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9후반부에는 처음AC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수년 동안 육신 안에 있으면서 저 세상의 영들과 교류했으며,가장 악한 영들과도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심지어 때로는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먼저‘정말이런일이실제로있었다는말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AC.59자체만 놓고 보면 대답은 분명합니다.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비유나 상징적인 이야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경험의 역사적 사실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스베덴보리자신은무엇이라고주장하고있는가?’하는 문제를 먼저 구별하는 것이 좋습니다.적어도 저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그는 이것을 실제 영계 경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AC.59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왜이이야기를여기에서하는가?’입니다.이 경험담 바로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시면 사람이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입니다.수천의 영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는데도‘머리카락하나’해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이유를 자신의 영적 능력에서 찾지 않고‘주님의보호’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스베덴보리는수천의악령과싸워이길정도로대단한영적능력을가진사람이었다’고 읽으면 본문의 중심이 뒤집힙니다.그가 말하려는 것은 자기의 강함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입니다.
‘머리카락하나도해를입지않았다’는 표현을 읽을 때에도 성경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성경에는 주님의 보호를 말하면서‘너희머리털하나도상하지아니하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그러나AC.59이 여기서 그 성경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상응을 논증하는 것은 아니므로,억지로 별도의 성경 해석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다만 한국어 독자에게는 주님의 보호를 표현하는 익숙한 성경적 언어와 자연스럽게 울림을 이루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또‘수천’이라는 숫자를 상징적인 숫자로 바꾸어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실제로 매우 많은 영들에게 둘러싸였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반대로 이 숫자를 가지고 영계의 집단 규모나 구조를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이번 글의 중심은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특별한 경험이 허용되었을까요?AC.59은 여기서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인류에게영계의비밀을밝히는사명을받았기때문에반드시이런일을겪어야했다’고 이번 한 글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술들을 따라가면 그가 자신에게 영계가 열렸으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그러나AC.59의 이 특정 경험이 왜 허용되었는지는 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또 이 경험을 모든 신앙인의 표준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AC.59은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영들을 눈으로 보고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오랜 경험을 통해‘거듭나고있는사람들이’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그의 특별한 경험과 모든 사람의 경험을 동일하게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이 강렬한 사람이 더 높은 신앙인이라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AC.59의 강조점은 얼마나 많이 보고 들었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말을 존중해서 읽는다면 영과 영계를 전부 인간 심리의 비유로 환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그는 영의 세계와 그곳의 영들을 실제적인 것으로 말합니다.그러므로 그의 저술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무엇을 실제라고 주장하는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모든 불안이나 나쁜 생각,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곧바로‘악한영의공격’이라고 판정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AC.59은 그런 진단법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늘마음이갑자기불안하니악한영이가까이왔다’, ‘이런생각이떠올랐으니어떤영이내게넣은것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은AC.59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적용입니다.사람의 감정과 생각에는 신체적·심리적·환경적 요인도 있으므로 특정 느낌만으로 영적 원인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이 경험담은 무엇을 말해 줄까요?가장 먼저AC.59자체가 말하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스베덴보리는 극심한 영적 적대 가운데서도 주님의 보호 때문에 자신이 해를 입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영의 세계와 그 본성,그리고 거듭나는 사람들이 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따라서 이 이야기는 독자에게 특별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라고 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거듭남의 전투와 그 가운데 있는 주님의 보호에 대한 증언입니다.
여기서도AC보다 앞에 있는 것은 말씀입니다.우리가 스베덴보리의 놀라운 영계 경험에 마음을 빼앗겨 그의 체험 자체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AC의 역할은 독자의 관심을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그가 해설하고 있는 말씀과 그 말씀의 주님께 돌려보내는 데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AC.59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목적도‘나를보라’가 아닙니다. ‘주님의보호’를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자신에게 아무리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해도 생명과 안전의 근원은 자기에게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한 번의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독자에게 모든 것을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이런 주제들은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의심 없는 신앙을 갖게 할 만큼 충분히 가르칠 수 없으므로 세부 사항들을 뒤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같은 태도로 읽으면 좋겠습니다. ‘수천의영들’이라는 놀라운 한 문장만 떼어 내어 영계의 전체 구조를 만들거나 스베덴보리의 특별함을 강조하기보다,AC전체를 계속 따라가며 그가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의 중심은‘수천의영’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 자신도 아닙니다.그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머리카락하나도’해를 입지 않도록 그를 보호하신 주님입니다.
그래서AC.59의 이 매우 특이한 경험담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은‘스베덴보리가얼마나놀라운영적세계를보았는가?’에서 멈추지 않고‘그가이경험을통해누구를가리키고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사람을 매 순간 보호하시는 주님입니다.
AC.59에서 처음 읽는 사람을 가장 놀라게 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면 그 안의 욕정과 거짓을 빨리 없애 주시면 될 것 같은데,오히려 그것들이 한순간에 제거되지 않으며 악한 영들까지 오랫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된다고 합니다.도대체 왜 그러실까요?
먼저AC.59자체가 제시하는 이유를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으며,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그리고 이것들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그렇게 하면‘인간전체를파괴하는것’이 되기 때문입니다.그 사람이 지금까지 획득해 온 생명이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자체가 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또한 욕정과 거짓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좋은 것이므로 보존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오면서 자기 것으로 획득한 생명의 상태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사랑하고,그 사랑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살아왔습니다.그 가운데 악한 욕정이 지배해 왔다면 욕정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은 몸에 묻은 먼지처럼 간단히 털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그의 실제 삶과 깊이 얽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한순간에 제거하여 사람 자체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그러나 그렇다고 악을 그대로 인정하거나 정당화하시는 것도 아닙니다.AC.59의 방향은 분명히‘개혁’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악한 영들이 등장합니다.그들은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허락됩니다’.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허락하신다’와‘뜻하신다’입니다.악한 영들의 악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주님께서 그들에게 악을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악한 영들은 자기 성질에 따라 사람의 욕정을 자극합니다.그러나 그들의 작용이 마지막 결과를 결정하지는 못합니다.AC.59은 그렇게 자극된 욕정들이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느슨해지고,마침내‘주님에의해’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주어는 결국‘주님’입니다.악한 영들이 욕정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악한 영들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사람을 개혁하시고 선을 향해 이끄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왜 욕정을 자극하게 하시는가,자극된 욕정이 왜 느슨해지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그러나AC.59은 그 세부적인 과정을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 우리가 빈칸을 너무 빨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욕정이드러나야사람이자유롭게선택할수있기때문이다’, ‘악이나타나지않으면선을자기것으로선택할수없기때문이다’라고 말하면 그럴듯하지만,그것은 적어도AC.59이 이 자리에서 직접 설명하는 내용은 아닙니다.인간의 자유와 시험에 관한 다른AC들을 충분히 살펴본 뒤 더 정확하게 연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데까지 가면 충분합니다.악과 거짓은 사람의 획득된 생명에 깊이 얽혀 있기 때문에 한순간에 제거되지 않습니다.악한 영들이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고,그 욕정들은 여러 방식으로 느슨해지며,마침내 주님께서 그것들을 선을 향해 기울이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도 피해야 합니다. ‘악이즉시없어지지않는다면굳이악과싸울필요가없는것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그러나AC.59의 주제 자체가‘전투’입니다.악이 즉시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은 악을 용납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이 실제 전투를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이전의 욕정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곧‘나는전혀거듭나지않았구나’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AC.59의 설명대로라면 거듭남의 과정 자체에 옛 생명과의 전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대로‘이욕정도주님께서아직남겨두신것이니괜찮다’며 합리화해서도 안 됩니다.욕정은 여전히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주님께서 그것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그것을 선하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또 이 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너무 쉽게 적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도악을당장없애지않으시니다른사람의잘못도그냥두어야한다’는 목회 원칙이나 교육 원칙이AC.59에서 곧바로 나오지는 않습니다.신적 섭리의 방식과 인간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AC.59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한 인간을 얼마나 깊이 아시면서 거듭나게 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사람에게 얽혀 있는 악과 거짓을 단순히 잘라 내는 대상으로만 보지 않으시고,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마침내 선을 향해 이끄십니다.
그리고 악한 영들의 악한 의도조차 주님의 다스림 밖으로 벗어나 마지막 결과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그들은 선과 진리를 미워하지만,그들의 미움이 주님의 목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AC.59에서‘악한영들이허락된다’는 놀라운 말을 읽을 때 악한 영들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본문의 중심은 그들이 아닙니다.그들의 작용 가운데서도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그 사람의 옛 생명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마침내 선을 향해 이끄시는 주님이 중심입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30)
AC.59
여기서자연적인간의음식으로오직‘모든푸른풀’(vegetableandthegreenoftheherb)만이언급되는이유는이렇습니다.거듭남의과정에서사람이영적인간이되어가는동안,그는끊임없이전투에놓이게되며,이때문에주님의교회는‘전투하는교회’(militant)라불립니다.거듭나기전에는욕정들이지배권을가지는데,이는인간전체가욕정들과거기에서나온거짓들로이루어져있기때문입니다.거듭남의과정에서이욕정들과거짓들은한순간에제거될수없습니다.그렇게되면인간전체가파괴되고말기때문인데,이는그가지금까지획득해온유일한생명이바로그런것들이기때문입니다.그래서악한영들이오랜시간동안그사람과함께있도록허락되며,이들은그의욕정들을자극합니다.그결과욕정들은수없이다양한방식으로느슨해지고,마침내주님에의해선을향해기울어질수있게되며,이렇게사람이개혁됩니다.이전투의시기동안,사랑과신앙,곧주님을향한사랑과신앙에속한모든선과진리를극도로미워하는악한영들은,사람에게‘채소와푸른풀’에비유되는음식외에는아무것도남겨주지않습니다.그럼에도불구하고주님은사람에게‘씨맺는채소’와‘열매맺는나무’에비유되는음식도주시는데,이는평온과평화의상태와그안에있는기쁨과즐거움입니다.이음식은주님께서간헐적으로주십니다. The reason why the “vegetableandthegreenoftheherb” only are here described as food for the natural man is thi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when man is being made spiritual, he is continually engaged in combat, on which account the church of the Lord is called “militant”; for before regeneration cupidities have the dominion, because the whole man is composed of mere cupidities and the falsities thence derived.During regeneration these cupidities and falsities cannot be instantaneously abolished, for this would be to destroy the whole man, such being the only life which he has acquired; and therefore evil spirits are suffered to continue with him for a long time, that they may excite his cupidities, and that these may thus be loosened, in innumerable ways, even to such a degree that they can be inclined by the Lord to good, and the man be thus reformed. In the time of combat, the evil spirits, who bear the utmost hatred against all that is good and true, that is, against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which things alone are good and true, because they have eternal life in them—leave the man nothing else for food but what is compared to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nevertheless the Lord gives him also a food which is compared to the herb bearing seed, and to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states of tranquillity and peace, with their joys and delights; and this food the Lord gives the man at intervals.
[2] 주님께서매순간,아니매순간의가장작은부분까지도사람을보호하지않으신다면,그는즉시멸망하고말것입니다.이는영의세계에는주님을향한사랑과신앙에속한것들에대해형언할수없을만큼강렬하고치명적인증오가존재하기때문입니다.이사실의확실성은,제가지금까지수년동안,비록육신안에있으면서도,저세상의영들,그중에서도가장악한영들과함께지내온경험을통해확언할수있습니다.저는때로수천의영들에게둘러싸여,그들이독을내뿜고,가능한모든방식으로저를괴롭히도록허락받았으나,주님의보호아래서제머리카락하나도해를입지않았습니다.이렇게오랜경험을통해저는영의세계와그본성,그리고거듭나고있는사람들이영원한생명의행복에이르기위해반드시견뎌야하는전투에대해충분히배울수있었습니다.그러나이런주제들은일반적인설명만으로는누구도의심없는신앙으로믿게만들수없기때문에,주님의신적자비(theLord’sDivinemercy)에관한세부적인내용들은뒤이은글들에서계속설명될것입니다. Unless the Lord defended man every moment, yea, even the smallest part of every moment, he would instantly perish, in consequence of the indescribably intense and mortal hatred which prevails in the world of spirits against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The certainty of this fact I can affirm, having been now for some years (notwithstanding my remaining in the body) associated with spirits in the other life, even with the worst of them, and I have sometimes been surrounded by thousands, to whom it was permitted to spit forth their venom, and infest me by all possible methods, yet without their being able to hurt a single hair of my head, so secure was I under the Lord’s protection.From so many years’ experience I have been thoroughly instructed concerning the world of spirits and its nature, as well as concerning the combat which those being regenerated must needs endure, in order to attain the happiness of eternal life.But as no one can be so well instructed in such subjects by a general description as to believe them with an undoubting faith, the particulars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relate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59는 바로 앞 AC.58에서 남겨 둔 질문에 답합니다. AC.58은 같은 사람의 자연적인 것들에게 ‘채소와풀의푸른것’이 음식으로 주어진다고 했지만, 왜 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그렇게 묘사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AC.59는 바로 그 이유를 거듭남의 ‘전투’에서 찾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남 가운데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 ‘계속전투에종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주님의 교회를 ‘전투하는교회’(militant)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전투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종교와 싸우는 외적인 전쟁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맥상 사람 안의 욕정과 거짓, 그리고 그것들을 자극하는 악한 영들과 관련된 거듭남의 전투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이 대목부터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거듭남을 ‘나쁜사람이점점좋은사람이되는과정’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59에서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과정은 훨씬 더 격렬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 욕정들에서 거짓들이 생겨납니다. 거듭남이 시작되면 이 기존의 생명과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선과 진리 사이에 전투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욕정’(cupidities)은 단순히 사람이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의 욕구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59에서 말하는 욕정은 거짓을 낳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모든 자연적 소망이나 즐거움을 곧바로 ‘욕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더 놀라운 것은 ‘거듭나기전에는인간전체가욕정들과거기서나온거짓들로이루어져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간이라는존재자체가본질적으로아무가치없는악이다’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정죄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맥은 거듭나기 전 사람이 획득해 온 생명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실제로 지배권을 행사해 온 삶이 욕정과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것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실까요? AC.59의 대답은 매우 중요합니다. 욕정과 거짓이 한순간에 없어지면 ‘인간전체를파괴하는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획득해 온 생명이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악이 인간의 본래 생명이므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악이 거듭남에 꼭 필요한 좋은 재료라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현재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온 생명의 상태를 한순간에 없애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기존 인간을 순간적으로 소멸시키고 전혀 다른 인간을 그 자리에 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용된다’고 합니다. 이 문장은 특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악한 영들을 보내어 사람을 악하게 만드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의 단어는 ‘허용된다’(are suffered)입니다. 악한 영들의 작용은 주님의 선한 작용과 같은 것이 아니라 허용되는 것입니다.
그 악한 영들은 사람의 욕정들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욕정들은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느슨해집니다’(loosened). 마침내 그것들이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을 정도가 되고, 그렇게 사람이 개혁됩니다.
여기서도 주어를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한 영들이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은 욕정을 자극합니다. 욕정들이 느슨해지는 과정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선으로기울이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악한 영들의 활동과 주님의 활동을 같은 종류의 작용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이 한 문장을 가지고 ‘악한영은자유로운선택을만들어주기위해필요하다’, ‘욕정이올라오지않으면사람에게선택의기회가없으므로거듭남도일어나지않는다’는 완성된 이론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영들의 유입, 시험의 질서는 AC전체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AC.59가 직접 밝히는 것은 악한 영들이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고, 그 욕정들이 무수한 방식으로 느슨해져 주님께서 선으로 기울이실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악을사용하신다’는 말과도 조심스럽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을 선한 것으로 만드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은 악입니다. 다만 악한 영들의 활동을 무제한으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허용의 범위 안에 두시며, 그 가운데서도 사람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이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방향입니다.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악한 영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를 극도로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선과 진리만이 참으로 선하고 참된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영들이 전투 중인 사람에게 남겨 주는 음식은 ‘채소와풀의푸른것’에 비유되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AC.58에서 왜 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그렇게 묘사되었는지에 대한 AC.59의 대답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채소와풀의푸른것’을 ‘삶이단조롭고메마르며겨우버티는심리상태’라고 구체적으로 번역해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AC.59는 그런 심리적 묘사를 하지 않습니다.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전투 중 악한 영들이 사람에게 그것에 비유되는 음식 외에는 남겨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서도 다른 음식을 주십니다. ‘씨맺는채소’와 ‘열매있는나무’에 비유되는 음식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스베덴보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직접 설명합니다. ‘평온과평화의상태와그안의기쁨과즐거움’입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앞의 AC.57에서는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영적 음식과 관련하여 설명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전투 중 주님께서 간헐적으로 주시는 평온과 평화, 기쁨과 즐거움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같은 자연적 표상이 언제나 단 하나의 문장으로만 정의되는 기계적인 상징 사전을 만들 수 없다는 것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직접 설명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음식을 ‘간헐적으로’ 주십니다. AC.59은 왜 항상 평화 상태를 유지하게 하지 않으시는지 세부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너무편안해지면거듭남이중단되기때문에평화를일부러거두신다’거나 ‘다시전투할힘을주기위한휴식시간이다’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전투 가운데서 주님께서 평온과 평화의 상태, 그 기쁨과 즐거움을 간헐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거듭남의 전투를 매우 어둡게만 읽지 않게 해 줍니다. 전투가 있다는 것과 주님께서 평화를 주신다는 것이 같은 문단 안에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활동하지만 그 활동이 마지막 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사람을 선으로 기울이시고 평온과 평화도 주십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더욱 강한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매순간,아니매순간의가장작은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시면 사람은 즉시 멸망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영의 세계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한 형언할 수 없이 강렬하고 치명적인 증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문장은 단순히 ‘주님은가끔위험할때우리를도와주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AC.59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의 보존 자체가 지속적인 주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독립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키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이례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직접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는 당시 이미 여러 해 동안 육체 안에 있으면서 저 세상의 영들과 교류해 왔으며, 가장 악한 영들과도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자신을 괴롭히도록 허용되었지만, 주님의 보호 아래 머리카락 하나도 해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정말문자그대로수천의영들을경험했다는뜻인가?’, ‘왜스베덴보리에게이런일이일어났는가?’, ‘우리도이런영적경험을해야하는가?’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은 AC.59본문의 의미를 넘어 스베덴보리의 영계 경험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독립적인 문제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AC.59자체에서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비유나 상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제 경험에 근거한 사실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그의 저술을 해설하면서 이 대목을 단순한 문학적 비유로 바꾸는 것도 본문에 충실한 독법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경험을 가지고 ‘스베덴보리는수천의악령을혼자이겨낸영적거인’이라고 읽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정반대입니다. 그는 자신이 강해서 견뎠다고 하지 않고 ‘주님의보호아래서’ 안전했다고 말합니다. AC.59의 주인공은 스베덴보리의 영적 능력이 아니라 그를 보호하신 주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여러 해의 경험을 통해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 견뎌야 하는 전투에 관하여 충분히 배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경험을 단순한 개인 간증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거듭남의 전투와 주님의 보호를 증언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또 하나의 중요한 절제를 보여 줍니다. 그는 이런 주제를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말한다고 해서 누구든 의심 없는 신앙으로 믿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그 세부 사항들을 뒤에서 계속 말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진리는사람이받을수있는만큼만조금씩주어진다’는 일반 원리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9의 직접 의미는 스베덴보리가 지금 한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이런 낯선 영적 현실을 충분히 납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뒤에서 더 구체적인 사항들을 제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우리에게도 AC.59를 읽는 좋은 방법을 보여 줍니다. 악한 영, 욕정의 자극, 영적 전투, 수천의 영들과의 경험 같은 말을 한꺼번에 완전한 영계 시스템으로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세부 사항은 뒤에서 더 말하겠다고 했으므로, 지금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구조를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구조는 이렇습니다. 거듭남 가운데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사람은 전투를 겪습니다. 거듭나기 전 그를 지배하던 욕정과 거짓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 악한 영들이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고, 그 욕정들은 무수한 방식으로 느슨해지며, 마침내 주님께서 그것들을 선으로 기울이실 수 있게 됩니다. 전투 중 악한 영들은 선과 진리를 미워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간헐적으로 평온과 평화, 기쁨과 즐거움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매 순간 보호하십니다.
따라서 AC.59의 중심을 ‘왜악한영들이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신정론으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나는사람의전투가운데주님께서어떻게허용하시고보호하시며선으로이끄시는가?’라는 문맥 안에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을 인간의 자기계발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의 욕정을 찾아내어 자기 힘으로 재배열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전투는 실제로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겪습니다. 그러나 욕정을 선으로 기울이시는 분도 주님이고, 전투 중 평화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며, 매 순간 사람을 보호하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그래서 AC.59의 마지막 무게중심은 인간의 싸움보다 더 깊은 곳, 곧 싸우는 인간을 한순간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의 보호에 있습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창1:30)
AC.58
같은사람의자연적음식이여기서설명됩니다.그의자연적인것은‘땅의들짐승’(wildanimaloftheearth)과‘하늘의새’(fowloftheheavens)로상징되며,이들에게는먹을것으로채소와풀의푸른것이주어집니다.그의자연적음식과영적음식둘다시편에이렇게묘사됩니다. The natural meat of the same man is here described.His natural is signified by the “wildanimaloftheearth” and by the “fowloftheheavens,” to which there are given for food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Both his natural and his spiritual food are thus described in David:
여기서‘가축’(beast)이라는말은,같은시편의11절과12절에언급된‘들짐승’과‘공중의새’모두를포함하는표현으로사용되었습니다. where the term “beast” is used to express both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he fowl of the heavens which are mentioned in verses 11 and 12 of the same psalm.
AC.58은 바로 앞 AC.56-57에서 설명한 ‘음식’이라는 주제를 계속 이어 갑니다. AC.56에서는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영적 인간에게는 영적 음식이,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연적 음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AC.57에서는 영적 인간의 음식이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로 표현된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AC.58은 ‘같은사람의자연적음식’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첫 문장의 ‘같은사람’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화제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다루고 있는 그 사람에게 영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자연적인 것도 있으며, 이제 그 자연적인 것에 주어지는 음식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인간안에자연적·영적·천적세층이동시에하나의구조로존재한다’는 전체 인간론까지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8이 직접 말하는 것은 훨씬 단순합니다. ‘같은사람의자연적음식’이 있으며, 그의 자연적인 것이 ‘땅의들짐승’과 ‘하늘의새’로 상징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땅의들짐승’과 ‘하늘의새’를 함께 그 사람의 ‘자연적인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두 표현을 우리가 임의로 더 세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들짐승을 ‘자연적애정’, 새를 ‘자연적사고와기억지식’이라고 나누었지만, AC.58자체는 그렇게 각각의 의미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앞의 AC들에서는 짐승과 새가 각각 애정과 이해·지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설명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은 단순한 고정 사전처럼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AC.58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들짐승’과 ‘새’를 묶어 ‘그의자연적인것’이라고만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범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이 자연적인 것들에게 음식으로 주어지는 것은 ‘채소와풀의푸른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글의 직접적인 중심입니다. 앞의 AC.57에서 영적 인간의 음식은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라는 표현으로 설명되었는데, 이번에는 자연적인 것들에게 주어지는 음식이 더 단순하게 채소와 풀의 푸른 것으로 표현됩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자연적인간은외적지식과경험의결과물만먹는다’거나 ‘자연적음식은생명을직접낳지못한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8은 그런 세부적인 성질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 자연적 인간에게 이런 음식만 주어지는지는 바로 다음 AC.59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따라서 그 이유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다음 글에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은 AC.58과 AC.59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AC.58은 ‘무엇이자연적음식인가’를 말하고, AC.59는 ‘왜그자연적인간에게채소와풀의푸른것만음식으로주어지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 그 이유를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 넣으면 다음 AC.59의 몫을 앞질러 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시104:14을 인용합니다. ‘그가가축을위한풀과사람을위한채소를자라게하시며땅에서먹을것이나게하셔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자연적 음식과 영적 음식이 말씀 안에서 함께 묘사되는 예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시104:14을 너무 복잡하게 풀 필요는 없습니다. AC.58이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가축을위한풀’과 ‘사람을위한채소’라는 표현을 통해 자연적 음식과 영적 음식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가축을위한풀’을 자연적 애정에게 공급되는 기초적 선과 진리, ‘사람을위한채소’를 이성적 이해에 공급되는 더 높은 진리라고 자세히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AC.58은 그렇게 해설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시104:14의 모든 표현을 독립적인 상응 체계로 풀려면 다른 AC의 충분한 근거가 더 필요합니다.
또 ‘사람을위한’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자연적생명은영적·천적생명을섬기기위해존재한다’는 전체 질서를 바로 끌어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생각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전체에서는 관련될 수 있지만, AC.58의 직접 설명은 아닙니다.
시104:14뒤에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 언어상의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시편에서 ‘가축’(beast)이라는 말이 같은 시편 11절과 12절에 등장하는 ‘들짐승’과 ‘공중의새’를 함께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도 처음에는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왜 새까지 ‘가축’이라는 말 안에 포함한다고 할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자연과학적 분류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시104의 문맥에서 ‘beast’라는 표현이 앞서 언급된 들짐승과 새를 함께 포괄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짐승과새는상응적으로모두자연적생명영역이므로하나의범주다’라고 우리가 더 큰 체계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8이 직접 말하는 만큼만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같은 시편 11절과 12절에 언급된 들짐승과 새를 14절의 ‘가축’이라는 말이 함께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자연적인 것을 곧바로 악한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AC.58은 그 사람의 자연적인 것이 있고, 그것에 맞는 음식이 주어진다고 말할 뿐입니다. 자연적인 것 자체가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앞의 AC.56에서도 이미 보았습니다. 자연적 인간은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의 음식은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지식이나 자연적인 삶 자체를 악이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은 인간에게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의 영역이며, 그것에 맞는 음식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자연적 음식만으로 모든 영적 생명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AC.56-57은 이미 영적 인간에게 영적 음식이 따로 있다고 구별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적 음식과 영적 음식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번 AC.58은 그 둘을 구별하면서도 같은 사람 안에서 함께 다룹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자연적인것은영적인것보다낮고가치가없는것인가?’ 그러나 AC.58만으로 그렇게 결론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우열의 평가보다 각 영역에 맞는 음식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또 ‘자연적인것은반드시영적인것을섬겨야한다’는 결론도 이번 글에서는 조금 기다리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 질서는 이후 거듭남 전체를 통해 더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AC.58의 중심은 자연적 음식이 무엇으로 묘사되는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은 오히려 단순하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앞에서는 영적 인간의 음식이 설명되었고, 이제 같은 사람의 자연적인 것에 주어지는 음식이 설명됩니다. 그의 자연적인 것은 ‘땅의들짐승’과 ‘하늘의새’로 상징되고, 그들에게는 채소와 풀의 푸른 것이 음식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시104:14은 자연적 음식과 영적 음식이 함께 묘사되는 말씀의 예로 인용됩니다. ‘가축을위한풀’과 ‘사람을위한채소’가 각각의 음식으로 나타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가축’이라는 말이 같은 시편에 앞서 나오는 들짐승과 새를 함께 표현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AC.58이 직접 말하는 전부에 가깝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다음 AC.59로 넘어가기 위한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왜 자연적 인간에게 ‘채소와풀의푸른것’만 음식으로 주어지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 글에서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되어 훨씬 더 깊게 밝혀집니다.
따라서 이번 AC.58은 ‘자연적음식이더높은생명을섬기는질서’를 완성하는 글이라기보다, 다음 설명을 위한 사실을 먼저 제시하는 글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같은 사람에게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있으며, 자연적인 것에도 그에 맞는 음식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그 이유는 AC.59에 남겨 둡니다.
AC.57의 첫 문장은 처음 읽으면 꽤 낯섭니다. ‘씨맺는채소는쓰임을지향하는모든진리이다.’진리는 참이면 참인 것이지,왜 스베덴보리는 진리에 굳이‘쓰임을지향한다’는 말을 붙였을까요?
먼저 영어 표현을 그대로 보면‘everytruthwhichregardsuse’입니다.여기서regards는 단순히‘관찰한다’는 뜻보다‘향한다’, ‘목적으로삼는다’, ‘관련되어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따라서‘쓰임을지향하는진리’라는 번역은 진리가 어떤 목적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을 살린 표현입니다.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여기서‘쓰임’이 현대적인 의미의‘실용성’과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진리가당장돈이되는가?’, ‘문제를빨리해결해주는가?’, ‘생활에바로써먹을수있는가?’라는 뜻의usefulness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쓰임’은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어떤 것이 선한 목적을 섬기며,주님께서 세우신 질서 안에서 다른 것의 유익을 위해 기능하는가와 관계됩니다.따라서 진리가 쓰임을 지향한다는 것은 진리가 단지 머릿속에 저장되거나 지적 만족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을 섬기는 방향을 가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이웃을사랑해야한다’는 진리를 안다고 해봅시다.그 문장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원어까지 분석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의 목적이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그 진리는 결국 실제로 이웃을 선하게 대하고,무엇이 그 이웃에게 참된 선인지 분별하며,그 선을 위해 행동하는 삶을 향합니다.
그러나 이것을‘진리→즉시행동’이라는 단순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어떤 진리는 먼저 생각을 바로잡고,어떤 진리는 오랜 시간 사람의 판단을 형성하며,어떤 진리는 시험 가운데서 비로소 깊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쓰임을지향한다’는 것은 모든 진리가 듣자마자 곧바로 눈에 보이는 행동 하나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행동만하면진리가쓰임을이룬다’는 뜻도 아닙니다.사람은 잘못된 생각에서 매우 열심히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선한 의도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이웃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가 함께 중요하다는 원리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진리는 선을 섬기지만,선 또한 진리에 의해 올바른 방향을 받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AC.57의 표현은 앞의AC.44와도 연결됩니다.거기서는 이해가 말씀을 듣고 의지가 그것을 행한다고 했습니다.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진리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삶과 결합하는 방향을 가집니다.
그러나‘쓰임’은 단지‘내가무엇인가좋은일을했다’는 개별 행동보다 넓습니다.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는 인간의 직무,관계,사회생활,천국의 질서까지 모두 쓰임과 연결되어 설명됩니다.각 존재가 전체를 위해 어떤 선한 기능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고AC.57한 문장에서 쓰임의 전체 교리를 모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지금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씨맺는채소’가 단순한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쓰임을바라보는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씨맺는채소’일까요?현재 심화에서는 채소가 빨리 자라고 낮게 자라므로‘초기의진리’,나무는 오래 살고 깊이 뿌리내리므로‘성숙한선’이라고 설명하기 쉽습니다.그러나AC.57은 이런 자연적 특징들을 근거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채소=초보단계’, ‘나무=성숙단계’라는 고정표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대응은‘씨맺는채소=쓰임을지향하는모든진리’, ‘열매맺는나무=신앙의선’입니다.그 이상은 문맥에서 충분한 근거가 있을 때만 더 나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씨’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씨가 다른 생명을 낳는다는 자연적 특징은 이해를 도울 수 있지만,이번 글에서는 씨 자체의 상응을 독립적으로 풀지 않습니다. ‘씨맺는채소’라는 전체 표현이 진리를 뜻한다고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면‘쓰임을향하지않는진리’도 있을까요?이 질문은 조금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객관적으로 참된 진리는 본래 선한 질서를 섬기는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사람이 그 진리를 자기 지식과 우월감,논쟁과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그때 문제는 진리 자체보다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의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데 사용한다면,지식으로는 진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 진리가 그의 삶 안에서 본래의 선한 쓰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아주 많은 교리를 알지 못해도 자신이 아는 진리를 성실하게 삶에 적용하여 이웃의 선을 섬기는 사람은 그 진리가 쓰임을 향하도록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합니다. ‘쓰임’이라고 하면 언제나 남에게 눈에 띄는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그러나 어떤 사람의 쓰임은 자녀를 돌보는 것일 수도 있고,정직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약속을 지키는 것,해를 끼치지 않는 것처럼 겉으로 작아 보이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쓰임의 규모가 아니라 선한 목적을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가 쓰임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모두가 큰 종교적 사역이나 특별한 봉사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쓰임은 사람의 자기 공로를 세우는 방식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나는이런쓰임을하고있으므로영적으로높은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쓰임의 외형은 유지하면서도 그 중심은 자기 사랑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AC.57의 문맥에서 영적 음식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따라서 진리가 쓰임을 향하고 그 쓰임이 실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의 근원 역시 인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사람은 받아들이고 행하지만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이것이‘쓰임을지향하는진리’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진리는 삶을 향합니다.그러나 그 삶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어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닙니다.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사람 안에서 선한 목적과 결합하여 실제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아는것’과‘사는것’을 서로 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스베덴보리는 지식을 경멸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사람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문제는 아는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진리가 쓰임을 지향한다는 말은‘이론은필요없고행동만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바른 행동을 위해 바른 진리가 필요합니다.그리고 진리가 진리답게 살아 있으려면 선한 목적과 쓰임을 향해야 합니다.
따라서AC.57의 표현을 가장 간단하게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쓰임을지향하는진리’란 자기 안에서 끝나는 진리가 아니라 선한 삶과 선한 목적을 섬기도록 주어진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씨맺는채소’가 영적 인간의 음식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영적 인간은 단지 많은 사실과 교리를 축적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선한 쓰임을 향하도록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AC.57을 읽으며‘나는얼마나많은진리를알고있는가?’라는 질문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그보다 더 깊은 질문은‘내가아는진리가무엇을향하고있는가?’입니다.자기 지식과 자기 확증을 향하는가,아니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과 이웃의 유익을 향하는가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