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에 나오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를 좀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마22:37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생각해 보면 질문이 생깁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단순히 ‘하나님을 아주 많이 사랑하라’는 강조의 반복일까요, 아니면 각각의 말에 서로 다른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일까요?

 

AC.36 자체는 ‘마음’, ‘목숨’, ‘뜻’을 각각 따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들을 곧바로 ‘마음=의지, 목숨=행위, 뜻=이해’라고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 구절에서 AC.36이 직접 붙드는 핵심은 훨씬 분명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며,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 신앙 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장 평범한 의미에서 이 말씀을 읽어도 충분히 깊습니다. ‘마음을 다하여’는 내 사랑과 애정에서, ‘목숨을 다하여’는 내 생명과 삶에서, ‘뜻을 다하여’는 내 생각과 이해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스베덴보리가 AC.36에서 각각 그렇게 정의했다고 말하기보다,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본 설명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쉽게 말하면 ‘내 삶의 한 부분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예배드릴 때의 마음만 주님께 드리고 나머지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 선택과 행동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과 생각과 삶 전체가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 영역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것을 마음으로 아끼고, 자주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시간과 힘을 사용하고, 중요한 선택을 할 때도 그것을 고려합니다. 물론 주님 사랑을 인간적인 애착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지만, ‘온 존재를 다하여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에는 이런 예가 도움이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결국 삶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을 다하여’라는 말씀은 ‘내가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은 입으로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무엇을 잃을까 가장 두려워하며, 무엇을 얻기 위해 가장 많은 것을 희생하는지를 보면 자기 사랑의 방향이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주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의 중심에 두는 것과 연결됩니다.

 

‘목숨을 다하여’라는 말씀은 그 사랑이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은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AC.36이 신앙을 단순한 ‘앎과 인정’에 두지 않고 교리가 가르치는 것에 대한 ‘순종’까지 말하는 것도 이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이 삶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AC.36이 말하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뜻을 다하여’라는 말씀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이해도 주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생각하지 않는 맹목적인 열정이 아닙니다. 무엇이 참인지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며,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진리 앞에서 살피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사랑은 감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며 어떤 기준으로 생각하는가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 표현을 지나치게 분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막12:30에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AC.36도 바로 이 구절을 함께 인용합니다. 만일 ‘마음, 목숨, 뜻’ 각각을 인간의 세 가지 고정된 기능에 정확히 대응시킨다면 막12의 네 번째 표현인 ‘힘’을 다시 어디에 대응시켜야 하는지 문제가 생깁니다. 오히려 이런 여러 표현이 함께 사용되는 것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부’를 강조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를 가장 쉽게 풀면 ‘너의 존재와 삶 전체로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 생각하는 것, 원하는 것, 선택하는 것, 행하는 것 가운데 어느 한 영역만 따로 떼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든 순간에 주님만 생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일하고, 가족을 돌보고, 쉬고,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며 자연계의 수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일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전체가 어떤 사랑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의 정상적인 삶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속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선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AC.36은 이 주님 사랑을 이웃 사랑과 떼어 놓지 않습니다. 주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전혀 없다면, 바로 다음 계명과 분리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두 계명으로 함께 말씀하셨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십시오’라는 감정적 권면보다 훨씬 깊습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주님과 무관한 영역을 따로 만들어 놓지 마십시오’라는 요청으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도, 생각도, 선택도, 실제 삶도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선과 진리를 향하게 하는 것, 이것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라는 말씀을 우리의 삶 가까이에서 이해하는 한 방법입니다.

 

다만 다시 한 번 구별할 것은, 이러한 설명이 AC.36에서 ‘마음은 이것, 목숨은 이것, 뜻은 이것’이라고 각각 속뜻을 규정한 결과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AC.36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신앙의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중심을 놓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 익숙한 말씀을 ‘나의 일부가 아니라 나의 전 존재와 삶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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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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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랑’에 대해 어디를 보니 ‘charity’를 쓰던데,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 해도 되는지요? 그리고 왜 ‘주님 사랑’은 전치사 ‘to’를 쓴 반면, ‘이웃 사랑’은 ‘toward’를 쓰나요?

 

 

AC.36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두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큰 두 계명으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스베덴보리도 신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자주 등장하는 ‘체어리티’(charity)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주님 사랑’은 단순히 주님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애정과 고백을 무가치하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가장 높이 여기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살고자 하는 데서 실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점은 AC.36의 문맥에서도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 있다고 말한 직후, 그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그 사랑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친절한 감정을 가지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해 행동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언제나 이웃 사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웃’의 범위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보다 넓습니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에서 시작하여 여러 사람의 공동체, 사회와 국가, 교회, 더 나아가 주님의 나라까지 ‘이웃’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집니다. 다만 AC.36에서는 이웃의 단계와 질서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우선 ‘이웃 사랑은 이웃의 참된 선을 원하고 그 선을 행하는 사랑’이라고 이해하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는 어떤 관계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charity`는 흔히 이웃을 향한 사랑과 그것이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영어의 `charity`를 보고 단순히 ‘자선’, ‘기부’, ‘구제’라고 생각하면 스베덴보리의 뜻보다 지나치게 좁아집니다. 그에게 체어리티는 훨씬 넓은 영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 번역에서는 `charity`를 문맥마다 곧바로 ‘이웃 사랑’으로 바꾸기보다 ‘체어리티’라고 살려 두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은 말 그대로 사랑의 대상을 이웃에 두는 표현이고, ‘체어리티’는 그러한 이웃 사랑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삶의 원리로 나타나는 것을 폭넓게 가리키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교리적 용어로 계속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나눌 필요도 없지만, 언제나 완전히 같은 단어처럼 바꾸어 써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영어 표현 자체로는 가능하며,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도 charity와 neighbor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원문이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하면 ‘이웃 사랑’으로, `charity`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도 독자가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love to the Lord`라고 하면서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했을까요? `to`와 `toward`가 다르니 여기에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6은 이 전치사의 차이에 별도의 교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to`는 주님과의 직접적인 결합을, `toward`는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는 것을 뜻한다고까지 확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것은 영어 표현의 미묘한 차이에서 본문이 직접 말하지 않은 신학적 의미를 끌어내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전치사의 차이보다 두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선은 이웃을 향한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반대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 역시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고 주님께 둡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을 ‘뿌리’, 이웃 사랑을 ‘열매’라고 비유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것도 AC.36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기보다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핵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AC.36이 신앙을 설명하다가 결국 이 두 사랑으로 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머리로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이 실제 삶의 선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 ‘이웃 사랑’, ‘체어리티’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될 서로 깊이 연결된 핵심 개념들입니다.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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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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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6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주님을 향한 생각이라고 여기며, 또 어떤 이들은 신앙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 교리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 곧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셔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앞의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시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라고 하십니다 (마22:37-40).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는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합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 “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Matt. 22:37–41) The “law and the prophets” 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해설

AC.36은 매우 직접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상당히 강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신앙’이라고 부르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교리를 머리로 알고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신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여러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종교적인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문은 신앙이 신앙 교리에 포함된 것들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라고 말합니다. 즉 ‘앎’과 ‘인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스베덴보리는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종’은 AC.36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은 머릿속에 있는 교리로 끝나지 않고, 그 교리가 가르치는 것을 실제 삶에서 따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인가?’ AC.36은 곧바로 그 오해를 막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순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수많은 규칙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며 사람이 순종해야 할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순종이다’라는 말을 ‘명령을 잘 따르는 것이 신앙이다’라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어떤 순종인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독립적인 영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6의 논점은 신앙의 고백이나 교리의 인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신 사랑을 삶에서 완전히 떼어 놓는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온전한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AC.36은 스베덴보리 자신의 철학이나 신학 체계를 먼저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막12:29-31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시며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이어 마22에서도 같은 두 계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덧붙습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가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두 항목을 골라 중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달려 있는 중심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말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는 무엇이 참인지 가르치고,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6의 기준에서는 신앙의 본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진리를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36 자체가 ‘신앙의 교리’와 그것이 ‘가르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순종할지를 알려면 먼저 무엇이 참인지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대립시키는 것은 ‘교리냐 사랑이냐’가 아니라 ‘삶과 분리된 교리적 신앙’과 ‘사랑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AC.35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5에서는 이해가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가 그 반대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인간의 분열을 다루었습니다. AC.36에서는 그 문제가 신앙의 언어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해로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 교리가 가르치는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은 우리에게 단순히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만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당신의 사랑과 삶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라고도 묻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올바른 고백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AC.36에서 신앙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알고 인정한 진리가 사랑과 만나고, 그 사랑이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순간 신앙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두 큰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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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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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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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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