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기도했는데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면 ‘역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계속 문제가 생기고 계획이 어그러지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고 형통하게 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가면서 ‘여호와께서 나의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라고 고백했고(창24:27), 요셉에 대해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합니다(창39:2). 그러므로 어떤 일이 순조롭게 열릴 때 그것을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감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하나의 공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 일이 잘 풀림’, 그리고 그 반대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님 = 일이 막힘’이라는 공식을 놓는 것입니다. 이 공식이 성립한다면 우리는 일이 얼마나 잘 풀리는지만 보아도 하나님의 뜻을 상당히 정확하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깊이 읽어 보면 이 공식은 곧 무너집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요셉입니다. 성경은 분명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함께하셨던 요셉의 삶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이 잘 풀리는 삶’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구덩이에 던져졌으며, 노예로 팔렸고,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스럽게 일했지만, 거짓 고발을 받아 감옥에 갔습니다. 심지어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렸습니다. 만일 요셉이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이라면 일이 잘 풀려야 한다’는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해석했다면, 여러 차례 ‘나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나 보다’라고 결론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막혀 있는 시간 속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창39:21).

 

바울의 삶은 더욱 분명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길은 언제나 순조롭게 열렸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배가 파선하고, 사람들에게 쫓겨났습니다. 행16에서는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했고, 옥문이 열렸으며, 간수와 그의 집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행16:22-34).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막힘’이 서로 반대편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던 바로 그 길에서 감옥에 갔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일이 아주 잘 풀린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려 했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삯을 내니 배에도 탈 수 있었습니다(욘1:3). 상황만 놓고 보면 놀라울 만큼 길이 잘 열렸습니다. ‘기도했더니 마침 배가 있더라. 역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배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 달아나는 배였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문이 열렸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지 않으며, ‘문이 닫혔다’는 사실 자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열린 문으로 잘못 들어갈 수도 있고, 닫힌 문 앞에서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닫힌 문 자체가 주님의 인도하심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단지 우리가 통과해야 할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의 순조로움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별하려 하면 우리는 매우 쉽게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실제로 주님께서 길을 막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행16에서 바울 일행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했지만,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고,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행16:6-7). 이후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통하여 방향이 바뀝니다. 그러므로 일이 막히는 것을 전혀 무시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환경의 열림과 닫힘은 우리가 분별할 때 참고해야 할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어가면 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원하는 일을 모두 성공시키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고 거듭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이 일이 성공할 것인가’, ‘이 관계가 이루어질 것인가’, ‘사업이 잘될 것인가’,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를 보지만, 주님께서는 그 일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자연적 성공과 영적 선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사업이 크게 성공했는데 그 성공 때문에 돈과 명예에 대한 사랑이 더욱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사업이 실패했는데 그 실패를 통하여 자신의 교만을 보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될 수도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 결혼이 자동으로 주님의 뜻이라는 뜻도 아니며,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고 해서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자연계에서의 ‘잘됨’과 영적 의미에서의 ‘선’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일이 잘 풀리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기 쉽습니다. ‘내가 기도했는데 계약이 성사되었다’, ‘내가 원하던 사람이 나타났다’, ‘돈이 마련되었다’, ‘문이 열렸다.’ 물론 실제로 주님의 섭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했던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주님의 뜻이었다고 단정하면,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막으신다’고 너무 쉽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주님의 제지인지,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 때문인지, 자연계의 조건 때문인지, 나 자신의 준비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인지는 즉시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장애물에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붙이는 것도 신적 섭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이 문제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겟세마네에서 시작하여 체포, 심문, 조롱, 채찍질,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외적으로만 보면 모든 일이 ‘잘못 풀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는 배신했고,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거부했고, 빌라도는 십자가형을 허락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일이 잘 풀릴 것이다’라는 기준만 적용한다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사건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바로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형통 = 하나님의 뜻’이라는 공식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일이 잘 풀리는가’가 아니라 ‘이것이 선하고 참된가’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충돌한다면 아무리 문이 활짝 열려도 주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의 축복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 것도 아닙니다. 상황보다 먼저 선과 진리를 보아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자신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나는 왜 이것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정받고 싶은 것인지,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말하지만, 사실은 성공하고 싶은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 이미 내가 원하는 답을 정해 놓고 주님께 확인만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은 외부에서 표적을 찾는 일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살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실제 상황도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없애고, 매 순간 초자연적인 신호로 지시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정보를 살피고, 조언을 듣고, 결과를 예상하고, 책임 있게 선택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말씀의 선과 진리에 비추어 보고, 그 뒤에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잘 풀릴 때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풀렸으니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일이 막힐 때도 멈추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혔으니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다’고 즉시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형통과 장애 모두 분별의 자료는 될 수 있지만 최종 기준은 아닙니다.

 

오히려 때로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에 견뎌야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선을 선택했기 때문에 손해를 볼 수 있고,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관계가 어려워질 수도 있으며, 옳은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더 힘든 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일이 안 풀리니 내가 잘못 가고 있나’라고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선을 너무 빨리 포기하게 됩니다.

 

반대로 일이 놀라울 만큼 잘 풀릴 때야말로 더 깊이 자신을 살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성공을 나는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이 일이 나를 주님과 이웃에게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 더 집착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형통 자체가 영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맞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상황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살피고,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그 결과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모든 일이 내 뜻대로 풀리는 삶이 아니라, 일이 풀리든 막히든 점점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라는 말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필요한 길을 열어 주신다는 귀한 신뢰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공식으로 만들면 위험합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도 일이 막힐 수 있고, 주님의 뜻을 거슬러 가면서도 일이 놀라울 만큼 잘 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일이 잘 풀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것은 ‘이 일이 잘될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되며, 나는 그것을 선택함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일이 가장 잘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주님의 사랑은 가장 깊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형통’을 주님의 뜻과 동일시해서도, ‘막힘’을 주님의 부재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때로 열린 문을 통하여 우리를 이끄시고, 때로 닫힌 문 앞에서 우리를 멈추게 하시며, 때로는 아주 어렵고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길이 얼마나 편한가가 아니라, 그 길에서 내가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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