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2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의 평화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평화를 갈등이나 불안이 없는 상태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평화 자체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먼저 AC.92가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 상태가 아닙니다. 그 직전까지 사람 안에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AC.91에 따르면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그 결과 싸움이 그치며 평온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평화는 단순히 싸움 하나가 없어졌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 안의 질서가 달라진 결과로 찾아오는 상태입니다.
AC.92가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싸움이 그쳤기 때문에 생명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는 싸움과 저항 때문에 충분히 나타나지 못하던 것이 이제 겉 사람에게까지 미치기 시작합니다. AC.91에서는 이것을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에 비유했습니다. 평화는 텅 빈 고요가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생명이 미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4부터 계속 나온 ‘안식’도 주님께서 피곤하여 일을 중단하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고 그 일이 완성되어 싸움이 그쳤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완성된 질서 안에서 이제 평화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자연의 모습으로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폭풍이 그쳤다고 해서 자연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요한 비와 이슬이 땅을 적실 때 식물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AC.90-91에서 ‘비’와 ‘안개’가 평화의 평온을 뜻하고, 그것에 의해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산출된다고 한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평화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공백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곧생명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상응 공식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92의 표현은 더 정확합니다. 그것은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가 어디에서 오며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그것은 사람 자신이 만들어 내는 편안함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나와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거기에서 선과 진리가 살아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AC.92에서 말하는 평화는 싸움의 부재보다 훨씬 적극적인 상태입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친 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자유롭게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 생명으로 인해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살아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단순한 ‘쉼’이 아니라 생명으로 충만한 안식입니다. (AC.92심화1)
AC.91은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이것을 속 사람은 좋은 것이고 겉 사람은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90-91에서 천적 인간에게도 겉 사람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오히려 ‘들의관목’과 ‘들의초목’, 곧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그 겉 사람에서 산출됩니다. 문제는 겉 사람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이 질서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AC.91의 표현 그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섬기려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앞에서 AC.81은 영적 인간이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언제나 승리한다고 했고, AC.84-87에서는 여섯 날의 싸움 뒤에 일곱째 날의 안식이 온다고 했습니다. AC.91은 이제 그 싸움이 인간 안에서는 어떤 관계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아직 저항과 싸움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달라집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것이 어떤 모습인지 조금 더 알 수 있습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며, 그 결과 겉 사람에서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산출됩니다. 즉 겉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그것을 바깥의 삶 가운데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순종’은 겉 사람을 억압하거나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섬김’ 역시 인간의 몸과 감각, 이성, 기억지식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성과 기억지식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기능하게 됩니다. 겉 사람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자유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AC.81에서는 천적 인간이 겉으로 어떤 결박에도 제어되지 않고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AC.85에서는 그가 자기 자신의 바람에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바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억지로 굴복당하는 상태라기보다, 사람 안의 바람 자체가 새로운 질서 안에 들어가 더 이상 속 사람과 싸우지 않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결국 AC.91의 ‘순종하고섬긴다’는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안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아직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것에 따라 활동합니다. 그때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은 겉 사람이 사라져 얻는 안식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 놓임으로써 얻는 안식입니다. (AC.91심화1)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5, 6)
AC.92
싸움이그칠때,곧탐욕과거짓으로말미암은불안이그칠때겉사람이누리는평화의평온이어떠한지는평화의상태를아는사람만이알수있습니다.이상태는너무나즐거워서즐거움에관한모든관념을뛰어넘습니다.그것은단지싸움이그친상태만이아니라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며,말로표현할수없는방식으로겉사람에게영향을미칩니다.그때평화의즐거움에서생명을얻는신앙의진리들과사랑의선들이태어납니다. The nature of the tranquility of peace of the external man, on the cessation of combat, or of the unrest caused by cupidities and falsities, can be known only to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a state of peace.This state is so delightful that it surpasses every idea of delight: it is not only a cessation of combat, but is life proceeding from interior peace, and affecting the external man in such a manner as cannot be described; the truths of faith, and the goods of love, which derive their life from the delight of peace, are then born.
해설
AC.92는 앞에서 말한 ‘평화의평온’이 단순히 싸움이 끝난 뒤의 고요함이 아님을 밝힙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아 싸움과 불안이 있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서 그 싸움이 그칩니다. 그러나 싸움이 없어졌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평화의 본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평온이 어떠한지는 실제로 평화의 상태를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평화는 너무나 즐거워서 즐거움에 관한 모든 관념을 뛰어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매우 기분 좋은 감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그 평화가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생명이 흘러나오는 상태입니다. 그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치는데, 그 방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설명은 AC.91의 ‘비’와 ‘안개’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거기서는 평화의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단순한 편안함이 아니라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은 단순히 싸움을 멈춘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새로운 것을 산출하게 됩니다.
그 결과 태어나는 것이 ‘신앙의진리들’과 ‘사랑의선들’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진리와 선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얻는다’는 설명입니다. 진리와 선이 단지 사람의 기억 속에 있거나 지식으로 존재하는 것과, 실제 생명을 가진 상태는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치고, 그 평화의 즐거움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생명을 얻어 태어납니다.
따라서 AC.92의 평화는 싸움이 사라진 빈자리가 아닙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친 자리에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 흘러들고, 그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쳐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을 살아 있게 합니다. AC.90의 ‘평화의평온’, AC.91의 ‘비와안개’, 그리고 AC.92의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은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천적 인간의 안식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생명으로 충만한 상태인지를 보여 줍니다. (AC.92해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7
천적인간이‘안식일’(sabbath),곧‘안식’(rest)인또하나의이유는그가천적인간이될때싸움이그치기때문입니다.악한영들은물러가고선한영들이가까이오며,천적천사들도가까이옵니다.이들이함께있을때에는악한영들이도저히머물수없어멀리달아납니다.그리고싸움을수행한것은사람자신이아니라사람을위하여주님홀로이셨기때문에,주님께서‘쉬셨다’(rested)고합니다. Another reason why the celestial man is the “sabbath,” or “rest,” is that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 evil spirits retire,and good ones approach,as well as celestial angels;and when these are present,evil spirits cannot possibly remain,but flee far away. And since it was not the man himself who carried on the combat,but the Lord alone for the man,it is said that the Lord “rested.”
해설
AC.87은 천적 인간을 ‘안식일’, 곧 ‘안식’이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밝힙니다. 그가 천적 인간이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AC.84에서는 ‘모든싸움이그친다’는 사실을 말했고, AC.85에서는 여섯 날의 싸움과 수고 뒤에 평화의 상태가 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싸움이 그칠 때 영계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오며, 이들이 함께 있을 때 악한 영들은 머물지 못하고 멀리 달아납니다.
그러나 AC.87의 가장 중요한 설명은 마지막 문장에 있습니다. 앞선 여섯 날 동안 싸움이 있었지만, 그 싸움을 실제로 수행한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사람을위하여주님홀로’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싸움이 끝났을 때 말씀은 사람이 쉬었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쉬셨다’고 합니다. 창조의 여섯 날을 사람의 거듭남으로 읽으면서도 그 거듭남의 근원적인 행위자를 사람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81에서도 영적 인간은 실제로 ‘싸움가운데있으며언제나승리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싸움을 경험하고 악과 거짓에 맞서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지만, 그 싸움에서 악을 이기게 하는 능력의 근원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AC.87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과 응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승리의 능력과 공로를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또한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는 설명은 천적 인간의 안식이 단순한 심리적 평온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인간의 거듭남은 영계와 분리된 인간 내부만의 변화가 아닙니다. 사람이 천적 상태에 이르면서 그와 함께하는 영적 환경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악한 영들의 공격이 물러가면서 싸움의 상태도 그칩니다.
따라서 AC.87에서 ‘주님께서쉬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피곤하여 활동을 중단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위하여 싸우신 분이 주님 홀로이시므로 그 싸움이 그친 상태를 주님의 안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AC.84에서 시작된 ‘왜주님께서쉬신다고하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에서 가장 직접적인 답에 이릅니다. 여섯 날의 싸움도 주님의 역사이고, 그 싸움이 끝나 천적 인간의 평화에 이른 것도 주님의 역사이므로, 그 완성된 상태가 주님의 ‘안식’입니다. (AC.87해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창2:2, 3)
AC.84
천적인간은‘일곱째날’(seventhday)입니다.주님께서여섯날동안역사하셨기때문에그것을‘그분의일’(hiswork)이라하며,그때모든싸움이그치기때문에주님께서‘그분의모든일을마치고쉬신다’(restfromallhiswork)고합니다.이런이유로일곱째날은거룩하게구별되었고,‘안식’(rest)을뜻하는히브리어에서유래하여안식일이라불렸습니다.이와같이사람이창조되고,형성되고,만들어졌습니다.이러한것들은말씀자체에서매우분명합니다.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day,” which, as the Lord has worked during the six days, is called “hiswork”; and as all combat then ceases, the Lord is said to “restfromallhiswork.” On this account the seventh day was sanctified, and called the sabbath, from a Hebrew word meaning “rest.” And thus was man created, formed, and made. These things are very evident from the words.
해설
AC.84는 앞에서 천적 인간을 ‘일곱째날’이라 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여섯 날 동안 이루어진 것은 근본적으로 주님의 역사이며, 그래서 그것을 ‘그분의일’이라 합니다. 사람이 죽은 상태에서 영적 인간으로 형성되고, 마침내 천적 인간이 되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실제로 싸움을 겪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를 창조하고 형성하며 새롭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의 안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앞선 여섯 날의 역사가 누구의 일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일곱째 날에 주님께서 ‘그분의모든일을마치고쉬신다’고 하는 이유는 ‘모든싸움이그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안식을 인간처럼 수고하여 피곤해진 뒤 쉬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은 거듭남의 싸움이 그친 상태와 관계됩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 승리하지만, 천적 인간은 같은 방식의 싸움 가운데 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AC.84는 이제 그 차이를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의 구조에 연결합니다.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여섯 날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싸움이 그치고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일곱째 날, 곧 안식의 상태가 됩니다.
이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고 안식일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안식일이라는 명칭 자체를 ‘안식’을 뜻하는 히브리어와 연결합니다. 따라서 안식일의 속뜻은 단순히 일정한 날짜에 일을 멈추는 외적인 행위에 머물지 않고,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 거듭남의 싸움이 그치고 천적 상태에 이르는 것과 연결됩니다. 다만 AC.84는 그 안식의 상태를 아직 상세하게 펼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왜 그것을 주님의 안식이라 하는지 그 기본 원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마지막의 ‘이와같이사람이창조되고,형성되고,만들어졌습니다’라는 말은 앞선 여섯 날과 일곱째 날 전체를 한 문장으로 되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안에서 질서 있게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종착점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싸움을 완수하여 스스로 안식을 획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가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져 싸움이 그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4에서 일곱째 날은 단순히 창조 이후에 덧붙여진 하루가 아니라, 앞선 모든 역사가 향하고 있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AC.84해설)
이장에서는천적인간을다루는데,앞장에서는죽은사람으로부터형성된영적인간을다루었습니다.그러나오늘날에는천적인간이무엇인지알려져있지않고,영적인간이나죽은사람이무엇인지조차거의알려져있지않으므로,그차이를알수있도록각각의성질을간략히밝히는것이저에게허락되었습니다.첫째,죽은사람은육체와세상에속한것외에는아무것도참되고선한것으로인정하지않으며,그것을숭배합니다.영적인간은영적이고천적인진리와선을인정하지만,사랑에서라기보다는신앙의원리에서그렇게하며,또한그원리에서행동합니다.천적인간은영적이고천적인진리와선을믿고퍼셉션하며,사랑에서나오는신앙외에는다른신앙을인정하지않고,또한그사랑에서행동합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or a dead man,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First,then,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and this he adores.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and not so much from love.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죽은사람을움직이는목적들은오직육체적이고세상적인삶만을향하며,그는영원한삶이무엇인지도,주님이누구신지도알지못합니다.혹안다고해도믿지않습니다.영적인간을움직이는목적들은영원한삶을향하며,그것을통하여주님을향합니다.천적인간을움직이는목적들은주님을향하며,그분을통하여주님의나라와영원한삶을향합니다. Second: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or what the Lord is;or should he know,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죽은사람은싸움가운데있을때거의언제나굴복하며,싸움가운데있지않을때에는악과거짓이그를지배하므로그는종입니다.그를붙들어매는결박은외적인것으로,법에대한두려움,생명을잃는것에대한두려움,재산과이익을잃는것에대한두려움,그리고그것들때문에그가중요하게여기는평판을잃는것에대한두려움과같은것들입니다.영적인간은싸움가운데있지만언제나승리합니다.그를제어하는결박은내적인것이며,양심의결박이라합니다.천적인간은싸움가운데있지않으며,악과거짓의공격을받을때에는그것들을업신여기므로정복자라합니다.그는겉으로보기에는어떤결박에도제어되지않고자유롭습니다.그의결박은겉으로드러나지않으며,선과진리에대한퍼셉션입니다. Third: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and when not in combat,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such as the fear of the law,of the loss of life,of wealth,of gain,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but is always victorious;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he despises them,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but is free. His bonds,which are not apparent,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AC.81은 창1에서 다룬 영적 인간과 창2에서 다루는 천적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죽은 사람까지 포함한 세 상태를 직접 비교합니다. 여기서 ‘죽은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는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AC.67-72에서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을 다룬 직후라고 해서 여기의 ‘죽은사람’을 사망한 사람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81의 세 구별은 한 인간이 거듭남 가운데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 번째 차이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근원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선과 진리를 인정하지만 ‘사랑에서라기보다는신앙의원리에서’ 그렇게 하며 그 신앙에서 행동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믿을 뿐 아니라 퍼셉션하며, ‘사랑에서나오는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랑에서 행동합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신앙이 없어지고 사랑만 남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고, 행동 역시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질서가 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차이는 사람을 움직이는 ‘목적’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목적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에 머뭅니다. 영적 인간의 목적은 영원한 삶을 향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의 목적은 먼저 주님을 향하고, 그분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여기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은 모두 주님과 영원한 삶을 향하지만 그 질서가 다릅니다. AC.73에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고 했던 말은 단순히 같은 것을 더 강하게 믿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목적의 질서가 달라지는 변화와도 관계됩니다.
세 번째 차이는 영적 싸움과 사람을 제어하는 결박에서 나타납니다. 죽은 사람은 싸움에서 거의 언제나 굴복하고, 싸움이 없을 때에는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를 제어하는 것은 법이나 생명, 재산, 이익, 평판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외적인 결박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 승리하고, 그를 제어하는 것은 양심이라는 내적인 결박입니다. 천적 인간은 더 이상 같은 방식의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이 공격해 와도 그것들을 업신여깁니다. 그에게도 결박이 있지만 그것은 외적으로 강제하는 결박처럼 드러나지 않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는 겉으로 보기에 어떤 결박에도 제어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이 세 구별은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을 서로 완전히 별개의 인간 종류로 나누기 위한 분류표라기보다, 앞 장과 이 장에서 다루는 거듭남의 상태 차이를 이해하게 하는 설명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천적 인간을 단순히 영적 인간보다 ‘더높은사람’이라고만 이해하면 AC.81의 세밀한 구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차이는 선과 진리를 어디에서 받아들이는가, 무엇이 삶의 주된 목적이 되는가, 악과 거짓 앞에서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 세 기준을 붙들면 앞으로 창2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훨씬 정확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81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