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6 심화

1.  AC 삼상2:3 인용은 개역개정과 이렇게 다른가?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AC.66을 읽다가 가장 먼저 멈추게 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삼상2:3입니다. 개역개정은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AC의 영어 인용은 높은 것을 말하라, 높은 것을! 옛것이  입에서 나오게 하라는 식입니다. 단어 몇 개가 다른 정도가 아니라 명령의 방향 자체가 거의 반대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의 성경을 AC 영어에 맞추어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삼상2:3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금지를 나타내는 말이 있고, 문맥 역시 한나가 교만과 오만을 경계하는 내용입니다. 오늘날의 주요 영어 번역들도 대체로  이상 그렇게 교만하게 말하지 말라’, ‘오만한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게 하라는 방향으로 번역합니다. 따라서 개역개정의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것이며는 히브리어 본문과 일반적인 번역 전통에 잘 맞습니다.

 

그러므로 AC의 영어 문장을 보고 개역개정 번역자들이 아르카나를 몰라서 잘못 번역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AC의 영어 인용을 문자적 번역보다  깊은 내적 의미의 번역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66 자체는  구절의 문자적 의미는 사실 높은 것을 말하라는 뜻이다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태고교회의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현재 우리가 보는 것과 매우 다른 형태로 삼상2:3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칙 하나가 생깁니다. 성경 본문과 AC의 인용문이 현저하게 다를 때에는 두 문장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은 성경대로 정확하게 제시하고, AC가 어떤 형태로 그 말씀을 인용하는지도 그대로 보여 주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AC.66의 한국어 본문에서도 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뒤의 영어 원문에는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인용형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독자는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이처럼 다른 형태의 문장을 인용했을까요? 그 정확한 문헌적 배경을 확인하지 않은 채 스베덴보리가 히브리어를 영적으로 다시 번역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당시의 성경 텍스트나 번역 전통, 인용 관행을 문헌적으로 더 조사해야 할 문제입니다. 현 단계에서 확실한 것은 AC.66의 영어 인용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히브리어 본문에 따른 일반적인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런 차이가 AC.66 전체의 설명을 무너뜨리는 것일까요?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인용을 사용하는 목적은 태고교회의 스타일이 높은  옛것에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특정 인용이 그의 설명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분명합니다. 다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인용된 성경의 실제 문자와 AC가 사용하는 인용형을 같은 것처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성경과 AC의 관계를 다루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됩니다. AC를 존중한다는 것이 성경을 AC의 표현에 맞추어 다시 번역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문자적 본문을 먼저 존중하고, 스베덴보리가 그 말씀을 어떤 방식으로 인용하고 사용하는지를 그 다음에 정확하게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의미 차이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지만, 이번 삼상2:3처럼 의미 차이가 너무 크다면 그 차이를 감추지 않고 설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경우에는 개역개정과 AC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문구를 유지합니다. 동시에 AC의 원문을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높은 것을 말하라는 형태로 인용했다는 사실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왜 생겼는지는 확인 가능한 문헌적 근거 이상으로 추측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례가 성경보다 AC를 높이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 번역에는 보이지 않는 진짜 뜻을 AC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말씀의 속뜻을 밝힌다는 AC의 역할과 말씀 자체의 권위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 AC.66 역시 결국 말씀의  가지 스타일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중심은 AC의 문장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가장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 읽습니다. AC가 그와 다른 형태로 인용한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성경은 낮은 문자, AC 높은 영적 번역이라는 구조로 만들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말씀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텍스트도 정직하게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AC.66 심화 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

AC.66 심화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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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태고교회, 역사, 예언, 시편

AC.66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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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표상으로 표현했을 아니라, 그것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어 더욱 생명력 있게 하였는데, 이런 방식은 그들에게 더없이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스타일을 가리켜 한나는 예언 가운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 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 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 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이러한 표상들은 다윗의 시편에서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이라고 불립니다. (78:2-4) Such representatives are called in David, “Dark sayings of old(Ps. 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78:2-4)

 

창조와 에덴동산 등에 관한 모든 내용,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 스타일로,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나타납니다. 책들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내적 의미 안에 전혀 다른 것들이 담겨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순서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셋째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스타일은 태고교회에서 그토록 높이 존중되던 스타일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스타일처럼 연결된 역사적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없습니다. 내적 의미 안에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고, 그것들은 아름답게 연결된 질서를 따라 이어지며, 사람과 사람, 교회의 여러 상태, 하늘 자체를 다루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넷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로,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안에서는 왕으로서의 다윗이라는 인격 아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 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 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 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AC.66은 창세기 1장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말씀의 문체와 속뜻의 관계를 한층 넓게 보여 주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64-65에서는 말씀에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66은 말씀 전체를 모두 똑같은 외적 형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 둘째는 역사적 스타일,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 넷째는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입니다. 네 스타일은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AC.66의 관심은 결국 그 서로 다른 외적 형식 안에 어떻게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가에 있습니다.

 

첫째인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 온 창세기 앞부분과 직접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후대 사람이 자연물 하나를 보고 의도적으로 이것은 무엇을 상징할까?하고 해석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외적인 것을 말하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함께 생각하는 표현 방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표상들을 단순히 하나씩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만들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한 이유를 그것들에 더 큰 생명력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하며, 그런 방식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와 에덴동산을 비롯한 앞부분을 읽을 때, AC가 그것을 단순한 상징 목록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표상의 이야기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바로 이 문맥에서 한나의 삼상2:3이 인용되는데, 여기서는 잠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은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라고 되어 있는 반면, AC의 영어 인용은 높은 것을 말하라, 높은 것을! 옛것이 입에서 나오게 하라는 식으로 전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과 오늘날의 일반적인 번역은 개역개정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말을 금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AC의 영어 인용을 근거로 개역개정이 잘못되었다거나, AC가 그 구절의 진짜 번역을 제공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어 본문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여 개역개정 문구를 그대로 두되, 스베덴보리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인용 형태가 우리가 읽는 성경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와 AC.66의 논증에서 이 인용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시78:2-4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AC.66은 특별히 이러한 표상들을 다윗이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굳이 시편의 모든 세부 표현을 하나씩 새로운 상응으로 풀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의 역할은 첫째 스타일의 표상들이 예로부터내려온 것이라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78의 인용과 다음 문장은 함께 읽는 것이 좋습니다.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이라는 표현과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표상적 전승이라는 설명이 서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라면 상당히 큰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부터 아브람 이전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직접 계시받아 처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앞선 세대에게서 전해 받은 자료라고 보는 것인가?AC.66의 문장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합니다. ‘창조와 에덴동산 등에 관한 모든 내용,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제시하는 상당히 중요한 주장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그러므로 1-11 허구이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에서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이 문제는 AC의 창세기 앞부분 이해에 매우 중요하므로 별도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범위를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로 명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아주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즉 이 둘째 스타일에서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외적 역사를 지우지 않습니다.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내적 의미 안에 전혀 다른 것들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66의 둘째 스타일에서는 역사인가 상징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속뜻을 갖습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앞부분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에 대해서는 사실들이 문자 그대로라고 명시하는 반면, 그 이전 태고교회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문장을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66 하나만 가지고 창1부터 창11까지 각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세세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첫째와 둘째 스타일을 서로 다르게 설명하며, 아브람 이후의 둘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문자적 역사성을 명시적으로 확인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스타일이 태고교회에서 매우 높이 존중되던 스타일에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연결된 역사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서는 문자적으로 아무 뜻이 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곧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지만, 그 목적은 문자 자체를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그 단절된 표현들의 내적 의미 안에 깊은 아르카나와 아름답게 연결된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65에서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연속의 질서를 가진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도 직접 열거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상태, 하늘 자체를 다루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여기서 특히 마지막 표현은 앞으로 말씀의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을 곧 모든 성경 구절은 무조건 주님의 지상 생애에 대한 암호이다라는 공식으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AC.66은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여러 차원을 다루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을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관계는 실제 예언서 인용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넷째는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의 중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 다윗이라는 인격 아래에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을 다룬다고 합니다. 이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을 읽을 때 다윗의 역사적 인격과 개인적 언어를 곧 지워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 외적 형식 아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룬다는 것이 AC.66의 설명입니다. 따라서 시편의 를 만날 때 곧바로 모든 문장을 독자의 개인 감정으로만 읽는 것도, 반대로 문자적 화자를 아무 의미 없다고 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힌 것은 왕 다윗의 인격 아래 주님이 내적 의미에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보면 말씀의 속뜻이 언제나 똑같은 외적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스타일에서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자연적인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습니다. 역사적 스타일에서는 실제 역사적 사실들 안에 전체와 세부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언적 스타일에서는 외적으로 단절되어 보이는 표현들 안에 깊은 아르카나가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되고, 시편에서는 왕 다윗의 인격 아래 내적 의미로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속뜻이 있다는 하나의 원칙만 붙들고 모든 성경 본문을 동일한 방법으로 기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AC.66은 보여 줍니다.

 

그러나 네 스타일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통일성도 있습니다. 모두 말씀이며, 외적으로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안에는 문자에 다 드러나지 않는 내적 내용이 있습니다. AC.64에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했고, AC.65에서는 그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가 천사들에게 영광이라고 불렸습니다. AC.66은 이제 그 속뜻이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스타일 안에서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큰 윤곽으로 보여 줍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한 계시 수준처럼 읽는 것입니다. AC.66은 그런 서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스타일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하며, 예언적 스타일은 그 스타일에서 생겨났고, 시편은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 언어 사이에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것을 첫째가 가장 높고 둘째는 낮고 셋째가 다시 높다는 등급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각각 말씀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스타일입니다.

 

AC.66은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마치는 글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AC를 읽는 방법을 준비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첫째 스타일에 속하는 창조의 표상적 연속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 이후로 가면 둘째인 역사적 스타일을 만나게 되고, AC가 그 실제 역사 속의 모든 것에서 어떻게 내적 의미를 밝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예언서와 시편이 인용될 때도 그들의 서로 다른 스타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에는 속뜻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본문을 똑같은 상징 해독법으로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형식을 존중하면서 그 안의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성경과 AC의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먼저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도, 실제 역사의 스타일도, 예언의 스타일도, 시편의 스타일도 있습니다. AC는 그 차이를 없애거나 성경의 표현을 자기 체계에 맞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말씀 안에 어떤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따라서 AC.66이 가르치는 좋은 독법은 문자를 버리고 속뜻으로 가자가 아니라, ‘말씀의 외적 형식을 정확히 읽으면서 안에 주님께서 두신 깊은 뜻을 따라가자는 방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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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창2 앞, 왜 말씀의 속뜻을 알려면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하는가?

AC.67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다른 삶의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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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창1, ‘영광’이라 불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 : 천사들의 지각

AC.65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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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심화

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 필요 없는가?

AC.65를 읽으면 성경을 깊이 공부해 온 독자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천사들은 하늘에서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만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고 단어 하나의 뜻과 문법을 세밀하게 살피는 일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AC.65에서 그런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글은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자연계의 인간에게 말씀의 문자를 연구하지 말라고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 천사와 인간은 말씀을 동일한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비롯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전해졌고, 우리는 번역된 성경의 단어와 문장을 통하여 그것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원어와 문법과 문맥을 정확히 연구하는 일은 인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분명히 유익합니다.

 

특히 번역에서는 원어 연구가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뜻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고, 번역 과정에서 한 언어의 뉘앙스를 다른 언어로 완전히 옮기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원어를 살피면 번역자가 왜 특정 표현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고, 서로 다른 번역을 비교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천사는 글자를 보지 않으니 인간도 원어를 연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AC.65가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도 말씀의 특정 단어나 표현에 매우 세밀하게 주목합니다. AC를 읽다 보면 어떤 단어가 왜 사용되었는지, 단수와 복수가 왜 달라지는지, 같은 듯 보이는 표현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 경우를 계속 만나게 됩니다. 이것만 보아도 말씀의 문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AC.65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AC.65가 우리에게 주는 경계는 무엇일까요? 원어 연구 자체가 곧 말씀의 속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과 문법을 완벽하게 분석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천사들이 지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에 도달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5의 사람들은 스베덴보리가 읽는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뜻하는 것을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문자 연구와 내적 의미는 동일한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둘을 서로 적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문자 연구는 낮은 것이고 속뜻만 높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말씀의 질서를 거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속뜻은 말씀의 문자와 무관하게 떠오르는 별도의 영적 생각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는 출발점은 여전히 주어진 문자입니다. 문자를 정확하게 읽는 일과 그 안에 있는 더 깊은 의미를 인정하는 일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기준이 생깁니다. 원어 연구를 통해 개역개정의 익숙한 표현과 다른 원문의 뉘앙스를 발견했다고 해서 곧바로 우리 성경은 틀렸고 원어를 아는 내가 진짜 뜻을 안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번역은 언제나 여러 요소를 고려한 결과이고, 표현의 차이가 실제 의미 차이를 만드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특정 히브리어나 헬라어 표현의 차이에 실제로 의존한다면 그때는 그 차이를 숨기지 말고 독자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원어는 말씀을 교정하기 위한 권위 경쟁의 도구라기보다, 주어진 말씀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원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영적 수준을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 원어를 많이 안다고 해서 자동으로 말씀의 속뜻을 더 깊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원어를 모른다고 해서 말씀을 깊이 받을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AC.65는 그런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글이 아닙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이 인간의 문자 이해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입니다.

 

따라서 목회와 설교에서도 원어는 매우 유용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설교의 권위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헬라어로 보면 진짜 뜻은 이것입니다라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번역 성경을 읽는 회중이 마치 불완전한 말씀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원어의 차이가 본문 이해에 중요할 때 그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면 충분합니다.

 

반대로 원어 연구를 경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의미니까 단어의 정확한 뜻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면 독자의 주관적인 연상을 속뜻이라고 부르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은 우리가 문자를 넘어 마음대로 만들어 내는 뜻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주신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 자체도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결국 AC.65가 보여 주는 것은 원어 연구냐 속뜻이냐라는 선택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말씀의 문자가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동시에 말씀은 그 문자적 의미로 다 소진되지 않으며, 천사들에게는 그 안에서 뜻하는 내적 의미가 지각됩니다. 원어 연구는 전자를 돕는 귀한 도구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후자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장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원어 연구는 필요 없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안다는 것 자체가 말씀의 속뜻을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65는 문자를 버리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읽는 그 문자 안에 천사들이 영광이라고 부를 만큼 아름답고 질서 있는 내적 의미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65 심화 2,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란 무엇인가?

AC.65 심화2.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란 무엇인가?AC.65에서 특히 눈에 띄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the nearest interior sense)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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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창1, ‘영광’이라 불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 : 천사들의 지각

AC.65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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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 어떤 이들이 하늘의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만을 이해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적 의미가 너무도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도 완전하며, 그들을 너무도 깊이 감동시켜서, 그들은 그것을 영광(glory)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 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해설

AC.65는 바로 앞 AC.64와 함께 읽어야 가장 잘 이해됩니다.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말씀의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65에서는 이제 그 설명을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입구 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말씀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었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자신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먼저 이 글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실제 영적 경험으로 제시하는 기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5는 비유를 만들어 천사라면 아마 이렇게 말씀을 읽을 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글이 아닙니다. 저자는 자신이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실제로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들과 대화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해설할 때에는 한편으로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실제 경험으로 제시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독자에게도 반드시 같은 경험이 일어나야 한다거나 우리가 그 영적 경험의 세부 구조를 본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늘의 입구 이라는 표현도 그런 경우입니다. 처음 읽으면 천국의 어느 층인가? 첫째 천국보다 낮은 곳인가?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5는 여기서 천국의 지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 비교적 낮은 단계의 하늘 영역이라고 확정하기보다, 본문 그대로 하늘의 입구 이라고 두고 이 경험의 핵심에 집중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AC.64에서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와 역사적 이름을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사에게는 단어가 전혀 없고 오직 추상적인 의미만 있다는 일반적인 언어 이론까지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65가 직접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읽고 있던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을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는 표현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문자 바로 안쪽의 영적 의미이며 그보다 깊은 곳에는 천적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층위를 확정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과 뒤의 설명들을 함께 보면 말씀의 여러 의미에 관한 더 풍부한 교리가 나오지만, AC.65 자체는 여기서 그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원문이 말하는 그대로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고 두고, 그 의미조차 천사들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게 지각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표현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초보 독자에게도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므로 별도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연속의 질서입니다. 특히 in such order of sequence라는 표현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서로 관계없는 상징들의 모음처럼 지각된 것이 아니라 어떤 연속적인 질서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1을 읽으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빛에서 궁창으로, 식물에서 광명체로, 생물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설명은 각 단어의 뜻을 하나씩 풀어 놓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습니다. 다만 이 창1의 사례는 AC.65연속의 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예이지, 이 한 구절만으로 말씀의 모든 내적 의미가 어떤 구조로 연결되는지를 다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의미는 또한 그들을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도 먼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AC.65는 그들이 왜 glory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에 관한 상응론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광은 언제나 신적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상태이므로 여기서도 정확히 그것을 뜻한다고 이번 한 문장에 완성된 정의를 가져오기보다, 그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완전한 연속의 질서에 깊이 감동되어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영광을 단순히 정말 아름다웠다정도의 감탄사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한 것은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고 감동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말이 어떤 속뜻을 갖는지는 그 표현을 직접 해설하는 관련 AC에서 충분히 살펴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AC.65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고 있었고, 그와 대화한 이들은 하늘의 첫 입구 뜰에서 그 말씀의 단어나 글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 장면은 AC.64에서 말한 인간의 문자와 천사적 지각 사이의 관계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특정 천사들이 동시에 내적 의미를 읽는다는 식으로 모든 세부 작동 방식을 AC.65 하나에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는 동안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말씀의 문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천사들은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인간에게도 단어와 문법과 원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AC.65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과 자연계의 인간이 말씀을 읽는 방식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단어와 문장으로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문자를 통해 말씀을 읽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문자에서 떠난 의미를 지각한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문자를 소홀히 하라는 명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말씀의 문자를 더욱 신중하게 대해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바로 그 말씀 안에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대신, 주님께서 말씀을 문자로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두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원어 연구나 정확한 번역도 그 자체로 속뜻은 아니지만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읽기 위한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AC.65를 읽고 나도 천사들처럼 말씀의 내적 의미를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 자체는 독자에게 그런 경험을 추구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가 경험한 영적 개방과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깊은 깨달음이나 감동을 얻는 일을 곧 같은 종류의 경험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깊이 감동받고 삶이 변화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을 곧 AC.65하늘의 입구 에서 이루어진 경험과 동일시할 근거는 이번 글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특별한 경험은 특별한 경험대로 존중하고, 우리의 말씀 읽기는 말씀 읽기대로 주님 앞에서 충실하게 이어 가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AC.65는 독자의 관심을 신비 체험 자체보다 말씀으로 돌립니다. 이 경험에서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거기서 만난 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그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켜 영광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이 가리키는 중심도 결국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의 목적이 독자로 하여금 나도 스베덴보리처럼 영계를 보고 싶다는 데 머물게 한다면 중심이 옮겨진 것입니다. AC.65가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매일 읽을 수 있는 말씀 안에, 인간의 눈에는 문자로 보이지만 천사들에게는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어 영광이라 불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AC가 중요하다면 바로 그 말씀의 깊이를 열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도 말씀과 AC의 순서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었기 때문에 이 경험이 일어났고, 그들이 지각한 것도 말씀의 내적 의미였습니다. AC.65는 새로운 영적 체험을 말씀 위에 올려놓는 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짧은 글은 AC.64의 설명을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말씀의 단어와 글자가 있고, 그 안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는 그들에게 영광이라 불릴 만큼 깊은 것이었습니다.

 

심화

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 필요 없는가?

 

AC.65 심화 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는 필요 없는가?

AC.65 심화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는 필요 없는가?AC.65를 읽으면 성경을 깊이 공부해 온 독자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천사들은 하늘에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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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 무엇인가?

 

AC.65 심화 2,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란 무엇인가?

AC.65 심화2.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란 무엇인가?AC.65에서 특히 눈에 띄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the nearest interior sense)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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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태고교회, 역사, 예언, 시편

AC.66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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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창1, 말씀의 속뜻 :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과 천사들의 지각 (AC.64-66)

AC.64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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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3. 스베덴보리는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경이라는 말보다 the Word’,  말씀이라는 표현을 매우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경건한 표현일까요, 아니면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용어일까요?

 

AC.64 자체에서는 분명히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말씀의 속뜻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속뜻을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번 문맥에서 the Word는 단순히 책의 일반 명칭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문자 안에 속뜻을 가지고 천사들에게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되는 신적 계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 말씀은 실제 교회생활에서는 상당히 겹쳐 사용됩니다. ‘성경을 읽는다 말씀을 읽는다가 같은 행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라는 말은 낮고 말씀이라는 말만 영적이라고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 단어 자체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the Word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로 가면 말씀의 범위에 관한 별도의 설명이 나오고, 우리가 흔히 성경 66이라고 부르는 범위와 그의 엄밀한 의미의 the Word가 어떻게 관계되는가 하는 문제도 생깁니다. 이것은 실제로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AC.64 한 문장만 가지고 그 전체 정경론을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속뜻이 있는 책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지만 다른 성경책에는 주님의 생명이 없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마치 성경 안에 신적인 책과 비신적인 책이 단순히 둘로 갈리고, 후자는 영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정경과 속뜻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는 관련 본문들을 직접 모아서 따로 다루어야 정확합니다.

 

이번 AC.64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문자적 의미에서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그 말씀을 문자와 이름으로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합니다. 따라서 the Word는 이 글에서 속뜻과 천사의 지각을 함께 품고 있는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합니다. ‘말씀의 속뜻이라고 할 때 중심 명사는 속뜻만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속뜻이 말씀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입니다. 아르카나 역시 AC가 말씀 밖에서 새로 만들어 내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밝혀진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the Word를 우리말로 말씀이라고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고 의미도 잘 살아납니다. 한국 교회에서 말씀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을 가리키는 익숙하고 권위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일상적인 성경이라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거나 잘못된 표현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AC와 성경의 관계를 뒤집지 않는 것입니다. AC.64 말씀의 속뜻을 설명한다고 해서 AC가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주장은 자신이 말씀 밖에 새로운 계시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말씀 안에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아니라 말씀이라고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the Word라고 할 때 그는 단순한 종교 문헌의 명칭보다, 주님에게서 온 계시이며 그 문자 안에 내적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는 성격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확한 범위와 어떤 성경책들이 스베덴보리의 엄밀한 의미에서 말씀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관련 본문을 충분히 확인하여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독법에서는 한 가지를 더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마다 AC를 높이기 위해 성경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AC가 끊임없이 독자를 말씀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AC.64가 말하는 속뜻도, 아르카나도, 천사들의 지각도 모두 말씀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AC.64, 창1, 말씀의 속뜻 :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과 천사들의 지각 (AC.64-66)

AC.64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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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 심화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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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2.  사람(internal man)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 사람(internal man)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혼과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마음이라는 뜻일까요?

 

먼저  사람을 단순히 몸 안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사람으로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람  사람을 말할 때 이것은 육체의 안쪽과 바깥쪽이라는 공간적 구별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과 의식에 서로 구별되는 내적이고 외적인 차원이 있음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렇다고  사람 = 영혼이라고 바로 등식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영혼이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인간의 생명 자체나 사후에도 사는 인간을 가리키는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람  사람과 짝을 이루어 인간 안의 내적 차원을 설명하는 특정한 용어입니다. 따라서 두 말이 관련될 수는 있어도 언제나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동의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 =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면 생각, 감정, 의지 등을 매우 넓게 포함하여 말합니다. 그런데 AC에서는 겉 사람에게도 생각과 욕망과 판단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이나 감정이라고 해서 모두 자동으로  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정신 활동 =  사람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너무 넓어집니다.

 

AC.64에서 특별히 주의할 것은 거듭남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보고 그렇다면 주님의 생명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들어가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질문입니다. AC 다른 곳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가 사람 안으로 유입되는 질서를 설명할 때와, 여기서 사람이 거듭남 가운데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때는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먼저 열리고 그다음  사람이 바뀐다 또는 반대로  사람이 먼저 거듭난 다음  사람이 바뀐다는 한 줄짜리 공식으로 AC.64를 정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이 문장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은 창1에서 다룬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진행과 주님의 유입 질서가 어떻게 함께 성립하는지는 관련 글들을 더 읽으면서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 단계에서 속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가장 안전하게는  사람과 구별되는 인간의 내적 차원이라고 잡아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겉 사람은 자연계와 감각을 통하여 관계하는 인간의 외적 차원이고, 속 사람은 그보다 내적인 인간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이 정의도 앞으로 AC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점차 풍성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 문장으로  정의해 주면 편한데  이렇게 여지를 남기는가?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의 중요한 용어들은 뒤로 갈수록 여러 문맥에서 점점 더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처음 등장한 자리에서 우리가 너무 완성된 정의를 만들어 버리면 오히려 나중의 본문을 그 정의에 억지로 맞추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언제나 선하고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사람은 세상적이고 악하다고 처음부터 단정해 버리면 이후의 설명을 읽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내적이라는 말 자체가 자동으로 선하다를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것을 어떻게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가입니다.

 

AC.64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거듭남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단순히 사람의 외적인 생활 습관 몇 가지가 개선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영혼인가, 마음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겠습니다. 속 사람은 영혼이나 마음과 관련될 수 있지만 그 어느 한 단어와 단순히 동일시하기보다, AC에서 겉 사람과 구별하여 인간의 내적 차원을 가리키는 고유한 용어로 익혀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정확한 구조와 기능은 앞으로 관련 AC들이 설명할 때 하나씩 더해 가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글을 가장 안전하게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 ‘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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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 무엇인가?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 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르카나 속뜻과 같은 말일까요?  AC에서 자주 만나는 퍼셉션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단어 자체를 보면 arcana는 라틴어 arcanum의 복수형으로, ‘감추어진 것들’, ‘비밀들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래서 Arcana Coelestia라는 제목도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 천적인 비밀들’, ‘천국의 비밀들 정도의 뜻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비밀이라고 할 때는 일부 사람만 알고 남에게 숨겨 두는 비밀 정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AC.64의 문맥에서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아르카나 속뜻은 정확히 같은 말일까요? 완전히 같은 용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4는 먼저 이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말한 다음, ‘ 아르카나는 너무 많아서 수많은 책으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속뜻이 말씀의 내적 의미 자체를 가리킨다면, ‘아르카나는 그 속뜻 안에서 밝혀지는 수많은 감추어진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 기계적으로 속뜻 = 그릇, 아르카나 = 내용이라는 공식으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그런 철학적 구분표를 제시하면서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서로 매우 가까운 의미 영역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르카나가 말씀 밖에 따로 감추어져 있는 비밀 지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4에서 말하는 아르카나는 바로 말씀의 속뜻과 관련하여 밝혀지는 감추어진 것들입니다.

 

창세기 1장이 좋은 예입니다. 문자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여섯 날을 읽습니다. 그런데 AC.6부터 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수많은 내용을 밝혔습니다. 빛과 어둠, 물과 궁창, 식물과 씨,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하나님의 형상과 심히 좋았더라 등이 거듭남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AC.64는 지금까지 제시한 이 모든 것조차 말씀 안의 아르카나 가운데 극히 일부라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아르카나는 단순한 상징의 뜻풀이보다 넓습니다. ‘빛은 이것을 뜻한다’, ‘물은 저것을 뜻한다는 대응 하나를 알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거듭남의 질서와 상태, 주님의 역사를 밝혀 줍니다. 따라서 아르카나를 재미있는 성경 암호나 숨은 정보처럼 접근하면 AC가 말하려는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면 퍼셉션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퍼셉션은 AC에서 별도로 설명되는 인간의 영적 상태와 인식에 관한 용어입니다. 따라서 아르카나와 퍼셉션을 하나는 내용이고 하나는 그것을 알아보는 능력이라고 간단히 짝지어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관련될 수는 있지만 동일한 범주의 두 용어가 아닙니다. ‘아르카나가 무엇인가를 묻는 이번 심화에서는 퍼셉션의 전체 교리까지 가져오지 않고, 그것이 아르카나의 다른 이름은 아니라는 정도로 구별하면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아르카나라는 말을 들을 때 AC 자체가 성경보다 더 높은 비밀 지식을 담은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힌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는 AC 안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입니다. AC.64의 순서도 먼저 말씀의 속뜻을 말하고 그 안의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를 말합니다.

 

따라서 Arcana Coelestia라는 책 제목도 결국 독자의 눈을 이 책 자체에 묶어 두기보다 말씀으로 돌려보냅니다. ‘천국의 비밀은 스베덴보리가 새로 창조한 비밀이 아니라, 그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주신 말씀 안에 이미 있으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AC.64에서 아르카나는 말씀의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속뜻 안에 담겨 있는 수많은 감추어진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다 설명한 이 자리에서도 자신이 밝힌 것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라고 말합니다.

 

 

 

AC.64 심화 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 심화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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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창1, 말씀의 속뜻 :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과 천사들의 지각 (AC.64-66)

AC.64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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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풀어내려면 수많은 책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다만 극히 일부만 제시되었는데, 그것도 말씀이 거듭남을 다루고 있으며, 거듭남이 사람(the external man)에서 사람(the internal man)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들뿐입니다.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 지각합니다. 그들은 문자 속에 있는 것들,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말씀의 역사서와 예언서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나라, 성읍, , 사람의 이름들은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직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만을 관념으로 가집니다. 그래서 낙원에 있는 아담을 통해 그들은 태고교회를 지각하지만, 교회 자체가 아니라 교회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지각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아브람 시대까지 계속된 교회를 지각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개인을 전혀 지각하지 않고, 그가 표상한 구원하는 신앙을 지각합니다. 이와 같이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떠나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지각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해설

AC.64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설명해 왔는지를 한 걸음 물러서서 밝히는 글입니다. 그는 이것을 말씀의 속뜻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면 문자적으로는 천지와 빛, 궁창과 물, 식물과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그리고 사람의 창조가 나옵니다. 그런데 AC.6부터 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 안에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이 들어 있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AC.64는 이제 바로 그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 속뜻은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을 문자적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은 말씀을 버리고 그 밖에서 만들어 낸 별도의 영적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뜻입니다. 1의 빛, , 식물, 해와 달과 별, 생물과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들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속뜻도 밝혀집니다. 따라서 AC를 읽으면서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문자는 낮고 속뜻은 높으니 이제 문자는 필요 없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문자 안에 우리가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이 AC.64의 출발점입니다. 특히 우리의 독법에서는 언제나 말씀 자체가 먼저이고 AC는 그 말씀 안에 담긴 속뜻을 밝혀 주는 해설이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안의 아르카나가 너무 많아 수많은 책으로도 충분히 펼쳐 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창1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제시한 것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설명이 창세기 1장의 모든 속뜻을 다 밝혔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 줍니다. 그가 특별히 골라 제시한 것은 말씀이 거듭남을 다루고 있으며, 거듭남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아르카나들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거듭남에 관한 여섯 단계라고 이해했다고 해서 그 말씀의 내적 내용 전체를 다 파악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64 자신이 지금까지 제시한 것은 극히 일부라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듭남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표현도 그대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이른다는 질서도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AC.64의 이 문장은 지금 그것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창1의 여섯 날에 나타난 거듭남의 진행이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이 두 표현을 성급히 하나가 틀리고 하나가 맞는 것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이 유입되는 질서와, 사람이 거듭남을 경험하며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인도되는 진행을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후 AC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할 때 점차 분명해질 것입니다.

 

AC.64의 두 번째 큰 주제는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에 있는 것들을 알지 못하며,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역사서와 예언서에 등장하는 나라와 성읍, 강과 사람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오직 그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지각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성경의 역사에 무지하다는 일반적인 지식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에게 그 말씀이 어떻게 지각되는지를 설명하는 문맥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 예가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입니다. 천사들은 낙원의 아담을 통해 태고교회를 지각하지만 거기에서도 태고교회라는 역사적 교회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 교회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지각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아브람 시대까지 계속된 교회를 지각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표상한 구원하는 신앙을 지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통해 말씀의 고유명사들이 천사에게 단순한 역사적 이름으로 머무르지 않고 그 이름들이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담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실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AC.64의 관심은 그 인물들의 역사성 여부를 논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할 때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에게 머무르지 않고 그가 표상하는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뜻을 인정하는 것과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구별이 특히 중요합니다.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떠나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는 말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사람 이름과 사건을 무시해야 한다는 지침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문자로 주어진 말씀을 읽습니다. 천사의 지각 방식과 인간의 말씀 읽기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64가 보여 주는 놀라운 점은 우리가 자연계에서 같은 말씀을 읽는 동안 그 말씀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과 천국을 잇는 방식으로 주어져 있다는 더 큰 주제의 입구가 여기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AC.64성경 이야기를 이제 역사로 읽지 말고 상징으로만 읽으라는 선언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훨씬 깊습니다. 말씀에는 인간이 문자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속뜻이 있으며, 그 속뜻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천사들은 바로 그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합니다. 인간에게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과 이야기가 보이지만, 천사에게는 그 이름들이 의미하는 교회와 신앙에 관한 것이 지각됩니다. 자연계의 문자와 천국의 지각이 하나의 말씀 안에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속뜻은 인간이 본문을 읽다가 자유롭게 떠올리는 영적 감상과도 구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읽으며 나는 아브라함처럼 용감하게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AC가 말하는 속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4에서 아브라함은 그가 표상하는 구원하는 신앙과 연결됩니다. 속뜻은 독자의 주관적인 연상이나 감동이 아니라 말씀의 말과 이름들이 실제로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르카나라는 말도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안에 우리가 문자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수많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미있는 비밀 지식을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1에서 밝혀진 거듭남의 질서처럼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아르카나속뜻이 정확히 같은 말인지, 서로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생길 질문은 그렇다면 AC 말하는 말씀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경 66권 전체와 정확히 같은 범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the Word라는 말을 상당히 엄밀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문제를 잘못 설명하면 어떤 성경책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고 다른 성경책에는 없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으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충분히 구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AC.64를 읽고 나면 지금까지의 창1 해설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첫째 날의 빛부터 여섯째 날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따라온 것은 단순히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에 임의로 붙인 영적 비유가 아니라, 그가 말씀의 속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를 설명하면서 천사들의 말씀 지각을 제시합니다. 천사들은 인간이 보는 문자와 이름에 머무르지 않고 그 말과 이름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과 돌아갈 곳은 여전히 말씀입니다. AC를 많이 읽을수록 성경의 문자가 시시해지고 AC의 설명만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간다면 오히려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AC.64가 말하는 아르카나는 말씀 밖에 있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이고, 속뜻 역시 말씀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AC의 역할은 말씀을 대신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읽고 있던 바로 그 말씀 안에 얼마나 깊은 생명이 들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AC.64의 첫 문장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창세기 1장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 신앙과 사랑에 관한 영적이고 천적인 세계가 열립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 준 것조차 그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 가운데 극히 일부라고 말합니다. AC.64는 그래서 창1 해설의 결론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말씀과 AC를 어떤 관계로 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심화

1. 아르카나(arcana) 무엇인가?

 

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 ‘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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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internal man)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 심화 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 심화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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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베덴보리는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64 심화 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64 심화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경’이라는 말보다 ‘the Word’, 곧 ‘말씀’이라는 표현을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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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창1, ‘영광’이라 불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 : 천사들의 지각

AC.65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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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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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AC.63 마지막에는 처음 읽는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 하늘,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을 한 사람의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어 왔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도 없는데 갑자기 하늘로 인도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이것이 사후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단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뒤에 붙인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따라서 AC.63만 가지고 하늘, 천적 낙원의 뜻을 모두 확정하려 하기보다, 이것이 다음 장의 일곱째 날 설명으로 넘어가는 연결 문장이라는 사실을 먼저 보는 것이 좋습니다.

 

문맥상 이 사람이 여기서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여섯 상태를 말했고, AC.63은 여섯째 날 끝에서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고 전투가 그치며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하늘,  천적 낙원으로 인도된다는 말 역시 지금까지 설명해 온 거듭남의 연속선상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곧바로 하늘은 장소가 아니라 오직 마음의 상태라는 뜻이다라고 결론 내려도 될까요? 그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 사후의 천국도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표현 하나를 근거로 천국은 장소가 아니고 인간 내면의 상태일 뿐이다라고 하면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를 지나치게 축소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늘로 인도된다는 말이 있으니 이 사람이 여기서 죽어 실제 사후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읽는 것도 현재의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지금 설명되는 것은 창조의 여섯 날에 대응하는 인간의 거듭남이고, 스베덴보리는 그 다음 상태를 다음 장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늘,  천적 낙원이 여섯째 날 이후에 이어지는 거듭남의 상태와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이며 왜 하늘 천적 낙원이라고 불리는지는 창2와 이어지는 AC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밝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AC.63의 마지막 문장은 독자에게 일종의 예고편과 같습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창조가 이제 새로운 상태로 넘어갑니다.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치고, 악한 영들이 떠나며 선한 영들이 대신하고, 사람은 하늘,  천적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거기서 멈추며 다음 장에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AC 전체를 이미 알고 있다면 일곱째 날, 천적 인간, 안식, 천상의 사람의 상태 등을 미리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따라 설명하는 순서를 그대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창세기 1장이 끝났으니 이제 창세기 2장의 말씀 자체가 먼저 나오고, 그 말씀을 AC가 어떻게 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AC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AC.63의 마지막 한마디를 가지고 다음 장의 의미를 우리가 먼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창2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속뜻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AC는 말씀보다 앞서 독자를 끌고 가는 책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것을 밝히는 해설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로 인도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현재 단계의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것은 사망 장면을 묘사하는 문장이 아니라 거듭남의 여섯째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문맥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천적 낙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리도 그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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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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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무슨 뜻인가?

 

AC.63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어 그의 욕정을 자극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계속 관계하는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는 떠난다고 하는가?

 

먼저 AC.63이 실제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자리를 대신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것을 사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주변에 있으면서 영향력만 약해진다고 바꾸어 번역하듯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떠난다고 했으면 우선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시에 이 한 문장을 가지고 거듭난 사람에게는 이제 어떤 악한 영도 전혀 접근할  없으며 악의 영향 가능성 자체가 영원히 사라진다고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AC.63은 여기서 영들과 인간의 관계 전체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끝에서 일어나는 상태 변화를 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큰 전환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AC.59에서는 전투 가운데 악한 영들이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고 있었고, AC.63에서는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면서 그 전투가 그칩니다. 바로 그 뒤에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자리를 대신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따라서 악한 영들의 떠남은 적어도 전투가 그치고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변화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존 설명처럼 이것을 악한 영들이 지배권을 잃는다고 표현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AC.63의 문장 자체가 정확히 정의한 뜻이라고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떠남이 영계에서 어떤 관계 변화와 정확히 대응하는지, 악한 영들이 이후 사람과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는 뜻인지 아닌지는 관련 AC들의 설명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사람에게는 언제나 선한 영과 악한 영이 함께 있어 균형이 유지되어야 하는  아닌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자유와 영적 균형에 관한 더 큰 교리에 속합니다. 그 교리를 AC.63 한 문장 안에 억지로 끌어와 그러므로 떠난다는 것은 사실 밖으로 밀려난다는 뜻이다라고 결론 내리면, 오히려 본문의 표현을 다른 교리에 맞추어 수정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두 사실을 함께 붙들면 좋겠습니다. 첫째, AC.63은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이 실제로 떠난다고 말합니다. 둘째, 이 한 문장만으로 인간과 악한 영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끝난다고까지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 사이의 세부적인 영적 질서는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더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무엇보다 본문의 강조점은 악한 영들이 어디로 이동했는가를 추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선한 영들이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까지 이어진 전투가 그치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면서 사람을 둘러싼 영적 상태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라는 말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 악한 영은 완전히 소멸하는가,  미터 밖으로 물러나는가? 같은 공간적인 그림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전투가 끝나고 다음 상태가 시작된다는 문맥입니다. 영들의 세계에서 떠남이 정확히 어떤 상태의 변화를 뜻하는지는 충분한 관련 본문을 만나면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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