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

‘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방금 설명한 ‘땅’(ground)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그리고 ‘땅이 그 효력을 내지 아니하는 것’(not yielding its strength)이 그 결실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땅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것과 그 말 자체에서도 분명하며, 또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아무런 신앙도 고백하지 않는 것이라는, 앞에서 말한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That to “till the ground” mean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appears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of which we have just now spoken; and that its “not yielding its strength” denotes its barrenness, is evident both from what was said concerning ground, and from the words themselves, as well as from this consideration, that those who profess faith without charity, profess no faith, as was said above.

 

해설

AC.381은 바로 앞 AC.380의 설명 가운데 처음 두 부분을 확증합니다. ‘땅을 가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이며, 그 땅이 ‘그 효력을 내지 아니한다’는 것은 그 분열이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새로운 상응을 길게 전개하지 않습니다. 대신 앞에서 이미 밝혀진 ‘땅’의 의미와 창4:12의 표현 자체, 그리고 AC.379에서 제시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는 원리를 함께 가져와 AC.380의 해석이 왜 성립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땅을 가는 것’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땅’의 의미에서 나옵니다. AC.377에서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라고 했고,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그의 영적 성질이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문맥에서 그 땅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교리적 분열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땅을 계속 간다는 것은 그 분열을 계속 연구하고 확증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짓된 원리를 한 번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고 논증하고 가르치면서 더욱 견고한 체계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배양’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경작하더라도 그 땅은 ‘그 효력’을 내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결실 없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은 ‘땅이 그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표현 자체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땅의 힘은 씨를 받아 싹을 틔우고 열매를 내는 데 나타나는데, 이제 그 힘이 가인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속뜻에서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교리를 아무리 발전시켜도 거기에서는 참된 영적 생명의 열매가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결실 없음’의 이유를 다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서 찾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아무런 신앙도 고백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AC.379의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다’라는 설명을 압축하여 되풀이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땅이 결실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임의로 그 땅의 생산력을 빼앗아 벌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신앙의 생명 자체를 이루는 체어리티를 신앙에서 떼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제거한 뒤에는 아무리 그 신앙을 경작해도 살아 있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고백한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입으로 ‘나는 신앙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문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profess’에는 어떤 교리를 자기의 신앙 원리로 인정하고 주장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체어리티를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에서 떼어 내면서도 그것을 참된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것을 부정합니다. 체어리티가 빠진 신앙은 신앙의 한 종류가 아니라, 앞에서 말했듯이 신앙에 관한 지식만 남은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행위가 있어야 신앙의 부족분을 채워 완전해진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에 외적으로 덧붙이는 공로적 행위가 아닙니다. AC.379에서 체어리티를 ‘사랑과 자비’라고 했고, 그것이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고 했습니다. 또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생각 안에 있을 때 그 생각 안에 ‘신앙의 본질인 체어리티’가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의 열매는 머리로 알고 있는 진리에 외적인 선행 몇 가지를 더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선을 의도하는 의지와 결합되어 실제 삶으로 나타날 때 생깁니다.

 

이렇게 보면 ‘땅을 열심히 가는데도 열매가 없다’는 이미지는 상당히 강력합니다. 사람은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자기 신앙의 논리를 세우고, 성경 구절을 모으고, 교리 체계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매우 열심히 땅을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작업의 중심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제거되어 있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경작 자체가 생명의 열매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분리를 더 깊이 ‘배양’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이 경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땅을 경작하고 있으며 무엇을 열매 맺으려 하느냐입니다.

 

이 점은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에게도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올바른 교리를 찾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말씀의 진리와 참된 교리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목적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지식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가르치고 선으로 인도하며, 마침내 선과 결합되어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정죄하게 되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며, 선한 쓰임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가 갈고 있는 ‘땅’이 어떤 땅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AC.381은 그래서 AC.379-380을 매우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면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며,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단지 지식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AC.380에서는 그런 분열을 계속 배양해도 그 땅은 결실하지 못하고,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81은 그 결실 없음의 이유를 다시 한 번 명시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외적인 형벌이 아니라 신앙에서 그 생명을 제거한 데 있습니다.

 

결국 AC.381의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날카롭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땅은 아무리 갈아도 참된 영적 결실을 내지 못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에 있으며,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가 인간의 의지와 삶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진리가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삶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체어리티를 제거한 데 있었고, 그 결과 남은 것은 더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열매 맺지 못하는 땅이었습니다.  

 

심화

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가?

 

AC.381 심화 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가?’

AC.381 심화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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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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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0,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신앙’ (AC.38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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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창4:12)

 

AC.380

‘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은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이 다시는 네게 그 효력을 내지 아니할 것이요’(it shall not yield unto thee its strength)는 그것이 결실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till the ground” signifie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it shall not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signifies that it is barren.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해설

AC.380은 창4:12의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의 속뜻을 세 부분으로 압축하여 제시합니다. 바로 앞 AC.377-379에서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고, 그 분열로 말미암아 사람이 선에서 돌아서며, 체어리티가 소멸될 때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80에서는 그러한 분열을 계속 붙들고 발전시킬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아무리 그 땅을 갈아도 결실이 없으며, 마침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한 채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먼저 ‘땅을 간다’는 것은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간다는 것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얻기 위해 토지를 경작하는 긍정적인 이미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의 의미는 언제나 문맥 안에서 결정됩니다. 여기서 ‘땅’은 이미 AC.377에서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간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배양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그 분열된 교리를 더욱 발전시키고 확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원리도 사람이 계속 생각하고 논증하고 뒷받침하면 점점 더 정교한 하나의 체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계가 정교해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참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가인의 진행 과정과도 잘 맞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가 되었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AC.378에서는 그 분열이 ‘입을 벌려’, 곧 하나의 이단적 교리로 가르쳐졌다고 했습니다. 이제 ‘땅을 간다’는 것은 그렇게 형성된 교리를 계속 배양하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경고가 있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조잡한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출발점을 붙들고 오랫동안 연구하고 논증하면 매우 정교하고 일관성 있어 보이는 교리 체계도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살아 있는 결합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많이 경작해도 그 땅은 참된 영적 열매를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곧이어 ‘땅이 다시는 네게 그 효력을 내지 아니할 것이요’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간단히 ‘그것이 결실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strength’는 땅이 가지고 있는 생산력, 곧 열매를 내는 힘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교리를 아무리 발전시키고 확증해도 거기에서는 살아 있는 신앙의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앞의 AC.379에서 그 이유가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며,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체어리티, 곧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신앙에 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경작해도 그 지식 자체에서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나오는 생명이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결실이 없다’는 것을 외적인 활동이나 종교적 성과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 없는 사람도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경건한 열심처럼 보이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외적으로는 설교도 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많은 종교 활동을 하며, 상당한 성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그러한 외적 성과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 영적 결실입니다. 바로 그 결실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스스로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AC.380에서 가장 중요한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더 순수하게 보존하려고 체어리티와 구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완전히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배척하면 역설적으로 신앙 자체도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잃게 됩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과 결합할 때 살아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라는 목적을 잃어버린 신앙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무엇이 실제로 선이며 무엇이 실제로 진리인지에 관하여 방향을 잃고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 점은 앞의 AC.379와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지옥의 무리들조차 신앙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진리에 관한 문장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이 참된 교리다’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악한 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진리를 생명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사람 안에서 방향을 잃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 나면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한다’는 상태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부족이라기보다 영적 분별의 상실에 가깝습니다.

 

‘피하는 자’와 ‘유리하는 자’라는 두 표현 역시 지금 번호에서는 하나하나 별도의 상응으로 세분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전체 의미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AC.380은 둘을 합쳐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피하는 자는 이것, 유리하는 자는 저것’이라고 미리 나누어 의미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뒤의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두 표현을 더 구체적으로 구별한다면 그때 따라가면 됩니다. 현재로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방향을 잃고 안정된 영적 토대를 갖지 못하는 상태 전체를 나타낸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매우 실제적인 경고가 됩니다. 신학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영적으로 분별하는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신앙의 정확성을 매우 강조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들을 자기 사랑이나 정죄나 지배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진리를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진리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땅을 열심히 갈고 있지만 그 땅이 ‘그 효력’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방향을 얻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보호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이 둘이 주님 안에서 결합될 때 사람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점점 더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 자신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함께 받아들일 때 생기는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유리함’과 반대되는 상태는 단순히 교리적 확신이 강한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삶의 방향이 분명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80은 가인의 분열이 어디에 도달하는지를 세 단계로 보여 줍니다. 먼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을 계속 ‘경작’합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는 영적인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를 버리고 신앙만을 지키려 했던 교리가 결국 신앙 자체의 방향까지 잃어버리는 역설입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제거함으로써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향하여 올바른 방향을 갖게 됩니다.

 

 

 

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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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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