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9,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 거듭남이 쓰임이 되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1여덟째 날에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다가 2아론에게 이르되 속죄제를 위하여 흠 없는 송아지를 가져오고 번제를 위하여 흠 없는 숫양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 드리고 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속죄제를 위하여 숫염소를 가져오고 또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되고 흠 없는 송아지와 어린 양을 가져오고 4또 화목제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드릴 수소와 숫양을 가져오고 또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오라 하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하매 5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회막 앞으로 가져오고 온 회중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선지라 6모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니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7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되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 8이에 아론이 제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9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아론에게 가져오니 아론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제단 밑에 쏟고 10그 속죄제물의 기름과 콩팥과 간 꺼풀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고 11그 고기와 가죽은 진영 밖에서 불사르니라 12아론이 또 번제물을 잡으매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그에게로 가져오니 그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13그들이 또 번제의 제물 곧 그의 각과 머리를 그에게로 가져오매 그가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14또 내장과 정강이는 씻어서 단 위에 있는 번제물 위에서 불사르니라 15그가 또 백성의 예물을 드리되 곧 백성을 위한 속죄제의 염소를 가져다가 잡아 전과 같이 죄를 위하여 드리고 16또 번제물을 드리되 규례대로 드리고 17또 소제를 드리되 그 중에서 그의 손에 한 움큼을 채워서 아침 번제물에 더하여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18또 백성을 위하는 화목제물의 수소와 숫양을 잡으매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그에게로 가져오니 그가 제단 사방에 뿌리고 19그들이 또 수소와 숫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콩팥과 간 꺼풀을 아론에게로 가져다가 20그 기름을 가슴들 위에 놓으매 아론이 그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21가슴들과 오른쪽 뒷다리를 그가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드니 모세가 명령한 것과 같았더라 22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23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24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레9)

 

해설

레위기 9장은 ‘여덟째 날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짧은 표현은 앞의 레8과 레9을 하나로 연결하는 열쇠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레 동안 회막 문을 떠나지 않고 위임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이제 실제 제사장 사역이 시작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228(출22:30)은 ‘일곱’이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제사장 위임이 이레 동안 계속되었다고 설명한 뒤, ‘여덟째 날’은 ‘그 다음 상태의 첫 단계’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9의 여덟째 날은 단순히 달력상의 다음 날이 아닙니다. 준비가 완성된 뒤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이것은 레8과 레9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레8에서 아론은 씻김을 받고, 옷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고,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고, 손에 제물을 받아 흔들고, 이레 동안 회막 문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아직 ‘준비’였습니다. 레9에서 비로소 아론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립니다. 거듭남도 이와 같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악을 살피고, 마음을 정돈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준비시키시는 목적은 결국 그 사람이 실제 삶에서 선한 쓰임을 행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여덟째 날은 준비된 선과 진리가 실제 삶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상태의 첫 장면은 의외입니다. 아론이 제사장이 되었으니 곧바로 백성을 위한 제사부터 드릴 것 같지만, 먼저 ‘자기를 위한 속죄제’와 ‘자기를 위한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7절에서 모세는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라고 명령합니다. 8절부터 14절까지 실제로 아론 자신의 속죄제와 번제가 먼저 드려지고, 그 후 15절부터 백성을 위한 제사가 시작됩니다. 주님의 쓰임을 맡았다고 해서 인간 자신의 정결 과정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기 전에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계속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이 점은 모든 영적 쓰임에서 중요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말씀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자기 내면을 돌아볼 필요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이제 제사장이니 백성의 문제만 다루면 된다’가 아닙니다. 먼저 자신의 속죄제와 번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은 잘 보면서 자신의 악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진리를 가르치면서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면 쓰임은 쉽게 proprium의 도구가 됩니다. 참된 쓰임은 자기 정결을 지나 다른 사람에게 흘러갑니다.

 

15절부터는 백성을 위한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가 차례로 드려집니다. 레1-7에서 하나씩 배웠던 제사들이 이제 실제 제사장 사역 안에서 하나의 계열로 등장합니다. 먼저 죄와 관련된 정결이 있고, 이어 전체를 주님께 드리는 번제가 있으며, 선과 진리가 삶의 예물이 되는 소제가 있고, 마지막에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나타내는 화목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기계적인 ‘거듭남의 네 단계’로 고정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이 배열에는 분명한 영적 질서가 보입니다.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이 결합보다 먼저이며, 주님께 드려짐과 선한 삶을 거쳐 마침내 화목과 교통으로 나아갑니다.

 

18절로 21절의 화목제에서는 지금까지 배운 상응들이 다시 모입니다.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은 기름과 콩팥과 간 꺼풀이 제단에 올라갑니다. AC.10033(출29:13)은 제사의 피가 신적 진리를, 기름이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단에서 피와 기름이 함께 다루어지는 것은 진리와 선의 결합이라는 제사 전체의 중심을 다시 보여 줍니다. 그리고 가슴들과 오른쪽 뒷다리는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립니다. 레7에서 보았듯 가슴은 체어리티의 영적 선과, 오른쪽 뒷다리는 더 내적인 천적 선과 연결됩니다. 레1-7에서 하나씩 배운 제사의 언어가 이제 레9의 실제 예배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2절에서 아론은 모든 제사를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아론의 손은 제물을 다루던 손이었습니다. 레8에서는 그 손에 제물을 올려놓아 요제로 흔들게 했고, 그 손에 있는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손이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마침내 다른 사람을 향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쓰임의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아 자기 안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단순히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말보다 훨씬 깊습니다. AC.1422(창12:3)는 축복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천적·영적·자연적인 모든 좋은 것을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아론이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하는 장면은 제사장 자신의 힘으로 복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가 제사장의 쓰임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레8에서 ‘손을 채우셨던’ 주님께서 이제 레9에서는 그 손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복을 흘려보내십니다.

 

23절에서는 모세와 아론이 함께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백성을 축복합니다. 그때 마침내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납니다.’ 회막 자체가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AC.9784(출27:20)가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회막은 ‘주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회막이 바로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을 만나시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와 아론이 회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와 축복하고 그 직후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순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쓰임의 능력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갔다가 그분에게서 받아 나올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것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AC.5922(창45:13)는 ‘여호와의 영광’을 신적 진리와 연결하며, 천국에서 신적 진리가 빛과 영광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AC.10574(출33:18)는 더욱 분명하게 ‘여호와의 영광’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가장 참된 의미에서는 그 빛 가운데 나타나시는 주님 자신과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9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은 단순히 눈부신 초자연적 현상을 보았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사와 정결과 쓰임을 통해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 가운데 드러나는 것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절정이 찾아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여기에서 인간이 피운 제단의 불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이 불은 ‘여호와 앞에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의 상응을 매우 일관되게 설명합니다. AC.6832(출3:2)는 제단 위에서 계속 타야 했던 불을 신적 사랑과 연결하고, 레6:12-13의 꺼지지 않는 불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레9 마지막에 여호와에게서 나온 불이 제물을 사르는 것은 모든 참된 예배의 생명이 결국 인간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사랑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레6의 ‘꺼지지 않는 불’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레6에서는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를 표상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레9에서는 그 불의 근원이 눈앞에 드러납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옵니다.’ 인간이 제물을 준비하고, 제사장이 규례대로 행하고, 피를 뿌리고 기름을 놓지만 마지막으로 제사를 받아들이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예배의 형식을 준비할 수는 있지만 그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불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장면은 거듭남에서도 결정적입니다. 인간은 말씀을 읽고, 악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선을 행하고, 이웃을 섬깁니다. 이런 협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실제 영적 생명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노력 자체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가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올려놓을 수는 있지만 불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내려옵니다.

 

그래서 백성의 마지막 반응도 의미가 깊습니다. 그들은 불을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립니다.’ 모든 준비와 모든 제사가 결국 인간의 자기 만족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 앞의 경배로 끝납니다. 제사장이 훌륭하게 의식을 마쳤으므로 사람들이 아론을 칭찬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광과 주님에게서 나온 불을 보고 모두가 엎드립니다. 참된 쓰임은 사람의 시선을 쓰임을 행한 사람에게 모으지 않고 주님께 돌립니다.

 

레8과 레9을 함께 놓으면 하나의 아름다운 거듭남의 계열이 보입니다. 레8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을 씻으시고, 진리를 입히시고, 사랑의 기름을 부으시고, 귀와 손과 발을 거룩하게 하시며, 손에 선과 진리를 채우십니다. 그리고 이레의 충만한 준비가 끝난 뒤 레9의 여덟째 날이 옵니다. 이제 인간은 받은 것을 실제 쓰임으로 행합니다. 먼저 자신을 계속 정결하게 하고, 그 다음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며, 마침내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그때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님에게서 불이 나옵니다. 거듭남은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준비하여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선이 흘러가게 하시고, 마침내 그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이 드러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레9의 이 약속은 바로 그렇게 성취됩니다. (SWC.레9 해설)

 

심화

1. 왜 제사장 위임식이 끝난 다음 날을 ‘여덟째 날’이라고 했을까?

 

SW.레9 심화1, 왜 제사장 위임식이 끝난 다음 날을 ‘여덟째 날’이라고 했을까?

SW.레9 심화1. 왜 제사장 위임식이 끝난 다음 날을 ‘여덟째 날’이라고 했을까? 레9은 단순히 ‘다음 날’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여덟째 날에’라고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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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보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 했을까?’

 

SWC.레9 심화2, ‘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보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 했을까?’

SWC.레9 심화2. ‘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보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 했을까?’ 아론은 이미 레8에서 제사장으로 위임되었습니다. 물로 씻었고 거룩한 옷을 입었으며 관유를 받았고,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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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SWC.레9 심화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SWC.레9 심화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레9에는 같은 약속이 두 번 나옵니다. 6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고 말하고, 23절에서는 모든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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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아론은 제사를 마친 뒤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SWC.레9 심화4, ‘왜 아론은 제사를 마친 뒤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SWC.레9 심화4. ‘왜 아론은 제사를 마친 뒤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레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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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살랐을까?’

 

SWC.레9 심화5, ‘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살랐을까?’

SWC.레9 심화5. ‘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살랐을까?’ 레9의 마지막은 장엄합니다. 아론이 모든 제사를 마치고 백성을 축복하고,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 다시 백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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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1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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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8,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고 - 제사장 위임식에 감추어진 거듭남과 쓰임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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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7 심화

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레3의 마지막 말씀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였습니다. 그런데 레7:22-27에서는 같은 명령이 훨씬 더 길고 강하게 반복됩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고, 어떤 피도 먹지 말라고 하며, 그것을 먹는 사람은 백성 가운데서 끊어진다고까지 합니다. 왜 기름과 피는 이처럼 특별하게 구별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5943(창45:18)은 레7:23-26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의 기름과 그것을 불사르는 것이 천적 신성 자체,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피 역시 제사의 핵심 상응입니다. 앞에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피를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기름과 피는 제사의 두 중심인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사랑의 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그것을 먹으면 안 될까요? ‘먹는다’는 것이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는 원리를 함께 놓으면 매우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살아야 하지만 그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과 진리는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언제나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바로 여기서 가장 미묘하게 개입합니다. 악한 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보다 오히려 선한 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영적으로 더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다’, ‘내가 희생했다’,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 ‘내가 사람을 변화시켰다’고 하면서 주님에게서 온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 규례는 선과 진리를 거부하라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충분히 받아 살아가되 ‘그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라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선은 인간 안에 있지만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진리도 인간의 이해 안에 있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이 구별이 지켜질 때 인간은 주님의 선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면서도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 자유의 역설입니다. 천사들은 선을 자기 의지에서 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레7에서 기름과 피가 다시 한번 엄격하게 보호되는 것은 제사의 중심을 지키는 일입니다. 거듭남의 마지막까지 인간이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습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의 것이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기 삶으로 삼되 그 근원을 proprium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 인정 안에서 주님과 인간의 참된 화목과 결합이 지속됩니다. (SWC.레7 심화 4)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레7:30-34에는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재미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화목제물을 가져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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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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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7 심화

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드린 제사 자체가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 고기는 ‘가증한 것’이 된다고 합니다. 하루 차이인데 왜 이처럼 엄격할까요? 본문은 실제로 셋째 날의 고기를 명백하게 금합니다.

 

여기에서도 먼저 선을 하나 그어야 합니다. ‘셋째 날’이라는 말만 보고 곧바로 주님의 부활 셋째 날에 연결하거나, 숫자 3의 일반적인 상응을 그대로 대입하여 레7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번에 확인한 스베덴보리의 1차 원전에서는 레7:17-18을 직접 그렇게 해설하는 근거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 자체의 의미에서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누리며 그분과 교통하고 결합하는 제사입니다. ‘먹는 것’이 자기 것으로 삼음을 나타낸다면,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데도 신적 질서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살아 있는 선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것이지 인간이 한 번 받아 창고에 넣어 두고 ‘이것은 이제 내 선이다’라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선의 근원을 주님에게 돌리는 동안 그 선은 살아 있지만, 그것을 proprium의 공로나 소유로 붙잡으면 성질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많은 선을 행한 사람이 어느 순간 ‘나는 평생 이렇게 선하게 살아왔다’는 자기 의에 머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선은 실제로 주님에게서 받은 선이었을지라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저장하여 현재의 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면 더 이상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어제의 체어리티가 오늘의 자기 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째 날의 고기를 ‘왜 정확히 셋째 날인가?’까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거룩한 선을 신적 질서 밖에서 붙들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큰 원리는 화목제의 전체 상응과 잘 맞습니다. 남은 것은 불살라야 합니다. 이미 그 상태의 쓰임을 다한 것을 proprium이 붙잡고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경험에도 적용됩니다. 오래전의 은혜 체험, 과거의 뜨거운 기도, 이전의 사역 성과가 오늘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감사할 기억이지만 오늘의 양식은 아닙니다. 오늘은 오늘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레7의 셋째 날 규례는 적어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경계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을 받아 기뻐하되 그것을 내 공로로 저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선은 언제나 현재 주님에게서 오는 살아 있는 선이어야 합니다. 화목은 과거의 선을 소유하는 상태가 아니라 지금 주님에게서 받고 지금 이웃과 나누는 살아 있는 결합입니다. (SWC.레7 심화 3)

 

 

 

SW.레7 심화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SW.레7 심화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레3의 마지막 말씀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였습니다. 그런데 레7:22-27에서는 같은 명령이 훨씬 더 길고 강하게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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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레7의 화목제에는 아주 미묘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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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7 심화

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레7의 화목제에는 아주 미묘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하며 아침까지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서원이나 자원으로 드린 화목제는 그날뿐 아니라 이튿날에도 먹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의도적으로 두 경우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감사는 하루이고 서원과 자원은 이틀일까요? 이것 역시 현재 확인된 스베덴보리의 1차 원전에서 레7:15-16의 차이를 직접 풀어 주는 강한 대목은 찾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첫째 날은 정확히 무엇, 둘째 날은 정확히 무엇’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응 원리에서는 중요한 방향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날’은 단순한 24시간보다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제물을 먹을 수 있는 날의 차이도 단순한 식품 보관 규정 이상의 대표적 의미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특히 감사는 이미 받은 선을 즉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응답입니다. 어떤 은혜를 경험하고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바로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감사는 살아 있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어제 받은 감사를 저장해 두었다가 오늘 자기 공로처럼 꺼내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서원과 자원에는 인간의 의지와 약속이라는 요소가 조금 더 들어옵니다. 서원은 앞으로 행할 것을 약속한 뒤 이루어진 상태와 관련되고, 자원제는 인간이 자유롭게 드리는 응답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감사제와 정확히 같은 시간 규정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세 종류의 화목제가 서로 다른 영적 상태를 표상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감사제는 더 높고 서원제는 더 낮다’는 식으로 순위를 매길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다양한 선한 상태를 하나의 획일적인 방식으로 다루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즉각 솟아나는 감사도 있고,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도 있으며,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공통된 한계가 있습니다. 셋째 날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선이라도 인간이 그것을 붙잡아 proprium의 소유로 만들기 시작하면 처음의 살아 있는 교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의 선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여지고 누려져야 합니다.

 

따라서 레7:15-16은 거듭남이 ‘한 번 받은 은혜를 저장하여 평생 소비하는 삶’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언제나 살아 있으며 인간도 날마다 새롭게 그것을 받아야 합니다. 감사든 서원이든 자원이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선이 현재의 삶 안에서 살아 있는 선이 되는 것입니다. (SWC.레7 심화 2)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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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7 심화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SW.레7 심화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레7:12-13은 레2를 읽은 사람에게 아주 뜻밖의 장면입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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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7 심화

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레7:12-13은 레2를 읽은 사람에게 아주 뜻밖의 장면입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를 드립니다. 여기까지는 레2와 익숙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라고 합니다. 레2에서는 ‘누룩을 넣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누룩 있는 빵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본문상 이 차이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무교는 순수하고 정결한 것을 나타내며, 누룩은 여러 문맥에서 거짓이나 불순한 것이 섞이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레2의 소제에서 누룩이 금지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제단에서 여호와께 화제로 올라가는 것은 순수한 선과 진리를 표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7의 유교병에 대해서는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제가 확인한 범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레7:13을 직접 들어 ‘감사 화목제에 유교병을 넣은 이유는 정확히 이것이다’라고 해설하는 강한 원전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누룩 = 악이므로 화목제에 악도 함께 드린다’와 같은 식의 해석은 피해야 합니다. 그것은 상응을 기계적으로 역산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화목제의 전체 구조는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번제는 전부 제단에서 불살라지지만 화목제는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이 함께 먹습니다. 즉 화목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의 실제 삶과 공동체의 기쁨 안으로 들어와 함께 누려지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레7의 감사제에는 제단에 직접 올라가는 거룩한 부분과 인간이 함께 먹는 부분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화목제가 ‘인간이 이미 완전히 천사처럼 순수해진 뒤에만 가능한 교통’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직 자연적 인간의 삶을 살아가며 불완전함이 남아 있는 사람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레7:13에 대한 직접적인 스베덴보리의 해설이 아니라 화목제 전체와 누룩의 일반 상응을 바탕으로 한 ‘유력한 독법’ 정도로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오히려 이 구절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조심스러운 경계에 있습니다. 레2의 무교 소제는 주님께 드려지는 선과 진리의 순수함을 강조하고, 레7의 감사 화목제는 그 선이 인간의 실제 생활 속 기쁨과 교제 안으로 내려오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자연적 삶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주님의 질서 안으로 데려오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완전해진 사람이 마지막에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아직 거듭나는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이 주님께서 주신 선을 발견하고 ‘이것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라고 인정하며 누리는 것이 감사입니다. 레7의 무교병과 유교병이 한 상에 놓이는 장면은 그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그 이상의 세부 상응은 원전이 더 발견될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장 정직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SWC.레7 심화 1)

 

 

 

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레7의 화목제에는 아주 미묘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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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7,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리고 - 주님의 선을 받아 함께 누리는 화목의 완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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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7,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리고 - 주님의 선을 받아 함께 누리는 화목의 완성’

 

1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는 지극히 거룩하니 2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건제의 번제물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3그 기름을 모두 드리되 곧 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4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고 5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속건제니라 6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라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7속죄제와 속건제는 규례가 같으니 그 제물은 속죄하는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8사람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 곧 그 제사장은 그 드린 번제물의 가죽을 자기가 가질 것이며 9화덕에 구운 소제물과 냄비에나 철판에서 만든 소제물은 모두 그 드린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10소제물은 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니라 11여호와께 드릴 화목제물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12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 13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14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15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6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17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19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20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21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무슨 물건을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 것이요 24스스로 죽은 것의 기름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의 기름은 다른 데는 쓰려니와 결단코 먹지는 말지니라 25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26너희가 사는 모든 곳에서 새나 짐승의 피나 무슨 피든지 먹지 말라 27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9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려는 자는 그 화목제물 중에서 그의 예물을 여호와께 가져오되 30여호와의 화제물은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지니 곧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31그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 것이며 32또 너희는 그 화목제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을지니 33아론의 자손 중에서 화목제물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자는 그 오른쪽 뒷다리를 자기의 소득으로 삼을 것이니라 34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35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아론에게 돌릴 것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 것이니 그들을 세워 여호와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한 날 36곧 그들에게 기름 부은 날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돌리게 하신 것이라 대대로 영원히 받을 소득이니라 37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식과 화목제의 규례라 38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령하신 날에 시내 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령하셨더라 (레7)

 

해설

레위기 7장은 레1부터 시작된 제사의 첫 큰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37절은 지금까지 나온 것을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식과 화목제의 규례’라고 한꺼번에 열거합니다. 그래서 레7은 새로운 제사 하나를 소개하는 장이라기보다 앞에서 배운 제사들을 다시 제사장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특히 화목제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제사의 목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죄를 깨닫고 정결하게 되는 것만이 끝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이 제거된 인간은 마침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웃과 함께 누리며, 주님과 결합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1절로 7절은 속건제를 다시 다룹니다. 속건제물은 번제물을 잡던 곳에서 잡고 피는 제단 사방에 뿌리며,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은 기름, 두 콩팥과 그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을 제단에서 불사릅니다. 이것들은 레3의 화목제에서 이미 만났던 요소들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3(출29:13)은 피를 신적 진리와, 기름을 신적 선과 연결하며, AC.10072(출29:22)는 내장을 덮은 기름을 가장 낮은 것 안에 있는 선과 연결합니다. AC.10074(출29:22)는 콩팥을 자연적 인간의 내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속건제가 단순히 ‘잘못에 대한 벌금’을 지불하는 제사가 아님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실제 삶에서 손상된 것을 바로잡게 하실 뿐 아니라 자연적 인간의 가장 안쪽과 바깥쪽까지 선과 진리의 질서로 다시 세우십니다.

 

6절과 7절에서는 속건제가 ‘지극히 거룩하다’고 다시 선언되며 제사장들이 그것을 먹습니다. 레6에서 보았듯이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닙니다. AC.2187(창18:8)은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을 교통, 결합, 자기 것으로 삼음과 연결합니다.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결해진 자리에 주님의 선이 들어와 인간의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버리는 것은 비움이고, 주님의 선을 받아 살아가는 것은 채움입니다. 레위기의 제사들은 이 두 방향을 계속 함께 보여 줍니다.

 

8절로 10절에서는 번제물의 가죽과 여러 소제물이 제사장에게 돌아갑니다. 이것은 제사의 모든 것이 제단 위에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진 것 가운데 어떤 것은 제사장을 통해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레7:8의 ‘가죽’ 자체를 이 문맥에서 무엇이라고 정확히 상응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이번에 충분한 직접 원전을 확보하지 못했으므로 세밀하게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7절로 10절 전체에 ‘돌아갈 것이요’,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니라’가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제사는 인간이 주님께 무엇을 빼앗기는 행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한 뒤 다시 그분에게서 받아 올바르게 누리는 질서를 가르칩니다.

 

11절부터 장의 중심인 화목제 규례가 시작됩니다. 레3에서 화목제의 기본 구조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화목제가 ‘감사’, ‘서원’, ‘자원’이라는 서로 다른 상태에서 어떻게 드려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가 함께 드려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3절에는 ‘유교병’, 곧 누룩이 들어간 빵도 함께 등장합니다. 레2에서는 누룩을 제단의 화제로 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화목제의 감사 식사에서는 유교병이 함께 놓이는 것입니다. 본문 자체가 감사 화목제에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조심스러운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누룩은 문맥에 따라 거짓이나 불순한 것을 의미할 수 있으며, 무교는 순수함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레7:13의 유교병이 왜 특별히 감사 화목제에 허용되는지를 직접 풀어 주는 강한 AC 원전은 이번 검색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유교병은 정확히 이것을 뜻한다’고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문자적 구조만으로도 중요한 차이는 분명합니다. 번제처럼 모든 것을 불살라 주님께 올리는 제사와 달리 화목제는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이 함께 먹는 제사입니다. 즉 인간의 실제 삶과 기쁨과 감사가 주님 앞의 교제 안으로 들어오는 제사입니다. 이 점은 별도 심화에서 원전상 확실한 부분과 해석상 유력한 부분을 구별하여 더 살펴보겠습니다.

 

15절로 18절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감사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하고 아침까지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서원이나 자원으로 드린 화목제는 이튿날까지 먹을 수 있습니다. 단 셋째 날에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며 남은 것은 불살라야 합니다. 실제 본문은 감사제와 서원·자원제 사이에 이 시간 차이를 명확히 둡니다. 여기에는 ‘오늘의 선을 어제의 것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매우 매력적인 영적 독법이 가능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로 확인되지 않은 세부를 확정적인 상응으로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거룩한 선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데에도 상태와 질서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인간의 proprium이 붙들어 자기 소유로 만들기 시작하면 처음의 거룩한 교통이 변질될 수 있습니다.

 

19절로 21절은 그래서 ‘먹는 사람의 상태’를 강조합니다. 화목제 고기가 부정한 것에 접촉되면 먹지 못하며, 부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거룩한 화목제물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앞에서 ‘먹음’이 교통과 결합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받아들이는가뿐 아니라 ‘어떤 상태에서 받아들이는가’도 중요합니다. 거룩한 진리를 많이 알고 입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거룩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붙든 채 거룩한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면 오히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섞게 됩니다. 그래서 정결은 결합보다 먼저 옵니다. 레4-6의 속죄제와 속건제가 레7의 화목제보다 앞에 놓여 있는 것도 이런 큰 질서와 잘 어울립니다.

 

22절로 27절에서는 레3 마지막에서 이미 보았던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다시 매우 강하게 반복됩니다. AC.5943(창45:18)은 바로 레7:23-26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의 기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 곧 천적인 신성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레3에서 확인했듯이 피는 신적 진리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기름과 피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은 선과 진리를 인간의 proprium이 자기 것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와 연결됩니다. 선은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들을 받아 살아갈 수 있지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선하다’, ‘내가 진리를 소유한다’고 하는 순간 주님에게서 온 것을 proprium의 것으로 바꾸기 시작합니다.

 

28절로 36절은 레7의 절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화목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기름과 가슴을 ‘자기 손으로’ 가져옵니다. 가슴은 여호와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삼고, 기름은 제단에서 불사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아갑니다. 또 오른쪽 뒷다리는 거제로 제사장에게 줍니다. 여기에는 매우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AC.10087(출29:26)은 가슴을 ‘체어리티의 선’, 더 높은 의미에서는 신적 영적인 것과 연결합니다. 가슴이 심장과 폐가 있는 부분이며, 중간 또는 둘째 천국의 영적 선과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슴을 흔드는 것은 그 선이 살아나게 되는 것과 연결됩니다.

 

오른쪽 뒷다리에 대해서도 원전이 놀랍도록 분명합니다. AC.10075(출29:22)는 오른쪽 넓적다리 또는 뒷다리를 가장 내적인 천적 선과 연결하고, 레7:32, 34-35를 직접 인용하면서 가슴은 영적 선, 오른쪽 뒷다리는 천적 선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가슴은 둘째 천국의 체어리티의 선을, 오른쪽 뒷다리는 가장 안쪽 셋째 천국의 천적 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둘이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것은 단순한 제사장의 몫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선과 천적 선의 교통과 받아들임을 표상합니다.

 

더구나 AC.10093(출29:27)은 ‘흔드는 것’과 ‘들어 올리는 것’의 차이까지 설명합니다. 가슴을 흔드는 것은 신적 진리가 ‘인정되어 살아 있게 되는 것’을, 오른쪽 뒷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은 주님에게만 속한 신적 선이 ‘지각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의 차이와 연결합니다. 영적 천국에서는 신적 진리를 이해를 통해 ‘인정’하고, 천적 천국에서는 신적 선을 의지를 통해 ‘지각’합니다. 레7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 요제와 거제의 작은 동작 안에 천국의 두 큰 질서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화목제의 ‘화목’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화목은 단지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다가 제물을 보고 마음을 푸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체어리티와 사랑의 삶으로 자기 것이 되고, 다시 주님께 그 근원을 인정하는 교통과 결합의 상태입니다. 제단에는 기름이 올라가고, 제사장에게는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가 돌아가며, 깨끗한 사람들은 화목제의 고기를 함께 먹습니다. 주님과 제사장과 백성이 하나의 제사 안에서 연결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37절과 38절은 레1-7 전체를 아주 아름답게 닫습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위임식, 화목제가 모두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 506도 레7:1, 11, 37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러한 제사 규례들을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에 속한 것으로 열거합니다. 각각의 제사는 따로 떨어진 종교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하나의 거듭남의 질서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레1의 번제에서 인간 전체가 주님의 사랑에 드려지는 모습을 보았고, 레2의 소제에서 선과 진리가 삶의 예물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레3의 화목제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레4와 5의 속죄제에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레5와 6의 속건제에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실제로 회복하는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레7은 다시 화목제로 돌아와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의 목적은 죄 없는 사람처럼 자신을 관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이 자기 삶이 되고, 그 선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결합의 삶에 있습니다. 그래서 레7의 마지막 모습은 제물을 잃어버린 인간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함께 먹고 누리는 인간입니다. 정결은 화목을 향하고, 회개는 결합을 향하며, 거듭남은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향합니다. (SWC.레7 해설)

 

심화

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SW.레7 심화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SW.레7 심화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레7:12-13은 레2를 읽은 사람에게 아주 뜻밖의 장면입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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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레7의 화목제에는 아주 미묘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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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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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SW.레7 심화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SW.레7 심화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레3의 마지막 말씀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였습니다. 그런데 레7:22-27에서는 같은 명령이 훨씬 더 길고 강하게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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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레7:30-34에는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재미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화목제물을 가져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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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8,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고 - 제사장 위임식에 감추어진 거듭남과 쓰임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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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 ‘제단의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 회복에서 영원한 사랑의 불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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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3 심화

3.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 하셨을까?’

 

레위기 3장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매우 강한 명령으로 끝납니다. 더구나 이것은 한 번의 제사에만 적용되는 임시 규정이 아니라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기름과 피를 특별히 먹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는 스베덴보리가 놀랄 만큼 직접적인 답을 줍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3(출29:22)은 제사와 번제에서 모든 피를 제단에 붓고 모든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살랐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레3:17의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를 직접 인용합니다. 즉 레3 마지막 절의 의미를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피가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상응입니다. 주님의 피 역시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와 관계합니다. 기름은 신적 선, 곧 신적 사랑의 선과 관계합니다. 따라서 피와 기름은 제사의 수많은 요소 가운데서도 특별히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먹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실제 음식 규정이었지만 그 안의 영적 의미는 훨씬 깊습니다. 신적 선과 신적 진리는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생각하고 원하고 행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생명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선을 행하고 나면 ‘내가 했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내가 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올바르게 살면 자신의 선함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과 봉사와 체어리티까지 자기 공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3은 말합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선은 네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선도 주님의 것이며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을 행할 힘과 진리를 볼 수 있는 빛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니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내가 선을 행했으니 이것은 내 선이다’라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인간은 전력을 다해 선을 행하되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진리를 열심히 배우고 이해하되 그 빛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다는 규정은 매우 깊은 겸손을 가르칩니다. 겸손은 ‘나는 아무 가치가 없다’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내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레3의 마지막 한 절이 장 전체를 닫는 완벽한 결론이 됩니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내장과 콩팥과 간 주변의 기름을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른 모든 과정이 결국 한 고백을 향합니다. ‘선은 주님의 것입니다.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정 안에서 참된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선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과 진리의 주인이 되려는 교만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내 안에서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 있습니다. 선을 행하되 그 선을 먹어 자기 공로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되 그 진리를 먹어 자기 지혜의 소유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를 받아 삶으로 살되 언제나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레3의 마지막 고백은 그래서 아주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내가 행한 선 가운데 참으로 선한 것은 주님에게서 왔고, 내가 깨달은 진리 가운데 참으로 진리인 것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주님과의 화목과 결합을 보존하는 깊은 겸손입니다. (SWC.레3 심화 3)

 

 

 

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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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심화 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SW.5 심화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레위기 3장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가장 낯선 부분은 아마 제물의 내장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내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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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3 심화

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레위기 3장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가장 낯선 부분은 아마 제물의 내장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내장에 덮인 기름’,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이 소와 양과 염소의 제사에서 거의 똑같이 반복됩니다. 현대 독자에게는 굳이 성경이 이런 해부학적인 세부까지 기록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곳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이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57(출29:19)은 제사와 번제의 수많은 세부 규정을 열거하면서 ‘누가 조금이라도 계몽된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세부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감추어져 있음을 보지 못하겠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는 특별히 내장의 기름, 간의 기름,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제단에서 불사르는 규정을 직접 언급합니다.

 

먼저 기름은 선을 표상합니다. AC.10029(출29:13)는 제물의 기름을 선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제사의 문맥에서는 인간의 자연적 또는 겉 사람 안에 받아들여져 진리와 결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름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동물의 가장 좋은 지방 부위를 요구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의 선이 그 근원인 주님께 돌려지는 것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기름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더 세밀해집니다. AC.10072(출29:22)는 ‘내장을 덮은 기름’을 ‘가장 낮은 것들 안에 있는 선’이라고 설명합니다. 내장은 인간의 가장 낮고 바깥쪽 자연적 삶과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내장의 기름은 주님의 선이 인간의 고상한 종교적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온 상태를 보여 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생각하면 이것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경건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가족에게 거칠 수 있습니다. 교리는 정확히 설명하면서 돈 문제에서는 자기 이익만 좇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를 말하면서 운전할 때나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쏟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영역들이 바로 우리의 자연적 삶의 ‘낮은 곳’입니다. 거듭남은 이런 곳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간에 덮인 꺼풀은 또 다른 층위를 보여 줍니다. AC.10073(출29:22)은 이것을 ‘정결하게 된 자연적 인간의 내적 선’이라고 설명합니다. 간은 피를 정화하는 기관이므로 상응에서도 정결과 관계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그 행동을 낳는 자연적 인간 안쪽의 정서와 동기까지 정결하게 하십니다.

 

콩팥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AC.10074(출29:22)는 콩팥을 ‘정결하게 된 자연적 인간의 내적 진리’와 연결하고, 그 위의 기름을 그 진리에 속한 선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AC.10032은 콩팥이 몸 안에서 걸러 내고 정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영적으로는 ‘살피고, 정결하게 하고, 바로잡는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주님께서 ‘콩팥과 마음’을 살피신다는 식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마음이 사랑의 선과 관계한다면 콩팥은 인간 안의 진리를 살피고 분별하는 것과 관계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만이 아니라 그 행동 속에 어떤 진리와 어떤 동기가 있었는지가 주님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제 레3의 장면을 다시 바라보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제사장이 내장과 콩팥과 간 주변의 기름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장면은 단순한 도축 과정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연적 삶의 가장 깊고 낮은 곳까지 주님의 선과 진리가 들어가 살피고, 정결하게 하고, 바로잡는 거듭남의 과정을 표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정결하게 된 것들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제단 위의 불로 올라간다는 점입니다. 자연적 인간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과 감각과 일상생활과 직업과 인간관계를 버리고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정결하게 되어 주님의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레3의 반복은 오히려 아름답습니다. ‘내장의 기름도, 간의 꺼풀도, 콩팥과 그 위의 기름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보여 드리는 종교적 모습만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생각과 욕망과 습관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화목은 표면적인 평온이 아닙니다. 인간의 깊은 곳과 낮은 곳까지 선과 진리가 정결하게 되고 서로 결합하여, 속과 겉이 함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3의 낯선 내장 규정은 오히려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겉’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깊고 가장 낮은 곳까지 정결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SWC.레3 심화 2)

 

 

 

SW.5 심화 3,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 하셨을까?’

SW.5 심화3.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 하셨을까?’ 레위기 3장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매우 강한 명령으로 끝납니다. 더구나 이것은 한 번의 제사에만 적용되는 임시 규정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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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심화 1, 화목제의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

SW.5 심화1. 화목제의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 ‘화목제’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사이가 나빠진 인간이 제물을 드려 하나님과 다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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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3 심화

1. 화목제의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

 

‘화목제’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사이가 나빠진 인간이 제물을 드려 하나님과 다시 사이좋게 되는 제사’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더 강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제사처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91(출24:5)은 이스라엘 백성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장면을 해설하면서, 이것이 ‘선으로부터, 그리고 선에서 나오는 진리로부터 드리는 주님에 대한 예배’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번제가 특별히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면, 제사는 선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제의 중심에도 선과 진리가 함께 있습니다.

 

레3의 의식 자체가 이것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제물의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AC.10033(출29:22)은 피가 신적 진리를, 기름이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화목제의 중심에는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미워하시다가 제물을 보고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해야 하는 쪽은 인간입니다.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그 결과 인간 스스로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인간에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인간이 그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선을 심으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합되면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목’은 단순한 감정적 관계 회복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결합’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함으로써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목제에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행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AC.10047(출29:16)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리는 것이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거듭남 역시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를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는 제사’로만 읽으면 레3의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놓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오히려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당신과 결합시키시는 거듭남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인간 안에서 악과 거짓이 물러가고, 주님의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그 선이 삶의 가장 바깥쪽까지 내려올 때 인간은 점점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결과가 ‘평화’입니다. 성경의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서로 싸우던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는 상태와 깊이 관계합니다. 진리와 선이 하나가 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며, 인간의 뜻이 점차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 평화가 옵니다.

 

따라서 화목제는 ‘내가 무엇을 드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 것인가?’를 묻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을 바로잡으셔야 내가 다시 그분의 생명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가?’를 묻게 하는 제사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 의해 변화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진리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며, 마침내 우리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우리는 주님과의 결합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화목제의 깊은 중심입니다. (SWC.레3 심화 1)

 

 

 

SW.5 심화 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SW.5 심화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레위기 3장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가장 낯선 부분은 아마 제물의 내장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내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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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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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1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2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3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5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6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릴지며 7만일 그의 예물로 드리는 것이 어린 양이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8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9그는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그 기름 곧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0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1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니라 12만일 그의 예물이 염소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13그것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14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5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7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3)

 

해설

레위기 3장에 들어서면 세 번째 제사인 ‘화목제’가 등장합니다. 레1에서는 번제를, 레2에서는 소제를 살펴보았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고,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더하여 일부를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를 제사장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화목제에서는 다시 동물과 피가 등장하지만, 번제와는 제사의 구조가 다릅니다. 제물 전체를 불사르지 않고 특별히 ‘기름’을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는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레3을 여는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는 ‘왜 화목제에서는 피와 기름이 이토록 중요하게 다루어지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짐승들이 아무 의미 없이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823(창15:9)은 소, 염소, 숫양, 어린양,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 등이 각각 고유한 의미를 가졌으며, 바로 그 때문에 한 종류를 다른 종류로 임의로 바꾸어 드릴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일상의 번제, 안식일과 절기의 제사, 자원제와 서원제, 화목제, 속죄와 정결의 제사마다 특정 동물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각각 다른 천적·영적 상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레3에서는 소와 양과 염소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레1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소 떼에 속한 동물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정서를, 양 떼에 속한 동물은 속 또는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정서를 표상합니다. AC.9391(출24:5)은 소와 송아지가 자연적 인간의 선과 관계하고, 양과 어린양 등이 속 또는 영적 인간의 선과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3의 화목제 역시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결합은 속 사람에서만 이루어지고 겉 사람은 그대로 남는 일이 아니라, 속과 겉이 함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화목제에서는 ‘수컷이나 암컷이나’ 드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번제에서는 수컷을 요구했지만 화목제에서는 둘 다 허용됩니다. 이것이 의미 있는 차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 확보한 직접 원전만으로 레3의 수컷과 암컷을 각각 세밀하게 나누어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물의 종류와 성별까지도 대표교회의 제사에서 아무 의미 없는 규정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원전이 직접 밝혀 주는 데까지만 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머리에 안수합니다. 레1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수는 단순히 손을 얹는 의식이 아닙니다. AC.10023(출29:10)은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전달과 받아들임, 곧 커뮤니케이션과 리셉션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머리는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에는 그 제사가 예배자의 전 존재와 관계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화목은 바깥에서 어떤 의식 하나를 행함으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과 관계합니다.

 

제물을 잡으면 제사장들이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립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제단은 주님의 신적 선과 그분께 드리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화목제의 깊은 중심이 드러납니다. AC.10047(출29:16)은 제단 둘레에 피를 뿌리는 것이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인간의 거듭남 역시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과정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화목’을 단순히 ‘하나님께 화가 나셨는데 제물을 드려 마음을 풀어 드린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서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방해하는 것은 주님 편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 안의 악과 거짓입니다. 인간이 진리를 받아 악을 피하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될 때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더 온전히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화목제의 피가 제단 사방에 뿌려지는 장면은 바로 이 ‘진리와 선의 결합’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레3에서 특별히 반복되는 것은 ‘기름’입니다. 소를 드릴 때도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을 떼어내고, 양을 드릴 때도 기름진 꼬리와 내장의 기름을 떼어내며, 염소를 드릴 때도 같은 명령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침내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왜 기름이 이토록 중요할까요?

 

AC.10033(출29:22)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한 답을 줍니다. 제사의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제사의 모든 피가 제단에 드려지고 모든 기름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레3의 기름은 단순히 고대인들이 가장 좋은 부위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기름은 선을,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여기서 레3의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피와 기름이 함께 있습니다. 신적 진리와 신적 선입니다.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은 제단의 불에 올라갑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레2에서도 고운 가루와 기름을 통해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았는데, 레3에서는 그것이 피와 기름이라는 더욱 강렬한 표상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말씀의 진리는 인간을 선으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올바른 형태와 방향을 얻습니다. 거듭남은 이 둘이 인간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기름을 떼어내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어느 부위의 기름인지 매우 세밀하게 지정하신다는 점입니다. ‘내장에 덮인 기름’,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얼핏 보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낯설고 불필요해 보이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세부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AC.10072(출29:22)는 내장을 덮는 기름이 ‘가장 낮은 것들 안에 있는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내장은 자연적 인간의 가장 낮은 것들과 관계하고, 그 위의 기름은 그 가장 낮은 차원까지 내려와 있는 선을 표상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이 인간의 고상한 종교적 생각에만 머물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말투, 습관, 돈을 쓰는 방식, 일상의 관계, 몸과 감각의 즐거움을 다루는 방식처럼 삶의 가장 바깥쪽까지 주님의 선이 내려와야 합니다.

 

간에 덮인 꺼풀도 의미가 있습니다. AC.10073(출29:22)은 그것을 ‘정결하게 된 자연적 인간의 내적 선’과 연결합니다. 간이 몸에서 피를 정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이 표상에도 정결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인 행동만 조금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인간 안쪽에 숨어 있는 동기와 정서까지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이 있습니다. AC.10074(출29:22)는 콩팥이 ‘정결하게 된 자연적 인간의 내적 진리’를, 그 위의 기름은 그 진리에 속한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AC.10032은 콩팥의 기능에서 그 상응을 설명하면서, 콩팥은 살피고 정결하게 하고 바로잡는 진리와 관계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에서도 주님께서 ‘마음과 뜻을 살피신다’고 할 때 원문에서 콩팥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레3의 제단 위에는 단순히 동물의 지방 조직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상응의 언어로 보면 인간의 자연적 삶 가장 깊은 곳까지 선과 진리가 들어와 정결하게 되고, 그 정결해진 선과 진리가 사랑의 불 안에서 주님께 돌려지는 모습입니다. 주님과의 화목은 인간의 일부만 주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상태가 아닙니다. 속 사람에서 시작된 주님의 질서가 자연적 인간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양의 화목제에서는 한 가지 독특한 것이 더 등장합니다.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입니다. 이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세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세세한 부위까지 천국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확보한 직접 원전만으로 레3의 ‘기름진 꼬리’ 자체의 의미를 충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기름 = 선’이라는 확실한 원칙을 넘어 꼬리의 세부 의미를 임의로 만들어 내지 않겠습니다.

 

제사장은 이 기름들을 제단 위의 ‘번제물 위에서’ 불사릅니다. 이 표현도 중요합니다. 화목제가 번제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단 위에 있는 번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번제가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표상한다면, 화목제 역시 그 사랑의 질서 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진정한 화목과 결합은 사랑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실제로 음식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와 번제가 ‘떡’ 또는 음식이라고 불린 이유가 그 안에서 표상된 천적 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AC.10079(출29:23)는 떡이 사랑의 선을 의미하며, 제사와 번제 역시 이러한 이유로 ‘떡’이라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고기와 지방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표상하는 사랑의 선과 그 선에서 나오는 참된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레1과 레2에서 반복해서 만났던 표현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는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주님께서 동물의 타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레1의 번제, 레2의 소제, 레3의 화목제는 서로 다른 제사이면서도 모두 한곳을 향합니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고, 그 사람의 삶이 사랑에서 나오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17절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강력한 명령으로 마무리합니다.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AC.10033은 바로 레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표상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여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신적 선과 신적 진리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영적 삶에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내가 어떤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 알아냈다’고 생각하고, 어떤 선을 행했다고 해서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영적으로 피와 기름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는 위험에 빠집니다. 인간은 선과 진리를 받아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도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레3은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화목제의 핵심은 결국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신적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통해 인간을 정결하게 하시며, 인간 안의 진리와 선을 결합시키십니다. 그 결합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높은 곳에서 자연적 삶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인정합니다. 바로 그때 주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레3 앞에서 우리는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가?’라는 질문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이 물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있는가?’, ‘내 자연적 삶의 가장 낮은 부분까지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려와 있는가?’, ‘나는 내가 행하는 선을 나의 공로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아는 진리를 나의 지혜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레1에서 우리는 전부를 불살라 주님께 드리는 번제를 보았습니다. 레2에서는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하나가 되는 소제를 보았습니다. 이제 레3에서는 피와 기름, 곧 진리와 선이 함께 제단에 드려지는 화목제를 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레3의 마지막 선언은 화목제 전체를 꿰뚫는 고백이 됩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우리의 선도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 선과 진리가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은 주님과 결합하는 화목의 삶이 됩니다. (SWC.레3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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