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
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밭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땅’은 분열을 의미합니다.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에 심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들과 진리들로부터는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로부터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단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루고 있는 구절에서도 ‘땅’이라는 말은 사람 안에 있는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That the “ground” here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therefore the “ground,” having the field in it, is a schism. Man himself is the “ground,” and also the “field,” because these things are inseminated in him, for man is man from what is inseminated in him, a good and true man from goods and truths, an evil and false man from evils and falsities. He who is in any particular doctrine or heresy is named from it,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the term “ground” is used to denote a schism or heresy in man.
해설
AC.377은 AC.373에서 짧게 제시했던 ‘땅(ground)은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설명합니다. 창4:10에서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부터’ 주님께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앞의 AC.374-376에서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그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피들이 부르짖어 올라오는 ‘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땅을 단순히 악이 벌어진 장소로 보지 않고 ‘분열 또는 이단’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가인이 표상하는 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여 하나의 교리적 원리로 만든 상태라는 지금까지의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첫 논리는 ‘밭’이 교리를 의미하므로 밭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땅’은 분열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368에서 ‘들’ 또는 ‘밭’이 교리를 의미한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밭은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는 곳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씨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며,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조직되는 교리적 영역이 밭으로 표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밭을 품고 있는 더 근원적인 ‘땅’으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가인의 문맥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의 결합에서 갈라지고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으므로, 그 땅은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AC.377의 설명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번 번호의 핵심 문장입니다. 교리는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명제들의 집합만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이 실제로 심어지고 자라는 장소는 사람 자신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땅과 밭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그의 생명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의도하며, 마침내 삶으로 내보내는 살아 있는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사람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들과 진리들로부터는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로부터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접하면 그 지식대로 자동적으로 사람이 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심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인간의 내면에 받아들여져 그의 생각과 의지와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알고 있는 것과 그 진리를 인정하고 사랑하여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을 잠깐 듣거나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이 ‘거짓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확증하며 그에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이 점차 그의 영적 성질을 형성합니다.
이 점에서 ‘심어진 것’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자유와도 연결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생각과 감정이 곧바로 그 사람 자신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인간에게 제시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인정하며 의지와 행동으로 확증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AC.377을 ‘나쁜 생각이 한 번 들어오면 악한 사람이 된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이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고, 어떤 악과 거짓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여 굳히느냐에 따라 그의 내적 성질이 형성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땅’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돌아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아벨을 죽였다는 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고, 이어 둘을 분리하며,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점차 하나의 교리가 되었고, 결국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즉 하나의 거짓된 원리가 사람 안에 심어지고 확증되면서 그의 교리와 삶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들이 부르짖는 ‘땅’은 단순한 흙이 아니라 그러한 분열이 자리 잡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인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단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된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받아들이고 확증하여 살아가는 교리적 성질에 따라 영적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래서 이 문맥에서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교단이나 종파에 붙이는 제도적 낙인으로 먼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핵심은 살아 있는 전체 질서에서 어떤 진리를 떼어 내어 독립시키고, 그것을 다른 진리나 선과 대립시키며 절대화하는 영적·교리적 분열입니다.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신앙이 홀로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만든 것이 바로 그 분열입니다.
이 때문에 AC.377은 교리의 중요성을 매우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지 시험을 보기 위해 외우는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되다고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고 ‘올바른 교리만 머리로 정확히 알면 선한 사람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가인의 문제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선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무시하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땅’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함께 심어지고 결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다’라는 말은 말씀을 읽는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땅과 밭을 고대에 있었던 어떤 교회나 사람들의 상태로만 읽으면 우리는 그 말씀의 바깥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땅이고 밭이라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지금 내 안에는 무엇이 심어지고 있는가? 내가 반복하여 받아들이고 확증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내가 붙드는 신앙의 진리는 실제로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진리를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이렇게 역사적 표상에서 현재 인간의 거듭남으로 들어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희망도 줍니다. 사람이 ‘땅’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만 심어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도 심어질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께서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인간에게 주시고 심으시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사람이라는 땅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들이 자라고 결합하도록 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는 원래 어떤 땅인가?’라는 고정된 자기 규정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주님께서 내 안에 심으시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결국 AC.377에서 ‘땅’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 분열과 이단이 추상적인 교리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심어지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로부터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받아들이고 확증한 악과 거짓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가인의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심어져 하나의 교리가 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들이 바로 그 땅에서부터 부르짖습니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가인의 교리와 분리된 삶 밖에서 우연히 생긴 사건이 아니라, 그 분열이 사람 안에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은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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