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과 아비후 사건 직후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이것 때문에 ‘나답과아비후가술에취해다른불을드렸던것이아닌가?’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음주 여부를 사실처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포도주 금지 규례가 이 자리에 놓인 영적 이유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적인 단서를 줍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71(창9:21)은 레10:8-10을 직접 인용하면서 ‘술취함’이 신앙의 진리에 관한 오류와 혼란을 표상했기 때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포도주 자체가 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377은 포도주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성찬에서도 포도주가 거룩하게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에는 반대 의미도 있습니다. 진리가 악과 섞여 왜곡되면 포도주는 거짓을 나타내며, ‘술취함’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류 속에서 비틀거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레10의 핵심은 술이라는 물질보다 ‘분별력을잃는상태’입니다.
실제로 본문 자체가 이유를 말합니다. ‘그리하여야너희가거룩하고속된것을분별하며부정하고정한것을분별하고’ 백성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적 흥분이 아니라 맑은 영적 분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다른불’과 연결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문제는 거룩해 보이는 것과 실제로 거룩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향로와 향과 성소와 제사장이라는 외적 요소만 보면 모두 거룩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의 불은 다른 불이었습니다.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을 구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감동적이라고 해서 모두 신적이지 않고, 열정적이라고 해서 모두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교리가 말씀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내가강하게느낀다’는 사실과 ‘이것이주님의진리다’라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영적 생활은 단순한 흥분보다 분별을 향합니다. 무엇이 선처럼 보이는가보다 그 선의 근원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리처럼 들리는가보다 그것이 실제 말씀과 주님의 사랑에 일치하는지를 살핍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이 분별은 더욱 중요합니다. 레10:11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포도주 금지 규례는 레10의 중심 주제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다른 불과 주님의 불을 분별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하는 것, 이것이 주님의 쓰임을 맡은 사람에게 필요한 영적 맑음입니다. (SWC.레10심화3)
레위기 10장은 바로 앞 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레9:24에서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제단위의번제물과기름을’ 살랐습니다. 그리고 레10:2에서도 다시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 나답과 아비후를 삼킵니다.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인데 하나는 제물을 받아들이는 불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장을 삼키는 불입니다. 이 충격적인 대비가 레10전체를 여는 열쇠입니다. 문제는 불이라는 외적 현상 자체가 아니라 ‘어떤사랑에서예배가나오는가’입니다.
1절에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불을 담고 향을 놓아 여호와 앞에서 분향합니다. 겉모습만 보면 모든 것이 종교적입니다. 그들은 이방 제사장도 아니고 아론의 아들들이며, 향로를 들고 성소에서 향을 피웁니다. 문제는 단 하나, 그것이 ‘여호와께서명령하시지아니하신다른불’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75(출24:1)는 이 사건을 직접 해설하면서 나답과 아비후가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를 표상했으며, 그들이 ‘다른불’을 사용한 것은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다른 근원에서 예배와 교리를 세우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불은 사랑의 선을, 향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C.9965(출28:43)는 이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제단의불’은 신적 사랑,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표상하지만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불’은 지옥에서 나오는 사랑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AC.10244(출30:20)도 레10:1-2를 직접 인용하면서 그들의 행동은 ‘주님을향한사랑이아닌다른사랑에서나오는예배’를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10의 ‘다른불’은 단순히 불을 잘못 가져온 제의상의 실수가 아닙니다. 예배의 겉모습은 거룩하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내적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 아닌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레9와 레10의 연결이 매우 깊어집니다. 레9에서 인간은 제물을 준비하고 제단에 올렸지만 마지막 불은 ‘여호와앞에서’ 나왔습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그 불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들의 ‘다른불’을 가져옵니다. 레9의 불은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내려오는 사랑이고, 레10의 다른 불은 인간의 proprium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께 올리려는 사랑입니다. 겉으로는 둘 다 불이고 둘 다 예배에 사용되지만 근원은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예배하고있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나를예배하게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설교도 다른 불로 할 수 있고, 기도도 다른 불로 할 수 있으며, 봉사와 선교와 성경 연구까지 다른 불로 할 수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영향력을 갖고 싶은 욕망, 자기 교리를 지키려는 집착이 거룩한 행위의 연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향은 같아 보여도 그 향을 태우는 불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이 나답과 아비후를 삼킨 것은 하나님께서 순간적인 실수에 격분하여 두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죽음’을 표상적 예배의 소멸과 천국과의 결합이 끊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AC.10244는 당시 이스라엘 교회에서 외적 의식이 내적인 천국의 실재를 정확히 표상할 때 그 표상을 통해 천국과의 결합이 있었으며, 규정된 표상을 깨뜨리면 그 결합을 더 이상 나타낼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다른사랑에서나오는예배에는천국과의결합이없다’는 영적 사실을 극적으로 표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의 ‘나는나를가까이하는자중에서내거룩함을나타내겠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이 갈수록 무엇이 주님의 것이고 무엇이 proprium의 것인지 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다루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를 거룩한 것에 섞으면 그것은 더 위험한 혼합이 됩니다. 목회와 말씀 연구와 예배 인도처럼 거룩한 것에 가까운 쓰임일수록 ‘내불인가,주님의불인가?’라는 자기 점검이 더 필요합니다.
4절로 7절에서는 나답과 아비후의 시신이 진영 밖으로 옮겨지고 아론과 남은 아들들은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어 애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은 나답과 아비후가 진영 밖으로 옮겨진 것을 직접 언급하면서 그들의 예배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천국에서 나온 예배가 아니었음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이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가족의 슬픔을 부정하라는 일반 명령이 아니라 표상교회 안에서 천국에 속하지 않은 예배가 밖으로 제거되는 장면입니다. 아론의 ‘잠잠함’ 역시 그의 내면 상태를 우리가 함부로 심리적으로 추측하기보다는 본문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8절부터 장면은 갑자기 포도주와 독주 문제로 넘어갑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이어집니다. ‘거룩하고속된것을분별하며부정하고정한것을분별하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나답과 아비후 사건 뒤에 우연히 붙은 별개의 음주 규정이 아닙니다. 레10의 두 번째 핵심인 ‘분별’의 문제입니다.
AC.1071(창9:21)은 레10:8-9를 직접 인용하면서 술 취함이 신앙의 진리에 관한 오류와 정신적 혼란을 표상하기 때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포도주와 독주가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포도주 자체는 좋은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할 수 있지만, 술 취함은 진리가 거짓과 뒤섞여 올바른 판단을 잃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AC.6377도 포도주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사랑과 신앙의 선을, 반대 의미에서는 악에서 나온 거짓을 나타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에 고정된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문맥과 계열 안에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의 핵심은 금주 자체보다 ‘분별’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고 그것을 백성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불의 근본 문제도 바로 분별의 실패였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기에게서 나오는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고,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와 다른 근원에서 나오는 교리를 구별하지 못하면 외적으로 아무리 거룩한 예배를 드려도 내적으로는 다른 불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단순히 ‘선한가악한가’를 넘어 ‘이선처럼보이는것이어디에서오는가’를 분별하게 됩니다.
12절로 15절에서 모세는 남은 제사장들에게 소제와 화목제의 몫을 규례대로 먹으라고 다시 명합니다. 두 형제가 죽은 직후에도 거룩한 제사의 질서는 계속됩니다. 이것은 냉혹함을 의미하기보다 주님의 질서가 인간의 충격과 혼란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레6과 레7에서 보았듯 거룩한 것을 먹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기 삶으로 삼는 것과 연결됩니다. 다른 불이 제거된 뒤 필요한 것은 빈자리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16절로 20절에서 뜻밖의 갈등이 생깁니다. 모세가 속죄제 염소를 찾았는데 이미 불살라져 있었습니다. 규례대로라면 피를 성소 안으로 가져가지 않은 이 속죄제물은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습니다. 모세는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합니다. 그런데 아론은 ‘오늘이런일이내게임하였는데내가속죄제물을먹었더라면여호와께서좋게여기셨겠느냐’고 답합니다. 놀랍게도 20절은 ‘모세가그말을듣고좋게여겼더라’고 끝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레10전체를 균형 있게 잡아 줍니다. 앞부분만 읽으면 이 장은 ‘규칙에서조금이라도벗어나면죽는다’는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실제 규례에서 벗어난 일이 있었음에도 모세가 아론의 설명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나답과 아비후의 핵심 문제는 단순한 절차상의 사소한 실수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처럼 문제의 중심은 ‘다른불’, 곧 다른 사랑과 다른 근원에서 나온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론은 비극 가운데서 거룩한 것을 형식적으로 먹는 것이 과연 주님 앞에 합당한지를 묻고 있습니다.
다만 이 마지막 사건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레10:19-20을 직접 상세하게 해설한 강한 원전을 이번 검토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론의슬픔은정확히이것을상응한다’거나 ‘모세가받아들인것은정확히이런영적상태를뜻한다’고 세부 상응을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은 ‘문자적절차의기계적실행’과 ‘그규례가섬기는거룩한목적’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순종은 자기 뜻대로 규례를 바꾸는 것도 아니지만, 외적 형식만 수행하면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레10은 결국 ‘거룩함을어떻게분별할것인가?’라는 장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향을 피웠지만 다른 불을 사용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포도주와 독주를 피하여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규례를 아는 모세와 비극을 겪은 아론 사이에서 ‘무엇이여호와께서좋게여기시는것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됩니다. 이 모든 장면의 중심에는 분별이 있습니다.
레9에서 주님에게서 나온 불은 제물을 사르고 백성을 경배하게 했습니다. 레10에서 인간이 가져온 다른 불은 예배 자체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 안에 ‘불이있는가없는가’가 아닙니다. 뜨거운 열심 자체도 기준이 아닙니다. 그 불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기준입니다. 자기애에서 오는 열심인지, 세상 사랑에서 오는 열심인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인간이 자기 불을 만들어 주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다시 주님을 예배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레10의 두 불은 겉으로는 닮아 있지만 그 근원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바로 그 두 불을 점점 더 분명하게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SWC.레10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