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창4:1)

 

AC.338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the man and Eve his wife)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처럼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그 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은 신앙이며, 여기서는 그것을 ‘가인’(Cain)이라 합니다. 하와가 말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는 것은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By the “man and Eve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s has been made known; its first offspring, or firstborn, is faith, which is here called “Cain”; her saying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ies that with those called “Cain,” faith wa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해설

AC.338부터 스베덴보리는 창4: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이하기 시작합니다. 앞의 AC.324-337이 창4 전체의 속뜻을 미리 보여 주는 개요였다면, 이제부터는 본문을 한 구절씩 따라가며 그 안에 담긴 교회적 상태를 자세히 해설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다시 단순한 두 개인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그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이라고 하며, 그것을 여기서는 ‘가인’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의 개요에서 가인을 계속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읽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AC.338에서는 그를 단순히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설명이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생겨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도 당연히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독립적으로 서 있는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고, 그 앎이 바로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 안에 살아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AC.338에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신앙이 사랑 안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있는 무엇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가인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은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상태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사랑 안에서 떼어 내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보기 시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 분리가 이후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더 높이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가인을 ‘처음에는 좋은 신앙이었는데 나중에 나쁜 신앙으로 변했다’고 단순히 시간적으로 나누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38에서 이미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는 데서 가인의 고유한 분리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신앙이라는 참된 것을 가진 상태이면서 동시에 그 신앙을 본래의 사랑의 질서에서 떼어 내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을 구별하는 것’과 ‘신앙을 분리하는 것’을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과 신앙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무엇이고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진리와 선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분명히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구별된 것을 서로 떨어져도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순간 문제가 달라집니다. 신앙이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일 수 있다고 여기고, 나아가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더 본질적인 것으로 높이면 ‘구별’은 ‘분리’가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바로 이 분리입니다. 앞에서 사용했던 부부의 비유도 여기에 도움이 됩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존중과 배려와 신실함은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습니다. 그 원칙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이 없어도 규칙만 정확히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원칙이 사랑에서 독립하여 사랑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와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말도 이 문맥에서 중요합니다. 영어 표현은 ‘I have gotten a man, Jehovah’인데, 스베덴보리는 이 말에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실재처럼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의미를 읽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신앙을 거짓이라고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참되고 중요한 것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위험을 더욱 미묘하게 만듭니다. 명백한 거짓 하나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가 본래 그것이 결합되어 있어야 할 사랑의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단이나 교리의 왜곡도 언제나 처음부터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를 전체보다 높이고 다른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관계에서 떼어 내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처음 난 것’, 곧 첫 번째 자손이라는 표현 역시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태고교회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태어난 한 개인이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태고교회로부터 어떤 교리적 상태가 처음 파생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시간표로만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개인들의 전기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생겨난 교리적, 교회적 상태들이 어떻게 파생되고 변화했는지를 표상합니다. 또한 AC.338은 가인의 타락이 이미 완성된 상태만을 보여 주는 번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리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보기 시작한 변화가 나중에는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는 신앙으로 진행하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까지 이어집니다. 겉으로는 미세해 보이지만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바꾸는 결정적인 방향 전환입니다.

 

AC.337과 함께 읽으면 이 점이 더욱 선명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퍼셉션 안에서 하나였기 때문에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따로 세우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매우 심각한 왜곡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 가인의 상태가 아닙니다.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는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을 최종적인 것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338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지 ‘내가 믿는 교리가 옳은가?’가 아닙니다. ‘그 교리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도 함께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참된 교리라도 자기 확신과 자기 우월성을 강화하는 데만 사용된다면 그 진리는 본래의 질서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그 신앙은 자신의 참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생명은 신앙 자체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8의 핵심은 단순히 ‘가인은 신앙이다’가 아닙니다. ‘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다’라는 데 있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체어리티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본래 하나로 있어야 할 것을 따로 세우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창4의 상세 해설은 이제 바로 그 분리가 어떻게 점차 교회의 질서를 바꾸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며,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지를 하나씩 보여 줄 것입니다.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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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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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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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가인의 왜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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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또한 그 교회의 이단들과 분파들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 관해서는 위에서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곧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그들은 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신앙, 곧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까 하여 신앙을 언급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AC.200, 203) As this chapter treats of the degener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falsification of its doctrine, and consequently of its heresies and sects, under the names of Cain and his descendants, it is to be observed that there is no possibility of understanding how doctrine was falsified, or what was the nature of the heresies and sects of that church, unless the nature of the true church be rightly understood. Enough has been said above concerning the most ancient church, showing that it was a celestial man, and that it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was of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Through this love they had faith from the Lord, or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that belonged to faith, and for this reason they were unwilling to mention faith, lest it should be separated from love, as was shown above. (n. 200, 203)

 

[2] 천적 인간은 이와 같으며, 시편에서도 표상을 통하여 이와 같이 묘사됩니다. 거기서는 주님을 ‘왕’으로, 천적 인간을 ‘왕의 아들’로 말합니다. Such is the celestial man, and such he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in David, where the Lord is spoken of as the king, and the celestial man as the king’s son: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시72:1, 3, 5, 7) Give the king thy judgments, and thy righteousness to the king’s son. The mountains shall bring peace to the people, and the hills in righteousness. They shall fear thee with the sun, and toward the faces of the moon, generation of generations.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be no moon. (Ps. 72:1, 3, 5, 7)

 

‘해’(sun)는 사랑을, ‘달’(moon)은 신앙을, ‘산들’(mountains)과 ‘작은 산들’(hills)은 태고교회를, ‘대대로’(generation of generations)는 홍수 이후의 교회들을 각각 의미합니다. ‘달이 다할 때까지’(until there be no moon)라고 한 것은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30:26에서 말한 것도 참조) By the “sun” is signified love; by the “moon,” faith; by “mountains” and “hills,” the most ancient church; by “generation of generations,”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until there be no moon” is said because faith shall be love. (See also what is said in Isaiah 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30:26)

 

[3] 태고교회와 그 교리는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이로부터 태고 시대에 사람들이 신앙을 따로 고백하여 그것을 사랑에서 분리했을 때 교리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리를 왜곡한 사람들, 곧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거나 신앙만을 따로 고백한 사람들을 당시에 ‘가인’(Cain)이라 불렀으며, 이러한 일은 그때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습니다. Such was the most ancient church, and such was its doctrine. But the case is far different at this day, for now faith takes precedence over charity, but still through faith charity is given by the Lord, and then charity becomes the principal. 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doctrine was falsified when they made confession of faith, and thus separated it from love. Those who falsified doctrine in this way, or separated faith from love, or made confession of faith alone, were then called “Cain”; and such a thing was then regarded as an enormity.

 

해설

AC.337은 창4의 가인과 그 후손들을 더 자세히 해설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을 먼저 제시합니다. ‘무엇이 왜곡되었는지를 알려면 먼저 왜곡되기 전의 참된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로 의미되는 이단들과 분파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어떤 관계 안에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교회의 중심은 신앙을 별도로 고백하고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독립된 무엇이 아니라 사랑 안에 살아 있는 진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AC.337의 ‘그들은 신앙을 언급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는 표현도 문자적인 금기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낱말 자체를 싫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하나로 있던 것을 따로 떼어 ‘신앙’이라고 세우는 순간 그것이 사랑에서 분리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독립된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기준에서 볼 때 가인의 문제가 얼마나 근본적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독립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태에서는 ‘신앙을 따로 말하고 고백하는 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본래 하나로 있었던 천적 인간에게서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단순한 표현상의 구별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질서를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기준이 ‘사랑과 신앙의 하나 됨’이라면 가인의 죄는 단순히 하나의 교리적 오류를 주장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별개의 것으로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그 첫 분리가 뒤의 모든 변질의 출발점이 됩니다.

 

시72의 인용은 이 천적 질서를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해’를 사랑으로, ‘달’을 신앙으로 설명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달이 자기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해의 빛을 받아 비춘다는 점을 기계적인 상응으로 확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37이 직접 밝히는 핵심은 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이 그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

 

‘산들’과 ‘작은 산들’은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산과 높은 곳이 사랑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에서도 태고교회의 천적 성격을 보여 줍니다. 그들에게 가장 높은 것은 신앙고백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이웃 사랑과 신앙에 속한 퍼셉션이 나왔습니다.

 

특히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표현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진리나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남지 않고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살아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이 됩니다.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도 같은 설명을 보강합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의 모든 세부 상응을 해설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적인 연결점은 달과 해, 곧 신앙과 사랑입니다. 신앙의 빛이 사랑의 빛과 하나 되는 천적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함께 인용합니다.

 

그런데 AC.337 [3]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이 문장을 놓치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의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포함한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 체어리티가 형성되면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높거나 본질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먼저 의식적으로 주어질 수 있지만, 그 신앙의 목적은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형성하시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바로 앞 AC.335의 셋과 AC.336의 에노스를 조심해서 구별해야 합니다. 셋은 ‘새로운 신앙’,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라고 했지만, 셋과 에노스 자체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AC.337 [3]의 ‘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후대 영적 인간의 질서를 셋과 에노스에게 그대로 소급해서는 안 됩니다. AC.335-336은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의 분리 이후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성된 것을 말하고, AC.337 [3]은 그것과 별도로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스베덴보리 시대의 후대 질서를 대비합니다.

 

이 구별을 해 두면 가인의 의미도 더욱 정확해집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이 먼저 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는 것은 정상적인 거듭남의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났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독립시키고 높인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신앙고백을 하거나 교리를 배우는 것 자체를 가인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후대 인간에게는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끝날 때입니다. 신앙고백의 정확성이 삶에서의 선과 체어리티를 대신하게 되면 가인의 영적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7의 마지막 ‘이러한 일은 그때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는 말에서 ‘그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였던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신앙을 별도로 떼어 고백하는 것은 그 질서 자체의 붕괴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인간이 신앙을 명확히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같은 악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어떤 질서를 무조건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질서와 영적 인간의 질서를 구별해야 하고, 태고교회와 홍수 이후 교회의 상태도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이 먼저였다는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 사람에게 ‘먼저 사랑이 생긴 다음에야 진리를 배워야 한다’는 시간적 공식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오늘날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말도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중요하다’는 교리적 우선권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듯,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과정상의 선행과 본질상의 주도권은 서로 다릅니다.

 

AC.337은 이처럼 가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점을 세워 줍니다. 참된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가인의 후손들과 여러 이단적 상태를 읽을 때에도 ‘무엇을 믿었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어떤 관계에 놓였는가?’를 계속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처럼 퍼셉션으로 직접 진리를 아는 상태에 있지 않으며, 먼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목적은 여전히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체어리티를 이루시고, 마침내 진리가 삶과 사랑 안에서 살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7은 ‘신앙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구호보다 훨씬 정교한 질서를 가르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과 사랑의 최종적인 분리가 주님의 질서는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과 결합될 때 살아 있고,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목적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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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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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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