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7 심화

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레3의 마지막 말씀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였습니다. 그런데 레7:22-27에서는 같은 명령이 훨씬 더 길고 강하게 반복됩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고, 어떤 피도 먹지 말라고 하며, 그것을 먹는 사람은 백성 가운데서 끊어진다고까지 합니다. 왜 기름과 피는 이처럼 특별하게 구별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5943(창45:18)은 레7:23-26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의 기름과 그것을 불사르는 것이 천적 신성 자체,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피 역시 제사의 핵심 상응입니다. 앞에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피를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기름과 피는 제사의 두 중심인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사랑의 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그것을 먹으면 안 될까요? ‘먹는다’는 것이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는 원리를 함께 놓으면 매우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살아야 하지만 그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과 진리는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언제나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바로 여기서 가장 미묘하게 개입합니다. 악한 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보다 오히려 선한 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영적으로 더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다’, ‘내가 희생했다’,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 ‘내가 사람을 변화시켰다’고 하면서 주님에게서 온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 규례는 선과 진리를 거부하라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충분히 받아 살아가되 ‘그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라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선은 인간 안에 있지만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진리도 인간의 이해 안에 있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이 구별이 지켜질 때 인간은 주님의 선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면서도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 자유의 역설입니다. 천사들은 선을 자기 의지에서 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레7에서 기름과 피가 다시 한번 엄격하게 보호되는 것은 제사의 중심을 지키는 일입니다. 거듭남의 마지막까지 인간이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습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의 것이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기 삶으로 삼되 그 근원을 proprium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 인정 안에서 주님과 인간의 참된 화목과 결합이 지속됩니다. (SWC.레7 심화 4)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레7:30-34에는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재미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화목제물을 가져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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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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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7 심화

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드린 제사 자체가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 고기는 ‘가증한 것’이 된다고 합니다. 하루 차이인데 왜 이처럼 엄격할까요? 본문은 실제로 셋째 날의 고기를 명백하게 금합니다.

 

여기에서도 먼저 선을 하나 그어야 합니다. ‘셋째 날’이라는 말만 보고 곧바로 주님의 부활 셋째 날에 연결하거나, 숫자 3의 일반적인 상응을 그대로 대입하여 레7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번에 확인한 스베덴보리의 1차 원전에서는 레7:17-18을 직접 그렇게 해설하는 근거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 자체의 의미에서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누리며 그분과 교통하고 결합하는 제사입니다. ‘먹는 것’이 자기 것으로 삼음을 나타낸다면,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데도 신적 질서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살아 있는 선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것이지 인간이 한 번 받아 창고에 넣어 두고 ‘이것은 이제 내 선이다’라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선의 근원을 주님에게 돌리는 동안 그 선은 살아 있지만, 그것을 proprium의 공로나 소유로 붙잡으면 성질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많은 선을 행한 사람이 어느 순간 ‘나는 평생 이렇게 선하게 살아왔다’는 자기 의에 머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선은 실제로 주님에게서 받은 선이었을지라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저장하여 현재의 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면 더 이상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어제의 체어리티가 오늘의 자기 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째 날의 고기를 ‘왜 정확히 셋째 날인가?’까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거룩한 선을 신적 질서 밖에서 붙들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큰 원리는 화목제의 전체 상응과 잘 맞습니다. 남은 것은 불살라야 합니다. 이미 그 상태의 쓰임을 다한 것을 proprium이 붙잡고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경험에도 적용됩니다. 오래전의 은혜 체험, 과거의 뜨거운 기도, 이전의 사역 성과가 오늘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감사할 기억이지만 오늘의 양식은 아닙니다. 오늘은 오늘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레7의 셋째 날 규례는 적어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경계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을 받아 기뻐하되 그것을 내 공로로 저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선은 언제나 현재 주님에게서 오는 살아 있는 선이어야 합니다. 화목은 과거의 선을 소유하는 상태가 아니라 지금 주님에게서 받고 지금 이웃과 나누는 살아 있는 결합입니다. (SWC.레7 심화 3)

 

 

 

SW.레7 심화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SW.레7 심화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레3의 마지막 말씀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였습니다. 그런데 레7:22-27에서는 같은 명령이 훨씬 더 길고 강하게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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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레7의 화목제에는 아주 미묘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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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는 내적인 차원인데, 거기서 나온 선이라면 당연히 살아 있는 선이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핵심은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그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사람이 인정한다’는 것이 아직 완전히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AC.9의 사람은 이전 상태보다 분명히 진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외적인 규칙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했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는 여전히 ‘내가 선을 생각했고, 내가 선을 선택했고, 내가 선을 행했다’고 여깁니다. 선이 안으로부터 나타나고 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이 없다’는 말을 그 선행이 전혀 무가치하다거나 실제로 아무 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 행위의 외적인 유익성보다 영적인 생명의 귀속입니다. 선의 생명은 인간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동안에는 그 선을 아직 주님에게서 오는 살아 있는 선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변화만 생각하면 AC.9의 사람은 이미 상당한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선을 행하는가?’뿐 아니라 ‘그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를 묻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한 일을 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가 했다’, ‘내가 옳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고 자기 공로를 붙들 때에도 proprium은 매우 미묘하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사람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에서 사람은 실제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노력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께서 하실 것이다’라고 기다리는 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동시에 선을 행할 능력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 갑니다.

 

이 때문에 AC.9의 세 번째 상태는 지나가야 할 잘못된 상태라기보다 필요한 성장 과정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을 때 자기가 걷는다고 느끼는 것처럼,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도 처음에는 자기가 회개하고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자유감과 자기 활동감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시면서, 점차 선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깨닫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으로부터’라는 표현은 이미 완성된 거듭남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 사람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 영향이 겉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사람의 의식과 귀속은 아직 자기 자신에게 기울어 있을 수 있습니다. AC.8에서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했다면, AC.9에서는 그 구별이 실제 선행 가운데서도 더 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돌아볼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내가 기도하고 봉사하고 이웃을 돕고 말씀을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누구에게 공로를 돌리고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을 때 섭섭해하거나, 자신의 선행 때문에 자신을 더 높은 사람으로 여기거나,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진다면 ‘선한 일을 하는 나’를 붙들고 있는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했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9는 그러한 발견 자체가 거듭남의 과정 안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서 멈추게 하지 않으시고 점차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이끄십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선을 행하되 점점 더 자기 공로를 내려놓게 됩니다.

 

따라서 AC.9의 ‘생명이 없다’는 표현은 선행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그 선행이 어디에서 참된 생명을 받아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한 진전입니다. 그러나 그 선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려면 사람은 그 생명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결국 거듭남은 ‘내가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마음과 삶으로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AC.9 심화 1)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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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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