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부터 저와 전화통화하시거나 저를 만나러 오시기 전, 사전에 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시는 것이 여러 모로 유익할 것 같아 이런 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일종의 러프한 자기소개입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으로 출발, 장로교 통합에서 성장하다가 고등학교 때 침례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한 후에는 한동안 기업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직원으로 있었고, 그리고 다소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한 후, 어느 교회 부사역자로 있다가 지난 2013년 개척, 목사 안수를 받은 침례교회 목사입니다. 저는 1961년생입니다.
오랫동안 침례교 신학에 오리엔티드 되어 있던 저는 그러나 무슨 신학 지식 수준에만 머무르는 게 아닌, 실제 목회현장에서 어떤 영적 체험들을 좀 하게 되면서, '정원 목사'라는 분의 저서들을 통해 영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개척 초기 여러 신학적 비주류(?)들을 잠깐잠깐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그럴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떤 것을 좀 살피다 보면 어딘가 저하고는 안 맞아 거기에서 물러나 또 다른 것을 살피고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그만 결과적으로 잠깐잠깐 살펴본 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고 무슨 이단, 삼단을 기웃거린 것은 아닙니다 ^^ 단지, 조금만 시야를 넓혀도 금새 신앙의 패러다임이 참 다양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주님의 선의 종류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그중 자신에게 맞는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제가 여러 곳을 두루 살핀 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16년 8월, 어느 기도원에서 어떤 목사님을 만나 수도원의 세계를 알게 되었는데요, 이후 시작한 수도학교에서 저는 수도학교 3년간 많은 수도사, 성인들 및 수도 영성 관련 책을 접할 수 있었고, 또 현재 수도사의 삶을 사시는 분들을 만나 교제할 수 있었으며, 이 일로 저는 현 개신교 일반 목회 스타일로부터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분들 한 분 한 분이 다 별과 같이 빛나는 분들이시지만, 제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책과 성인들은 '성 분도 요셉 라브르', '성 프란치스코', 그리고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등이며, 그러다가 2017년 늦가을,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라는 분을 알게 되었고, 6년 차인 지금은 이분의 저작들(Writings)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를 통해 스베덴보리를 좀 살피신 후에도 마음이 동하시면, 그때 비로소 제게 연락주시면 좋겠습니다. 경험상 이런 순서가 피차 좋을 듯 싶어서입니다 ^^ 제 이메일 주소는 bygrace.byun@gmail.com 이며, 이메일로 본인의 연락처 및 간략한 자기소개를 주시면, 제가 카톡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비록 교제라 할지라도 저는 주(主, dominion)가 번역의 일이라 그저 이 글을, 저 책을 읽어 보세요 정도의 코치 밖에는 못하지 싶습니다. 제 소명의 일도 있고, 그리고 제 남은 시간이 그다지 많지도 않은 것 같아서이며, 무엇보다도 제 역량(?)이 이제 겨우 첫 단계만 열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저는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저 역시 평생을 몸담았던 기존 신학적 입장에서 물러서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인공위성 발사 시, 로켓 추진체가지면을 박차고 출발, 중력을 극복하고자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음을 말씀드립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혜요, 주님과 천국을 사모함에 따른 내면 열어주심과 그 열린 창으로 천국 지혜를 부어주심이십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하오며, 저를 찾으시는 모든 분 역시, 동일한 은혜 안에 드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젯밤 늦게 아들이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라는 제목의 유튜브를 보내와서 잠결에 한참을 들었고, 그리고 이튿날인 오늘 오전, 몇몇 글을 더 찾아보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 ‘구원’이라는 주제는 간단한 게 아니지만... 주님의 빛을 구하며, 인도하심을 따라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개신교인들, 더 나아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쉽게 풀어쓰면, ‘신앙고백에 비해 비록 좀 많이 부족해도 주님의 은혜로 천국 입국을 허락받아 그곳에 가서 많은 복락을 영원히 누리는 것’ 정도이지 싶은데요, 보통은 그렇지 않나요? ㅎㅎㅎ
구원에 대한 이런 개념, 관념은 천국 천사들이 볼 땐 뭔가 좀 뒤죽박죽되어 있는 관념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을 생각하려면 먼저 좀 살펴봐야 하는,주님, 인간,천국,영계 등에 대한 사전 지식들이 필요해서입니다.
첫째, ‘속 사람이라는 게 뭐지?’하는 것인데요, 천국은 지상처럼 무슨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며, 사람은 그곳에서 이 속 사람의 상태로 지내기 때문입니다. 지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속 사람'(internal man)은 우리가 '영육간에...' 할 때, 그 '영'으로 우선은 이해하셔도 됩니다. 다만 영 또한 다시 그 안에 겉 사람, 속 사람이 있다는 점, 그리고 실제 우리는 이 영의 속 사람으로 천국에서 지내게 된다는 점,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지식을 바탕으로 둘째, ‘사람의 사후 삶은 생전 삶의 연속’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지상 생활로 결정되는 이 속 사람의 상태는 사후 영계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말이며, 그래서 지상에서는 이렇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천국에서 저렇게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셋째, ‘천국은뭔가 부족한 상태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건데요, 천국이든 지옥이든 순도 100% 상태여야만, 즉 완전히 선하고 진실하든지, 완전히 악하고 거짓되든지 해야만 드디어 천국으로 올려지거나 지옥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 어느 정도는 선과 악이 몇 대 몇 상태이기 때문에,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기 전, 이 비율을 순도 100% 상태로 맞추는 중간 상태가 필요한데요,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라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사후 일단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이 중간 상태로 들어가며, 여기서 바로 이 순도 100%로 맞추는 작업, 곧 천국 갈 사람은 천국에서는 아무 쓸 데 없는 악과 거짓을, 지옥 갈 사람은 지옥에서는 아무 쓸 데 없는 선과 진리를 떼어내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이쯤에서 열 분 중 아홉 분은 꼭 '연옥'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이 '연옥'에 대해서는 아래 제 블로그 관련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우리의 속 사람이라는 영역은 주님조차 간섭하지 않으시는 영역’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사람이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그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에 따른 책임이며, 주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둘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늘 선악간, 천국과 지옥간 균형을 보장하시는, 그런 사랑과 은혜인 것입니다.
오래전 주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것은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으셨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당시 지옥으로 말미암아 이 균형이 거의 깨지기 일보직전이셨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친히 거듭남의 과정을 통해 마리아를 통한 인성(human)은 벗으시고, 여호와로 말미암은 새로운 신적 인성(神的 人性, Divine Human)을 입으셨으며, 이 새로운 신적 인성으로 지옥을 방문, 지옥의 광기를 수습하심으로써 다시 이 모든 피조세계의 균형을 맞추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인성을 입고 지옥을 찾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안 그러면, 즉 직접 여호와라는 신성 그 자체로 지옥을 직접 찾으시면, 지옥은 그대로 소멸되기 때문이며, 지옥의 소멸은 동시에 천국에도 영향을 미쳐 피조 세계 전체가 소멸되기 때문이었는데요, 피조세계는 선악간, 천국과 지옥간 균형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그래서 ‘주님의 은혜란 우리의 속 사람을 뭐 어떻게 뚝딱 변화시켜주시는 그런 게 아니라 우리의 생전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 평생 동행하시는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평생 우리의 선택을 곁에서 도우시는 그런 은혜입니다. 미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를 그저 불쌍하다고 눈감아주시는 그런 은혜가 아닙니다. 미리 기름을 준비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최종 선택은, 그래서 우리의 최종 모습은 우리가 정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전에 제가 삼성전자 다니던 시절엔 미국 오라클이라는 회사가 참 글로벌 초우량기업 중 하나였습니다. 그 연봉이며, 복지며... 그래서 삼성맨들조차 거기 직원들을 부러워했지요. 자, 그렇게 그곳이 좋아 원했다고 해서 아무나 덜컥 거기 누구 고위직에 의해 낙하산으로 입사를 할 수 있었다 합시다. 만일 그가 그곳의 업무역량을 갖추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상태라면 그는 과연 그곳에서 며칠을 버틸 수 있을까요? 외국기업은 특히나 더 이런 거에 칼 같아서 소위 얄짤없이 바로 쫓겨나지 싶습니다.
천국이라는 곳(상태)이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온 인류를 사랑하셔서 모두를 천국으로 인도하고 싶어하시지만, 우리 중 그 상태가 천국에 합당한 상태, 즉 천국에 머무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면 오히려 우리가 못 견뎌 뛰쳐나오게 되는, 천국은 그런 곳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천국은 화염과도 같은 사랑의 열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지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주님은 우리의 속 사람 퀄러티까지는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속 사람의 최종 모습, 최종 퀄러티, 최종 상태는 전적으로 우리 소관, 우리 책임입니다.
주님은 모든 순간,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시려고, 주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시는데요, 그러므로 우리는 ‘왜 내가 이 모양이 되도록 나를 내버려 두셨습니까?’라며 주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그 사람의 상태, 즉 자기 안에 천국이 있는, 그런 사람이라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이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
말씀하신 것도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하든 늘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주님의 법, 주님의 질서를 범하는 게 된다!’며 삼가는 사람입니다.
요셉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
6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7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창39:6-10)
라며, 그 짓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짓임을 분명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길어졌지요? 좀 빨리 결론을 내려보면은요, 이순신 장군이든 누구든 공정과 정의, 나라 사랑이라는 선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래서 그의 안에 올바름과 의로움의 선이 형성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천국에 갔을 것이다, 그는 지금 천국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는 생전에 주님이 누구이며, 속 사람을 비롯, 이 모든 게 무엇인지 전혀 몰랐겠지만, 그러나 사후, 천사들을 통해 이 모든 올바름과 의로움, 그리고 그의 안에 있는 선함이 사실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주님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으면, 그는 거기서 주님을 시인하고 영접하는데, 그래서 주님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라는 말씀이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꼭 지상에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는 것이, 태어난 나라와 종교적 환경 등의 이유로 평생 말씀을 들어보지도, 복음을 접해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전 세계 수많은 종교, 수많은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 그들 나름의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셨고, 그래서 세상 살 때, 자기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선하게 산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주님의 신성이 그 안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사후, 주님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때, 그곳에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은 그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며, 선한 사람들은 주님의 진리, 주님에 관한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 of the Lord)를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 안에 있는 선과 닮았기 때문이지요.
부언하여, 오늘 유튜브 제목인 ‘이순신 장군은 구원을 받았을까?’라는 이 모든 혼란은 사도들의 서신서들을 주님의 말씀과 동격으로 놓고, 거기서 교리들을 추출, 그걸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현 성경 66권 중, 주님의 말씀, 곧 신(神, The Divine)이신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 그래서 그 안에 주님의 생명, 곧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들어있는 말씀(the Word)은, 구약은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등29권이고, 신약은 마, 막, 눅, 요, 계 등5권입니다. (AC.10325)
말씀의 속뜻이란, 사람이 육과 영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겉 글자의 뜻과 속뜻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 말씀의 영인 속뜻은 오직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만 들어 있고, 신약 서신서들을 비롯, 구약의 룻기, 역대서, 잠언, 전도서 등에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비록 신앙 생활에 유익하고 좋은 글이지만 그러나 순수하게 외적이기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내적 존재들인 천사들의 눈에는 위에 언급한 주님의 말씀을 읽을 땐, 그 속뜻, 즉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생명의 그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향기와... 등등 그 감동에 어쩔 줄을 몰라하지만, 위 리스트에 없는 성경을 읽을 땐, 그저 까맣게만, 즉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외적인 것은 저들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만유의 대 주재이셔서 이처럼 모든 민족, 모든 인종에게 참으로 공평한 구원 시스템을 준비하셨음을 깨달으시고,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넓혀 주님의 시야로 타 종교, 타민족과 인종을 사랑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가끔 탈북민들 유튜브나 베트남, 라오스 산지 유튜브 영상들을 보며, 저희 사모에게 '여보, 만약 우리도 저기서 태어났으면 저분들처럼 저렇게 살아가고 있겠지?' 하면서 서로 웃고는 하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교회 밖에서 태어나 교회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은 자기들이 원해서 그 나라, 그 환경 가운데 태어나신 게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니 제발, 타 종교, 다른 민족과 인종, 심지어 나랑 다른 신학적 입장 가지신 분들에 대해 너무 그렇게 무슨 결사 반대, 목숨 바쳐... 등 결연한 태도로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태도는 주님 앞에서 오히려 매우 위험하시며, 그래서 절대 안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신 한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주님의 구원 시스템은 공정, 공평한 시스템이며, 구원은 시스템으로 진행되는 것이지 어떤 허가권자의 재량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점, 본인의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 생활을 감당할 수 있으면 천국에서 지내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뛰쳐나와 지옥에서 지내는 것입니다. 비록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을 흘리셨어도 말입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 속 사람을 변화시켜 거듭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속 사람의 상태란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상태, 즉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한 상태를 말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와 교회 밖에 있는 분들의 차이는, 우리에게는 밝고 환한 주님의 말씀이 있는 반면, 저들에게는 없어 저들은 흐릿하고 어두운 빛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온 인류는 한 사람으로 보이며, 그 가운데 교회는 그 한 사람의 심장과 폐의 역할을, 교회 안에 있지 않은 나머지 인류는 나머지 장기들을 비롯, 나머지 지체들을 의미합니다. 전도도 선교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목회든 전도와 선교든 그를 통해 자신의 속 사람이 더욱 잘 준비되고 있다면 참 다행이고 감사할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네, 그렇습니다 ㅎㅎ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시면, 우선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책 36장, ‘천국의 비 기독교인들’과 55장, ‘천국에 이르는 삶은 어렵지 않다’를 읽어보시기 바라며, 필요하신 분들 위해 관련 pdf를 공유하오니 도움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래는 영문이며,
54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 하리라 하시니라 (눅12:54-59)
하나님의 신성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흘러들어온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의 쪽이어야 하며,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인 것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받아들이는 능력이 사람에게 끊임없이 주어지며, 사람이 악을 제거하는 만큼 그 능력은 비록 주님의 것이지만 사람의 것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for the Divine proceeding which is “the Father in the heavens,” flows in with the evil equally as with the good, but the reception of it must be on man’s part, yet not on man’s part as from man, but as if from man, for the ability to receive is given to man continually, and it also flows in to the extent that man removes the evils that oppose, and does this also from the ability that is continually given, the ability itself appearing to be man’s, although it is of the Lord. (AE.644:23)
※ 오늘로 누가복음 12장을 마칩니다. 지난 7월 30일 주일부터 시작, 오늘까지 8주에 걸쳐 다루었는데요, 늘 이렇게 원고를 프린트하여 나누어드렸으니 수시로 다시 여러 번 읽으시고 확실히 자기 걸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겉 육을 입고 사는 사람들은 이 속뜻 설교를 결코 한번 듣고 완전히 자기 걸로 소화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렇게 속, 곧 내적(內的, internal)으로 말씀 읽기를 연습하다 보면 어느덧 우리도 천사들처럼 내적으로, 영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이 세상과 세상 모든 일, 곧 주변 일상을 비롯,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에서 한발 물러나 그 영적 의미들을 천국, 천사들 관점, 곧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며, 그렇게 되면서 우리 모두 세속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되어, 이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을 향해 우리를 정결하게 보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세상을 위해서가 아닌,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몸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서 천국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복음서에는 외식하는 자에 대한 에피소드가 자주 나옵니다. 외식(外飾)이라는 말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 영어 성경 표현은 위선(僞善)입니다. 위선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겉으로는 진실한 듯하나 속으로는 속이는 것, 겉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증오하거나 멸시하는 것이지요. 복음서에 위선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람들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왜곡, 말씀 속에 있는 내적이고 거룩한 것들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겉으로만 경건할 뿐, 속에는 악의와 교활한 속임수가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 비난하셨던 것입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몄지만 그 속은 죽은 자들의 해골과 뼈로 가득한 무덤처럼 말이지요. 교회의 교리가 잘못될 경우, 그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자가 됩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공간 안에 있으면 누구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 여기 ‘감염’(感染)이라고 했는데요, 출애굽, 즉 애굽을 나오다, 애굽에서 출발하다 하는 출애굽 모든 여정은 그 속뜻으로는, 악과 거짓에 감염된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 천국을 향해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자, 그렇다면 참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위선자가 아닐까요? 비록 참된 신앙 안에 있다 하더라도 거듭나기 전에는 위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영적 상태에 따라 누구나 조금씩은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위선을 얼마나 아느냐 하는 것이고, 거기서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하면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또한 각 사람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54절과 5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54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구름이 서쪽에서 일면 소나기가 온다고 합니다. 이는 주님 활동하신 유대 땅의 지형적 특성 때문인데요, 그러나 그 속뜻으로도, 서쪽은 해가 지는 방향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사랑이 없는 때, 즉 교회의 마지막 때를 나타내며, 또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가리키고, 소나기는 진리를, 그러므로 구름이 서쪽에서 일면 소나기가 온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절에는 남풍이 불면 심히 더울 거라는 것 역시 그 지역 지형적 특성이지만, 역시 그 속뜻으로도, 남풍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을 뜻하며, 그러므로 남풍이 불면 덥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선으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합해 보면,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자아의 욕망을 좇을 때 교회는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 신앙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서지 않으면, 석양에 해 기울듯 교회 안에는 사랑이 식어갑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타락한 교회를 정리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여시지요. 교회는 세상의 심장과 폐와 같아서 한순간도 없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소나기는 바로 그 진리이고, 남풍은 그 선을 뜻합니다.
서쪽에서 구름이 일면 소나기가 올 것을 아는 것처럼 진실한 신앙인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통해 주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자기 안의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웁니다. 마치 노아 시대에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이 세상을 덮은 거짓의 홍수와 맞서 싸우듯 그렇게 싸웁니다. 진실한 신앙인들은 그런 방법으로 시험을 딛고 한 단계 한 단계 거듭납니다. 하지만 반대로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 내면의 교회에 오신 주님, 자신들을 찾아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박해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 644번 글 20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면의 악과 거짓으로 인해 눈이 어두운 자들은 진리를 보지 못하고 주님의 임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럴 경우,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시험을 이기지 못하면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그래서 주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한탄하신 것입니다. 시대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생각할 때는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외부의 교회든 내면에 있는 교회든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는 누구나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때는 영이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영이 순수하다는 것은 진리를 위해 진리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해 마지막 때가 되면 신앙인들은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타인의 판단을 믿습니다. 자신의 순수한 영으로 진리를 바라보지 않고 타락한 교회의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바라보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말씀에서 ‘베드로’는 교회의 신앙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부터 진리를 생각하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스스로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 즉 잘못된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신앙인들이 스스로 진리를 판단하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자유이며,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은 노예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위선자가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스스로의 판단으로 진리를 믿을 수 있을까요?
58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주님께서는 그 대답으로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고, 영어 성경의 번역은 이렇습니다. ‘네가 원수와 함께 행정관에게 갈 때 길에서 근면하여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넘겨 옥에 갇히지 않도록 하라’입니다. 말씀에서 ‘감옥에 갇히는 것’은 신앙인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악과 거짓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가 있어야 악과 거짓을 물리칠 수 있는데 진리가 없으니 악과 거짓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의 삶이 아니라 죽은 자의 삶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길에서 근면하라, 즉 진리 안에서 근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안에서 근면한 것일까요? 진리가 명령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행하고 진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9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 하리라 하시니라
말씀에서 ‘갚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주님 앞에 큰 빚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깨닫고 고쳐나간다면 그것은 주님의 빚을 갚는 일이며,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한 푼도 남김없이 갚으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교회가 아무리 죄를 짓더라도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악이 선을 넘게 되면, 다시 말해서 그대로 두면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 같으면 지체 없이 오셔서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교회 안의 남은 자를 데리고 새 교회를 여십니다.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오랜 섭리이며 방법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새 교회를 세우시는 이 섭리는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신앙인들이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삶을 살 때 주님은 어느 정도는 허용하시지만, 도를 넘으면 직접 그의 내면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임재하실 때 진실한 사람들은 주님을 받아들여 주님과 함께 내면의 악과 거짓을 몰아내는 싸움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한 번 더 거듭납니다. 반대로 진리보다는 세상에 뜻을 둔 위선자들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시험에서 이길 수 없으며 결국 점점 더 깊이 악의 수렁 속으로 빠져듭니다. 주님은 위선자가 되기 쉬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첫째는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겉 사람의 자아로부터 진리를 바라보지 말고 속 사람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며, 그를 붙잡고 있는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진리 안에서 근면하라 하십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진리 안에서 근면한 것은 진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고 진리에 합당한 일은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게으름 부리지 않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지는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의 명령 앞에서 게으름을 부릴 때 어둠이 내려앉는 것처럼 악하고 거짓된 것이 삶 가운데 은밀하게 내려앉습니다. 신앙인들은 그렇게 해서 지옥에 갇히게 되는데요,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근면해야 합니다. 항상 속 사람으로부터 진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