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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1:00:12 AC.416, 창4:20, '야발'과 '아벨'
  2. 09:41:04 AC.415, 창4:20,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1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4:20)

 

AC.416

 

본절,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가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 인한 선(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을 상응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dwelt in tents and in folds of cattle)의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벨의 경우 때문인데요, 그는 아담과 이브의 둘째 아들로, ‘양 치는 자’(a shepherd of the flock)였기 때문입니다. 야발은 가인으로부터 세어 일곱 번째 후손이었습니다. That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abal was not the first of those who “dwelt in tents and in folds of cattle,” for it is said likewise of Abel, the second son of Adam and Eve, that he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Jabal was the seventh in the order of descent from Cain.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16에서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 하나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바로, ‘야발(Jabal)이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로 불린 것이, 역사적, 연대기적 최초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이미 창4:2에서 아벨을 ‘양 치는 자’, 곧 목자로 소개합니다. 만일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직업의 기원이나 생활 방식의 최초 기록으로 이해한다면, 야발은 결코 ‘조상, 곧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야발은 가인의 계보에서 일곱째에 해당하는 인물로, 시간적으로도 훨씬 뒤에 등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이 표현들이 역사적 사실을 배열한 연대기가 아니라, 영적 상태와 교회의 변화를 표상적으로 배열한 구조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야발이 ‘아버지’로 불린 이유는, 그가 처음으로 장막 생활이나 목축을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새 교회가 회복되는 국면에서 ‘천적인 것과 그로부터 나온 선’이 다시 정식으로 자리 잡았음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조상’, 곧 ‘아버지’라는 표현은 시간적 기원이 아니라 질서적, 본질적 기원을 가리킵니다.

 

아벨과 야발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벨은 태고교회 초기에 있었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사랑의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를 표상합니다. 그에게서 ‘목자’라는 표상이 사용된 것은, 그 시대에 사랑과 선이 본성적으로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는 가인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후 교회는 황폐의 길을 걸었습니다. 야발은 그 황폐 이후,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 국면에서의 사랑과 선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같은 상징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영적 국면을 대표합니다.

 

이 점에서 ‘야발이 가인의 계보에서 일곱째’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숫자 ‘일곱’은 언제나 완결, 거룩, 한 주기의 끝과 새 시작의 문턱을 의미합니다. 야발이 일곱째에 등장한다는 것은, 가인의 계보로 대표되는 신앙 중심, 사랑 상실의 흐름이 완전히 소진된 이후, 그 잔해 위에서 사랑과 선의 회복이 다시 나타났음을 뜻합니다. 마치 여러 날 산불로 산 전체가 완전히 타버려 다시는 초록 식물을 볼 수 없을 것 같아도 그러나 놀랍게도 이듬해 봄처럼 잠시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새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지요. 그러므로 야발은 타락의 연속선상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황폐 이후에 허락된 회복의 표상입니다.

 

따라서 AC.416은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를 읽을 때 반드시 경계해야 할 한 가지를 분명히 합니다. 즉, ‘누가 먼저였는가’, ‘무엇이 처음 시작되었는가’라는 자연적, 연대기적 질문으로 본문에 접근하면, 본문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인류 문명의 연표를 주려는 책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 내면의 상태가 어떻게 생성, 타락, 황폐, 보존, 회복되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입니다.

 

결국 AC.416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야발이 ‘장막과 가축의 아버지’로 불린 것은, 아벨보다 늦게 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온 선이, 새 교회의 질서 안에서 다시 아버지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주님께서 교회를 다루시는 방식이 언제나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415, 창4:20,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father of cattle)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로 말미암는 선(the good that is derived 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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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4:20)

 

AC.415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father of cattle)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로 말미암는 선(the good that is derived from the holy things of love)과 상응하는데요, 이는 위 본 장 2절에서 보여드린 걸 보면 분명합니다. 거기 보면,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는 체어리티의 선(the good of charity)과 상응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양 치는 자’(shepherd) 대신 ‘조상’(father)이, ‘양’(flock) 대신 ‘가축’(cattle)이 사용되었는데요, ‘가축’이라는 말이, 야발을 가리켜 이것의 ‘조상’(father)이라 하고 있는데요, ‘장막’(tent) 바로 뒤를 잇는 걸 볼 때 분명한 건, 이는 사랑의 거룩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선(the good that comes from the holy of love)에 상응한다는 것, 그리고 이는 어떤 거주지나 가축우리, 그러니까 장막과 가축우리에 거주하는 자들의 조상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들 표현이 사랑의 천적인 것들로 말미암는 선(goods from the celestial things of love)에 상응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이 말씀에 나오는 여러 구절을 보면 분명합니다. 가령 예레미야에 보면, That by the “father of cattle” is signified the good that is derived from the holy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what was shown above, at verse 2 of this chapter, where it was shown that a “shepherd of the flock” signifies the good of charity. Here however the term “father” is employed instead of “shepherd,” and “cattle” instead of “flock”; and the word “cattle,” of which Jabal is said to be the “father,” follows immediately after “tent,” whence it is evident that it signifies the good that comes from the holy of love, and that there is meant a habitation or fold for cattle, or the father of them that dwell in tents and in folds for cattle. And that these expressions signify goods from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vari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Jeremiah: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23:3) I will gather the remnants of my flock out of all lands whither I have scattered them, and I will bring them again to their folds, that they may be fruitful and multiply. (Jer. 23:3)

 

에스겔에는 In Ezekiel: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34:14) I will feed them in a good pasture, and upon the mountains of the height of Israel shall their fold be; there shall they lie down in a good fold, and in a fat pasture shall they feed upon the mountains of Israel, (Ezek. 34:14)

 

여기 ‘우리’(folds)와 ‘꼴’(草場, pastures)은 사랑의 선(the goods of love)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걸 ‘살진 것’(fatness)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는 where “folds” and “pastures” denote the goods of love, of which “fatness” is predicated.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30:23) He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halt sow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shall be fat and full of oil;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Isa. 30:23)

 

여기 ‘먹을 것’(bread)은 천적인 것(what is celestial)과, 거기서 가축이 먹어 ‘살지는 것’(fat)은 그때 나오는 선(the goods thence derived)과 각각 상응합니다. 예레미야에는 where by “bread” is signified what is celestial, and by the “fat” whereon the cattle should feed, the goods thence derived. In Jeremiah:

 

11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12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렘31:11, 12) Jehovah hath redeemed Jacob, and they shall come and sing in the height of Zion, and shall flow together to the good of Jehovah, for the wheat, and for the new wine, and for the oil, and for the 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and their soul shall be as a watered garden, (Jer. 31:11–12)

 

여기 ‘곡식’(wheat), ‘기름’(oil)은 여호와의 거룩(the holy of Jehovah), 곧 여호와께 속한 거룩한 것에 대한, 그리고 ‘새 포도주’(new wine)와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즉 ‘가축’(cattle)은 거기서 나오는 선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시 where the holy of Jehovah is described by “wheat” and “oil,” and the goods derived from it by “new wine” and the “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or of “cattle.” Again: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6:3) The shepherds and the flocks of their cattle shall come unto the daughter of Zion; they shall pitch their tents toward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 (Jer. 6:3)

 

‘시온의 딸’(daughter of Zion)은 천적 교회(the celestial church)를 가리킵니다. ‘장막’(tents)과 ‘양 떼’(flocks of cattle)가 그 교회에 속한 걸로 서술되는 교회 말이지요. The “daughter of Zion” denotes the celestial church, of which “tents” and “flocks of cattle” are predicated.

 

 

해설

 

스베덴보리는 ‘야발은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사랑의 거룩한 것(천적인 것)에서 흘러나오는 선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앞선 AC.414에서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가축’은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산출되는 선의 열매를 표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표현의 변화입니다. 본문은 ‘목자’와 ‘양 떼’ 대신 ‘조상’과 ‘가축’을 사용합니다. 이는 보호와 돌봄의 행위 자체보다, 기원과 발생에 초점을 둔 표현으로, 선이 사랑에서 태어나고 길러진다는 상응의 질서를 분명히 합니다.

 

또한 ‘가축’이라는 말이 ‘장막’ 바로 뒤에 놓인 문맥적 배치 역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연속성을 근거로, 여기서 말하는 가축이 일반적인 소유나 재산이 아니라 사랑의 거룩함에 거하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선임을 밝힙니다. 다시 말해, 장막(사랑의 임재)에 거하는 삶이 먼저 있고, 그 결과로 가축(선)이 자연스럽게 번성합니다. 이는 선이 규칙이나 강요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상태가 온전할 때 자라난다는 천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러한 해석은 예언서 전반의 용례로 뒷받침됩니다. 예레미야 23장과 에스겔 34장에서 ‘우리(fold)와 ‘(pasture)은 모두 사랑의 선이 안전하게 머무르고 자라나는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에스겔은 ‘살진 꼴’과 ‘좋은 우리’를 말하는데, 여기서 ‘기름짐’은 선의 풍성함이 사랑에서 나온다는 상응을 분명히 합니다. 선은 메마른 명령에서 자라지 않고, 사랑이 공급하는 생명력에서 자랍니다.

 

이사야 30장에서도 같은 질서가 나타납니다. ‘종자에 내리는 비’와 ‘풍성하고 기름진 곡식’은 천적인 것을, ‘광활한 목장에서 먹이는 가축’은 그 천적인 것에서 파생된 선을 가리킵니다. 곡식과 기름이 먼저 언급되고, 가축의 먹임이 뒤따르는 구조는, ‘사랑이 먼저, 선은 거기서 파생’이라는 상응의 순서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이는 야발이 ‘가축의 조상’으로 불린 이유를 성경 전체의 문법 안에서 설명해 줍니다.

 

예레미야 31장에서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이 여호와의 거룩함을,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는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선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물 댄 동산’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선이 고립된 도덕 행위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생명 상태임을 강조합니다. 선이 이렇게 유지될 때, 영혼은 마르지 않고 자랍니다.

 

예레미야 6장 또한 ‘시온의 딸’, 곧 천적 교회이지요, 그 주위에 장막을 치고 가축을 먹이는 장면을 통해, 장막(사랑의 임재)과 가축(선)의 결합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장막이 없는 가축은 흩어지고, 가축 없는 장막은 비어 있습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으며, 사랑이 선을 낳고, 선이 사랑을 증거하는 관계로 함께 서야 합니다.

 

이 모든 증거를 종합하여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가축의 조상, 곧 아버지’로 불린 것은 그가 목축 문화의 시조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의 거룩함에서 나온 선의 질서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상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여기서 ‘조상’은 통치자가 아니라 기원이며, ‘가축’은 소유물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AC.415는 새 교회의 회복이 교리나 제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임재(장막)에서 출발하여 선의 풍성함(가축)으로 확장되는 질서임을, 성경 전체의 상응과 표상에 근거해 분명히 드러냅니다.

 

 

 

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하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 ‘장막에 거주하는 것’(dwell in tents)은 사랑의 거룩함과 상응합니다. 말씀에서 ‘장막’(tents)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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