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 진리를 지키면서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이 말에는 앞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가 관계를 끊을 성경적 근거를 찾는 쪽이라면,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는 관계를 지키고 싶지만 신앙의 차이와 감정의 상처 때문에 마음과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저는 오히려 이 두 번째 고민 속에 체어리티(charity)가 시작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선은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할 도리’를 너무 감정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댁이나 처가를 좋아해야만 도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에 동의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선하고 올바른 것을 행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불편해도 필요한 안부를 묻고, 아플 때 살피고, 부모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드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가능한 범위에서 돕고, 명절이나 중요한 가족 행사에서 해야 할 책임을 감당한다면 그것 역시 체어리티의 실제적인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하는 선행은 위선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선한 감정이 완전히 생긴 다음 선을 행하는 과정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감정이 따라오지 않더라도 ‘이것이 주님 앞에서 옳다’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가운데 우리의 사랑 자체가 조금씩 변화합니다. 속에서는 ‘가기 싫다’, ‘전화하기 싫다’, ‘왜 내가 먼저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올라오는데도 ‘그래도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판단하여 행한다면,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던 ‘합리성’(rationality)과 ‘자유’(freedom)가 작동하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감정에 끌려가는 대신 무엇이 선한지를 보고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참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체어리티는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댁이나 처가에서 ‘우리 신앙을 인정하라’, ‘우리 예배나 종교행위에 참여하라’, ‘아이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치게 하라’고 요구한다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신앙을 조롱하거나 모욕한다면 ‘이런 대화는 더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경계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그들의 신앙에 동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앞서 요한이서를 살펴보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짓과의 연합을 끊는 것’과 ‘체어리티를 끊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 신앙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은 하겠습니다.’ 이 두 문장은 얼마든지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려운 것은 바로 그다음입니다. 머리로는 ‘도리를 해야 한다’고 아는데 마음에서는 분노와 불쾌감과 억울함이 계속 올라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실제 잘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갈등을 ‘내가 교만해서 그렇다’고 자기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잘못이 분명하더라도 그 잘못을 붙잡고 ‘그러므로 나는 저 사람에게 선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악이 어느 순간 내 안의 악을 정당화하는 재료가 됩니다. 그때부터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만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 때문에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가 됩니다.

 

바로 여기서 체어리티는 감정보다 깊어집니다. 상대방을 좋아하지 않아도 미워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지내기 어렵더라도 필요한 선은 행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으로서는 존중할 수 있습니다. 만나면 불편하더라도 일부러 모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관계를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불행을 바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상당히 큰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단지 ‘가족관계를 유지했는가?’가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하여 ‘내가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 도리를 다한다’는 것을 ‘예전처럼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족관계에도 적절한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남의 횟수를 줄이면서도 예의를 지킬 수 있고, 종교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식사를 함께할 수 있으며,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도울 수도 있습니다. 전화 한 통, 병문안, 필요한 도움, 부모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이 모두 가능합니다. ‘친밀함’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같은 정도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더 지혜로운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잘 안 돼’라는 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신앙의 실패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곳에서 거듭남의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정말 아무 갈등도 없는 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신앙을 부정하거나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선은 하겠습니다’라고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도 결국 감정적으로 원수를 좋아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상대의 악 때문에 나까지 악의 질서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앞에서 살펴본 사울과 스데반을 생각하면 한 가지 중요한 태도가 더 생깁니다. 내가 상대방의 교리를 명백한 오류라고 판단하더라도 그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까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사울 안에서 주님께서는 훗날의 바울을 보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나는 정통이고 저 사람은 이단이다’라고 확신하는 내 안에 사울의 종교적 프로프리움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영원한 상태는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를 흐리지 않으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저 사람들이 잘못했으니 변화시켜 주십시오’만 기도하기보다 ‘주님, 제가 거짓에는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에게 해야 할 선은 버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들의 잘못 때문에 제 안에 미움이 지배적 사랑(ruling love)으로 자리 잡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가 해야 할 것은 하되 할 수 없는 것까지 억지로 떠맡지 않게 하시고, 어디까지 사랑하고 어디서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 분별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기도가 아니라, 그 잘못 때문에 내 영혼까지 함께 흐트러지지 않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어쩌면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관계를 얼마나 많이 유지했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이 관계 안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행동했는가?’입니다. 때로는 찾아뵙는 것이 그 답일 수 있고, 때로는 거리를 두는 것이 답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침묵해야 하고, 때로는 분명하게 ‘그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상대방을 벌주기 위해 행동하지 않고, 선과 진리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행동한다면 방향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라는 말은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신앙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사랑까지 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감정은 아직 따라오지 않더라도 주님 앞에서 내가 해야 할 선은 행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한 줄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의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있어도 내가 해야 할 선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의 요한이서 이야기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짓에는 참여하지 않되 사람에게는 선을 행하는 것, 경계는 세우되 미움으로 절연하지 않는 것.’ 아마 바로 그 어려운 중간 지점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실제 삶의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SL.15,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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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3,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 요한이서의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족 절연을 명령하는가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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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 요한이서의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족 절연을 명령하는가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실제로 요한이서 1장 10-11절은 상당히 강하게 들립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이 말씀만 떼어 놓으면 ‘잘못된 교리를 가진 사람과는 집안의 관계까지 끊어야 한다’는 결론이 가능해 보입니다. 특히 가족이나 시댁, 혹은 처가를 ‘이단’이라고 판단한 경우에는 이 말씀이 절연을 정당화하는 매우 강력한 근거처럼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서 전체의 문맥과 성경의 다른 말씀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함께 놓고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요한이서가 경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요이1:7)고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이어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9절),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10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직접적인 상황은 단순히 ‘나와 교리가 다른 혈육, 혈연, 친척’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거짓 가르침을 가지고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11절의 이유도 중요합니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핵심은 사람과 인간적인 접촉을 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의 ‘악한 일’에 참여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데 있습니다.

 

당시의 ‘집에 들인다’는 표현도 오늘날 누군가를 집에 잠깐 방문하게 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초기 교회는 가정집을 중심으로 모였고 순회 교사와 전도자들이 신자들의 집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가르쳤습니다.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친절을 넘어 그의 사역을 후원하고 그에게 활동 기반을 제공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명령에는 ‘거짓 교사를 교회의 교사로 받아들이고 그의 활동을 지원하지 말라’는 매우 실제적인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의 사역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후원하지 말라’에 훨씬 가깝습니다.

 

특히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러므로 그 사람과 인간관계를 완전히 끊어라’로 확대할 때는 성경 전체와 충돌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불신자와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뜻으로 자신의 말을 오해하지 말라고 설명하면서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5:10). 더구나 부모와 가족을 공경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서 한 구절을 근거로 ‘이단으로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일반적인 인간적 사랑과 가족으로서의 모든 책임까지 중단해도 된다’는 보편적 원칙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교제’와 ‘동조’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교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으로 만나고 안부를 묻고 어려울 때 돕는다고 해서 그의 신학적 주장을 승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 사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된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거나 가족관계에서 제거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에 참여하지 않는 것’과 ‘그 사람에게 체어리티(charity)를 행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이 믿는 모든 것을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상대방 안의 선을 사랑하고 그의 참된 유익,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유익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가르침에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교리가 틀렸으므로 그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진리를 지키려다가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길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단’이라는 판단 자체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사울과 스데반을 살펴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 편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스데반과 그리스도인들이 위험한 잘못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길에서 주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단 판정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짓 교리는 실제로 존재하며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고 저 사람은 이단이다’라는 확신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되는 순간, 사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특히 가족관계에서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저 사람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다’와 ‘그러므로 저 사람과 가족으로서의 관계도 끊어야 한다’ 사이에는 상당히 큰 거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댁의 종교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집의 종교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고, 자녀에게 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경계를 세울 수도 있으며, 반복적인 개종 압박이나 모욕이 있다면 만남의 방식과 빈도를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경계’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자녀·형제의 인간적 관계 자체를 끊는 것을 요한이서 10절이 명령한다고 말한다면, 본문의 적용 범위를 상당히 넘어설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반대편의 극단도 피해야 합니다. ‘가족이니까 무조건 만나야 한다’는 것도 성경적 원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 폭력이나 학대, 지속적인 모욕, 강압적인 종교행위, 자녀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는 행동이 있다면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강한 관계 제한도 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저들은 이단이니까 요한이서가 절연하라고 했다’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악과 해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 그 악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야 합니다. ‘교리적 불일치’와 ‘실제적인 해악’을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 문제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위험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내가 싫다’를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로, ‘나는 만나고 싶지 않다’를 ‘성경이 만나지 말라고 한다’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신앙 때문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진리를 지키기 위해 이 관계를 제한하는가, 아니면 내 불편함과 분노와 상처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정당화하고 있는가?’ 이것은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할 분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살펴본 사울의 이야기가 여기서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종교적 확신은 때로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정당화 장치가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말이 붙으면 평소에는 하지 못할 냉혹한 행동까지 의로운 행동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이 정말 주님의 뜻인지 판단할 때에는 ‘내가 성경 구절 하나를 가지고 있는가?’뿐 아니라 그 해석이 말씀 전체의 선과 진리, 특히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서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짓까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거짓을 후원하지 말고, 관계는 유지하더라도 악한 일에는 참여하지 말며, 체어리티를 행하되 진리를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스베덴보리의 원리와도 잘 맞습니다. 사랑만을 내세워 모든 거짓을 용인하는 것도 잘못이고, 진리를 내세워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따라서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라는 말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이서는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후원하여 그의 악한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씀이지, 교리가 다르다고 판단되는 가족과 모든 인간적·가족적 관계를 끊으라는 일반적인 절연 명령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한 문장으로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요한은 거짓과의 연합을 끊으라고 했지, 체어리티까지 끊으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랑을 버리지 말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짓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 바로 그 둘을 함께 지키는 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SL.14,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 진리를 지키면서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이 말에는 앞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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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2,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 열심보다 중요한 진리 사울(사도 바울의 회심 전 이름)은 하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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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단’은 누구인가 - 교리의 경계보다 더 깊은 주님의 판단

 

기독교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대개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사람이나 집단’을 뜻합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구원론, 성경관 등 일정한 교리적 기준에서 벗어나면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교회가 공동체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교리적 경계를 세우는 일 자체는 필요합니다. 모든 가르침이 똑같이 참일 수는 없으며,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이 교리적으로 이단이라고 판정하는 것과 주님께서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시는 것은 같은 것인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는 것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난 나라와 시대, 부모와 교회, 교육과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적 지식을 접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당히 정확한 교리를 배우고도 악하게 살아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불완전하거나 심지어 잘못된 교리를 배웠음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무슨 교리를 알고 있었는가?’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십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별이 생깁니다. ‘거짓을 믿는 것’과 ‘거짓을 사랑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배웠다면 그는 그것을 진심으로 참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이 선을 향하고 있다면 진리를 만나면서 잘못된 생각을 고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성경과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욕망과 지위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외적인 교리는 정통이어도 내면에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참된 이단’이라는 다소 역설적 표현이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가장 위험한 이단은 단순히 어떤 교리 문장을 잘못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악을 선이라고 하고 거짓을 진리라고 하면서 그것을 자기 삶의 원리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비틀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입술로는 정통 신앙을 고백하면서 삶으로는 그 신앙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도 이 역설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주님께 가장 강한 책망을 받은 사람들이 언제나 ‘교리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알고 율법을 가르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이라는 특정 집단을 오늘날의 어떤 교단에 그대로 대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훨씬 두려운 경고입니다.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과 ‘진리대로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21절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은 이 문제를 매우 날카롭게 비춥니다. 여기서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은 적어도 외적으로는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고백 자체를 최종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가 주님의 뜻을 삶으로 받아들였는지를 보십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믿음’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믿음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살아 있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으로 이어져야 하고, 믿는 것은 살아내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이웃을 향한 선과 ‘유용한 일’(use)로 나타나야 합니다. 아무리 정교한 교리 체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자기 우월감과 타인에 대한 멸시, 권력과 이익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면 진리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도 스베덴보리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이 나아갈 방향을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교리는 결국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만 ‘그 사람의 교리가 틀렸다’는 판단에서 ‘그러므로 그 사람은 악하며 지옥에 간다’는 판단으로 건너뛰어서는 안 됩니다. 전자는 우리가 어느 정도 검토할 수 있지만 후자는 그 사람의 내면을 아시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특히 이 원리를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전통적 기독교의 기준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이해, 속죄론, 사후세계, 성경의 속뜻 등에 관한 그의 가르침이 전통적 교리 체계와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베덴보리를 이단이라고 하니 그들이야말로 진짜 이단이다’라고 맞받아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다운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똑같은 칼을 상대에게 돌려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참인가? 이 가르침은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하는가?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가?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는가? 이웃을 사랑하고 유용한 삶을 살게 하는가?’ 그리고 동시에 그 가르침이 실제로 말씀과 스베덴보리의 저작에 부합하는지도 엄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사람이나 집단에 먼저 이름표를 붙이기보다 진리와 삶의 열매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결국 ‘누구’보다 ‘무엇’으로 바꾸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누가 이단인가?’보다 ‘무엇이 사람을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가장 깊은 차원의 이탈은 ‘교단 명부를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선을 알면서 악을 사랑하고, 진리를 알면서 자기 욕망을 위해 왜곡하며,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에서 삶이 갈라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결론은 조금 역설적일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람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 그 진리대로 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을 진리인 줄 알고 붙드는 사람보다,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을 위해 거짓으로 만드는 사람이 더 깊은 어둠에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교단의 이름표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진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최종적 내면은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오류를 발견했다고 그 사람 안의 모든 선까지 부정하지 않고, 진리를 발견했다고 그 사람 안의 모든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는 것, 바로 그 지점이 ‘이단’이라는 매우 날카로운 말을 다룰 때 특히 필요한 ‘스베덴보리의 렌즈’입니다.

 

 

 

SL.5, ‘좌파도 구원 받을 수 있나’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주님은 정치적 좌표로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들이대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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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3, ‘예수님 영접 기도’ 안 하면 구원 못 받나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 기도문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이는 주님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일정한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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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멀리할 때 (2025/7/24)

 

참 마음이 아프지만, 조용히 주님 음성 듣고자 귀 기울일 때 떠오르는 글 하나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HH.278,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

 

그리고 영계에서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신기한 현상

 

같은 원리로, 영계에서는 누가 어떤 사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면 그것이 실현된다. 그 사람이 그를 생각 속에서 보고, 그 사람의 상태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누가 어떤 사람에게 반감을 가지면 서로 떨어지게 된다. 모든 반감은 상반된 애정과 생각의 불일치에서 오기 때문에, 영계에서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의견이 같으면 서로의 눈에 보이고, 의견이 달라지는 즉시 시야에서 사라진다. (HH.194, 22장, ‘천국의 공간’)

 

유대인들, 특히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성경을 자기들하고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예수’가 얼마나 눈엣가시였을까요? 지난 2천 년 교회사뿐 아니라 구약 선지서들을 보아도 마이노러티(minority)들은 늘 당시 머조러티(majority)들에 의해 핍박과 박해를 받아왔으므로 뭐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런 일이 막상 저에게 일어나는 걸 볼 때, 마음이 참 거시기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혼자 산 걸까요? 그저 주님의 무슨 섭리 있으심이겠지 하고는 저는 오늘도 제게 맡기신 소명에만 집중합니다.

 

아침에 읽은 글 하나

 

‘핏소리’(the voice of bloods)(10절)는 체어리티가 사라졌음을, ‘땅에서 저주를’(the curse from the ground)(11절)은 왜곡된 교리를,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the 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12절)는 거기서 나오는 악과 거짓을 각각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원하여 주님을 외면했기 때문에, 영원한 사망이라는 위험에 빠졌습니다 (13-14절). 그러나 체어리티가 이식되는 것은 신앙을 통해서였기 때문에, 신앙은 불가침의 것이 되었습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the mark set upon Cain)는 이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15절). (AC.330, 창4, 개요)

 

그러니까 ‘천적인 교회, 혹은 천적 인간은 신앙도 사랑으로, 즉 교리가 달라도 사랑부터 하는 반면, 영적인 교회, 혹은 영적 인간은 사랑도 신앙으로, 즉 일단 신앙으로 사랑을 학습한 후 하기 때문’이라는, 전에 제가 첨부한 설명글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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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을 보호하시는 이유 (2025/7/14)

 

다음은 창세기 4장, 저 유명한 가인과 아벨 본문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17)

 

이 가인 본문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에서는 글 번호 AC.324-403에 걸쳐 다루고 있지만, 오늘은 한 가지, 곧 여호와는 왜 친 아우를 살해한 자를 보호하시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하시는,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의 속뜻에만 주목하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에도 사실 여러 아르카나가 있어, 그리고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하나를 분리해 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한 가지,

 

‘심지어 그 신앙이, 분리된 신앙, 곧 사랑 따로 신앙 따로 신앙일지라도 신앙에 대한 폭행은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는 이것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 창세기 첫 열한 장, 곧 1장부터 11장까지는,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리신 바에 의하면 실제 역사가 아닙니다. 여기는 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스토리텔링식 역사 서술 방식으로, 지구의 지질학적 나이가 45, 6억 년 정도임을 감안하면, 그리고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 특히 날 수, 연 수의 의미가 상태들과 그 변화임을 감안하면, 그래서 비록 총 11장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수천, 수만, 아니 수십, 수백만 년의 역사일지도 모릅니다. 말씀은,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인류의 출발, 그 첫 등장에 대한 역사적 사실 확인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는 아브라함의 등장부터입니다. 참고로, 그래서 창11까지 말씀에 나오는 인명들은 어느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 이름으로 부른 교회, 교리, 신앙을 말합니다. 즉 예를 들면, 므두셀라가 969세를 살았다는 건, 므두셀라라는 교회, 혹은 교리나 신앙이 숫자 969로 표현하는 어떤 장구한 세월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AC.66,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AC.66)

66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다음과 같았는데요, 그들은 어떤 지상에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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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람 아담은 일곱째 날, 곧 안식일 상태,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말하며, 이는 곧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하나 된 상태입니다. 여기 사랑과 신앙은 주님 사랑, 주님 신앙을 말합니다. 이때는 주님 사랑 안에서만 주님 신앙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던 태고교회가 시간이 흐르자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났는데 이들이 곧 가인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올인하는 대신 주님을 연구하는 일에 올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신비를 탐구, 그걸 교리화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었지요. 당연히 이들의 삶은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를 소홀히 하는 삶이었고, 그러므로 이들은 오리지날 태고교회 입장에서 보면 이단(heresy)이었습니다.

 

반면, 이런 중에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여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아벨입니다. 이들은 주님께 받아들여졌지만, 가인이라는 교회는, 당연한 얘기지만, 주님이 받으실 수 없었습니다. 참고로, 교회가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이 둘 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라는 교회에서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가인이라는 교회는 그럼에도 돌이키는 대신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자신들한테서 완전히 끊어내었는데, 즉 박탈하고 말았는데, 이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 끔찍한 삶이 펼쳐지는데요, 그러자 가인은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소연합니다. 사람은, 교회는 오직 체어리티로만 주님과 결합하는데, 이 유일한 연결고리를 끊어냈으니, 즉 스스로 박탈하고 말았으니, 이제는 철저히 악과 거짓만 남은 상태로 큰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러자 주님은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그걸 이제 알았냐? 너는 선을 넘었으니 어쩔 수 없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니 나는 모르겠다 보통 이럴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예상을 깨고, 주님은 이런 가인일지라도 그를 지키시며, 보호하십니다. 가인은 형제 살해범, 곧 이단인데도 말입니다.

 

이 아르카나의 결론만 말씀드리면, 주님의 섭리는 이후 인류의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가 아벨의 길이 아닌, 결국 가인의 길을 걷게 될 걸 아시고, 비록 그가 이단이지만 그의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셔서, 그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큰 그림을 그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 ‘그의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표현 안에는 사실은 어마어마한 배경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여기서 다루기에는 무리여서 그냥 이렇게만 넘어가겠습니다.

 

※ 창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에 나오는 ‘아담’(the man)과 그의 ‘아내’(wife)는 앞 19절에 나오는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로 상징된 새 교회를, 이름이 셋(Seth)인 그녀의 ‘아들’(son)은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가인의 계보는 역사 속에 사라지고, 아담과 하와로부터 새로운 아들이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가인에 대하여 이런 섭리를 갖고 계시는데, 이런 주님의 계획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인은 이단이야, 가인은 아벨을 죽였어, 그러므로 가인을 죽여야 해 하며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은, 주님 보실 때 신앙에 대한 폭행이며, 곧 신성모독을 범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단지 가인에 대한 소멸만 막으셨을 뿐, 그에 대한 저주는 계속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 저 같으면 시작부터 헝클어져서 에이, 파토났네... 그냥 다 리셋하고, 첨부터 다시 하지 할 것 같은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정말 번거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신 신(The Divine)이십니다. 그런 분이 또 사랑의 신이신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이단을 대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첫째, 이단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교리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독교, 개신교 교리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신앙 따로 체어리티 따로의 삶, 곧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삶을 산다면, 그는 주님이 보실 땐, 그가 오히려 가인의 후예, 곧 정통 이단입니다. 반면, 개신교에서 말하는 이단이라 하더라도 그가 그의 신앙 안에서 체어리티의 삶을 산다면, 그는 주님 보실 때 아벨의 후손인 것이고 말입니다. 이런 분들은 혹시 생전에 회심하지 못해도 사후, 돕는 천사들에 의해 재교육받고, 주님을 영접하여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은 생전에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이지, 속 사람의 상태와 상관없이 무슨 라이센스만 취득하면 무조건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HH.318,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HH.318-328)

36천국에 있는 이교도, 즉 교회 밖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 318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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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단에 속했다고 강제로 무릎 꿇리고, 개종 기도를 시키고, 강요와 윽박, 협박과 위협을 가하는 것은 신앙에 대한 폭행이며, 주님에 대한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이런 일을 주도한 개신교인은 아멘, 할렐루야! 오,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길 잃은 어린양을 구원시켰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착하고 신실할수록, 그리고 굳은 신념의 소유자일수록 더욱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합니다. 무지하기 때문인데요, 자기가 하는 일이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옳고 그름, 선과 진리를 오직 학습으로만 알고, 퍼셉션(perception, 천사들과 주님 간 커뮤니케이션 방법), 곧 하늘의 음성으로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무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하더라도 혹시 주님은? 하며 늘 주님의 눈치 볼 줄은 알아야 합니다. 저런 개신교인은, 아니 어느 종교라 하더라도 자기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저렇게 하는 사람은 평소 그의 삶의 태도가 주님 앞에 어떤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유1:9)

 

천사장 미가엘조차도 심지어 마귀에 관한 일조차 주님 앞에 조심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도 그래야겠습니다. 몰라서 그럴 수는 있으나 겸손해야 합니다. 무의식 중에라도 늘 주님을 경외하며, 모든 언변과 행실을 조심해야 합니다. 경외란 주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결론입니다.

 

가인같은 이단도 주님은 존중하셨거늘, 만일 내가 함부로 대하는 이 사람의 신앙이 오히려 아벨의 신앙이라면, 나중에 그 후과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유대인들도 신념의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 되었고, 사울 시절 바울도 그렇게 교회를 핍박, 박해하였으나 결국 거꾸러지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을 살펴보고 그 열매가 아벨의 열매이면, 비록 내가 믿는 교리와 다르더라도 시비, 훼방, 간섭 등을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오히려 주님 앞에 자기 할 도리만 다 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기 할 도리’는 심지어 전도, 선교, 목회보다도 더 우선합니다. 주님의 나라는 속 사람의 나라인데, 이 속 사람은 ‘자기 할 도리’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굳은 신념으로 함부로 사는 사람보다는 사랑으로 늘 주님 뒤에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랑보다 더 강력한 신념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언행에 있어 항상 나의 이 말과 글, 행위와 행실로 주님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가, 증거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울 시절 바울처럼 바보같이 나의 이 열심으로 오히려 주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 ‘주님을 드러낸다’는 것은, 거기에 주님이 느껴지는가, 사람들이 내 말, 내 글, 곧 일상 중 나를 접하고 주님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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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단(heresy)인가? (2025/4/21)

 

오늘날 저마다 무슨 이단 대책 위원회다, 이단 심판, 혹은 판정 위원회다 하여 열심히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현대종교’라는 앱을 켜면 수많은 이단 목록이 나오지요. 전에는 저도 여기를 자주 찾곤 했습니다. 이 모든 분들의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며, 한편으론 감사한 마음도 있습니다.

 

시야가 좀 더 높아진, 그리고 넓어진 지금은, 그러나 이 ‘이단’(heresy)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지금의 저 이단 판정의 기준은 ‘교리’인데요, 즉 내 교리를 기준으로 봤을 때, 너는 틀렸다 판정하는 것이 지금의 이단 판정입니다. 교리라는 것은 진리에서 추출하는 것이므로, 그러니까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로 봤을 때, 네가 믿는 진리는 틀렸다는 것이죠.

 

이런 모습은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의 일반적 특징인데요, 놀라운 것은, 이들은 ‘지적인 면’(the intellectual part)으로만 거듭날 수 있어, 주님은 이들 역시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믿는 그 교리 눈높이에 맞춰서 말이죠.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가 믿는 교리에 따라 선을 행하면 천국 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 묻은 좀 어설픈 오류들은 천국에 오르기 전 다 정돈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중요한 건, 교리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자기 교리에 녹아져 들어간 주님의 신성을 따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에 합당한 선이 구비되기 때문인데, 천국은 선의 나라이므로 이는 매우 중요한 필수 구비 요건 중 하나입니다. 참고로, 그러나 이 선을 행하는 것 또한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책 창세기에 나오는 첫 번째 이단이 가인입니다. 창세기 첫 1, 2, 3장의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였으나, 창세기 4장,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바로 가인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요, 이들의 속뜻을 살펴보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를 ‘아벨’(Abel)이라고 합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이단의 기준입니다. 즉 가인 편에 서면 이단, 아벨 편에 서면 정통(?), 그러니까 안전합니다.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랑과 신앙이 일치하는가? 그러니까 나는 주님 사랑 따로, 주님 신앙 따로인가 아닌가 말이죠. 말로만, 립 서비스로만 이웃 사랑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글 쓰는 저 자신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네요... 어쩌면 우리 모두 여전히 가인의 후손, 후예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우리를 건사하여 주시는 주님,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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