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영어만 읽으면 ‘move’는 ‘움직이다’, ‘brood’는 새가 알을 ‘품다’라는 서로 다른 말인데 왜 두 단어가 나란히 나오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 경우에는 Potts의 영어만 가지고 의미를 추측하기보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표현과 창1:2의 성경적 배경을 함께 보는 것이 좋습니다.

 

창1:2의 히브리어에서 ‘운행하시니라’에 해당하는 동사는 רחף 계열의 말이며, 신32:11에서도 독수리가 자기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동사는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는 뜻만으로 읽기보다, 무엇인가의 위에서 움직이거나 너풀거리는 이미지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히브리어 단어 자체가 곧 암탉이 알을 품는다는 뜻이다’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9에서 결정적인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표현을 어떻게 해설하는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주님의 자비라고 밝히면서 그 자비의 운행을 새가 알을 품는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Potts의 ‘brood’는 바로 이 설명을 전달하기 위한 말입니다. 따라서 ‘move’와 ‘brood’는 서로 경쟁하는 두 번역이라기보다, 성경 본문의 ‘운행’이라는 표현과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풀어 주는 ‘품음’의 이미지를 함께 보여 준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라는 비유는 AC.19의 전체 문맥과 잘 맞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감추어 보존하시며, 이것들을 리메인스라고 합니다. 아직 그것들이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았는데도 주님의 자비는 그 위에서 운행합니다. 그러므로 ‘품는다’는 그림은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을 보호하고 보존하며 장차 생명이 나타날 때를 준비하는 모습을 매우 자연스럽게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암탉, 알, 따뜻함 같은 요소 하나하나에 별도의 상응을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AC.19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사용하는 비유의 목적은 주님의 자비가 수동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 위에서 이미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아직 거듭남을 의식하지 못하고 ‘빛이 있으라’는 상태에 이르지 않았어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거듭남을 위한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번역에서도 ‘move’와 ‘brood’를 하나의 한국어로 억지로 합칠 필요는 없습니다. 창1:2의 성경 표현을 따라 ‘운행하다’를 살리고,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는 ‘품다’를 함께 제시하면 됩니다. 현재처럼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 ‘품는다’(brood)라고 옮기면 두 층위가 모두 드러납니다.

 

결국 ‘move’와 ‘brood’가 나란히 있는 이유를 ‘히브리어 한 단어에 두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너무 단순하게 정리하기보다, ‘창1:2의 운행이라는 성경 표현을 스베덴보리가 품음의 이미지로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이 두 단어는 어색한 중복이 아니라 AC.19의 핵심, 곧 아직 빛이 나타나기 전부터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을 품고 계시는 주님의 자비를 보여 주는 매우 아름다운 표현이 됩니다. (AC.19 심화 2)

 

 

 

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bygrace.kr

 

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에,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반복해서 ‘자비’라는 말을 만나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한국어의 ‘자비’가 일상적으로 불교와도 자주 연결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차라리 ‘은혜’라고 번역하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두 말을 임의로 하나로 합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사용한 말을 구별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에서 영어 ‘mercy’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말은 ‘misericordia’입니다. 이것은 긍휼, 자비, 불쌍히 여김과 관련된 말입니다. 따라서 Potts가 이를 ‘mercy’로 옮겼을 때 한국어로 ‘자비’라고 번역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자비’가 반드시 불교적 용어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mercy’를 ‘자비’라고 하는 것은 다른 종교의 개념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는 기독교적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반면 ‘grace’는 일반적으로 ‘은혜’라고 번역합니다. 두 말은 서로 매우 가까우며 실제 신앙 언어에서는 겹치는 영역도 많기 때문에 ‘자비는 이것, 은혜는 저것’이라고 완전히 분리된 두 개념처럼 정의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뉘앙스에서 ‘mercy’는 비참하고 연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grace’는 값없이 베풀어지는 호의와 은혜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를 돕는 구별이지 두 단어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교리적 경계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19에서는 특히 왜 ‘자비’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지가 본문의 흐름에서 드러납니다. 사람은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고, ‘깊음’으로 표현되는 욕정과 거짓에 잠겨 있습니다. 아직 빛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사람이 먼저 선해져서 주님의 관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직 그런 어두운 상태에 있을 때부터 주님께서 그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감추어 보존하시고 그 위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런 문맥에서는 ‘자비’라는 말이 AC.19의 장면을 매우 잘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작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도 같은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보고 이해하며 인간의 구원과 거듭남에 관한 것을 알게 되는 근원을 자기 지성이나 공로에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는 표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mercy’를 사용하는 모든 곳을 하나의 간단한 공식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각의 문맥에서 그 말이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더 깊이 보면 주님의 자비는 주님의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속성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타락하고 연약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 사랑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향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와 긍휼의 언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비’를 단순히 불쌍해서 봐주는 감정 정도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AC.19에서 주님의 자비는 실제로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보존하고, 그것들 위에서 운행하며, 장차 거듭남에 사용하시는 적극적인 신적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어 번역에서는 ‘mercy’를 ‘은혜’로 바꾸어 익숙하게 만들기보다 ‘자비’로 구별하여 두는 편이 좋습니다. 독자에게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도 AC를 계속 읽으면서 ‘주님의 자비’가 어떤 문맥에서 반복되는지를 경험하면 그 말의 깊이가 점차 드러납니다. ‘grace’가 나오면 ‘은혜’, ‘mercy’가 나오면 ‘자비’라는 기본적인 구별을 유지하되, 둘을 서로 경쟁하는 신학 개념으로 만들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19에서 이 차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그림은 결국 ‘품으심’입니다. 아직 빛이 나타나기도 전에 주님의 자비는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며, 사람 안에 감추어 보존하신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새 생명을 만들어 내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그를 떠나지 않고 거듭남을 준비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자비’는 단순한 번역어 하나가 아니라 거듭남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AC.19 심화 1)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bygrace.kr

 

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 ‘품는다’(brood)고 합니다. 그것이 운행하는 대상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인데, 말씀 전체에서 이것들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 자’(remnant)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은 바로 이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19는 창1:2의 마지막 말씀,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의 속뜻을 밝힙니다. 앞선 AC.17-18이 거듭남 이전의 인간을 ‘혼돈과 공허’, ‘흑암’, ‘깊음’으로 묘사했다면, 여기서는 그처럼 어두운 상태의 인간에게 이미 주님의 자비가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출발점은 사람이 먼저 자신을 고치거나 주님께 올라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버리지 않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에 있습니다.

 

‘운행하다’(move), 또는 ‘품다’(brood)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암탉이 자기 알을 품는 모습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세부적인 상응을 임의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사람 안에 보존해 두신 것들 위에서 계속 역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현재 상태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아무것도 없는 존재처럼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아직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 그 안에 감추어 두시고 보존하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1:2의 마지막 장면은 단순히 흑암 가운데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다는 모습이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생명을 자비로 품고 계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그것이 바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 자’(remnant)입니다. AC.19는 여기서 그것을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는 우선 그 직접적인 설명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동시에 리메인스를 단순히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좋은 추억이나 종교 지식 전체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사람이 자기 힘으로 모아 둔 영적 자산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후 AC에서는 리메인스가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 순진함과 체어리티에 속한 상태들까지 포함하는 훨씬 깊은 개념으로 펼쳐지지만, AC.19에서는 그 전체 교리를 미리 끌어오기보다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람 안에 무엇인가를 이미 보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은 무엇일까요? AC.19는 여기의 ‘수면’이 바로 이러한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창1:2의 문자에서는 흑암 아래의 물과 그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 안에 주님께서 감추어 보존하신 것들과 그 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알고 다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를 읽으면, 이 말씀은 창조 이전의 한 장면을 넘어 주님께서 사람의 거듭남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AC.19에는 리메인스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중요한 말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18의 ‘황폐’와 연결됩니다. 아직 사람의 겉에 속한 것들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들이 거듭남의 새로운 생명으로 전면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고도 그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선한 것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공로나 명예로 돌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19가 직접 제시한 사례는 아니지만, 왜 사람에게 속한 것이 물러나는 과정과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이 빛 가운데 나오는 과정이 서로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리메인스 자체가 불안정하거나 쉽게 오염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낼 사람의 외적 상태가 아직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러나 ‘황폐해질 때까지 리메인스가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주님께서 그 이전에는 사람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창1:2의 그림은 정반대입니다. 아직 ‘빛’도 ‘낮’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영은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직 자기 안에서 분명한 영적 빛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주님의 자비는 이미 그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 위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AC.18의 황폐를 단순히 버림받음이나 파괴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쪽에서는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는 것들이 물러나는 과정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주님의 자비가 이미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들 위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9는 리메인스 교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현재 모습만 보고 ‘저 사람 안에는 아무런 선도 남아 있지 않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다고 해서 그 모든 세월 동안 주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리메인스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의 거듭남을 자동적으로 보장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 사람이 훗날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자비로 준비하고 보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AC.19의 중심은 리메인스라는 개념 자체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자비’입니다. 리메인스가 존재하는 것도 주님께서 감추어 보존하셨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훗날 거듭남에 사용되는 것도 주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1:2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어두우면서도 동시에 희망적입니다. 아직 빛은 나타나지 않았고 사람은 여전히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흑암 속에서도 주님의 자비는 이미 사람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 보존하신 것들 위에서 운행하며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말씀에서 마침내 ‘빛이 있으라’는 새로운 상태가 시작됩니다. (AC.19 해설)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

bygrace.kr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bygrace.kr

 

 

 

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bygrace.kr

 

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