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창세기 본문 중 에서가 자기 아내들을 구하는 장면들입니다.

 

34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26:34, 35)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27:46)

 

6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7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8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9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28:6-9)

 

그리고 아래는 이에 대한 해설입니다.

 

에서의 두 결혼(헷 족속 유딧, 바스맛)과 그로 인한 이삭, 리브가 마음의 ‘근심’, 그리고 리브가가 ‘내 삶이 싫어졌다’고까지 말하는 탄식은, 문자 그대로만 보면 ‘이방(헷)과의 혼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창세기 속뜻의 흐름에서는 ‘가정 내 갈등’ 자체가 핵심이라기보다 ‘교회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합(혼인)’이 어떻게 흐트러지는가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혼인’은 단지 가족사(史)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신앙/교리)가 결합하여 생명이 생겨나는 상태’를 대표적으로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딸(아내)을 맞이했는가’는 ‘어떤 종류의 정서, 욕구, 교리, 삶의 방식과 결합했는가’를 드러냅니다.

 

에서(자연적 선, 혹은 자연인의 강건한 에너지에 가까운 것)는 본래 ‘야곱(진리의 차원, 교리, 질서, 분별)’과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즉 ‘자연의 힘(에서)’은 ‘진리의 인도(야곱)’를 받아 ‘선의 도구’가 될 때 복된 자리에 놓입니다. 그런데 창26–28의 이 결혼 장면들은, ‘자연적 힘이 진리의 인도를 싫어하거나(혹은 무시하거나)’, 그 대신 ‘바깥의 것(외적 매력, 세상적 기준, 감각적, 자기중심적 기쁨)’과 결합해 버릴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입니다. 속뜻으로 말하면, ‘속 사람(이삭의 선, 리브가의 진리)’이 ‘겉 사람(에서의 삶)’의 잘못된 결합과 선택으로 인해 깊은 불일치와 불쾌, 곧 ‘양심의 고통’과 같은 상태를 겪는 것입니다.

 

특히 ‘헷 족속’은 단순히 ‘민족이 이방이다’라는 표지가 아니라,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주님과의 결합에 어긋나는 어떤 요소’—다시 말해 ‘내적 예배(주님 사랑)와 연결되지 않은 외적 예배’, 혹은 ‘진리의 빛이 아닌 감각과 습관이 주도하는 삶의 방식’ 같은 것을 대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은, ‘자연적 삶이 자기에게 편하고 좋아 보이는 방식(외형상 그럴듯한 것)과 결합하는데, 그것이 주님께로 향한 내적 결합을 깨뜨리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겉으로는 결혼이요 가정의 확장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생명(선과 진리의 혼인)이 아닌 다른 결합’이 됩니다. 그러니 리브가가 ‘내 삶이 싫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된 감정 표출이 아니라, ‘진리(리브가)의 입장에서 보아, 선과 진리의 계승이 끊어질 수 있다는 절박함’을 드러내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이라는 대목은, ‘진리의 계열(야곱)이 외적, 감각적 결합을 택하면, 교회(한 사람 안의 교회)의 미래가 사라진다’는 두려움입니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는 ‘리브가가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아내를 맞게 하려는 것’이 단지 ‘민족 순수성’이나 ‘좋은 혼처 찾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진리가 자기에게 합당한 정서, 선의 바탕을 얻어와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밧단아람(아람, 라반의 집)은 흔히 ‘외적 지식들, 기억-지식들, 교리적 재료들’이 모여 있는 영역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즉 야곱이 그곳으로 가서 아내를 맞는다는 것은, ‘진리(야곱)가 주님께서 쓰실 수 있는 선의 바탕(애정, 삶의 습관, 실천의 토양)을 얻어와 결합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나안 사람의 딸’과 ‘헷 사람의 딸’은 ‘겉은 종교, 도덕, 문화로 포장되었으나 내적이 주님께로 열려 있지 않은 결합’을 대표할 수 있고, 반대로 ‘밧단아람에서의 결합’은 ‘진리가 주님의 섭리 아래서 순서를 갖추어 선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상징이 됩니다.

 

28:6-9에서 에서가 보이는 반응은 아주 인간적으로도 설득력 있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아버지가 기뻐하지 못하네. 그럼 다른 방식으로라도 맞춰볼까?’ 그래서 에서는 ‘가나안 딸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 못함’을 보고, 이번에는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겉으로는 ‘수정’이고 ‘효도’ 같은 동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더 섬세한 진단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에서가 깨달은 것’은 ‘주님의 뜻(내적 이유)’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분(외적 신호)’에 머무를 위험이 큽니다. 즉 ‘내적 회개’가 아니라 ‘외적 처방’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가나안이 안 된다면 이스마엘 쪽은 어떨까?’ 하는 선택은, ‘내적 진리의 인도’가 아니라 ‘대안 탐색’으로 움직이는 자연인의 전형적인 움직임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마엘 계열은 성경 전체 상징 흐름에서 종종 ‘영적인 것과 분리된 합리성/지식, 혹은 외적 신앙과 내적 사랑의 불일치’ 같은 것을 대표하는 방향으로 읽힙니다(물론 문자적으로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그 자체로 단순 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본처들 외에’ 또 더한다는 표현까지 보면, 이것은 ‘정리와 순서의 회복’이 아니라 ‘혼합의 확대’에 가깝습니다. 속뜻에서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둔다’는 표상은, ‘한 삶이 여러 종류의 애정/교리를 뒤섞어 품는 상태’, 곧 ‘일관된 중심이 없는 결합’을 드러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시도는 ‘근본 문제의 치유’가 아니라 ‘겉모양의 조정’에 머물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그 기쁨이 ‘주님 안에서의 질서’가 아니라 ‘관계의 표면’에서만 판단되면, 결과적으로 ‘내적 사람의 근심’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이 대목들을 설교자의 관점으로 풀어내면, 성도들에게는 꽤 현실적인 거울이 됩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며 감각적 선택을 밀어붙이는 것도 문제이지만, ‘눈치 보고 반응 보고, 다른 처방을 덧대는 방식’도 동일하게 문제의 뿌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주님이 다루시는 것은 ‘내가 누구를 기쁘게 했는가’가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과 결합했는가’입니다. 즉 ‘내 삶(자연적 욕구, 일상 습관, 즐거움, 자존심, 효율, 성공욕)’이 ‘주님의 진리’와 결합해 주님께로 향하는가, 아니면 ‘겉으로 그럴듯한 외적 기준’과 결합하여 내적 생명을 갉아먹는가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삭, 리브가의 ‘근심’은 단지 부모 마음이 상한 정도가 아니라, ‘내적 교회가 외적 삶의 결혼 선택 때문에 숨이 막히는 상태’를 그립니다.

 

정리하면, (1) 에서의 헷 족속 결혼은 ‘자연적 힘이 외적, 감각적 삶의 방식과 결합하여 내적 선, 진리와 어긋나는 상태’를 보여주고, 그 결과가 (2)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곧 ‘내적 양심의 고통,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불쾌’로 나타납니다. (3) 리브가의 탄식과 야곱의 파송은 ‘진리가 합당한 선의 바탕과 결합하도록 주님이 순서를 세우시는 섭리’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4)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을 추가로 맞이하는 장면은 ‘내적 변화가 아닌 외적 보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연인의 움직임’과 ‘혼합의 확대’라는 위험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단락들은 ‘가정사’라기보다 ‘한 사람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어떤 길로 가는가’—‘주님 중심의 결합인가, 외형 중심의 결합인가’를 깊이 묻는 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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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첫 주일입니다. 보통은 신년 주일이라 하여 설교도 그에 맞게 준비하지만, 저희는 당분간 아주 특별한 절기 외에는 오직 이 AC에만 전념하기로 한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5장입니다. 오늘부터 6주에 걸쳐 창세기 5장을 살피게 되며,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 1절로 3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1-3)

 

위 본문을 아래

5 아담 계보의 속뜻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겉으로 보면 무슨 가계 족보의 서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 전체에서 인간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아담의 계보’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이는 한 개인의 혈통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최초의 교회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다음 상태로 넘어갔는지를 말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인간의 기원이 아니라, ‘사람됨의 기원’, 곧 교회의 기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혀 새로울 수 있는 이 관점을 아래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본문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떤 한 사람의 족보를 떠올리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그 기대를 깨뜨립니다.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을 뜻하는 말이며, 성경은 이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복수로 취급합니다. 이는 분명히 어떤 한 개인,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 것이지요.

 

성경에서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 상태를 뜻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 다시 말해 교회가 존재할 때, 그 상태를 성경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곧 ‘사람’이었고, 그 교회에 속한 이들은 개인이기 이전에 교회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의 사고, 사랑, 퍼셉션(perception), 삶 전체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아담의 계보’로 시작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계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상태의 계승’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 ‘그 이름으로 불리던 교회가 어떤 상태로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가’를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며, 나 자신을 한 개인으로 보기보다, 지금 나는 어떤 교회 상태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모양은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뜻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외적으로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살도록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참인지를 배움과 학습을 통해서 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인식, 곧 지각(perception,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라 부릅니다. 아래는 관련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483에서 창세기 5장에 나열된 이름들, 곧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라멕’(Lamech), ‘노아’(Noah)라는 이름들을 다시 한번 분명히 정리합니다. 셋에서 노아에 이르는 모든 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들 가운데 첫째이자 중심이 되는 교회를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는 앞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가장 온전하게 반영했던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이후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은 이 ‘사람’의 상태에서 파생된 변형들이었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 특징은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이란, 지식이나 판단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내적 지각’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를 배워서 알지 않았고, 명령을 통해 분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곧바로 퍼셉션, 곧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 교회들 사이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나 제도의 차이가 아니라,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이 퍼셉션의 삶은 율법 이전의 삶이었고, 교리 이전의 삶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로 계산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직관적으로 알았던 삶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규범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사랑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인간이 그와 같은 질서 안에 놓였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모양은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 퍼셉션의 삶은 점차 약해졌고, 결국 다른 방식의 교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먼저 이 가장 완전한 상태를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상태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성경은 여전히 그 방향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셋째, ‘셋을 낳았다는 것은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음을 뜻합니다

 

본문 3절에서 갑자기 시간이 흐르고,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Seth)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한 사람이 나이 들어 아들을 낳은 것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새로운 교회 상태의 출현’을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완전한 퍼셉션의 상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주님께서는 그 리메인스(remains)를 보존하시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으로 대표, 표상됩니다. 이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동일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이 여전히 중요했으나, 더 이상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했고, 신앙이 점점 더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순수한 상태가 지나가도, 주님은 언제나 그다음 상태를 준비하십니다. 셋은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 ‘섭리의 응답’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교회는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 역시 셋의 교회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살지 못하지만, 사랑과 신앙의 결합 안에서 여전히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사랑이 신앙과 분리되지 않을 때, 교회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무너져도 끝나지 않고, 언제나 다음 상태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계보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삶은 다음 상태를 낳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이 말씀 앞에서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속 사람의 상태’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모두 이 속 사람의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무슨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무엇보다도 자기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매진해야 합니다. 대신 ‘나는 교회 몇 년 다녔어’, ‘나는 예수님 영접 기도한 지 벌써 30년이나 된 사람이야’, ‘나는 교회에서 목사로, 장로로, 권사, 집사로 평생 섬겼어’ 등등 이런 다분히 겉 사람에 치우친 공로에 의지하시다가는 나중에 큰일 납니다.

 

동일한 원리로 우리는 성경도 이제는 겉이 아닌 속으로, 아니 겉도 보고 속도 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삼천포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겉도 중요하지만, 속으로 읽는 훈련, 곧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읽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사랑의 주님,

 

오늘 신년을 맞아 창세기 5장 첫 본문으로 주님 음성에 귀 기울였습니다. 다소 생소하고 낯선 내용들이 혹시 있었을지라도 반발심 대신 주님을 사랑하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저마다 자기 내면을 들을 귀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자 힘써 노력하는 심령들에게는 주님, 아낌없이 놀라운 하늘의 계시를 부어주시옵소서. 그래서 놀라운 일, 곧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의 기적들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렇지 못한 심령들에게도 주님, 저들을 어루만지사 부드러운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그래서 다들 올 한 해 능히 주님의 계시를 받기에 합당한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다음 본문은 창5:4-20(AC.486-515)입니다.

 

 

 

설교

2026-01-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2, 25. 창5.1, 2026-01-04(D1)-주일예배(창5,1-3, AC.469-485, 성찬), ‘창5 아담 계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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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pdf
0.14MB

 

 

 

 

주일예배(2026/01/11, 창5:4-20),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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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28, 창4:25-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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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5, 26)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301, ‘지금까지 지내온 것’과 찬554, ‘종소리 크게 울려라’입니다.

 

 

오늘은 올해 2025년 마지막 주일예배입니다. 방금 찬송가 301장 가사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처럼 찬양하게 되는 아침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4장 마지막 단락으로 창세기 4장 관련 모두 다섯 번의 설교를 마치게 됩니다.

 

 

여러분, 살면서 사람이 가장 절망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어떤 의욕 충만했던 시도가 처음 의도와는 달리 결국 크게 실패했을 때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를 보면, 같은 말인데요, ‘앞이 캄캄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히지?’ 했던 때인 것 같습니다. 지난 19809월, 고3 예비고사를 한 달 남겨두고 모친께서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을 때가 그랬던 것 같고, 주님 일에 헌신하고자 멀쩡히 다니던 대기업을 나와 여러 해 동분서주하던 대형 교회에서 결국 권고사직을 당하던 때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고요한 심령으로 지난날들을 돌아보게 되고, 그 결과 지금 생각하면 무척 아쉬웠던 순간들, 그러니까 ‘아,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그보다는 이렇게 저렇게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장면들이지요, 곧 사소한 말 한마디, 소소한 대인관계, 크고 작은 선택들 가운데 참 지혜롭지 못했던 순간들이 수두룩함을, 그러니까 위 두 경우 말고도 지난날의 많은 막힘과 왜곡들 가운데 사실은 내가 자초한 측면들이 많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전체적으로 보면, 주님은 그런 너무나 서투르게 살아온 저라는 사람의 일생을, 그러나 또한 기가 막히게 보살펴주셔서 오늘 이렇게 생의 마지막을 주님께 붙들려 오직 주님 일에 쓰임 받게 하심을 봅니다. 천방지축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지 모를 인생을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지금도 여전히 이루고 계심을 봅니다.

 

우리가 지난 4주에 걸쳐 살펴온 창세기 4장이 바로 그런 장입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났고, 그의 계보는 점점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멀어졌습니다. 문명은 발전했지만, 사랑은 사라졌고, 라멕의 노래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죽었음을 선언합니다. 다음과 같은 정신 나간 노래나 하고 말이지요.

 

23...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4:23, 24)

 

이쯤 되면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끝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야...’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오랜 세월 가인 계보를 돌보셨음에도 말이지요. 우리라면 그냥 다 포기하고 다시 새로 리셋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전혀 다른 문장을 시작합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4:25)

 

이 문장은 조용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님은 아직 일을 끝내지 않으셨다. ‘황폐’(vastation)는 마지막 장이 아니다.’라고 말이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볼 땐 정말 엉망진창이 된 가인 계보의 끝, 곧 하나의 장구한 교회 시대의 종말의 때에,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과 자비의 여호와이신 주님이 하시는 일을 다음 세 가지로 살피고자 합니다.

 

 

먼저, ‘셋’(Seth)은 잃어버린 체어리티를 회복하는 길, ‘다른 씨’, 곧 신앙이다 (25)

 

25절에서 하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4:25)

 

많은 사람은 셋을 ‘아벨의 대체품’처럼 생각합니다. 위 말씀은 얼핏 그렇게도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와는 ‘대신에’라고는 하지만 ‘다른 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사랑이었고,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을 제거해 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셋은 그 사랑을 그대로 복제한 존재가 아닙니다. 셋은 황폐를 통과한 이후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씨, 곧 리메인스의 표상입니다.

 

큰 산불이 지나간 자리를 가 본 적이 있으신지요?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봄이 되면, 분명 아무도 뭘 뿌리거나 심지 않았는데도 거기서 풀들이, 그리고 새싹들이 조용히 올라옵니다. 그 풀들은, 그 싹들은 불에 타지 않고 땅속에 남아 있던 씨앗에서 나옵니다. 자주 뉴스에 나오는 강원도 산불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다 끝났다’고 할 때, 땅은 이미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셋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가인의 계보가 겉으로 역사를 이끌고 갈 때, 셋의 계보는 눈에 띄지 않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계보가 아닌, 드러나지 않게 숨겨오신, 그러나 잘 보존된 계보를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성공, 능력, 영향력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안에 조용히 지켜 오신 ‘다른 씨’, 곧 아직 꺼지지 않은 신앙의 흔적이 다음 시작의 출발점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씨가 잘 보관되어 오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셋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둘째, 에노스(Enosh)는 셋을 통해 회복하게 된 체어리티를 모든 것, 곧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는 새 교회이다 (26)

 

26절은 셋의 아들 에노스를 소개합니다. ‘에노스’는 셋이라는 신앙을 통해 회복된 체어리티를 그 중심에 두는 교회를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전환입니다.

 

태고교회 초기에는 인간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즉각적으로 보는 지각, 곧 퍼셉션(perception)의 신앙을 살았습니다. 그때는 사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될 수도 없는 개념이었지요. 그러나 그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퍼셉션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를 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퍼셉션은 천국과, 그리고 천국을 통해 주님과 바로 연결되는 능력인데 이제 그 연결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노스가 등장합니다. 이는 인간이 처음으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약하다. 우리는 스스로 설 수 없다.

 

젊을 때는 신앙도 자신감으로 합니다. ‘기도하면 돼. 마음만 굳게 먹으면 되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조금 살아보면 알게 됩니다. 어떤 문제는 기도해도 즉시 풀리지 않고, 어떤 상처는 의지로는 감당되지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사람은 명령하는 기도가 아닌, 간청하는 기도, 의탁하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에노스의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인의 계보는 끝까지 자기 확신의 길을 갔습니다. 라멕은 살인을 노래하면서도 자신을 정당화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셋의 계보는 다릅니다. 이 계보는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인정이 바로 다음 단계로 이어집니다.

 

에노스는 비록 천적 인간처럼 체어리티를 타고 나는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서 셋이라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배워가지고 살아내야 하는 영적 인간이지만, 자기를 체어리티로부터 분리했던 가인들과는 달리 체어리티를 자기의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간입니다.

 

 

셋째, 그 결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 참된 예배가 재개, 회복되었다 (26)

 

26절 마지막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26)

 

이 말은 ‘그때부터 기도가 시작되었다’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방식이 바뀌었다는 선언입니다. 이전에는 인간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보았다면, 이제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부릅니다. 확신해서가 아니라, 의지하기 때문에 부릅니다.

 

여기서 하나의 대비가 분명해집니다. 가인은 성을 쌓고 자기 이름을 남겼지만, 셋의 계보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대비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여전히 성을 쌓습니다. 경력, 성과, 명성, 업적, 심지어 신앙의 업적까지 쌓아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 반대입니다. 기도는 내 이름을 내려놓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체어리티가 회복되면, 그리고 회복된 체어리티를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면,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예배,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요,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라멕은 그 신앙마저 부정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교회라고 부를 만한 내적 실체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외적 형식이나 기억 지식은 남아 있을지라도, 주님과의 내적 결합은 끊어진 상태이지요.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켜 스베덴보리는 ‘이전 교회가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전 교회가 이렇게 소멸된 후, 주님은 셋과 에노스로 표상된 새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이 교회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고,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이 교회의 예배는 다시 여호와, 곧 사랑과 자비의 주를 향한 예배가 됩니다. 이때 성경은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합니다. 이는 새 교회의 예배가 공식적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성경 전반에서 반복됩니다. 어떤 상태가 끝나고, 전혀 다른 질서의 상태가 시작될 때, 성경은 종종 ‘그때 비로소’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연대기의 표시가 아니라, 영적 시대의 구분선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형식은 남아 있으나 체어리티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예배가 계속되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으로는 예배가 중단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회복될 때, 성경적 의미에서의 예배는 다시 ‘시작’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창4 마지막 시간, 비록 가인 계보의 이야기였지만, 그래서 내내 우울하고 어두웠지만, 그러나 주님은 가장 어두웠던 라멕의 때에 오히려 아다와 씰라를 일으켜 주님의 일, 즉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전에 잃어버렸던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회복, 새 교회의 중심되게 하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주님의 일하심을 오늘 우리도 잘 관찰하였사오니, 오, 주님! 우리 개개인에게도 올해에 이어 내년 2026년에도 동일하게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을 찬양, 주님게 감사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2025-12-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1, 24. 창4.5, 2025-12-28(D1)-주일예배(창4,25-26, AC.434-442),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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