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황폐, 황량, 완결, 끊어짐의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교회 밖 실제 역사는 평화, 번영, 행복했던 때가 인류 역사 가운데 있었나요? 인류의 역사는 항상 교회의 상태를 반영하나요?

 

교회가 영적으로는 ‘황폐(vastation), ‘황량(desolation), ‘완결(consummation, 종말), ‘끊어짐(cutting off)의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실제 인류의 외적 역사에서는 오히려 평화와 번영, 안정과 문화적 성취가 나타났던 시기가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가 단순한 역사 결정론이 아님을 시험하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런 시기는 실제로 있었고 지금도 가능하며,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교회의 내적 상태와 인류의 외적 역사를 구분’합니다. 그에게서 ‘교회’란 사회 제도나 종교 조직, 혹은 기독교 문명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과 연결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적 상태’를 뜻합니다. 반면 정치적 안정, 경제적 번영, 문화와 과학의 발전, 전쟁의 유무 같은 것은 외적 역사에 속하며, 이는 교회의 내적 상태와 직접적으로 일대일 대응 관계에 있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는 교회가 극도로 황폐된 시기에 오히려 외적 문명은 번성한 시기가 겹쳐 나타난 사례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주님 강림 직전의 로마 제국 말기를 보면, 유대교회는 메시아 신앙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 곧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완결된 황폐’에 이르렀지만, 로마 세계는 법과 행정, 도로망, 치안, 문화 면에서 고대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정과 질서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중세 말과 근대 초 유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형식주의와 권력화, 교리적 독점 속에서 체어리티를 거의 상실했지만, 르네상스와 과학혁명, 상업과 국가 체계의 발전은 오히려 가속화되었지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시기를 ‘교회는 죽어 있으나 세상은 잘 돌아가는 상태’로 인식하며,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에서 가능한 상태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주님께서 인류 전체의 외적 질서를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황폐되었다고 해서 사회 전체가 즉시 붕괴되도록 내버려 두신다면, 새로운 교회가 설 자리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와는 별도로, 법과 도덕, 시민 질서, 자연적 선(정직, 책임, 연민, 공동선)을 유지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이는 직접 섭리가 아니라 간접 섭리에 속하지만, 인류 역사가 계속 이어지도록 하는 필수 조건입니다.

 

둘째, 스베덴보리는 ‘외적 선과 내적 선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사람은 신앙이 없어도, 혹은 교회가 황폐된 시대에 살면서도, 이성, 교육, 문화, 법, 명예 의식에 의해 외적으로는 선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적 선이며, 주님과의 내적 결합에서 나오는 영적 선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그래서 외적 평화와 번영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곧 교회의 생명이나 참된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셋째, 교회는 황폐 속에서도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항상 ‘보이지 않는 핵(nucleus)’, 곧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AC.407에서 말하듯, 다수는 이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소수의 사람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체어리티의 삶, 이름 없는 신앙의 씨앗을 통해 교회를 보존하십니다. 이 보존된 핵이 있기 때문에 역사 전체가 유지되고, 언젠가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적 역사의 안정은 교회의 생존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 시대를 위한 토양’으로 기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내적 상태가 인류 역사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황폐가 장기적으로는 인류에게 ‘의미 상실과 방향 상실’을 가져온다고 봅니다. 외적 윤리와 제도는 유지될 수 있으나, 삶의 궁극적 목적과 존재 이유에 대한 공통된 인식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그래서 황폐된 시대의 특징은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풍요 속의 공허, 불안, 분열, 그리고 내적 고독입니다. 이 점에서 교회의 상태는 인류 역사의 표면이 아니라, ‘깊이와 방향’을 결정합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김은경 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참고하세요.

 

주님의 교회는 전 세계에 퍼져 있고, 따라서 전 인류적 교회이며, 자기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이웃 사랑으로 선하게 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말씀이 존재하고, 그 말씀에 의해 주님을 알고 있는 교회는, 그 외의 사람들에게 있어 사람의 심장과 폐 같은 역할을 한다. 인체의 모든 기관과 지체가 심장과 폐로부터 그 형태, 위치, 결합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생명을 공급받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308) 설명한 바 있다. That the church of the Lord is spread over all the globe, and is thus universal; and that all those are in it who have lived in the good of charity in accordance with their religion; and that the church, where the Word is and by means of it the Lord is known, is in relation to those who are out of the church like the heart and lungs in man, from which all the viscera and members of the body have their life, variously according to their forms, positions, and conjunctions, may be seen above (n. 308).

 

요약하면, 인류의 외적 역사는 교회의 내적 상태를 즉각적으로 반영하지는 않으며, 교회가 황폐된 상태에서도 평화와 번영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내적 상태는 인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축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황폐 이후의 세계는 절망의 세계가 아니라, ‘새 교회를 위해 조용히 준비되는 세계’이며,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일수록 오히려 ‘아침’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징조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목사님의 질문은 단순한 역사 해석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느 시대의 문턱에 서 있는가’를 묻는 매우 정확한 신학적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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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10

 

황폐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알면서도 알기를 원치 않거나, 보면서도 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입니다. 옛 유대인들과 오늘날 기독교인들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는, 무지의 결과, 뭘 알지도 못하고, 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고대와 현대의 이방인들처럼 말입니다. 알면서도 알기를 원치 않는, 즉 보면서도 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황폐함의 마지막 때가 이르면 이때 하나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데요, 이들이 아니고, 이들이 이방인이라 부르는 사람들한테서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홍수 전 태고교회에서 일어났고, 또 홍수 후 고대교회와, 그리고 유대교회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새 빛이 그때 가서야 빛을 발하고, 그전에는 아닌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그때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진리임을 시인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Vastation is of two kinds; first, of those who know and do not wish to know, or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like the Jews of old, and the Christians of the present day; and secondly, of those who, in consequence of their ignorance, neither know nor see anything, like both the ancient and modern gentiles. When the last time of vastation comes upon those who know and do not desire to know, that is,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then a church arises anew, not among them, but with those whom they call gentiles. This occurred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was before the flood, with the ancient church that was after that event, and also with the Jewish church. The reason why new light shines forth then and not before is, as has been said, that then they can no longer profane the things revealed,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they are true.

 

 

해설

 

스베덴보리는 ‘황폐(vastation)가 하나의 동일한 상태가 아니라, 그 원인과 성격에 따라 ‘두 종류’로 구분된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 황폐’, 곧 진리를 보고도 보려 하지 않으며, 들었으나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상태입니다. 이는 고대 유대인들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유형으로, 진리가 이미 계시되어 있고, 접근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때문에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경우 황폐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지적 거부’에서 비롯되며, 그 결과 진리와 체어리티는 점점 왜곡되고, 마침내 신앙 자체가 공허해집니다. 둘째는 ‘무지로 인한 황폐’, 즉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상태로, 고대와 현대의 이방인들에게서 나타난 유형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거부할 조건 자체가 없기에, 악의적 불신이 아니라 ‘열린 무지’의 상태에 머뭅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가 일어나는 결정적 순간이 언제인가를 이 구분을 통해 밝히는데, ‘알면서 거부하는 자들’의 황폐가 극에 달할 때, 곧 더 이상 신앙이 남아 있지 않아 진리를 모독할 위험이 사라질 때에야 비로소 ‘아침’이라는 새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새 교회는 그들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이방인’이라 부르며 멸시하던 자들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홍수 이전), 고대교회(홍수 이후), 그리고 유대교회 모두에서 동일하게 반복된 주님의 섭리입니다. 그 이유는 앞서 밝혔듯, ‘모독’의 위험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고 인정하면서도 거부하는 상태에서는, 새로 주어지는 빛과 체어리티가 즉시 속된 것과 뒤섞여 파괴됩니다. 반면, 진리를 알지 못해 거부하지도 못하는 자들은, 새롭게 계시되는 신앙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을 지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가 황폐된 자리의 ‘잔존하는 지식’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열려 있는 무지의 자리로 교회를 옮기십니다. AC.410은 이처럼 교회의 이동이 심판이나 변덕이 아니라, ‘모독을 피하고 구원을 지속하기 위한 필연적 섭리’임을 분명히 하며, 왜 새 아침이 ‘너무 이르게’ 오지 않고, 오직 황폐가 충분히 이루어진 뒤에야 밝아오는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합니다.

 

 

 

AC.409, 창4:19, '라멕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 시간이 가면서 황폐해진, ‘가인’(Cain)이라 하던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이들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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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9

 

시간이 가면서 황폐해진, ‘가인’(Cain)이라 하던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이들은 사랑을 시인했음에도 신앙을 머리 삼으며, 사랑보다 신앙을 앞세웠습니다. 이 이단에서 유래한 후대의 이단들은 점점 더 헤매며 방황하더니,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아예 신앙조차 부인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새 빛, 곧 아침이 빛을 발하며, 여기 ‘라멕의 아내들’(wives of Lamech)이라고 하는,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라는 이름을 가진 새 교회가 하나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을 라멕의 아내들이라 하는데요, 라멕은 아무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는데도 말이지요. 이는 마치 유대인들의 내적(內的, internal), 외적(外的, external) 교회와 똑같은 경우인데, 마찬가지로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었던 이들 유대인의 교회를, 말씀에서는 ‘아내들’(wives), 곧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로 표상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레아는 외적 교회, 라헬은 내적 교회를 표상합니다. 이들 교회는 겉으로는 둘로 보이지만 여전히 하나일 뿐입니다. 내적인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외적인 것, 곧 표상적인 것(表象, the representative)은 단지 무슨 우상을 숭배하는 것, 곧 죽은 것인 반면, 외적인 것과 함께하는 내적인 것은 하나의 교회, 여기 아다와 씰라가 그런 것처럼 심지어 하나 된, 같은 교회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곱과 그의 후손은 라멕처럼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교회는 그들 가운데 남아 있을 수가 없어 대신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이들 이방인은 부정(不貞, infidelity) 대신 무지(無知, ignorance) 가운데 살았지요. 교회가 황폐해졌을 때, 그 가운데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 남아 있을 경우는,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물며, 교회는 이럴 경우, 진리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로 이동하는데요, 오히려 이 사람들이 저 사람들보다 더 쉽게 신앙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 “Cain,” 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 “Adah and Zillah,” who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 “wives,” 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 [apud se] 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상징되는 이단적 신앙의 흐름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완전히 황폐(vastation)에 이르는지를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가인의 이단은 처음부터 사랑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사랑을 신앙의 근본으로 두지 않고 ‘신앙을 주된 것으로 세우며 사랑보다 앞세운’ 데서 이미 치명적인 방향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이 초기 왜곡은 이후 파생된 여러 이단들을 통해 점점 심화되었고, 마침내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 자체마저 부정되는 상태’, 곧 교회 안에 더 이상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은 황폐의 극점(極點)에 도달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앞선 글(AC.408)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비치기 시작하며,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이 새 교회가 본문에서 아다와 씰라, 곧 ‘라멕의 두 아내’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라멕 자신은 신앙이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아내들’이 있다고 표현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아내’가 개인의 도덕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내적, 외적 구조’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에 비유하는데, 레아는 외적 교회를, 라헬은 내적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 두 교회는 겉으로는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교회이며, 외적 교회가 내적 교회와 결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 있는 교회가 아니라 ‘우상 숭배적이거나 죽은 형식’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다와 씰라는 각각 새 교회의 천적, 영적 차원과 자연적 차원을 낳는 근원으로서, 함께 있을 때에만 참된 교회를 이룹니다. 그러나 라멕과 야곱의 경우처럼, 교회가 자리 잡은 민족이나 공동체가 신앙을 상실한 상태에 머무를 때, 그 교회는 그곳에 계속 머물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교회가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진다’고 설명하는데,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악의적 불신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지(ignorance)의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는 새 진리와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만, 이미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거부하고 왜곡한 상태는, 앞서 말한 모독의 위험 때문에 새로운 교회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황폐된 공동체 안에 ‘진리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 머무르지 않으며, 오히려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열린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로 옮겨집니다. AC.409는 이 원리를 통해, 교회의 역사가 특정 민족이나 제도에 고정되지 않고, 언제나 ‘주님의 섭리에 따라 이동하며 새롭게 시작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AC.408, 창4:19, '모독'(冒瀆, profanation)의 속뜻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하나의 교회가 더 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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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가 ‘모독(冒瀆, profanation)을 이토록 엄중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죄나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구조 자체를 파괴하여 회복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독이란, 사람이 ‘주님의 진리와 선을 알고 인정하며 어느 정도 믿기까지 한 뒤에, 그것을 삶에서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자기 욕망, 자기 영광, 권력, 이익을 위해 왜곡하여 사용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 일어나는 가장 심각한 결과는, 인간 안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분리되지 못한 채 강제로 결합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 사람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곧 선과 진리의 흔적이 저장되어 있고, 겉 사람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악과 거짓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독은 이 둘을 억지로 섞어 버립니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은 어느 한쪽으로도 돌아설 수 없는 상태, 즉 선을 완전히 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악으로 완전히 떨어질 수도 없는 ‘내적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영혼이 찢어진다’는 표현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사후 세계에서 그 사람이 극심한 고통과 혼란 속에 놓이게 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므로, 선을 사랑하는 부분과 악을 사랑하는 부분이 동시에 활성화되어 서로를 끊임없이 공격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 상태에 놓인 영들은 가장 깊은 불안과 자기혐오, 분노와 절망 속에 머물게 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참혹한 상태’라고까지 말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모독이 반복될 경우, 주님께서 인간 안에 보존하신 리메인스 자체가 훼손될 위험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리메인스는 거듭남의 유일한 토대이기에, 이것이 손상되면 주님께서 더 이상 그 사람을 새로운 상태로 인도하실 길이 거의 사라집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은 사람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상태로라도 머물게 하시고, 심지어는 신앙 자체를 거의 잃게 되는 황폐(vastation)를 허락하시면서까지 ‘모독만은 피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차라리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상태는, 새 빛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알고 믿으면서도 거부하고 뒤섞는 모독의 상태는 그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독은 단순히 ‘나쁜 죄’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내적 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정적 단절’이며,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듯, 주님께서 모독을 무엇보다 엄중히 금하시고, 역사 전체를 통해서까지 그것을 막으시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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