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9.심화

 

3.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위 심화 1의 세 번째 단계인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  진리가 삶의 성품이 되며, 선한 행동이 열매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단계에서도 여전히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일 수가 있나요?

 

이 질문은 사실 창세기 1장 해석에서 매우 미묘하지만 핵심적인 지점을 건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에서도 여전히 어느 정도 inanimate’, 곧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먼저 ‘inanimate’라는 표현의 의미를 정확히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nimate’와 ‘inanimate’는 단순히 활동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다고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진리를 말하며 실제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고 있어도, 그 사람이 그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선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나의 선’이라는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상태는 완전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자기 생명처럼 보이는 상태’, 곧 어느 의미에서는 ‘inanimate’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1장의 식물 단계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식물들을 설명할 때 ‘‘living sou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herb’, ‘tree’, ‘fruit’ 같은 식물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식물은 생명이 있지만 ‘자기 스스로 움직이거나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 의미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선한 삶을 살고 있어도 아직 그 선이 ‘자유로운 사랑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이 단계는 선이 존재하지만, 아직 완전히 ‘animate’ 상태는 아닌 단계로 이해됩니다.

 

어떤 성도가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매우 성실하고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정직하며 교회에서도 헌신적으로 봉사합니다. 그의 삶에는 분명히 ‘fruit’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꽤 선하게 살아왔다’, ‘내가 이렇게 봉사해 왔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자기의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상태에서도 여전히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이유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식물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living soul’, 즉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동물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동물은 ‘사랑과 애정(affection)을 상징합니다. 즉 사람이 선과 진리를 단순히 알고 실천하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사랑 자체로 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짜 ‘animate’ 상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걸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tree bearing fruit’ 단계는 매우 중요한 단계이지만 아직 최종 단계는 아닙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실제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만, 사람은 여전히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이 그 선을 행한다고 느끼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단계로 들어가면 사람은 점점 더 분명히 깨닫습니다. ‘내가 하는 선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하시는 선이구나.’ 그때 선은 더 이상 식물처럼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구조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먼저 진리가 싹트는 단계가 있고, 그다음 진리가 열매를 맺는 삶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이 완전히 살아 있는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선이 ‘사랑에서 나오고, 또한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식물의 상징이 끝나고 ‘living soul’이 등장합니다.

 

사람은 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이 아직 ‘내가 하는 선’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열매가 맺힌 단계이지만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점점 더 빛 속으로 들어가면, 그 선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알게 되고 그때 선은 진짜 생명처럼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의 식물에서 동물로 넘어가는 변화가 바로 이 차이를 보여 준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9, 심화 4, ‘갑작스런 repentance의 등장’

AC.29.심화 4. ‘갑작스런 repentance의 등장’ AC.29 두 번째 단락에,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좀 어리둥절합니다.

bygrace.kr

 

AC.29, 심화 2, ‘각기 종류대로’

AC.29.심화 2. ‘각기 종류대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요, 그냥 다양한 종류의 채소, 나무라는 단순한 의미만은 아니겠지요?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창세기 1장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