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

 

‘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의외로 자주 듣게 되는 말입니다. 병이 낫지 않거나,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무너진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 때 ‘더 믿어야 합니다’,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세요’라는 권면을 듣습니다. 이런 말에는 분명 성경적인 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을 강조하셨고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21:22). 실제로 불신앙 때문에 주님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라고 한 말씀도 있습니다(마13:58).

 

그러나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과 ‘기도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히 믿음이 부족해서다’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후자의 공식을 적용하면 성경에서 가장 믿음이 깊었던 사람들의 기도조차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주님께 간구했습니다(고후12:8). 그러나 가시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후12:9). 바울의 믿음이 부족해서였을까요?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요청한 것과 주님께서 주신 응답의 형태가 달랐던 것입니다.

 

더 결정적인 장면은 겟세마네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마26:39). 결국 그 잔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감히 주님의 믿음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장면만으로도 ‘내가 원하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음 = 믿음 부족’이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자신의 원함을 아뢰면서도 그것을 아버지의 뜻 아래 두는 가장 깊은 기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기도응답의 관계를 좀 더 섬세하게 보아야 합니다. 불신앙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구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원인을 내 믿음의 부족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섭리 전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선택이 관계된 문제에서는 인간의 자유도 고려해야 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도 주님께서 성인이 된 자녀의 자유를 제거하고 강제로 마음을 바꾸시는 것은 아닙니다.

 

눅15의 둘째 아들이 좋은 예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했지만 먼 나라에 있는 아들을 강제로 끌고 오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라고 해야 했습니다(눅15:17-18). 이것은 부모의 기도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부모의 기도를 통하여 자녀에게 수많은 길을 열어 주시고 선과 진리를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를 강제로 심어 넣지는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을 보존하시면서 사람을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는 내가 지금 원하는 결과 하나만을 향하지 않고 나의 영원한 구원과 거듭남(regeneration)을 향합니다. 우리는 눈앞의 한 장면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삶 전체를 보십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분명히 좋은 것처럼 보이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지금은 실패와 손실처럼 보이는 일이 훗날 전혀 다른 의미를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훈련’이라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인간의 자유 및 자연계의 질서 안에서 허용하시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을 놓치면 ‘믿음이 부족해서 응답받지 못했다’는 말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매우 잔인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중병에 걸린 자녀를 위해 부모가 밤낮으로 기도했다고 합시다. 교회도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아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부모에게 ‘조금만 더 믿었으면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을 텐데’라고 말한다면 자녀를 잃은 슬픔 위에 ‘내 믿음이 부족해서 아이가 죽었다’는 또 하나의 짐까지 얹는 셈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판결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암 환자가 낫지 않았다고 해서 믿음이 부족했다고 단정할 수 없고, 자녀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부모의 기도가 부족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무너진 결혼이 회복되지 않았다고 해서 어느 한 사람의 믿음이 부족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상황에 작용하는 수많은 조건과 사람들의 자유를 모두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허용하시고 그 허용된 상황 속에서 어떤 영원한 선을 이루어 가시는지도 다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위험도 숨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얼핏 강한 믿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주님의 뜻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내 뜻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는 일이 됩니다.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을 때에는 자신을 정죄하거나 다른 사람의 믿음을 정죄하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오히려 더 겸손합니다. ‘주님, 저는 이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선합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시니 제 뜻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약한 기도가 아닙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기도의 질서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 앞에서 한 고백도 이 점을 놀랍도록 잘 보여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불에서 건져 내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자신들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단3:18). 이것은 ‘내 믿음이 충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결과를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보다 훨씬 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가 믿음의 깊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표현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릅니다. 믿음은 결과를 통제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결과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응답이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요청한 일이 그대로 이루어졌을 때만 ‘응답받았다’고 말한다면 바울의 기도는 실패한 기도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분명히 응답하셨습니다. 다만 문제를 제거하지 않고 그 문제 가운데 살아갈 은혜를 주셨습니다. 응답은 때로 상황의 변화일 수도 있고, 상황을 견딜 힘일 수도 있으며, 내가 원했던 문을 여는 대신 다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 생애 동안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자신을 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내가 욕심으로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악한 목적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지, 기도만 하면서 내가 해야 할 책임을 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야고보도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약4:3). 그러나 이 말씀은 먼저 나 자신을 살피기 위한 말씀이지, 고통받는 다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판결하기 위한 무기가 아닙니다.

 

따라서 ‘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라는 말에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진리가 들어 있지만, 그것을 모든 미응답에 적용하는 순간 위험한 단순화가 됩니다. 믿음의 부족이 주님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사람의 믿음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적으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네 믿음이 부족하다’고 원인을 찾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곁에서 함께 견디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선을 찾고,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정죄하지 않도록 돕고, 결과를 주님의 지혜와 사랑에 맡길 수 있도록 곁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체어리티(charity)에 더 가깝습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믿음의 부족이 기도를 방해할 수는 있지만, 내가 구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내 믿음이 부족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은 더 짧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결과가 오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것을 단 한마디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단3:18)

 

 

 

SL.23,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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