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 [3]의 ‘그러나그것들은태양의빛이그것을받는대상안에서보이듯이,의지와이해안에서그렇게나타날뿐입니다’라는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중요한 원리를 아주 압축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그것들’은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이며, 특히 중요한 표현은 ‘initsrecipientobjects’, 곧 ‘빛을받아들이는대상안에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태양빛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태양빛이 물이나 나뭇잎, 창문이나 돌에 비치면 빛은 각각의 대상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빛 자체의 근원은 아닙니다. 빛의 근원은 태양이고, 대상은 그 빛을 받아 그것이 나타나게 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의지와 이해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비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사람 안에서 사랑은 의지에,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사랑한다’, ‘내가진리를이해한다’, ‘내가이것을믿는다’고 느낍니다. 실제로 그것들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일어나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이고 행합니다. 그러나 AC.30이 강조하는 것은 그 생명의 최초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주님의자비’라고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양의빛이그것을받는대상안에서보인다’는 말은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용체는 실제로 받아들이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에서 참된 사랑과 참된 신앙의 생명 자체를 자기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핀 AC.29의 ‘생명없는’상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처음에는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선택하면서도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 자신의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근원을 올바르게 구별하게 합니다.
실제 삶에서도 이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기로 결정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는 실제로 상황을 판단하고, 도울 것을 선택하며, 자신의 손과 시간과 재물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나는아무것도하지않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참된 선, 곧 이웃을 위하는 사랑의 생명까지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냈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양빛이 물체 안에 실제로 나타나면서도 그 빛의 근원이 그 물체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AC.30 [3]의 이 비유는 ‘사람에게나타나는것은가짜이고주님만모든것을하신다’는 식의 인간 부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의지와 이해는 사랑과 신앙을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수용체이며,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그 수용체 안에 사랑을 일으키시고 진리로 비추십니다. 이것이 ‘태양의빛이그것을받는대상안에서보이듯이’라는 비유의 핵심입니다. (AC.30심화1)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창1:14-17)
AC.30
‘큰광명체들’(greatluminaries)이무엇을뜻하는지는,먼저신앙의본질이무엇인지,그리고새로창조되고있는사람들안에서신앙이어떻게자라가는지를알지않으면분명히이해할수없습니다.신앙의본질과생명은오직주님이시며,주님을믿지않는사람은생명을가질수없습니다.이는주님께서친히요한복음에서밝히신바입니다. What is meant by “great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2] 새로창조되고있는사람들안에서신앙이자라가는과정은다음과같습니다.처음에는그들에게생명이없습니다.생명은선과진리안에만있고,악과거짓안에는없기때문입니다.그다음에그들은신앙을통해주님에게서생명을받는데,먼저는기억에속한신앙,곧단지지식에불과한신앙인기억지식의신앙을받습니다.다음에는이해에속한신앙,곧이성적신앙을받고,마지막으로는마음에속한신앙,곧사랑의신앙이며구원의신앙을받습니다.앞의두종류의신앙은3절로13절까지생명없는것들로표현되며,사랑에의해생명을얻는신앙은20절로25절까지생명있는것들로표현됩니다.이때문에여기서는이제처음으로사랑과거기서나온신앙을다루는데,이것들이바로‘광명체들’(luminaries)입니다.사랑은‘낮을다스리는큰광명체’(thegreaterluminarywhichrulesbyday)이고,사랑에서나온신앙이‘밤을다스리는작은광명체’(thelesserluminarywhichrulesbynight)입니다.이두광명체는하나가되어야하므로,‘광명체들이있어’(Lettherebeluminaries, [sitluminaria])라는라틴어단수표현을쓰고있습니다.라틴어복수표현인[sintluminaria]가아니고말입니다.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At first they have no life,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first by faith of the memory,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lastly by faith in the heart,which is the faith of love,or saving faith.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by things inanimate,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by animate things.For this reason love,and faith thence derived,are now here first treated of,and are called “luminaries”;love being “thegreaterluminarywhichrulesbyday”;faith derived from love “thelesserluminarywhichrulesbynight”;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it is said of them,in the singular number,“Lettherebeluminaries” [sit luminaria],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 속사람안에서의사랑과신앙은겉사람의육체적차원에서의열과빛과같으므로,전자는후자로표현됩니다.이런이유로광명체들을‘하늘의궁창에두어’(setintheexpanseofheaven)라고하는데,이는속사람안에놓였다는뜻입니다.큰광명체는의지안에,작은광명체는이해안에말입니다.그러나그것들은태양의빛이그것을받는대상안에서보이듯이,의지와이해안에서그렇게나타날뿐입니다.의지를사랑으로움직이게하고,이해를진리또는신앙으로비추는것은오직주님의자비뿐입니다.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intheexpanseofheaven,” or in the internal man;a great luminary in its will,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해설
AC.30은 창세기 1장의 넷째 날, 곧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가 나타나는 장면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먼저 ‘신앙의본질이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넷째 날의 광명체들을 단순히 해와 달의 상징으로 바로 풀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무엇이며, 특히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생명을 얻어 가는지를 먼저 알아야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출발점에서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신앙의본질과생명은오직주님이시다’라고 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종교적 확신이나 교리 지식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바로 이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요3:36, ‘아들을믿는자에게는영생이있고’를 인용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30에 인용된 직접적인 이유는 먼저 ‘달로상징되는신앙에는순종이포함된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신앙의 생명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에 있으며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개역개정의 후반부가 ‘아들에게순종하지아니하는자’라고 번역되어 있어 신앙과 삶의 순종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도 생각하게 하지만, AC.30은 여기서 그 어휘를 별도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직접적인 초점은 신앙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새로 창조되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세 상태를 구별합니다. 처음은 ‘기억에속한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fidesscientifica’입니다. 사람은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기억하지만 아직 그것이 신앙의 살아 있는 생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음은 ‘이해에속한신앙’, 곧 이성적 신앙입니다. 이제 사람은 단지 기억할 뿐 아니라 자신이 배우는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은 ‘마음에속한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입니다. 이 마지막 신앙은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입니다.
이 세 단계는 앞에서 지나온 창조의 날들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이 창1:3-13의 ‘생명없는것들’로 표상되고,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은 창1:20-25의 ‘생명있는것들’로 표상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생명없는’이라는 말은 기억 지식이나 이해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필요한 준비입니다. 그러나 아직 신앙의 생명이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움직이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AC.29에서 열매까지 나타났는데도 아직 ‘생명없는것들’로 표현되었던 이유도 이 문맥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제 AC.30에서 처음으로 사랑과 ‘사랑에서나온신앙’이 함께 등장하고, 이것들이 ‘광명체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광명체’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밤을 다스리는 ‘작은광명체’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사랑과신앙’이라고 병렬시키지 않고 ‘사랑과거기서나온신앙’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신앙은 사랑과 독립하여 스스로 생명을 가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와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 두 광명체가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는 라틴어 표현에서도 읽어 냅니다. 그는 ‘sitluminaria’라는 단수 표현과 ‘sintluminaria’라는 복수 표현을 의도적으로 대조하면서, 사랑과 신앙이 둘로 분리된 영적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 안에서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중요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와 그것과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자연계의 열과 빛에 비유합니다. 속 사람 안의 사랑은 열과 같고, 신앙은 빛과 같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둘의 근원과 수용에 있습니다. 광명체가 ‘하늘의궁창에’놓인다는 것은 속 사람 안에 놓인다는 뜻이며,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놓입니다. 즉 사랑은 의지와 연결되고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아르카나가 나옵니다. 사랑과 신앙이 의지와 이해 안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들의 근원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태양의빛이그것을받는대상안에서보이듯이’그것들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날 뿐이라고 말합니다. 햇빛이 물체에 비쳐 그 안에서 보이더라도 빛의 근원이 그 물체가 아닌 것처럼, 인간 안에 나타나는 참된 사랑과 신앙의 생명도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 그릇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자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는 자신이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이 ‘오직주님의자비’라는 AC.30마지막 문장은 바로 이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넷째 날의 전환점은 단순히 ‘신앙을더많이아는것’이 아닙니다. 기억 속에 있던 신앙이 이해로 나아가고, 마침내 사랑과 결합하여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조차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그 근원이 주님임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앞의 날들에서 준비되었던 모든 것이 이제 사랑이라는 큰 광명체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라는 작은 광명체의 빛 아래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30이 넷째 날의 광명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신앙의 본질과 성장 과정을 밝히는 이유입니다. (AC.30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