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4 심화

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경’이라는 말보다 ‘the Word’, 곧 ‘말씀’이라는 표현을 매우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경건한 표현일까요, 아니면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용어일까요?

 

AC.64 자체에서는 분명히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곧 ‘말씀의 속뜻’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속뜻을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번 문맥에서 ‘the Word’는 단순히 책의 일반 명칭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문자 안에 속뜻을 가지고 천사들에게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되는 신적 계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과 ‘말씀’은 실제 교회생활에서는 상당히 겹쳐 사용됩니다. ‘성경을 읽는다’와 ‘말씀을 읽는다’가 같은 행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라는 말은 낮고 ‘말씀’이라는 말만 영적이라고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 단어 자체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the Word’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로 가면 ‘말씀’의 범위에 관한 별도의 설명이 나오고, 우리가 흔히 ‘성경 66권’이라고 부르는 범위와 그의 엄밀한 의미의 ‘the Word’가 어떻게 관계되는가 하는 문제도 생깁니다. 이것은 실제로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AC.64 한 문장만 가지고 그 전체 정경론을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속뜻이 있는 책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지만 다른 성경책에는 주님의 생명이 없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마치 성경 안에 신적인 책과 비신적인 책이 단순히 둘로 갈리고, 후자는 영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정경과 속뜻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는 관련 본문들을 직접 모아서 따로 다루어야 정확합니다.

 

이번 AC.64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문자적 의미에서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그 말씀을 문자와 이름으로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합니다. 따라서 ‘the Word’는 이 글에서 속뜻과 천사의 지각을 함께 품고 있는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합니다. ‘말씀의 속뜻’이라고 할 때 중심 명사는 ‘속뜻’만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속뜻이 말씀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입니다. 아르카나 역시 AC가 말씀 밖에서 새로 만들어 내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밝혀진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the Word’를 우리말로 ‘말씀’이라고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고 의미도 잘 살아납니다. 한국 교회에서 ‘말씀’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을 가리키는 익숙하고 권위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일상적인 ‘성경’이라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거나 잘못된 표현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AC와 성경의 관계를 뒤집지 않는 것입니다. AC.64가 ‘말씀의 속뜻’을 설명한다고 해서 AC가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주장은 자신이 말씀 밖에 새로운 계시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말씀 안에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왜 성경이 아니라 말씀이라고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the Word’라고 할 때 그는 단순한 종교 문헌의 명칭보다, 주님에게서 온 계시이며 그 문자 안에 내적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는 성격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확한 범위와 어떤 성경책들이 스베덴보리의 엄밀한 의미에서 ‘말씀’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관련 본문을 충분히 확인하여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독법에서는 한 가지를 더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마다 AC를 높이기 위해 성경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AC가 끊임없이 독자를 말씀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AC.64가 말하는 속뜻도, 아르카나도, 천사들의 지각도 모두 ‘말씀’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AC.64, 창1, 말씀의 속뜻 :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과 천사들의 지각 (AC.64-66)

AC.64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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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 심화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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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속 사람’(internal man)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혼’과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마음’이라는 뜻일까요?

 

먼저 ‘속 사람’을 단순히 몸 안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사람으로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말할 때 이것은 육체의 안쪽과 바깥쪽이라는 공간적 구별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과 의식에 서로 구별되는 내적이고 외적인 차원이 있음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렇다고 ‘속 사람 = 영혼’이라고 바로 등식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영혼’이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인간의 생명 자체나 사후에도 사는 인간을 가리키는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반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짝을 이루어 인간 안의 내적 차원을 설명하는 특정한 용어입니다. 따라서 두 말이 관련될 수는 있어도 언제나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동의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속 사람 =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면 생각, 감정, 의지 등을 매우 넓게 포함하여 말합니다. 그런데 AC에서는 겉 사람에게도 생각과 욕망과 판단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이나 감정이라고 해서 모두 자동으로 ‘속 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눈에 안 보이는 정신 활동 = 속 사람’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너무 넓어집니다.

 

AC.64에서 특별히 주의할 것은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보고 ‘그렇다면 주님의 생명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들어가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질문입니다. AC 다른 곳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가 사람 안으로 유입되는 질서를 설명할 때와, 여기서 사람이 거듭남 가운데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때는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속 사람이 먼저 열리고 그다음 겉 사람이 바뀐다’ 또는 반대로 ‘겉 사람이 먼저 거듭난 다음 속 사람이 바뀐다’는 한 줄짜리 공식으로 AC.64를 정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이 문장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은 창1에서 다룬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진행과 주님의 유입 질서가 어떻게 함께 성립하는지는 관련 글들을 더 읽으면서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 단계에서 속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가장 안전하게는 ‘겉 사람과 구별되는 인간의 내적 차원’이라고 잡아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겉 사람은 자연계와 감각을 통하여 관계하는 인간의 외적 차원이고, 속 사람은 그보다 내적인 인간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이 정의도 앞으로 AC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점차 풍성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딱 정의해 주면 편한데 왜 이렇게 여지를 남기는가?’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의 중요한 용어들은 뒤로 갈수록 여러 문맥에서 점점 더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처음 등장한 자리에서 우리가 너무 완성된 정의를 만들어 버리면 오히려 나중의 본문을 그 정의에 억지로 맞추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속 사람은 언제나 선하고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겉 사람은 세상적이고 악하다’고 처음부터 단정해 버리면 이후의 설명을 읽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내적’이라는 말 자체가 자동으로 ‘선하다’를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것을 어떻게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가입니다.

 

AC.64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거듭남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단순히 사람의 외적인 생활 습관 몇 가지가 개선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속 사람은 영혼인가, 마음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겠습니다. 속 사람은 영혼이나 마음과 관련될 수 있지만 그 어느 한 단어와 단순히 동일시하기보다, AC에서 겉 사람과 구별하여 인간의 내적 차원을 가리키는 고유한 용어로 익혀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정확한 구조와 기능은 앞으로 관련 AC들이 설명할 때 하나씩 더해 가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글을 가장 안전하게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AC.64 심화 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64 심화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경’이라는 말보다 ‘the Word’, 곧 ‘말씀’이라는 표현을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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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 ‘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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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 ‘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르카나’는 ‘속뜻’과 같은 말일까요? 또 AC에서 자주 만나는 ‘퍼셉션’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단어 자체를 보면 ‘arcana’는 라틴어 ‘arcanum’의 복수형으로, ‘감추어진 것들’, ‘비밀들’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래서 Arcana Coelestia라는 제목도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 ‘천적인 비밀들’, ‘천국의 비밀들’ 정도의 뜻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비밀’이라고 할 때는 일부 사람만 알고 남에게 숨겨 두는 비밀 정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AC.64의 문맥에서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아르카나’와 ‘속뜻’은 정확히 같은 말일까요? 완전히 같은 용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4는 먼저 ‘이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말한 다음, ‘그 아르카나는 너무 많아서 수많은 책으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속뜻’이 말씀의 내적 의미 자체를 가리킨다면, ‘아르카나’는 그 속뜻 안에서 밝혀지는 수많은 감추어진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 기계적으로 ‘속뜻 = 그릇, 아르카나 = 내용’이라는 공식으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그런 철학적 구분표를 제시하면서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서로 매우 가까운 의미 영역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르카나’가 말씀 밖에 따로 감추어져 있는 비밀 지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4에서 말하는 아르카나는 바로 말씀의 속뜻과 관련하여 밝혀지는 감추어진 것들입니다.

 

창세기 1장이 좋은 예입니다. 문자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여섯 날을 읽습니다. 그런데 AC.6부터 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수많은 내용을 밝혔습니다. 빛과 어둠, 물과 궁창, 식물과 씨,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하나님의 형상과 ‘심히 좋았더라’ 등이 거듭남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AC.64는 지금까지 제시한 이 모든 것조차 말씀 안의 아르카나 가운데 ‘극히 일부’라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아르카나는 단순한 ‘상징의 뜻풀이’보다 넓습니다. ‘빛은 이것을 뜻한다’, ‘물은 저것을 뜻한다’는 대응 하나를 알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거듭남의 질서와 상태, 주님의 역사를 밝혀 줍니다. 따라서 아르카나를 재미있는 성경 암호나 숨은 정보처럼 접근하면 AC가 말하려는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면 ‘퍼셉션’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퍼셉션은 AC에서 별도로 설명되는 인간의 영적 상태와 인식에 관한 용어입니다. 따라서 아르카나와 퍼셉션을 ‘하나는 내용이고 하나는 그것을 알아보는 능력’이라고 간단히 짝지어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관련될 수는 있지만 동일한 범주의 두 용어가 아닙니다. ‘아르카나’가 무엇인가를 묻는 이번 심화에서는 퍼셉션의 전체 교리까지 가져오지 않고, 그것이 아르카나의 다른 이름은 아니라는 정도로 구별하면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아르카나’라는 말을 들을 때 AC 자체가 성경보다 더 높은 비밀 지식을 담은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힌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는 AC 안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입니다. AC.64의 순서도 먼저 ‘말씀의 속뜻’을 말하고 그 안의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를 말합니다.

 

따라서 Arcana Coelestia라는 책 제목도 결국 독자의 눈을 이 책 자체에 묶어 두기보다 말씀으로 돌려보냅니다. ‘천국의 비밀’은 스베덴보리가 새로 창조한 비밀이 아니라, 그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주신 말씀 안에 이미 있으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AC.64에서 ‘아르카나’는 말씀의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속뜻 안에 담겨 있는 수많은 감추어진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다 설명한 이 자리에서도 자신이 밝힌 것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라고 말합니다.

 

 

 

AC.64 심화 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 심화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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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창1, 말씀의 속뜻 :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과 천사들의 지각 (AC.64-66)

AC.64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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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AC.63 마지막에는 처음 읽는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을 한 사람의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어 왔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도 없는데 갑자기 ‘하늘’로 인도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이것이 사후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단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뒤에 붙인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따라서 AC.63만 가지고 ‘하늘, 천적 낙원’의 뜻을 모두 확정하려 하기보다, 이것이 다음 장의 일곱째 날 설명으로 넘어가는 연결 문장이라는 사실을 먼저 보는 것이 좋습니다.

 

문맥상 이 사람이 여기서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여섯 상태를 말했고, AC.63은 여섯째 날 끝에서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고 전투가 그치며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된다’는 말 역시 지금까지 설명해 온 거듭남의 연속선상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곧바로 ‘하늘은 장소가 아니라 오직 마음의 상태라는 뜻이다’라고 결론 내려도 될까요? 그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 사후의 천국도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표현 하나를 근거로 ‘천국은 장소가 아니고 인간 내면의 상태일 뿐이다’라고 하면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를 지나치게 축소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늘로 인도된다’는 말이 있으니 이 사람이 여기서 죽어 실제 사후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읽는 것도 현재의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지금 설명되는 것은 창조의 여섯 날에 대응하는 인간의 거듭남이고, 스베덴보리는 그 다음 상태를 다음 장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늘, 곧 천적 낙원’이 여섯째 날 이후에 이어지는 거듭남의 상태와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이며 왜 ‘하늘’과 ‘천적 낙원’이라고 불리는지는 창2와 이어지는 AC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밝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AC.63의 마지막 문장은 독자에게 일종의 예고편과 같습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창조가 이제 새로운 상태로 넘어갑니다.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치고, 악한 영들이 떠나며 선한 영들이 대신하고, 사람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거기서 멈추며 ‘다음 장에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AC 전체를 이미 알고 있다면 일곱째 날, 천적 인간, 안식, 천상의 사람의 상태 등을 미리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따라 설명하는 순서를 그대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창세기 1장이 끝났으니 이제 창세기 2장의 말씀 자체가 먼저 나오고, 그 말씀을 AC가 어떻게 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AC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AC.63의 마지막 한마디를 가지고 다음 장의 의미를 우리가 먼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창2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속뜻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AC는 말씀보다 앞서 독자를 끌고 가는 책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것을 밝히는 해설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로 인도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현재 단계의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것은 사망 장면을 묘사하는 문장이 아니라 거듭남의 여섯째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문맥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곧 천적 낙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리도 그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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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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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어 그의 욕정을 자극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계속 관계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여기서는 떠난다고 하는가?’

 

먼저 AC.63이 실제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것을 ‘사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주변에 있으면서 영향력만 약해진다’고 바꾸어 번역하듯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떠난다’고 했으면 우선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시에 이 한 문장을 가지고 ‘거듭난 사람에게는 이제 어떤 악한 영도 전혀 접근할 수 없으며 악의 영향 가능성 자체가 영원히 사라진다’고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AC.63은 여기서 영들과 인간의 관계 전체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끝에서 일어나는 상태 변화를 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큰 전환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AC.59에서는 전투 가운데 악한 영들이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고 있었고, AC.63에서는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면서 그 전투가 그칩니다. 바로 그 뒤에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따라서 악한 영들의 떠남은 적어도 전투가 그치고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변화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존 설명처럼 이것을 ‘악한 영들이 지배권을 잃는다’고 표현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AC.63의 문장 자체가 정확히 정의한 뜻이라고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떠남’이 영계에서 어떤 관계 변화와 정확히 대응하는지, 악한 영들이 이후 사람과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는 뜻인지 아닌지는 관련 AC들의 설명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사람에게는 언제나 선한 영과 악한 영이 함께 있어 균형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자유와 영적 균형에 관한 더 큰 교리에 속합니다. 그 교리를 AC.63 한 문장 안에 억지로 끌어와 ‘그러므로 떠난다는 것은 사실 밖으로 밀려난다는 뜻이다’라고 결론 내리면, 오히려 본문의 표현을 다른 교리에 맞추어 수정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두 사실을 함께 붙들면 좋겠습니다. 첫째, AC.63은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이 실제로 ‘떠난다’고 말합니다. 둘째, 이 한 문장만으로 인간과 악한 영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끝난다고까지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 사이의 세부적인 영적 질서는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더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무엇보다 본문의 강조점은 악한 영들이 어디로 이동했는가를 추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까지 이어진 전투가 그치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면서 사람을 둘러싼 영적 상태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라는 말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 ‘악한 영은 완전히 소멸하는가, 몇 미터 밖으로 물러나는가?’ 같은 공간적인 그림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전투가 끝나고 다음 상태가 시작된다는 문맥입니다. 영들의 세계에서 ‘떠남’이 정확히 어떤 상태의 변화를 뜻하는지는 충분한 관련 본문을 만나면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되겠습니다.

 

 

 

AC.63 심화 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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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의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게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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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의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움직이신다’고 하면 사람이 자기 생각과 의지를 잃고 외부의 힘에 의해 조종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앞뒤 문맥에서 떼어 내지 않고 읽으면 강조점이 조금 달라집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 전투가 그친다고 했고, 이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움직이신다’보다 ‘그때’입니다. 어떤 때인가 하면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라는 거듭남의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의지를 잃고 수동적인 도구가 된다는 뜻을 이 문장에 넣을 이유는 없습니다.

 

또 ‘자신의 모양으로’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62는 사람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63은 이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거듭난 인간의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주님처럼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을 받아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의 형상과 모양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지만 AC.63 한 문장이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에 관한 전체 교리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하나가 된다’, ‘이 상태가 인간에게 가능한 최고의 자유이다’ 같은 결론까지 이번 글의 직접적인 뜻으로 확정하기보다, 관련 AC들이 자유와 의지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함께 보면서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AC.63은 주님의 역사와 인간의 존재를 서로 없애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움직이십니다.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그 움직임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을 ‘주님이 전부 하시니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수동주의로 읽는 것도, 반대로 ‘결국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하게 사는 것이다’라고 읽는 것도 본문의 균형을 놓치게 됩니다.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일상적인 예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움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진리와 사랑이 아직 충분히 결합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가운데 진리와 사랑이 결합하고 사랑이 삶의 주된 원리가 된다면, 그가 선을 행하는 생명의 근원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다만 이것은 AC.63을 이해하기 위한 예이지,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표현의 모든 의미를 이 한 사례로 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이 표현이 지키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거듭난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고 해서 이제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하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도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입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기보다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말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면,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사람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그의 생명을 이끌게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이 정확히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는 이 한 문장보다 훨씬 큰 주제이므로, 이번에는 AC.63이 말하는 범위 안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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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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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심화

1. 왜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하는가?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 여섯 단계로 나뉘며,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여섯째 날에서 끝나지 않고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AC를 처음부터 따라온 독자라면 AC.13에서 이미 읽었던 한 문장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scarcely)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AC.13이 말한 것보다 더 많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사실은 누구나 결국 일곱째 상태에 이른다’거나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일곱째 상태를 완성한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거의 없다’를 ‘아무도 갈 수 없다’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scarcely’는 문자 그대로 ‘거의 없다’, ‘좀처럼 없다’는 뜻이지 ‘절대로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13이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경우는 존재하지만 매우 드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AC.62가 직접 설명하는 것은 ‘여섯 단계’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됨’입니다. 일곱째 상태의 성질을 AC.62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AC.62 한 문장만 가지고 ‘여섯째 날은 영적 천국이고 일곱째 날은 천적 천국이다’, 또는 ‘모든 사람은 여섯째 날을 거쳐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체계를 만들면 본문보다 앞서가게 됩니다.

 

AC.13으로 돌아가 보면 첫째 상태에서 일곱째 상태까지의 전체 윤곽이 이미 간단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일곱째 상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의 상태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일곱째 상태가 매우 높은 거듭남의 상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거듭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동일한 방식으로 도달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마지막 단계인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와 정확히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관련 글들을 더 충분히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는 말을 너무 빨리 통계나 운명론으로 바꾸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극소수인가?’, ‘나는 영적 유형으로 태어났으니 애초에 일곱째 상태에는 갈 수 없는가?’ 같은 질문이 곧바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13과 AC.62는 사람들을 출생 때부터 두 종류로 분류하는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두 글만으로 ‘누가 처음부터 영적 인간형이고 누가 천적 인간형인가’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온순하고 다정한 성격이면 천적 인간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이면 영적 인간이라는 식으로 사람의 자연적 기질을 스베덴보리의 ‘영적’과 ‘천적’에 그대로 대응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AC가 사용하는 용어보다 훨씬 피상적인 구별이 됩니다.

 

그러면 AC.13의 ‘거의 없다’는 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 가장 먼저 거듭남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과 이어지는 일곱째 상태는 며칠 동안 몇 가지 종교적 체험을 하면 끝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AC.62가 굳이 ‘조금씩 조금씩’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과정이 점진적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낙심의 근거로 삼을 필요도 없습니다. AC.62의 초점은 ‘너는 몇째 날까지 갈 수 있느냐’를 묻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처음 상태에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창조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변화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도 ‘나는 일곱째 상태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자기 등급 판정보다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두는 편이 좋습니다.

 

또 ‘거의 없다’는 말을 보고 그 상태에 이른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내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여섯째 상태이고 누가 일곱째 상태인지 외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AC.13이나 AC.62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씀은 다른 사람을 분류하기보다 거듭남이 얼마나 깊은 주님의 역사인지를 보게 합니다.

 

무엇보다 창세기 본문의 순서를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말씀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입니다. AC.62 역시 이 여섯째 날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어떻게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지를 말합니다. 일곱째 날은 곧 이어지는 창2:1-3의 말씀에서 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단계에서 가장 안전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AC.13은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실제로 말합니다. 그 표현을 약화시킬 필요도, ‘아무도 없다’고 강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AC.62는 사람이 여섯 창조의 날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 두 진술을 그대로 붙들고, 일곱째 상태와 천적 인간의 더 깊은 관계는 관련 AC들이 직접 설명할 때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독법은 답을 조금 늦추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AC를 더 정확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체계화하기보다, 말씀과 AC가 열어 주는 순서를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듭남 자체가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진다고 하듯, 그것을 이해하는 일도 그렇게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AC.62, 창1:31, 여섯 날의 거듭남 :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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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 심화

1. ‘understanding’을 왜 ‘이해’라고 번역하는가?

 

AC.61에는 앞으로 AC에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두 단어가 함께 나옵니다. ‘understanding’과 ‘will’입니다. 여기서는 각각 ‘이해’와 ‘의지’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분에게는 ‘understanding’을 왜 그냥 ‘이해’라고 번역하는지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이해’라고 하면 흔히 ‘그 설명을 이해했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다’처럼 무엇인가를 알아들은 결과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반면 AC에서 ‘understanding’은 그런 한 번의 이해 행위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속한 하나의 능력을 가리키는 용어로 계속 사용됩니다. AC.61에서도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이 인간의 understanding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번역할 때 ‘이해력’, ‘지성’, ‘사고력’ 같은 표현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각각 장점이 있습니다. ‘이해력’은 능력이라는 점을 쉽게 전달하고, ‘지성’은 하나의 정신 능력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각각 아쉬움도 있습니다. ‘이해력’은 한국어 문장에서 반복되면 다소 딱딱하고 능력의 정도, 곧 ‘이해력이 좋다, 나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지성’은 철학적이거나 지적 수준을 뜻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고, ‘사고력’은 생각하는 능력 일반으로 범위가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 전체의 기본 번역어로는 간결하게 ‘이해’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독자는 여기서 말하는 ‘이해’를 ‘무엇인가를 알아들은 결과’만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신앙에 관한 지식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해’라는 번역어 자체를 바꾸기보다 처음 등장할 때 그 뜻을 충분히 설명해 두고, 이후에는 계속 ‘이해’라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번역어의 일관성도 유지하면서 처음 읽는 독자의 혼란도 줄일 수 있습니다.

 

특히 ‘will’과 함께 놓으면 이 선택의 장점이 더 분명해집니다. AC에서는 understanding과 will이 자주 짝을 이루어 등장합니다. 이것을 ‘이해와 의지’라고 하면 간결하면서 두 용어의 대응 관계도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의지’ 역시 일상적인 ‘의지력이 강하다’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61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이 인간의 ‘의지’에 속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의지는 단순히 어떤 목표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정신력보다 훨씬 깊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필요하다면 처음 설명할 때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풀어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정식 번역어로 매번 사용하면 문장이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해하는 능력에 속한다’보다 ‘인간의 이해에 속한다’가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명을 위해 ‘원하고 뜻하는 능력’ 정도로 풀 수는 있지만, 정식 번역어는 ‘의지’로 유지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특히 ‘의도하는 능력’이라고만 하면 의지가 단순히 어떤 행동을 계획하거나 의도하는 기능으로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와 의지를 흔히 ‘머리와 가슴’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는 비유로만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understanding과 will은 신체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에 관한 용어입니다.

 

AC.61 자체가 이 두 용어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은 이해에 속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은 의지에 속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AC에서 ‘이해’라는 말을 만날 때 단순히 ‘알고 있다’는 뜻으로만 읽지 않고, 신앙에 관한 지식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을 함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의지’를 만날 때에는 단순한 결심이나 의지력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와 관계된 능력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해’라는 평범한 한국어 단어가 AC 안에서는 점차 하나의 중요한 용어로 자리 잡게 됩니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도 같은 번역어를 일관되게 사용하면서 그 뜻을 차근차근 익혀 가는 편이, 문맥마다 ‘이해력’, ‘지성’, ‘사고력’ 등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보다 AC 전체의 사유 구조를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understanding은 기본적으로 ‘이해’, will은 ‘의지’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처음 접하는 독자가 이 말을 일상적인 의미로 너무 좁게 읽지 않도록, 필요한 자리에서는 ‘이해하는 능력’, ‘원하고 사랑하는 데 관계된 의지’라고 풀어 설명하면 충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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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에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창1:31의 상태가 ‘심히 좋았더라’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을 단순히 ‘신앙 = 아는 것’, ‘사랑 = 행동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처음 이해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사랑의 의미를 너무 좁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어떤 성경 구절을 기억하거나 어떤 교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에는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관계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진리에 따라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들과 관계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외우고 있다는 것은 기억 지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인정하고,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비추는 진리로 받아들이며, 실제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면 신앙에 속한 것과 더 깊이 관계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 역시 단순한 감정이나 행동 하나와 같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며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의지의 생명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이웃의 선을 원하고, 그 사람에게 무엇이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그 선을 행하려 한다면 사랑에 속한 것이 삶에 나타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알면 신앙, 행동하면 사랑’이라는 공식은 피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많은 종교적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받기 위해 선행할 수도 있고,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행동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동의 내적 사랑이 무엇인지 곧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신앙 역시 단순히 머리에만 있는 정보가 아닙니다. AC.60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결국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앙을 단순한 지식 저장소처럼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들 =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관계된 것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안전합니다.

 

바로 다음 AC.61은 이 문제를 한 걸음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영적’이라고 하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하는 모든 것을 ‘천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60의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다음 글의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이해하는 준비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영적’과 ‘천적’의 전체 차이를 미리 다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는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다음 글이 말할 몫은 다음 글에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60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전혀 다른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거짓을 통해 이익을 얻고 싶어 할 수도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계속 복수하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가 알고 인정하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것은 아직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AC.60이 ‘심히 좋았더라’라고 부르는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사람이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결합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알던 것을 이제 실천한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조금 부족합니다. 실천은 물론 중요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결합은 더 안쪽의 의지와 이해에 관계됩니다. 무엇이 참인지 인정하는 이해와 무엇이 선한지 사랑하는 의지가 서로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AC.60은 이 결합을 단순한 협력이라고 하지 않고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를 이룹니다.

 

이 대목은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이 사람은 이제 성경을 많이 안다’고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것도 아니고, 단지 ‘좋은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하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AC.60의 설명에 따르면 그 깊은 이유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가 서로 분리된 채 각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결합된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쉽게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매우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고, 많은 선행을 하는 사람의 가장 깊은 동기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설명은 ‘누가 여섯째 날 인간인가’를 분류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거듭남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결합을 인간 자신의 작품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창1:31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라고 시작합니다. ‘심히 좋았더라’고 평가받는 상태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결과입니다.

 

속뜻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자기 힘으로 생명 있게 만들고 사랑과 결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가운데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을 가장 간단하게 구별한다면, 전자는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것들이고, 후자는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관계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0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그 구별 자체보다 그 다음입니다.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 됨 때문에 말씀은 앞선 날들의 ‘좋았더라’를 넘어 여섯째 날에 이르러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합니다.

 

 

 

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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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AC.59 후반부에는 처음 AC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수년 동안 육신 안에 있으면서 저 세상의 영들과 교류했으며, 가장 악한 영들과도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때로는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먼저 ‘정말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59 자체만 놓고 보면 대답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비유나 상징적인 이야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경험의 역사적 사실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스베덴보리 자신은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구별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어도 저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그는 이것을 실제 영계 경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AC.59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왜 이 이야기를 여기에서 하는가?’입니다. 이 경험담 바로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시면 사람이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수천의 영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는데도 ‘머리카락 하나’ 해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신의 영적 능력에서 찾지 않고 ‘주님의 보호’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는 수천의 악령과 싸워 이길 정도로 대단한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읽으면 본문의 중심이 뒤집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자기의 강함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다’는 표현을 읽을 때에도 성경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보호를 말하면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AC.59이 여기서 그 성경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상응을 논증하는 것은 아니므로, 억지로 별도의 성경 해석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한국어 독자에게는 주님의 보호를 표현하는 익숙한 성경적 언어와 자연스럽게 울림을 이루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또 ‘수천’이라는 숫자를 상징적인 숫자로 바꾸어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실제로 매우 많은 영들에게 둘러싸였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 숫자를 가지고 영계의 집단 규모나 구조를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 글의 중심은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특별한 경험이 허용되었을까요? AC.59은 여기서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류에게 영계의 비밀을 밝히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다’고 이번 한 글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술들을 따라가면 그가 자신에게 영계가 열렸으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AC.59의 이 특정 경험이 왜 허용되었는지는 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또 이 경험을 모든 신앙인의 표준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AC.59은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영들을 눈으로 보고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오랜 경험을 통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의 특별한 경험과 모든 사람의 경험을 동일하게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이 강렬한 사람이 더 높은 신앙인이라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 AC.59의 강조점은 얼마나 많이 보고 들었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말을 존중해서 읽는다면 영과 영계를 전부 인간 심리의 비유로 환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의 세계와 그곳의 영들을 실제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저술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무엇을 실제라고 주장하는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모든 불안이나 나쁜 생각,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곧바로 ‘악한 영의 공격’이라고 판정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AC.59은 그런 진단법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늘 마음이 갑자기 불안하니 악한 영이 가까이 왔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으니 어떤 영이 내게 넣은 것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AC.59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적용입니다.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는 신체적·심리적·환경적 요인도 있으므로 특정 느낌만으로 영적 원인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이 경험담은 무엇을 말해 줄까요? 가장 먼저 AC.59 자체가 말하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극심한 영적 적대 가운데서도 주님의 보호 때문에 자신이 해를 입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는 사람들이 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독자에게 특별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라고 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듭남의 전투와 그 가운데 있는 주님의 보호에 대한 증언입니다.

 

여기서도 AC보다 앞에 있는 것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놀라운 영계 경험에 마음을 빼앗겨 그의 체험 자체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AC의 역할은 독자의 관심을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해설하고 있는 말씀과 그 말씀의 주님께 돌려보내는 데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AC.59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목적도 ‘나를 보라’가 아닙니다. ‘주님의 보호’를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해도 생명과 안전의 근원은 자기에게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한 번의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독자에게 모든 것을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주제들은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의심 없는 신앙을 갖게 할 만큼 충분히 가르칠 수 없으므로 세부 사항들을 뒤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같은 태도로 읽으면 좋겠습니다. ‘수천의 영들’이라는 놀라운 한 문장만 떼어 내어 영계의 전체 구조를 만들거나 스베덴보리의 특별함을 강조하기보다, AC 전체를 계속 따라가며 그가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의 중심은 ‘수천의 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아닙니다. 그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도록 그를 보호하신 주님입니다.

 

그래서 AC.59의 이 매우 특이한 경험담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은 ‘스베덴보리가 얼마나 놀라운 영적 세계를 보았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그가 이 경험을 통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사람을 매 순간 보호하시는 주님입니다.

 

 

 

AC.59, 창1:30, 거듭남의 전투 : 악한 영들의 공격과 주님의 보호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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