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에 나오는 ‘기억-지식’이라는 게 뭔가요?

 

 

1. 기억-지식이란 무엇인가 (scientia / memory-knowledge)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억-지식’은 한마디로 말해, 기억 속에 저장된 모든 앎의 재료들, 곧 사실, 정보, 교리 문장, 경험, 개념, 언어, 기술 등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모두 기억-지식에 속합니다.

 

* 성경 구절을 암기하고 있는 것

* 교리 문장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

* 이건 옳고, 저건 틀리다라고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

* 철학, 신학, 과학, 역사, 윤리 지식

* 삶의 경험에서 얻은 판단 기준

* 설교를 많이 들어서 쌓인 신앙 용어들

 

중요한 점은, 기억-지식은 아직 ‘’, 곧 삶이 되지 않은 앎이라는 것입니다.

 

 

2. 기억-지식은 어디에 속하는가 – ‘자연적 차원’

 

스베덴보리 체계에서 기억-지식은 분명히 자연적 차원에 속합니다.

 

* 몸에 속하고

* 뇌와 기억에 저장되고

* 말로 설명할 수 있고

* 잊어버릴 수도 있고

* 옳게도, 그르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424에서 장인(artificer)이 기억-지식의 표상으로 등장합니다. 장인은 재료를 다루는 사람입니다. 기억-지식도 마찬가지로, 아직은 재료일 뿐입니다.

 

기억-지식 자체는 선도 아니고, 진리도 아닙니다. 아직은 선과 진리가 될 가능성일 뿐입니다.

 

 

3. 기억-지식 ≠ 신앙

 

스베덴보리는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신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고, 기억-지식은 기억에 저장된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를 아는 것 → 기억-지식

* 그 말이 옳다는 것을 내적으로 납득함 → 이해

* 실제로 그렇게 살려고 하는 마음 → 의지

* 그 결과 삶이 바뀌는 것 → 신앙의 시작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주 이런 구조를 사용합니다.

 

기억-지식 → 이해 → 신앙 → 삶

 

이 순서가 뒤집히면, 즉 기억-지식이 이해와 삶을 지배하면 → 가인의 길이 됩니다.

 

 

4. 왜 기억-지식이 위험해질 수 있는가

 

기억-지식은 중립적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향으로 갑니다.

 

① 위로 열리면 (정상 질서)

 

* 기억-지식 → 이해의 도구

* 신앙과 체어리티에 봉사

* 두발가인처럼 ‘스승(instructor)이 됨

 

② 아래로만 닫히면 (타락)

 

* 기억-지식 → 자기 확신의 무기

* 거짓을 꾸미는 재료

* 우상을 만드는 장인의 도구 (AC.424)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주인을 잘못 만나면 우상을 만들고, 주님께 복종하면 성전을 짓는다

 

 

5. 기억 지식은 왜 꼭 필요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지식은 절대 제거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기억-지식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 설교, 교리, 성경 언어는 모두 기억-지식의 형태로 먼저 들어옵니다. 기억-지식은 영적 씨앗이 심길 토양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신앙의 출발점이지만, 목적지는 아니다

 

 

6. 정리

 

기억-지식이란 아직 삶이 되지 않은 앎, 주인을 기다리는 재료, 신앙을 섬길 수도 있고, 신앙을 죽일 수도 있는 자연적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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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4

 

말씀에 나오는 ‘기능공, 공장(工匠), 장색(匠色), 장인(匠人), 숙련공’(artificer)은 지혜와 지성, 그리고 아는 게 많은 박식한 사람(a wise, intelligent, and well-informed [sciens] man)과 상응하며, 여기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natural good and truth)과 상응합니다. 계시록에서처럼 말입니다. By an “artificer” in the Word is signified a wise, intelligent, and well-informed [sciens] man, and here by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re signified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natural good and truth. As in John:

 

21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18:21, 22) With violence shall that great city Babylon be thrown down, and shall be found no more at all. And the voice of harpers, and musicians, and of pipers, and trumpeters, shall be heard no more at all in her; and no artificer, of whatsoever craft, shall be found any more in her. (Rev. 18:21–22)

 

여기 ‘거문고 타는 자’(Harpers)는 위에서처럼 진리와, ‘나팔 부는 자’(trumpeters)는 신앙의 선과, 그리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artificer of any craft)는, 그러니까 진리와 선에 관한 기억-지식과 각각 상응하는데요,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Harpers” here as above signify truths; “trumpeters,” the goods of faith; an “artificer of any craft,” one who knows, or the memory-knowledge of truth and good. In Isaiah:

 

19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40:19, 20) The artificer melteth a graven image, and the smelter spreadeth it over with gold, and casteth silver chains; he seeketh unto him a wise artificer, to prepare a graven image that shall not be moved, (Isa. 40:19–20)

 

자신들을 위해 판타지로부터 거짓된 것, 곧 ‘우상’(graven image)을 위조하고, 그걸 가르쳐 진리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자들에 관해 말하고 있지요. 예레미야에 보면, speaking of those who from fantasy forge for themselves what is false—a “graven image”—and teach it so that it appears true. In Jeremiah:

 

1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8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 9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 (10:1, 8-9) At the same time as they are infatuated they grow foolish, the doctrine of vanities, it is but a stock. Silver beaten out is brought from Tarshish, and gold from Uphaz, the work of the artificer, and of the hands of the smelter; blue and raiment; they are all the work of the wise, (Jer. 10:1, 8–9)

 

이 말씀이 상응하는 바는, 거짓을 가르치며, 말씀에서 적당한 구절들을 골라 수집하는 자인데요, 이 사람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저 자신의 어떤 떠오르는 걸 그럴듯하게 위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일컫기를, ‘우상의 가르침’(doctrine of vanities), 그리고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work of the wise)이라 하는 것이지요. 고대에 등장하는 기술공(the artificer)이 바로 이런 자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우상, 즉 거짓을 만드는 자들로서, 그 만든 우상의 겉을, 금으로는 선을 짐짓 닮게 하고, 은으로는 그 외관이 진리처럼 보이게 하며, 그리고 청색, 자색 옷으로는, 누가 보아도 그런 자연적인 것들을 확실히 나타내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signifying one who teaches falsities, and collects from the Word things with which to forge his invention, wherefore it is called a “doctrine of vanities,” and the “work of the wise.” Such persons were represented in ancient times by artificers who forge idols, that is, falsities, which they adorn with gold, that is, with a semblance of good; and with silver, or an appearance of truth; and with blue and with raiment, or such natural things as are in apparent agreement.

 

해설

 

AC.424에서 스베덴보리는 ‘장인(匠人, artificer)이라는 표현이 성경에서 단순한 기술자나 수공업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말씀에서 ‘장인’은 지혜롭고, 이해력이 있으며, 지식을 갖춘 사람, 곧 어떤 영역의 지식(sciens)을 다루는 사람을 표상합니다. 특히 본문에서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라는 말은, 자연적 선(구리)과 자연적 진리(쇠)에 관한 지식을 알고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즉 장인은 외적 재료를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적 차원의 선과 진리를 이해하고 형성하는 지성적 주체를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바벨론의 멸망을 묘사할 때, 음악가들과 함께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라고 말하는 대목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앞서 음악가들, 곧 ‘거문고 타는 자, 풍류하는 자, 퉁소 부는 자, 나팔 부는 자들’이 사라진다는 말은 진리와 선의 영적 표현이 끊어진 상태를 뜻하고, 그 뒤에 ‘세공업자(artificer), 곧 장인이 사라진다는 말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장인은 기억 지식의 차원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고 다루는 사람을 표상하며, 그 부재는 교회의 지적 토대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알립니다.

 

이사야 40장에서는 장인이 우상을 만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장인은 지혜로운 장인으로 묘사되지만, 그 지혜는 환상과 상상(fantasy)에 기초한 지혜입니다. 그는 거짓된 것을 만들고(우상), 그것을 금과 은으로 입혀 선과 진리의 외양을 씌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자기 생각에서 나온 거짓을 가르치되, 말씀에서 일부 표현과 개념을 끌어와 그럴듯하게 꾸미는 행위로 해석합니다. 즉 장인은 언제나 긍정적 의미만 갖지 않으며,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예레미야 10장에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됩니다. ‘우상의 가르침(doctrine of vanities)이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work of the wise)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 교훈이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말씀의 요소들(은, 금, 청색, 옷감 등)을 선별적으로 취해 조합한 지적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은은 진리의 외양, 금은 선의 외양, 청색과 의복은 자연적 질서와 합리성의 외관을 뜻합니다. 즉 이들은 완전히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처럼 보이도록 매우 정교하게 구성된 거짓을 만듭니다. 그래서 이런 거짓은 더 위험합니다. 그것은 무지에서 나온 오류가 아니라, 지식을 잘못 사용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AC.424는 매우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장인’, 곧 지식인은 교회의 회복에도 쓰일 수 있고, 교회의 타락에도 쓰일 수 있습니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내적 차원에 봉사하도록 가르치는 교사로 등장하지만, 같은 ‘장인’의 능력이 바벨론이나 우상 제작자에게서는 거짓을 정교화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차이는 능력에 있지 않고, 질서와 목적에 있습니다. 자연적 지식이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 아래에 놓일 때 그것은 교회를 세우지만,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거짓을 미화하는 수단이 됩니다.

 

따라서 AC.424에서 장인은 단순한 직업군이 아니라, 자연적 지성의 대표자입니다. 이 지성은 중립적이며, 위로부터 질서를 받으면 선을 만들고, 자기중심에 머물면 우상을 만듭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에 우상을 만들던 장인들이 바로 이런 잘못 사용된 지성의 표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선과 진리의 외양을 갖춘 거짓을 만들었고,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교리로 고정시키려 했습니다.

 

결국 AC.424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자연적 지식과 기술, 지성은 교회의 적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입니다. 두발가인처럼 내적 사랑과 신앙에 봉사하도록 가르침을 받으면, 장인은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됩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장인처럼 자기 사상과 환상을 절대화하면, 그는 거짓의 제작자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통해, 새 교회가 자연적 지성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로 교육하고 인도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AC.423, 창4:22, '두발가인이 father가 아닌, instructor인 이유'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 두발가인을 일컬어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instructor of e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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