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

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이며, 따라서 인간은 그 자체로는 악과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보이도록 제시될 때, 더 추한 것은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해 제게 분명해졌습니다. 다만 그 모습은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도록 제시되는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달아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나며,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을 한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며,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그들은 가슴을 두른 꽃 화환과 머리 위의 관으로 다양하게 단장하고, 다이아몬드 같은 기운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해설

AC.154는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강한 표현으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얼마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대조합니다. 첫 문장만 보면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이며 인간은 악과 거짓일 뿐’이라는 선언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후반부에서는 바로 그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154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두 상태를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며,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0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살려고 할 때, 그 proprium에서는 선과 진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AC.149-150에서 이미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proprium의 악은 단순히 인간이 개별적으로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정도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시 자신의 영계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때에는 더 추한 것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보이며, 그것을 자기 앞에서 보게 된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모습이 모두 똑같다고 하지 않고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proprium은 획일적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그러나’가 AC.154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앞의 흉측한 모습과 정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던 설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신다는 지금까지의 흐름이 여기서 다시 확인됩니다.

 

이 때문에 AC.154는 AC.141과 함께 읽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으며, 그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므로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라고 했습니다. 반면 AC.154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고 합니다. 두 문장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AC.154 자체가 그 구별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으로서의 proprium은 악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언제나 동일한 영적 성질을 가진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인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인지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후반부의 모습들은 이러한 차이를 영계의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고,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꽃 화환과 관으로 단장한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에서의 실제 나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의 성질입니다. 앞에서는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그 흉측함이 달라진다고 했고, 여기서는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아름다움도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영계에서 외적인 모습이 내적인 생명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설명이 이 대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은 현재 문맥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AC.148에서는 가슴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생명 없는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54에서는 체어리티를 부여받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proprium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점차 구체적인 내용을 얻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아직 체어리티와 proprium의 관계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이후의 설명을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상태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앞부분의 죽음과 추함, 뒷부분의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은 서로 대응되는 대조를 이룹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proprium 안에 갇혀 있을 때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있을 때의 차이가 영계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AC.154는 proprium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는 문장은 분명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에 같은 번호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말한다는 사실도 똑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살아 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AC.141에서 시작하여 AC.147-154를 거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 proprium의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154)

 

 

 

AC.155, 창2:22, ‘주님의 신부와 아내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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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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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2:19-20)

 

AC.143

고대에 ‘짐승들’(beasts)과 ‘동물들’(animals)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그와 같은 것들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고, 또 그러한 것들이 영계에서는 동물들로, 실제로는 그것들과 닮은 그러한 동물들로 표상되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식으로 말할 때에는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에서도 짐승들이 일반적으로 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곳에서는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언서 전체가 그러한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각각의 짐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말씀이 속뜻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짐승들은 두 종류가 있는데, 악하거나 해로운 짐승들과 선하거나 해롭지 않은 짐승들입니다.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양과 어린양과 비둘기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므로 이러한 짐승들을 의미합니다. ‘짐승들’(beasts)이 일반적으로 애정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의 몇몇 구절들을 통해 확증한 바 있으므로(AC.45-46), 여기서는 더 이상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That by “beasts” and “animals” were anciently signified 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 may appear strange at the present day; but as the men of those times were in a celestial idea, and as such things are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by animals, and in fact 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 therefore when they spoke in that way they meant nothing else. Nor is anything else meant in the Word in those places where beasts are mentioned either generally or specifically. The whole prophetic Word is full of such things, and therefore one who does not know what each beast specifically signifies, cannot possibly understand 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 But, as before observed, beasts are of two kinds— evil or noxious beasts, and good or harmless ones—and by the good beasts are signified good affections, as for instance by sheep, lambs, and doves;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That “beasts” in general signify affections may be seen above, confirmed by some passages in the Word (n. 45–46), so that there is no need of further confirmation.

 

해설

AC.143은 AC.142에서 ‘짐승들’(beasts)이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들’이 영적 애정들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 ‘짐승이 왜 인간의 애정을 의미하는가?’라는 해석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그 점을 인정하면서 설명을 시작합니다. 고대에 ‘짐승들’(beasts)과 ‘동물들’(animals)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그와 같은 것들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 시대 사람들이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08에서 고대인들의 말하는 방식에 관하여 설명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그들에게 자연계의 사물과 인간 안의 영적인 상태를 연결하여 말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적인 것들을 보면서 그것과 관련된 영적인 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었고, 그러한 관념 속에서 말했습니다. 따라서 동물을 말하면서 인간의 애정을 의미하는 표현도 그들에게는 낯선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애정과 같은 것들이 영계에서 실제로 동물들로 표상되며, 그것도 그 애정의 성질과 닮은 동물들로 표상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짐승과 애정의 관계는 단순히 고대인이 동물의 성격을 관찰하고 ‘양은 온순하니 선한 마음을 상징한다고 하자’는 식으로 만들어 낸 비유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 안에서는 영적인 상태와 그것을 표상하는 형상 사이에 실제적인 질서가 있고, 고대인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 그 관계에 따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동물들이 속뜻을 담을 수 있는 배경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나오는 짐승들도 같은 원리로 읽습니다. 짐승이 일반적으로 언급되든 특정한 종류가 언급되든 그 안에는 인간의 애정과 관련된 속뜻이 있으며, 특히 예언서에는 이러한 표현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 예언서의 속뜻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17에서 역사적인 말씀에도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했던 설명과 함께, 스베덴보리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 안에는 인간의 내적 상태와 천국적인 실재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동물은 곧 애정’이라는 하나의 공식만 만들어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43 자체가 이미 짐승들을 악하거나 해로운 것과 선하거나 해롭지 않은 것으로 구별합니다.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을 의미하며, 그 예로 양과 어린양과 비둘기를 듭니다. 반대로 악하거나 해로운 짐승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다른 성질의 애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동물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하나의 의미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동물의 성질과 그것이 놓인 말씀의 문맥, 그리고 현재 다루는 주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142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사람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며,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 등장하는 짐승들의 의미도 현재 다루는 인간의 상태에 맞추어 이해됩니다. AC.103에서 어떤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놓인 주제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고 했던 원리가 여기서 다시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짐승들’(beasts)이 일반적으로 애정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미 AC.45-46에서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했으므로 여기서 다시 증명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인용은 단순한 참고 번호가 아닙니다. 창1에서 동물들을 다룰 때 제시했던 상응의 원리가 이제 창2의 짐승들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창1과 창2의 해설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같은 말씀의 속뜻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줍니다.

 

따라서 AC.143의 핵심은 ‘짐승은 애정을 뜻한다’는 대응 하나를 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러한 의미가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함께 보았고, 영계에서도 인간의 애정은 그 성질에 상응하는 동물의 형상으로 표상됩니다. 말씀의 동물 표상도 이러한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응은 사람이 성경의 사물에 임의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적인 표현과 영적인 실재 사이의 관계를 말씀 안에서 읽어 내는 방식이라는 점이 AC.143에서 한층 분명해집니다. (AC.143)

 

 

 

AC.144, 창2:19-20, ‘이름으로 부르다 - 그 본질과 성질을 알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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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창2:19-20, ‘짐승과 하늘의 새 - 선의 애정과 진리의 앎을 알게 하시다’ (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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