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설교의 중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를 교회의 성장이나 성공, 은사나 신비 체험, 신학적 지식, 심지어 선교적 업적 자체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자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빌3:14의 ‘푯대를 향하여’를 중심에 놓고,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제사장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 골리앗에게 달려가는 다윗, 아합 앞에 서는 엘리야의 모습을 연이어 제시하면서 이제 막 출발하는 교회가 처음부터 방향을 정확히 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GPS’라는 친숙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출발점에서 좌표가 조금만 어긋나도 먼 훗날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하므로 교회의 좌표를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이 중심 명제는 매우 귀합니다.

 

특히 설교 초반에 제시되는 교회상은 주목할 만합니다. 설교자는 건물이나 숫자보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죄인이 들어와도 과거 때문에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부자나 유명인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특별대우를 받는 대신 연약한 사람이 사랑받고, 서로의 것을 나누며, 직분과 서열보다 겸손과 순결과 거룩함이 존중받는 교회를 꿈꿉니다. 반대로 직분과 권위, 시기와 경쟁, 험담과 배척으로 가득한 교회를 매우 강하게 비판합니다. 표현은 때때로 거칠지만 그가 지향하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외적 규모나 사회적 힘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실제로 살아 있느냐에 따라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곳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본질적으로 건물이나 교단, 조직 자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있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천 명이 모이고 거대한 조직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천국적인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며, 아주 작은 공동체라고 해서 교회성이 약한 것도 아닙니다. 외적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그 외적 형식 안에 내적인 것이 살아 있을 때입니다. 설교자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보다 ‘한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자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설교자가 예수님 곁에 세리와 죄인들과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부분도 중요합니다. 그의 요지는 ‘과거가 더러웠던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그의 과거를 계속 꼬리표처럼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 이상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사람은 현재 자연계에서 드러나는 이력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과거에 어떤 악 가운데 있었더라도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의 과거를 끊임없이 끄집어내어 현재의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거듭남이라는 복음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가장 힘 있게 전개되는 곳은 바울에 관한 부분입니다. 설교자는 바울에게 선교도, 신유도, 신비 체험도, 신학도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였고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으며 ‘셋째 하늘’에 관한 체험도 있었고 뛰어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3:8 이하의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를 중심으로 설교가 깊어집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서신은 스베덴보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는 ‘말씀’의 책들과 동일한 방식의 내적 의미, 곧 연속적인 아르카나를 지닌 책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빌3의 각 문구를 창세기나 출애굽기, 선지서나 복음서처럼 상응을 따라 속뜻으로 풀어 가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말이 영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여기서 표현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다’는 신앙적 고백은 매우 귀하며, 그 내용을 주님의 가르침과 스베덴보리가 밝힌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거나 예수님에 대해 뜨거운 감정을 갖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 역시 외적인 행동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의 푯대’라는 선언은 결국 ‘내 사랑의 질서가 주님의 질서를 닮아 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유용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실제 내용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설교가 강조하는 ‘내가 죽는 것’도 조금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기를 원했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난과 죽음을 마치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돌에 맞은 바울이 다시 성으로 들어간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죽고 싶어서’라고까지 표현하고, 뒤에서는 ‘내가 죽기를 미치도록 갈망하고’라는 강렬한 말을 사용합니다. 설교자의 의도가 육체적 죽음이나 자살을 권하는 것이 아님은 문맥상 분명합니다. 그 자신도 이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영적으로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의 지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인격을 살리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 존재를 혐오하라는 말이 아니며, 고통 자체를 사랑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상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는 상태, 자신의 지성과 의를 신뢰하는 상태가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설교 후반의 ‘고통이 오면 뛰어가서 환영하십시오’라는 권면은 그 열정은 이해하면서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통 자체를 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난은 때로 시험의 장이 되고,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통해 우리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시고 정화하시며 선을 더욱 굳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니거나 부당한 학대를 계속 허용하거나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상황을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통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진리와 선을 선택할 때 그 시험이 거듭남을 섬기게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셨으므로 나도 고난받아야 한다’보다 더 깊은 질문은 ‘예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 무엇을 이루셨는가’입니다. 주님의 전 생애는 지옥들과 싸우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계속적인 시험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의 양을 주님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올라오는 악과 거짓의 충동과 싸우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시험과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설교자가 벧전2를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는 것은 천국적 삶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상대방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내가 죽어야 한다’는 설교자의 표현은 신학적으로 구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에 복수하지 않고 그것을 견딜 수는 있으며, 용서하고 그 사람의 회복을 바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악 자체를 내가 대신 담당하여 구속하는 것은 주님께 속한 일입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가운데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용서는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반복적으로 해를 입으면서도 무조건 참는 것이 언제나 사랑인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진리를 말하고 경계를 세우며 악이 더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사랑에는 따뜻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보완된다면 설교자가 말하는 ‘욕을 당하고도 욕하지 않는 삶’은 훨씬 건강하고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설교 후반부에서 다시 교회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설교자는 ‘자기 의로 충만한 의인’보다 자기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교회, 큰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큰 자로 여김받는 교회,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보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는 교회를 꿈꿉니다. 여기에는 복음서에서 반복되는 주님의 가르침과 통하는 매우 중요한 직관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지상의 지위와 명성이 질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적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이 어떠한지가 중요합니다. 섬김을 사랑하는 사람은 높아지려 하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천국의 질서 안에서는 큰 자가 됩니다.

 

다만 ‘자기 의는 전혀 없고 내 죄밖에 없다’는 표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을 인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은 옳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거듭난 인간에게 실제로 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지 죄인으로 남겨 두고 외부에서 의를 덮어씌우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실제로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본래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난 삶의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내가 행하지만 그것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가장 귀한 문장인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문장의 깊이가 훨씬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한 지식을 늘리는 것도, 감동적인 체험을 많이 갖는 것도,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자 자신이 선교와 신유와 신비 체험과 신학을 모두 궁극적 목표에서 내려놓은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천국적이 되는 것도 아니며, 없다고 해서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비 체험 자체를 경계하거나 낮게 보는 방향으로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방대한 영계 경험을 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영적 체험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환상이나 계시나 놀라운 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허락하신 영적 체험이 그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고, 말씀을 더욱 사랑하게 한다면 그 열매를 함부로 멸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냐 이성이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것이 선과 진리의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설교자가 교회의 미래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라고 그리는 마지막 장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말은 ‘모두가 비슷한 종교적 말투와 행동을 갖게 되는 공동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입니다. 각 사람은 서로 다른 성품과 은사와 유용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하나의 중심, 곧 주님을 향합니다. 마치 인체의 서로 다른 기관들이 하나의 생명을 섬기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모두가 똑같아지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따라 서로를 섬기면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이 점에서 설교 초반과 마지막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어떤 교회를 꿈꾸는가’를 묻고, 마지막에는 성도들에게 눈을 감고 그 교회를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습니다. 이것은 목회적 호소로서 힘이 있습니다. 교회의 출발점에서 건물과 숫자와 영향력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갈 것인가’를 묻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름다운 공동체 이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속 사람에서 실제로 거듭남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피하고, 주님께 선을 행할 힘을 구하며, 실제 생활에서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외적인 신앙이 내적인 신앙이 되고, 알고 있던 진리가 삶의 선과 결합합니다. 그때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의 ‘GPS’ 비유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바꾸어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목적지를 ‘예수님’이라고 입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내가 걷는 길이 그 목적지와 일치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가, 아니면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는가. 내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는가, 아니면 유용한 사람이 되려 하는가.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속으로 계속 정죄하는가, 아니면 진실을 분별하면서도 그의 최종 상태는 주님께 맡기는가. 내가 가진 신학과 체험과 은사를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데 사용하는가, 아니면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가. 바로 이런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 실제 GPS의 경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가장 좋은 부분은 역설적으로 가장 단순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 이 문장을 굳이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우리에게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해 간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더욱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것은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며, 신비 체험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신학적으로 누구보다 정확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자신의 실제 삶에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푯대를 향하여’라는 제목도 새로운 깊이를 갖습니다. 푯대는 단순히 저 멀리 바라보는 목표가 아닙니다. 주님은 목적지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향해 내딛는 매 걸음의 생명이십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 애쓸 때, 나보다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보호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할 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우리는 이미 그 푯대를 향하여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전체적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 폐기하거나 경계해야 할 설교라기보다, 상당히 귀한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몇몇 강한 표현들을 거듭남과 시험, proprium,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조금 더 깊고 안전하게 다듬어 들으면 좋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성공보다 예수 그리스도’, ‘직분보다 겸손’, ‘정죄보다 용서’, ‘유명인보다 회개하는 한 영혼’, ‘자기 자랑보다 섬김’을 앞세우는 방향은 소중합니다. 여기에 ‘자기 죽음’을 자기혐오가 아니라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으로, ‘고난’을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 선과 진리가 굳어지는 시험의 장으로, ‘그리스도를 닮음’을 외적인 고난의 모방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오히려 더욱 풍성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설교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고 있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듭니다. ‘내가 주님을 푯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나의 사랑, 생각, 말, 판단, 돈의 사용,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용서, 정직, 섬김과 유용한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렇다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영웅이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proprium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삶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일 때, 설교자가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도 비로소 외적인 이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조금씩 드러내는 실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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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7)

 

 

※ 오늘은 본래 준비하던 다른 본문의 설교가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이틀 전인 지난 4월 4일 금요일 오전 11시 22분, 헌법재판소의 너무나도 이상한 선고로 우리는 멀쩡한 대통령을 또 한 번 잃었습니다. 김문수 장관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파면하는 게 말이 되느냐?’ 저는 목사이지만, 그러나 망망대해 태평양 무슨 외딴섬 목사가 아니며, 저는 특별한 소명을 받아 좀 별난 사역에 힘쓰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저 우주 어떤 외딴 별나라 사역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도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은 태어난 자기 조국을 사랑하며, 마땅히 나라와 민족을 사랑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천국이 나의 조국이 되지 않겠습니까? 비록 저 역시 작금의 이런 상황에 가슴속 울분과 화가 넘쳐나지만, 그러나 저의 모든 것은 제 것이 아니라 주님 것입니다. 아마 거의 모든 목회자, 모든 참 신앙인은 다 같을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가 하고픈 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펴 받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 십자가 달려 운명하셨을 때, 하늘의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다음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던 밤의 한 장면입니다.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26:51-54)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처음으로 돌아가자, 주님께 집중하자, 가장 근원적인 질문, 주님은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하셨나에 집중, 전에 나눴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말씀을 조금 더 다듬어 다시 이렇게 나누게 되었습니다. //

 

 

주님의 탄생 이야기는 주님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내적 의미, 곧 속뜻은 많이 다릅니다. 내적 의미로 주님의 탄생은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과정이라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는 본래 로마 황제 줄리어스 씨저(Gaius Julius Caesar, BC.100-34)의 이름(姓)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말씀에서는 ‘가이사’를 로마 황제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했습니다. 오늘 본문 저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님 오실 당시에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의 이름이며, 바로 그가 주님께서 탄생하실 즈음에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개역개정에서는 ‘호적하라’이지만, 영어 성경에는 인구조사인데요, 말씀에는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세어보라 명령하시고요, 또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일까요?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선과 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선과 진리들의 종류와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그 속뜻, 곧 영적 의미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성도님들 속에 선과 진리가 어떤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씀에서 인구조사라 하면, 결국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을 따라 인구를 조사한다 했을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또는 각 개인의 내면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직 사람들 안에 진정한 진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시기 전,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는 세상 진리입니다. 그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이사 아구스도’는 세상 진리나 규범, 또는 세상 법도를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참된 진리를 전혀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규범, 법도, 또는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읽고 이해했는데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이사의 영에 따라 인구조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선하고 진실한 것, 곧 선과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는, 그것을 아셔야 각 사람에게 맞는 구원의 섭리를 펼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은 우리를 무슨 학교 교육하듯 일률적으로 가르치며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맞게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철저히 맞춤식으로 가르치시며, 인도하시지요. 비록 그것이 크고 중요한 진리라 하더라도 우리 역량에 맞게 우리 페이스에 맞춰 아주 천천히, 아주 기초부터 오랜 세월 끝까지 말입니다.

 

2절입니다.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레뇨가 아니라 ‘수리아’입니다. 수리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를 말하는데, 주님 당시에는 아람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보내 며느릿감으로 리브가를 밧단 아람이라는 곳에서 구해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야곱도 하란이라고도 하는 아람 지역에 사는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런 기록의 속뜻은, 수리아, 또는 아람은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것,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아람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까닭은, 아람은 원래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며, 그러므로 아람 지방에는 오래전부터 고대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나오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속뜻으로는 선과 진리의 인식을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선과 진리를 인식할까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것을 바로 인식,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합리(合理, rational)라는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 이 역시 예를 들면, ‘퍼셉션’(perception)이나 ‘오운’(own)처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난처한 표현입니다. 난처하다는 말씀은, 원래 그 의미와 뉘앙스가 이만큼 있는데, 우리말로 옮기는 순간 확 다 사라지고 하나만 남는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부득이 이 역시 그냥 ‘래셔널’(rational)로 적겠습니다. 보통은 우선은 그냥 이성(理性)이나 추론하는 능력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선과 진리가 어떤 모양인지를 보는 능력이 래셔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래셔널이라는 능력, 의식 속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형상화됩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이 아내를 아람에서 만나는 것은, 이런 래셔널이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것이며, 따라서 시리아, 즉 아람에서 가장 먼저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사람의 내면을 살피시는 시기는 우리가 이 래셔널이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 전에 아시는 것과, 우리가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우리를 살피시는 건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호적을 시작했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해 눈뜨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의 내면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다음은 이 래셔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4장, ‘천국과 사람과의 말씀에 의한 결합’(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 By Means of the Word)에서 인용했습니다.

 

말씀에서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23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사19:23-25)

 

이 구절을 읽으면서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천사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씀의 문자 의미와 내적 의미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람은 글자의 뜻 그대로 이집트인과 아시리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받아들여지고, 이스라엘 민족과 융합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내적 의미에 따라서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을 생각한다. 여기서 내적 의미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성(spiritual)은 ‘이스라엘’, 자연성(natural)은 ‘이집트인’, 그리고 그 중간 기능인 합리성(rational)은 ‘아시리아인’이다. 그러나 이 두 의미는 서로 상응하기 때문에, 하나를 이룬다. 천사는 영적으로, 사람은 자연적으로 생각하는데, 이때 천사와 사람은 거의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듯이 결합된다. 실제로 말씀의 내적 의미는 말씀의 영혼이고, 문자 의미는 말씀의 몸인 것이다. 이것은 말씀 전체에 해당된다. 이상으로 말씀이 천국과 사람을 결합시키는 매체이고, 그 문자 의미는 기초와 바탕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H.307:3, 김은경 역)

 

즉, 우리가 말씀을 지상의 언어로 읽을 때, 그것이 우리 안에서 천국의 언어, 곧 영적으로 이해가 되려면 반드시 중간에서 이 래셔널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가리켜 주님의 첫 번째 래셔널, 곧 human rational이라 하고, 이삭을 가리켜 주님의 두 번째 래셔널, 곧 Divine rational이라 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아직 아브람 시절, 곧 아직 주님 안에 마리아로 유전한 human이 남아 있던 시절이 있었지만, 차곡차곡 그것을 벗고, Divine Human, 곧 아브라함 시절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

 

※ 하나 더, 다음은 ‘두고 가는 것은 육체밖에 없다’(After Death Man Is Possessed of Every Sense, and of All the Memory, Thought, and Affection That He Had in the World, Leaving Nothing Behind except His Earthly Body)라는, ‘천국과 지옥’ 48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합리적 기능은 어떻게 계발되는가에 대해서도 간략히 말하겠다. 진정한 합리성은 진리로만 형성되고, 그릇된 것으로는 형성되지 않는다. 그릇된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은 어떤 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진리에는 사회적, 도덕적, 영적인 세 종류가 있다. 사회적 진리는 국가의 법과 다스림에 관한 사항이며, 일반적으로 나라 안의 정의와 평등에 관한 문제들이다. 도덕적 진리는 대인관계에 관련된 개인의 삶의 문제를 다루며, 일반적으로는 정직과 올바름, 구체적으로는 모든 종류의 덕성에 관한 문제들이다. 영적 진리는 천국과 교회에 속한 일에 관련된 것이며, 일반적으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관한 문제들이다. (HH.468, 김은경 역)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사회적, 도덕적 진리가 영적 진리가 되도록,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진리가 우리의 도덕적, 사회적 진리로 흘러 들어가도록 천국의 천사들처럼 행하며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

 

※ 오늘 본문 앞부분은 전반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대적 상황, 즉 한 사람의 내면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전반적 정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여기서 고향이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성읍(city)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과 5절에는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이 동네(city)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고향, 성읍, 동네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각 사람의 종교적 신념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는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는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사람을 선하다 하실까요?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교리를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은 그런 사람을 선하게 여기십니다.

 

※ 여기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라고 굳이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교리 가운데 보면, 몹시 악한, 누가 보아도 지옥으로 말미암은 교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는 선하고 진실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녹아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천국에 있는 이교도들, 즉 교회 밖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이라는, ‘천국과 지옥’ 36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몰라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주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의 자비는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을 향한 자비라는 사실이다. 또 비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교회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사람으로 태어나며, 또 그들이 주를 모르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밝은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사람은 단 한 명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는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HH.318, 김은경 역) //

 

그렇게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4절과 5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말합니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었다’ 하고요, ‘요셉이 호적 하러 간 곳은 유대 땅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이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다윗은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족속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 족속은 언제부터 주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을까요? 아람 시절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람, 또는 수리아(시리아)의 상태는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상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래전부터 시작된 길고 긴 과정을 거쳐 오늘 그 자손 요셉은 지금 다윗의 집 족속, 즉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위 ‘아람 시절’이란 말은 요셉이 아람, 곧 수리아에서 실제 살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내적 의미, 곧 우리 모두 누구나 다 개인 신앙 발전 과정에서 수리아 시절, 아람 시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시기, 우리 안의 이 래셔널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5절에서는 요셉 혼자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데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경우처럼 그 내면에 교회가 존재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선과 진리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기만 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아직 교회가 세워졌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주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고, 마침내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까지 걸리는 기나긴 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진리를 알기까지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곳을 헤매고 다녔습니까? 그리고 진리를 안 다음에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말할 수 있게 된 건 또 언제부터입니까? 대개는 내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서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직 그 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분들도 계시고요. 그러니 주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그리고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단순히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 동네로 갔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길고 험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길을 처음 가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은 그냥 하루 이틀 걸어가면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기를 쓰고 가다 보면 언젠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의 시작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는 주님을 알기 전 이방인의 교리 가운데 있었던 상태이고요, 유대 땅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소속, 기적적으로 선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이 탄생하시는 곳 베들레헴에 당도했습니다. 6절입니다.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의 내면으로 오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7절입니다.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 가운데로 내적 진리이신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적 진리이신 것은, 아기가 강보에 싸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데요, ‘강보’는 그 영적 의미로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그 속에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진리는 사랑이 없는 진리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한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사랑을 동반한 내적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장 순수한 진리,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진리가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고 합니다. 구유는 말의 먹이를 담는 통입니다. 건초 같은 것을 담는 통입니다. 그리고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유’는 말씀에서 얻는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구유의 먹이를 먹고 자라는 것처럼, 사람의 이해력은 말씀의 진리를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유는 말씀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또는 교리의 지식 안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읽으면서 교리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관’의 속뜻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관이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어디에도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모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즉 주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는 것은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나름의 종교가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종교와 그의 진리를 존중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요셉이 유대 땅으로 오기 전 갈릴리에 살던 시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때부터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펼치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땅에서 유대 땅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이며,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믿음이 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가질 수 있고요, 그리고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어떻습니까?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비록 대통령 탄핵이라는 이 기가 막히는 엄중한 상황에 부득이 갑자기 바뀐 설교이지만, 그러나 덕분에 다시 한번 주님의 탄생을 꼼꼼히 살펴보는, 그래서 우리의 첫 출발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아멘

 

원본

2016-08-0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4-0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4-06(D1)-주일예배(2592, 눅2,1-7),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0.52MB
성찬.pdf
0.14MB
축도.2025-04-06(D1)-주일예배(2592, 눅2,1-7),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0.25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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