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스베덴보리는 왜 복음서 주석은 하지 않았나요? 주님의 육성이 담긴 복음서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분들조차 평생 품고 있는 핵심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선택’이며, 그의 전체 신학 구조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공백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복음서 주석을 ‘안 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한 것’

 

복음서에 대한 직접 주석은 없지만, 복음서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참 그리스도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등에서 전면적으로 풀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방식은 ‘본문을 따라가는 주석 방식(exegesis)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 내재된 구조적, 보편적 진리를 다시 전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신적 진리의 충만한 계시’로서, ‘그 동일한 내적 의미가 구원론, 기독론, 재림론, 연합론 전체에 이미 녹아 있도록 하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굳이 복음서 본문을 한 절씩 풀지 않아도 그 내적 의미 전체가 그의 저작들 전체 속에 재구성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해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복음서 자체를 ‘신학 전체’로 펼쳐 놓은 것’입니다.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직접적 이유들

 

첫째, 복음서는 ‘말씀’(Word)의 범주가 창세기, 출애굽기, 선지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두 범주로 나누는데요, 하나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 heavenly sense, arcana, 속뜻)를 가진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오경과 선지서들, 그리고 시편 일부 및 계시록을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구절 하나하나가 상징과 표상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실제 기록을 기반으로 하나, 그 자체가 상징계는 아닌 ‘복음서의 문자’입니다. 복음서 역시 ‘말씀’이지만, 그러나 다른 종류의 말씀입니다. 그 안의 상징성은 예수님의 생애와 직접 결합되어 있으며, 그래서 창, 출 같은 방식의 상징 주석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즉, 복음서는 ‘예수님의 실제 행적’이자 ‘내적 의미의 직접적 실현’이기 때문에 ‘상징 해석’을 위해 존재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이후 존재하던 성막과 제사가 주님 오신 이후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성막과 제사는 주님을 표상하던 것들인데 정작 그 실체인 주님이 오시자 더는 그런 도우미들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창세기, 출애굽기처럼 절대적 상징 주석을 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둘째, 복음서는 예수님의 ‘육신으로의 신성화 과정’(glorification)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의 성화 과정(신성화, glorification)’이 복음서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곧바로 ‘내적 의미 자체’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험’, ‘기적들’, ‘설교’, ‘십자가’ 및 ‘부활’ 등, 이것들은 ‘상징의 외피가 아니라 내적 의미 그 자체의 역사적 구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건 주석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애는 문자, 상징을 넘어 바로 ‘신적 실체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모든 문자와 상징, 표상, 상응이 가리키는 본체, 실체이신 분이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이미 ‘보충 주석’ 형태로 곳곳에서 해설

 

주석서는 아니지만 복음서 본문을 해설한 문단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시험받으심에 대해서는 지옥 전체와의 전투로(AC, TCR 다수),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천국적 삶과 진리의 질서로, 기적은 선과 진리의 표상으로, 십자가는 마지막 시험과 완전한 연합, 부활은 인간 구원의 원형 등, 즉, 절대적으로 해설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문 주석의 형태가 아닌, 신학 체계 속의 해설’로 그의 저작들 여기저기에서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재림기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처럼 정의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는 일’과 특히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통해서’라고 말입니다. 왜 이 두 곳일까요? 왜 복음서는 아닐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미 복음서 속에서 ‘자신을 직접 계시하심’

 

복음서는 그 문자 의미 자체가 ‘신성의 직접 계시’이므로 ‘상징을 벗기기 위한 해설(exegesis)이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는 상징과 표상으로 감추어져 있어 재림 시기에야 드러낼 수 있는 구조

 

창세기의 아담, 노아, 아브라함, 출애굽기의 애굽, 홍해, 시내산 등 이 모든 것이 인간 영적 발전의 ‘내적 단계’이므로, 재림 때 완전히 드러내야 했습니다. 즉, 창세기, 출애굽기, 계시록은 재림을 위해 봉인된 책들이지만, ‘복음서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핵심’이라는, 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서 주석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스베덴보리는 복음서의 핵심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의 삶, ‘사랑, 자비, 용서, 겸손’은 천국의 질서, ‘십자가’는 인간 구원의 전체 과정, ‘부활’은 삶의 변형, 변모 등, 따라서 그는 말합니다. “사람이 복음서를 ‘해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복음서는 지성의 책이 아니라, 생명의 책이다.” 그는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는 대신, 그 복음서의 내적 의미를 ‘삶의 길(way of life)로서 제시했습니다.

 

요약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복음서는 상징적 기록이 아니라, 신적 인간의 직접 계시이기 때문에, 둘째, 내적 의미는 이미 전체 신학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셋째, 주석의 대상은 ‘봉인된 말씀’인 창, 출, 계인 반면, 복음서는 그 자체로 개방된 말씀, 넷째, 복음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 목적이기 때문에, 다섯째, 그의 사명 자체가 복음서 주석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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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대표 저작인 ‘Arcana Coelestia’(약어 AC)에 대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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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수십 권에 달하는 저작들은 전부 약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AC는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의 약어이고, HH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CL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의 약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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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보통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풀어낸 책’으로 소개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목적을 가진 저작입니다. 이 책은 성경의 문장을 하나하나 해석하는 주석서이면서 동시에, 성경이 어떤 책인지, 왜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불리는지, 그리고 그 말씀이 인간의 삶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체계적인 신학서입니다. 저자인 스베덴보리는 이 책을 통해 ‘성경은 단순한 종교 문헌이 아니라,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언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칩니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는 ‘성경에는 문자로 보이는 의미 너머에 속뜻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경을 역사 이야기, 도덕 교훈, 종교 규범의 모음으로 읽습니다. 물론 그런 읽기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성경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문자에 드러난 이야기들은 겉모습일 뿐이며, 그 안에는 인간의 내면 상태, 신앙의 성장 과정,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숨겨진 차원을 그는 ‘아르카나’, 곧 ‘비밀’이라고 부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성경의 이야기를 과거의 사건으로만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과학적 보고서가 아니라, 한 인간이 무질서한 상태에서 질서를 회복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빛과 어둠의 분리, 물과 땅의 구분, 생명의 점진적 등장 등은 모두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단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그때 거기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할 일’을 말하고 있다고 이해됩니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은 ‘상응’입니다. 상응이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연결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은 단순한 물리적 빛이 아니라 진리를, ‘’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은 인간의 마음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의 거의 모든 사물과 사건은 영적인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이 상응의 법칙을 통해 성경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구조로 읽어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익숙한 성경 이야기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단순한 최초의 남녀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태를 나타내며, 에덴동산은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사랑과 지혜가 조화를 이루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뱀은 실제 동물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상징합니다. 이런 해석은 처음에는 낯설고 심지어 거부감을 줄 수도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임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원리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이 단순한 상징 해설서와 다른 점은, 모든 해석이 결국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점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 따르면 성경의 모든 내용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주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생명의 근원이며, 성경이 살아 있는 이유도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구절이든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문자 차원에 머물러 있는 이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은 또한 인간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겉 사람은 우리가 일상에서 드러내는 생각과 행동의 차원이고, 속 사람은 그 배후에 있는 사랑과 의도의 차원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성경 이야기가 바로 이 속 사람의 변화와 회복을 다루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성경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기보다 ‘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책이 신앙을 지식이나 교리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삶과 분리된 개념으로 보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사랑과 행동으로 드러나며,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진리는 반드시 선과 결합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이론서이면서 동시에 매우 실천적인 책이기도 합니다.

 

일반 독자에게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성경을 읽는 새로운 눈을 열어 준다는 데 있습니다. 이전에는 이해되지 않던 본문이 살아 움직이며, 반복되는 이야기와 긴 족보, 복잡한 율법들조차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성경이 갑자기 ‘지루한 책’에서 ‘끝없이 깊어지는 책’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으며, 단번에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경이 원래 그런 책이라고 말합니다. 천국과 연결된 책이기에, 한 번에 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독자에게 어떤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이렇게 믿어라’라고 명령하기보다, ‘이렇게 볼 수도 있다’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주님과의 더 깊은 만남, 그리고 삶의 변화가 놓여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교리를 배우는 것이라기보다, 성경을 통해 자기 자신과 삶, 그리고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 아래 링크는 그 첫 번째 글인 AC.1번 글로 이어지는, AC를 시작하는 링크입니다. 라틴어 원본 대신 Potts 영역(1888-1902)으로 대신하였으며, 각 글 하단에 이해를 돕기 위해 원본에는 없는 해설들을 제가 달아 나가고 있으니, 읽어 보시고 도움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혹시 특정 번호의 글을 검색하실 때에는 글 목록 우측 상단 돋보기를 클릭, 왼쪽 목록에서 '태그'를 선택하신 후, 'AC 3' 형식으로 찾으시거나 '제목'에서 특정 키워드로 찾으시면 되겠습니다. 'AC 3'처럼 가운데 한 칸 띄는 이유는 이 검색기가 특수 문자 사용을 불허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처음부터 태그 입력을 저런 형태로 해놓았습니다.

 

 

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 (AC.1-5)

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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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가 영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나 작용을 의미하나요? AC.392-394를 참조해 주세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전제는 ‘가인의 표는 외적 기호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창4:15의 ‘’는 문자적으로 어떤 문신, 낙인, 물리적 표시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매우 일관되게, ‘외적으로는 보호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제한과 구별을 의미하는 영적 표식’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이 ‘’는 ‘가인이 보호받을 만해서 받은 은혜의 표시가 아니라, 가인으로 대표되는 상태가 더 이상 파괴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묶어 두는 장치’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성경 본문만 읽으면 ‘왜 하나님은 살인자를 보호하시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이 먼저 떠오르지만, AC의 관점에서는 질문의 방향 자체가 달라집니다. 문제는 ‘개인으로서의 가인이 아니라, 분리된 진리라는 상태가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92의 핵심은 ‘죽이지 못하게 하려는 표’입니다. AC.392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만나는 자마다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이 표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육체적 살인이 아니라, ‘교회의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완전히 파괴해 버리는 영적 행위’를 뜻합니다. 가인은 ‘사랑 없는 진리’, 다시 말해 ‘신앙을 말하지만 사랑을 잃은 교리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 상태가 무제한적으로 작동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진리를 빙자하여 정죄하고, 판단하고, 생명을 꺾고, 결국 교회 자체를 황폐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상태를 즉각 제거하지도 않으시고, 그렇다고 자유롭게 방치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표를 주어 작동 범위를 제한’하십니다. 즉, 가인의 표란, ‘이 상태는 존재는 하지만, 더 이상 다른 것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겠다’라는 ‘섭리적 제동 장치’입니다.

 

 

AC.393의 핵심은 ‘보존을 위한 격리’입니다. AC.393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표가 ‘교회의 남아 있는 것들을 보존하기 위한 구별’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사상 중 하나는, 주님께서는 언제나 교회 안에 ‘리메인스(remains, 남은 것, 남은 자)라는 것을 보존하신다는 점입니다. 설령 교회의 주류가 타락해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없애 버리지는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가인의 상태, 즉 사랑 없는 진리는 그 자체로는 위험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더 큰 공백과 혼돈이 생길 수 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상태를 ‘죽이지 않고, 대신 다른 상태들과 섞이지 않도록 표시를 하여 구분’하십니다. 이때 ‘’는 다음과 같은 기능을 합니다. 이 상태는 ‘완전한 교회가 아님’을 드러낸다. 그러나 ‘완전히 제거될 대상도 아님’을 표시한다. 더 건강한 선과 진리의 상태와는 ‘혼합되지 않도록’ 경계선을 긋는다. 그래서 이 표는 은혜의 훈장이 아니라, ‘접근 금지’, ‘격리 표시’에 가깝습니다.

 

 

AC.394의 핵심은 ‘주님이 직접 관리하시는 상태’입니다. AC.394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가 인간이나 교회가 임의로 붙인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직접 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사랑 없는 진리의 문제를 인간적 판단이나 감정으로 해결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혹은 오늘날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우리는 이런 유혹을 받습니다. ‘이런 신앙은 잘못되었으니 제거해야 한다.’ ‘이런 교리는 해롭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주님은 그런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주님은 제거하지 않으시고, 방임하지도 않으시며, 대신 ‘’를 주어 ‘그 영향력을 통제하시고, 다른 것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섭리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읽고 ‘왜 하나님은 악인을 보호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주님은 교회가 타락했을 때조차, 파괴가 아니라 보존을 먼저 생각하신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가인의 ‘’는 불편한 본문이 아니라, ‘주님의 섬세하고도 인내 깊은 섭리를 보여 주는 상징’입니다.

 

 

 

SC.11.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창4:15)의 속뜻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먼저 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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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가인에게 표를 주사...'(창4:15) 해설

창4:15에 나오는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가인은 아우를 죽인 형제 살인범인데 왜 여호와께서는 그런 가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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