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6:7)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 중 하나입니다. 겉으로 보면, 넘어지려는 궤를 붙들어 넘어지지 않게 하려던 웃사가 즉시 죽임을 당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선한 의도로 한 행동인데 왜 이렇게까지 엄중한 결과가 오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장면은 ‘하나님의 성물’과 ‘인간의 자연적 상태’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매우 깊은 상응의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행동의 겉모습’이 아니라 ‘상태(state)입니다.

 

먼저 궤, 곧 ‘여호와의 언약궤’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임재’, 더 정확히는 ‘신적 진리와 선의 결합된 임재’를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이 임의로 다루거나 손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오직 ‘정해진 질서와 상태 안에서만’ 가까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도 궤는 반드시 레위인, 그것도 특정한 방식으로만 운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식 규정이 아니라, ‘거룩한 것은 인간의 자연적 자아가 직접 붙잡을 수 없다’는 영적 질서를 표현한 것입니다.

 

웃사의 경우를 보면, 겉으로는 궤가 넘어질까 봐 붙든 것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자연적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적인 것을 지탱하거나 다룰 수 있다고 여기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지성에서 나온 개입’, 즉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으려는 상태’입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사람이 아직 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적 진리에 직접 손대면 그것이 오히려 파괴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신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순수한 질서인데, 그것이 왜곡된 상태와 접촉할 때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감정적으로 화를 내어 치셨다’기보다는, ‘질서의 법칙이 그대로 작용했다’는 이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진노’, ‘치심’ 같은 표현들을 인간의 시각에서 본 현상적 언어로 설명합니다. 실제로는 주님에게 분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적 질서와 어긋날 때 그 결과가 ‘심판’처럼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불이 따뜻함을 주지만, 같은 불에 무질서하게 손을 넣으면 화상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불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성질과 인간의 상태가 맞지 않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깊이 보아야 할 점은, 이 사건이 다윗이 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임재를 더 가까이 가져오려는 시도’ 속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사람이 진리를 더 가까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올바른 방식과 준비된 상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열심이나 선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적인 것에 급히 접근하면,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 다윗이 두려워하며 과정을 멈추고, 다시 질서에 맞게 궤를 옮기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열심이 질서로 교정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본문은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룩한 것은 질서 안에서만 접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 각자의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종종 선한 의도로 주님의 것을 붙잡고 다루려 하지만, 그 안에 ‘자기 의’나 ‘자기 주도성’이 섞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의 것은 주님이 지키신다. 인간은 그것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웃사의 사건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신적 질서와 인간 상태 사이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SC.55, ‘삼상5, 블레셋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

삼상5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 궤를 자기들의 신 다곤의 신전에 두면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리고 아스돗 사람들에게 큰 재앙이 닥칩니다. 그래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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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5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 궤를 자기들의 신 다곤의 신전에 두면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리고 아스돗 사람들에게 큰 재앙이 닥칩니다. 그래서 저들이 말하기를,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후 계속 비슷한 일들이 반복됨에도 불구, 저들은 자기들의 신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런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장면은 겉으로 보면 ‘명백한 증거를 보고도 왜 돌아오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낳지만,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인간 내면의 구조를 매우 정확히 드러내는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증거의 크기’나 ‘기적의 강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love)과 의지(will)’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무엇이 참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히 경험했지만,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여 삶을 바꾸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궤를 우리에게서 치워라”라고 말하며,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외적 인정은 있으나 내적 수용은 없는 상태’입니다.

 

이 장면을 조금 더 깊이 보면, 블레셋과 다곤은 단순한 역사적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상응(correspondence)으로 이해됩니다. 스베덴보리 해석에서 블레셋은 ‘신앙(faith)을 말하지만 체어리티(charity)는 결여된 상태’, 즉 지식과 교리는 있으나 삶의 선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곤은 더 구체적으로 ‘진리를 자기 방식으로 왜곡하여 섬기는 종교적 지식’ 혹은 ‘머리(지식)는 있으나 몸(삶)은 물고기처럼 아래에 묶여 있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다곤이 넘어지고 부서지는 장면은, 진리의 빛 앞에서 그런 왜곡된 신앙이 무너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삶을 바꾸고 싶지 않은 의지’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기적은 사람을 강제로 믿게 만들 수 없다.” 오히려 기적은 외적인 확신만 줄 뿐, 내적인 사랑이 바뀌지 않으면 결국 그 사람을 더 완고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의 삶과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리 강한 경험을 해도 그것을 자기식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아예 멀리 치워버리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다른 도시로 계속 떠넘기는 장면은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문제의 본질, 곧 ‘자신들의 상태’를 바꾸려 하지 않고, 외적인 대상만 옮기며 상황을 회피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진리가 불편하면 받아들이기보다 ‘거리 두기’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통찰 하나가 더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저들에게 그렇게 분명한 표적을 보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강제 개종’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즉 진리의 빛이 비추어질 때,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떤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빛을 기뻐하고 더 가까이 가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묶인 사람은 그 빛을 고통스럽게 느끼고 피하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궤는 ‘축복의 근원’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압박’으로 경험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적 상태의 본질입니다. 천국의 빛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본문은 단순히 고대 블레셋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어떤 상태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몰라서 거부하는 경우보다,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바뀌는 것이 싫어서’ 뒤로 물러서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질문을 우리에게 돌립니다. ‘나는 진리를 불편해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으며, 정작 내 삶은 바꾸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시지만, 그분을 가까이 둘 것인지 밀어낼 것인지는 인간의 사랑이 결정한다.”

 

 

 

SC.56, ‘궤를 붙들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웃사’(삼하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6:7)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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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4, ‘태어나 보니 이란, 북한, 중국, 러시아 등이었던 청년들’

요즘 미국-이란 전쟁이 한창입니다. 미국-이스라엘의 압도적 군사력으로 그동안 중동 호랑이 노릇하던 이란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풍비박산이 나는 중입니다. 어느 산 속 깊은 곳에서는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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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국-이란 전쟁이 한창입니다. 미국-이스라엘의 압도적 군사력으로 그동안 중동 호랑이 노릇하던 이란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풍비박산이 나는 중입니다. 어느 산 속 깊은 곳에서는 이란군 혁명수비대 정예 5,000명이 생매장 되었다고도 하는데요, 저들이 그동안 저질러온 악행을 생각할 때, 심은 대로 거두는구나 싶지만, 한편으로 저런 나라에 태어나 저들의 교리가 진리인 줄 알고 살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는 젊은이들의 경우, 그 책임을 어떻게 물어야 하나 고민도 됩니다. 저들 뿐이 아니지요. 북한, 중국, 러시아 등 많은 나라에 태어나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살다 망하게 된 사람들도 다 그렇지요. 이런 것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어떤 입장, 어떤 통찰을 말하나요?

 

 

이 질문의 핵심은 ‘어떤 나라, 어떤 종교, 어떤 환경 속에서 태어나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살다 비극적 삶을 마친 사람들의 책임과 구원 문제’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집중해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관점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핵심 입장은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은 ‘태어난 환경이나 종교 자체’로 심판받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내면, 곧 ‘그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르려 했는가’에 따라 판단됩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반복하여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으며, 각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판단된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이슬람, 공산주의, 무신론, 혹은 왜곡된 기독교 환경 속에 태어났다고 해서 그것 자체로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선하게 살고자 했는가, 이웃을 해치지 않으려 했는가, 양심에 따라 살았는가’가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개념을 제시합니다. 바로 ‘양심(conscience)과 ‘인플럭스(influx)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선과 진리를 흘려보내신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외적인 교리로는 잘못된 것을 믿고 있다 하더라도, 내적으로는 ‘선한 삶’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천국과 통하는 길이 열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는 저작들에서 ‘이방인들, 즉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천국에 간다’고 단언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종교 안에서 진실하게 선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매우 중요한 역설도 있습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통 교리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삶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빛을 알면서도 거부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진정한 기준은 ‘무엇을 믿었느냐’보다 ‘어떻게 살았느냐’이며, 더 정확히는 ‘그가 사랑한 것이 무엇이었느냐’입니다. 사랑이 곧 그 사람의 본질이며, 사후 세계에서 그 사람은 그 사랑에 따라 자기와 같은 상태의 공동체, 곧 천국 또는 지옥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제 질문하신 ‘저런 환경 속에서 잘못된 것을 진리로 알고 살다가 비극을 맞이한 젊은이들’에 대해 보면, 스베덴보리는 그들을 집단적으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 각각을 ‘개별적인 영적 존재’로 봅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살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선을 선택하려 했으며, 잔혹함을 기뻐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사후 세계에서 교육과 교정을 거쳐 천국으로 인도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는 ‘이방인들은 사후에 천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아 더 쉽게 진리를 받아들인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또 하나의 냉정한 원리도 제시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거짓 교리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이용해 악을 정당화하고, 잔혹함과 증오를 사랑하며, 타인을 파괴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면, 그 책임은 면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경우는 ‘무지’가 아니라 ‘사랑의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즉 환경은 영향을 주지만, 최종적으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랑과 의지라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통찰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시며, 아무도 태어난 조건 때문에 버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사랑 때문에는 면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나라, 어떤 집단을 단순히 ‘악하다’고 단정하기보다, 그 안에 있는 개별 인간들의 내면과 선택을 더 깊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이 돌아옵니다. ‘나는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실제 삶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SC.55, ‘삼상5, 블레셋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

삼상5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 궤를 자기들의 신 다곤의 신전에 두면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리고 아스돗 사람들에게 큰 재앙이 닥칩니다. 그래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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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3, ‘창1 AC 심화 버전 공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

창1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버전 작업을 여러 달에 걸쳐 마쳤습니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 이걸 아는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공유하는 게 맞을까요? 일단 블로그에는 실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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