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8 심화

1. 넷째 날 요약, 정리

 

창1:14-19의 넷째 날에 해당하는 AC.30-38을 여기까지 읽고 나면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순종, 교대와 다양함, 낮과 밤, 빛과 어둠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넷째 날이 끝나는 이 지점에서 전체 흐름을 한 번 묶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넷째 날은 ‘빛이 처음 생기는 날’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빛은 이미 첫째 날에 등장했습니다. 넷째 날에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광명체들’입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과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빛을 비추고 삶을 이끌게 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AC.31-34를 지나면서 이 점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영적 생명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를 말하면서 사랑을 더 큰 것으로 두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사랑에서 옵니다.

 

이것은 ‘사랑만 있으면 진리나 신앙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만 그 질서에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넷째 날의 해와 달은 바로 이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많이 알고 말하는 것만으로 영적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삶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별들도 등장합니다. 별은 신앙에 속한 여러 지식과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해와 달과 별을 함께 보면 넷째 날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사람 안에 단지 하나의 막연한 ‘종교적 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과 그것에 속한 여러 진리가 서로 관계를 이루면서 영적 삶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33에서는 이 빛의 근원이 더욱 깊이 설명됩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 하나가 아니라 인간 생명의 중심과 관계된 것입니다. 넷째 날에 큰 광명체인 사랑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다시 강조됩니다. 사랑 없는 신앙, 곧 삶과 분리된 신앙은 참된 의미의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넷째 날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머릿속에 많이 저장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AC.35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두 능력인 ‘의지’와 ‘이해’가 등장합니다. 사람은 의지하고 이해하는 존재이며, 이 두 능력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의 관계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주님의 자비로 사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보존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악한 의지가 원하는 것과 다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거듭남의 길이 열립니다.

 

이 대목은 넷째 날의 사랑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다는 말을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옳다고 믿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처음부터 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사람을 가르치시고, 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며 점차 의지와 삶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참된 결합은 악한 의지와 거짓된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AC.36은 그래서 신앙을 ‘순종’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단순히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별히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중심에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둡니다. 여기서도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신앙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어떤 사랑과 삶으로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창1:14의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로부터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이라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 자연계에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이 있고,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듯이 영적 생명에도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이 획일적이 되어 생명이 없게 되고, 선과 진리도 분별되거나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침체와 혼란과 악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7이 말하는 것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와 다양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영적 후퇴나 악한 상태를 주님께서 성장시키기 위해 주신 필수적인 계절이라고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AC.38에서는 넷째 날을 마무리하면서 네 가지 대응을 매우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 일’, 악한 것들은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요3:19, 21을 인용하여 빛과 어둠이 인간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AC.37의 ‘밤’과 AC.38의 ‘밤’을 기계적으로 똑같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하루의 변화 전체가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지만, AC.38에서는 낮과 밤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을 나타냅니다. 말씀의 상응은 단어 하나에 언제나 하나의 뜻만 붙여 놓은 고정된 암호표가 아니라,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AC.30-38을 한 흐름으로 놓고 보면 넷째 날의 중심이 보입니다. 앞선 과정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면, 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지고 영적 삶을 비추며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어야 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고 순종과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을 단순히 ‘해와 달과 별의 창조’라고만 읽으면 그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이 날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점차 살아 있는 빛으로 자리 잡고,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더욱 분명히 구별되며, 영적 생명이 그 빛 아래서 질서를 이루어 가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넷째 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져 영적 삶을 비추고 다스리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질서를 이루어 가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AC.38, 창1:18-19, ‘낮과 밤의 분별 : 행위로 드러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기준’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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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창1:18, 19)

 

AC.38

‘낮’(day)은 선을, ‘밤’(night)은 악을 뜻하며, 그래서 선(goods)을 가리켜서는 ‘낮의 일’(works of the day)이라 하고, 악(evils)을 가리켜서는 ‘밤의 일’(works of the night)이라 합니다. 또한 ‘빛’(light)은 진리를, ‘어둠’(darkness)은 거짓을 뜻합니다.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해설

 

AC.38은 매우 짧지만, 창세기 1장의 속뜻을 읽는 데 중요한 네 가지 대응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비유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언어가 지닌 영적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 일’, 악한 것들은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먼저 ‘왜 낮은 선이고 밤은 악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38은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고 대응 자체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낮에는 빛이 있어 사물들이 드러나고 활동할 수 있으며, 밤에는 어둠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적 모습이 그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빛’은 진리에, ‘어둠’은 거짓에 대응합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볼 수 있게 하지만, 거짓은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앞의 AC.37에서는 아침·낮·저녁·밤의 교대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에 비유했는데, 이번 AC.38에서는 곧바로 ‘밤은 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의 ‘밤’과 여기의 ‘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말씀의 상응을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사전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이나 상태도 문맥에 따라 강조되는 영적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AC.37에서는 하루와 한 해의 변화가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고, AC.38에서는 ‘낮과 밤’,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구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7의 모든 ‘밤’을 곧 악이라고 읽거나, 반대로 AC.38의 밤을 단순한 상태 변화 정도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각각 그 글이 말하는 문맥을 따라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요3:19, 21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말씀하시고, 반대로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빛과 어둠이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고 행하는 인간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이 잘 드러납니다.

 

특히 요3장의 말씀에는 ‘행위’가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어둠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이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오는데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입니다. 그러므로 AC.38이 선을 ‘낮의 일’, 악을 ‘밤의 일’이라고 표현한 것은 선과 악이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개념이 아님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이는지는 결국 삶과 행위에도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행위만 보면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모두 알 수 있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8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주려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왜 선과 악을 낮과 밤으로, 진리와 거짓을 빛과 어둠으로 표현하는지를 밝히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 대응은 먼저 다른 사람을 분류하는 도구가 아니라 말씀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빛=진리’라는 대응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단지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를 받아들여 사는 것은 구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진리가 삶에서 행해질 때에야 비로소 빛이 된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에서 빛은 진리 자체를 뜻합니다. 다만 요3장의 인용이 보여 주듯 사람은 그 빛을 사랑하여 그쪽으로 나올 수도 있고, 자기의 악한 행위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빛이 빛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사람이 그 빛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18의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라는 표현도 단순히 자연계의 밝음과 어둠을 나누는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서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분별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어느 쪽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AC.38은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 가지 대응만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 그러나 이 짧은 대응을 붙들고 창세기 1장을 다시 읽으면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셨다’는 말씀이 인간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분명히 구별되어 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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