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6:1-8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Verse 6, And it repented Jehovah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at his heart.

 

※ 6절 속뜻

 

 

586a. ‘한탄하사’는 자비(mercy)를 상징하며, ‘마음에 근심하시고’ 역시 같은 걸 상징합니다. ‘한탄하사’(후회, repent)는 지혜와 관련이 있고, ‘마음에 근심하시고’는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That he “repented” signifies mercy; that he “grieved at the heart,” has a like signification; to “repent” has reference to wisdom; to “grieve at the heart” to love.

 

 

587.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가 자비를 상징하며, ‘마음에 근심하시고’ 역시 같은 상징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 곧 결론지을 수 있는데요, 여호와는 결코 후회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만물을 온전히 영원부터 예견(豫見, foresee)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을 지으셨을 때, 즉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온전하게 하사 천적 인간이 되게 하셨을 때에도 그는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지금 여기서 설명 중인 이런 인종이 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예견하셨고, 그래서 후회하실 수 없으십니다. That it repented Jehovah that he made man on the earth signifies mercy, and that “he grieved at the heart” has a like signification, is evident from this, that Jehovah never repents, because he foresees all things from eternity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nd when he made man, that is, created him anew, and perfected him till he became celestial, he also foresaw that in process of time he would become such as is here described, and because he foresaw this he could not repent.

 

사무엘이 한 말을 보면, 이런 사실이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This appears plainly from what Samuel said: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삼상15:29) The invincible one of Israel doth not lie, nor repent, for he is not a man that he should repent. (1 Sam. 15:29)

 

모세의 글에는 And in Moses: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민23:19) God is not a man that he should lie, or the son of man that he should repent; hath he said, and shall he not do? Or hath he spoken, and shall he not make it good? (Num. 23:19)

 

오히려 ‘후회하다’라는 것은 자비로워짐, 불쌍히 여김을 상징합니다. But to “repent” signifies to be merciful.

 

여호와의 자비(mercy), 곧 주님의 자비는 인류를 향하여 주님이 행하신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인류는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상태에 있으며, 주님은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을 저마다의 상태에 따라 불쌍히 여기십니다. 주님은 벌을 받게 되어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선의 즐거움을 누리게(grant) 된 사람 또한 불쌍히 여기십니다. 벌(punishment)은 자비의 한 가지 행위인데, 그 이유는 자비는 벌에 포함된 모든 악을 선으로 구부리기 때문입니다. 선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 또한 자비의 한 가지 행위인데, 아무도 어떤 종류의 선도 결코 자기 공로로 얻을(earn)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 전체가 악하며, 모든 사람은 그냥 방치되면 지옥을 향해 거꾸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옥 밖으로 사람을 끌어당기시는 것이 자비이며, 이것이 순수한 자비인 것은, 주님은 이 일에 어떤 사람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The mercy of Jehovah, or of the Lord, includes everything that is done by the Lord toward mankind, who are in such a state that the Lord pities them, each one according to his state; thus he pities the state of him whom he permits to be punished, and pities him also to whom he grants the enjoyment of good; it is of mercy to be punished, because mercy turns all the evil of punishment into good; and it is of mercy to grant the enjoyment of good, because no one merits anything that is good; for all mankind are evil, and of himself everyone would rush into hell, wherefore it is of mercy that he is delivered thence; nor is it anything but mercy, inasmuch as he has need of no man.

 

자비를 미세리코르디아(misericordia, 라틴, 자비)라 합니다. 인간을 지옥의 비참(miseries)1에서 건져주시기 때문이며, 인류가 처한 비참한 상태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자비는 비참 가운데 있는 전 인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Mercy has its name from the fact that it delivers man from miseries1 and from hell; thus it is called mercy in respect to mankind, because they are in such a state of misery, and it is the effect of love toward them all, because all are so.

 

 

588. 주님에 대하여, ‘후회하신다’, ‘마음에 근심하신다’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자비 한가운데 이런 것들이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주님의 ‘후회’, ‘근심’이라는 표현은, 말씀 여러 다른 구절처럼 그래 보이는 겉모습을 따른 것입니다. But it is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 “repents,” and “is grieved at heart,” because there appears to be such a feeling in all human mercy, so that what is said here of the Lord’s “repenting” and “grieving” is spoken according to the appearance, as in many other passages in the Word.

 

주님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 곧 주님의 자비의 본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인간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것은 인간의 이해를 무한히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자비, 곧 후회하고 근심하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 자비에 대한 개념을 잡지 않으면, 그는 결코 자비에 대한 어떤 개념도 가질 수 없으며, 그래서 어떤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곧 주님의 속성을 서술할 때, 왜 종종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하는지 하는 이유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또는 주님이 벌하신다, 시험하신다, 파괴하신다, 화내신다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은 결코 누구를 벌하시지도, 결코 누구를 시험에 빠트리시지도, 결코 누구를 파멸에 이르게 하시지도, 그리고 결코 화를 내시지도 않으시는데 말입니다. What the mercy of the Lord is none can know, because it infinitely transcends the understanding of man; but what the mercy of man is we all know to be to repent and grieve; and unless a man were to form his idea of mercy according to his own apprehension, he could not have any conception of it, and thus he could not be instructed; and this is the reason why human properties are often predicated of the attributes of Jehovah or the Lord, as that Jehovah or the Lord punishes, leads into temptation, destroys, and is angry; when yet he never punishes anyone, never leads any into temptation, never destroys any, and is never angry.

 

※ 각주

 

1. 자비에 대한 라틴어, 미세리코르디아는 딱 봐도 그 생김새가 불쌍한 사람들한테서 느끼는 마음의 어떠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The Latin word for mercy—misericordia—by its very construction expresses the idea of a heart that feels for the wretched.

 

실제로 주님에 대하여 이런 주장들을 하기 때문에, 후회와 근심 또한 주님의 속성, 성품이라고 하는 일이 이어집니다. 어떤 한 가지 주장은 또 다른 주장을 낳기 때문인데요. 이런 건, 말씀에 나오는 다음 본문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But as even such things as these are predicated of the Lord, it follows that repentance also and grief may be predicated of him; for the predication of the one follows from that of the other, as plainly appears from the following passages in the Word.

 

[2]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겔5:13) Mine anger shall be consummated, I will make my wrath to rest, and it shall repent me. (Ezek. 5:13)

 

여기, ‘노’(anger)와 ‘분’(wrath)을 여호와께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가라앉음’(repentance) 또한 사용되고 있습니다. Here, because “anger” and “wrath” are predicated, “repentance” is predicated also.

 

스가랴입니다. In Zechariah:

 

14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나를 격노하게 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으나 15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슥8:14-15) As I thought to do evil when your fathers provoked me to anger, saith Jehovah Zebaoth, and it repented me not, so again I will think in those days to do good unto Jerusalem and to the house of Judah. (Zech. 8:14–15)

 

여기 보면, 여호와가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주님은 결코 악을 행하실 생각조차 하실 수 없으시며, 오직 각 사람과 모두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신데도 말입니다. Here it is said that Jehovah “thought to do evil,” and yet he never thinks to do evil to any, but good to all and to everyone.

 

모세의 글, 모세가 여호와께 나아가 관용을 구할 때에 In Moses, when he prayed forbearance of the face of Jehovah:

 

12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4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출32:12, 14) Turn from the wrath of thine anger and repent thee of this evil against thy people; and Jehovah repented of the evil which he said he would do unto his people. (Exod. 32:12, 14)

 

여기서도 ‘맹렬한 노’(wrath of anger)라는 표현을 여호와께 사용하고 있고, 그 결과, ‘뜻을 돌이키사’(repentance)라는 표현 역시 뒤따르고 있습니다. Here also the “wrath of anger” is attributed to Jehovah, and consequently “repentance.”

 

요나서에서, 니느웨 왕의 말입니다. In Jonah, the king of Nineveh said: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욘3:9) Who knoweth whether God will not turn and repent, and turn from the heat of his anger, that we perish not? (Jonah 3:9)

 

여기서도 비슷하게 ‘노’(anger)라는 표현 때문에 ‘뜻을 돌이키시고’(repentance)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Here similarly “repentance” is predicated because “anger” is.

 

[3] 호세아입니다. In Hosea:

 

8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호11:8-9) My heart is turned within me; my repentings are kindled together; I will not execute the wrath of mine anger; (Hos. 11:8–9)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본문, ‘마음에 근심하시고’와 똑같은 말씀,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가 나오네요. where likewise it is said of the heart that “repentings were kindled,” just as in the passage we are considering it is said that he “grieved at heart.”

 

‘긍휼’(repentings)은 누가 봐도 큰 자비를 가리킵니다. “Repentings” plainly denote great mercy.

 

그래서 요엘서에는 So in Joel: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욜2:13) Turn unto Jehovah your God; for he is gracious and compassionate, slow to anger and plenteous in mercy, and repenteth of the evil; (Joel 2:13)

 

여기 ‘뜻을 돌이켜’(repent) 역시 두말할 것도 없이 자비를 가리킵니다. where also to “repent” manifestly denotes mercy.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렘26:3) If so be they will hearken, and turn every man from his evil way, and it repent me of the evil, (Jer. 26:3)

 

이 역시 자비, 불쌍히 여기심을 상징합니다. signifying to have mercy.

 

계속해서 Again: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렘18:8) If that nation turn from their evil, it shall repent me of the evil; (Jer. 18:8)

 

이 또한 ‘뜻을 돌이키겠고’(repent)는 그들이 만일 돌아오면 불쌍히 여기시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where also to “repent” denotes to have mercy provided they would turn.

 

자기한테서 주님의 자비가 떠나버리게 한 장본인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결코 먼저 사람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For it is man who turns the Lord’s mercy away from himself: the Lord never turns it away from man.

 

 

589. 이들과 다른 많은 구절들을 보고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말씀(the Word)은 인간의 수준(appearances)으로 기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게 맞춰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From these and many other passages it is evident that the Word was spoken according to the appearances with man.

 

그래서 말씀이 기술된 이런 수준을 가지고 거짓된 원리들(false principles)을 컨펌(confirm, 증거를 들어 사실임을 보여주다, 확인하여주다)하고픈, 잘못된 전제들(false premises)을 뒷받침(support)하고픈 사람은 수없이 많은 말씀 구절들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Whoever therefore desires to confirm false principles by the appearances according to which the Word was spoken, can do so by passages without number.

 

그러나 잘못된 가정들(false assumptions)을 증명하기 위해 말씀을 사용하는 것은 말씀을 액면가(face value)로 사용하는 것, 말씀을 겉글자의 뜻 그대로 사용하는 것하고는 아주 다릅니다. 또다른 사람은 말씀에 있는 것을 단순히 믿는 사람입니다. But it is one thing to confirm false principles by the Word, and another to believe in simplicity what is in the Word.

 

잘못된 가정들을 컨펌하는 사람은 먼저 그가 절대 포기하거나 부분적으로라도 물러설 마음이 없는 어떤 원리를 골라 시작합니다. 대신 그는 말씀을 포함, 모든 가용(可用, available) 소스들로부터 증거들을 긁어모아 차곡차곡 쌓습니다. 더 이상 진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그 원리, 전제, 가정에 철저하게 스스로 사로잡힙 때까지 말이지요. 한 마디로, 이런 사람은 진리 앞에 장님이 될 때까지 이런 짓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He who confirms false principles, first assumes a principle which he will not at all recede from, nor in the least yield, but scrapes together and accumulates confirmations wherever he can, thus also from the Word, until he so strongly persuades himself that he can no longer see the truth.

 

똑같이 말씀을 겉글자의 뜻으로 받지만, 그러나 단순한 마음(simple heart)으로 그걸 믿는 사람은 저 사람처럼 무슨 원리를 붙잡으면서 시작하는 게 아니고, 즉, 자기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말씀을 이용해 먹으려는 동기가 아닌, ‘이건 주님이 하신 말씀이야. 그러니까 진리야.’라는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만일 그 말씀의 속뜻을 말씀의 다른 구절들을 가지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그는 잠자코 따르며, 마음으로 즐거워 합니다. But he who simply or with simple heart believes, does not first assume principles, but thinks that because the Lord has thus said it is true; and if instructed from other sayings of the Word how it is to be understood, he acquiesces and rejoices in his heart.

 

주님은 화를 내시며, 벌하시고, 후회하시거나 근심하시는 분이시며, 그래서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믿되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하게 믿는 것은 전혀 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은 크고 작은 모든 걸 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이런 믿음을 갖게 되면, 그는 다른 모든 영역에서 눈이 밝아지며, 현세가 아니면 내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Even the man who in simplicity believes that the Lord is angry, punishes, repents, and grieves, and so believing is afraid of evil and does good, takes no harm; for this belief causes him to believe also that the Lord sees everything; and being in such a belief he is afterwards enlightened in other matters of faith, if not before, then in the other life.

 

자기들이 사랑한 가정들(assumptions)과, 아주 역겨운 자기 사랑 및 탐욕으로 스스로를 속인 사람들의 경우는 아주 다릅니다. Very different is the case with those who in agreement with a foul love of self or of the world persuade themselves to believe certain things that are deduced from the principles they have already adopted.

 

 

590. ‘후회’(repenting)는 지혜와, ‘마음에 근심함’(grieving at heart)은 사랑과 각각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apprehension)로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인간의 경험 수준, 겉모습 수준에서만 가능합니다. That “repenting” has reference to wisdom, and “grieving at heart,” to love, cannot be explained to human apprehension, save in accordance with the things that are with man, that is, by means of appearances.

 

인간의 사고(thought) 속에 들어있는 모든 생각(idea)은 지적 능력(understanding, intellect) 및 의지, 다르게는, 사고와 그 사고에 대한 사랑과 관계된 무엇입니다. In every idea of thought in man there is something from the understanding and from the will, or from his thought and his love.

 

어떤 생각이든지 어느 정도 그의 의지나 그 의지에서 나온 사랑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면 그건 생각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전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Whatever idea does not derive anything from his will or love is not an idea, for otherwise than from his will he cannot think at all.

 

사고와 의지 사이엔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는 일종의 결혼 같은 게 있는데, 사람의 사고 속 생각들에도 타고나거나 후천적으로 생겨나는, 의지 혹은 사랑에 속한 일들이 있습니다. There is a kind of marriage, perpetual and indissoluble, between the thought and the will, so that in the ideas of man’s thought there inhere or adhere the things that are of his will or his love.

 

인간에게 속한 이런 일들을 잘 관찰하면, 주님의 자비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즉, 지혜와 사랑인데요, 어느 정도 살짝 아는 것, 얼핏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지 싶습니다. From this state of things in man it may as it were be known, or rather it seems possible to form some idea of what is contained in the Lord’s mercy, namely, wisdom and love.

 

그래서 선지자들, 특히 이사야 같은 경우, 어디서나 거의 항상 두 가지 표현을 써서 모든 것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천적인 것을 각각 포함하지요. Thus in the prophets, especially in Isaiah, there are almost everywhere double expressions concerning everything; one involving what is spiritual, the other what is celestial.

 

주님의 자비, 영적 측면이 지혜요, 천적 측면이 사랑입니다. The spiritual of the Lord’s mercy is wisdom; the celestial is love.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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