 뒤섞여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지배적 사랑이 형성됩니다. 주님과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 지배적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지배적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익음’이라는 개념과 깊이 연결됩니다. 선도 익고 악도 익습니다. 실제로 강사 역시 재림의 목적을 설명하면서 ‘선으로 익은 사람’을 추수하시는 동시에 가라지, 곧 ‘악으로 익은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추수란 단순히 착한 사람을 데려가고 나쁜 사람을 벌하는 외적 사건이라기보다, 각 사람이 자유 가운데 형성해 온 내적 상태가 마침내 분명하게 드러나는 때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도 이런 관점에서 훨씬 깊어집니다. 주인은 처음부터 가라지를 뽑아 버리지 않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적 섭리의 놀라운 원리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의 모든 악을 처음부터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자유와 합리성이 파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이 함께 드러나고, 사람이 진리를 배운 뒤 자유롭게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를 통하여 그의 영적 상태가 형성되도록 허용하십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경험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해서 이전의 모든 악한 성향이 즉시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가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가라지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지?’, ‘이렇게 오래 신앙생활했는데 이런 분노와 질투가 남아 있지?’ 하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이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곧 악이 더 강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사람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할 것인지, 아니면 ‘이것은 주님의 계명에 반하는 악이다’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할 것인지 선택하게 하십니다. 이 선택이 반복되면서 선은 점차 뿌리를 내리고 악은 주변으로 밀려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악의 성향 자체가 인간의 기억에서 완전히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질서를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수’는 매우 엄숙하면서도 아름다운 말입니다. 씨를 뿌린 목적은 결국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의 진리를 주시는 목적도 우리가 진리 시험에 높은 점수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서 선의 생명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진리는 수단이고 선은 목적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로 나아가야 하며, 앎은 삶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강사가 ‘싹이 성도나 이삭이 성도를 추수하지 않고 익은 곡식만 추수한다’고 강조하는 부분은 그래서 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천국에 있다’는 식의 공포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지상에서 모든 악의 흔적을 제거하여 절대적 완전 상태에 도달하는 일이 아닙니다. 천사들조차 자기에게서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악이 올라오더라도 그것을 사랑하여 자기 것으로 삼는가, 아니면 악이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여전히 부족함이 많더라도 주님과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 점차 그의 중심 사랑이 되어 간다면 그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익은 열매란 인간적 무결점의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실제 생명의 방향이 된 상태라고 보는 편이 좋습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의 연단 이해를 받아들일 때에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익어야 한다’는 말을 잘못 받아들이면 자기완성을 향한 엄격한 종교적 성취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 연단받아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완전해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어느 정도 성장했다고 느끼면 이번에는 ‘나는 다른 성도보다 익었다’는 영적 우월감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익은 열매를 추구하던 일이 오히려 proprium의 열매를 맺는 역설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자기에게서 선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천사가 인간보다 훨씬 선한데도 자기 선을 자랑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더 높은 천사일수록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과 거짓뿐이며 선과 진리는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유입된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익음’의 가장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영적 자신감의 증가가 아니라 자기 공로의 감소일 수 있습니다.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었다고 자기 열매를 자랑하지 않듯, 거듭나는 사람도 자기에게서 나타난 선을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연단받아서 정도 사람이 되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런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익은 열매의 향기입니다.

 

강사는 이어 재림의 목적에 ‘가라지를 불사르는 심판’도 포함시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세상 끝과 추수를 아마겟돈 심판에 연결하여, 선으로 익은 자들을 추수하는 동시에 악으로 익은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재림의 목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후 강의에서는 이 구조를 ‘익은 열매 추수-죄악 세상 심판-천년왕국 건설’이라는 재림의 세 가지 목적으로 명료하게 정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심판은 앞에서도 보았듯 주님께서 분노하여 사람들에게 형벌을 가하시는 사건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적 진리의 빛이 임하여 각 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고, 서로 섞여 있던 선과 악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도 지옥으로 던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끝까지 모든 사람을 악에서 돌이키려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유롭게 자기애와 악을 생명의 중심으로 확정하면, 사후에는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를 스스로 찾게 됩니다.

 

따라서 ‘가라지를 불사른다’는 말씀에서 ‘’도 자연적 불길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불은 사랑을 나타냅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천국적 사랑이며,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정욕을 나타냅니다. 지옥의 불은 주님께서 밖에서 지펴 사람을 고문하시는 불이라기보다 악한 영 자신이 사랑하는 탐욕과 자기애의 불입니다. 그 사랑이 서로 충돌하면서 고통을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보면 알곡과 가라지의 마지막 분리는 주님께서 갑자기 사람들을 두 종류로 임의 분류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미 지상생활에서 자기의 자유로운 선택들을 통하여 어느 쪽으로 자라고 있는지를 형성합니다. 추수 때에는 그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랑이 지배적인 사람은 선한 공동체를 기뻐하고, 자기애가 지배적인 사람은 자기와 같은 사랑의 공동체를 찾습니다.

 

여기에서 ‘익은 열매’라는 말은 더욱 엄중해집니다. 선만 익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움도 반복하면 익습니다. 거짓도 반복하여 받아들이면 익습니다. 사람을 지배하는 즐거움도 계속 허용하면 하나의 지배적 사랑으로 익습니다. 반대로 용서도 반복하면 익고, 정직도 반복하면 익으며, 남의 선을 기뻐하는 체어리티도 반복하여 실천하면 익습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인가를 익히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추수는 먼 미래에 갑자기 시작되는 일이기 전에 오늘의 작은 선택들 안에서 이미 준비되고 있습니다. 오늘 한 번의 거짓말이 곧 사람 전체를 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유익하다고 사랑하고 반복하며 정당화하면 그것은 점차 성품이 됩니다. 반대로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 때문에 진실을 선택하는 일이 반복되면 정직은 점차 그의 생명의 일부가 됩니다. 이것이 ‘열매가 익는다’는 말씀을 우리의 실제 삶에 가져오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강사가 말하는 ‘영생활의 진보’는 매우 실제적인 의미를 얻게 됩니다. 영적 진보는 얼마나 높은 신비를 알게 되었는가로만 측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전에는 쉽게 화내던 사람이 조금 더 참을 수 있게 되고, 예전에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던 사람이 사과할 수 있게 되며, 예전에는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질투하던 사람이 이제는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영생활의 진보입니다. 진리가 의지를 바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사경회가 오랫동안 ‘연단’을 강조해 온 이유도 이 ‘익음’과 연결해서 보면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연단은 고생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고난을 많이 당했다고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하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더 완고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환경을 통하여 무엇이 드러나고 무엇이 변화되는가입니다. 시험 속에서 자기애가 드러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며 거절함으로써 선이 자리 잡는다면 그 시험은 열매를 익게 하는 연단이 됩니다.

 

이 점은 공용복 선생과 함께했던 이 수도적 전통을 이해할 때도 중요하겠습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연단’, ‘성결’, ‘익은 열매’를 단순히 고행이나 자기억제의 양으로만 이해하면 이 전통의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결국 물어야 하는 것은 ‘ 연단을 통해 사람이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더 부드러워졌는가, 더 겸손해졌는가,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되었는가,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되었는가입니다. 그런 열매가 없다면 외적인 엄격함 자체가 거듭남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익은 열매’와 ‘신인합일’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앞서 바로잡았듯 이 사경회가 사용하는 표현은 ‘신인합일’입니다. 그것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심스럽게 옮기면 인간이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합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결국 열매로 드러납니다. 주님과 결합되었다고 말하면서 삶은 자기애와 지배욕과 미움에 지배되고 있다면 그 결합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적 체험의 강도보다 열매가 중요하고, 자신이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경지’보다 그 사람에게서 어떤 사랑이 흘러나오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신비적 영성의 과장을 막아 주는 매우 안전한 기준입니다. 주님과 깊이 결합될수록 주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추수’라는 말을 교회 전체의 차원에서 보면 또 하나의 의미가 열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한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그 교회 안의 선과 악이 충분히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같은 교회에 속해 있고 같은 말씀을 읽으며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교리가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는지가 드러납니다. 체어리티와 겸손과 선한 삶을 낳는가, 아니면 자기 의와 지배욕과 분열을 낳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열매’입니다. 교리의 참됨은 단지 논리적 정교함으로만 판별되지 않습니다. 참된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므로 궁극적으로 선을 향합니다. 따라서 어떤 교리가 사람을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 대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자기 집단의 우월성만 강화한다면, 아무리 성경 구절을 많이 사용하더라도 그 열매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원리를 이 사경회 자체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해설한다는 것은 바깥에서 이 사경회를 판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사 자신이 제시한 ‘열매’라는 기준을 존중하면서 더 깊게 묻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참석자들을 더 겸손하게 하고, 더 정직하게 하며, 자기 악을 더 잘 보게 하고,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게 하며, 주님을 더 의지하게 한다면 귀한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종말 지식이 사람을 두려움에 빠뜨리거나, ‘우리는 알고 저들은 모른다’는 우월감을 만들거나, 특정한 외적 체험과 단계가 구원의 등급처럼 굳어진다면 그 부분은 다시 말씀의 빛 아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 ‘건전한 재림 신앙’이라는 강사의 표현을 가장 깊게 받아들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건전한 재림 신앙은 날짜를 정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재림에 관한 지식이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는가까지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기 때문에 오늘 더 사랑하고, 더 정직하고, 더 용서하고, 더 깨어 자기 악을 살핀다면 그 재림 신앙은 생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재림을 많이 말하면서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세상을 향한 적대감과 자기 집단의 우월성만 키운다면, 그 지식이 아무리 복잡하고 정교해도 그 열매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1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1992년 시한부 종말론의 실패 이후 교회가 재림 신앙 자체를 잃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영생활의 진보와 건전한 재림 신앙’을 함께 회복하고, 재림의 첫 목적을 ‘익은 열매의 추수’로 제시하는 강사의 강조는 종말론을 영적 성장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익은 열매’를 공중강림 때 선택적으로 휴거될 성도의 자격으로만 읽기보다, 말씀의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결합하여 체어리티와 선한 삶이라는 열매가 되고 마침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의 지배적 사랑으로 자리 잡는 거듭남의 성숙으로 읽으며, ‘추수’는 그렇게 각자가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의 실제 상태가 신적 진리의 빛 앞에서 드러나 선과 악이 분리되는 심판의 아르카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7부에서 특별히 오래 붙들고 싶은 것은 ‘익으면 낫을 대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놀라운 기다리심이 있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 다음 날 밭에 나가 열매가 없다고 땅을 갈아엎지 않듯, 주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싹인 때를 아시고, 이삭인 때를 아시며, 아직 속이 차지 않은 때도 아십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진리를 공급하시고, 시험 가운데 보호하시며,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우리가 자유 가운데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두려움만 줄 말씀이 아닙니다. ‘ 나는 아직 이것밖에 되었나?’ 하고 자기를 몰아붙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씨를 심으신 분이 주님이시며 자라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몫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되 그 힘과 선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 사경회의 ‘익은 열매’라는 언어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가장 아름답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익는다는 것은 ‘내가 강해지는 ’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더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억지로 행했지만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여 행하고, 처음에는 자기 공로를 붙들었지만 나중에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며, 처음에는 천국에 가기 위해 이웃을 사랑했지만 마침내 이웃의 선 자체를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열매는 겉만 익은 것이 아니라 속까지 익어 갑니다.

 

그렇다면 재림을 기다리는 가장 좋은 방법도 분명해집니다. ‘언제 오십니까?’만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늘 안에서 무엇을 익히고 계십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종말의 시간표를 손에 들고 하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게 맡겨진 사람을 사랑하고, 오늘 발견한 악을 거절하며, 오늘 깨달은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우리의 실제 생명이 되어 갈 때, 우리는 미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시에 이미 지금 말씀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1 8

뿌리는 비유와 가지 마음밭 : 문제는 씨앗이 아니라받아들이는 그릇이다

18부에서는 강사가 지금까지 배운 ‘기본 진리’ 전체를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통해 다시 정돈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핵심진리를 구원론과 성화론과 종말론을 중심으로 성경을 체계화한 진리라고 설명하면서,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가 앞서 공부한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앞으로 공부할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이 공부를 통하여 성도가 ‘영적인 목표와 방향’, 그리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영적 가치관’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점에서 마태복음 13장은 강사에게 단순히 서로 다른 일곱 비유가 모여 있는 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설명해 온 영적 성장과 앞으로 다룰 종말론을 서로 이어 주는 하나의 중요한 연결부입니다.

 

강사는 이 일곱 비유를 하나의 체계 안에서 읽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서론’, 마지막 그물 비유를 ‘결론’, 그 사이의 비유들을 ‘본론’처럼 배열하고, 이를 앞으로 계시록에서 등장하는 ‘14 4’과 ‘666’을 해석하는 틀로까지 연결합니다. 겨자씨 비유는 144천의 성장적 측면, 누룩 비유는 행실적 측면, 진주와 보화 비유는 생명적 측면을 설명하며, 가라지 비유는 666과 적그리스도적 영혼의 정체를 설명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그물 비유에서는 이 모든 것이 종말의 추수로 결론지어진다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연결 전체를 그대로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13장의 각 비유를 계시록의 특정 숫자와 직접 대응시키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비유를 고립된 교훈으로 읽지 않고 하나의 영적 성장 과정 속에서 읽으려 한다는 강사의 기본 방향에는 주목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내적 질서를 종말 시간표보다는 주님께서 한 사람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가 하는 과정에서 찾게 됩니다.

 

그 출발점이 ‘ 뿌리는 비유’입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네 종류의 밭, 곧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을 네 종류의 ‘마음밭’으로 설명합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진리이며, 씨 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고, 씨가 떨어지는 밭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똑같은 씨가 뿌려졌는데도 어떤 곳에서는 전혀 자라지 못하고, 어떤 곳에서는 잠깐 자라다가 말라 버리고, 어떤 곳에서는 가시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며, 좋은 땅에서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씨가 네 종류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씨는 같습니다. 차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밭에 있습니다. 신적 진리는 동일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 이해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는 끊임없이 유입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형체와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햇빛은 동일하지만 아름다운 꽃에 비추면 꽃의 색과 생명을 드러내고, 부패한 것에 비추면 그 부패를 드러냅니다. 태양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대상이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말씀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겸손해지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 한 사람은 자기 악을 발견하고 회개하지만, 다른 사람은 남의 잘못을 찾아 정죄하는 근거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진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씨 뿌리는 비유 앞에서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말씀을 어떤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강사는 네 가지 마음밭 가운데 특별히 ‘좋은 ’에 초점을 둡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목적은 결국 열매를 얻는 데 있으므로, 좋은 밭이 되어야 영적으로 성장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좋은 밭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고 세상에서 빛이 되며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여러 쓰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앞서 7부에서 살펴본 ‘익은 열매’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열매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추수 때가 되었다고 갑자기 익은 열매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씨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씨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장애물을 이기고, 마침내 결실하는 긴 과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과정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강사는 여기서 사람은 자신이 네 가지 밭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스스로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는 과정’을 통하여 그것을 드러내신다고 설명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내가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밭인지, 좋은 밭인지를 드러내는 시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 통찰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자기 내면을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이 닥치면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아무도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을 때에는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누군가 나를 무시하거나 내 의견을 공개적으로 반박했을 때 격렬한 분노가 올라온다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애가 드러난 것입니다. 재산에 손해가 없을 때에는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손해를 감수하면서 정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시험은 주님께서 우리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아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게 되고, 드러난 악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함으로써 선이 더욱 깊이 자리 잡도록 허용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네 가지 밭을 단순히 세상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누는 분류표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이 네 가지 상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진리에 대해서는 좋은 밭이면서 다른 진리에 대해서는 돌밭일 수 있고, 어떤 때에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기애가 건드려지는 특정 영역에서는 길가처럼 굳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좋은 밭이고 사람은 길가다’라고 사람을 분류하기 시작하면 주님의 비유가 오히려 자기 의를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의 마음밭을 판정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마음밭을 살피고 갈도록 주어진 말씀입니다.

 

첫 번째 ‘길가’는 사람들이 계속 밟고 다녀 굳어진 땅입니다. 씨가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에 그대로 있으므로 새가 와서 먹어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악한 자가 와서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 상태라고 설명하십니다. 강사는 이것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하고 강퍅한 마음, 세상 일과 돈 버는 데 몰두하여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씀을 아주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수없이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이 너무 익숙해져 더 이상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지 않는 것입니다. ‘ 말씀 알아’, ‘ 설교 많이 들었어’, ‘그건 초신자에게 필요한 이야기지’ 하는 상태가 되면 진리가 기억에는 있지만 의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말씀을 모르는 것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너무 익숙해져 더 이상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는 것도 위험합니다.

 

특히 말씀을 오래 공부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더욱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말씀을 읽는 순간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어떤 설교에 사용할까?’, ‘누구에게 적용하면 좋을까?’가 먼저 떠오르면 정작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자기 밭에는 씨를 받지 못하는 역설이 생기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을 많이 이해하는 것 자체가 좋은 밭의 증거는 아닙니다. 그 진리가 먼저 나 자신의 proprium을 비추고,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드러내며, 실제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말씀에 관한 지식은 많아지는데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은 오히려 흐려진다면 씨는 기억 속에는 많이 쌓였지만 아직 마음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돌밭’은 씨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깊지 않아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넘어지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처음 접했을 때 감동하고 기뻐하지만 아직 그 진리가 의지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영적 감동 자체는 귀하지만 감동이 곧 거듭남은 아닙니다.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여 ‘이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같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 일상생활 속에서 가족과 갈등하고, 직장에서 손해를 보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을 만났을 때 그 진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말씀 때문에 실제로 자기 뜻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뿌리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영적 체험과 영적 성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체험은 순간적으로 매우 강렬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의지와 삶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반드시 더 거듭난 것도 아니고, 특별한 환상이나 음성을 경험했다고 반드시 더 깊은 영적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체험 이후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세 번째 ‘가시떨기’는 더욱 미묘합니다. 씨가 아예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 성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합니다. 이 상태는 교회 밖의 불신자보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세상 자체가 아닙니다. 직업을 갖고 돈을 벌고 가족을 돌보고 집을 마련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모두 필요한 자연적 삶입니다. 문제는 질서입니다.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하는데 거꾸로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욕망을 섬기기 시작하면 가시가 말씀을 막습니다. 돈 자체가 가시가 아니라 돈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가시이고, 직업 자체가 가시가 아니라 명예와 지위를 자기 존재 가치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가시입니다. 가족 자체가 가시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보다 가족의 욕망을 더 높이 두는 것이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본래 쓰임을 위한 좋은 도구이지만 그것들이 목적이 되면 영적 생명을 압박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질서’의 문제입니다. 천국적 질서에서는 높은 것이 낮은 것을 다스립니다.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선이 진리를 통하여 자연적 삶을 질서 있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적 욕망이 영적인 것을 지배하면 질서가 전도됩니다. 사람이 기도하고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세상적 성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때 신앙은 가시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강사가 ‘세상의 쾌락이나 육신의 행복이나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할 없다’고 강하게 말하면서 성도는 ‘육에 속한 삶을 벗어 버리고 영에 속한 생활을 철저히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연적 삶 자체를 버리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은 아니라고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과 직업과 재산과 사회생활을 떠나는 것이 자동적으로 더 영적인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돈도, 직업도, 가정도, 사회적 책임도 주님과 이웃의 선을 섬기는 쓰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의 본질은 ‘소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보다 ‘소유가 마음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네 번째가 ‘좋은 ’입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라고 하시며, 그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좋은 밭을 가진 성도들이 가장 잘 성장하고 하나님의 일을 맡으며 세상의 빛과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가장 밝은 빛을 따라 산 성도들과 순교자들, ‘교회 시대의 이긴 자들’이 이러한 좋은 밭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 이해에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의 참된 깨달음은 결국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진리는 선을 향하지 않으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진리입니다.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씨가 열매가 됩니다.

 

그리고 좋은 밭은 타고난 좋은 성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제 밭도 그냥 두면 저절로 좋은 밭이 되지 않습니다. 땅을 갈고, 돌을 골라내고, 가시를 제거하고, 흙을 뒤집어 씨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거듭남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좋은 밭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진리를 주시고 자유를 주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안의 돌과 가시를 보고 그것을 제거하는 일에 협력하게 하십니다. 물론 그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거절해야 합니다. ‘주님이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아니고, ‘내가 힘으로 나를 좋은 밭으로 만들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밭을 갈지만 생명을 주고 씨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강사는 이어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 땅의 삶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도록 주어진 시간이며, 성도는 ‘적당히 천국만 가면 되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더 높은 영적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겸손과 충성, 인내와 사랑을 많이 실천할수록 하늘의 상급도 커진다는 것을 ‘저금 통장’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강조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도 된다’는 식의 신앙을 경계하고 실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사랑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므로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급을 저축한다’는 표현을 조금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의 상급은 선행을 많이 쌓아 놓은 대가로 하나님께서 지급하시는 보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면서 상급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 선 안에 자기 공로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상급은 오히려 선 자체를 행하는 기쁨입니다.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기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쁘며, 자기보다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할 수 있는 상태 자체가 천국의 행복입니다. 쓰임을 행하는 것이 상급이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 있는 것이 상급입니다.

 

따라서 ‘ 높은 것을 추구하라’는 말도 ‘천국에서 남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천국에서는 높은 자가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넓은 쓰임을 행합니다. 가장 높은 천사는 가장 낮아지기를 기뻐합니다. 주님께 가까울수록 자기 공로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좋은 밭의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도 단순히 ‘상급 액수의 차이’로 읽기보다 각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고유한 능력과 쓰임에 따라 선이 얼마나 충만하게 결실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사랑과 지혜와 쓰임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경쟁적 서열이 아니라 조화로운 다양성입니다. 삼십 배인 사람이 백 배인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백 배인 사람이 삼십 배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각자가 주님께 받은 그릇만큼 충만한 것이 그 사람에게는 완전한 기쁨입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가장 밝은 ’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한 보완이 됩니다. 강사는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산 사람들을 교회 시대의 이긴 자들, 성화된 성도들, 순교자들과 연결하고 모든 성도가 더 높은 영적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다만 ‘밝은 ’을 영적 엘리트의 등급처럼 받아들이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순수하게 받아 삶으로 나타내는가로 이해하면 더 안전합니다. 가장 밝은 사람은 ‘나는 남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을 받아 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깊이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에게서 빛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빛에는 proprium의 그림자가 섞이기 시작합니다.

 

이 점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앞서 강의에서 사용한 ‘신인합일’이라는 표현에도 중요한 분별 기준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과 깊이 결합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의 상태는 결국 ‘열매’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신비한 체험이나 높은 단계에 대한 자기 인식이 아니라 실제로 더 겸손해지고, 더 온유해지고, 더 정직해지고, 더 사랑하게 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 주님과의 참된 결합은 반드시 체어리티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이 인간의 의지와 삶 안에서 생명이 됨으로써 주님과 결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씨 뿌리는 비유에는 놓치기 쉬운 매우 아름다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씨를 뿌리시는 주님은 좋은 밭에만 씨를 뿌리지 않으십니다.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밭에도 씨가 떨어집니다. 인간적인 농사 상식으로 보면 낭비처럼 보이지만 신적 사랑의 관점에서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현재 상태만 보고 진리를 주실 대상을 미리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강퍅한 사람에게도 진리가 오고, 얕은 사람에게도 오며, 세상 염려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도 옵니다. 주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가능성을 공급하고, 사람에게 자유롭게 응답할 기회를 주십니다.

 

더 나아가 오늘 길가 같은 사람이 영원히 길가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굳은 땅도 갈아엎으면 밭이 될 수 있고, 돌밭에서도 돌을 골라낼 수 있으며, 가시밭에서도 가시를 뽑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희망입니다. 네 가지 밭을 고정된 인간 유형으로만 읽으면 ‘ 사람은 길가라서 된다’고 쉽게 단정할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마음밭 자체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 밭을 가는 과정이 바로 회개와 시험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의 빛으로 굳은 땅을 드러내시고, 시험을 통하여 숨어 있던 돌을 드러내시며, 우리가 사랑하고 있던 가시가 무엇인지 보여 주십니다. 그것을 보게 될 때 사람은 주님의 힘으로 하나씩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전에는 열매를 맺지 못했던 땅이 점차 좋은 땅으로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밭인가?’라는 질문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주님께서 지금 밭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계시는가?’일 것입니다. 내게 반복해서 찾아오는 시험은 어떤 돌을 보여 주고 있는가, 내가 놓지 못하는 염려는 어떤 가시인가, 말씀을 들으면서 자꾸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고 싶은 마음은 내 밭의 어느 부분이 굳어 있다는 신호는 아닌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씨 뿌리는 비유는 사람을 네 부류로 분류하는 비유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거듭남을 보여 주는 말씀이 됩니다.

 

특히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해 온 ‘연단’도 여기에서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단의 목적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돌을 골라내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씨가 깊이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고, 가시를 뽑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열매가 막히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연단의 중심에는 고난이 아니라 생명이 있습니다.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그 자체로 성숙한 것이 아니며, 고난 가운데 자기애와 자기 의가 드러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거절하면서 체어리티와 겸손과 인내가 자라났을 때 비로소 그 고난이 연단이 됩니다. 이 점에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이 오랫동안 강조해 온 ‘연단’도 외적인 고생의 강도보다 그 연단을 통하여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중심으로 볼 때 그 영적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1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뿌리는 비유를 지금까지 배운 핵심진리와 앞으로 배울 요한계시록을 연결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길가·돌밭·가시밭·좋은 밭이라는 가지 마음 상태 가운데 좋은 밭이 되어 가장 밝은 빛과 풍성한 열매를 추구해야 한다는 강사의 강조는 신앙이 반드시 영적 성장과 삶의 결실로 이어져야 한다는 중요한 요청을 담고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동일한 씨인 신적 진리가 사람의 받아들이는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낳는 인플럭스의 원리, 시험을 통하여 자기 내면의 실제 상태가 드러나고 악과 거짓을 거절하면서 마음밭이 변화되는 거듭남의 과정, 그리고 진리가 마침내 의지와 결합하여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열매가 되는 영적 질서의 아르카나로 읽을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8부에서 특별히 붙들 만한 것은 ‘좋은 밭은 처음부터 좋은 밭이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실제 농부의 밭을 생각하면 답은 분명합니다. 좋은 밭도 갈아야 하고, 돌을 골라내야 하며, 가시를 뽑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좋은 밭은 ‘나는 원래 괜찮은 사람’이라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들어올 때마다 자기 안의 돌과 가시를 보게 되고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제거해 온 마음입니다. 그래서 시험 가운데 ‘ 안에 이런 분노가 있었구나’, ‘내가 이렇게까지 인정받기를 원했구나’, ‘나는 주님보다 돈을 의지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은 몹시 불편하지만, 동시에 밭이 좋아질 가능성이 열린 순간이기도 합니다. 쟁기가 땅속에 숨겨져 있던 돌을 끌어올렸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의 중심에는 결국 농부이신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밭을 보면서 ‘나는 아직 돌도 많고 가시도 너무 많다’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현재의 밭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밭에서 무엇이 자랄 수 있는지를 아십니다. 씨를 주시고, 빛을 주시고, 비를 내리시며,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우리가 허용하는 만큼 밭을 갈아 가십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라는 말은 영적 엘리트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이라기보다, 주님께서 뿌리신 씨가 마침내 우리 안에서 그 목적을 이루도록 허용하라는 초청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내 생각을 바꾸고, 생각이 의지와 결합하며, 의지가 행동을 바꾸고, 마침내 내 삶 전체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씨에서 열매까지, 그 긴 과정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1 9

겨자씨와교회 시대 이긴 ’ : 가장 작은 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19부에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겨자씨 비유를 중심으로 ‘영적 성장’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강사의 전체 체계에서 씨 뿌리는 비유가 ‘어떤 마음밭으로 말씀을 받는가’를 보여 주는 서론이라면, 이제 겨자씨 비유부터는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단계로 넘어가는 셈입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서로 독립된 이야기로 보지 않고, 씨를 받아 성장하고 광야 연단을 통과하여 마침내 ‘이긴 ’가 되는 하나의 영적 과정으로 연결합니다. 실제로 뒤에서 겨자나무가 된 성도, 누룩처럼 온전히 부푼 성도, 값진 진주를 소유한 성도를 모두 ‘광야를 통과해서 이긴 자가 상태’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겨자씨 비유 자체는 매우 짧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을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시면서, 그것이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고 말씀하십니다. 강사가 이 비유에서 특별히 붙드는 것은 ‘성장’입니다. 작은 씨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자라고 또 자라 마침내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무가 된 상태를 강사는 앞서 계속 설명해 온 ‘광야 연단을 통과한 성도’, ‘익은 열매’, ‘교회 시대 이긴 ’와 연결합니다. 나아가 계시록의 144천도 이러한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의 집단으로 해석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성령 강림부터 공중강림까지의 교회 시대 동안 하나님께서 이러한 ‘ 맞은 144천을 만들어 내시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구원 섭리가 됩니다.

 

여기에서 먼저 귀하게 받을 수 있는 것은 신앙을 ‘시작’으로 끝내지 않고 반드시 ‘성장’으로 이어 가려는 강사의 문제의식입니다. 겨자씨는 씨인 채로 보존되기 위해 심어진 것이 아닙니다. 씨가 땅속에 들어갔다면 자라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고백도 신앙생활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시작입니다. 진리를 받았다면 그 진리가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 속으로 들어가 그의 생명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반복하여 ‘구원받았으니 됐다’는 식의 정지된 신앙을 경계하고, 연단과 성화와 성장과 열매를 강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거듭남은 단번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에는 말씀의 진리를 외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배우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 진리가 곧 그의 생명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진리를 따라 살면서 자기 안에서 그 진리를 거스르는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시험 가운데 그것들과 싸우며, 주님의 도움으로 악을 거절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렇게 진리가 점차 의지와 결합하고 선이 되며, 마침내 이전에는 ‘옳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던 ’을 ‘좋기 때문에 기쁘게 행하는’ 상태로 변화합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그림은 이러한 거듭남의 성장과 매우 아름답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작은 ’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신적 진리 자체가 작거나 미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 인간에게 받아들여질 때 그 진리가 차지하는 자리가 매우 작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옳은 같다’는 작은 인정 하나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사람의 전 존재를 지배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자연적 인간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내가 잘해야 하는가?’라고 반발합니다. 그 가운데 아주 작은 진리 하나가 심어집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옳다.’ 겨자씨처럼 작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진리를 따라 실제로 살아가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참을 수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보복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더 나아가 상대방의 사정을 생각하기 시작하며, 마침내는 그 사람에게도 선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해 안에 작은 씨로 있던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사랑과 결합하고, 마침내 삶 전체를 움직이는 하나의 원리가 됩니다. 이것이 씨가 나무가 되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영적 성장은 지식의 양이 늘어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얼마나 많아졌는가?’보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얼마나 나의 사랑과 삶이 되었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입니다.

 

이 점에서 겨자씨 비유는 앞서 씨 뿌리는 비유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8부에서 살펴본 네 가지 마음밭은 진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겨자씨는 제대로 받아들여진 진리가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좋은 밭이라는 것은 씨를 보관하는 창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씨가 자랄 수 있는 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밭의 참된 증거는 결국 성장과 열매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인 뒤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랑과 삶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와 별개로 그 씨가 실제로 어디까지 자라고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이것을 ‘광야 연단’과 연결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식물은 씨가 심어진 뒤 아무 과정 없이 갑자기 큰 나무가 되지 않습니다. 햇빛과 비를 받고 바람을 견디며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영적으로도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려면 시험이 필요합니다. 평온할 때 ‘나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지는 시험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을 때 ‘나는 온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만, 모욕을 받았을 때에도 악으로 악을 갚지 않을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시험은 머릿속에 있던 진리를 삶의 진리로 만드는 자리입니다.

 

그렇다고 시험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많이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한 사람은 더 부드러워지고 다른 사람은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험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원망을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의 진리를 붙들고 그 악을 거절하는가입니다. 따라서 ‘광야 연단’의 본질은 고통의 양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선과 진리가 악과 거짓을 이기고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을 붙들면 이 사경회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연단’이라는 언어도 고행이나 영적 성취주의로 흐르지 않고 거듭남의 실제 과정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강사의 해석에서 겨자나무가 된 상태는 매우 높은 영적 단계입니다. 단순히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 광야 연단을 통과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져 ‘이긴 ’가 된 상태입니다. 강사는 이 상태를 계시록의 ‘ 맞은 ’, ‘교회 시대 이긴 자들’, ‘14 4’과 연결하고, 이들이 장차 휴거되어 특별한 위치에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다른 강의 대목에서도 강사는 ‘교회 시대 이긴 ’가 광야 연단 과정을 마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하게 된 사람이며, 이들에게 ‘생명과’를 먹는 상태가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144천은 자연적 의미에서 정확히 144,000명의 특별한 성도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들은 상응을 통하여 영적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특히 12와 그 배수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 곧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전체를 나타내며, 144,000은 그러한 상태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수로 읽습니다. 따라서 ‘144,000이라는 정원이 실제로 채워져야 종말이 시작된다’는 식의 자연적 산술로 읽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14 4’이라는 특정한 수의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이 형성되고, 이들이 대환난 전에 휴거되는 종말론적 구조가 중요합니다. 실제로 강사는 이 숫자가 ‘14 4천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명시적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관심이 ‘나는 14 4 안에 들어갈 있는가?’에서 ‘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얼마나 온전한 질서를 이루고 있는가?’로 이동합니다. 숫자가 외적인 선발 인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충만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겨자씨 비유와 144천 사이에도 다른 방식의 연결이 가능합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은 작은 진리의 시작이 인간 전체를 새롭게 하는 데까지 성장하는 것이고, 12와 그 배수의 충만함은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온전한 질서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핵심은 특별한 영적 엘리트 집단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서로 결합하여 그의 삶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긴 ’라는 표현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전통에서는 이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광야를 통과하고 죄성을 이기며 정결한 단계에 도달한 사람을 ‘이긴 ’라고 부릅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에 반복하여 ‘이기는 그에게는’이라는 약속이 주어지는 것도 이 체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됩니다. 강사는 이긴 자들에게 생명나무의 열매, 흰옷, 새 예루살렘의 이름 등 특별한 약속들이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이기는가가 핵심입니다. 다른 종교를 이기는 것도 아니고, 다른 교파를 이기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보다 높은 영적 단계에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깊은 싸움은 자기 안의 악과 거짓에 대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자기 힘으로 그것들을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여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실제로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지옥의 유입을 물리치시고 선과 진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긴 ’라는 표현을 잘못 받아들이면 영적 우월감이 생길 위험도 있습니다. ‘나는 광야를 통과한 사람이고 사람은 아직 광야에 있다’, ‘나는 생명과를 먹은 단계이고 사람은 아직 단계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사람을 영적 계층으로 분류하기 시작하면, 자기부인을 위해 시작한 영성이 오히려 가장 미세한 proprium을 키울 수 있습니다. 영적 교만은 세상적 교만보다 더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세상적 교만은 돈이나 학벌이나 지위를 자랑하지만, 영적 교만은 겸손과 성결과 체험과 진리 지식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에서는 오히려 높이 올라갈수록 자기가 높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더 깊은 천국적 상태에 있는 천사일수록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압니다. 따라서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의 매우 중요한 역설입니다. 진정으로 성장할수록 ‘내가 성장했다’는 의식은 오히려 약해지고, 주님께 대한 의존은 깊어집니다. 나무가 커질수록 뿌리가 더 깊이 땅속으로 내려가듯, 영적 성숙이 깊어질수록 겸손도 깊어져야 합니다.

 

이 점에서 겨자씨 비유의 ‘나무’는 아주 좋은 분별 기준을 줍니다. 큰 나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큰 것이 아닙니다. 그 가지에 새들이 와서 깃듭니다. 즉 성장의 결과가 다른 존재에게 유익이 됩니다. 이것은 ‘쓰임’이라는 스베덴보리의 핵심 개념과 매우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천국에서 모든 것은 쓰임을 향합니다. 지혜가 많아지는 것도 쓰임을 위해서이고, 사랑이 깊어지는 것도 쓰임을 위해서이며, 어떤 천사가 더 높은 지혜를 받는 것도 더 넓고 깊은 쓰임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나는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기준 가운데 하나는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쓰임이 되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게 되었는데 사람을 더 쉽게 정죄하게 되었다면 나무는 커진 것처럼 보여도 그 가지에 새들이 깃들기 어렵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연단을 많이 받았는데 가족이 나를 더 어려워하고 가까이하기 힘들어한다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영적 성장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이 그 사람 곁에서 위로를 받고, 안전함을 느끼고, 진리를 더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 나무의 가지가 실제 쓰임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든다’는 말씀도 상응적으로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말씀에서 새들은 여러 문맥에서 사고, 지적인 것들, 진리에 관한 이해와 관계합니다. 그렇다면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는 것은 진리가 인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하여 그의 내적 삶이 다양한 참된 생각과 이해가 머물 수 있는 질서 있는 구조가 되는 모습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진리 하나였지만 그것이 삶과 결합하면서 다른 진리들을 받아들이고 연결할 수 있는 큰 구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 신앙의 성장에서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경의 여러 말씀이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창세기의 말씀과 복음서의 말씀이 별개처럼 보이고, 사랑과 신앙과 회개와 시험과 섭리가 각각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중심적인 진리가 삶 안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여러 진리들이 서로 연결됩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면 계명과 회개와 신앙과 쓰임과 섭리가 하나의 질서 안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큰 나무의 여러 가지가 하나의 줄기에 연결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이 사경회가 추구하는 ‘핵심진리’의 의도와도 의미 있는 접점이 생깁니다. 강사들이 여러 성경 본문을 하나의 영적 성장 체계로 정돈하려는 이유 역시 성경의 진리들을 흩어진 정보로 남겨 두지 않고 하나의 전체적인 신앙의 길로 이해하려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 의도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체계가 성경 위에 올라서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합니다. 체계가 말씀을 설명해야지, 말씀이 이미 만들어 놓은 체계를 증명하는 자료로만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서로 다른 본문들을 연결할 때에는 그 연결이 말씀의 내적 상응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해석자가 만든 종말론적 도식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겨자씨 비유를 곧바로 ‘14 4천의 교회 시대 이긴 ’와 동일시하는 부분은 이 강의의 체계 안에서는 일관되지만, 그것이 비유 자체가 직접 말하는 유일한 의미라고 단정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 자체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성장입니다. 아주 작게 시작된 것이 주님의 생명으로 자라 예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 됩니다. 이 영적 원리를 충분히 붙든 뒤에 다른 계시록 본문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그리고 이 ‘작음에서 큼으로’라는 원리는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보존하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해도 주님과 부모에 대한 순진한 사랑, 이웃에 대한 선한 정서, 진리에 대한 감각 같은 것들이 내면 깊은 곳에 보존됩니다. 이것이 리메인스입니다. 나중에 사람이 거듭남의 길에 들어설 때 주님께서는 그 보존된 상태들을 사용하십니다. 인간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씨와 같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장차 거듭남에 사용될 매우 귀중한 기반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현재 모습만 보고 그의 영적 가능성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겨자씨만 한 것이 장차 어떤 나무가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지금 말씀을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 아직 많은 약점과 혼란을 가진 사람, 신앙생활에서 여러 번 넘어지는 사람도 주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알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의 주체가 궁극적으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도 중요한 위로가 됩니다.

 

다만 강사의 ‘가장 높은 단계까지 올라가라’는 강조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받을 때에는 목표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야 합니다. 영적 성장의 목표는 ‘나는 어느 단계까지 올라갔는가?’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안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역사하고 있는가?’입니다. 가장 높은 상태는 자기 자신을 가장 높게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께 의존하고 가장 기쁘게 이웃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천국의 높이는 공간적 고도가 아니라 사랑의 내적 깊이입니다.

 

따라서 겨자나무가 되는 것은 ‘영적 거인’이 되는 것과 다릅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은 작아지고 주님의 생명이 크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진리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주님께서 진리를 주신다’고 알게 되고,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선을 행하신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천국에 가기 위해 선을 행하지만, 나중에는 선 자체를 사랑하여 행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장입니다.

 

강사의 설명 가운데 ‘14 4천이 너무 적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것이 예정된 수라고 답하는 대목도 이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숫자를 자연적 인원수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으므로 ‘나는 제한된 정원 안에 있을까?’라는 불안 자체가 사라집니다. 주님의 구원은 숫자 제한을 두고 경쟁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며, 각 사람에게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144,000이라는 수가 말하는 것은 천국의 좌석 수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충만함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긴 ’라는 말도 경쟁에서 해방됩니다. 내가 다른 성도보다 먼저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다른 성도의 영적 수준이 아니라 내 안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이 삼십 배의 열매를 맺든 백 배의 열매를 맺든 그것은 나와 경쟁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선을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체가 내가 이겨야 할 자기애의 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이 지닌 ‘연단’과 ‘이긴 ’의 언어를 더욱 깊고 안전하게 받아들이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랜 수도적 훈련과 자기부인이 ‘나는 다른 성도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는 의식을 낳는다면 그 연단 속에 proprium이 숨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연단을 거치면서 자기 악을 더 잘 보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오래 참으며,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고, 주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된다면 그 연단은 겨자씨가 나무가 되어 가는 실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영적 성숙은 밖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높이가 아니라 안으로 깊어지는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1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는 비유를 광야 연단을 통과하여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고 마침내 계시록의 ‘교회 시대 이긴 ’, 곧 144천의 인 맞은 종에 이르는 영적 성장의 모습으로 읽는 강사의 해석은 신앙을 단순한 구원의 출발점에 머물게 하지 않고 반드시 성화와 성장과 열매로 나아가게 한다는 중요한 힘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겨자씨의 성장을 작은 진리의 시작이 시험과 회개를 통하여 의지와 결합하고 마침내 선과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큰 나무가 되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으며, 144천 역시 문자적인 제한 인원의 영적 엘리트 집단이라기보다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갖추어진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고, 참된 ‘이긴 ’란 자기 힘으로 높은 영적 단계에 올라간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거절하여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점점 그의 생명을 다스리게 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9부에서 특별히 붙들 만한 것은 겨자씨가 ‘ 나무’가 된 뒤의 모습입니다. 나무가 커졌다는 사실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들입니다.’ 성장의 목적이 자기 확대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자기를 위해 그늘을 만들지 않습니다. 다른 생명이 그 가지에서 머물고 쉼을 얻습니다. 이것은 영적 성장을 분별하는 매우 아름다운 기준입니다. 내가 정말 성장했다면 누군가가 나 때문에 살아나야 합니다. 누군가가 내 곁에서 정죄보다 위로를 받고, 불안보다 평안을 얻으며, 나 자신에게 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바라보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교회 시대 이긴 ’라는 강사의 강한 표현도 전혀 다른 색깔을 띠게 됩니다. 이긴 사람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자신이 높은 단계에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될수록 자기 씨앗의 작음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 모든 생명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의 질문도 ‘나는 지금 단계인가?’보다 ‘ 안에서 무엇이 커지고 있는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공부할수록 자기 의가 커지는가, 체어리티가 커지는가? 연단을 받을수록 완고함이 커지는가, 겸손이 커지는가? 영적 체험이 많아질수록 자기 특별함이 커지는가, 주님께 대한 의존이 커지는가? 바로 이 질문이 겨자씨 비유를 우리 자신의 거듭남 안으로 가져옵니다.

 

겨자씨 한 알은 참으로 작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인간이 만들어 넣지 않은 생명이 있습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작은 작을 수 있습니다. 한 구절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 한 가지 악을 죄라고 인정하는 것, 한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것, 자기 잘못 하나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진리라면, 그리고 사람이 자유롭게 그 진리를 받아 삶으로 옮긴다면 주님께서는 그 작은 시작을 사용하여 인간 전체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가 말하는 영적 성장의 가장 깊은 신비는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성도가 있는가’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 심으신 아주 작은 진리 하나를 통하여 얼마나 거듭남을 이루실 있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 10

누룩과 진주, 보화 : 존재가 변화되고, ‘자기 소유를 판다 것은 무엇인가

110부에서는 겨자씨 비유에서 시작된 ‘교회 시대 이긴 ’에 대한 설명이 누룩 비유와 진주·보화 비유로 이어지면서 한층 깊어집니다. 강사는 이 세 비유를 각각 별개의 영적 상태로 보기보다 동일한 사람, 곧 ‘광야를 통과하여 익은 열매가 교회 시대 이긴 ’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주는 비유로 이해합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되는 것은 ‘성장적인 측면’, 누룩이 가루 서 말 전부를 부풀게 하는 것은 ‘행실적·인격적인 측면’, 값진 진주와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하여 자기 소유를 모두 파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측면’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뒤에서 이 세 비유를 다시 한데 모아 ‘ 광야의 과정을 지나서 부풀고 성장하고 온전히 소유하게 ’ 이긴 자들을 서로 보완하여 설명하는 비유라고 명시합니다. 이 강의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려면 이 점을 먼저 붙들어야 합니다. 강사는 서로 다른 세 비유에서 하나의 완성된 영적 인간을 보고 있습니다.

 

먼저 누룩 비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여기서 특별히 ‘전부 부풀게’ 된다는 데 주목합니다. 신앙이 사람의 어느 한 부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동, 인격과 생활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누룩 비유를 ‘인격적인 면에서의 행실적인 성장’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정리합니다. 이것은 앞서 겨자씨 비유에서 다룬 성장의 문제를 더욱 실제적인 삶으로 가져옵니다. 겨자씨 비유가 ‘얼마나 자랐는가’를 보여 준다면 누룩 비유는 ‘ 성장이 사람 전체에 얼마나 스며들었는가’를 묻는 셈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의 어느 한 기능만 종교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이해만 거듭나고 의지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으며, 주일의 예배만 변화하고 평일의 생활은 그대로일 수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이해 안에 들어옵니다. 사람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배우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사랑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거듭남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그것을 따라 살고, 반복되는 시험 가운데 악을 거절하며, 마침내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그의 성품과 행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리는 생명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부 부풀게 되었다’는 강사의 표현은 거듭남의 중요한 한 면을 매우 잘 붙잡고 있습니다.

 

다만 말씀에서 ‘누룩’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를 모두 가질 수 있으므로 무조건 ‘누룩=성화’라는 고정된 상응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경계하셨을 때 누룩은 거짓된 교리와 악한 영향이 퍼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여기에서는 천국을 누룩에 비유하셨으므로 선한 의미입니다. 핵심은 ‘스며들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입니다. 악과 거짓도 사람 안에 들어오면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고,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도 받아들여지면 인간의 전 존재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3장의 누룩은 단순히 ‘행실이 좋아진 사람’을 넘어,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의지와 행동에까지 스며들어 인간 전체가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누룩 비유는 우리에게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 신앙은 어디까지 부풀어 있는가?’입니다. 예배드릴 때에는 신앙인이지만 돈을 다룰 때에는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에는 겸손하지만 자기 의견이 무시되면 견디지 못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주님의 뜻을 구하지만 실제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는 자기 이익만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누룩이 가루 전체에 퍼진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어떤 부분에는 들어갔지만 아직 다른 영역에는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거듭남은 바로 그 남아 있는 영역까지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신앙과 생활, 교리와 인격, 예배와 직업, 기도와 인간관계 사이의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해 온 ‘마음과 행실의 정결’이라는 주제와도 맞닿습니다. 강사는 겨자나무가 된 성도와 누룩처럼 온전히 부푼 성도와 값진 진주를 소유한 성도를 모두 광야를 통과하여 익은 열매가 된 같은 사람의 서로 다른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귀한 통찰이 있습니다. 영적 성숙은 어느 한 방면의 탁월함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 지식만 많거나 기도만 오래 하거나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완성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실제 인격과 행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이 강의가 상당히 가까워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살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결’이나 ‘이긴 ’라는 표현을 받아들일 때에는 여전히 주의가 필요합니다. 인간이 거듭나면서 악이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제거하신다기보다 사람이 그것으로부터 물러나게 하시고 악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깊이 거듭난 사람일수록 ‘나는 이제 죄성이 제거된 정결한 사람이다’라고 자신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안에 있는 proprium이 어떤 것인지를 더 분명히 알고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영적 성장의 결과가 자기 완성에 대한 확신이 되어서는 안 되고 주님께 대한 의존의 심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강사는 진주 비유와 보화 비유로 넘어갑니다. 마태복음 1344절부터 46절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읽으면서, 두 비유는 서로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기뻐하여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장사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자기 소유를 모두 팔아 그것을 산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자기 소유를 판다’는 부분을 매우 강하게 붙듭니다. 진주의 값은 얼마인가를 묻고는 사실상 ‘자기의 소유를 몽땅 파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소유하려면 인간이 붙들고 있던 육적인 소유와 자기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 사경회의 수도적 영성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얻기 위하여 세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자기에게 속한 것을 포기하며, 광야 연단을 통하여 자기 소유가 벗겨지는 과정을 중요하게 보는 것입니다. 강사는 다른 강의 대목에서 욥의 연단과 이 진주 비유를 직접 연결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기 위해 ‘자기의 육적인 모든 소유’를 내려놓게 되는 것이 연단의 특징이라고까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욥이 재물과 자녀를 잃은 일을 이러한 ‘소유를 파는’ 과정의 한 사례처럼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자기부인’은 단순한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실제 삶의 소유와 애착을 내려놓는 매우 현실적인 영적 훈련의 언어로 받아들여져 온 것으로 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자기 소유를 판다’는 말씀은 대단히 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외적인 소유와 내적인 소유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문자 그대로 재산과 가족과 직업을 버리라고 요구하신다고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훨씬 더 근본적으로 내려놓아야 할 ‘자기 소유’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proprium입니다. ‘ 생각이 옳다’, ‘ 뜻대로 되어야 한다’, ‘내가 선을 행했다’, ‘ 지혜로 이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만큼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자신에게 돌리는 모든 것이 그 깊은 층의 ‘ ’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그토록 엄중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proprium 자체에는 선한 것이 없으며, 참된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소유를 팔아 진주를 산다’는 말씀은 단순한 금욕을 넘어 훨씬 더 깊은 자기부인의 말씀으로 열립니다. 돈을 버렸는데 자기 의는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재산을 포기했는데 영적 교만은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적 명예를 버리고 수도생활에 들어갔는데 ‘나는 세상을 버린 사람’이라는 새로운 명예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proprium의 매우 미묘한 성질입니다. 자연적인 소유를 버리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내가 버렸다’는 공로의식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된 자기부인은 소유의 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힘으로 선할 있다’는 자기 소유의 가장 깊은 환상을 내려놓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이 점에서 진주 비유는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더 깊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무엇을 버렸는가?’보다 ‘버린 그것을 누구의 공로로 여기고 있는가?’입니다. 세상의 많은 것을 포기했어도 그 포기를 자기 영적 지위의 근거로 삼는다면 아직 팔리지 않은 가장 값비싼 ‘자기 소유’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연적으로는 가정과 직업과 재산을 가지고 살아도 그것을 자기 욕망을 위한 소유물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의 수단으로 여기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무소유와 내적 자기부인은 반드시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본질적인 것은 외적 형편보다 사랑의 질서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욥의 모든 소유가 거두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처럼 설명하는 부분에는 특별히 세심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일반화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높은 영적 단계로 이끌기 위해 재산이나 자녀를 빼앗으신다’는 매우 위험한 신관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주님은 악이나 비극을 직접 보내어 사람을 성화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끊임없이 선을 향하지만, 자연계와 인간 자유 안에서 허용되는 고난과 상실까지 사용하여 사람을 영원한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재산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을 ‘하나님께서 당신을 높은 단계로 올리기 위해 거두어 가셨다’고 쉽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당사자에게는 영적으로도 목회적으로도 너무 무거운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욥기의 핵심을 자기부인의 관점에서 받는다면, 외적인 것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모든 외적 기반이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을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만 사랑했는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지가 드러나는 시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는 고백의 깊이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모든 비극을 직접 일으키신다는 교리적 진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근거를 외적 소유에서 하나님께로 옮기는 신뢰에 있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욱 깊이 가져가면, 결국 인간은 ‘ 생명도 것이 아니다’라는 데까지 가게 됩니다. 생명 자체가 순간마다 주님에게서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진주와 보화가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낸다는 강사의 강조도 이 지점에서 새롭게 받을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소유물로 만들어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될 수 없고 오직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천사조차 자기에게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생명이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된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더욱 충만하게 받아들이는 상태’라고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사람이 자기 proprium을 붙들수록 그 유입을 왜곡하고, 자기 것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진주를 ‘소유’하는 길은 내 소유를 버리는 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얻는 진주마저 ‘이제 이것은 것이다’라고 붙들 수 없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여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며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천국적 자유의 아름다운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천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지만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자유롭습니다.

 

이것을 앞의 누룩 비유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자기 소유를 판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비워 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운 자리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와야 합니다. 자기애를 버렸는데 사랑이 들어오지 않으면 단순한 자기 억압이 될 수 있고, 세상 욕망을 절제했는데 쓰임의 기쁨이 생기지 않으면 메마른 금욕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자기부인은 ‘’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의 중심을 바꾸는 것입니다. proprium이 중심이던 인간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중심이 되는 인간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주 비유의 중심은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얻기 위해 버리는가?’입니다. 밭을 산 사람은 슬퍼하며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기뻐하여’ 돌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적 자기부인은 궁극적으로 기쁨을 향합니다. 처음에는 악을 버리는 일이 고통스럽습니다. 자기애가 그것을 자기 생명을 잃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면 내가 지는 것 같고, 명예욕을 내려놓으면 내가 작아지는 것 같으며, 자기 뜻을 포기하면 자유를 잃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반대로 알게 됩니다. 자기애를 붙드는 것이 속박이었고, 그것을 버리는 것이 자유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주를 발견한 사람이 모든 것을 팔면서도 기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더 귀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전에 귀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상대적으로 가벼워진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부인의 동기를 분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두려워서 버리는 것과 더 큰 사랑 때문에 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받는다’는 두려움만으로 이루어지는 금욕은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기쁨을 맛보면서 이전의 자기중심적 욕망이 더 이상 가치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질서가 실제로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면서 예전에 소중히 여기던 장난감을 자연스럽게 내려놓듯, 영적 인간도 더 높은 선을 맛보면서 낮은 사랑을 점차 놓게 됩니다. 이것이 강사가 말하는 ‘자기 소유를 판다’는 표현을 거듭남의 언어로 더욱 깊이 이해하는 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세 비유를 함께 놓으면 강사의 체계가 왜 이들을 모두 ‘교회 시대 이긴 ’와 연결하는지도 이해됩니다. 겨자씨는 ‘성장’, 누룩은 ‘ 존재의 변화’, 진주와 보화는 ‘자기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음’을 보여 줍니다. 강사는 이 세 가지를 광야 연단을 통과한 한 사람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세 비유를 반드시 144천이라는 특정 집단과 연결할 필요는 없지만, 거듭남의 서로 다른 면을 보여 주는 연속적인 그림으로 읽는 것은 상당히 풍성합니다. 진리가 씨로 심어지고 자라 나무가 되며, 그 생명이 인간 전체에 누룩처럼 퍼지고, 마침내 사람은 주님과의 결합을 방해하는 proprium을 내려놓으면서 천국적 생명을 더욱 충만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나는 이제 나무가 되었다’, ‘나는 전부 부풀었다’, ‘나는 진주를 소유했다’고 자기 상태를 판정하기 시작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가장 큰 역설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주님에게 가까워질수록 자기 선을 덜 봅니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직 자기 의가 강할수록 자신의 영적 성취를 쉽게 측정하고 등급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시대 이긴 ’라는 강사의 표현을 받아들일 때 가장 중요한 안전장치는 ‘이긴 자신은 누구의 힘으로 이겼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자기 힘과 자기 연단과 자기 성취로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가장 깊은 싸움이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수도적 연단의 목표도 매우 분명해집니다. 수도생활의 목표는 고난을 많이 견딜 수 있는 강한 인간을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많이 버린 사람, 더 오래 금식한 사람, 더 많이 기도한 사람, 더 어려운 환경을 견딘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도 궁극적 목적이 아닙니다. 그 모든 훈련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 결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가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강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더 오래 참게 되고, 자기 잘못을 더 빨리 인정하게 되며, 자신의 공로를 덜 주장하고, 맡겨진 쓰임을 더 기쁘게 행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외적인 광야는 통과했어도 내적인 광야는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시흥영성수련원처럼 오랫동안 실제 수도공동체와 연단의 전통을 이어 온 곳을 바라볼 때 소중한 분별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외부 사람이 그들의 내적 상태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수도적 전통 그 자체가 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소유를 줄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소유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자기를 낮추는 외적 모습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그 빈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쓰임의 기쁨이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도적 자기부인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는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강사가 이 세 비유를 계시록의 144천과 연결하는 부분에서는 앞서 9부에서 살펴본 구별을 그대로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겨자씨·누룩·진주·보화가 모두 144천이라는 ‘교회 시대 이긴 ’의 성장·행실·생명적 측면을 설명합니다. 실제 강의 서두에서도 겨자씨 비유는 144천의 성장적 측면, 누룩 비유는 행실적 측면, 진주·보화 비유는 생명적 측면이라고 명시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144,000은 자연적 인원수로 제한된 영적 엘리트 집단이라기보다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모든 것과 그 충만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비유가 가리키는 거듭남의 충만함을 특정한 144,000명에게만 해당되는 특별 코스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각자의 자유와 받아들임에 따라 가능한 가장 충만한 천국적 상태로 이끌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목회적으로도 중요합니다. ‘나는 14 4 안에 들었는가?’, ‘나는 어느 연단 단계인가?’, ‘나는 생명과를 먹는 단계인가?’라는 질문에 신앙의 중심이 쏠리면 사람은 자꾸 자기 영적 위치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중심 질문은 ‘나는 지금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어떤 악을 거절해야 하는가?’, ‘오늘 내가 행해야 선과 쓰임은 무엇인가?’, ‘내가 알고 있는 진리를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전자는 자기 상태를 측정하게 하지만 후자는 주님을 바라보고 실제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110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는 성장, 누룩이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는 인격과 행실의 변화, 값진 진주와 보화를 얻기 위하여 자기 소유를 모두 파는 자기부인을 모두 광야 연단을 통과한 ‘교회 시대 이긴 ’, 곧 144천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읽는 강사의 해석은 신앙이 지식이나 체험에 머물지 않고 인간 전체의 변화와 철저한 자기부인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강력한 요청을 담고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진리가 이해에서 의지로 내려가 인간의 모든 생활을 새롭게 하고, 시험 가운데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거절하며, 마침내 인간이 자기 지혜와 자기 공로와 자기 뜻이라는 proprium의 소유권을 내려놓음으로써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고 충만하게 받아들이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10부에서 가장 깊이 붙들 만한 것은 어쩌면 ‘자기 소유를 팔았다’는 말보다 그 앞에 있는 ‘기뻐하여’라는 한마디일 것입니다. 자기부인을 고통과 희생만으로 이해하면 신앙은 점점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밭의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팔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자기부인의 비밀입니다. 세상을 미워해서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너무 귀하여 세상이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재물을 악하게 여겨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물보다 더 귀한 선을 발견하고, 명예를 무조건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과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생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거듭남은 ‘나는 무엇을 얼마나 버렸는가?’를 세는 과정이 아니라 ‘무엇이 내게 가장 귀한 것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는 과정입니다. 주님이 정말 가장 귀해지면 많은 것은 억지로 떼어 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제자리로 내려갑니다. 재산은 쓰임의 도구가 되고, 지식은 이웃을 섬기는 수단이 되며, 직분은 명예가 아니라 책임이 되고, 신앙 체험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주님께 감사할 이유가 됩니다. 심지어 자기의 영적 성장마저 자기 소유로 붙들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누룩도 ‘전부’ 부풀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주일의 한 시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화가 날 때의 선택에도,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행동에도,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들어오십니다. 신앙이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의 질서가 되어 갑니다. 이것이 누룩의 변화이고, 겨자씨의 성장이며, 진주를 얻기 위해 자기 소유를 파는 자기부인이 서로 만나는 지점입니다.

 

결국 ‘이긴 ’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내가 이겼다’는 의식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셨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내 힘으로 광야를 통과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붙드셨고, 내 힘으로 악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싸우실 수 있도록 내가 악을 거절했으며,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버림조차 자랑이 될 수 없고 연단조차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남는 것은 감사와 쓰임입니다.

 

그렇게 보면 겨자씨와 누룩과 진주와 보화가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모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진리 하나가 심어집니다. 그 진리가 시험을 지나며 자라 나무가 됩니다. 그 생명이 사람의 전 존재에 누룩처럼 스며듭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 ’이라고 움켜쥐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하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버려서 하나님을 얻었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를 찾아오시고 씨를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고 변화시키신 분이 주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자기 소유를 판다’는 말씀의 가장 깊은 자리일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내가 했다’는 소유권마저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누리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주님의 것임을 기쁘게 인정하는 것, 그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110부의 가장 깊은 결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 11

부자 청년과모든 소유를 팔라’ : 영생, 생명, 온전, 보화, 그리고 주님과의 결합

111부에서는 앞서 진주와 보화 비유에서 다루었던 ‘자기 소유를 판다’는 주제가 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년 이야기와 연결되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됩니다. 강사는 부자 청년이 주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자 주님께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하신 점에 주목합니다. 이어 청년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지켰다고 하자 주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여기에서 ‘영생’, ‘생명’, ‘온전’, ‘보화’를 서로 연결되는 표현으로 보고, 진주와 보화 비유에서 말한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이 ‘소유’에는 물질적 재산뿐 아니라 인간 안의 ‘죄성과 정욕’까지 포함되며, 그것을 벗어 가는 과정이 곧 ‘광야 연단 과정’이라고 풀이합니다. 강사의 종합은 매우 선명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길, 모든 소유를 파는 길,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을 통과하는 길, 광야 연단을 받는 길은 결국 한 방향, 곧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온전’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 사경회의 영적 성장론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강사가 말하는 ‘구원’과 ‘완성’ 사이의 관계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계명을 알고 있으며 어려서부터 그것을 지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아직 ‘ 가지 부족한 ’이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강사는 이것을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하게 사는 수준과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소유하는 수준 사이의 차이로 읽습니다. 외적인 계명 준수에서 더 깊은 자기 포기와 주님을 따르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의 문제의식은 매우 귀합니다. 신앙은 단지 ‘나는 계명을 지켰다’고 점검하는 외적 도덕성으로 끝나지 않으며, 인간의 가장 깊은 사랑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부자 청년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깊어집니다. 계명 준수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에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계명을 외적으로 지켰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내적 사랑까지 자동적으로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살인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 있고, 도둑질하지 않았지만 탐욕을 사랑할 수 있으며, 간음하지 않았지만 음란한 욕망을 자기 생명의 즐거움으로 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부모를 공경하고 종교생활을 성실하게 했어도 자기 재산과 명예와 자기 의를 주님보다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단순히 ‘계명을 열심히 지켜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의 마음이 실제로 무엇에 붙들려 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는 사실은 그의 가장 깊은 사랑의 질서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강사도 바로 이 점을 붙들어, 청년이 소유가 많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소유’의 속뜻이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소유를 물질적 재산에만 한정하지 않고 ‘죄성과 정욕’까지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더욱 깊게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버리기 어려운 소유는 반드시 돈이나 집이나 토지가 아닐 수 있습니다. ‘ 생각’, ‘ 판단’, ‘ 공로’, ‘ 신앙’, ‘내가 옳다는 확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와 같은 것들이 훨씬 더 깊은 소유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proprium의 영역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생각과 선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종교적인 사람은 자연적인 재물을 상당히 절제하고도 ‘나는 남들보다 거룩하다’, ‘나는 이만큼 연단받았다’, ‘나는 깊은 진리를 안다’는 영적 소유를 붙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소유를 팔라’는 말씀을 단순히 물질적 무소유의 명령으로만 읽으면 가장 깊은 소유를 그대로 둔 채 외적인 것만 내려놓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자기부인은 인간의 개성과 인격을 파괴하거나 모든 자연적 소유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기에게서 나온 자기 ’으로 붙드는 질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고,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으며, 목회적 권위를 가지고 있어도 사람을 자기에게 묶지 않고 주님께 이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 재산도 없고 매우 검소하게 살면서도 자기 뜻과 자기 의와 자기 영적 우월감을 강하게 소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소유를 판다’는 말씀의 가장 깊은 층에서는 ‘이것은 것이다’라고 붙드는 proprium의 소유권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영생’, ‘생명’, ‘온전’, ‘보화’를 서로 연결하여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하나의 중심으로 모으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네 표현이 완전히 동일한 동의어라기보다 서로 깊이 연결된 영적 질서의 서로 다른 면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밀하겠습니다. ‘생명’의 원천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형체입니다. ‘영생’은 그 주님의 생명을 천국적 사랑과 진리의 질서 안에서 영원히 받아들이며 사는 상태입니다. ‘온전’은 인간이 무한하신 주님처럼 절대적으로 완전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질서 안에서 선과 진리가 조화를 이루고 사랑과 삶이 하나가 되어 가는 상태입니다. ‘보화’는 그보다 귀한 것이 없을 만큼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인간의 가장 높은 가치가 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네 표현은 모두 주님과의 결합을 향하지만 각각 생명의 근원, 영원한 상태, 질서의 충만함, 가치의 중심이라는 서로 다른 뉘앙스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온전하고자 할진대’라는 주님의 말씀은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완덕’, ‘이긴 ’, ‘익은 열매’와 연결되면서 상당히 완성된 영적 단계의 언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 인간이 지상에서 어느 순간 절대적 무결점 상태에 도달하여 더 이상 거듭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한한 피조물은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영원히 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천사들도 영원히 완전해져 갑니다. 그러므로 ‘온전’은 ‘나는 이제 완성되었다’고 자기 상태에 졸업장을 붙이는 의미라기보다, 그 단계에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선과 진리의 질서가 사람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깊은 영적 상태에 들어갈수록 사람은 자신을 완전하다고 느끼기보다 주님만이 완전하시며 자기 안의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압니다.

 

여기서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진주 비유 사이에는 매우 아름다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소유를 다 팔고 기뻐하며 진주를 얻지만, 부자 청년은 자기 소유를 팔라는 말씀 앞에서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둘 다 ‘모든 소유’의 문제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는 더 귀한 것을 발견한 기쁨이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보다 컸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이 주님을 따르는 기쁨보다 컸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영적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단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경제적 교훈으로만 읽기보다 ‘내가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은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것을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합니다. 돈을 가장 사랑하면 시간을 희생하고, 명예를 가장 사랑하면 관계를 희생할 수 있으며,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가장 사랑하게 되면 자기애와 거짓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사가 ‘광야 연단 과정 자체가 계명을 지키는 과정’이며, 부자 청년이 가진 물질적 소유뿐 아니라 ‘정욕과 죄성’까지 모두 팔아야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귀한 강조와 동시에 신중한 보완을 함께 필요로 합니다. 귀한 점은 계명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적 욕망과 싸우는 과정이 없이는 참된 영적 성장이 어렵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죄성을 팔아 없애야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이 인간 자신의 수고로 죄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한 뒤에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신다는 식으로 들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악의 뿌리를 뽑아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그 악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사람의 역할은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고 합리화하지 않고, 주님의 계명에 반하는 죄로 인정하여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거절하는 것입니다. 실제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모든 소유를 판다’는 것도 한 번의 영웅적 결단으로 끝나는 사건이라기보다 거듭남 전체를 통하여 반복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명예욕 하나가 드러나면 그것을 내려놓고, 내일 자기 의가 드러나면 그것을 내려놓으며, 어느 날에는 돈에 대한 애착이, 또 어느 날에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처음부터 모두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시험과 삶의 여러 상태를 통하여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인간이 자기 소유의 목록을 하나씩 발견하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에는 자유롭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구나’, ‘나는 사람을 용서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인정받고 싶었구나’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거절할 때 ‘판매’가 이루어집니다. 물론 그 대가로 주님의 생명을 인간이 구매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은혜는 사고파는 상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붙들고 있던 자기 것을 놓음으로써 이미 끊임없이 주어지고 있던 주님의 생명을 더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진주 비유의 ‘산다’는 표현도 더욱 섬세하게 이해하도록 합니다. 자연적 상거래에서는 값을 지불하면 물건의 소유권이 내게 넘어옵니다. 그러나 천국적 진리는 그렇게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소유를 버린 대가로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재산처럼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은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기 것처럼 느끼고 자유롭게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것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주의 참된 소유는 역설적으로 ‘ 것이 아니다’라는 인식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천국적 자유입니다. 자기 것으로 움켜쥐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충만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어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기도, 곧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말씀도 이 ‘생명’과 결합의 문제 안에서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앞서 바로잡았던 ‘신인합일’이라는 표현이 다시 중요한 자리를 갖습니다. 주님과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말씀은 인간이 신적 본질로 변하여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는 ‘결합’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인간은 생명의 수용체이며, 주님은 선과 진리 자체이시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피조물입니다. 두 존재의 구별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의 뜻을 자기 뜻보다 사랑하고, 주님의 진리를 자기 생각보다 높이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삶으로 행할수록 사랑과 목적과 삶의 질서에서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됩니다.

 

이것은 결혼의 상응을 생각하면 조금 이해하기 쉽습니다. 참된 부부는 서로 다른 두 사람으로 남으면서도 사랑과 목적이 깊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도 사랑으로 결합합니다. 물론 주님과 인간의 관계는 피조물 사이의 결혼보다 무한히 높은 것이지만, ‘구별을 보존한 이루어지는 결합’이라는 점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인합일’을 사용할 때에도 ‘합일’이라는 말 때문에 인간과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융합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의미를 함께 밝혀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결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이 단지 주님에 관한 진리를 많이 안다고 주님과 결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는 진리를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계명을 지키는 ’을 매우 중요하게 붙드는 것은 좋은 출발입니다. 다만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형식적인 규칙 준수만이 아니라, 계명의 내적 목적을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을 넘어 미움을 거절하고, 도둑질하지 않는 것을 넘어 이웃의 선을 원하며, 간음하지 않는 것을 넘어 결혼 사랑의 거룩함을 사랑하고, 거짓 증언하지 않는 것을 넘어 진실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외적 계명이 내적 사랑으로 들어갈 때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부자 청년의 가장 큰 문제는 재산의 양 자체가 아닙니다. 그의 마음이 재산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정확히 그 결합을 드러내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방식의 명령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이 가장 큰 소유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명예가,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학문과 지식이, 종교인에게는 자기 교리와 자기 경건이 가장 큰 소유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가장 깊이 붙들고 있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시험은 모든 사람에게 외적으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부자 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팔라고 하셨으므로 모든 성도는 문자적으로 모든 재산을 팔아야 한다’는 식으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말씀의 깊은 목적은 가장 사랑하는 것이 주님보다 위에 있는지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수도적 무소유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재산을 실제로 줄이거나 공동생활 가운데 개인 소유를 제한하는 것은 인간의 애착을 드러내고 절제하는 데 유익한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훈련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이 소유를 버린 뒤에도 ‘내가 버린 ’을 소유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 사람과 다르다’, ‘나는 재산을 버렸다’, ‘나는 수도적 삶을 산다’는 의식이 새로운 보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proprium은 놀라울 만큼 종교적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까지 팔아야 할 것은 ‘내가 팔았다’는 공로의식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소유를 팔아야 한다. 하나라도 팔면 진주를 없다’고 강하게 강조한 표현은 내적으로 읽을 때 오히려 더욱 엄중해집니다. 외적 재산 몇 가지를 내려놓는 수준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을 방해하는 모든 자기 소유권을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워 무(無)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 고유한 개성과 쓰임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질수록 주님께서 주신 참된 개성이 더 자유롭게 살아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서로 똑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상에서보다 훨씬 분명한 고유성을 가지면서도 그 고유성이 자기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쓰임을 섬깁니다.

 

따라서 자기부인의 최종 목적은 ‘나를 없애는 ’이 아니라 ‘거짓된 나의 중심을 내려놓는 ’입니다. ‘내가 생명의 원천이다’, ‘ 선은 것이다’, ‘ 판단이 최종 기준이다’, ‘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거짓된 중심이 내려옵니다. 그 자리에 주님이 중심이 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오히려 참된 자신을 얻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피조물로서의 참된 질서 안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좁은 ’과 ‘협착한 ’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강사는 부자 청년과 진주 비유를 연결하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을 통과해야 비로소 보화와 생명을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좁은 길이 좁은 이유는 주님께서 일부러 인간을 고생시키기 위해 길을 좁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은 자기 욕망을 제한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라’,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진리는 proprium에게 매우 좁게 느껴집니다. 자기 욕망에는 넓은 길이 편합니다. 원하는 대로 화내고, 원하는 대로 소유하고, 원하는 대로 인정받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진리를 해석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넓음은 실제 자유가 아니라 욕망의 지배입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좁아 보이는 주님의 길이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참된 자유의 길이 됩니다. 처음에는 용서하는 것이 억울하지만 나중에는 미움을 품고 사는 것이 더 큰 속박임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정직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이 답답하지만 나중에는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훨씬 고통스러운 속박임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자기 뜻을 내려놓는 것이 죽음처럼 느껴지지만 나중에는 자기 뜻에 갇혀 사는 것이 얼마나 좁은 삶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좁은 길의 끝에는 더 큰 생명과 자유가 있습니다.

 

111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부자 청년의 ‘영생’, 주님의 ‘생명’, ‘온전하고자 할진대’, ‘하늘의 보화’, 그리고 진주 비유의 ‘자기 소유를 팔아 얻는 값진 진주’를 모두 하나님의 생명과 광야 연단의 완성으로 연결하는 강사의 해석은 신앙이 외적인 계명 준수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 가장 깊이 붙들고 있는 소유와 욕망까지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는 강력한 자기부인의 요청을 담고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모든 소유’를 단순한 재산이나 외적인 생활조건보다 더 깊이 인간이 자기 생각과 자기 뜻과 자기 선과 자기 공로를 자기 것으로 붙드는 proprium으로 읽고, 그것을 시험 가운데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함으로써 이미 끊임없이 유입되고 있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그렇게 주님과 존재론적으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의지와 삶의 질서에서 점점 더 깊이 결합되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11부에서 특별히 붙들 만한 것은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주님을 싫어해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원했고 계명도 지켰으며 주님께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사랑을 건드리는 순간 멈추었습니다. 이 장면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에게도 매우 정직한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주님께서 손대지 않기를 바라는 영역 하나를 남겨 둘 수 있습니다. ‘이것만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이것만은 것입니다.’ 재물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자기 계획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으며, 오랫동안 붙들어 온 신학적 확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주 비유와 부자 청년의 차이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느냐보다 ‘ 귀한 것을 보았는가?’에 있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여’ 팔았고, 부자 청년은 ‘근심하여’ 돌아갔습니다. 주님이 정말 더 귀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자기부인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억지로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더 귀한 것을 위해 자발적으로 놓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영적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세상을 미워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이 제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든 소유를 판다’는 말씀의 마지막 단계는 재산도, 정욕도, 자기 의도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장 마지막에는 ‘내가 모든 것을 버려서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마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생각까지 내 소유로 붙들면 자기부인이 다시 자기 공로가 됩니다. 그래서 참된 이긴 자는 마지막에 ‘나는 모든 것을 팔았습니다’라고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손에서 하나씩 놓게 하셨고, 제가 놓았다고 생각한 힘마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신인합일’이라는 이 사경회의 언어도 가장 안전한 의미를 얻습니다. 인간이 신적인 존재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 ’이 점점 내려가고 주님의 생명이 더욱 자유롭게 그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기뻐하는 새 의지로 거듭나고, 나의 이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로 밝아지며, 나의 개성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고유한 쓰임을 더욱 온전히 드러내게 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는 고백은 인간의 인격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자기에게서 주님께로 옮겨 간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재산을 버렸는가, 버렸는가’를 묻는 이야기보다 훨씬 깊습니다. ‘내가 주님보다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는 누구도 쉽게 ‘나는 팔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은 평생의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를 보여 주시면 하나를 내려놓고, 또 더 깊은 하나를 보여 주시면 다시 내려놓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점점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부유해집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했던 자리가 주님의 선과 진리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라는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진주와 보화는 인간이 소유한 물건이 아니라 주님 자신과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 됩니다.



1 12

가라지 비유 : ‘악한 자의 아들들’, 불법, 그리고 선과 악이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는 이유

112부에서는 마태복음 13장의 다섯 번째 비유인 ‘가라지 비유’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앞의 씨 뿌리는 비유가 서론적인 말씀이고,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 비유가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을 성장·행실·생명의 여러 측면에서 설명했다면, 이제 가라지 비유는 그 정반대편을 보여 준다고 정리합니다. 곧 앞의 비유들이 ‘빛으로 익은 가장 훌륭한 열매’를 보여 주었다면, 가라지는 ‘어둠으로 익어 가장 악한 마귀의 종이 사람들’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24절부터 30절의 좋은 씨와 가라지를 함께 자라게 두었다가 추수 때에 분리하는 말씀을 읽고, 이어 주님께서 친히 해설하신 36절 이하를 토대로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 ‘추수 때는 세상 ’, ‘추수꾼은 천사들’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부분에서 강사의 관심은 단순히 ‘나쁜 사람도 세상에 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교회와 세상 안에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고 자라다가 마지막에는 그 실제 정체가 드러나 분리된다는 종말론적 질서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가라지 비유는 대단히 깊은 말씀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종들에게 가라지를 곧바로 뽑지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종들은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묻지만 주인은 ‘가만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강사도 실제 농사의 예를 들어 벼와 피가 어린 시절에는 구별하기 쉽지 않지만 자라고 열매가 맺힐 무렵에는 확연히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반면 피는 뻣뻣하게 서 있고, 추수 때가 되면 열매의 차이도 드러나므로 그때 비로소 골라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는 매우 의미 있는 통찰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도 처음부터 외관만으로 쉽게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열매를 맺는지가 드러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 이해와도 매우 깊이 맞닿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안의 악을 강제로 즉시 뽑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한다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한동안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가 있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면서도 여전히 자기애를 사랑할 수 있고, 선을 행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으며, 교회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밑에 자기 집단의 명예나 자기 지위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인간 자신이 자유 가운데 볼 수 있도록 허용하시고, 진리의 빛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점차 분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가만두라’는 말씀은 악을 괜찮다고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악의 본질이 충분히 드러나도록 허용하시는 섭리의 깊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 점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현재 상태를 보고 쉽게 ‘알곡’이나 ‘가라지’라고 판정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확신이 강할수록 ‘ 사람은 바른 진리를 가졌고, 사람은 틀렸다’, ‘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다’라고 빠르게 나누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비유에는 놀랍게도 인간 종들이 성급하게 뽑는 일을 금하시는 장면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최종 심판권이 없다는 매우 중요한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외적 행위와 말은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 내적 동기, 그리고 주님께서 그 안에 보존하고 계신 리메인스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행위는 분명 악하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 행위를 한 사람의 영원한 상태까지 우리가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강사는 가라지를 단순히 연약한 신자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신자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강한 표현으로 ‘악한 자의 아들들’, ‘마귀의 ’, ‘가장 어둠으로 익은 영혼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뒤로 가면서 이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 다른 성도를 넘어지게 하고 미혹하는 자들, 배교자들, 거짓 선지자들과 연결합니다. 특히 마태복음 1341~42절의 ‘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를 읽으며 가라지의 첫 특징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부분에서 강사의 강조는 분명합니다. 가라지는 단순히 영적 수준이 낮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도 그것을 거슬러 악을 행하며, 다른 사람까지 잘못된 길로 이끄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불법’이라는 말을 더욱 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불법은 단지 국가 법률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법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모든 계명은 그 사랑을 보호하기 위한 질서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바르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자기애와 지배욕을 위해 말씀을 사용한다면 영적으로는 불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리적 표현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주님을 향하여 진실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 하며 자기가 아는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안에는 선의 질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라지’를 특정 교파나 특정 집단의 이름과 너무 쉽게 동일시하지 않도록 해 줍니다. 가라지의 가장 깊은 정체는 교단명이 아니라 사랑의 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설명에서는 가라지가 계시록의 ‘666’과도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앞서 강의 서두에서도 144천은 가장 밝은 빛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여 익은 성도들이고, 666은 가장 깊은 어둠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며 마귀의 종으로 살아간 타락한 영혼들의 상징으로 대비됩니다. 그래서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가 144천의 여러 면을 보여 준다면 가라지 비유는 666의 정체를 보여 준다는 것이 강사의 해석입니다. 이 구조는 강의 전체 안에서는 일관되어 있습니다. ‘빛으로 완전히 익은 사람’과 ‘어둠으로 완전히 익은 사람’을 양극에 놓고 마지막 추수에서 그 둘이 분리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666 역시 특정 수의 사람이나 특정 인물의 암호로 한정하기보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수로 읽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일반적으로 영적 질과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666을 ‘누가 바로 사람인가?’라고 외부에서 찾기보다, 신적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자기애와 세상 사랑 아래 종속시켜 왜곡하는 인간의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관점은 오히려 가라지 비유를 더 가까이 가져옵니다. 가라지는 언제나 ‘ 밖의 악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진리를 내가 어떤 사랑에 종속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리를 통해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가, 아니면 진리를 이용해 내 옳음을 증명하고 사람을 지배하며 자기 명예를 높이는가에 따라 같은 진리도 전혀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라지는 처음부터 겉모습이 완전히 다른 식물이 아니라 알곡과 매우 비슷하게 자란다는 강사의 농사 비유가 의미심장합니다. 영적으로도 가장 위험한 거짓은 처음부터 ‘나는 악이다’라는 얼굴로 오는 거짓이 아닙니다. 선처럼 보이고 진리처럼 보일 때 더욱 위험합니다. 자기 의는 ‘진리를 지키는 열심’처럼 보일 수 있고, 지배욕은 ‘영적 권위’처럼 보일 수 있으며, 사람을 멸시하는 마음은 ‘거룩한 분노’로 포장될 수 있습니다. 자기 교회의 성공을 사랑하면서 그것을 ‘주님의 나라 확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욕망을 ‘말씀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열매가 맺히면 차이가 드러납니다. 한쪽에서는 체어리티와 겸손과 쓰임이 나오고, 다른 쪽에서는 멸시와 지배와 분열과 자기 높임이 나옵니다.

 

바로 이 ‘열매’가 강사의 설명에서도 중요합니다. 벼와 피를 어릴 때는 구별하기 어렵지만 추수 때에는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고 피는 뻣뻣이 서 있으므로 확실히 구별된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을 곧바로 ‘겸손해 보이는 사람은 알곡, 당당해 보이는 사람은 가라지’라는 외적 성격 판별법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참된 선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반대로 자기애가 깊어질수록 자기 힘, 자기 지식, 자기 의, 자기 공로를 높이 세우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매가 익을수록 겸손이 깊어지는 것은 매우 천국적인 특징입니다.

 

이것은 앞서 144천과 ‘이긴 ’를 설명할 때 계속 보완했던 부분과도 연결됩니다. 만일 ‘나는 이긴 자다’, ‘나는 높은 영적 단계에 있다’, ‘나는 밝은 가운데 있고 저들은 어둠에 있다’는 의식이 사람 안에서 자기 우월감으로 굳어진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기준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참된 빛은 자기를 높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빛이 강해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자기 안의 proprium을 더 잘 보고, 자신에게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더 깊이 인정합니다. 따라서 ‘가장 밝은 ’과 ‘가장 깊은 겸손’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하게 볼 것은 가라지를 누가 심었느냐는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때에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하십니다. 강사는 이것을 마귀가 악의 씨를 심는 것으로 읽습니다. 이 기본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들어오는 악과 거짓의 유입은 지옥에서 오고, 선과 진리의 유입은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해 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단순한 수동적 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악한 생각이나 욕망이 들어오는 것 자체가 곧 그 사람의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여 동의하고 자기 것으로 삼을 수도 있고, 말씀의 진리에 어긋난다고 인정하여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가 가라지를 심었다’는 말을 듣고 ‘ 안의 악은 전부 마귀가 넣은 것이니 나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악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고 ‘나는 이미 가라지가 되었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적 책임은 유입 자체보다 수용과 동의에 관계합니다. 분노가 올라오는 것과 분노를 사랑하여 복수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음란한 생각이 지나가는 것과 그것을 붙들어 즐기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거짓된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그것을 자기 유익 때문에 진리로 확정하는 것도 다릅니다. 거듭남의 싸움은 바로 이 수용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 원수가 가라지를 심었다는 표현도 영적으로 매우 인상적입니다. 잠은 무의식 상태를 뜻하기도 하지만, 말씀의 상응에서는 영적 경계가 느슨해지고 진리에 대한 주의가 약해진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자기 상태를 살피지 않고 ‘나는 이제 괜찮다’고 안심할 때, 또는 진리를 단지 습관적으로 알고 실제 삶에는 적용하지 않을 때 거짓과 악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반복해서 ‘깨어 있으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깨어 있음은 종말 날짜를 계산하며 긴장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안의 사랑과 생각의 움직임을 말씀 앞에서 살피는 상태입니다.

 

강사가 가라지를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과 연결하는 부분도 매우 중요합니다. 악은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나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거짓을 가르치면 다른 사람의 영적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가르침의 책임은 매우 큽니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주님께 이끌어야 하는데, 그것을 이용해 사람을 자기에게 묶거나 공포로 통제하거나 자기 권위를 절대화한다면 진리의 외형으로 거짓의 쓰임을 행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외적 직분만으로 그 가르침의 영적 질이 보증되지는 않습니다. 그 가르침이 어떤 사랑에서 나오며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강사들을 포함하여 어느 신앙 공동체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일 것입니다. 강의 내용의 일부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 다르다고 해서 그 강사의 내적 상태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오랜 수도생활과 많은 성경 지식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해석이 자동적으로 신적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과 가르침을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가르침은 말씀의 빛 아래 검토할 수 있지만 사람의 영원한 내면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가라지를 지금 뽑지 말라’는 비유에서 매우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허용의 섭리’가 다시 깊게 들어옵니다. 왜 주님께서는 악한 가르침과 거짓된 종교가 존재하도록 허용하시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왜 처음부터 모두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답의 중심은 자유입니다. 진리가 진리로 받아들여지려면 사람에게 진리를 거절할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선을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악을 선택할 가능성도 허용되어야 합니다. 강제로 선밖에 선택할 수 없는 존재는 선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인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악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그것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허용하시며, 허용된 악조차 궁극적으로 선을 위해 굽혀 사용하십니다. 거짓을 만나면서 진리가 더 분명해질 수도 있고, 시험을 통해 자기 안의 숨은 악이 드러나 거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악도 결국 좋은 것이니 내버려 두자’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가라지는 결국 거두어집니다. 악은 영원히 선과 하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다만 분리의 때와 방식이 주님의 지혜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맡겨진 범위에서는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거짓을 분별하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제어해야 합니다. 교회도 거짓 가르침과 학대와 부정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최종적으로 ‘가라지’라고 판결하여 정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행위와 교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영원한 상태에 대한 심판은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11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앞의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 비유가 빛으로 익어 ‘교회 시대 이긴 ’, 곧 144천이 된 성도들을 보여 준다면 가라지 비유는 그 반대로 어둠 가운데 익어 불법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며 마귀의 종이 된 666적 영혼의 정체를 보여 준다고 보는 강사의 해석은 선과 악이 인간의 자유로운 삶 속에서 점차 그 열매를 드러내다가 마지막 추수에서 분리된다는 강한 도덕적·종말론적 경고를 담고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특정 사람이나 집단을 미리 ‘가라지’로 판정하는 도식으로 사용하기보다, 선과 악·진리와 거짓이 인간과 교회 안에서 한동안 함께 존재하도록 허용되는 것은 자유와 거듭남을 위한 신적 섭리 때문이며, 시험과 삶을 통하여 각 사랑의 실제 열매가 드러나고, 마지막에는 신적 진리의 빛 앞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속한 것과 자기애와 거짓에 속한 것이 스스로 분리되는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12부에서는 무엇보다 ‘가만두라’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붙들 만합니다. 이것은 무관심의 말씀이 아닙니다. 악을 보고도 방관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인간의 성급한 심판보다 주님의 섭리가 훨씬 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보이는 한 장면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시작과 끝, 감추어진 동기와 자유, 리메인스와 앞으로 가능한 모든 상태를 함께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 사람은 틀렸다. 뽑아 버리자’고 할 때 주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곡식의 뿌리까지 보고 계실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자기 자신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내 안에 가라지 같은 생각과 욕망이 발견된다고 해서 곧 ‘나는 가라지다’라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발견한 뒤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자기 것으로 사랑하고 변호하면 그것은 점점 뿌리를 깊게 내리지만, ‘이것은 주님에게서 것이 아니다’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한다면 그것이 드러난 것 자체가 오히려 거듭남의 기회가 됩니다. 밭에 가라지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은 농사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분별할 수는 있지만 영혼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은 거짓이라고 말해야 하고 불법은 불법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 사람은 가라지다’라고 최종 판정을 내리는 순간 우리는 주님께 속한 추수꾼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려 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최종적인 분리는 종들이 아니라 ‘추수 ’에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일은 먼저 자기 밭을 돌보고, 주님께서 주신 씨가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한 한 진리와 선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가라지 비유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무서운 종말 비유가 아니라 오히려 겸손을 배우게 하는 말씀으로 바뀝니다. 알곡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강사의 농사 비유처럼, 참으로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가 알곡이라고 큰소리치기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며 더욱 낮아집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아직 발견되는 가라지를 보며 다른 사람의 연약함도 오래 참을 수 있게 됩니다. 어쩌면 바로 그 겸손과 체어리티가 ‘나는 알곡이다’라는 자기 확신보다 훨씬 더 분명한 알곡의 열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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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주여 불법 : 가라지는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자라는가

113부에서는 가라지의 정체를 한층 더 깊이 파고듭니다. 12부에서 강사는 주님께서 가라지를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 하셨고, 특히 그들을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하신 데 주목했습니다. 이제 강사는 그 가운데 ‘불법을 행하는 ’라는 표현을 붙들고 마태복음 721절부터 23절로 이동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그리고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입니다. 강사가 이 본문을 가라지 비유와 연결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가라지는 반드시 교회 밖에서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심지어 종교적 능력과 활동까지 보이면서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앞서 가라지를 다른 성도들을 미혹하여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며 명예욕·교만·정욕에 지배되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한 뒤 곧바로 마태복음 7장의 이 말씀을 연결합니다.

 

이 연결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종교의 외적 형태와 사람의 실제 내적 생명을 엄격하게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입으로 고백하고, 성경을 알고, 예배하고, 기도하며,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이 천국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입니다. 신앙은 입술의 고백이나 지적 동의만으로 살아 있는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진리가 의지 안에서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실제 생활로 나타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여 주여’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 사이의 구별은 바로 신앙과 삶,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의 결합 문제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마태복음 7장의 사람들이 주님을 전혀 모르는 세속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외적으로만 보면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종교적 활동 목록을 인정의 근거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 대목 때문에 가라지 비유는 ‘교회 사람 세상 사람’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을 수 있으며, 더 깊이 들어가면 한 사람의 종교생활 안에도 주님에게서 온 것과 proprium에서 나온 것이 오랫동안 뒤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엄중한 말씀입니다. 사람은 종교적 활동을 하면서도 그 활동의 중심에 자기애를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하면서 사람의 구원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을 사랑할 수도 있고, 봉사하면서 쓰임 자체보다 칭찬받는 것을 더 기뻐할 수도 있으며, 진리를 가르치면서 진리 자체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악을 책망하면서도 상대방의 회복보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데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외적 행위만 보면 모두 종교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움직이는 지배적 사랑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행위의 영적 질은 전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때문에 행위만 떼어 놓고 선악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행위의 생명은 그 안에 있는 의도와 사랑입니다. 같은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더라도 한 사람은 이웃의 필요 때문에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사람들에게 선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줄 수 있습니다. 외적 행위는 같아도 내적 생명은 다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적 동기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완전하게 아십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의 빛 아래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했는가?’뿐 아니라 ‘나는 이것을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가라지 비유가 더욱 무서워지는 동시에 더욱 유익해집니다. 가라지는 처음부터 알곡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강사가 벼와 피의 예를 들어 설명했듯이 초기에는 매우 비슷해서 쉽게 구별되지 않다가 열매가 익을 때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애는 처음부터 ‘나는 자기애다’라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라는 매우 종교적인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열매가 나타나면 그 사랑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참으로 주님에게서 온 열심이라면 체어리티와 겸손과 인내와 쓰임을 낳지만, 자기애에서 나온 열심이라면 결국 경쟁과 지배와 멸시와 분열을 낳습니다.

 

그래서 ‘불법’의 가장 깊은 의미를 단순한 규칙 위반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주님의 법 전체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계명에 율법과 선지자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가장 깊은 불법은 사랑의 질서를 뒤집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의 선보다 자기 유익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종교적 언어로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무법보다 훨씬 알아보기 어려운 불법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여 주여’라는 고백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의 차이는 말과 행동의 단순한 대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이해의 차원과 관계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그 진리가 의지와 사랑 안으로 들어가 실제 생명이 되는 차원과 관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해야 합니다. 진리가 선과 분리되어 머리에만 있을 때 사람은 많은 것을 알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진리가 그의 생명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진리가 선과 결합하면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을 행하게 되고, 점차 그 행함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강의가 계속 강조해 온 ‘행실’과 ‘연단’의 중요성을 긍정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교리를 알고 구원을 고백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야 한다는 강조입니다. 씨가 좋은 밭에 떨어졌다면 열매를 맺어야 하고, 누룩이 들어갔다면 가루 전체가 부풀어야 하며, 진주를 발견했다면 자기 소유를 내려놓는 실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라지 비유와 마태복음 7장의 연결은 앞의 여러 비유를 거꾸로 비추어 줍니다.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주의가 하나 필요합니다. ‘불법을 행하는 ’를 발견하겠다고 다른 사람의 삶을 끊임없이 검사하기 시작하면 가라지 비유의 방향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먼저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합니다. ‘ 목사는 불법을 행하는 자인가?’, ‘ 교단은 가라지인가?’, ‘ 사람은 666 속했는가?’를 찾기 시작하면 말씀의 빛이 밖으로만 향합니다. 그러나 ‘내가 주여 주여 하면서 실제로는 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 종교적 열심 안에 자기애와 명예욕이 숨어 있지는 않은가?’, ‘내가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진리를 가진 나를 사랑하는가?’라고 물으면 비로소 말씀이 내 속 사람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이 차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내리는 판결이 아니라 신적 진리가 각 사람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영계에서는 지상에서 사용하던 외적인 가면을 영원히 유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점차 밖으로 드러나고,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로 스스로 향하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외부에서 선고받아 보내지는 장소라기보다 각 사람이 지상에서 자기 생명으로 만든 지배적 사랑이 드러나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와 결합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수’는 주님께서 임의로 사람을 알곡과 가라지로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안에서 이미 형성된 사랑의 질이 신적 진리의 빛 가운데 완전히 드러나는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불에 던진다’는 말씀도 하나님께서 분노하여 사람을 문자적인 불 속에 집어넣으시는 장면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은 사랑을 나타내며,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 사랑과 천국적 사랑을,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욕망을 나타냅니다. 지옥의 불은 하나님께서 밖에서 가하시는 물리적 형벌의 불이라기보다 악한 영들이 자기 생명으로 삼은 악한 사랑의 타오르는 욕망입니다. 지배하고 싶고, 복수하고 싶고,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은 사랑이 그들의 생명 자체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가 불에 던져진다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사람이 평생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한 악한 사랑이 마침내 그의 영원한 상태로 드러나는 엄중한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차이를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너는 마음에 들지 않으니 지옥으로 가라’고 임의적으로 판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끊임없이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끝까지 자기애와 악을 자기 생명으로 선택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선택 자체를 강제로 없애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심판에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함께 있습니다. 주님은 지옥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이 선택한 사랑의 영원한 결과를 허용하십니다.

 

여기서 강사의 ‘적그리스도·거짓 선지자·666 악으로 익은 가라지들’이라는 해석도 다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13장의 적그리스도를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적그리스도’로 보고, 거짓 선지자와 666을 그와 연결하여 ‘악으로 익은 가라지’라고 정리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미래주의적 종말론 체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연결입니다. 앞의 144천이 빛으로 가장 잘 익은 알곡이라면, 666은 어둠으로 가장 깊이 익은 가라지라는 대칭 구조입니다. 강의 처음부터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을 바로 이 144천과 666을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로 제시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대칭 구조의 영적 통찰은 살리면서도 그것을 미래의 특정 두 집단에 고정하지 않습니다. ‘14 4’과 ‘666’은 자연적인 인원수나 특정 정치적 집단의 명단이라기보다 서로 대립하는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선과 진리가 주님 아래 질서를 이루는 교회의 충만한 상태를, 다른 하나는 신적 진리가 자연적 인간과 자기애에 의해 왜곡되고 훼손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계시록의 전쟁은 먼 미래에만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지금 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내 삶을 다스릴 것인가, 아니면 내 욕망이 진리를 자기 편으로 끌어다 사용할 것인가 하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적그리스도’라는 말도 가장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단순히 미래 어느 한 악한 세계 통치자만 찾으면 나는 그 문제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 내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주님의 진리를 알면서 자기 욕망 때문에 거절할 때, 체어리티보다 자기 의를 높일 때,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사람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려 할 때 그리스도께 반대되는 원리가 내 안에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곧 ‘ 안에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식으로 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계시록의 악을 언제나 외부 인물에게만 투사하지 말고 그것이 표상하는 악과 거짓의 원리를 자기 거듭남의 문제로도 읽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마태복음 7장의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는 고백은 영적 은사와 체험을 바라보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체험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내적 상태를 보증하지 않습니다. 예언이나 치유나 방언이나 환상이나 특별한 영적 경험 자체가 곧 거듭남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참된 것인지 여부와 별개로,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었느냐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가, 자기애와 세상 사랑인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이 방대한데도 그의 저작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중심이 ‘어떤 놀라운 영적 현상을 경험하라’가 아니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데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영계를 보고 천사와 대화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을 천국적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영적 지식을 많이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진리를 많이 알수록 그것을 살지 않을 때 책임이 더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진리가 이해 안에 많아졌지만 의지가 변화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자기 의와 교만을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경회가 영적 성장과 연단을 강조하는 데서 가장 귀하게 살릴 부분은 ‘체험보다 ’, ‘고백보다 행함’, ‘지식보다 실제 변화’라는 방향입니다. 다만 그 행함마저 자기 공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의 중요한 보완입니다. ‘나는 좁은 길을 걸었다’, ‘나는 연단을 통과했다’, ‘나는 계명을 지켰다’, ‘나는 이긴 자가 되었다’가 새로운 ‘주여 주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행해야 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되 실제 선을 행할 수 있는 힘과 의지와 생명은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라지의 가장 미묘한 형태는 어쩌면 ‘종교적 propriu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 proprium은 돈과 권력과 쾌락을 자랑하지만 종교적 proprium은 진리와 경건과 희생과 연단을 자랑합니다. 전자는 알아보기 쉽지만 후자는 훨씬 어렵습니다. 심지어 ‘나는 겸손하다’는 생각으로 교만할 수도 있고, ‘나는 자기부인하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외적인 악만이 아니라 선한 것처럼 보이는 자기 동기까지 주님 앞에 비추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동기를 의심하며 불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자기 내면을 끝없이 분석하여 완벽한 동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보여 주시는 악을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거절하며, 맡겨진 쓰임을 성실히 행하는 것입니다. 동기에 불순물이 섞여 있음을 발견하면 그것도 주님께 맡기고 다시 선을 선택하면 됩니다. 거듭남은 한 번에 순수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점차 지배권을 얻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은 단순히 마지막 심판 날 어떤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무서운 선고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 무엇이 주님과 결합될 수 없으며 무엇이 떠나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미움은 주님과 결합될 수 없고, 거짓은 주님과 결합될 수 없으며, 지배욕과 자기 공로와 악의 즐거움도 주님과 결합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가운데 ‘떠나가라’는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내 안의 악과 거짓입니다. 사람을 쫓아내기 전에 악을 쫓아내야 하고, 다른 사람을 가라지로 판정하기 전에 내 안에서 주님의 생명과 결합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주님께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하신 말씀과도 균형을 이룹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오래 참고 성급한 최종 심판을 삼가야 하지만, 자기 안에서 분명히 죄임을 알게 된 악에 대해서는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과 ‘’을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악은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고, 사람의 구원을 바라면서도 그 사람의 해로운 행위를 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체어리티와 진리가 함께 가는 방식입니다.

 

11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라지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설명한 주님의 말씀을 마태복음 7장의 ‘주여 주여’ 하는 자들과 연결하고, 나아가 적그리스도·거짓 선지자·666을 악으로 완전히 익은 가라지의 모습으로 이해하는 강사의 해석은 단순한 종교적 고백이나 능력이나 직분이 사람의 참된 영적 상태를 보증하지 않으며 결국 삶의 열매가 드러나야 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담고 있고,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미래의 특정 악인들을 찾아내는 도식으로만 읽기보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하지 않은 채 자기애와 명예욕과 지배욕을 섬기게 될 때 종교 자체가 가라지의 외형을 취할 수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이며, 마지막 심판은 주님께서 임의로 사람을 정죄하시는 사건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유 가운데 자기 생명으로 만든 지배적 사랑이 신적 진리의 빛 가운데 완전히 드러나 선은 선과, 악은 악과 결합하는 영적 분리의 아르카나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번 13부에서 특히 마음에 남는 것은 ‘주여 주여’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불신앙인의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교회 밖보다 먼저 교회 안을 향하며, 더 먼저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향합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부르는가?’보다 ‘주님의 뜻이 삶의 어느 부분까지 들어와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기도할 때의 나와 가족을 대할 때의 내가 얼마나 같은가, 예배할 때의 나와 돈을 사용할 때의 내가 얼마나 같은가, 말씀을 설명할 때의 나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대할 때의 내가 얼마나 같은가를 묻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사경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익는다’는 표현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줍니다. 무엇이 익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종교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 자체가 익음은 아닙니다. 말씀 지식이 많아졌다는 것도 그 자체로 익음은 아닙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자기 의가 익을 수도 있고 체어리티가 익을 수도 있습니다. 연단을 많이 받은 뒤 사람이 더 딱딱해질 수도 있고 더 부드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많이 배운 뒤 다른 사람을 더 쉽게 정죄할 수도 있고 더 오래 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열매가 무엇이 자라고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알곡과 가라지의 가장 안전한 분별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분류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익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주님을 알아 갈수록 더 겸손해지고 있는가, 진리를 알아 갈수록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는가, 연단을 통과할수록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이해하게 되는가, 자기부인을 배울수록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겨자씨가 자라고 누룩이 퍼지며 진주의 가치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반대로 종교생활이 깊어질수록 자기 우월감과 정죄와 지배욕이 함께 커지고 있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결국 ‘주여 주여’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로 옮겨 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입술에서 삶으로, 이해에서 의지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자기 공로에서 주님의 은혜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인간이 가장 마지막까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어쩌면 ‘나는 이제 알곡이다’라는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알곡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강사의 비유처럼, 주님의 생명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선을 자랑하기보다 ‘ 안에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에게서 것입니다’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 겸손 속에서 ‘주여 주여’라는 입술의 고백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이라는 삶이 마침내 하나가 됩니다. 바로 그것이 가라지 비유가 우리를 다른 사람의 심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거듭남으로 돌려세우는 가장 깊은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 14

그물 비유와세상 ’ : 교회라는 그물은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를 함께 품는가

114부에서는 마태복음 13장의 마지막 비유인 ‘그물 비유’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이 비유를 앞의 모든 비유를 종합하고 정리하는 ‘결론’으로 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이것을 ‘추수의 원리’, 특히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국 건설 사업의 결론적 진리’이자 종말론적 진리로 규정합니다. 마지막 때를 ‘추수 ’라고 해석해 왔듯이, 그물 비유 역시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는 추수와 동일한 원리를 물고기의 형상으로 다시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강사의 해석은 매우 명료합니다. ‘바다’는 세상이고, ‘물고기’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바다에 던져진 ‘그물’은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하여 교회가 시작되었고, 교회는 세상이라는 바다 속에 그물을 던져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물 속에는 좋은 물고기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함께 들어옵니다. 그리고 강사의 종말론적 시간표에서는 교회 시대가 끝나고 주님께서 지상 재림하실 때 그물이 완전히 걷어지며, 그 안에 들어 있던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분리됩니다. 강사는 이것을 알곡은 곡간에 모으고 쭉정이는 불사르는 추수의 원리와 동일한 구조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중요한 점 하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교회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와 ‘구원받은 상태’ 자체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그물 안에는 각종 물고기가 있습니다. 즉 교회라는 외적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가라지 비유와 마태복음 7장의 ‘주여 주여’ 하는 자들에 대한 설명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교회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고, 그물 안에도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함께 있습니다. 외적인 교회 소속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생명의 사람이 되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두 차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교회입니다. 사람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고, 교리를 알고, 예배에 참여한다는 것은 외적인 교회의 형식 안에 들어와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교회는 주님을 인정하고 말씀에서 진리를 받아 그 진리를 선한 삶으로 살아갈 때 그 사람 안에 세워집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같은 교회 안에 있어도 내적으로는 매우 다른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물’이라는 형상은 매우 적절합니다. 그물은 물고기를 잡는 순간부터 종류를 완벽하게 구별하지 않습니다. 일단 함께 모읍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이미 완성된 천사들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아직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도 있고, 깊이 성장한 사람도 있으며, 말씀을 진실하게 받아들이려는 사람도 있고, 종교를 자기 목적에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하나의 그물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연계에서 곧바로 완전한 천국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바라보는 데 상당히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교회 안에 불완전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가 모양인가?’ 하며 곧바로 교회 자체를 부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교회 안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안전하다’고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그물의 목적은 단지 물고기를 잡아 두는 데 있지 않고 마지막에는 종류가 드러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울타리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자유롭게 그 진리에 응답하며 자기의 실제 영적 상태를 형성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서 강사의 설명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는 그물을 오순절부터 지상 재림까지 존재하는 ‘교회 시대’의 교회로 이해하고, 그 끝에서 자연적 역사 속의 마지막 분리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세상 ’은 지구의 물리적 소멸이나 교회 조직의 단순한 종료가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더 이상 살아 있는 결합을 이루지 못하여 그 교회가 영적으로 끝에 이른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은 자연계에서 모든 사람을 한 장소에 모아 판결하는 사건이 아니라 영계에서 각 사람과 각 영적 사회의 실제 상태가 신적 진리의 빛 가운데 드러나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그물이 ‘가득하다’는 표현도 단순히 교회의 사람 수가 어느 정원까지 차면 끝난다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으로는 교회의 상태가 충만해지고, 그 안에 있던 선과 악의 실제 성격이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드러나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충만함’과 ‘완성’은 어떤 상태가 그 끝까지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도 충분히 성숙하고 악도 충분히 성숙하여 더 이상 하나의 외적 형태 아래 섞여 있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때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앞서 가라지 비유에서 보았던 ‘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처음에는 구별하기 어렵지만 마지막에는 열매가 드러납니다. 그물 비유에서도 물속에 있을 동안에는 모든 물고기가 한 그물 안에 함께 있지만, 물가로 끌어올린 뒤에는 좋은 것과 못된 것이 구별됩니다. 이 두 비유가 서로 다른 형상으로 동일한 영적 원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내적 상태가 충분히 형성되기 전에 억지로 최종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기다림’은 신적 무관심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을 방치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유 가운데 자기 사랑의 방향을 형성할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섭리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워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자유가 있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주님과 이웃을 위해 행할 수도 있고 자기 명예를 위해 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자유로운 선택들이 반복되면서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사랑이 감추어지지 않고 드러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를 이해하는 기준도 중요해집니다. 좋은 물고기는 교리 시험에 더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을 뜻하지 않고, 못된 물고기는 특정 교파에 속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가장 깊은 기준은 사람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기뻐하는 사랑이 중심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중심인가입니다. 진리 역시 그 사랑을 섬깁니다. 선한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를 자기 삶을 고치고 이웃에게 쓰임이 되기 위해 사용하지만, 자기애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를 자기 우월성과 지배를 위해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물 비유는 교리와 삶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라는 그물 안에는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찬송을 부르며 비슷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종교적 외형 아래에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예배를 통해 주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은 예배를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목회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목회 직분의 권위와 존경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같은 그물 안에 있지만 내적으로는 다른 방향으로 자라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교회 안에서 ‘누가 좋은 물고기이고 누가 나쁜 물고기인가’를 판정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유에서도 최종적인 분리를 행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천사들도 자기 판단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에 따라 봉사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미리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고, 악을 악이라고 분명히 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회개하고 선을 선택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문을 열어 사람을 받아들이는 그물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악을 선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악은 분명히 거절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그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도 잘못이고, 어떤 악을 범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혼 전체를 ‘못된 물고기’로 확정해 버리는 것도 잘못입니다. 행위와 교리는 분별할 수 있지만 사람의 가장 깊은 내적 상태와 영원한 가능성은 주님만이 아십니다.

 

이것은 12부에서 살펴본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한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분별해야 하지만 성급하게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는 감상주의로 흐를 수 있고, 사랑 없는 진리는 사람을 잘라내는 냉혹한 심판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천국적 질서는 체어리티와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악은 악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의 구원을 원하고, 거짓은 거짓이라고 밝히면서도 그 사람을 멸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그물 비유를 ‘천국 건설 사업의 결론적 진리’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강사의 전체 체계에서는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마음밭이 드러나고, 겨자씨에서 성장하며, 누룩에서 행실 전체가 변화되고, 진주와 보화에서 자기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며, 가라지 비유에서 악의 정체가 드러난 뒤, 마지막 그물 비유에서 모든 상태가 종합적으로 추수된다는 구조입니다. 강사의 관점에서는 마태복음 13장이 사실상 구원론·성화론·종말론 전체를 한눈에 보여 주는 하나의 축소판인 셈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일곱 비유 전체를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라는 관점에서 연결해 보면 상당히 풍성한 그림이 나옵니다. 먼저 씨가 뿌려집니다. 신적 진리가 사람에게 옵니다. 그 진리를 어떤 상태로 받아들이는지가 드러납니다. 받아들여진 진리는 겨자씨처럼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룩처럼 삶 전체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사람이 더 귀한 천국적 선을 발견하면 proprium의 소유를 점차 내려놓게 됩니다. 동시에 가라지 같은 자기애와 거짓의 상태가 드러나며 영적 싸움이 일어납니다. 마침내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이것을 개인의 차원에서 하나의 ‘추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서 악한 성향이 완전히 소멸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악으로부터 떼어 놓으시고 그것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proprium에서 올라오는 악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영원히 주님의 보호와 생명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물고기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악과 완전히 무관한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고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자기에게서 선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 점은 그물 비유에서 ‘좋은 ’이라는 말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선은 인간에게서 자생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선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선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천국의 사람은 자기 선을 자기 공로로 여기지 않습니다.

 

반대로 ‘못된 ’이라는 표현도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태어날 때부터 나쁘게 만드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을 천국을 위해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지속적으로 거절하고 자기애와 악을 자기 생명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선택된 사랑이 점점 지배적 사랑으로 굳어지면 사후에는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를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분리는 주님께서 임의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만들어 놓고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가운데 받아들인 생명의 질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낸다’는 말씀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오랫동안 숨길 수 없습니다. 자연계에서는 체면과 사회적 규범과 이해관계 때문에 실제 사랑과 다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겉 사람의 외적 형식이 점차 벗겨지고 속 사람의 실제 사랑이 나타납니다. 자기가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게 되고, 같은 종류의 즐거움을 가진 공동체를 찾아갑니다. 그래서 심판은 외부에서 낯선 판결이 내려오는 것이라기보다 그 사람이 이미 자기 생명으로 만든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세상 ’의 의미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자연적 의미에서 ‘세상 ’이라고 하면 지구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세상’ 또는 ‘시대’의 끝은 한 교회의 완성된 마지막 상태를 뜻합니다.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의 결합이 무너지고 외적 종교 형식만 남았을 때 그 교회는 끝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끝은 모든 것이 끝난다는 뜻이 아니라 새 교회가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심판 후에 새 질서를 세우십니다.

 

이렇게 보면 그물의 걷힘은 파괴보다 분별과 새 질서의 시작입니다. 좋은 물고기가 분리되는 것은 그들을 위한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것이고, 악이 분리되는 것은 더 이상 선을 억압하고 혼란시키지 못하도록 경계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은 천국의 관점에서 단지 공포스러운 종말이 아니라 해방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선과 악이 뒤섞여 있어 선한 사람들이 억압받던 상태가 끝나고, 각자가 자기의 실제 사랑에 맞는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경험됩니다. 어느 악이 오랫동안 선한 의도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주님을 섬기고 싶어 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둘이 섞여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한다’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가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을 통하여 둘의 차이가 점점 드러납니다. 어느 순간 사람은 선택해야 합니다. 인정받지 못해도 선을 계속 행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이 없으면 선을 포기할 것인가. 이런 시험을 통해 무엇이 진짜 사랑인지 분리됩니다. 작은 의미에서 하나의 그물이 걷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을 개인의 거듭남과 연결한다고 해서 계시록과 마지막 심판을 단순한 심리학으로 축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같은 신적 질서가 여러 층위에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분별, 교회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진리와 거짓의 분리,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심판은 서로 다른 규모이지만 하나의 신적 질서를 반영합니다. 주님의 질서는 선과 악이 영원히 혼합된 상태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위해 한동안 허용하시지만 끝에는 각각 그 본질대로 질서를 세우십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 그물 비유가 요한계시록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최종 정리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을 통하여 ‘14 4’과 ‘666’이라는 계시록의 두 중요한 숫자의 정체를 준비시키고, 마지막 그물 비유를 통해 ‘추수 세상 ’을 정리한 뒤 계시록 해설로 나아갑니다. 강사 자신도 144천을 가장 잘 익은 알곡, 666을 가장 악하게 익은 쭉정이로 대비하면서 계시록 전체를 ‘추수 때에 대한 이야기’라고 이해합니다.

 

이 구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받을 때에는 강사의 핵심 문제의식은 살리되 숫자와 집단의 문자적 고정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144천을 정확한 영적 엘리트 숫자로, 666을 특정 집단이나 개인들의 명단처럼 읽기 시작하면 계시록의 보편적 영적 의미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144천은 선과 진리의 충만한 교회 상태를, 666은 진리가 자연적 인간과 자기애에 의해 왜곡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때 그 말씀은 어느 한 시대의 특정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모든 시대의 교회와 인간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물 비유가 주는 가장 중요한 균형일 수 있습니다. 그물은 넓습니다. ‘각종 물고기’를 모읍니다. 교회의 사명은 처음부터 사람을 세밀히 골라내어 ‘너는 자격이 있고 너는 없다’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고, 사람은 자유롭게 응답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그물을 던지는 일을 맡았지 최종 심판의 자리를 맡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교와 목회에 상당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교회는 완성된 사람만 받아들이는 ‘천국 우등생 모임’이 아니라 죄인들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거듭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장소여야 합니다. 지금 돌밭인 사람이 나중에 좋은 밭이 될 수 있고, 지금 많은 가시를 가진 사람도 주님의 섭리 가운데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물은 넓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물 안에 들어온 것으로 모든 과정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 실제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이 사경회의 ‘익은 열매’라는 강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이 시작이라면 익는 것은 과정이고 추수는 그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질문은 ‘나는 교회 안에 있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나는 어떤 물고기가 되어 가고 있는가?’, 더 정확히는 ‘어떤 사랑이 생명의 중심으로 익어 가고 있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생활의 기간이나 직분보다 사랑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그물 비유는 아주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자기 점검을 요구합니다. 나는 교회라는 그물 안에서 무엇을 얻고 있는가? 진리를 받아 더 겸손해지고 있는가, 아니면 더 쉽게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가?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는가, 아니면 자기 신앙 경력을 특권처럼 생각하는가? 연단을 받을수록 부드러워지는가, 아니면 강퍅해지는가?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주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이 깊어지는가, 아니면 ‘나는 이만큼 했다’는 자기 공로가 커지는가? 바로 이러한 열매가 그물 안에서 어떤 생명이 자라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11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바다를 세상, 물고기를 세상 사람들, 그물을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시작된 교회, 그물이 가득하여 끌어올려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나누는 장면을 마지막 때의 추수와 지상 재림 이후의 심판으로 읽는 강사의 해석은 교회라는 외적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의 영적 상태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는 실제 열매와 생명이 드러나야 한다는 엄중한 결론을 제시하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물 비유를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외적으로 함께 섞여 있던 선과 ,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신적 진리의 가운데 실제 사랑에 따라 분리되는 마지막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고, 개인에게서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proprium 자기애가 점차 구별되어 마침내 어느 사랑이 지배적 생명이 되었는지가 드러나는 거듭남의 완성이라는 차원으로도 이해할 있습니다.’

 

그리고 1강의 이 마지막 비유에서 가장 깊이 붙들 만한 것은 ‘각종 물고기’라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물은 처음부터 좋은 물고기만 골라 잡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구원 의지가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완성된 사람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아직 혼란스러운 사람도, 많은 악한 습관을 가진 사람도, 진리를 거의 모르는 사람도 부르십니다. 교회의 문은 거듭난 사람에게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야 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천국적으로 될수록 사람을 받아들이는 문은 넓고, 악과 거짓을 분별하는 진리는 분명하며, 사람에 대한 최종 심판은 주님께 맡기는 태도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사랑 때문에 진리를 흐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물의 교회가 추수 때까지 감당해야 할 매우 어려운 균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물 자체도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 조직도, 수도공동체도, 신학 체계도, 사경회도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사람을 주님께 이끌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돕는 ‘그물’입니다. 만일 사람이 그물 자체를 사랑하여 주님보다 자기 교회와 자기 체계와 자기 공동체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수단이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좋은 그물은 물고기를 자기에게 묶어 두기 위한 그물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으로 이끄는 그물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1강 전체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겠습니다. ‘밝은 진리’, ‘모형적 진리’, ‘신인합일’, ‘광야 연단’, ‘익은 열매’, ‘이긴 ’, ‘14 4’, ‘666’, 그리고 마지막 ‘그물’까지 매우 독특하고 강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체계가 가진 장점은 분명합니다. 신앙을 지식으로 끝내지 않고 실제 성화와 삶의 변화로 밀어붙이는 힘이 있습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체계가 지나치게 자연적 시간표와 영적 등급, 특정 숫자와 집단에 고정될 때 말씀의 더 깊고 보편적인 속뜻을 열어 줍니다.

 

결국 모든 비유의 마지막 질문은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어느 체계를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씨는 열매가 되어야 하고, 겨자씨는 나무가 되어야 하며, 누룩은 전체에 스며들어야 하고, 진주를 발견하면 proprium의 소유를 내려놓아야 하며, 가라지 같은 악은 주님의 빛 앞에서 드러나야 하고, 마지막에는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의 차이가 생명으로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삶이 되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1강의 마지막에서 가장 안전하게 남길 수 있는 기도는 아마 ‘주님, 저를 좋은 물고기라고 여기게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에 속하지 않은 것을 보여 주시고, 그것을 죄로 알고 거절하게 하시며, 제가 어떤 영적 반열에 들었는지를 계산하기보다 오늘 맡겨진 사람에게 선한 쓰임이 되게 주십시오’일 것입니다. 그때 그물 비유는 다른 사람을 골라내는 종말의 비유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어떤 사람으로 익어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으로 살아납니다.

 

 

 

SY.48,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2강 (7/27),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2강 1부‘모형적 진리’와 구원의 여정 - 출애굽은 지나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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