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6

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7절)

 

해설

AC.76은 창2:7의 속뜻을 개요로 제시하면서 천적 인간의 ‘생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AC.75에서는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고 했고, 이제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2:5-7의 여러 표현은 서로 떨어진 장면들이 아니라 천적 인간에게 속한 것들을 차례로 보여 주는 하나의 흐름 안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설명하지 않고, 그것이 ‘그의 생명’을 묘사한다고만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개요에서 ‘생명의 숨’을 곧바로 어떤 특정한 인간의 능력이나 기능 하나와 동일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 표현을 단순히 최초 인간의 육체가 처음 호흡하기 시작했다는 장면으로만 한정해서 읽는다면, 스베덴보리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거듭남의 연속적인 문맥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AC.73부터 계속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입니다.

 

특히 ‘그에게 … 불어넣으심’이라는 표현은 그의 생명의 근원이 그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AC.76 한 문장만으로 그 생명이 정확히 무엇이며,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오는지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개요가 직접 말하는 것은 천적 인간의 생명이 창2:7의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표현의 구체적인 속뜻은 뒤따르는 상세 해설에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76은 매우 짧지만 AC.75와 함께 중요한 구별을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고, 또한 그의 생명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는 관목과 초목 및 그것들을 적시는 안개의 모습으로, 후자는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합니다. 이 각각이 천적 인간 안에서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는 아직 개요에서 앞당겨 정하지 않고, 이어지는 설명의 순서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AC.76 해설)

 

 

 

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의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8-9절)

AC.77그 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동산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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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창2:1-17 개요,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의 관목과 초목, 기억지식과 이성’ (5-6절)

AC.75그의 기억지식과 이성[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은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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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은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5, 6절)

 

해설

AC.75는 창2:5-6에 나오는 ‘관목’, ‘초목’, ‘지면’, ‘안개’를 천적 인간의 상태와 관련하여 읽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개요에서 먼저 사람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여기서 관목과 초목은 단순한 식물에 관한 묘사로만 읽히지 않고, 앞 번호에서 말한 천적 인간에게 있는 기억지식과 이성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제시됩니다.

 

특히 ‘기억지식과 이성’이라는 순서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되면 기억지식이나 이성이 없어지는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다만 AC.75는 아직 천적 인간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이전 상태와 비교하여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천적 인간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반대로 ‘기억지식과 이성이 천적 인간을 만든다’는 식으로 미리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관목과 초목이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에서 난’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이 개요는 기억지식과 이성만 제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적셔지는 상태까지 함께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지면’은 무엇이며, ‘안개’는 무엇이고, 왜 비가 아니라 안개로 적셔지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AC.75는 아직 그 각각의 의미와 관계를 풀어 설명하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은 창2:5-6의 여러 표현이 천적 인간의 기억지식과 이성의 상태를 묘사한다는 큰 윤곽을 먼저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75에서는 관목은 무엇, 초목은 무엇, 지면은 무엇, 안개는 무엇이라고 각각 고정된 상응표를 먼저 만드는 것보다 스베덴보리의 설명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한 문장에서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천적 인간에게도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창2:5-6의 관목과 초목 및 그것들을 적시는 안개의 모습이 그 상태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각각의 표현이 어떤 관계 속에서 그 상태를 나타내는지는 뒤따르는 상세 해설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AC.75 해설)

 

 

 

AC.76, 창2:1-17 개요, ‘그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 (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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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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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 3절)

 

해설

AC.74는 창2:2-3의 속뜻을 한 문장으로 먼저 제시합니다. AC.73에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그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제 그 천적 인간을 창조의 ‘일곱째 날’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창1의 여섯 날과 창2의 일곱째 날은 단순히 자연계의 창조가 진행된 뒤 하루가 더해지는 순서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앞의 여섯 날이 인간의 거듭남과 관계되어 있었다면, 그 뒤에 오는 일곱째 날 역시 그 거듭남의 연속선상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와 관계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을 의미한다’고 풀어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안식일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창2:2-3에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그가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말씀을 인간의 거듭남과 연결하여 읽을 때, 그 일곱째 날은 바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의 상태와 관계됩니다. 다만 AC.74는 아직 왜 천적 인간을 일곱째 날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 대응 관계를 개요로 먼저 제시할 뿐입니다.

 

두 번째 명제인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다가 피곤해져 쉬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주님께서 ‘쉬신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AC.74가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뒤에서 일곱째 날과 안식, 거듭남의 싸움,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행하시는 일의 관계를 차례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개요에서 그 설명을 모두 앞당겨 넣기보다,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는 두 명제를 그대로 기억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74는 이렇게 AC.73에서 제시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라는 변화를 창2의 일곱째 날과 연결합니다. 이제 독자는 두 가지 질문을 가지고 다음 설명을 따라가게 됩니다. 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지, 그리고 왜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쉬신다고 하는지입니다. 이 질문들은 이 번호에서 미리 완성해서 답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직접 그 이유를 밝히는 순서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AC.74 해설)

 

 

 

AC.75, 창2:1-17 개요,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의 관목과 초목, 기억지식과 이성’ (5-6절)

AC.75그의 기억지식과 이성[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은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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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3, 창2:1-17 개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 (1

창2:1-17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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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창2:1-17)

 

AC.73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바로 이것을 다룹니다. (1절) 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1절)

 

해설

AC.73은 창2:1-17 전체의 첫 번째 개요이며, 동시에 창1과 창2를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한 문장입니다. 창1에서는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이 거듭남의 여섯 날을 거치면서 영적 인간이 되는 과정이 다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거듭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2는 창1과 별개의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1에서 이루어진 거듭남이 더 깊은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다룹니다.

 

여기서 ‘죽어 있던’이라는 표현은 특히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앞 AC.67-72에서 죽음 이후의 삶과 사람이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지는 일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문맥을 놓치면 육체의 죽음에서 영적 존재가 되고 다시 천적 존재가 된다는 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73은 창2 본문의 개요로 돌아온 첫 번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거듭나기 전 인간의 영적 상태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사후세계에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승급한다는 설명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변화에 관한 말입니다.

 

또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는 말을 단순히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하나의 등급표처럼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이 한 문장에서는 두 상태의 정확한 차이가 아직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일곱째 날, 주님의 안식, 퍼셉션, 사랑과 신앙, 속 사람과 겉 사람 등의 내용을 통하여 그 차이를 차례로 열어 갑니다. 그러므로 AC.73에서는 우선 창1에서 다루어진 영적 인간이 창2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는 큰 방향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원문의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은 천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 아무 관계 없이 처음부터 별도로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한 사람의 거듭남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앞으로 창2:1-17의 여러 세부 사항을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큰 틀이며, AC.73은 그 전체 과정을 단 한 문장으로 먼저 제시하고 있습니다. (AC.73 해설)

 

 

 

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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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앞,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가’

AC.72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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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어느 정도 불순한 식사 초대에도 번번이 응하셨지요... 왜 그러셨나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 저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초대가 드물지만 좀 있어 그때마다 고민이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식사 초대에 응하신 장면들은 복음서 곳곳에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7장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고, 11장과 14장에서도 또 다른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에 앉으십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시험하려는 마음, 체면을 세우려는 마음, 혹은 자기 의를 확인하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지요. 그런데도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로 모아집니다. ‘그 자리에 있는 영혼들 때문’입니다. 주님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보다, 그 자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 자체를 ‘드러내는 자리’, 곧 숨겨진 내면이 빛 가운데 드러나도록 하는 장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실제로 그 식사 자리들은 대부분 책망과 계시의 자리로 바뀝니다. 외식, 교만, 자기 의, 자비 없음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다시 말해, 주님은 그들의 식탁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그 식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상대의 불순함에 끌려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불순함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 혹은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위해 들어가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런 외적 사교 자리 자체를 거의 즐기지 않았고, 특히 영적 진리에 반하는 분위기의 자리에는 스스로를 많이 제한하는 편이었습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말년에 갈수록 더욱 조용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고, 필요 이상의 교류를 줄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인플럭스(influx)’를 따라 반응하려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경우에는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물러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겉모습이나 상황’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수용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처럼 공개적으로 논쟁의 자리로 들어가 상대를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중하게 ‘들어갈 자리’와 ‘물러설 자리’를 분별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목사님의 경우로 돌아오면, 핵심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 자체가 아니라, ‘그 자리에 가는 것이 주님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입니다. 만약 그 자리가 단순히 체면을 세우기 위한 자리이고, 목사님을 ‘장식’처럼 이용하려는 분위기이며, 거기서 어떤 진리의 나눔이나 선한 접촉도 이루어질 여지가 없다면, 스베덴보리적인 분별로는 조용히 거절하는 것도 충분히 정당합니다. 반대로, 비록 동기가 섞여 있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눌 가능성이 있고, 혹은 목사님의 참석 자체가 어떤 선한 영향,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상태’로 전해지는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도 들어가셨던 그 원리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기준은 이것 하나로 정리됩니다. ‘이 자리가 나를 소모시키는 자리인가, 아니면 주님이 나를 통해 무언가 하실 수 있는 자리인가.’ 전자는 피하는 것이 지혜이고, 후자는 겸손히 들어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일반 원칙으로 딱 잘라 정해지지 않고, 그때그때 ‘퍼셉션’(perception)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에 걸림을 느끼고 계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그 걸림이 ‘자기 보호에서 오는 불편함’인지, 아니면 ‘들어가면 안 된다는 내적 경고’인지를 조용히 분별해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일 것입니다.

 

 

 

SC.59, 결혼 안 한 스베덴보리가 'Conjugial Love'를 저술?

스베덴보리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녀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께서는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살아가며 결혼과 자녀를 통해 겪는 풍성한 기쁨과 때로는 무거운 아픔을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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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7, ‘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그러니까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며, 왜 세상 떠나기 전 이런 책을 썼고, 왜 주님은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이 책은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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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해설

AC.72는 AC.67부터 시작된 창2 앞의 다른 삶에 관한 서론을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창2 끝에서 이어질 내용을 예고합니다. AC.67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71에서는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의 해설 사이에 계속 삽입하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므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에 따라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2는 그 원칙에 따라 이 장의 끝에서 다룰 첫 주제를 미리 알려 줍니다.

 

그 주제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가’입니다. 이것은 AC.70에서 이미 예고한 내용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 어떠한지, 곧 어떻게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AC.72는 그 설명이 창2 본문의 속뜻을 해설한 뒤 이 장의 끝에서 이어질 것임을 밝혀 줍니다. 따라서 AC.70과 AC.72는 서로 다른 두 주제를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주제의 내용과 배치 위치를 각각 알려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아직 그 과정을 앞당겨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에서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AC.72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번호의 역할은 그 설명이 뒤에 온다는 것을 독자에게 알려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부활이나 사후 상태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가져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제부터 창2의 속뜻을 해설한 뒤 다시 이 주제로 돌아오겠다고 한 구성상의 안내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AC.67-72는 하나의 잘 짜인 서론을 이룹니다.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는 이유를 밝히고,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증언하겠다고 하며,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고 선언한 뒤, 이러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따로 배열하겠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장의 끝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다룰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이제 이 안내를 마치고 AC.73부터 창2:1-17의 속뜻에 관한 개요가 시작됩니다. (AC.72 해설)

 

 

 

AC.73, 창2:1-17 개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 (1

창2:1-17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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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덧붙이다’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의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삽입한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그것들을 어떤 순서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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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의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삽입한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그것들을 어떤 순서에 따라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본문을 해설하는 가운데 부수적으로 소개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append them in some order, 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AC.71은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책의 구성 자체를 이해하게 해 주는 중요한 안내입니다. AC.67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고, AC.70부터는 사람이 어떻게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말씀 본문의 속뜻을 해설하는 가운데 계속 삽입하면 내용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에 따라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에서 각 장의 앞뒤에 길게 나타나는 영계와 사후의 삶에 관한 기록은 본문 해설과 무관하게 덧붙인 여담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말씀의 본문에 대한 연속적인 해설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AC.67에서 밝힌 대로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다른 삶의 본성을 독자가 계속 알아 갈 수 있도록 따로 배열한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내용들이 본문 해설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본문을 해설하는 가운데 부수적으로 소개되는 내용들도 있다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도 눈에 띕니다. AC.67부터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것과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된 것,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을 계속 ‘허락’의 언어로 말해 왔습니다. 이제 AC.71에서는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로 덧붙이는 것까지 같은 언어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 번호는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메인 해설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이 기록과 배열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획으로만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신적 자비 아래 허락된 일로 이해했다는 사실까지만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71을 알고 나면 이후 AC의 구성이 훨씬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성경 본문의 속뜻을 따라가는 해설과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이 서로 경쟁하는 두 주제가 아니라, 말씀의 해설은 그 연속성을 지키고 다른 삶에 관한 내용도 흩어지지 않도록 각각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따라서 장의 처음이나 끝에서 영계에 관한 긴 기록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본문과 무관한 삽입물로 건너뛸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고 보아 의도적으로 함께 제시한 내용으로 읽어야 합니다. (AC.71 해설)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 심화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에 따라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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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앞,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가’

AC.72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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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 어떠한지, 곧 어떻게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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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 어떠한지, 곧 어떻게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제가 알 수 있도록,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때 저에게 알려졌던 많은 사람과 말하고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도 단지 하루나 일주일 동안이 아니라 여러 달 동안, 거의 일 년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와 똑같이 그들과 말하고 교제하였습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서 살았을 때 자신들이, 그리고 매우 많은 다른 사람이 죽음 이후에는 살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만큼 그토록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몹시 놀라워했습니다. 실제로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다른 삶 안에 있게 됩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AC.70부터 스베덴보리는 AC.67에서 예고했던 ‘다른 삶’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주제는 사람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입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히 ‘죽음’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이 ‘소생될 때’ 어떠한지, 곧 어떻게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생은 사라졌던 인간이 다시 존재하게 되는 새로운 창조를 뜻하기보다, 육체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 들어가는 전환과 관계됩니다. 그 결론이 이 번호의 마지막 문장인 ‘죽음은 삶의 연속’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자신이 알 수 있도록,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알았던 많은 사람과 죽음 이후에도 말하고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것도 하루나 일주일 정도의 일시적인 경험이 아니라 여러 달 동안, 어떤 경우에는 거의 일 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이 세상에서와 똑같이 말하고 교제했다고 합니다. AC.68의 ‘저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기 때문입니다’라는 선언이 여기서는 자신이 생전에 알았던 사람들과 죽음 이후에도 계속 교제했다는 구체적인 증언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놀라워했다는 내용도 중요합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서 살 때 자신들과 매우 많은 사람이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죽음 이후에 오히려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목을 통하여 사후의 삶을 먼 미래에 다시 시작되는 생명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들이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의 정확한 시간적 의미를 여기서 먼저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에서 분명한 강조점은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 인간의 생명을 끊어 놓는 긴 공백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삶이 영원한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AC.70 전체를 읽는 열쇠입니다. 사람이 육체의 죽음을 통과할 때 어떤 소생의 과정이 있으며, 그 과정은 이제부터 더 자세히 설명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있다는 사실과 인간의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AC.70에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확립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 육체의 죽음과 함께 소멸하는 것이 아니며, 죽음은 한 삶의 완전한 종결 뒤에 전혀 다른 존재가 새로 시작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제 뒤따르는 번호들은 바로 이 연속 가운데 사람이 어떻게 육체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차례로 보여 줄 것입니다. (AC.70 해설)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이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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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창2 앞, ‘인간은 본래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고 시대에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육체를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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